강명관의 고금유사
<맹자> ‘등문공’ 편에 농가(農家)인 허행과 유가인 맹자의 논쟁이 나온다. 허행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사람은 자신이 먹을 것은 직접 경작해서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가도 예외일 수 없다.
허행은 이렇게 묻는다. 왜 왕은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거대한 곡식 창고와 재물 창고를 갖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백성을 해쳐서 자신을 봉양하는 것’이다. 허행은 생산 대중을 착취하는 정치와 정치인을 비판했던 것이다.
정치가 직업이었던 맹자는 허행의 주장을 인정할 수 없었다. 허행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그는 실업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맹자는 ‘사회적 분업’을 들어 허행을 비판한다. 농민이 사용하는 농기구는 대장장이가, 그릇은 도공이 만든 것이다. 농민은 자신이 생산한 곡식을 대장장이와 도공의 생산물과 교환한다. 농기구와 그릇을 만들면서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법이다. 정치도 다르지 않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회 전체를 조정하는 전문 직업인 정치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농사 짓는 일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맹자는 이 논리로 허행의 주장은 완전히 변파한 것인가? 찬찬히 따져보면 그렇지 않다. 허행의 정치 비판 이면에는 ‘왜 정치하는 인간들은 백성들이 생산한 것을 과잉으로 소유하는가?’라는 문제 제기가 있다.
이 문제를 다시 좀 더 음미해 보자. 정치는 농사 짓는 일이나 대장장이·도공의 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농사꾼과 대장장이와 도공은 거대한 창고를 채우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직능으로 타인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않고, 타인을 동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치가는 어떤가? 그들은 자신의 의지를 일방적으로 백성들에게 관철시킨다. 명령하고 지시하고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 그 이면에는 강압과 폭력이 있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거대한 곡식 창고, 재물 창고는 그것을 수단으로 하여 채워진 것이다.
이제 허행의 질문을 다시 이렇게 쓸 수 있다. “정치하는 자가 강압과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 백성으로부터 빼앗아낸 부는 정당한 것인가?” 맹자는 물론 왕도정치를 말하며 백성에 대한 착취를 절제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었다.
허행의 질문은 생산하는 사람과 생산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개재하는 지배·피지배의 근원적인 모순에 관한 것이었다. 맹자는 그 질문의 핵심을 알았을 테지만,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교묘한 언사로 질문의 핵심을 피했을 뿐이다. 그 역시 지배하는, 정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맹자를 보고 오늘날의 정치를 떠올린다. 국민에게서 거둔 천문학적 세금을 해외자원개발에 날리고도 그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한 자들에 대한 조사는 한사코 막는다. 한쪽에서는 학교 아이들에게 주는 밥값이 낭비라면서 급식을 중단한다. 그 이면에는 꼭 같이 궤변에 가까운 교묘한 언사가 있다.
묻거니와 ‘민주주의’와 ‘국민’을 들먹이는 이 나라의 정치는 강압과 폭력을 수단으로 삼아 정치하는 자들의 창고를 채웠던 맹자 시대의 정치와 얼마나 다른가?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맹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맹자>가 특별한 고전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