ふくざわゆきち | 福澤諭吉

문명론의 개략, 제 5권 제 9장 일본문명의 유래

이윤진이카루스 2015. 7. 18. 17:10

5

 

9장 일본문명의 유래

 

   앞장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의 문명은, 그 인간의 교류에 여러 주장이 병립하여 점차 서로 근접하여, 마침내 합쳐서 하나가 되어, 그로써 그 사이에 자유를 존치시킨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금은동철 등과 같은 여러 원소를 용해하여 한 덩어리로 하여,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또 동과 철도 아니고, 일종의 혼합물을 만들어 스스로 그 균형을 이루어, 상호 서로 유지하여 전체를 보존하는 것과 같다. 되돌아보아 우리 일본의 형편을 살피면 이것과 크게 다르다. 일본의 문명도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본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군주든지 귀족이든지, 종교든지 국민이든지, 모두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하여 각각 한 종족이 되어, 각각 자신의 주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도, 그 여러 주장이 병립할 수 없고, 서로 근접할 수 없고, 합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을 비유하면 금은동철이라는 여러 품목이 있더라도, 그것을 용해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만약 혹은 합쳐서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할지라도, 기실 여러 품목의 비율을 평균하여 혼합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한쪽이 무겁고 한쪽이 가벼워, 하나로써 다른 것을 없애고, 다른 것으로써 그 본색을 드러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 금은의 화폐를 만드는 데 10분의 1의 구리를 섞는 것도, 구리는 그 본색을 드러낼 수 없고, 그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순수한 금은화폐인 것과 같다. 이것을 사물의 편중이라고 칭한다. 대체로 문명의 자유는 다른 자유를 희생하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권리를 허락하고 여러 권익을 얻게 하고, 여러 의견을 수용하여 여러 힘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여, 타인과 나의 균형 사이에 존재할 뿐. 그러므로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혹은 정부, 혹은 국민, 혹은 학자, 혹은 관리, 그 지위가 어떠한지를 묻지 않고, 다만 권력을 지닌 자가 있으면, 설령 지혜의 힘에서도 완력에서도, 그 힘이라고 칭하는 것에 관해서는 반드시 제한이 없을 수 없다. 대체로 인류가 지닌 권력은 결코 순수할 수 없다. 반드시 그 중에 천성적인 악폐를 배태하여, 혹은 비겁하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혹은 과격하기 때문에 사물을 해치는 일, 천하 고금의 실례에 의하여 볼 수 있다. 이것을 편중의 재앙이라고 칭한다. 권력을 쥔 자는 항상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문명을 서양의 문명에 비교하여, 그 의미가 다른 바는 특히 이 권력의 편중에 관해서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권력의 편중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인간교류의 한 가운데에 침투하여 도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본서의 제2장에서, 한 나라 국민의 기풍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곧 이 권력의 편중도, 저 기풍의 한 가운데 한 가지 항목이다. 지금의 학자, 권력에 관한 일을 논하는 데는, 다만 정부와 국민만을 상대하여, 혹은 정부의 전제에 분노하고 혹은 국민의 발호를 나무라는 자 많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을 상세히 하여 세밀히 음미하면, 이 편중은 교류의 지대한 것부터 지극히 작은 것에 미치고, 대소를 묻지 않고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에 구애되지 않고, 적어도 여기에 교류가 있으면 그 권력은 편중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의미를 묘사하여 말하면, 일본 한 가운데 1100개 저울을 걸어, 그 저울 크고 작든, 전부 모두 한 방향에 치우쳐 균형을 잃은 것 같고, 혹은 34면의 결정체를 부수어, 1000으로 나누고 10000으로 나누어 마침내 가루로 되는 것도, 그 한 분자는 여전히 34면 본색을 잃지 않고, 또 이 가루를 합쳐서 하나의 작은 조각으로 만들고 또 합쳐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도, 그 물체는 여전하여 34면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 같다. 권력편중을 일반적으로 개괄하여 사사건건 미세함과 치밀함의 극에 통달하는 형편은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학자가 특별히 이것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다만 정부와 국민 사이는 교류가 크고 공적인 것이어서 두드러지게 사람의 이목을 끌기 때문에, 그 논의도 이것을 목적하는 것이 많을 뿐. 이제 실제적으로 편중이 있는 곳을 설명하겠다. 여기에 남녀의 교제가 있으면 남녀 권력의 편중이 있고, 여기에 부모와 아들의 교류가 있으면 부모와 아들 권력의 편중이 있고, 형제의 교류에서도 이것이 있고, 어른과 아이의 교류에도 이것이 있고, 집안에서 나와 세간을 보아도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스승과 제자 주인과 종, 빈부귀천, 신참 고참, 본가와 먼 혈족, 어느 것도 모두 그 사이에 권력의 편중을 존재하게 했다. 더욱 한 걸음을 나아가 인간이 다소 종족을 이룬 바의 것에 관하여 보면, 봉건시대에 큰 번()과 작은 번()이 있고. 절에 본산(本山)과 말사(末寺)가 있고, 신사(神社)에 본사(本社)와 말사(末社)가 있어, 적어도 인간의 교류가 있으면 반드시 그 권력에 편중이 없음이 없다. 혹은 또 정부 가운데서도 관리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이 편중이 존재하는 것 매우 심하다. 정부의 관리가 평민을 대하여 위세를 떨치는 상황을 보면 이 권력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이 관리가 정부의 가운데 있어서 상급자를 대할 때는, 그 억압을 받는 일이 평민이 관리를 대하는 것보다도 훨씬 심한 것이 있다. 비유건대 지방의 하급관리 등이 촌장을 함께 불러 일을 말할 때는 그 오만이 혐오스러울 것 같아도, 이 하급관리가 장관을 대하는 모양을 보면 역시 불쌍히 여기는 미소를 참고 있다. 촌장이 하급관리를 만나 무리하게 질타를 당하는 모양은 불쌍하더라도 마을에 돌아와 소작농을 무리하게 질타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혐오스러울 것이다. 갑은 을에게 압제당하고 을은 병에게 제재를 받아, 강압과 억제의 순환, 끝이 있을 수 없다. 역시 기이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인간의 귀천과 빈부, 지혜와 어리석음과 강함과 약함의 부류는, 그 상황(컨디션: condition)에서 몇 단계도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이 단계를 존치시키는 것도 교류에 방해가 될 수 없다할지라도, 그 상황이 다른 것에 따라 겸하여 또 그 권리(라이트: right)도 다른 것이 많다. 이것을 권력의 편중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제 세간의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면 권력을 가진 자는 다만 정부만 같아도, 충분히 정부가 어떤 것인지를 음미하여 그런 이유를 구하면, 조금 논의가 세밀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 원래 정부는 국민이 모여 일을 하는 곳이다. 이 장소에 있는 자는 군주라 칭하고 관리라고 칭할 뿐. 그리고 이 군주와 관리는 태어나면서 요로에 있는 군주와 관리가 아니다. 설령 봉건시대에 관직을 세습하는 풍습이 있어도, 실제적으로 일을 맡은 자란 많게는 우연히 선발된 인물이다. 이 인물, 일단 정부의 지위에 오른다 해서, 갑자기 평소의 마음씨를 고칠 이치가 없다. 그 혹은 정부에 있어 권력을 자행하는 일이 있음은, 곧 평소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증거에서는 봉건시대에서도 천민을 천거하여 정부의 요로에 고용한 일이 없지 아니할지라도, 그 인물의 소행을 보면 결코 기이한 것이 없다. 다만 이전의 행태에 따라 조금 일을 교묘하게 하는 것 밖에 없다. 그 교묘함은 곧 전횡의 교묘함이어서, 백성을 사랑하여 어리석게 하는 것이 아니면, 백성을 위협하여 위축되어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인물로 하여금 민간에 있도록 하면, 반드시 민간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촌에 있으면 촌에서 행동하고, 도시에 있으면 도시에서 행동하여, 도저히 우리 국민이 일반적으로 피할 수 없는 유행병이기에, 홀로 이 사람에 한하여 그것을 탈각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정부에 소속되면 그 사업이 성대하여 능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으로써,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유독 전횡의 근원이 아니고, 전횡하는 자들을 모이게 하는 중심이다. 전횡하는 자에게 자리를 빌려주어 평소의 본색을 드러내어 성대히 일을 시행하도록 하는 데 흡사 적당한 장소이다. 만약 그렇지 않아서 전횡의 근원이 특히 정부에 있다고 하면, 전국의 국민은 다만 관직에 있을 때만 이 유행병에 감염되어 전과 후는 과연 병이 없거나, 무례하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권력을 자행하는 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공통적인 폐단이어서, 이미 정부에 있어 권력을 지니면 그 권력 때문에 스스로 현혹되어 더욱 이것을 가지고 노는 폐단도 있을 것이고, 혹은 또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전횡이 아니면 일을 수행할 수 없는 형국도 있을 것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국민에게서 평소의 교육과 습관에서 전혀 없는 바의 것을, 다만 정부의 지위에 알맞다고 해서 마음에 두어 업무에 시행하는 이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권력을 자행하여 그 힘의 편중됨은 결코 정부뿐만 아니라, 이것을 전체 국민의 기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풍은 곧 서양 여러 나라와 우리 일본을 구별함에 두드러진 경계선이기에, 이제 여기에서 그 원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할지라도, 그 일은 매우 어렵다. 서양인의 저서에 아시아 지역에 전횡이 횡행하는 원인은, 그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인구가 과다하고, 지리는 산과 바다가 험악하고 광활한 것으로 인해 망상과 공포심이 심하다는 등에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 것도, 이 주장을 받아들여 직접적으로 우리 일본의 상황에 적용하여, 그로써 미심쩍은 점을 단정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가령 이것에 의해서 미심쩍음을 단정하여도, 그 원인은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사람의 힘으로써 이것을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사건의 과정을 설명하고, 전횡이 이루지는 단계를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그 단계가 일단 밝혀지면 역시 이것에 대응하는 조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 일본이라는 나라도 개벽의 초기에 있어서는, 세계 중의 다른 여러 나라와 같이, 약간의 백성으로 한 무리를 이루어, 그 한 무리의 안에서 완력이 매우 강하고 지혜의 힘을 최대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가 있어 기배하거나, 혹은 다른 지방에서 와서 정복하여 그 우두머리가 된 일이리라. 역사에 의하면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서쪽에서 군사를 일으킨 일이 있다. 한 무리의 백성을 지배함은 본래 한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 우두머리에 딸려 사무를 보는 자가 없을 수 없다. 그 인물은, 혹은 우두머리의 친척, 혹은 친구 안에서 뽑아, 함께 힘을 모아, 스스로 정부의 체제를 이룬 것이리라. 일단 정부의 체제를 이루면. 이 정부에 속한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고, 백성은 그 다스림을 받는 자이다. 이것 때문인가 처음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구별이 생겨, 다스리는 자는 위이고 주인이고 또 내부이고, 다스림을 받는 자는 아래이고 객()이고 또 바깥이다. 상하와 주객과 내외의 구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생각건대 이 양자는 일본의 인간 교류에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 경계선 이루어, 흡사 우리 문명의 두 가지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류한 종족이 적지 않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도달한 바는 이 두 가지 요소에 돌아가, 하나도 독립하여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자가 없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서로 나뉘다)

사람을 다스림은 그 일이 본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가입하는 자는 반드시 완력과 지혜의 힘을 겸비하고 또 다소간의 재산이 없을 수 없다. 일단 몸과 마음이 힘이 있고, 또 이것에 부유함을 겸비할 때는, 반드시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권력을 지닌 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왕실은 이 권력자의 위에 서서, 그 힘을 모아서 국내를 다스리고, 전쟁을 해서 이기지 않음이 없고, 정벌하여 항복시키지 않음이 없다. 또 다스림을 당하는 백성도, 왕실의 유래가 유구한 이유로써 더욱 복종하고, 신공(神功)왕후 시대부터 누차 외국으로 출정한 일도 있고, 국내에 위력을 보이고 혜택을 베풀어 국내를 돌아보아 근심이 없었던 것 미루어 알 수 있다. 이후 문화가 점차 열려, 양잠과 조선술, 직조와 바느질 기계 및 농기구, 의학서와 유교서 및 불교서적, 기타 문명의 여러 사항들이, 혹은 조선으로부터 전해지고, 혹은 자국에서 발명하여, 인간의 생생한 모습은 점차 성대함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이 문명의 제반 상항을 시행하는 권력은 모두 정부의 한 손에 달려, 백성은 다만 그 내용에 따를 뿐. 게다가 전국의 토지, 백성의 신체까지도, 왕실의 사유와 다르지 않음이 없다. 이 상황을 보면 다스림을 받는 자는 다스리는 자의 노예와 다르지 않다. 후세에 이르기까지도 어()국가, 어전지(御田地), 어백성(御百姓) 등의 명칭이 있다. 이 어()라는 글자는 정부를 존경한 말이어서, 일본의 논밭도 백성의 신체도 모두 정부가 소유한 물건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닌토구(仁徳) 천황이 민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짐은 이미 부유하다고 했다는 것도, 분명히 백성을 사랑하는 본심에서 나와, 백성의 부유함은 오히려 내가 부유함 것과 같다는 의미이어서, 정말이지 마음을 비운 침착하고 인자한 군주라고 칭할 수 있을지라도, 천하를 한 가족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사유화하는 기상을 살펴서 볼 수 있다. 이 추세에서 천하의 권력은 모두 왕실에 돌아가고, 그 힘, 항상 한편에 편중되어, 그로써 왕조시대의 말기에 다다랐다. 생각건대 권력의 편중은 앞에 언급한 것과 같이 지극히 큰 것에서부터 지극히 세세한 것에 이르러, 인간의 교류를 천만가지로 나누면 천만가지의 단계로 된 편중이 나타나고, 모아서 백으로 만들면 백가지 단계의 편중이 나타나, 이제 왕실과 백성의 두 가지 단계로 나누면, 편중도 역시 이 사이에 생겨나, 왕실의 한 편에 편중되는 것이다. (국력은 왕실에 편중된다)

켄페(源平: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 두 가문이 일어나는 데 이르러 천하의 권력은 무사가문에 돌아가고, 이것에 의하여 혹은 왕실과 균형을 이루어, 인간교류의 추세가 일변할 수 있을 것 같다하여도, 결코 그렇지 않다. 켄페(源平)든지, 왕실이든지, 모두 이 다스리는 자 가운데의 부분이어서, 국권이 무사가문에 돌아감은 다스리는 자 가운데서 이 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힘을 옮겼을 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관계는 여전하여 상하 주객의 추세를 갖추어, 조금도 옛날과 다른 것이 없다. 단지 다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서 고닌(光仁) 천황은 호키(宝亀)시대에 천하에 명령을 내려 병사와 농부로 나누어, 백성에게서 부유하고 무력이 있는 자를 뽑아 병역에 쓰고, 초췌한 자로 하여금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명령의 취지에 따르면, 백성 중에 부유하고 강한 자는 무력으로써 약소한 자를 보호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농사에 힘써 무사에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가난하고 약한 것은 더욱 가난과 약함에 빠지고, 부강은 더욱 부유함과 강함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경계선이 더욱 확연하여, 권력의 편중은 더욱 심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서적을 생각건대, 요리토모(頼朝)60여주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라마다 치안관을 두고, 장원(荘園)에는 책임자를 임명하여, 그로써 종전의 지방관과 장원관리관의 권한을 약화시킨 이후, 여러 나라의 무사들 가운데서 혈통도 있고 인품도 지닌 자는 치안관과 장원책임자의 직에 임명하고, 이하의 사람은 고케닌(御家人)이라 칭하여 지방관과 장원책임자의 지배를 받고, 모두 막부의 부하가 되었고, 혹은 백일교대(百日交代: 지방 관리들이 백일마다 교대로 수도에 와서 인질로 근무하는 것)로 가마쿠라(鎌倉)에 숙영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호조(北条)시대에도 대개 동일한 형편이어서, 나라 안 어디에도 무사가 없는 곳이 없다. 조큐(承久)의 난에 야스토키(泰時)18 기병으로 가마쿠라(鎌倉)를 세운 것은 522일의 일인데, 같은 달 25일까지 사흘간에 관동지역의 병사를 모두 모아, 도합 19만 기병이 되었다 한다. 이것에 의하여 생각하면, 여러 나라의 무사인 자는 평소부터 출진하려는 준비에 바빠, 본디 농업에 힘쓸 여가가 있을 수 없고, 분명히 다른 백성의 힘에 의지하여 먹고 산 일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병역과 농업의 경계선이 더욱 명백하게 정해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무사의 수도 점차 증가한 것이리라. 요리토모(頼朝)의 시대에는 대체로 관동의 섬기는 무사가문으로써 여러 나라를 수비하는 데 배치하여, 3, 5년의 교대였는데, 그 후 무기한으로 대대로 세습적으로 봉록을 받는 직책이 되고, 호조(北条)가 망하고 아시카가(足利)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치안관이라는 자, 번갈아 서로 병탄하고, 혹은 흥하고 혹은 망하고, 혹은 토호에게 쫓기고. 혹은 신하에게 빼앗겨, 점차 봉건적 추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왕조시대 이래의 형편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무사, 처음에는 국내의 처소에 분산하여 각자 권력을 휘둘러, 그로써 왕실의 명령에 복종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합쳐서 몇 개의 소집단을 이루어, 처음으로 다이묘(大名)과 쇼묘(小名)의 칭호가 생겼다. 아시카가(足利) 시대에 이르러서는 또 합쳐서 몸체가 큰 것을 이루었어도, 그 몸체와 다른 몸체를 합칠 수 없다. 즉 오닌(応仁) 이후 난세여서, 무사가 최고로 번성한 시대이다. 이와 같이, 무사의 세계에는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진퇴영고(進退栄枯)가 있어도, 백성의 세계에서는 하등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다만 농업에 힘써 무사의 세계에 보낼 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눈으로 보면, 왕실도 무사의 가문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무사의 세계에 치세와 난세와 흥망이 있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는 흡사 날씨와 기후의 변화가 있음과 다르지 않다. 다만 말없이 그 과정을 볼 따름이다.무사의 가문이 흥해서 신정정치의 미혹을 일소한 소득은 제235쪽에 (이와나미[岩波] 문고 구판 33) 논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주장에, 천하의 대세는 아홉 번 변하여 무사가문의 시대가 되고, 무사 가문의 세대 또한 다섯 번 변하여 도쿠가와(徳川)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하여, 그 외에 여러 연구가들의 주장도 대동소이하여도, 이 주장은 다만 일본에서 정권을 잡는 사람의 신진교대(新陳交代)한 모양을 보고 몇 번이라고 할 따름인 것이다. 모두 이때까지 일본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오직 왕실의 계보를 탐구한 것이거나, 혹은 임금과 재상과 벼슬아치의 득실을 논하는 것이거나, 혹은 전쟁과 승패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강역사(講釈師: 이야기꾼 혹은 야담가)의 전쟁이야기와 비슷한 것이거나, 대체로 이런 항목 밖에 없다. 드물게 정부와 관계가 없는 것이 있다면 불교도의 거짓말과 허망한 주장뿐, 역시 볼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역사는 없고 일본정부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학자의 부주의여서 나라의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라이(新井) 선생의 독사여론(読史余論)이라는 것도 곧 이런 부류의 역사여서, 그 책 가운데 천하의 추세가 변한다고 되어있어도, 실은 천하의 대세가 변함이 아니고, 천하의 추세는 일찍이 이미 왕조시대에 정해져,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 두 가지 요소로 구별하고, 군사와 농업으로 나누는 데 이르러 더욱 그 경계선을 분명히 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왕조시대의 말기에 후지와라(藤原) 가문, 권력을 독점하여, 혹은 상황(上皇), 정치를 자문하는 일이 있어도, 다만 왕실 내부의 일이어서 본디 세상의 형편과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다이라() 가문이 망하고 미나모토() 가문이 일어나서, 새로이 가마쿠라(鎌倉)에 정부를 열어도, 호조(北条)가 신하로 국가의 명령을 집행함도, 아시카가(足利)가 남조(南朝)에 대항하여 역적으로 불리는 것도, 오다(織田)와 도요토미(豊臣)와 도쿠가와(徳川)가 각각 일본을 통솔하여 지배했다 하는 것도, 지배하는 데 다만 유능하고 졸렬함이 있을 뿐. 천하의 형세는 여전하여 옛날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에서 즐거웠던 것은 도쿠가와(徳川)도 그것을 기뻐했고, ()이 근심했던 것은 을()도 그것을 근심하여, 그 기뻐함과 근심함에 대처하는 방법도 갑과 을에 있어서 조금도 다른 바가 없다. 비유건대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의 정부에서 오곡이 풍부하게 익어 백성이 유순함을 기뻐하는 심정은, 도쿠가와(徳川)의 정부도 그것에서 같다.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의 정부에서 두려워하는 바의 모반자의 종류는, 도쿠가와(徳川) 시대에서도 그 종류가 다르지 않다. 회고하여 저 유럽 여러 나라의 형편을 보면 크게 의미가 다른 바가 있다. 그 국민 사이에 종교적 교설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점점 유행하면 정부도 역시 그것에 따라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는 봉건적 귀족만을 두려워했지만, 세간의 상공업이 점차 번성하여 중산층에서 권력을 지닌 자가 있기에 이르면, 역시 이것을 기뻐하고 혹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유럽의 각 국가에서는 그 국가의 추세가 변하는 데 따라서 정부도 역시 그 취지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일본은 그렇지 않다. 종교적 교설도 학문도 상업도 공업도 모두 정부 안에서 농락당하는 것이어서, 그 변동을 근심할 필요가 없고, 또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만약 정부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그것을 금지할 수 있다. 유일한 걱정은 같은 부류 중에서 일어나는 자가 있어 정부가 신진교대(新陳交代)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같은 부류 중에서 일어나는 자라는 것은 다스리는 자 중에서 일어나는 자를 말한다그러므로 건국 2500여 년간, 나라의 정부라는 것은 동일한 모양의 일을 반복하여, 그 모양이 흡사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은 것과 같고, 같은 제목의 연극을 몇 번이고 공연하는 것과 같다. 아라이(新井) 씨가 천하의 대세 아홉 번 변하고 또 다섯 번 변했다고 하는 것은, 곧 이 연극을 아홉 번 공연하고 또 다섯 번 공연했다는 것일 뿐. 혹은 서양인의 저서에, 아시아주의 여러 나라에서도 변혁과 소동이 일어남은 유럽과 다르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변란 때문에 나라의 문명을 진척시키는 일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생각건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신구 교체하여도 국가의 추세는 변하는 일이 없다)

위와 같이 정부는 때때로 변혁을 번갈아 일으키는 일이 있어도, 국가의 형편은 곧 그렇지 않아, 그 권력은 항상 한 편에 편중되어, 흡사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에 높고 큰 장벽을 만들어 그 통로를 끊은 것 같다. 형태가 있는 완력도 형태가 없는 지혜와 덕행도, 학문도 종교도, 모두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참여하여, 그 무리들은 번갈아 서로 의지하여 각각 권력을 늘이고, 재산도 여기에 모이고 재능도 여기에 모여, 영욕(榮辱)도 여기에 있고 염치도 여기에 있고, 멀리 상류의 지위를 차지하여 하류 백성을 지배하여, 치세와 난세와 흥망, 문명의 진보, 모두 다스리는 자가 아는 바이고, 다스림을 받는 자는 전혀 마음에 이것을 관여하지 않고, 태연히 길가의 일을 보고 듣는 것 같다. 비유건대 옛날부터 일본에 전쟁이 일어났다. 혹은 고에츠(甲越)의 접전이라 하고, 혹은 죠코쿠(上國: 수도 지역)와 관동(關東)의 전투라고 하고, 그 명칭을 들으면 양국이 서로 적대하여 싸우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전투는 다만 양국의 무사와 무사의 싸움이어서, 백성은 전혀 이것에 관계하는 일이 없다. 원래 적국이라는 것은 전국의 백성이 일반적인 마음으로써 서로 적대하는 것이어서, 설령 스스로 무기를 휴대하고 전장을 향하지 않아도, 자기 나라의 승리를 원하고 적국의 불행을 기원하고, 사사건건 하찮은 일에 이르기까지도 적과 아군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야, 진실로 적대적인 두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이 지닌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이 부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쟁에 있어서는 옛날부터 그런 사례를 보지 못한다. 전쟁은 무사와 무사의 싸움이지, 백성과 백성의 싸움이 아니다. 가문과 가문의 싸움이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니다. 두 가문의 무사, 전쟁을 시작할 때는, 백성이 그것을 방관하여, 적에게서도 아군에게서도 다만 강한 자를 두려워할 뿐. 그러므로 전쟁에 즈음하여, 쌍방의 깃발의 색깔을 따라서, 어제 아군의 군수품을 운송한 자도 오늘은 적의 군량미를 질 수 있다. 승패가 결정되어 전쟁을 끝내는 때는, 백성은 소동이 진정되어 장원책임자가 바뀌는 것을 볼 따름. 그 승리를 영예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패배를 모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혹은 새로운 장원책임자의 정치적 명령이 관대하여 연공미(年貢米: 매년 세금으로 내는 쌀)가 높은 것을 감액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이것을 우러러 기뻐할 따름.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하겠다. 고호조(後北条) 국은 관동 8주이다. 일단 도요토미(豊臣)와 도쿠가와(徳川)가 적대하여 패망이 발생하면, 패망 후 곧바로 8주를 지배한 자는 원수인 도쿠가와(徳川)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어떤 인물이기에 일시에 8주의 많은 적을 복종시킬 수 있는가? 생각건대 8주의 백성은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고, 호조(北条)와 도요토미(豊臣)의 전쟁을 구경한 사람들이다. 도쿠가와(徳川)가 관동으로 옮겨 후에 적의 잔당을 진압하여 토벌했다는 것은, 다만 호조(北条) 가문의 남은 신하들을 토벌했을 뿐인 일이어서, 농부들과 상인들 등의 처리에 이르러서는 흡사 손으로써 머리를 만지는 즉시 안도하였던 것이다. 이것 등등의 사례를 헤아리면 옛날부터 하나하나 열거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도 아직 변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옛날부터 아직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만약 이 전체 국가로써 외국을 적대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면, 일본 가운데의 백성에게서 설사 무기를 휴대하고 출진하지 않아도 싸우는 일에 심적으로 관여하는 자를 전사(戰士)라고 칭하고, 이 전사(戰士)의 수와 저 소위 구경꾼의 수를 비교하여 누가 많을 것인지, 미리 헤아려 알 수 있다. 일찍이 내가 주장 바에, 일본에서는 정부가 있되 국민은 (네이션: nation) 없다고 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본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전쟁에 의하여 타국의 토지를 합병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어도, 이것을 합병하는 일이 매우 쉽지 않고, 비상한 병력으로써 압도하거나, 어쩌면 그 토지의 백성과 약속하여 얼마간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우리 국토에 편입시킬 수 없다고 한다. 동양과 서양의 백성이 그 기풍을 달리하는 것으로써 알 수 있다. (일본의 백성은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연히 민간에 재주와 덕행을 지닌 자가 있으면, 자기가 지위에 있으면서 이 재능과 덕행을 이용하는 데 수단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 지위에서 벗어나 상류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어제의 평민, 오늘은 장군과 재상으로 되는 일, 옛날과 지금 그 사례가 적지 않다. 이것을 일별하면 저 위아래의 장벽도 없는 것과 같아도, 이 인물은 다만 그 신분을 벗어나 다른 신분에 숨었을 따름. 이것을 비유하면 토지의 낮고 습윤함을 피하여 높고 건조한 땅으로 옮긴 것과 같다. 한 몸을 위해서는 상황이 적당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원래 그 습지에 스스로 흙을 쌓아 높고 건조한 지위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습지는 옛날의 습지여서, 당장 자기가 자리를 차지한 높고 건조한 땅에 비교하면, 그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여 위아래의 구별은 조금도 내용을 바꾼 것이 없다. 또한 옛날 오와리(尾張)의 기노시타 도키치(木下藤吉)가 다이코(太閤: 태합)이 되었다 하여도, 오와리(尾張)의 백성은 옛날의 농민이어서 그 상황을 고치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도키치(藤吉)는 다만 농민의 무리를 탈출하여 무사의 가문의 무리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그 입신은 도키치(藤吉) 한 사람의 입신이고, 농민의 일반적인 지위를 높인 것이 아니다. 본디 그 시대의 추세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논할 수 없고, 이것을 논하는 것도 매우 무익하여도, 만약 도키치(藤吉)로 하여금 그 옛날 유럽의 독립적인 시읍(市邑)에 살게 했더라면, 시민들은 틀림없이 이 영웅의 행동을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또 지금의 세상에 도키치(藤吉)을 살게 하여 도키치(藤吉)의 일을 하도록 하고, 저 독립적인 시민을 지금 세상에 소생시켜 그 사업을 평가하게 한다면, 이 시민은 틀림없이 도키치(藤吉)를 보고 박정한 인물이라고 하리라. 조상의 묘지가 있는 고향을 돌아보지 않고, 동료인 농민을 돌보지 않고 버리고, 홀로 무사가문에 의탁하여 한 몸의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자는, 우리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 자를 욕할 것이다. 도저히 도키치(藤吉)와 이 시민과는 그 주장하는 요점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행동의 조잡함과 세밀함과 관대함과 엄격함은 서로 비슷해도, 시대의 추세에 의하지 않고 세태에 구애되지 않고,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끝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건대 유럽에서 1200, 1300년대 경, 성대하게 유행하던 독립시민과 같은 것은, 그 소행이 본디 난폭하고 과격하고, 혹은 고루하고 매우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다할지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본업에는 상업에 힘쓰고, 그 상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적 조치를 마련하여, 스스로 그 지위를 굳힌 자들이다. 근세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와 기타 국가들에 있어서, 중류의 시민이 차츰 재산을 축적하고 따라서 또 그 품행을 고양하여, 의회 등에서 논설을 시끄럽게 펼치는 자가 있어도, 다만 정부의 권력과 싸워 소시민을 압제하는 힘을 탐내겠다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신의 지위가 유발하는 이익을 온전히 하여 타인의 압제를 압제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취지일 뿐. 그 지위가 유발하는 이익이라는 것은, 지역과 관련해서는 로컬 인터레스트: local interest: 지역이익이 있고, 직업에 관해서는 클래스 인터레스트: class interest: 계급이익이 있어, 각각 그 사람이 거주하는 지방, 또는 영업을 함께하는 등의 교류하는 정에 의하여, 각자 자신의 주장을 내놓고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고, 이것 때문에 혹은 한 생명을 버리는 자가 없지 않다. 이 내용을 보면, 옛날부터 일본인이 자신의 지위를 돌아보지 않고 편리한 편에 붙어,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여 권력을 구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스스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의 일을 하여, 폭력으로써 폭력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비열하기가 심한 것이다. 이것을 서양의 독립적인 시민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중국에서 초나라의 항우가 진시황의 행렬을 보고, 저자를 잡고 대신할 것이다 라고 하고, 한고조는 그것을 보고 대장부는 당연히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 이 두 사람의 마음속을 살피는 데,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진나라의 폭정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실은 그 폭정을 호기로 삼아 자기가 야심을 채우고, 진시황의 지위를 대신하여 진나라의 일을 맡는 것을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그 포학함이 진나라와 같이 되지 않아도, 조금 일을 교묘하게 수행하여 인망을 살 따름. 그 전횡으로써 하층민을 다스리는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진시황도 한고조도 차이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영웅호걸이라고 칭하는 자가 적지 않을지라도, 그 업적을 보면 항우가 아니면 한고조이다. 역사의 시작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체 일본 가운데 있어서 독립적인 시민 등의 사례는 꿈속에서 헛된 망상을 한 적도 없을 것이다. (국민은 그 지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 마음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하는 것이어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독립적이어서, 조금도 다른 사람의 제어를 받지 않고, 조금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 세상에 당연히 존재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 일본에 있어서는 곧 그렇지 않다. 원래 우리나라의 종교적 교설은 신도(神道)와 불교의 양쪽 길이라고 하는 자가 있어도, 신도(神道)는 아직 종교적 교설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설령 오랜 옛날에 그 주장이 있어도, 이미 불법(仏法) 안에 농락되어. 수 백 년 간 본색을 드러낼 수 없다. 혹은 요즘에 이르러 조금 신도(神道)라는 이름을 듣는 것 같아도, 정부의 변혁을 맞아 겨우 왕실의 음덕에 의지하여 미미한 운동을 하려고 할뿐이어서, 다만 한 때의 우연한 일이기에, 나의 소견에서는 이것을 정해진 종교적 교설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아무튼 옛날부터 일본에서 유포되어 문명의 한 국면을 맡은 종교적 교설은, 다만 하나의 불법(仏法)이 있을 따름. 그런데 이 불법(仏法)도 처음 생긴 때부터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들어가 그 힘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옛날부터 유명한 스님과 고명한 스님이라고 칭하는 사람, 혹은 당나라에 들어가서 법()을 구하고, 혹은 자국에서 있으면서 새로운 종파를 열어, 사람들을 교화하고 절을 세운 것도 많다할지라도, 대개 모두 천황과 쇼군(將軍) 등의 보살핌이라는 요행을 맞이하여, 그 음덕을 빌려서 법()을 보급하려 할 따름. 심지어는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고 명예라고 하는 데 이르렀다. 승려가 승정(僧正: 승려의 고위직)과 승도(僧都: 승려의 고위직)의 지위에 보해진다는 사례는 매우 오래되어, 엔키시키(延喜式: 헤이안 시대 율령의 시행세칙)에 승도(僧都: 승려의 고위직) 이상은 3품에 준한다 하고,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겐무(建武) 2년의 칙명에는, 대승정(大僧正: 승려의 최고위직)으로써 2품 대납언(大納言), 승정(僧正: 승려의 고위직)으로써 2품 중납언(中納言), 권승정(権僧正: 승정의 다음 직위)으로써 3품 참의(参議)에 준한다고 되어 있다 (석가관반기[釈家官班記]). 이 내용을 보면, 당시 유명한 스님과 고명한 스님도 조정의 관직을 몸을 지니고, 그 지위로써 조정의 많은 신하들과 상하의 반열을 다투어 한 자리 내외로써 영예와 수치로 삼았던 것이리라. 이것 때문에 일본의 종교적 교설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는 있어도 자립적인 종교 행정인 것이 있음을 듣지 못한다. 더욱이 그 실제적 증거를 얻고자하면, 오늘날에도 나라 안의 유명한 절에 가서 그 기록된 유래를 불 수 있다. 쇼무(聖武) 천황의 텐표(天平) 연중에 일본의 제후국마다 고쿠분지(国分寺: 국분사)를 세우고, 간무(桓武) 천황 엔랴쿠(延暦) 7년에는 전교대사(伝教大師: 最澄: 최징)가 히에이잔(比叡山)을 열어 고본츄도(根本中堂: 근본중당)을 세워 왕성(王城)의 기몬(鬼門: 귀문: 음양설에서 여러 귀신이 출몰하는 곳)을 진압하고, 사가(嵯峨) 천황 고닌(弘仁) 7년에는, 고보다이시(弘法大師: 홍법대사: 空海: 공해)가 고야산(高野山)을 열어 천황으로부터 윤허를 받아 그 대가람(大伽籃)을 건립했다. 기타 남부의 여러 산, 교토의 여러 절, 헤이안 시대에는 가마쿠라(鎌倉)5, 근세에는 우에노(上野)의 도에이야마(東叡山), 시바()의 조죠지(増上寺) 등 어느 것도 모두 정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기타 역대 천황 스스로 불교에 귀의하여, 혹은 친왕(親王: 적출 황손)으로 중이 된 자도 매우 많다. 시라카와(白河) 천황에게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6명은 중이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종교에서 권력을 얻은 한 가지 원인이다. 오직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자립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여전히 그런 폐단을 면할 수 없다. 아시카가(足利) 말기, 다이에이(大永) 원년 지츠뇨 상인(実如上人) 시대에 천황의 즉위 자금을 기부하여, 그 보답으로써 영원히 몬제키(門跡: 황족이 출가하여 법통을 전하는 절)에 준한다 하여 호신노(法親王: 법친왕: 황자가 출가하여 친왕까지 봉해지는 경우)에 준하는 지위를 하사받은 일이 있다. 왕실이 쇠미하고 빈곤함을 불쌍히 생각하여 여유 돈을 대주는 것은 승려의 신분으로서 훌륭한 일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니시산조(西三条)는 불교에 입문하는 중개인을 통하여 관직의 등급을 산 일이 있다. 이것을 비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일본 가운데 대사원이라 칭하는 것은, 천황과 칙명으로 기원하는 바가 아니면 쇼군(将軍)이 집권하여 건립했다. 생각건대 이것을 어용사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절의 유래를 들으면, 쇼군(将軍)의 도장이 찍힌 문서는 몇 백 석, 주지의 자격은 어떠어떠하다고 하여, 그 상황도 높은 무사 족이 자신의 가문을 말함에 다르지 않다. 한 번 들어서 혐오감이 생길 것이다. 절의 문 앞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표찰을 걸고, 문에서 나가면 추종세력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치워서 길을 피하게 하여, 그 위력은 봉건시대의 다이묘(大名)보다도 기세등등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력의 근원을 찾으면, 종교의 위력이 아니고, 다만 정부의 위력을 차용한 것이어서, 결국 속세 권력 중의 한 부분이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가 번성했다할지라도, 그 종교는 모두 정권의 한 가운데 포함되어, 사방 온 누리에 보편적으로 비추는 것은, 불교의 밝은 빛이 아니고, 정권의 위력인 것 같다. 사원에서 독립적인 종교가 없는 것도 역시 괴이할 것이 없고, 그 종교에 귀의하는 무리에 종교를 믿는 본심이 없는 것도 역시 놀랄 것이 못된다. 그 한 가지 증거를 들면,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종교적 교설만을 위한 전쟁에 이르는 것이 극히 드문 것을 보아도, 역시 신앙인의 나약함을 살펴 알 수 있다. 이 종교에 있어서 신앙심이 귀의하는 외양에 드러나는 바는,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촌농부와 촌노파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경우가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상황을 보면, 불법(仏法)은 다만 이 문맹세계의 한 가지 도구이어서, 매우 어리석고 매우 누추한 사람의 마음을 완화하는 수단일 뿐, 기타에서는 하등의 효용도 없고, 또 하등의 세력도 있을 일이 없다. 그 세력이 매우 없음은,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파계승이라 하여, 세속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종파 위의 계율을 어긴 자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직접 그를 체포하여, 시중에 끌고 다니고 귀양을 보내는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승려가 정부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정부로부터 전국의 승려에게 육식과 대처(帯妻)를 허락하는 명령이 내렸다. 그 명령의 의하면, 종래의 승려가 고기를 먹지 않고 부녀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은 그 종교의 취지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어서, 정부의 허락이 없기 때문에 노력하여 스스로 금지한 것이리라. 이런 것들의 내용을 보면, 승려는 비단 정부의 노예뿐만 아니라, 일본 안에 이미 종교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종교 권리가 없다)

종교는 여전히 또 그러하다. 하물며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야. 우리나라에 유교서적이 전해진 것은 이미 오래다. 왕조시대에 박사를 두고, 천황이 스스로 중국서적을 읽고, 사가(嵯峨) 천황의 시대에 대납언(大納言) 후유츠구(冬嗣), 간가쿠인(勧学院: 권학원)을 세워 일족의 자제를 가르치고, 우다(宇多) 천황 시절에는 중납언(中納言) 유키하라(行平), 쇼가쿠인(奨学院: 장학원)을 건설하는 등, 한학도 점차 열리고, 특히 와카(和歌: 일본의 시) 교육은 옛날부터 성행한 일이 있어도, 모두 이 시대의 학문은 다만 재위 천황의 자제에게 미칠 뿐이어서, 저서라 할지라도 모두 관청의 손에 이루어진 것이다. 본래 인쇄술도 아직 발명되지 않아서, 민간에서 교육에 다다를 수 있는 수단이 있을 수 없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 미요시 야스노부(三善康信) , 유학으로써 등용되었다 해도, 이것 역시 정부에 속한 자들이어서, 백성들 사이에 학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죠큐(承久) 3년 호조 야스토키(北条泰), 우지세타(宇治勢多)에 침입했을 때, 고토바(後鳥羽) 상황(上皇)으로부터 어명이 와서, 병졸 5000여명 안에서부터 이 어명을 읽을 수 있는 자를 찾는 데, 무사시노(武蔵) 국의 주민 후지타 사부로(藤田三郎)라는 자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한다. 세상이 문맹인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아시카가(足利) 말기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온전히 승려의 몫이 되어, 글자를 배우고자하는 자는 반드시 절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 수단을 얻지 못한다. 후세 글자를 배우는 학생을 칭하여 데라코(寺子: 절 아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가 있다. 혹자의 주장에, 일본에 목판본이 생긴 것은 가마쿠라(鎌倉)5(五山)을 시작으로 한다고 했다. 과연 믿을 것인가? 도쿠가와(徳川) 초기에 그 시조 이에야스(家康), 우두머리로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중용하고, 다음에 하야시 도슌(林道春)을 등용하고, 평화가 지속됨에 따라 대유학자를 배출, 그로써 근세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학문의 성쇠는 세상의 치세와 난세라는 행보를 함께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일이 없고, 수 십 백년 전쟁과 소란의 사이, 완전히 이것을 승려의 손에 맡긴 것은, 학문의 불명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한 가지 사건을 보고도 유교는 불교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할지라도 전쟁에 즈음하여 학문이 쇠미함은 유독 일본뿐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국가가 그렇지 않음이 없다. 유럽에 있어서도 중세 암흑시대부터 봉건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에 관한 권한, 전적으로 승려에게 귀속되어, 세간에서 점차 학문이 피어난 것은 실제로 1600년대 이후의 일이다. 또 동양과 서양의 학풍이 그 내용을 달리하여, 서양 여러 나라는 실험에 대한 주장을 주로 하고, 우리 일본은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좋아하여, 허실의 차이, 동시에 말할 수 있음이 아니라도, 역시 일률적으로 그것을 나무랄 수 없다. 아무튼 우리 국민을 야만의 단계에서 구하여 오늘날의 문명에 이르도록 한 것은, 불교와 유교의 덕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근세에 유교가 번성함에 이르러, 세속에 유행하는 신불(神佛)을 믿는 부류의 거짓말과 망설을 배척하여 사람 마음의 현혹을 불식시킴과 같은 것은, 그 공로가 매우 적지 않다. 이 한편에서 보면 유교도 역시 유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동양과 서양 학풍의 득실을 잠깐 제쳐두고, 다만 그 학문이 유행한 사정에 관하여, 두드러진 두 가지 양상의 차이를 내걸어 여기서 제시할 따름. 생각건대 그 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난세가 지나고, 학문이 일어남을 맞아, 이 학문이라는 것, 서양 여러 나라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 사이에서 일어나고, 우리 일본에서는 정부 안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사건이다. 서양 여러 나라의 학문은 학자가 하는 일이어서, 그 실행하는 것이야 관민의 구별이 없고, 다만 학자의 세계에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소위 다스리는 자의 세계에 속하는 학문이어서, 흡사 정부의 한 부분임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적으로 보자, 도쿠가와(徳川)의 치세 250년간, 국내에서 학교라고 칭하는 것은, 처음 정부의 설립이 아니면 여러 번()의 것이다. 혹은 유명한 학자가 없지 않고, 혹은 많은 저술이 없지 않아도, 그 학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하인이고 그 저서는 반드시 관청의 발간이다. 혹은 떠돌이 낭인(浪人)에서 학자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장판(蔵版: 소장본)도 있으리라고 할지라도, 그 낭인(浪人)은 하인이 되는 것을 바라서 이루지 못한 것이고, 그 개인적인 장판(蔵版: 소장본)도 관청 판본이기를 바라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국내 학자의 결사가 있음을 듣지 못하고, 논문과 신문 등의 출판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기예를 가르치는 교습소를 보지 못하고, 여러 사람이 회의를 여는 곳을 보지 못하고, 전체 학문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사로이 기획하는 것이 없다. 간혹 석학과 대유학자가, 사숙(私塾)을 열어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그 학생은 반드시 무사에 한하여, 세습봉록을 먹고 군주를 섬기는 여가 시간에 글자를 배우는 자일 뿐. 그 배움의 흐름도 역시 다스리는 자의 명분에 어긋나지 않아서, 오로지 사람을 다스리는 길을 구하여, 수 천 백 권의 책을 독파함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혹은 드물게 은둔군자라고 칭하는 선생이 있어도, 사실은 마음에 만족하여 숨은 것이 아니고, 몰래 불우함을 탄식하여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잊고 방심한 자이다. 그 내용을 표현하여 말하면, 일본의 학자는 정부라고 칭하는 새장 속에 갇혀, 이 새장으로써 자기가 하늘과 땅으로 삼고, 이 작은 하늘과 땅 속에서 번민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세상 한 가운데 중국의 유교 교육이 멀리 퍼지지 않아서 배우는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축하할 가치가 있고, 만약 선생의 생각대로 무수한 학생을 낳는 일이 생기면, 좁은 새장 속에 혼잡하여, 몸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도 없어서, 원망은 더욱 많고, 번민은 더욱 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불쌍하기가 짝이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와 같이 제한된 새장 안에 한없는 학생을 낳아, 새장 바깥에 인간세상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에, 자신의 지위를 만드는 방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그 시대의 권력자에게 의지하여, 어떤 경멸을 받아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다.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학자의 뜻을 얻은 자는 정부와 여러 번()의 유교로 등용된 관리(儒官: 유관)이다. 이름은 유관(儒官)이라고 부른다할지라도, 사실은 긴 소매 옷을 입은 신분(長袖身分)이라 하여, 그들을 존경하지 않고, 다만 일종의 수단과 같이 다루어, 또 본인이 좋아하는 것인 정치적인 사무에서도 참가하게 하지 않고, 겨우 다섯 말의 쌀을 주어 소년들에게 독서교육을 하게 할뿐. 글을 아는 자가 드문 세상이기에, 다만 그 부자유를 보충하기 위하여 이용하기까지 하는 일이어서, 이것을 비유하면 가죽세공에 한하여 에타(穢多: 쇠백정)에게 지시하는 것과 같다. 비굴과 비천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무리를 향해 또 무엇을 바랄 것이며, 또 무엇을 비난하리? 그 패거리 안에 독립적인 결사가 없는 것은 수상한 일이 아니고, 일정한 논의가 없는 것도 역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의 전제가 충분히 사람을 속박한다고 하여, 조금 기개가 있는 유학자는 자칫하면 그것을 향해 불평을 품는 자가 없지 않다. 그렇다할지라도 잘 그 근본을 찾으면, 그 사람 스스로 씨앗을 뿌려 그것을 배양하여, 그 묘목이 무성하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정부의 전제, 이것을 가르치는 자가 누구인가? 설령 정부 본래의 특성에 전제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 요소의 발생을 도와서 그것을 윤색하는 자는 중국에 관한 유교학자 무리의 학문이 아닌가? 옛날부터 일본의 유교학자에게서 매우 재주가 있어 매우 잘 일을 처리하는 인물이라고 칭하는 자는, 매우 전제를 잘하여 매우 잘 정부에 등용된 자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유교는 스승이고 정부는 제자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불쌍하게도, 지금 일본 국민, 누가 사람의 자손이 아니랴? 현재 세상에 있어 전제를 행하고, 또 그 전제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오로지 이것을 현대인의 죄로 돌릴 수 없고, 멀리 그 선조에게 받은 유전적인 독소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병적인 독소의 득세를 도운 자가 누구인가, 중국 유교의 선생도 역시 책임이 있고 크게 힘을 쓴 것이다. (학문에 권리가 없고 오히려 세상의 전제를 돕다)

앞 문단에 말한 것과 같이, 유교는 불교와 더불어 각각 그 한 가지 면을 맡고, 우리나라에 있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문명을 일으킨 일이 있지만, 어느 것도 모두 옛날을 그리워하는 병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교적 교설의 본분은 사람 마음에 대한 교육을 맡아, 그 교육에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불교 또는 신도(神道)의 무리가 수 천 백년의 옛날을 말하여 금세기의 사람을 깨우치고자함도 매우 당연한 일일지라도, 유교에 이르러서는 종교와 다르고, 오직 인간 교류의 이치를 논하여, 예악(礼楽)6(六芸)라는 것을 주장하여, 절반은 이것을 정치에 관련시키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학문에서 융통성과 개혁의 내용을 알지 못함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닌가? 인간의 학문은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진보하여, 어제의 소득은 오늘의 손실로 되고, 전년의 옳음은 금년의 틀림이 되어, 물체마다 의심을 수용하고 사건마다 의심을 일으켜, 이것을 규명하여 이것을 음미하며, 이것을 발명하고 이것을 개혁하여, 자식과 동생은 아비와 형보다 우수하고 후배는 선배보다 뛰어나, 해마다 태어나고 또 태어남을 거듭하여, 점차 성대하게 진보하여, 뒤돌아보아 백년의 옛날을 보면, 그 거칠고 미련함과 문명 부재를 불쌍하게 여기며 웃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이야, 문명의 진보, 학문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논어에서 말하기를, 후세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어찌 오는 자가 지금 사람과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라고. 맹자에서 말하기를, 순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고, 하는 일 있는 자는 역시 이와 같다. 또 말하기를, 문왕은 나의 스승이다,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려나고. 이 교훈으로써 중국학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후세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운운하는 것은, 후배인 자가 노력하면 혹시 오늘날의 사람과 같이 되는 일도 있을 것이고, 방심은 안 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사람이 노력하여 도달할 수 있는 정상은 기껏해야 오늘날의 사람들의 지위에 있을 따름. 게다가 오늘날의 사람들도 이미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말세의 사람이므로, 설사 이것에 미치는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기대할만한 상황이 아니다. 또 후배 학자가 크게 분발하여, 대성일갈(大声一喝), 그 강개한 뜻을 기술하는 곳은, 수천 년 이전의 순임금과 같이 되려고 바라는 것이거나, 혹은 주공(周公)을 증인으로 세워 두려워하면서 문왕(文王)을 배우려고 하는 것까지의 일이어서, 그 내용은 재주가 없는 아이가 스승에게서 습자본을 받아, 주신 글씨본대로 글자를 쓰고자 고심하는 것과 같다. 처음부터 스승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자라고 각오를 했기 때문에, 아주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스승의 필법을 흉내 낼 뿐, 도저히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중국 유교의 계보는, 요순부터 우왕과 탕왕 문왕과 무왕 및 주공과 공자에게 전해져, 공자이후는 이미 성인의 씨가 다하여,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다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을 듣지 못한다. 맹자이후 송나라 시대의 유교학자 혹은 일본의 석학이 대유학자이어도, 후세를 향하여 자부할 수 있다할지라도, 공자이전의 옛 성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이것을 배워서 미치지 못하는 한탄을 할 뿐. 그러므로 그 도()는 후세에 전해지면 전해지는 만큼 나쁘게 되어, 점차 인간의 지혜와 덕행을 감소시키고, 점차 악인의 수를 증가시키고, 점점 어리석은 자의 수를 증가시켜, 한 번 전하고 또 한 번 전하여, 그로써 마지막 세대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재빨리 이미 금수의 세계로 될 수 있는 것은 수지타산 상에 명백한 계산이라도, 다행히도 사람의 지혜가 진보하는 규칙은 스스로 세상에 시행되어 유교학자의 생각과 같지 않고, 왕왕 옛 사람보다 우수한 인물을 탄생시킨 일에서야, 오늘날까지의 문명을 진보시켜, 저 계산의 비율에 어긋난 것은, 우리 국민의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옛날을 신뢰하고 옛날을 그리하여 조금도 자기의 생각을 교환하지 않아, 소위 정신적 노예(멘탈 슬레이브: mental slave)라 하여, 자기가 정신을 들추어내어 옛날의 도()에 바쳐,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 사람의 지배를 받고, 그 지배를 또 전하여 지금의 세상 한 가운데를 지배하고, 널리 인간 교류에 정체와 불통의 요소를 흡입케 하였던 것은, 유교학문의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할지라도 또 한편에서 말하면, 옛날에 만약 우리나라에 유교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더라면, 지금 세상의 형편에는 도달할 수 없다. 서양의 말에 리파인먼트: refinement라고 하여,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여 세련되게 한다는 한 가지 일에 관해서는, 유교학문의 효과가 역시 적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옛날에 있어서는 주효하였으나 현재에 있어서는 쓸모가 없을 뿐. 물질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에 있어서는, 찢어진 멍석도 이불로 사용할 수 있고, 쌀겨도 양식으로 할 수 있다. 하물며 유교학문에 있어서야, 틀림없이 그 구악을 책망할 수 없다. 나의 생각에 유교학문으로써 옛날의 일본인을 가르친 것은, 시골의 처녀를 대궐에 바쳐 보낸 것과 같다. 대궐에서 기거하고 움직이는 것은 스스로 세련됨을 흉내 내고, 그 재주도 혹은 영민을 더했다하여도, 활발한 기력은 잃어버리고, 가산을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한 부녀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생각건대 그 시절에는 처녀를 가르칠 교육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바치는 것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이해득실을 살펴서 달리 방향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은 의리와 용기의 나라라고 칭하여, 그 무사가 표한하여 과단, 충성스러워 솔직함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어서도 부끄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중 아시카가(足利) 말년에 이르러 천하의 대란, 호걸은 있는 곳에 할거하여 공격이 멈추는 때가 없고, 대체로 일본에서 싸움이 유행함은, 이 때 전후보다 성행함이 없다. 한 번 패하여, 국가를 망하게 한 자가 있고, 한 번 승리하여, 집안을 일으킨 자가 있고, 문벌도 없고 유래도 없고, 공적과 명성이 자유자재, 부귀를 순간에 얻을 수 있다. 문명의 정도에 앞뒤의 차가 있어도, 이것을 저 로마의 말기에 북쪽 오랑캐가 침입한 시대와 비교하여 비슷한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추세 가운데에 있어서는 일본의 무사에게도 스스로 독립과 자주의 기상을 일으켜, 혹은 저 독일의 야만인이 자주와 자유의 요소를 남긴 것처럼, 우리 국민의 기풍도 일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본 장의 첫머리에서 말한 권력의 편중은, 역사시작 처음부터 인간 교류의 미세한 곳까지도 침투하여, 어떤 진동이 있어도 이것을 파괴할 수 없다. 이 시대의 무사가 쾌활하고 자유로운 것 같아도, 그 쾌활하고 자유로운 기상은 한 몸의 강개함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정하여 일개의 남아라고 생각하여, 몸을 가장 중시하여, 자기 혼자의 자유를 즐긴다는 마음이 아니라, 틀림없이 외부의 무엇에 유혹되어 발생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무엇을 빙자하여 발생을 도운 것이다. 무엇을 외부의 무엇이라고 하는가. 조상 때문이고, 가문의 이름 때문이고, 주군 때문이고, 부친 때문이고, 자기의 신분 때문이다. 대체로 이 시기의 전쟁에서 명분으로 하는 바는 반드시 이런 것 등의 제반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없다. 또는 조상의 가문 이름이 없고, 주군과 부친의 신분이 없는 자는, 일부러 그 명분을 만들어 핑계로 이용하는 꼴이다. 어떤 영웅호걸이어서 힘이 있고 지혜가 있는 자라할지라도, 그 지혜의 힘에만 의지하여 일을 하고자 기도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여기서 사건의 흔적에 드러난 것을 들어, 한 가지, 두 가지 사례를 보이겠다. 아시카가(足利)의 말년에 사방의 호걸, 혹은 그 주인을 내쫓고, 혹은 그 주군과 부친의 원수를 갚고, 혹은 조상의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고, 혹은 무사다운 면목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라 하여, 무리를 모아 토지를 압수하고, 할거하는 세력을 이루었다할지라도, 그 기대하는 바는 다만 수도(교토)로 올라가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 대체로 수도(교토)로 올라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면, 천황 혹은 쇼군을 알현하여, 그 명의를 차용하여 천하를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또는 아직 수도(교토)로 올라가는 수단을 얻지 못한 자는, 멀리 왕실의 관직을 얻어, 이 관직에 의지하여 자신의 영예를 늘리고, 그로써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재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 재주는 옛날부터 일본의 무사들 사이에 유행하는 정해진 고유한 방식이어서, 미나모토() 가와 다이라() 가의 우두머리,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다. 호조(北条)에 이르러 바로 최상의 관직을 바라지 않고, 명분을 위하여 쇼군을 두고, 신분은 5품계로써 천하의 권세를 쥔 것은, 비단 왕실을 도구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쇼군도 이용한 것이다. 그 외형을 피상적으로 판단하면 아름답고 훌륭해 보이더라도, 충분히 사건의 내부를 분석하면, 틀림없이 사람의 비겁으로부터 생긴 것이어서, 진실로 천시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아카마츠 엔신(赤松円心)의 책략을 이용하여 고후시미(後伏見) 천황의 칙서를 받고, 그 아들 고묘(光明) 천황을 세운 것과 같은 것은, 만인의 눈으로써 보아도 이것을 천황의 본심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노부나가(信長)가 처음에 쇼군 요시아키(義昭)를 손안에 넣었어도, 쇼군의 명성이 천황의 명성보다 약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곧 요시아키(義昭)를 내쫓고 곧바로 천황을 껴안은 것도, 그 정()이 두텁다고 할 수 없다. 어느 것도 모두 계략과 속임수가 명백한 것이어서, 대체로 천하에 눈과 귀를 구비한 자라면, 그 속내를 통찰할 수 있음이 당연하여도, 아직 그 표면에서는 충성과 신의와 절개와 의리를 부르짖어, 어린애의 놀이와 같은 명분을 핑계로 이용하여 스스로 이것을 책략을 얻은 것으로 하여, 사람들도 역시 이것에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은 왜인가? 생각건대 그 무리들 안에 있어서 위와 아래가 함께 크게 이득을 보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사는 역사시작 초부터 이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교류의 규칙에 따라, 권력 편중의 속에서 길러져, 항상 사람에게 굽힘으로써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저 서양의 국민은 자기의 지위를 중시하여, 자기의 신분을 귀하게 여기고, 각각 그 권리와 의무를 지속적으로 확대함에 비교하면, 그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쟁과 소란의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교류의 법칙은 파괴할 수 없다. 일족의 우두머리에 대장이 있고, 대장 밑에 가노(家老)가 있고, 그 다음에 기마병이 있고, 또 가치(徒士: 하급무사)가 있고, 그로써 아시가루(足軽: 최하급 무사)와 쥬겐(中間: 하인)에 이르러, 상하의 명분이 명백하고, 그 명분과 함께 권한과 의무를 달리하여, 한 사람으로서 무리함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고, 한 사람으로서 무리함을 행하지 않는 자가 없다. 무리함에 억압당하고, 또 무리하게 억압하고, 이것을 향하여 굴복하면, 저것을 향하여 자부할 수 있다. 비유건대 여기에 갑을병정(甲乙丙丁)이라는 10명이 있어, 그 을()인 자, ()에 대하여 비굴한 모습을 하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이 있는 것 같아도, ()에 대하면 의기양양하여 크게 자부할 수 있는 유쾌함이 있다. 그러므로 앞의 치욕은 뒤의 유쾌함에 의하여 보상을 받고, 그로써 불만을 고르게 하고, ()은 정()에게서 보상을 받고, ()은 무()에게서 대가를 구하여, 점점 끝이 없고, 흡사 서쪽의 이웃에 빌려준 돈을 동쪽 이웃에게 독촉하는 것과 같다. 또 이것을 물질에 비유하여 말하면, 서양 국민의 권력은 쇠와 같아서, 그것을 팽창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고, 이것을 수축시키는 것도 역시 매우 쉽지 않다. 일본의 무사의 권력은 고무와 같고, 그 서로 붙이는 바의 물질에 따라서 수축과 팽창의 내용을 달리하여, 밑에 붙이면 크게 팽창하고, 위에 붙이면 갑자기 수축하는 성질이 있다. 이 치우쳐서 수축하고 치우쳐서 무거워지는 권력을 일체로 모아서 무사가문의 위세라고 칭하고, 그 일체의 억압을 당하는 자는 의지할 데가 없는 평민이다. 평민을 생각하면 불쌍하여도, 무사의 무리에 있어서는 위로 대장(大将)부터 밑으로 아시가루(足軽: 최하급 무사)와 쥬겐(中間: 하인)에 이르기까지, 상하 일반적인 이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이익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그 상하의 관계, 충분히 정돈되어 크게 체계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곧 그 체계적이라는 것은 무리의 내부에서, 상하 간에 사람마다 비굴함의 추태가 있을지라도, 무리가 일체의 영광으로써 굳이 스스로 이것을 자기네 영광으로 삼고, 오히려 한 개인의 지위는 버리고 그 추태를 망각하고, 달리 일종의 체계를 만들어 그것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 관습의 한 가운데서 길러져 마침내 그로써 제 2의 천성을 이루어, 어떤 물체에 접촉하여도 그 물체를 움직일 수가 없다. 위세와 무력도 굴복시킬 수가 없고, 가난과 천박함도 빼앗을 수 없고, 엄연한 무사가문의 기풍을 엿보아 알 수 있다. 그 한 국면의 사건에 관하여 한 장면의 작동에 관하여 이것을 살피면, 정말로 부러워할 수 있고 또 사모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옛날 미가와(三河)의 무사가 도쿠가와(徳川) 집안에 따라붙었던 형편도 이 한 가지 사례이다. 그 조직으로써 성립된 무사의 교류이기에, 이 교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종의 무형의 최고 권위가 없을 수 없다. 곧 그 권위가 있는 곳은 왕실에 멈춘다 할지라도, 인간세계의 권위는, 사실, 사람의 지혜와 덕행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왕실이라 할지라도 실질적인 지혜와 덕행이 있지 않으면 실질적인 권위는 왕실에 귀속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서인가 그 명분만을 남기고 왕실에 실권이 없는 지위를 품게 하여, 실권은 무사가문의 우두머리에게 장악하게 하려는 책략을 꾸몄던 것이므로, 곧 당시 사방의 호걸이 수도(교토)로 올라오는 일에 열중하여, 어린애 장난 같은 명분도 짐짓 남겨 이것을 이용한 까닭이다. 결국 그 근본을 찾으면, 일본의 무사에게 단지 한 개인의 기상(인디비쥬얼리티: individuality)이 없어서, 이런 비열한 소행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난세의 무사에게 단 하나의 기상이 없다)

옛날부터 세상 사람들이 등한히 간과하여 유의하지 않은 바이라도, 지금 특별히 그것을 기록하면, 일본의 무사에게는 오직 한 개인의 기상이 없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항목이 있다. 곧 그 항목이라는 것은 사람의 성명에 관한 것이다. 원래 사람의 이름은 부모가 짓는 것이어서, 성장 후 혹은 개명하는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주에 관한 물품은 사람마다의 취향에 맡겨, 자유자재일 것 같아도, 대개는 외부의 물체의 의하여 움직여, 스스로 시대의 유행에 따르는 것이어도, 사람의 성명은 의식주의 물품과 다르고, 이것을 짓는 것에 타인의 지시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설령 친척과 친구라고할지라도, 내가 원해서 상담을 받는 것이 아니면, 참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사람의 일의 형태에 나타나는 것들 중에서 최고로 자유자재일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따라서 개명을 금지하는 나라에 있어서는, 본래 그 법에 따름도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도, 개명이 자유로운 국가에 있어서, 겐스케(源助)라고 하는 이름을 히라키치(平吉)라고 고치거나, 또는 그것을 고치지 않는 자유는, 전적으로 한 개인의 의사에 맡겨, 밤에 자는 데 오른쪽을 베게로 하고 또 왼쪽을 베게로 하는 자유와 같다. 조금도 타인과 관계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 일본의 무사가문에서, 이름 한 자를 하사하여 성을 허락하는 사례가 있다. 비굴하고 저열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용맹도 여전히 이것을 피하지 못하고, 쇼군 요시데루(義輝)의 이름 한 자를 하사받아서 데루토라(輝虎)로 개명한 일이 있다. 더욱 심한 것은, 세키가하라(関原) 전투 후에 천하의 통치권이 도쿠가와(徳川) 씨에게 귀속되어, 제후 도요토미(豊臣) 씨를 사칭하는 자는 두 본래 성으로 회복시켰고, 또 마쓰다이라(松平)를 사칭하는 자가 있다. 이와 같은 성 개명은 혹은 스스로 원하여 혹은 위의 명령에 의해 하사를 받는 일도 있으려니 할지라도, 어느 것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경멸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여, 개명과 성을 사칭하는 일은, 당시의 풍습이어서 사람이 마음에 두는 일이 아니어서, 지금부터 나무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코 그렇지 않다. 타인의 성명을 사칭하여 마음에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심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같다. 그 증거에서는 아시카가(足利) 시대, 에이교(永享) 6, 가마쿠라(鎌倉)의 구보 모치우지(公方持氏)의 아들이, 성년식을 하면서 이름을 요시히사(義久)로 짓는 데, 관령(管領: 쇼군 아래 고위직) 우에스기 노리사네(上杉憲実)는 여느 때처럼 무료마치(室町) 막부의 쇼군의 생전 이름을 원할 수 있다고 간언하였어도 듣지 않았던 일이 있다. 이때 모치우지(持氏)는 이미 자립의 의지가 있었다. 그 의지는 선이든 악이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은 천박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또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호소카와(細川) 가문에 마쓰다이라(松平)의 성을 주려고 하는 데 사양하였다고 하여, 민간에서는 이것을 미담으로 하여 전했다. 진위가 상세하지 않을지라도,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의 심정은 지금도 옛날도 같은 것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다. 이상 기록한 바의 성명에 관한 사건은 그다지 큰 사건도 아니라도, 옛날부터 의리가 있고 용감하다고 칭하는 무사가, 사실은 의외로 비겁함을 알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권위를 장악한 정부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 마음의 내부까지도 침범하여 통제하기에 충분하다는 내력을 밝히기 위하여, 몇 마디 말을 여기에 단 것이다.

앞에 조목조목 논한 것과 같이, 일본의 인간 교류는, 상고시대부터 통치자 부류와 피통치자 부류라는 두 가지 요소로 나뉘어, 권력의 편중을 이루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 세력이 변한 것이 없다. 백성 간에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자가 없는 것은 본디 말할 것도 없다. 종교도 학문도 모두 통치자 부류에 안에서 농락당하여 일찍이 자립할 수 없다. 난세의 무사가 의리가 있고 용감한 것 같아도, 역시 홀로 개인적인 묘미를 모른다. 난세에서도 치세에서도, 인간 교류의 지대함에서 지극히 세밀함에 이르기까지, 편중이 이루지지 않은 곳이 없고, 또 이 편중에 의하지 않으면 일이라 하여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흡사 만 가지 병에 한 가지 약을 쓰는 것 같고, 이 한 가지 약의 효능으로써 통치자 부류의 힘을 보충하여 늘리고, 그 힘을 모아 집권자의 한 손에 귀속시키는 취향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왕조시대의 정치도 무사가문의 정치도, 호조(北条) 아시카가(足利)의 책략도 도쿠가와(徳川)의 책략도, 결코 요점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저것을 이것보다 좋다고 하고, 이것을 저것보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이 편중을 이용하는 능란함과 서투름을 보고 그 득실을 판단할 따름. 능란하게 편중의 재주를 실시하여 최상의 권력을 집권자의 가문에 귀속시킬 수 있으면, 만사가 이미 이루어져 달리 또 바랄 수 있는 것이 없다. 옛날부터의 인습으로 국가(国家)라고 하는 문자가 있다. 이 가()라는 자는 백성의 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집권자의 가족 또는 가문의 이름이라고 하는 뜻이리라. 그러므로 나라()는 즉 집()이고, ()은 곧 나라()이다. 심지어는 정부를 부유하게 하는 것으로써 어국익(御国益) 등으로 주장함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것은 곧 나라()가 집() 때문에 망하게 된 꼴이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써 정치의 근본을 정하기 때문에, 그 책략이 나오는 곳은 항상 편중적인 권력을 한 가문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산요(山陽)의 외사(外史), 아시카가(足利)의 정치를 평하여 꼬리가 커서 다룰 수 없다(尾大不掉: 미대부도: 부하의 세력이 강하여 군주가 자유롭지 못하다) 하여 그 큰 실책이라 하였다. 이 사람도 다만 편중이 실행되지 않아서 아시카가(足利) 가문에 권력이 귀속되지 않음을 논하는 것까지의 일이어서, 당시 유교학자의 생각에는 뛰어난 것이라도, 결국 집이 있음을 알고 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논리이다. 만약 아시카가(足利)의 꼬리가 커서 다룰 수 없다(尾大不掉: 미대부도: 부하의 세력이 강하여 군주가 자유롭지 못하다)를 실책이라고 하면, 도쿠가와(徳川)의 머리 쪽의 큰 편중을 보고 이것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편중의 정치는 옛날부터 도쿠가와(徳川) 가문보다 능란하여 뛰어난 것은 없다. 통일 후, 빈번히 자기 가문의 토목공사를 일으켜 제후의 재산을 쓰게 하고, 한편에서는 사방의 성채를 무너뜨려 번()마다 성()의 토목공사를 중지시키고,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무기를 수도에 반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제후의 처자식을 에도에 억류해서 성대히 저택을 짓도록 하여, 스스로 그들을 사치로 이끌어 인간에게 유용한 사업을 태만하게 하고, 여전히 그 여력이 있음을 보면, 혹은 하녀라 하든, 혹은 문지기라 하든, 제반의 핑계를 만들어 바쁘게 뛰어다녀 지치게 하여, 명령하여 실행되지 않은 것이 없고, 명령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음은, 그 형국이 마치 사람의 수족을 꺾고 그와 힘을 겨루는 것과 같다. 편중의 정치에 있어서는 실제로 최고로 높고 최고로 훌륭한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도쿠가와(徳川) 일가의 행위를 생각하면 능란함을 다하여 신묘함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디 정부를 세우는 데는 중심에 권력을 쥐고 전체를 통제하는 균형이 없을 수 없다. 이 균형을 반드시 써야함은 오직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만국 모두 그러하다. 야만적이고 문명이 없던 옛 일본인에게서도 여전히 이 이치를 이해하기는커녕, 수천 수백 년 전 시대부터 전제정치의 취지만은 잊지 않은 것 아닌가? 하물며 문물이 점차 열린 후의 세상에 있어서, 누군가 정부의 권력을 빼앗아버리고 그런 후에 문명을 기대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정치적 권력을 반드시 써야함은 학교의 어린이도 아는 바이다. 그렇다할지라도, 서양 문명적인 각 나라에서는 이 권력의 발원이 다만 한 곳이 아니고, 행정명령은 한 가지 길로 나올지라도, 그 행정명령은 국내의 인심을 모은 것이거나, 설령 혹은 완전히 그것을 모을 수 없어도, 그 인심에 의하여 다소의 내용을 바꾸어, 다양한 의견을 조합하여 다만 그 나오는 곳을 하나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정부와 국민은 다만 주객(主客)일 뿐만 아니라, 혹은 이것을 적대(敵対)라고 일컫는 것도 가능하다. 즉 도쿠가와(徳川) 정부에서 제후의 재산을 낭비하게 한 것은, 적에게 이겨 배상금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민에게 조선(造船)을 금지하고, 다이묘(大名)에게 성() 토목공사를 중지시킨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국의 포대를 무너뜨린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동포의 소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세상의 사물에서는 첫걸음과 그 다음 걸음의 구분이 있는 것이어서, 초보 단계의 제 1보를 처리하는 데는, 이것으로 다음의 제 2보에 맞추려는 궁리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 걸음은 처음 걸음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건대 속담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하고 하고,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는 것이 있다. 고통을 고통으로 하여 피하고, 쓴 약을 쓴 약으로 하여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어서, 사물의 첫걸음에서만 정신을 쏟는 때는, 그것을 피하고 싫어하는 것도 매우 좋은 것 같아도, 다음의 두 번째 걸음인 안락함과 병의 치료에 착안하면, 이것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다. 저 권력의 편중도, 일시 국내의 인심을 유지하여 사물의 순서를 얻고자 하는 것에는 부득이한 추세여서, 결코 사람의 나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위 첫걸음의 처리이다. 게다가 그 편중의 교활함에 이르면, 일시적으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정도의 훌륭함에 이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만 어찌하랴, 두 번째 걸음으로 나아가고자하는 때에 이르러, 곧 전년의 폐해를 드러내어 첫걸음의 적절함을 얻을 수 없었던 징후를 볼 수 있다. 이것으로써 생각하면, 전제적인 정치는 더욱 교묘해지면 그 폐해가 더욱 심해지고, 그 치세(治世)가 오래되면 그 나머지 폐해가 더욱 깊어져, 영원한 유전적인 독소가 되어 쉽게 제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도쿠가와(徳川) 시대의 평화와 같은 것이 곧 한 가지 사례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세상의 형편을 변혁시켜, 교류의 두 번째 걸음에 나아가고자 하여도, 그 일이 극도로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도쿠가와(徳川)의 전제가 교활하여 그 평화가 오래갔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거친 말로써 이 사정을 평한 일이 있다. 이르건대, 전제의 정치를 미화하는 것은, 한가한 은둔자가 표주박을 애지중지하여 그 표주박을 닦는 것과 같다. 아침저녁으로 심신을 피곤하게 하여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둥근 표주박이어서, 다만 광택만 늘어났을 뿐. 시대의 추이가 바야흐로 변화하여 두 번째 걸음에 들어가려는 데 즈음하여, 여전히 구습을 사모하여 융통성을 모르고,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바의 물건을 구하여 뇌리에 상상의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실제로 찾을 수 있다고 하여 번민하는 것은, 표주박이 이미 깨진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것을 닦는 것과 같다. 어리석음도 역시 한층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하고. 이 거친 말은 혹시 들어맞는 일도 있으리라. 어떤 것도 모두 사물의 첫걸음에 근심하여 다음 걸음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첫걸음에 멈추어 다음 걸음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고, 첫걸음으로써 다음 걸음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저 첫걸음의 편중으로써 사물의 순서를 얻게 하였다 하여도, 사실은 순서를 얻은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교류를 고사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류를 고사시킨 것이므로, 산요(山陽)의 외사(外史)의 이른바 꼬리가 커서 다룰 수 없다(尾大不掉: 미대부도: 부하의 세력이 강하여 군주가 자유롭지 못하다), 도쿠가와(徳川)의 머리 쪽의 큰 편중도, 어느 쪽도 득실을 결정할 수 없다. 결국 외사(外史) 등도 다만 사건의 첫걸음에 착안하여 표주박을 닦는 생각이 있을 따름.

시험적으로 도쿠가와(徳川)의 치세(治世)를 보는 데, 백성은 이 전제 편중의 정부를 위로 받들고, 회고하여 세간의 형편을 살펴 사람의 품행이 어떠한지를 물으면, 일본국 가운데 수천만의 인류는 각 수천만 개의 상자 안에 갇혀, 또 수천만 개의 장벽에 차단된 것과 같아서, 전혀 움직일 수 없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그 신분을 구별하는 것은 물론, 무사 가족의 가운데서는 봉록을 세습하고 벼슬을 세습하여, 심지어는 유교 관리와 의사와 같은 것도 그 집안에 정해진 일이 있어 대대로 직업을 바꿀 수 없다. 농업에도 문벌이 있고, 상업과 공업에는 주식(株式)이 있어, 그 칸막이가 견고함이 쇠와 같고, 어떤 힘을 사용해도 그것을 깨뜨릴 수 없고, 사람마다 재간이 있어도 나아가 일을 할 수 있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다만 물러서서 몸을 지키는 방책을 구할 뿐. 수 백 년 오래되어, 그 습관 마침내 사람의 본성이 되어, 소위 과감한 정신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비유건대 가난한 무사와 가난한 백성이 무지하고 문맹이어서 다른 사람의 경멸을 받고, 매년 가난은 또 가난에 빠져, 그 고통은 인간 세상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스스로 고난을 거역하여 용감히 일을 하려는 용기가 없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고난에는, 잘 감당하여도, 스스로 고난을 예상하여 미래의 행복을 구하는 자가 없다. 가난한 무사와 가난한 백성뿐만 아니라, 학자도 역시 그러하고, 상인도 역시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평가하면, 일본국의 사람은, 보통 사람들에게 갖추어질 수 있는 일종의 운동력이 결여되어 정체되어 흐르지 않는 극한상황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도쿠가와(徳川)의 치세(治世) 250년간, 이 나라에 대업을 기획하는 자, 드믄 이유이다. 최근 번()의 폐지라는 한 가지 행동이 있었어도, 전국의 백성, 돌연히 그 품성을 바꿀 수 없었고,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경계는 지금 여전히 분명하여 조금도 그 내용을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뿌리를 찾으면 모두 권력의 편중으로 부터 오는 것이어서, 사물의 두 번째 걸음에 주의하지 않은 폐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폐해를 살펴서 편중이라는 병을 제거하지 않으면, 천하는 난세에서도 치세(治世)에서도, 문명은 결코 진보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이 병의 치료법은, 당장 현재 정치가의 직무이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은 본서의 취지가 아니고, 우리는 다만 그 병의 병세를 제시한 것일 뿐. 대체로 역시 서양 여러 나라의 국민에 있어서도, 빈부강약이 똑같지 않다. 그 부강한 자는 가난하고 약한 자를 억제하는 데, 각박하고 잔인한 일도 있으리라, 오만하고 무례한 일도 있으리라. 가난하고 약한 자도 역시 이름과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일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도 있으리라. 그 교류의 추악함은 결코 우리 일본인과 다른 것이 없고, 혹은 일본인보다 심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할지라도, 그 추악한 즈음에, 스스로 사람마다 안에 홀로 개인의 기상을 보존하여 정신의 순조로운 흐름을 막지 않는다. 그 각박함과 오만함은 다만 부강하기 때문이고, 특별히 의지하는 바가 있지 않다. 그 아첨과 사기는 다만 가난하고 약하기 때문이고, 달리 두려워하는 바가 있지 않다. 그런데, 부강과 빈약은 자연스러움이 아니고, 사람이 지닌 지혜의 힘으로써 이룰 수 있다. 지혜의 힘으로써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목적이 있으면, 가령 실제로 이룰 수 없어도,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의존하여 자립과 진취의 길로 향하여 갈 수 있다. 시험적으로 저 가난한 사람을 향하여 물으면,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할지라도, 마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 있으리라. 나는 빈곤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빈곤한 시절만 저 사람에게 억제당하는 것이다, 나의 순종은 빈곤과 함께 사라질 수 있고, 저 억제는 부귀와 함께 가버릴 것이라고. 대체로 정신의 순조로운 흐름이라 함은 이 정도의 기상을 가리켜 이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 일본인이, 역사 이래 세상에서 유행하는 편중의 법칙에 억매여,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그 빈부강약에 구애되지 않고, 지혜와 어리석음과 현명함과 불초(不肖)를 불문하고, 다만 그 지위 때문에 혹은 이것을 경멸하고 혹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추호의 활기도 보존하지 못하고, 자신의 칸막이 안에 고착하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편중되면 치세와 난세 모두 문명은 진보할 수 없다)

이 권력의 편중으로부터 해서 전국의 경제에 끼친 영향도 소홀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경제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뒤얽힌 것이어서, 이것을 양해하는 것은 매우 쉽지 않다. 각 영주국의 사태는 시대 상황에 의하여 한결같은 것이 아니므로, 서양 여러 나라의 경제론으로써 직접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은 본래 말할 것도 없다할지라도, 여기서 어떤 영주국에 있어서도 어떤 시기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법칙의 비결이 있다. 즉 그 제 1 법칙은 재화를 축적하고 또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적하는 것과 없애는 것의 두 가지 방식의 관계는, 최고로 긴밀하여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적은 곧 없애는 수단이고, 없애는 것은 곧 축적의 방편이다. 비유하면 봄의 시절에 종자를 뿌리는 것은 가을의 곡식을 축적하는 수단이어서, 의식주를 위하여 재산을 없애는 것은,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여 그 힘을 기르고, 또 의식주에 관한 물건을 축적하는 방편임과 같다. 이 축적과 없앰의 때에, 혹은 없애서 축적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화재와 수재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혹은 사람의 마음이 애호하여 사치를 좋아하여, 헛되이 재물을 허비하여 흔적 없는 것이 있다. 이것 역시 물과 불의 재난과 다르지 않다. 경제의 요점은 결코 소비를 금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것을 소비하여 이것을 없앤 후에, 얻은 바의 물건의 다소를 보고 그 소비의 득실을 판단할 뿐이다. 그 얻은 재물이, 소비보다 많으면, 이것을 이익이라고 칭하고, 소득과 소비가 서로 같으면 이것을 이익이 없다고 칭하고, 소득이 오히려 소비보다도 작거나, 혹은 전혀 소득이 없으면, 이것을 손실이라고 칭하고 또 전손(全損)이라고 칭한다. 경제가의 목표는, 항상 이 소득으로 하여금 손실보다 많도록 하여, 차츰 축적하고 또 소비하여 전체 국가의 부유함을 이루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축적과 소비라는 두 가지 조목은, 어느 것을 수단으로 하고 어느 것을 목적으로 할 수 없고, 어느 것을 앞이라 하고 어느 것을 뒤라고 할 수 없다. 전후완급의 구별이 없고, 어렵고 쉽고 가볍고 무거움의 차이가 없다. 바로 같은 형태의 일이어서, 바로 같은 형태의 마음으로써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축적하여 잘 이것을 없애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끝내 크게 축적할 수 없다. 소비하여 없애서 또 잘 축적하는 노력이 없는 자는, 끝내 크게 없애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부국의 토대는 다만 이 축적과 소비를 성대히 함에 있을 뿐이다. 그 성대한 국가를 일러서 이것을 부국이라고 칭한다. 이것에 의하여 생각하면, 국가재산의 축적과 소비는 전체 국가의 인심으로써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국가재산이라는 명칭이 있으면 국가마음이라는 명칭이 있음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국가재산은 국가마음으로써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부의 세입과 세출도 국가재산의 일부분이기에, 서양 여러 나라에서 정부의 회계를 국민과 논의하는 것도, 그 취지는 생각건대 여기에 근거하는 것이다. 2 법칙, 재산을 축적하여 또 이것을 소비하는 것에는, 그 재산에 상응할 수 있는 지혜의 힘과 그 일을 처리하는 관습이 없을 수 없다. 이른바 이재(理財)의 지혜, 이재(理財)의 습관이라는 것, 이것이다. 비유하면, 천금을 받은 아들, 그 집안을 망쳐먹고, 도박에서 이긴 자, 오래 그 재산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느 것도 모두 그 재산과 그 지혜의 힘 습관과 걸맞지 않은 것이다. 지혜의 힘이 없고 습관이 없는 자에게 과분한 재산을 주는 것은, 헛되이 그 재산을 잃을 뿐만 아니라, 어린애의 손에 예리한 칼을 맡기는 것과 같고, 오히려 그것으로써 몸을 해치고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화를 불러올 수 있다. 고금에 그 사례가 매우 많다.

위에 기술된 바의 두 가지 법칙이 역시 옳다면, 이것을 비추어 옛날부터 일본에서 시행된 경제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왕조시대의 일은 잠시 중지하고, 가쓰잔 하쿠유(葛山伯有) 선생의 전제연혁고(田制沿革考)에 이르기를,

 

겐페이(源平) 난에 이르러, 징세는 관아에 의하지 않는다. 국민이 받드는 곳을 알지 못한다. 하나의 마을 하나의 장원의 땅이, 관청을 받들고, 다이라() 가문을 받들고, 미나모토() 가문을 받든다. 간혹 역시 간사한 도둑 무리들 때문에 식량을 빼앗기고, 호소할 것이 없는 백성, 도탄에 빠진다. 끝내 미나모토() 공의 권력이 행사되어, 영주국에 슈고(守護: 지방관)를 두고, 장원에는 지토(地頭: 마름)을 세운다. 고쿠시(国司: 지방관)와 쇼시(荘司: 장원의 마름)는 여전히 존재하므로, 백성은 두 명의 군주를 받든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아소카가(足利) 씨의 영주국과 군()을 다스리는, 다른 정치적 시행령이 없고, 영주국과 군()과 마을과 장원 모두를 나누어 무사에게 주어, 조세는 그 주인의 지위에 맡겨, 별도로 501의 과세를 할당하고, 스스로 받들도록 한다. 비유건대 조세로 내는 쌀 50석을 낼 수 있는 땅은, 별도로 1석을 내도록 하여 수도로 운송하여, 쇼군의 주방재료로 할당하였던 것이다. 혹은 늘려서 20분의 1에 이르렀던 해도 있다. 슈고(守護: 지방관)와 지토(地頭: 마름)는 스스로 그 세출을 헤아려 세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두 가지 조세(쇼군과 슈고[守護: 지방관]와 지토[地頭: 마름]에게 내는 이중세)이다. 중략 또 단센(段銭: 조세의 일종), 무네베츠(棟別: 조세의 일종), 구라야쿠(倉役: 조세의 일종)는 시기를 골라 징수한다. 단센(段銭: 조세의 일종)이라 함은 논에 걸어서 돈을 내게 하는, 지금의 다카가카리(高掛: 부가세)와 같다. 무네베츠(棟別: 조세의 일종)라 함은 가구별로 할당해서 은()을 내도록 하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가기야쿠(鍵役) 등과 같다. 구라야쿠(倉役: 조세의 일종)라 함은 부유한 백성과 부유한 상인에만 걸어 할당하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부겐와리(分限割)라고 하는 것과 같다. 구라야쿠(倉役: 조세의 일종), 요시미츠(義満) 공의 시대에서는 4계절에 할당되었고, 요시노리(義教) 공의 시대에는 1년에 12회에 이르고, 요시마사(義政) 공에서는 11월에 아홉 번, 12월에는 여덟 번에 이르렀기에, 농민은 논과 집을 버리고 도망쳐 흩어져, 도부꾼은, 문을 닫고 재물을 교환하지 않은 것이 오닌기(応仁記)에 나오고, 운운. 또 이르기를, 도요토미(豊臣) 가문이 통일한 후, 분로크(文禄) 3년에 이르러, 법률이 있는 바는, 천하의 조세 3분의 2는 지토(地頭: 마름)가 징수하고, 3분의 1은 농민의 몫으로 할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운운. 또 이르기를, 여기에 국가 초기 도쿠가와[徳川]에 이르러, 승전국의 가혹함을 혐오해, 조세 31을 완화하여 46민의 법을 [四公六民: 농산물의 4할을 영주에게 바치고 6할을 농민이 갖는 조세법] 말한다백성의 극심한 고통을 해결하고, 운운.

 

위의 연혁고(沿革考)의 주장에 의거하면,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조세는 심히 가혹했다는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쿠가와(徳川) 초기에 이르러 조금 완화된 것도,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옛날의 가혹한 조세로 돌아갔던 것이다. 또 옛날부터 세상의 지식인라고 칭하는 사람의 주장에, 농민은 나라의 근본이라도, 공업과 상업의 두 백성은 겨우 세금을 내거나 내지 않아서 앉아서 배를 채우는 것, 이치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빈번히 공업과 상업을 나무란 것도, 충분히 사실을 밝히면, 상공인은 결코 편안한 사람들이 아니다. 드물게 부유한 상인과 큰 장사꾼은 편안하게 먹는 자도 있으리라할지라도, 이는 다만 그 재산과 자본에 의지하여 생계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에,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이 많은 논을 소유하고 앉아서 먹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아래의 가난한 상인에 이르러서는 가령 직접 공공 세금을 내지 못하는 것도, 그 생산의 어려움은 농민과 다르지 않다.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공업과 상업의 세금이 없다. 그 세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업으로 하는 자도 스스로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증가함이야 역시 반드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한계는 농업의 이익과 공업 및 상업의 이익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데 이르러 멈출 수 있다. 비유건대 46민의(四公六民: 농산물의 4할을 영주에게 바치고 6할을 농민이 갖는) 세금 땅을 경작함은, 그 이익, 본래 풍족함이 아니라할지라도, 평년이라면 여전히 처자를 부양하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상공인이 도회지에 거주하면서 세금이 없는 직업을 영위함은, 농민에 비하면 편리한 것 같이 보여도, 여전히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그런 원인이 무엇인가? 동료의 경쟁에 의한 것이다. 생각건대 전국의 상공업에는 한계가 있어, 약간의 인원이 있으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정해진 곳에, 직무를 늘리지 않으면서 인원만을 늘리면, 10명으로 할 수 있는 상업을 2, 30명의 손에 나누어, 100명에서 받을 수 있는 일당임금을 2, 300명에게 나누어주어, 3할의 중개료를 얻는 장사도 1할로 감소하고, 2관문(2000)을 받을 수 있는 임금도 500문으로 내려가고, 스스로 동료의 경쟁 사업으로써 스스로 그 이윤을 박하게 하여, 오히려 다른 사람의 편리를 위하여 농민도 역시 이 편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공업이라는 명칭은 세금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세금이 있는 농업과 다르지 않다. 혹은 상공업에 이익이 많은 경우가 있으면, 그 많은 이유는, 정부에서 지식인의 말을 이용하여, 다양한 장애물을 설치하여, 농민이 상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 그 사람 수의 비율이 여전히 낮기 때문에, 약간 독점적인 이익을 얻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사정에 의하여 생각하면, 농업과 상공업이 틀림없이 그 이해를 같이하여, 함께 국내의 유용한 사업을 하는 것이므로, 그 명분에서 세금이 있는 것과 세금이 없는 것의 차별이 있다할지라도, 누구도 한가한 백성이 아니다. 쌍방 모두 국가의 재산을 축적하는 종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다스리는 자 부류와 다스림을 받는 자 부류로 구별한 것을, 지금 여기서 경제상에서는 생산자와 비생산자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곧 농업과 공업과 상업 이하의 다스림을 받는 자라는 종족은 국가의 재산을 생산하는 자여서, 무사 이상의 다스리는 자의 종족은 이것을 생산하지 않는 자이다. 혹은 앞 문단의 문자를 이용하여, 하나를 축적하는 종족이라 하고, 하나를 없애는 종족이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두 종족의 관계를 보는 데, 그 노력과 안일과 손해와 이익의 형편, 본래 공평하지 않다할지라도, 인구가 많아 자본의 비율을 넘고, 서로 다투어 직업을 구하는 형세에 닥치면, 부자는 일탈하고 가난한 자는 일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오직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세계적으로 보편적이 폐해이어서, 어떻게라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깊이 나무랄 것이 못된다. 그리고 또한 무사 이상, 다스리는 자 부류의 사람을 비생산 또 소비의 종족이라고 지칭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에서 문무(文武)에 관한 시책을 시행하여 세상의 사물의 순서를 정리하려 함은, 경제를 돕는 근본이므로, 정부의 세출로써 일률적으로 이것을 무익한 비용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제에 있어서, 특히 불합리하여 특히 문명국과 다른 바는, 이 동일한 방식의 일인 국가재산의 축적과 소비를 처리하는 데, 동일한 방식의 마음으로써 하지 않는 한 가지 일에 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법에 있어서, 백성은 항상 재물을 축적하여, 비유건대 46민의 세법(四公六民稅法: 농산물의 4할을 영주에게 바치고 6할을 농민이 갖는 조세법)이라 하면, 6할로써 겨우 부모와 처자를 부양하고, 나머지 4할은 정부에 납부하여, 일단 자신의 손을 떠나면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그 어떤 쓰임에 이바지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남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부족함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축적함을 알되 그 소비되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도 역시 이미 이것을 자기 손에 수취한 때는. 그 오는 곳을 잊고, 그 어떤 수단에 의하여 생겼던 것을 알지 못하여, 흡사 이것을 하늘이 준 물건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소비하여 없애는 데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소비하여 없애는 것을 알되 축적하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의 제 1법칙에, 축적과 소비는 확실히 동일한 방식의 일이어서, 틀림없이 동일한 방식의 마음으로써 처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동일한 방식의 일을 하는 데 두 가지 방식의 마음으로써 하여, 이것을 비유하면 한 글자의 문자를 쓰는 데, 왼쪽 변과 오른쪽 방을 나누어 두 사람의 손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어떤 달필이어도 글자를 이룰 수 없음이야 분명하다. 이와 같이 위와 아래의 마음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각각 그 보는 바의 이익을 달리하여, 상호간에 서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 그 행동을 보고 서로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어찌 경제의 부조리를 낳지 않을 수 있는가? 소비해야 함에 소비하지 않고, 소비해서는 안 됨에 소비하여, 도저히 그 비율이 적절할 수 없는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대란의 한 가운데 은각사(銀閣寺)를 일으키고, 하나노고쇼(花御所)의 기와지붕 주옥(珠玉)에 금과 은을 치장하고 60만 양의 돈다발, 다카쿠라 어소(高倉御所)의 미닫이 한 칸에 2만 전을 소비하는 사치여서, 여러 영주국의 백성에게 단센(段銭: 조세의 일종), 무네베츠(棟別: 조세의 일종)를 독촉하여, 정부에 한 푼의 여유재산도 없음은, 위와 아래 함께 가난한 시절이다.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내란 후에 오사카 성을 짓고, 다음에 또 조선을 정벌하여, 밖은 전쟁의 쓸데없는 비용, 내부는 향연의 사치를 다하여, 아직 금과 병마가 비축되어 있음은, 아래는 가난하되 위는 번성하고 부유한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역대 가운데서 현명함이라는 이름이 있는 호조 야스토키(北条泰時) 이하 도키요리(時頼)와 사다토기(貞時) 등 여러 제후는, 그 스스로 받드는 것이 틀림없이 검소 검약하였던 것이리라. 아래로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이르러, 그 초기시대에는 현명한 제후와 현명한 재상을 배출하여. 정부의 체재는 하나도 흠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을 요시마사(義政)의 시대 등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된다할지라도, 민간에 부유함을 가져와 일을 기획한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호조(北条)에 이르러 도쿠가와(徳川)의 유물로 하여금 오늘날에 전해진 것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마쿠라(鎌倉)의 고산(五山)이고, 에도 및 나고야의 성이고, 닛코산(日光山)이고, 도에이산(東叡山)이고, 조쇼지(増上寺)이고, 어느 것도 성대하지 않은 것이 없어도, 오직 의심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일본에서 그런 성대한 건축공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한 가지 사건이다. 과연 전국의 경제의 비율이 합당한 것인지, 우리는 결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지금 국내에 있는 성곽은 물론, 신사(神社)와 절의 고적이라 하여, 혹은 큰 불상과 큰 종, 혹은 대가람 등의 장대한 것이 있음은, 대개 모두 신도(神道)와 불교가 성행한 징표가 아니고, 독재군주가 성행함을 증명함에 충분할 따름. 드물게 수도와 물길 등의 대 공사를 일으킨 것도 있어도, 결코 백성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시대의 영주와 재상과 관리의 기호에 따라, 소위 백성의 질병을 물어 그 편리함을 헤아렸던 것 뿐. 본래 고대 무지한 세상의 한 가운데이어서, 정부에서 홀로 일을 함은 필연적인 추세여서, 누가 이것을 의심하는 자 있겠는가? 지금부터 그 행동을 시비하는 이유가 전혀 있을 수 없다할지라도, 국가 재산의 축적과 소비는 그 길을 달리하여, 경제상에 한없이 부조리를 낳고,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재상의 시대에서도 폭군과 오리(汚吏)의 시대에서, 모두 이 폐해를 피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일이므로, 후세에 적어도 여기에 분별력을 지닌 자가 있으면, 다시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재상은 반드시 유용한 일에 재산을 써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유용이라 함은 군주와 재상의 의지로써 결정하는 바의 유용이므로, 사람마다 기호에 따라 무()를 유용하다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을 유용하다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혹은 진실로 유용한 일을 유용하다고 하는 일도 있을 것이라 할지라도, 또는 무용한 일을 유용하다고 하는 일도 있으리라.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시대에, 정부로부터 명령하여 일절 채무 약속을 깨고 이것을 덕정(徳政)이라고 지칭한 일이 있다. 도쿠가와(徳川)의 시대에도 이것과 비슷한 사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것들도 정부로부터 덕()이라고 말하면 덕()인 것 같다. 아무튼 국내의 축적하는 자는 소비하는 자의 조치에 관하여 조금도 말참견을 하지 않은 풍습이므로, 소비하는 자는 세출을 헤아려 세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세출과 세입 모두 한계가 없고, 다만 하층민의 생계를 살펴서 종전의 형편에 멈추면, 이것을 최고의 인정(仁政)이라 하여 달리 되돌아보는 바가 없다. 매년 동일한 방식의 일을 반복하여, 이곳에서 축적하는 것은 저 곳에서 소비하고, 한 글자의 문자를 두 사람에게서 써서, 그로써 수백 년의 오늘에 이르고, 되돌아보아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여 전국 경제의 유래를 보면, 그 진보가 느린 것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하는 데, 도쿠가와(徳川)의 치세(治世) 250, 국내에 조금의 병기를 사용한 일이 없음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살면, 일본인이 어리석다할지라도, 공예의 길이 피어나지 않았다할지라도, 가령 그 축적은 서행했다할지라도, 250년 동안에는 경제적으로는 장족의 진보를 할 수 있음이 당연한데,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은 왜인가? 오직 이것은 쇼군과 여러 번주(藩主)의 부덕(不德)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만약 혹시 이것을 영주와 재상과 관리의 부덕(不德)과 무재주로 인하여 온 재앙으로 하면, 그 부덕(不德)과 무재주는 그 사람들의 죄가 아니고, 그 지위에 있으면 멈출 수 없는 부덕(不德)과 무재주이지 않을 수 없는 추세로 되어, 그 추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의 한 방향에서 논하면,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재상도 의외로 의지할 수 없고, 천하태평도 의외로 효과가 적은 것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에, 전쟁은 실로 두려워해야 하고 혐오해야 하는 재난이라도, 그 나라의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곳은, 이것을 사람 몸에 비유함에 칼로 벤 상처와 같고, 한 때는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지라도, 생명의 기본적인 부분과 관계가 없으면, 그 치유는 뜻밖에 빠른 것이고, 다만 경제에 관하여 각별히 두려워해야 함은, 칼로 벤 상처가 아니고 저 폐결핵과 같이, 달마다 날마다 차츰 쇠약한 병에 있다고. 이 주장에 의하여 생각하면, 우리 일본의 경제에 있어서도, 본래 권력의 편중으로부터 축적하는 자와 소비하는 자의 두 부류로 나누어, 쌍방 간에 기맥을 통하지 않게 하여, 달마다 날마다 쇠약하지 않으면, 해마다 달마다 동일한 형편에 머물러, 혹은 수백 년간에 조금 진보한 것도 도저히 성대하고 활발한 지경에 들어갈 수 없어서, 도쿠가와(徳川) 씨의 250년의 치세(治世)에서도 두드러진 진보를 보지 못했음은, 소위 경제의 폐결핵이라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일본 학자들의 의견에, 정부의 간죠부교[勘定奉行: 에도막부의 직명으로 재정을 맡음]와 군부교[郡奉行: 에도막부의 지방행정관]는 과세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그 취지는, 간죠부교[勘定奉行: 에도막부의 직명으로 재정을 맡음]에게 세금징수권을 맡기면 스스로 가혹한 징수에 빠지기 때문에, 백성에게 가까운 군부교[郡奉行: 에도막부의 지방행정관]의 권한으로써 이것을 균형 잡으려는 기대이리라. 본래 한 정부의 같은 구멍 안에 있는 관리에게 과세를 나누는 것도, 사실은 이익이 없다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의견의 뜻을 미루어 생각하면, 소비하는 사람의 한 손에 재정권을 부여하는 해로움은, 옛날 사람도 암암리에 알지 못한 것이 아닌 것이다.

경제의 제 2법칙에는, 재산을 축적하여 또 이것을 소비하는 데는, 그 재산에 상응할 수 있는 지혜의 힘과 그 일을 처리하는 관습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 대체로 이재(理財)의 요령은, 활발하고 과감한 행동과 검소하고 열성적인 힘에 있는 것이어서, 이 두 가지가 그 적당함을 얻어, 상호 서로 억제하고 상호 서로 평형을 이루어, 처음 축적과 소비의 성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한편에 편중되어, 과감한 행동이 없고 검소를 오로지하면, 그 폐해야 탐욕과 인색에 빠지고, 검소의 취지를 잊고 과감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면, 그 폐해야 낭비와 남용으로 되어, 어느 것도 이재(理財)의 근본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 문단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국의 백성을 축적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의 두 종족으로 구분하여, 그 경계가 판연할 때는, 그 종족 전체의 품행에 있어서 반드시 한편에 편중되어, ()의 종족에서는 검소와 열성의 요소를 지닌 것도, 과감한 행동을 잃고 인색이라는 폐단에 빠지지 않을 수 없고, ()의 종족에서는 활발함과 과감함의 요소를 지닌 것도, 검소의 취지를 읽고 낭비의 폐단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은, 그 교육이 보편적이 아니라할지라도, 천품이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이재(理財)라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 특별히 서투르다고 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인간 교류의 추세에 의하여 나누어서는 안 되는 직업을 나누어 각 종족의 습관을 이루어, 마침내 그 품행을 특화하여 서투름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 품행의 소질은 결코 악성이 아니고, 적절하게 이것을 조화시키면 과감함과 활발함, 검소와 열성이라 칭하는 것을 생성하여, 이재(理財)에 둘도 없는 용도를 이룰 수 있음이 당연하여도, 그 용도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낭비와 남용, 탐욕과 인색의 형태로 변했던 것은, 틀림없이 요소의 악성이 아니라, 조화의 적절함을 잃었던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산소와 질소를 조화롭게 하면 공기라는 명칭의 물체를 생성하여, 동식물의 생기에 빠질 수 없는 효과가 되기 마련이어도, 이 두 가지 원소를 분석하여 각각 달리할 때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물의 목숨을 해치치는 것과 같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이재(理財)의 상황을 보는 데, 돈을 써서 일을 하는 자는 항상 무사 이상의 다스리는 자의 부류이다. 정부에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문무(文武)에 관한 일을 기획함은 물론, 대체로 세간에서 글을 읽고, 무예를 강의하고, 혹은 기예를 연마하고, 혹은 풍류를 즐기는 등, 그 형편은 유용함에서도 무용함에서도, 한 몸의 의복과 식량을 도모하는 외에 여유를 만들어, 인생의 조금 고상한 부분에 마음을 쓰는 자는, 반드시 무사 이상에 한하여, 그 품행도 스스로 영민하고 활발하여, 무리하게 일을 하는 기력이 부족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 문명의 근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다만 어찌하랴, 이재(理財)라는 한 가지 사항에 이르러서는 수천 수백 년의 추세에 따라, 나감을 알되 들어옴을 모르고, 흩어짐을 알되 축적함을 모르고, 있는 물건을 소비함을 알되, 없는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모르는 자들이므로, 그 즈음에 스스로 낭비와 남용의 폐단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인습이 오래되어, 마침내 일종의 풍속을 이루어, 이재(理財)를 논의하는 것은 군자의 일이 아니라 하여, 이것을 알지 못함을 수치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아는 것을 수치로 삼아, 군자의 최고 상류라는 자와, 이재(理財)에 최고로 서투른 자는 두 글자가 같은 의미임에 이르렀다. 우회함도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에서 농부와 상인 이하의 다스림을 받는 자의 종족을 보면, 상류의 종족에 대하여 분명히 경계선을 정하여, 흡사 별도로 한 마당의 하류 세계를 열어, 인정과 풍속을 특화하여, 다른 사람의 억제를 당하고, 다른 사람의 경멸을 받아, 말하는 데 호칭이 다르고, 앉는 데 좌석을 차별하여, 의복에서도 제한이 있고, 법률에서도 차별이 있고, 심지어는 생명과 관련된 권한과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데 이르렀다. 도쿠가와(徳川)의 법률서에,

 

아시가루(足軽: 하급무사) 신분으로, 하찮은 상인과 농부의 신분으로서 법에 어긋나는 욕설 등 부주의한 처사 때문에 부득이 칼로 베어 죽인 자는 심문을 받고 틀림없다면 죄가 되지 않는 것 (법률조항이므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음: 역자)

 

이라고 한다. 이 법에 의거하면, 농부와 상인은 항상 수천만 명의 적과 접촉하는 것과 같고, 그 무사함은 다행히 피하는 것 뿐. 이미 생명을 안심할 수 없고, 어떻게 다른 것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있으랴? 염치와 공명심은 몸을 바쳐 소진해 끝장이 났고, 또 학문과 기예 등에 뜻을 둘 수 있는 여유를 남기지 않고, 다만 위의 명령에 따라 정부의 비용을 제공할 뿐이어서, 심신 모두 속박을 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할지라도 인류의 천성에 있어서는, 마음의 작용은 어떤 방식의 수단을 써도 완전히 이것을 바짝 묶어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도 틈을 구하여 간신히 빠지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농부와 상인 등의 신분도 진퇴가 본디 부자유스럽다하여도, 사재를 축적하여 재산을 운용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그 마음의 작동을 신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서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적다. 이것 때문인가 조금 기력이 있는 자는 축재에 마음을 다하여, 천신만고를 꺼리지 않고 검소와 열성으로 왕왕 거대한 재산을 이룩하는 자가 없지 않다. 그런데 본디 이 무리는, 다만 부유함을 원하여 부유함을 이룬 자여서, 달리 뜻을 둔 바가 있지 않고, 부유함을 구함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어서, 분명히 이것은 생애 둘도 없는 목적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는, 부유함 외에 귀중할 것이 없고, 부유함을 버리고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학술 이상 사람마음의 고상한 부분에 속하는 바의 일은, 이것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치의 한 항목으로 하여 이것을 금지하고, 상류 사람의 행동을 보고 은밀히 그 직접적으로 필요 없음을 측은하게 여기는 미소를 짓기에 이르렀다. 사태의 추이에 있어서는 역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도, 그 품행이 비열하여 과감한 행동이 없음은, 진실로 천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험적으로 일본 안에서 부호라고 칭하는 집안의 유래와 그 흥망의 내용을 탐색하면, 분명하게 사건의 실제 증거를 볼 수 있다. 옛날부터 대상인과 부농의 집안을 일으킨 자는, 결코 학자와 군자의 부류가 아니고, 10099는 배우지 못하고 기술도 없는 시골사람이어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다만 인색이라는 한 방식에 의하여 축적한 것뿐. 또 그 집안을 망해먹는 자를 보면, 기력이 결핍되어 축적하는 방식을 게을리 하던지, 혹은 주색과 방탕이라는 육체의 욕망을 자행하여 돈을 잃는 자에 불과하다. 저 무사의 부류가 표연하여 재산을 다스리지 않고, 그 좋아하는 곳에 빠져 감히 그 의지를 굽히지 않고, 감히 그 의지하는 바의 일을 하여 가난을 염려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본래 육체적 욕망으로써 집안을 파괴하는 것도, 표연하여 집안을 파괴하는 것도, 그 집안을 파괴하는 사실은 같을지라도, 마음이 향하는 곳을 논하면, 상류의 사람에게는 여전히 지혜와 덕행의 작용에 여유를 남기고, 하류의 사람에게는 다만 돈을 좋아하고 육체적 욕망을 받드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는 것 같다. 그 품행의 차이가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위의 형편으로써 다스림을 받는 자 부류의 검소함과 열성은 그 형태를 고쳐 탐욕과 인색이 되고, 다스리는 자 부류의 활발함과 과감한 행동은 그 성격을 변화시켜 낭비와 남용이 되어, 모두 이재(理財)의 쓰임이 맞지 않고, 그로써 오늘날의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대체로 일본을 가난하다고할지라도, 천연자원이 부족하지 않아서, 하물며 농사라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세계만방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많음이야. 결코 이것을 천연자원 빈국이라고 할 수 없다. 혹은 세법이 가혹해서인가, 세법이 가혹하다고할지라도, 그 세금을 모아 바다에 던지는 것이 아니므로, 국내에 있으면서 자본의 일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의 상황에서 전국이 가난함은 왜인가? 틀림없이 재원이 부족함이 아니고, 그 재원을 다루는 지혜의 힘이 부족한 것이다. 그 지혜의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그 지혜의 힘을 둘로 나누어 위와 아래 각각 일부분을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개괄하여 말하면, 일본의 재원은 역사시작의 처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그것에 상응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이 지혜의 힘을 둘로 나눈 것을 조화롭게 하나로 만들어, 실제의 쓰임에 맞게 하는 것은 경제의 급선무이어도, 수천 수백 년의 관습을 이루었던 것이므로, 일조일석의 운동으로써 개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이르러 조금 그 운동의 시작을 보는 것 같아도, 위와 아래의 종족, 서로 그 장점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단점을 배우는 자가 많다. 이것 역시 어떻게 할 수 없는 추세여서, 반드시 그 사람의 죄는 아니다. 드넓은 천하의 대세는 먼 옛날부터 흘러 오늘의 시대에 이르러, 억조의 인류를 압도하여 그 지향하는 바로 기운 것이므로, 지금에 있어서 돌연히 이것에 저항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巻之五

 

第九章 日本文明由来

 

 前章へる西洋文明其人間交際諸説並立して相近づきして其間自由したるものなりへば金銀銅鉄等諸元素鎔解して一塊又銅鉄一種混和物じてから其平均相維持して全体つものゝ我日本有様すればなり日本文明其人間交際より元素なかるらず立君なり貴族なり宗教なり人民なり皆古より我国して各一種族各自家なきにざれども其諸説並立するを相近づくをしてるをへば金銀銅鉄諸品はあれども鎔解して一塊すことはざるがしてりたるがきものありとども其実諸品割合平均してじたるに片重片軽をしてその本色はすをせしめざるものなりかの金銀貨幣るに十分一混合するも其本色はすをずして其造たるものは純然たる金銀貨幣なるが事物偏重文明自由自由してきものに権義利益せしめ意見ふせしめ彼我平均するのみ自由不自由ずとふもなり人間交際政府人民学者官吏其地位如何はず唯権力するあらば仮令智力にても腕力にても其力るものにては制限なかるらず人類する権力して純精なるをべからず其中天然悪弊胚胎して卑怯なるがために過激なるがためにすること天下古今実験偏重有権者常からめざるらず我国文明西洋文明比較して其趣なる此権力偏重

 日本にて権力偏重なるはねく其人間交際浸潤してらざるなし本書第二章一国人民気風へることあり此権力偏重かの気風一箇条なり学者権力ずるには唯政府人民とのみを相対して政府専制人民跋扈者多しとどもよく事実にして吟味すれば此偏重交際至大なるものより至小なるものに大小はず公私はらず交際あれば其権力偏重ならざるはなし其趣形容してへば日本国中千百天秤其天秤大となくとなく皆一方して平均ふが又三角四面結晶物千分万分細粉すも其一分子尚三角四面本色はずこの砕粉して一小片又合して一塊すも其物依然として三角四面つが権力偏重一般ねくして微細緻密にまで通達する有様しとども学者注意せざるはぞや唯政府人民との交際にしてなるものにてしく耳目るゝが其議論目的とするものきのみ今実際偏重かん男女交際あれば男女権力偏重あり親子交際あれば親子権力偏重あり兄弟交際にもあり長幼交際にもあり家内でゝ世間るも亦然らざるはなし師弟主従貧富貴賎新参故参本家末家れも皆其間権力偏重せり尚一歩めて人間種族したるのものにれば封建大藩小藩あり本山末寺あり本社末社あり人間交際あれば其権力偏重あらざるはなし又政府にても官吏地位階級此偏重あること政府吏人平民してればこそあるにたれども此吏人政府中上級するときは其抑圧ること平民吏人するよりも尚甚しきものありへば地方下役等名主共呼出してずるときは其傲慢厭きがくなれども此下役長官する有様れば亦愍笑へたり名主下役ふて無理らるゝ模様なれども小前無理有様れば亦悪せられせられ強圧抑制循環窮極あることなし亦奇観より人間貴賎貧富智愚強弱其有様コンヂションにて幾段際限あるらず此段階するも交際あるらずとども此有様なるに又其権義ライトをもにするもの権力偏重るなり

 今世間事物皮相すれば有権者唯政府のみのくなれどもよく政府何物たるを吟味して其然由縁めなば議論なるものに元来政府国人りてなり此場所君主官吏るのみして此君主官吏れながら当路君主官吏仮令封建時代世位せいゐ世官せいかんあるも実際くは偶然ばれたる人物なり此人物一旦政府地位ればとて平生心事るのなし其或政府にすることあるは平生本色はしたるものゝみ其証拠には封建時代にても賎民政府要路ひたることなきにずとども其人物所業ればしてなるものなし唯従前しくにするよりならず其巧擅権せんけんにてしてにするにざればして退縮せしむるものなり此人物をして民間らしめなば民間此事らばにてらばにて到底我国民一般かるらざるの流行病なれば此人脱却することあるらず唯政府れば其事業盛大にしてよく世間耳目るゝを口吻にもることなり政府擅権擅権者集会せしむるのなり擅権者して平生本色はしはしむるに適当したる場所なりらずして擅権政府りとせば全国人民唯在官のみ此流行病じて前後して無病なる不都合なりとにするは有権者通弊なれば政府すれば其権のためにから眩惑してこれをぶのもあらん又政府一家成行にて擅権ざればらざるのもあらんとども此一般人民にして平生教育習慣てなきのものを唯政府地位ればとてすの々あるらざるなり

 議論へばにして其力偏重なるはして政府のみに全国人民気風はざるを此気風西洋諸国我日本とを区別するにしき分界なれば今爰其源因めざるらずとども其事甚西人著書亜細亜洲擅権はるゝ源因其気候温暖にして土地肥沃なるに人口多きに地理山海険阻洪大なるに妄想恐怖念甚しきりとのもあれども此説我日本有様不審きやらず仮令不審ずるも其源因悉皆天然なれば人力如何ともすらず余輩唯事成行擅権はるゝ次第にせんとするのみ其次第既ならばこれにずるの処置もある我日本国開闢ては世界中諸国若干人民一群其一群より腕力最智力最しきありて支配する地方より征服して其酋長たりしことならん歴史れば神武天皇西よりしたりとあり一群人民支配するはより一人にてよくきことにざれば其酋長附属してなかるらず其人物酋長親戚朋友よりから政府体裁したることならん政府体裁せば此政府人民なり人民其治なりてか治者被治者との区別治者なりなり又内なり被治者なりなり又外なり上下主客内外判然として此二者日本人間交際しき分界我文明二元素きものなり往古より今日るまで交際種族なからずとども結局其至此二元素独立して自家本分つものなし。(治者被治者相分

 るは其事固よりからず此治者腕力智力又多少なかるらず身心ありこれに富有るときはするのべし治者有権者ならざるを王室此有権者其力めて国内たざるはなししてさゞるはなし且被治者なる人民王室由来久しきのこれに服従神后時代より屢外征もあり国内威福はれて内顧なかりしことして爾後人文漸養蚕造船織縫耕作器械医儒仏法其他文明諸件朝鮮より自国にて発明人間生々の有様次第盛大ぶとども此文明諸件施行するの悉皆政府一手人民唯其指揮ふのみ加之全国土地人民身体までも王室私有ざるはなし此有様れば被治物治者奴隷ならず後世るまでも御国御田地御百姓等あり此御政府尊敬したるにて日本国中田地人民身体皆政府私有品なり仁徳天皇民家炊煙るを朕既めりとひしも必竟愛人本心よりむは猶我富むがしとの趣意にて如何にも虚心平気なる仁君しとども天下一家視做して私有するの気象此勢にて天下王室其力一方して王代れり権力偏重へる至大より至細人間交際千万てば千万段偏重ありめてせば百段偏重あり今王室人民との二段てば偏重亦此間じて王室一方したるものなり。(国力王室

 源平るにんで天下武家王室権力平均人間交際勢一変きにたれどもしてらず源平なり王室なり皆是治者中部分にて国権武家したるは治者中此部分より彼部分したるのみ治者被治者との関係依然として上下主客旧時なることなしなることなきのみならずさき光仁天皇宝亀年中天下だしてとを百姓武力ある兵役其羸弱るいじやくなるをしてかしめたりとあり此令趣意へば人民武力小弱保護其貧にしてめて武人することなれば貧弱益貧弱富強益富強治者被治者との分界益判然として権力偏重益甚しからざるを諸書ずるに頼朝六十余州総追捕使りて毎国守護荘園地頭従前国司荘司ぎしより以来諸国健児にて筋目もありをも守護地頭以下御家人して守護地頭支配悉皆幕府りて百日交代にて鎌倉宿衛するのもありと北条時代にも大抵同有様にて国中処として武人あらざるはなし承久泰時十八騎にて鎌倉打立たるは五月二十二日のことなるが同二十五日まで三日東国兵尽りて都合十九万騎とありれにれば諸国武人なる平生より出陣用意はしくより農業るのあるらず小民ひしこと兵農分界愈明りて人口増加するに武人次第したることならん頼朝には関東伺候武家諸国守護五年交代なりしが其後いつとなく譜代世禄北条亡びて足利ては此守護なる相併呑土豪はれ家来はれ封建したるなり王代以来有様してへば日本武人国内処在布散して一人一人王室したるもの鎌倉時代るまでにして幾個小体大小名あり足利りては又合してなるものをしたれども其体するを応仁以後乱世にて武人なるなり武人世界には合離集散あり進退栄枯あれども人民世界には何等運動あるをかず唯農業めて武人世界するのみ人民れば王室武家区別あるらず武人世界治乱興敗あるは人民のためには天気時候変化あるにならず唯黙して其成行るのみ。《武家興神政府惑溺一掃したるの利益第二章三十五葉岩波文庫旧版三三頁じたり

 新井白石天下大勢九変して武家武家世又五変して徳川ぶと其外諸家大同小異なれども此説唯日本にて政権新陳交代せし模様幾変ひしのみのことなりてこれまで日本はるゝ歴史唯王室系図詮索するもの君相有司得失ずるもの戦争勝敗して講釈師軍談するもの大抵是等箇条よりならず政府関係せざるものあれば仏者虚誕妄説のみ亦見るにらずしてへば日本国歴史はなくして日本政府歴史あるのみ学者不注意にして一大欠典新井先生読史余論なども此類歴史にて其書中天下勢変とあれども天下大勢じたるに天下王代まりて治者被治者との二元素区別兵農るゝにこの分界にして今日るまで一度びもじたることなし王代藤原氏にし上皇くことあるも唯王室内にてより形勢関係あるらず平家亡びて源氏起鎌倉政府くも北条陪臣にて国命るも足利南朝してせらるゝも織田豊臣徳川各日本国中押領してしたれどもこれをするに唯巧拙あるのみ天下形勢依然としてならず北条足利にてびしことは徳川ひしことは其喜憂するの甲乙なることなしへば北条足利政府にて五穀豊熟人民柔順ぶの徳川政府北条足利政府にてるゝ謀反人種類徳川時代にても其種類にせず欧洲諸国有様ればなるあり其国民宗旨新説漸はるれば政府これに処置さゞるらず昔日封建貴族をのみれたりしが世間商工次第繁昌して中等人民権力するあるにればこれをれざるらず欧羅巴各国にては其国勢ずるに政府亦其趣ぜざるらずとども我日本らず宗旨学問商売工業悉皆政府籠絡したるものなれば其変動るにらずこれをるゝにらず政府せざるものあればじてなり唯一心配同類よりありて政府新陳交代せんことをるゝのみ。《同類よりとは治者より建国二千五百有余年政府たるものは同一様仕事繰返其状恰一版復読するが外題芝居幾度ふすが新井氏天下大勢九変又五変ひしは此芝居九度ふし又五度ふしたることのみ西人著書亜細亜洲諸国にも変革騒乱あるは欧羅巴ならずとども其変乱のために文明めたることなしとのありれなきにざるなり。(政府新旧交代すれども国勢ずることなし

 政府として変革交代することあれども国勢らず其権力常一方して治者被治者との高大なる隔壁其通路つが有形腕力無形智徳学問宗教皆治者みし其党与互相依頼して各権力ばし栄辱廉恥上流地位めて下民制御治乱興廃文明進退悉皆治者にして被治者せずとして路傍見聞するがへば古来日本戦争あり甲越合戦上国関東との取合其名けば両国互敵対してふがくなれども其実してらず此戦唯両国武士武士とのにして人民することなし元来敵国とは全国人民一般相敵することにて仮令から武器戦場かざるも我国勝利敵国不幸些末のことにるまでも敵味方趣意れざるこそ敵対両国けれ人民報国心此辺るものなりるに我国戦争ては古来未其例戦争武士武士とのにして人民人民とのとのにしてとの両家武士兵端くときは人民之傍観してにても味方にても唯強きものをるゝのみ戦争双方旗色次第にて昨日味方輜重しちよう運送せし今日兵糧勝敗決して戦罷むときは人民唯騒動まりて地頭交代するをるのみ其勝利とするに又其敗北とするに新地頭政令寛にして年貢米ずることもあらばしてばんのみ其一例はん後北条関八州なり一旦豊臣徳川敵対して敗滅滅後直八州したる讐敵なる徳川なり徳川家康如何なる人傑なればとて一時八州衆敵するをんや八州人民にも味方にも北条豊臣との戦争見物したるものなり徳川関東りし残党鎮撫征討したりとは唯北条家遺臣ちしのみのことにて百姓町人等始末ては其頭即時安堵したることなり是等れば古来枚挙あらず今日ても其趣じたるを日本古来未さずとふもなり今若此全国外国敵対するあらば日本国中人民にて仮令兵器へて出陣せざるものことをする戦者此戦者所謂見物人とを比較してれかかるきや其多少日本には政府ありて国民ションなしとひしもなりより欧羅巴諸国にても戦争他国土地兼併することこれありとどもこれをすることからず非常兵力抑圧するしくば其土地人民約束して幾分権利附与するにざれば我版図るゝことはずと東西人民其気風にすること。(日本人民国事せず

 民間才徳するあれば地位此才徳るに方便なきがためから其地位して上流仲間らざるを昨日平民今日将相りしこと古今其例少なからず一見すれば上下隔壁もなきがくなれども此人物唯其身してれたるのみへば土地卑湿けて高燥りたるが一身のためには都合宜しかるしとども其湿地から高燥地位りたるに湿地湿地にて目今己めたる高燥すれば其隔壁尚存して上下しもずることなし猶在昔尾張木下藤吉太閤りたれども尾張人民百姓にして其有様めざるがきものなり藤吉唯百姓仲間脱走して武家みしたるなり其立身藤吉一人立身なり百姓一般地位くしたるにより其時なればよりらずずるも無益なれども藤吉をして其昔欧羅巴独立市邑らしめなば市民此英雄挙動ばざることなる又今藤吉じて藤吉さしめ独立市民蘇生せしめて其事業せしめなば此市民藤吉して薄情なる人物ふならん墳墓みず仲間百姓見捨武家依頼して一身名利我党ずとてることならん到底藤吉此市民とは其説元素にするものなれば其挙動粗密寛猛相似たるも時勢らず世態はらずよりるまで相容るゝことをざるものなり欧羅巴にて千二三百年代はれたる独立市民きは其所業固より乱暴過激固陋蠢愚なるものありとどもして依頼するに其本業には商売其商売保護するために兵備けてから其地位くしたるなり近世英仏其他々に中等人民次第して又其品行くし議院等論説しきものあるも唯政府ふて小民圧制するのらんとするにから自分地位ふして他人圧制圧制せんがために勉強するの趣意のみ其地位とは地方てはロカルインテレストあり職業てはカラッスインテレストあり各其人住居する地方其営業にする交情各自家主張自家利益保護がためには一命をもなきに此趣れば古来日本人自分地位みずして便利依頼して権力他人依頼せざればからへんとするがきは鄙劣しきものなり西洋独立人民すれば雲壌相違はざるらず昔支那にて項羽始皇行列しと高祖大丈夫当くなるしとひたることあり今此二人心中するに自分地位らんがために暴政忿るに其暴政好機会して野心ふし秦皇はんとするにぎず其暴虐秦くならざるもしくにして人望ふのみ其擅権下民するの一事ては秦皇漢祖区別あることなし我国にても古来英雄豪傑する者少なからずとども其事跡れば項羽ざれば漢祖なり開闢より今日るまで全日本国中独立市民等夢中妄想したることもあるらず。(国民其地位んぜず

 宗教人心内部くものにて自由最独立して制御けず依頼せずしてなるに我日本てはらず元来我国宗旨神仏両道なりとあれども神道宗旨さず仮令往古其説あるも仏法籠絡せられて数百年間本色はすを近日しく神道くがくなれども政府変革王室余光々たる運動さんとするのみにて唯一時偶然なれば余輩所見にてはりたる宗旨らず古来日本はれて文明一局きたる宗旨唯一仏法あるのみるに此仏法初生より治者其力依頼せざるなし古来名僧智識する入唐して自国新教教化るものしとども大概皆天子将軍等眷顧徼倖げうかう其余光りてめんとするのみしきは政府より爵位けてとするにれり僧侶僧正僧都等せらるゝの延喜式僧都以上三位ずと後醍醐天皇建武二年宣旨には大僧正二位大納言僧正二位中納言権僧正三位参議ずとあり釈家官班記)。此趣れば当時名僧智識天朝官位其位朝廷群臣上下一席内外栄辱したることならんがため日本宗旨には古今其宗教はあれども自立宗政なるものあるをかず尚其実証んとせば今日にても国中有名寺院其由来記聖武天皇天平年中日本毎国国分寺桓武天皇延暦七年には伝教大師比叡山根本中堂てゝ王城鬼門嵯峨天皇弘仁七年には弘法大師高野山より印符はりて其大伽籃建立したり他南都諸山京都諸寺中古には鎌倉五山近世には上野東叡山増上寺等れも皆政府らざるものなし其他歴代天子自から親王たる白河天皇八男ありて六人たりしと是亦宗教たる源因なり一向宗自立きものなれどもこのかれず足利大永元年実如上人天子即位其賞として永世准門跡とて法親王ずるのはりたることあり王室衰微貧困ふて有余するは僧侶身分としてのことなれども其実らず西三条入道媒酌官位たるものなり鄙劣古来日本国中大寺院するものは天子皇后勅願所ざれば将軍執権建立なりして御用はざるを其寺由来けば御朱印何百石住職格式々とて其状恰々の士族自分家柄るにならず一聞以厭悪えんを門前には下馬札れば儻勢召連けしめ其威力封建大名よりもなるものありして其威力れば宗教威力唯政府威力借用したるものにして結局俗権中一部分たるにぎず仏教盛なりとども其教悉皆政権摂取せられて十方世界らすものは仏教光明ずして政権威光なるが寺院自立宗政なきも亦怪むにらず其教帰依する信教本心なきも亦驚くにらず其一証れば古来日本にて宗旨のみの戦争びしことのなるをみても亦以信教者懦弱其教信心帰依はれたる無智無学田夫野嫗れてくものあるにぎず此有様れば仏法唯是文盲世界一器械にして最愚最陋人心緩和するの方便たるのみ其他には何等功用もなく又何等勢力もあることなし其勢力なきのしきは徳川時代破戒とて世俗すに唯宗門上あれば政府より市中して流刑するのありきは僧侶政府奴隷ふもなり近日ては政府より全国僧侶肉食妻帯すのあり此令れば従来僧侶はず婦人づけざりしは其宗教るがためにはずして政府免許なきがためにめてからじたることならん是等れば僧侶政府奴隷のみならず日本国中既宗教なしとふもなり。(宗教権なし

 宗教尚且然儒道学問てをや我国儒書へたるは日既王代博士天子自から漢書嵯峨天皇大納言冬嗣勧学院てゝ宗族子弟宇多天皇には中納言行平奨学院漢学次第和歌よりなりしことなれども此時代学問唯在位子弟ぶのみにて著述ども悉皆官りしものなりより印書発明あらざれば民間教育方便あるらず鎌倉大江広元三善康信等登用せられたれども此亦政府したるものにて人民学者あるをかず承久三年北条泰時宇治勢多攻入たるとき後鳥羽上皇より宣旨来従兵五千余人より此宣旨読をとねしに武蔵国住人藤田三郎なる者一人たりと世間不文なることこれより足利るまで文学僧侶ばんとするらざれば其方便後世習字生徒寺子ふも其因縁なり或人日本版本出来たるは鎌倉五山とすとへりしてならん徳川其始祖家康として藤原惺窩林道春太平持続するに碩儒輩出近世びしことなり学問盛衰治乱にして独立地位ることなく数十百年干戈騒乱僧侶したるは学問不面目はざるを此一事てもばざることりとども兵乱学問衰微するは我日本のみに世界万国皆然らざるはなし欧羅巴ても中古暗黒より封建るまでは文字僧侶して世間学問けたるは千六百年代以降のことなり又東西学風其趣にして西洋諸国実験とし我日本孔孟理論虚実相違よりふしてきにざれども亦一概らず我人民野蛮今日文明らしめたるものは仏法儒学とのはざるを近世儒学なるに俗間はるゝ神仏者流虚誕妄説して人心蠱惑たるがきは其功最なからず此一方よりれば儒学亦有力のものと今東西学風得失唯其学問はれたる次第しき両様異別げてすのみ其異別とはぞや乱世学問るに此学問なるもの西洋諸国ては人民一般我日本にては政府たるの一事なり西洋諸国学問学者事業にて其行はるゝや官私なく唯学者世界我国学問所謂治者世界学問にして政府一部分たるにぎず徳川治世二百五十年国内学校するものは本政府設立ざれば諸藩のものなり有名学者なきに大部著述なきにざれども其学者家来なり其著書発兌なり浪人学者もあらん蔵版もあらんとども其浪人家来たらんことをざりしなり其私蔵版官版たらんことをふてはざりしなり国内学者社中あるをかず議論新聞等出版あるをかず技芸教場衆議会席学問てはあることなし碩学大儒家塾あれば其生徒士族世禄るの余業のみ其学亦治者名義かずしてるの数千百巻するも官途かざればさゞるが隠君子する先生あるも其実んじてするに不遇して怨望する者歟らざればれて放心したるなり其趣形容してへば日本学者政府閉込められ此篭乾坤此小乾坤煩悶するものとにして漢儒教育洽ねからずして学者からざりしこそ目出たけれ先生思通りに無数学者ずることあらば混雑もなくして怨望益多煩悶益甚しからざるを毒千万なる有様ずやあるなき学者人間世界のあるをらざるなれば自分地位るの方便只管其時代有権者依頼して何等軽蔑るもるをらず徳川時代学者たる政府諸藩儒官なり儒官ふとども其実長袖身分とてぶに唯一種器械くにして当人好物なる政治上事務にもらしめず五斗米へて少年読書けしむるのみなるなれば唯其不自由ふがためにひたるまでのことにてへば革細工りて穢多ずるが卑屈賎劣此輩又何をかめん又何をかめん其党与独立社中なきもむにらず一定議論なきも亦驚くにらざるなり加之政府専制よく束縛すとしく気力ある儒者もすれば不平なきにりとどもよく其本れば夫子自から培養其苗蔓延するがためにからめらるゝものなり政府専制これをぞや仮令政府本来性質専制元素あるも其元素発生けて潤色するものは漢儒者流学問ずや古来日本儒者にて才力してもよくしたる人物する専制にしてもよく政府ひられたるなり此一段ては漢儒にして政府門人ふもなり日本人民子孫ざらん専制又其専制めらるゝものは今人らず其祖先けたる遺伝毒らしむるものとはざるをして此病毒けたるぞや漢儒先生亦預あるものなり。(学問なくして専制

 前段へる儒学仏法とともに各其一局我国今日るまで此文明したることなれどもれも皆古ふのかれず宗旨本分其教変化あるらざるものなれば仏法又神道数千百年今世さんとするものことなれども儒学ては宗教なり人間交際礼楽六芸をも政治上する学問この学問にして変通改進らざるは遺憾のことならずや人間学問昨日今日前年今年毎物毎事不審吟味発明改革して子弟父兄後進先進生又生次第盛大百年れば其粗鹵不文にして愍笑きものきこそ文明進歩学問上達きなりるに論語後世畏来者かざるをらんと孟子舜何人予何人ることある亦是又曰文王我師なり周公豈我かんやと此数言以漢学精神後世畏々とは後進勉強せば今人ることもあらん油断はならぬと意味なりされば後人勉強して頂上ふじて今人地位るのみ加之其今人古人ばざる季世なれば仮令ぶことあるも頼母しき事柄後進学者奮発して大声一喝其慷慨べたる数千年以前くならんとする周公証人てゝれながら文王ばんとするまでのことにて其趣不器用なる子供先生習字手本御手本りにかんとして苦心するがめより先生にはばぬものと覚悟めたれば々よく出来たるにて先生筆法真似するのみ其以上ることはらず漢儒系図堯舜より禹湯文武周公孔子孔子以後聖人きて支那にも日本にも其人あるをかず孟子以後宋儒者又日本碩学大儒にても後世てはしとども孔子以上古聖しては一言もあるらずこれをばざるのすのみ其道ふればふるほどしくりて次第智徳悪人愚者して一伝又一伝末世今日りてははや禽獣世界きは十露盤なる勘定なれどもにして人智進歩定則からはれて儒者くならず古人人物じたることにや今日までの文明めて勘定割合したるこそ我人民慶福けれふて自己工夫へず所謂精神奴隷メンタルスレとて精神をば古人支配其支配又伝へて支配ねく人間交際停滞不流元素吸入せしめたるものは儒学きなりりとども又一方よりへば在昔若我国儒学ふものかりせば有様にはらず西洋リフインメントとて人心鍛錬して清雅ならしむるの一事ては儒学功徳亦少なしとせず唯昔てはては無用なるのみ不自由なる時節ては敗筵やれむしろ夜着食料儒学てをや其旧悪らず余思ふに儒学日本人へたるは田舎御殿奉公したるが御殿にて起居動作から清雅其才智穎敏したれども活潑なる気力して家産営業には無用なる一婦人じたることなり其時節には教場もなかりしゆゑ奉公れなきにざれども今日ては其利害得失して方向めざるらず

 古来我日本義勇其武人慓悍にして果断誠忠にして率直なるは亜細亜諸国てもるものなかる就中足利末年天下大乱豪傑所在割拠して攻伐止なく日本はれたる前後このよりなるはなし一敗あり一勝あり門閥もなく由緒もなく功名自在富貴瞬間文明前後はあれども羅馬末世北狄侵入せし時代して彷彿たる有様ふもなり此事勢ては日本武人にもから独立自主気象日耳曼野民自主自由元素したるが我国民気風一変きにはるれども事実てはしてらず此章へる権力偏重開闢より人間交際微細なるまでも入込何等震動あるもらず此時代武人快活不覊なるがくなれども此快活不覊気象一身慷慨よりしたるものにからめて一個男児身外無物一己自由むの外物はれて発生したるものしからざれば外物発生けたるものなり外物先祖のためなり家名のためなりのためなりのためなり身分のためなり此時とする是等諸件らざるものなし先祖家名なく君父身分なきさらに其名義口実るのなり如何なる英雄豪傑にして有力有智ども其智力のみをたのみさんとたるあるをかず其事跡はれたるものをさん足利末年諸方豪傑其主人其君父祖先さんとし武士たるの面目ふせんがためにとて党与土地押領割拠すとども其期する唯上洛一事るのみ此上洛何物たるをれば天子若くは将軍其名義借用して天下せんとすることなり上洛方便ざる王室官位此官位自家栄光するのあり此術古来日本武人はるゝ一定流儀にて源平酋長皆然らざるはなし北条ては最上官位をもめずして名目のために将軍五位天下権柄りたるは王室器械るのみならず将軍をも利用したるものなり其外形皮相すればにしてなるにたれどもよく内部にすれば必竟人心鄙怯よりじたることにてしむきの元素含有するものとはざるを足利尊氏赤松円心ひて後伏見帝宣旨其子光明天皇たるがきは万人るも尊王本心よりたるものとらず信長将軍義昭れたれども将軍天子かざるを義昭ふて天子はさみたるも其情厚しとらずれも皆詐謀偽計明著なるものにて天下耳目したるならば其内情洞察なれども尚其表面には忠信節義児戯しき名分口実ひてからたるものとこれにれざるはぞや其党与上下共するあればなり日本武人開闢より此国はるゝ人間交際定則権力偏重はれするをとせず西洋人民自己地位んじ自己身分各其権義持張するすれば其間しき異別兵馬騒乱ども此交際定則らず一族大将あり大将家老あり騎士あり又徒士あり足軽中間上下名分判然として其名分権義をもにし一人として無理らざるなく一人として無理はざるなし無理抑圧せられ又無理抑圧すればへば甲乙丙丁十名ありて其乙なるして卑屈らざるの恥辱あるにたれどもすれば意気揚々としてきの愉快あり恥辱愉快其不満足平均あることなく西隣したる東隣催促するがこれを物質へてへば西洋人民権力くにして膨脹すること収縮することも亦甚からず日本武人権力はゴムの其相接する縮張にしすれば膨脹すれば収縮するのあり此偏縮偏重権力一体めて武家威光其一体抑圧無告小民なり小民へばなれども武人党与ては上大将より下足軽中間るまで上下一般利益はざるを利益るのみに其上下関係よく整斉して条理なるものあるが其条理とは党与にて上下卑屈醜態ありとども党与一体栄光ひてから栄光独一個地位をばてゝ其醜体一種条理れたるものなり此習慣はれて第二何等るゝもかすらず威武することはず貧賎ふことはず儼然たる武家気風其一局一場すれば又慕きもの在昔三河武士徳川家附属したる有様なども此一例なり仕組成立たる武人交際なれば此交際維持せんがためにはむを一種無形最上権威なかるらず其権威王室まるとども人間世界権威事実智徳するものなるが王室ども智徳あらざれば権威らずてか其名目のみをして王室虚位せしめ実権をば武家統領らんとするのらしたることにて当時諸方豪傑上洛一事熱中児戯しき名分をもさらにして利用したる由縁なり必竟其本れば日本武人独一個人気象インヂヴヰヂュアリチなくして卑劣なる所業とせざりしことなり。(乱世武人独一個気象なし

 古来世等閑看過してめざりしなれども今特せば日本武人独一個人気象なき一個条あり其個条とは姓名なり元来人父母ずるものにて成長後或改名することあるも他人差図きに衣食住物品々の好尚自由自在たるにたれどもくは外物かされから流行ふものなれども姓名衣食住なりずるに他人差図けざるは勿論仮令親戚朋友どもより相談るにざればくちばし事柄人事はれたるものゝにて自由自在なる部分改名ずるてはより其法ふも自由るにざれども改名自由源助平吉めざるの自由一己して夜寝るににし又左にするの自由なるが他人関係あるらずるに古来我日本武家偏諱はりすのあり卑屈賎劣上杉謙信英武これをれず将軍義輝偏諱拝領して輝虎改名したることあり尚甚しきは関原戦争後天下大権徳川氏して諸侯豊臣氏本姓又松平あり是等変姓から上命にてはることもあらんとどもれにも事柄てはしむ挙動はざるを或人謂へらく改名冒姓当時風習にてめざることなればよりらずとふものあれどもしてらず他人姓名してしとはざるの人情古今皆同其証拠には足利永享六年鎌倉公方持氏元服して義久じたりしに管領上杉憲実室町はるしとめたれどもかずとあり此時持氏自立あり其志にもにもすはしき挙動ひしことならん又徳川時代細川家松平へんとせしにしたりとて民間には美談として云伝へり虚実詳ならざれどもとするの人情同様なること以上記姓名のことはまで大事件にもざれども古来義勇する武人其実外卑怯なるを又一には権威政府ろしきものにて人心内部までもしてするにるとの次第さんがために数言したるなり

 右条々にずる日本人間交際上古より治者流被治者流との二元素れて権力偏重今日るまでも其勢じたることなし人民自家権義主張するなきはよりたず宗教学問皆治者流籠絡せられて自立することを乱世武人義勇あるにたれども亦独一個人らず乱世にも治世にも人間交際至大より至細るまで偏重はれざるなく又此偏重らざればとしてはるきものなし万病一薬るが此一薬功能治者流補益其力めて執権者一手するの趣向なり前既へる王代政治将家政治北条足利徳川して元素にするものに只彼よりしとしよりしとふものは此偏重るのなるとなるとを其得失判断するのみ偏重して最上権力執権者するをれば百事既りて又望きものなし古来因襲国家文字あり此家人民すに執権者家族又家名ならんなりなりしきは政府ますを御国益などゝるにれりきはせられたる姿なり是等政治るが其策偏重権力一家せしめんとするよりならず山陽外史足利して尾大不掉とて其大失策とせり此人唯偏重はれずして足利権力せざりしをじたるまでのことにて当時儒者にはのことなれども到底家あるをあるをらざるのなり足利尾大不掉失策とせば徳川首大偏重満足せざるらず偏重政治古来徳川家よりにしてなるものはなし一統自家土木して諸侯さしめ一方には諸方塁堡々の城普請大船るを火器首府るゝをさず侯伯妻子江戸拘留して邸宅かしめから奢侈人間有用事業らしめ尚其余力あるをれば御手伝御固めと百般口実けて奔命れしめするとしてはれざるなくずるとしてはざるなかりしは其状恰手足するが偏重政治ては最上最美手本きものにて徳川一家ればたるものとより政府るには中心権柄全体するの釣合なかるらず此釣合必用なるは我日本のみならず世界万国皆然らざるはなし野蛮不文なる日本人にても尚且このしたればこそ数千百年前代より専制趣意ばかりはれざりしことならずや文物次第けたる政府文明するとふものあらん政権必用なるは学校童子なりりとども西洋文明各国にては此権発源唯一所政令一途るとども其政令国内人心めたるもの仮令ることはざるも其人心多少々の意見調合して唯其出にしたるものなりるに古来日本ては政府国民とは主客たるのみに敵対するもなり徳川政府にて諸侯さしめたるは償金るにならず国民造船大名城普請めたるは戦勝敵国台場つにならず同国人所業らざるなり

 事物には初歩次歩との区別あるものにて初段第一歩するにはをして第二歩せしむるの工夫なかるらず次歩初歩支配するものとふもなりへば良薬口しとふことあり苦痛苦痛として苦薬苦薬としてふは人情にして事物初歩にのみ精神ぐときはふもなるにたれども第二歩なる安楽平癒とにすればへざるらず権力偏重一時国内人心維持して事物順序せしむるにはむをざるのにてして悪心よりたるものには所謂初歩処置なり加之其偏重なるにては一時耳目かすほどのすものありとども唯如何せん第二歩まんとするの前年弊害はして初歩しきをざりし徴候れば専制政治愈巧なれば其弊愈甚しく其治世愈久しければ其余害愈深永世遺伝毒りて容易らざるものゝ徳川太平きは其一例なり今日有様変革交際第二歩まんとして其事極きにずや其難由縁ぞや徳川専制にして其太平しかりしをてなり余嘗鄙言此事情したることあり専制政治脩飾するは閑散なる隠居瓢箪してくが心身してたるものは依然たる瓢箪にして唯光沢したるのみ時勢変化して第二歩らんとするに尚旧物ふて変通らず到底求めてべからざるめて脳中想像んとして煩悶するものは瓢箪きたるをらずしてこれをくが亦一層甚しとしと此鄙言或ることあらんれも皆事物初歩心配して次歩あるをらず初歩次歩まざるものなり初歩次歩るものなりきは初歩偏重事物順序せしめたりとふも其実順序たるに人間交際枯死せしめたるものと交際枯死せしむるものなれば山陽外史所謂尾大不掉徳川首大偏重れか得失らず必竟外史なども唯事初歩して瓢箪くのあるのみ

 徳川治世るに人民此専制偏重政府世間有様して品行如何へば日本国中幾千万人類各幾千万個され又幾千万個墻壁てらるゝがくにして寸分くを士農工商其身分にするは勿論士族には々のものにしにししきは儒官医師きも其家ありてるをにも家柄あり商工にも株式ありて其隔壁堅固なること何等るもらず才力するも目的あらざれば唯退るのるのみ数百年しき其習慣遂りて所謂敢為精神すにれりへば貧士貧民無智文盲にして軽蔑貧又貧其苦人間世界きものなきがくなれどもからしてすのなしせずしてるのにはよくゆれどもからして未来愉快なし貧士貧民のみならず学者亦然商人亦然してすれば日本国尋常人類はる一種運動力停滞不流みたるものと是即徳川治世二百五十年此国大業なりし由縁なり輓近廃藩一挙ありしかども全国其性ずることはず治者被治者との分界今尚判然として其趣めざる由縁なり其本れば悉皆権力偏重よりりしものにて事物第二歩注意せざるの弊害此弊害して偏重くにざれば天下乱世にても治世にても文明してむことあるらず此病療法目今現政治家のなればずるは本書余輩唯其病容体したるのみ亦西洋諸国人民ても貧富強弱一様なるに其富強なる貧弱するに刻薄残忍なることもあらん傲慢無礼なることもあらん貧弱亦名利のために諂諛することもあらんくこともあらん其交際醜悪なるはして我日本人なることなし日本人よりしきこともあるしとども其醜悪から々の独一個人気象して精神流暢げず其刻薄傲慢唯富強なるがなりあるに其諂諛欺詐唯貧弱なるがなりるゝあるにして富強貧弱とは天然智力智力きの目的あれば仮令事実すことはざるもから其身依頼して独立進取貧民はゞはずとどもにはることならん貧乏なるが富人従順するなり貧乏なる時節のみせらるゝなり従順貧乏制御富貴しと精神流暢とは此辺気象してふことなり我日本人開闢以来世はるゝ偏重定則せられてすれば其貧富強弱らず智愚賢不肖はずして唯其地位軽蔑恐怖秋毫活気をもせずして自家隔壁固着するすれば雲壌相違あるをきなり。(権力偏重なれば治乱共文明らず

 此権力偏重よりして全国経済差響きたる有様等閑看過らざるものなり経済議論入組たるものにて了解することからず各国事態時状一様なるものにざれば西洋諸国経済論我国らざるはよりたずとどもれのてもれのてもねく通用二則要訣あり其第一則又散ずることなりして此積むとずるとの両様関係近密にしてして相離きものになり方便なりへば時節ずるは穀物むのにして衣食住ずるは身体健康其力又衣食住むの方便なるが此積散じてむことはざるものあり火災水難なり人心嗜慾にて奢侈財物費散してなきものあり是亦水火災難ならず経済して費散ずるにこれをじたる多少其費散得失ずるのみ其所得所費よりければ利益所得所費相同じければ無益所得却所費よりもなき所得あらざれば又全損経済家目的此所得をして所損よりからしめ次第蓄積又費散して全国富有さんとするにるなり此蓄積費散二箇条れをれを目的らずれをれをらず前後緩急なく難易軽重なししく同一様にしてしく同一様処置きものなり蓄積してよくずるのらざる蓄積するを費散してよくむのなきずるをざればなり富国唯此蓄積費散とを盛大にするにるのみ其盛大なるけて富国れば国財蓄積費散全国人心処置せざるらず国財あれば国心あるもれなきに国財国心はざるらざるなり政府歳入歳出国財一部分なれば西洋諸国にて政府会計するも其趣意きしものなり第二則蓄積これを費散するには其財相応智力其事するの習慣なかるらず所謂理財理財習慣なるものなりへば千金其家博奕其富つことはざるがれも皆其財其智力習慣相当せざるものなり智力なく習慣なき過分するは其財ふのみならず小児利刀するがふの古今其例甚

 右所記二則果してならばらして古来我日本国はれたる経済得失王代葛山伯有先生田制沿革考

 

 源平徴発国衙らず民奉ずるらず一郷一荘平族源氏間亦奸窃粮食られ無告塗炭惟谷源公権行はれ守護地頭国司荘司依然としてすれば民両君くと中略足利氏国郡する政令なく国郡郷荘尽租税其主指揮五十分一からとすへば租米五十石一石さしめて運送将軍厨料られしなりして二十分一りしもあり守護地頭から其出りてることをする両税なり中略又段銭たんせん)、棟別倉役ばずして段銭とは田地にかけてさしむ高掛りとふが棟別とは軒別割附さしむるなり今云鍵役などに倉役とは富民富商人へばかり割附るなり今云分限割ふに倉役義満公には四季にあてられ義教公には一箇年十二度義政公には十一月九度十二月八度りしゆゑ百姓田宅てゝ逃散商旅へざりしこと応仁記又云豊臣家一統文禄三年定則ありし天下租税三分地頭取三分百姓得分たるしとあり又云ここ国初徳川勝国苛刻租税三分四公六民倒懸

 

 右沿革考れば古来我国租税苛刻なりしことなし徳川しくめたるも年月るにひいつとなく苛税したることなり又古より識者する農民なれども工商二民すかさずして坐食逸飽てあるまじきことなりとて工商れどもよく事実にすれば工商して逸民富商大賈たいこしてもあらんとどもこは唯其財本活計るものなれば豪農多分田地所持して坐食するならず以下貧商ては仮令はざるも其生産きは農民ならず日本には古来工商なし其税なきがとするから増加せざるをされども其増加するや亦必際限あるものなり此際限工商平均するにへば四公六民税地すは其利よりなるにずとども平年なれば尚妻子ふてかる工商都邑住居して無税むは農民すれば便利なるにたれども尚饑寒かれざる者多其然由縁ぞや仲間るものなり全国工商仕事にはありて若干人員あればきにりたる仕事さずして人員のみをせば十人にて商業をば三十人百人にて日傭賃をば三百人配分三割口銭べき商売一割二貫文賃銭五百文から仲間競業から其利潤くし便利して農民亦此便利ければなり工商無税なりとふとども其実有税ならず工商利益きことあらば其多由縁政府にて識者々の故障けて農民するを其人数割合尚少なきがために専売せしめたるものなり此事情れば工商とはしく其利害にして国内有用事業すものなれば其名目有税無税とのありとどもれも逸民双方共国財蓄積する種類人民

 人間交際治者流被治者流とに区別したるものを今爰には経済にて生財者不生財者との二種農工商以下被治者種族国財ずるにして士族以上治者種族ぜざるなり前段文字ひて蓄積種族費散種族ふもなり此二種族関係るに其労逸損徳有様より公平ならずとども人口多くして財本割合ふて職業るのれば富者して貧者せざるを是亦独我邦のみに世界普通弊害にして如何ともすらざるものなればるにらず且又士族以上治者流不生財又費散種族くとども政府にて文武施行して事物順序整斉ならしむるは経済るの大本なれば政府歳出一概無益らず唯我国経済不都合にして文明国なる此同一様なる国財蓄積費散とを処置するに同一様てせざるの一事古来我国通法人民蓄積へば四公六民税法とすれば其六分父母妻子残余四分政府一度れば其行らず其何するをらずるをらずらざるをらずしてへば蓄積するを其費散らざるものなり政府亦既請取るときは其来其何じたるをらず天与くにふてじてくならざるはなししてへば費散するを蓄積らざるものなり経済第一則蓄積費散とはしく同一様にしてしく同一様処置きものなりとへりるに今此有様れば同一様すに二様てしへば一字文字くにとを二人るが如何なる能筆にてもらざるやなり上下二様各其所見利益にし相知らざるのみならず其挙動相怪むにれり経済不都合ぜざるをんやきにさずらざるに到底其割合しきをべからざるなり足利義政大乱最中銀閣寺花御所いらか珠玉金銀りて六十万緡びん)、高倉御所腰障子一間二万銭奢侈にて諸国人民段銭棟別譴責して政府一銭余財もなきは上下共なる時節なり太閤内乱大阪城又朝鮮征伐兵馬冗費宴楽奢侈して尚金馬あるはにして殷富なる時節又歴代にて賢明ある北条泰時以下時頼貞時等諸君其自からずること質素倹約なりしことならん徳川其初代には明君賢相輩出して政府体裁間然きものなし義政時代などにすれば同日ずとども民間してたるあるをかず北条及徳川遺物として今日へたるものゝにてしきは鎌倉五山なり江戸及名古屋なり日光山なり東叡山なり増上寺なりれも盛大なるものなれどもしむきは其時代日本にして盛大なる工業たるの一事なりして全国経済割合したるもの余輩してぜず今国内にある城郭勿論神社仏閣古跡とて大仏大鐘大伽藍等壮大なるものあるは大概皆神道仏教なりしにはずして独裁君主なるをするにるのみには水道堀割等大工したることもあれどもして人民たるに唯其時君相有司好尚所謂民疾苦ふて其便利推量したるものゝみより古代無智なれば政府にてすは必然にてしむあらんより其挙動是非するの々あるらずとども国財蓄積費散其路にして経済上なき不都合明君賢相にても暴君汚吏にても此弊かれざりしはきことなれば後世苟眼力したるあらば其覆轍らず明君賢相有用しとども其有用とは君相する有用なれば々の好尚有用とするもあらん有用とするもあらん有用有用とすることもあらんとども無用有用とすることもあらん足利義政時代政府よりして一切借金約束りて徳政けたることあり徳川時代にもたるなきに是等政府よりへばなるがれにも国内蓄積者費散者処置しもれざるなれば費散者りてするに出入共なく唯下民生計して従前有様まれば最上仁政としてあらず同一様繰返して此処ては彼処一字文字二人にて数百年今日古今比較して全国経済由来れば其進歩きことくにへたり其一例はんに徳川治世二百五十年国内寸兵ひたることもなきは万古世界中比類なき太平此世界比類なき太平れば日本人民愚なりとども工芸道開けずとども仮令其蓄積々たりとども二百五十年には経済長足進歩なるに事実らざるはぞや将軍及諸藩主不徳のみにらず君相有司不徳不才りしとせば其不徳不才其人其地位ればむを不徳不才ならざるをざるのりて其勢られたるものなり経済一方よりずれば明君賢相頼母しからず天下太平功能薄きものなり或人戦争なれども其国経済差響人身るに金創一時耳目かすとども生命貴要部分らざれば其癒着案外なるものなり唯経済格別きは金創にあらずして彼労症次第衰弱するりと此説れば我日本経済ても権力偏重よりして蓄積者費散者との二流双方気脈ぜずして衰弱せざれば同一有様まり数百年しくみたるも到底盛大活潑るをずして徳川氏二百五十年治世にもしき進歩ざりしは所謂経済労症なるより日本学者政府勘定奉行郡奉行とはたざるらずとへり其趣意勘定奉行収税すればから聚斂るが郡奉行平均するのりならんより一政府同穴役人つも事実はなかるしとども其論してれば費散者一手財用するの古人らざるにざるなり。》

 経済第二則蓄積これを費散するには其財相応智力其事するの習慣なかるらずとあり理財活潑敢為節倹勉強とにるものにて此二者其宜しきを相制相平均して蓄積費散盛大きなりらずして一方敢為なくして節倹とすれば其弊貪慾吝嗇りんしよく節倹れて敢為ふすれば其弊浪費乱用れも理財大本くものとるに前段へる全国蓄積者費散者との二種族区分して其分界判然たるときは其種族全体品行一方種族には節倹勉強元素するも敢為して吝嗇らざるを種族には活潑敢為元素するも節倹して浪費らざるを日本国人其教育洽ねからずとども天稟なるにざれば理財一事なりとふのなし唯其人間交際らざるの各種族習慣其品行にしてはすにりしものなり其品行素質して悪性なるに適宜調和すれば敢為活潑節倹勉強じて理財無二なれども其用さずして浪費乱用貪慾吝嗇じたるは必竟素質悪性調和したるものなりへば酸素窒素とを調和すれば空気じて動植物々にらざる功徳なれども此二元素分析して各別にするときは功徳さゞるのみならずするが古来我国理財有様るにして士族以上治者なり政府にて土木文武るは勿論世間にて技芸風流其事柄有用にても無用にても一身衣食るの余地けて人生高尚なる部分ゆる士族以上其品行から穎敏活潑にしてすの気力しからず我文明根本きものなれども唯如何せん理財一事ては数千百年るをるをらずずるをむをらずすをるをらざるなれば其際から浪費乱用かるらず加之因襲しき一種風俗理財ずるは士君子ずとしてらざるをとせざるのみならずるを士君子上流なる理財なるとは二字同義なるにれり迀遠亦極ると又一方より農商以下被治者種族れば上流種族して分界一場下界人情風俗にし制御軽侮ふに称呼にしするににし衣服にも制限あり法律にも異同ありしきは生命権義をもするにれり徳川律書

 

 足軽体さうらふ共軽町人百姓として法外雑言等不届仕方にて不得止やむをえず切殺候者吟味上紛無之まぎれこれなくはゞ無構事

 

とあり此律れば百姓町人幾千万人するが其無事なるはにしてかるゝのみ生命をもんずることはずるにあらん廉恥功名又文学技芸等余地さず唯上命政府費用するのみにて身心共束縛るものとりとども人類天性何様るも圧窄禁錮きものにれにか間隙めて漏洩あらざるはなしこの百姓町人等身分進退固より不自由なりとども私財蓄積してむの一事ては其心ばするものなしてか気力ある蓄財して千辛万苦らず節倹勉強して巨万なきにされども此輩唯富してしたるにてあるにるは目的するための方便ずして生涯無二目的なるが人間世界きものなしきものなし学術以上人心高尚なる部分する事件みざるのみならず奢侈一箇条として上流挙動其迀遠愍笑するにれり事勢ては亦謂れなきにざれども其品行鄙劣にして敢為気象なきはむにへたるものなり日本国中富豪する由来其興敗とを探索せば実証古来大賈豪農したるして学者士君子九十九無学無術野人にしてきをぢずらざるを唯吝嗇一方蓄積したるのみ又其家れば気力乏しくして蓄積酒色游宴肉体にしてふものにぎず士族飄然としてめず其好其志せず其志してへざるすれば同日より肉体るも飄然としてるも其家るの同様なれども心思ずれば上流には尚智徳余地下流には唯銭肉体ずるの一元素あるが其品行異別亦大なりと次第被治者流節倹勉強其形めて貪欲吝嗇治者流活潑敢為其性じて浪費乱用理財せず今日有様りしものなり我日本なりとふとども天然産物乏しきに農耕一事ては世界万国してきものきをやして天然貧国らず税法苛刻ならんか税法苛刻なりとども其税めてげるにざれば国内財本一部分たらざるをるに今日有様にて全国なるはぞや必竟財しきに其財するの智力しきなり其智力しきに其智力両断して上下各其一部分つがなり概言すれば日本国開闢より今日るまで相応智力はざるものと此智力両断したるものを調和して実際せしむるは経済急務なれども数千百年習慣したるものなれば一朝一夕運動変革近日しく其運動るがくなれども上下種族其所長らずして其所短者多是亦如何ともすらざるのにてずしも其人々たる天下大勢上古よりれて今世億兆人類推倒して其向きしものなれば抗抵することはざるも亦宜むべなりと

 

 

문명론의 개략 5권 9장.hwp

문명론의 개략 5권 9장.hwp
0.1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