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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합리성,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성장
1. 지식의 성장: 이론과 문제
I
이 강연에서 나의 목표는 과학의 한 가지 특수한 모습이 지니는 중요성을 - 과학의 성장 필요성이나,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과학의 진보 필요성 -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필요성의 실용적 혹은 사회적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내가 논의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 필요성의 지적(知的) 중요성이다. 지속적인 성장이 과학적 지식의 이성적이고 경험적인 특징에 필수적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과학이 성장을 중단한다면 틀림없이 그 특징을 잃어버린다. 과학을 이성적이고 경험적으로 만드는 것은 과학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자들이 이용 가능한 이론들을 구별하여, 더 나은 이론이나 (만족스러운 이론이 없으면) 과학자들이 이용 가능한 모든 이론들을 배척하는 이유를 내놓는 방식을 선정하여, 만족스러운 이론이 순응해야 하는 조건 몇 가지를 제시하는 방식.
내가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관하여 말할 때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관찰한 것들의 축적이 아니라, 과학 이론들의 반복되는 전복과 더 낫거나 더 만족스러운 이론들로 그 이론들을 갈음하는 것임을 여러분은 이 언명으로부터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라는 가장 중요한 모습을 새로운 실험과 새로운 관찰에서 보는 사람들에 의해서조차도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아마도 발견될 과정이다. 그 까닭은 우리의 이론들을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은 시험하여 전복(顚覆)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노력들로 인하여, 우리의 이론들과 그 이론들에 대한 우리의 비판 양쪽에 대한 자극과 인도 없이는 아무도 꿈꾸지 않았던 종류의 실험과 관찰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달한다.
이 강연은 전에 실행된 적도 발간된 적도 없다. 이 강연은 1960년 8월 스탠포드 과학 철학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gress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in Stanford)를 위하여 준비되었지만, 강연의 길이 때문에 작은 부분만 그곳에서 제시될 수 있었다. 또 다른 부분은 영국 과학 철학회(the British Society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의 나의 의장 연설을 구성하여 1961년 1월에 전달되었다. 그 강연에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몇 가지 개념의 본질적인 심층적 전개가 포함된다고 (특히 3-5부에서) 나는 믿는다.
그 까닭은 진정으로, 우리의 이론들을, 특히 우리의 새로운 이론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우리에 의하여 가장 흥미로운 실험과 관찰이 신중하게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 나는 과학의 이 모습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하여, 과학적 진보에 관한 그래서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의 구분에 관한 개념들과 연결된, 새로울 뿐만 아니라 오래된, 문제들 중 몇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한다. 내가 논의하고 싶은 새로운 문제들은 주로 객관적 진리에 관한, 그래서 진리에 다가감에 관한 개념과 - 지식의 성장을 분석하는 데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으로 나에게 보이는 개념들 - 연결되어 있는 문제들이다.
나는 나의 논의를 과학에서의 지식의 성장에 국한시킬지라도, 나의 말은 많이 변경시키지 않고도 과학 이전 지식의 성장에 또한 - 다시 말해서, 사람들과 심지어 동물들도 세상에 관하여 새로운 사실적 지식을 습득할 일반적인 방식에 - 적용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시행착오를 통한 배움의 -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 방법은 하급 동물들에 의해서 실행되든 고등 동물들에 의해서 실행되든, 침팬지에 의해서 실행되든 과학자에 의해서 실행되든 근본적으로 동일하게 보인다. 나의 관심은 과학적 지식에 관한 이론에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반적인 지식에 관한 이론에도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대한 연구는, 내가 믿기에, 일반적인 지식의 성장을 연구하는 데에 관한 가장 유효한 방법이다. 그 까닭은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 평범한 인간적인 지식의 성장에 관한 명백한 보기라고 언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1958년에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의 서문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그러나 우리가 진보할 필요가 충족되지 못할, 그래서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 끝장날 위험은 있는가? 특히 과학이 자체의 과제를 완료했기 때문에 과학의 진보가 끝날 위험은 있는가? 우리의 무지가 무한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과학의 진보에 대한 실제적 위험은 과학의 진보가 완료될 개연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과 (때때로 실제적 관심 부족의 결과) 같은 것들이다; 혹은 (아래 10부에서 논의될 ) 형식화와 정밀에 잘못 놓인 믿음; 혹은 여러 가지 형태 중 이런저런 형태의 권위주의.
내가 ‘진보(progress)’라는 술어를 여러 번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이 시점에서 내가 진보에 관한 역사적 법칙을 믿는 사람이 아님을 명백히 하는 것이 좋겠다. 정말로 나는 이전에 진보의 법칙에 관한 신념을 다양하게 공격했고,? 심지어 과학도 그런 법칙을 닮은 어떤 것의 작동에 종속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의 역사는, 모든 인간 아이디어의 역사와 같이, 무책임한 꿈의, 고집의, 오류의 역사이다. 그러나 과학은 오류가 체계적으로 비판되고 상당히 자주, 시간이 지나면, 수정되는 - 아마도 유일한 활동 - 극소수인 인간 활동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 우리가, 과학에서, 흔히 우리의 오류로부터 배운다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과학에서 진보하는 것에 관하여 분명하고 합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인간 활동 대부분의 다른 분야에는 변화는 있지만, (우리가 삶에서 가능한 목표들에 대하여 매우 좁은
? 나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Poverty of Historicism) (1960년, 두 번째 판), 그리고 본 서적의 16장 참조. (16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관점을 우리가 택하지 않는다면) 진보는 드문데, 그 까닭은 거의 모든 소득은 손실에 의하여 상쇄되거나 상쇄 이상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분야에서 우리는 변화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심지어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과학 분야에서 우리는 진보의 기준을 지니고 있다: 심지어 이론이 경험적 시험을 거치기 전에도 우리는, 이론이 명시(明示)된 특정 시험들을 통과한다면, 그 이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다른 이론들에 대한 개선일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주장이다.
다소 다르게 표현하여, 훌륭한 과학 이론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그리고 - 그 이론이 시험되기 전에도 - 그 이론이 특정 시험을 통과한다면, 어떤 종류의 이론이 훨씬 더 나을 것인지를, 우리는 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래서 과학에서 진보에 관하여, 그리고 이론들 사이의 합리적 선택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이 (상위-과학적[meta-scientific]) 지식이다.
II
그리하여 이론이 시험되기 전에도, 이론이 특정 시험을 통과하면 그 이론은 어떤 다른 이론보다 우수할 것임을 우리는 이론에 관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주장이다.
나의 첫 번째 주장은, 우리에게는 상대적인 잠재적 만족스러움에 대한 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은 이론이 몇 가지 결정적인 시험을 통과함으로써 사실상 만족스러운 것으로 판명될 것인지 아닌지를 심지어 우리가 알기 전에도 이론에 적용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얼마 전에? 언명하였으며, 그런데, 그로 인하여 이론이 지닌 상대적인 잠재적 만족스러움의 정도에 따라서 우리가 이론의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상대적인 잠재적 만족스러움에 대한 기준은 매우 간단하고 직감적이다. 그 기준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이론을 선호될 수 있는 것으로서 규정한다; 다시 말해서, 더 많은 양의 경험적 정보 즉, 내용(content)을 담고 있는 이론: 논리적으로 더 강한 이론; 더 큰 설명력과 예언력을 지닌 이론; 그리고 그리하여 예언된 사실들을 관찰한 것과 비교함으로써 더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는 이론. 요컨대 우리는 사소한 이론보다 흥미롭고, 과감하고 고도의 정보를 담고 있는 이론을 선호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론 속에서 바라는 이 모든 특질들은 동일한 한 가지 일과 대등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는 듯하다: 더 높은 정도의 경험적 내용(content)이나 시험가능성.
III
이론의 (혹은 여하한 서술의) 내용에 대한 나의 연구는 두 가지 서술 a와 b의 결합(conjunction) ab의 정보 내용이 항상 그 결합의 구성요소 어느 것의 내용보다 더 크거나, 적어도 동등할 것이라는 간단하고도 명백한 개념에 근거했다.
a를 ‘금요일에 비가 올 것이다’라는 서술로 하라; b를 ‘토요일은 맑을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31부에서 46부까지, 82부에서 85부까지, 새 부록 ix의 시험도(試驗度: degrees of testability), 경험적 내용, 입증가능성(corroborability), 그리고 입증(corroboration)에 대한 논의 참조; 또한 이 부록의 설명력의 정도에 대한 논의, 그리고 특히 아인슈타인의 이론과 뉴튼의 이론 비교 (401쪽 주석 7) 참조. 다음에서, 나의 저서에서 논의된 보다 상세한 구분을 시작하지 않고, ‘진보의 기준’으로서 시험가능성, 기타 등등을 나는 언급할 것이다.
것이다’라는 서술로 하라; 그리고 ab는 ‘금요일에 비가 올 것이고 토요일은 맑을 것이다’라는 서술로 하라: 그렇다면 마지막 서술인 결합 ab의 정보 내용은 그 구성요소인 a의 정보 내용과 또한 그 구성요소인 b의 정보 내용을 능가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고 ab의 확률은 (혹은, 동일하게, ab가 참일 확률) 그 구성요소 어느 것의 확률보다 작을 것이다.
‘서술 a의 내용’ 대하여 Ct(a)라고, 그리고 ‘a와 b의 결합의 내용’에 대하여 Ct(ab)라고 쓰면, 우리는
(1) Ct(a) ⩽ Ct(ab) ⩾ Ct(b)를 얻는다.
이것은 다음 상응하는 확률 계산의 법칙과 대조를 이루어,
(2) p(a) ⩾ p(ab) ⩽ p(b),
이 법칙에서 (1)의 부등호가 거꾸로 된다. (1)과 (2)의 법칙은 합쳐져서, 증가하는 내용에 따라서, 확률은 감소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고 서술한다; 혹은 다시 말해서, 증가하는 비개연성에 따라서 내용은 증가한다고. (이 분석은 물론, 서술의 논리적 내용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포함되는 모든 저 서술들의 집합으로서 서술의 논리적 내용이라는 일반적인 생각과 완전히 일치한다. 서술 a의 내용이 서술 b의 내용보다 보다 크다면 - 다시 말해서, a가 b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면 - 서술 a는 서술 b보다 논리적으로 강력하다고 우리는 또한 말할 것이다.)
이 사소한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불가피한 결과들이 있다: 지식의 성장이 우리가 증가하는 내용을 지닌 이론들로써 일을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가 감소하는 확률을 (확률 계산이라는 의미에서) 지닌 이론들로써 일을 해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목표가 지식의 발전이나 성장이라면, 높은 확률은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도저히 우리의 목표가 또한 될 리가 없다: 이 두 가지 목표는 양립할 수 없다.
나는 이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결과를 약 30년 전에 발견했고, 그 후 그 결과를 강의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높은 확률이 틀림없이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는 편견은 매우 깊이 뿌리박혀 내가 얻은 사소한 결과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역설적(paradoxical)’이라고 생각된다.? 이 간단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높은 정도의 확률이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틀림없이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명백하게 보여서 그 사람들은 그 생각을 비판적으로 고려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브루스 브루크-웨이블(Bruce Brooke-Wavell) 박사는 그러므로 내가 이런 상황으로 ‘확률’을 말하는 것을 멈추고 나의 논증을 ‘내용의 계산법’ 및 ‘상대적 내용’에 기초해야 한다고 나에게 제안했다; 또는 다시 말해서, 내가 비개연성을 겨냥하는 과학에 관하여 말하지 말고, 과학이 최대한의 내용을 목표로 한다고 말하기만 해야 한다고. 나는 이 제안을 많이 생각했지만, 그 제안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가 실제로 명백해질 수 있다할지라도 폭넓게 수용되고 깊이 뿌리박힌 확률주의적 편견과의 정면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 철학, 35호, 1960년에 실린 J. C. 하사니(Harsanyi)의 ‘과학적 가설을 선택하기 위한 포퍼의 비개연성 기준’ 332쪽 이하 참조. 그런데 나는 과학적 가설들을 선택하는 데에 대하여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는다: 모든 선택은 위험한 추측이다. 게다가 이론학자들의 선택은 (수용보다는) 심층적인 비판적 논의를 할 가치가 매우 높은 가설이다.
충분히 쉬울 것과 같이, 내가 내 자신의 이론을 내용의, 혹은 논리적 힘의 계산에 기초한다면, 확률 계산이, 명제나 서술에 대한 그 계산의 (‘논리적’) 적용에서, 이 서술들의 논리적 약점 혹은 내용 결핍의 계산에 (절대적인 논리적 약점이나 상대적 논리적 약점의) 지나지 않음을 설명할 필요가 여전히 있으리라. 높은 확률은 틀림없이 과학의 목표라는 것과, 그러므로 귀납 이론이 틀림없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에 대하여 높은 정도의 확률을 얻을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무비판적으로 상정(想定)하는 데에 그렇게 일반적인 경향을 띠지 않는다면, 아마도 정면충돌은 피해지리라. 확률 계산법과 혼동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완전히 다른 계산법이 - ‘진리 유사성(truthlikeness)’ 즉,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생긴다.)
이 간단한 결과들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종류의 다소 정교한 이론들이 고안되었다. 내가 그 이론들 중 어느 것도 성공적이지 않음을 증명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이론들이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론 안에서 간직하고 우리가 아마도 ‘박진성’ 즉, ‘진리 유사성’으로 (아래 11부 참조) 부를 속성은 (2)가 불가피한 정리(定理: theorem)인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확률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은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 앞에 놓인 문제는 술어의 문제가 아님이 주시되어야 한다. 나는 소위 ‘확률’에 개의치 않으며, 나는 소위 ‘확률 계산’이 유효한 저 정도(程度: degrees)들을 당신이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할지라도 개의치 않는다. ‘확률’이라는 용어를 (라플라스[Laplace], 케인즈[keynes], 제프리즈[Jeffreys]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언명했으며, 그에 대하여 내가 다양한 형식적 공리[公理; axiom] 체계들을 내놓았던) 이 계산법의 잘 알려진 규칙들을 충족시킬 여하한 것을 위하여 유보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이 용어 사용법을 수용한다면 (그런 조건으로만), 서술 a의 절대적 확률이 그 서술의 논리적 약점의 정도이거나, 정보성 내용의 결핍일 뿐이라는 데에, 그리고 서술 b가 주어진 서술 a의 상대적 확률은, 우리가 이미 정보 b를 소유하고 있다고 상정(想定)하여, 상대적 약점의 정도이거나 서술 a 안에 있는 새로운 정보 내용의 상대적 결핍일 따름이라는 데에 의심이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과학에서 우리는 높은 정보 내용을 겨냥한다면 - 지식의 성장이 우리가 더 많이 아는 것을, a만이라기 보다는 a와 b를 동시에 아는 것을, 그리하여 우리 이론들의 내용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 우리가 또한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 낮은 확률을 겨냥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낮은 확률은 반증될 높은 확률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도의 반증 가능성이나 반박 가능성이나 시험 가능성이 과학의 목표 중 하나라고 - 사실상, 정확하게 고도의 정보 내용과 동일한 목표 -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잠재적 만족스러움에 대한 기준은 그러므로 시험가능성 즉, 비개연성이다: 오직 고도로 시험될 수 있거나 비개연적인 이론이 시험할 가치가 있어서, 그 이론이 엄격한 시험을 - 특히 실행되기 전에 그 이론에 대하여 결정적인 것으로 우리가 가리킬 수 있는 저 시험들 - 견디어 낸다면 실제로 (잠재적으로 뿐만 아니라) 만족스럽다.
많은 경우에 시험의 엄격성을 객관적으로 비교하는 일이 가능하다. 우리가 가치가 있는 일임을 발견한다면, 시험의 엄격성에 대한 척도를 정의(定義)하는 일이 심지어 가능하다. (이 책의 부록 참조.) 동일한 방식을 사용하여 우리는 이론이 지니는 설명력과 입증의 정도를 정의(定義)할 수 있다.?
IV
여기 제시된 기준이 실제로 과학의 진보를 지배한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례의 도움을 받아서 쉽게 예시될 수 있다.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이론들은 뉴튼이 내놓은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고 더 나은 시험 가능한 이론에 의하여 통합되고 갈음되었으며, 유사하게 프레넬(Fresnel)의 이론과 패러데이(Faraday)의 이론은 맥스웰(Maxwell)의 이론에 의하여 통합되고 갈음되었다. 뉴튼의 이론과 맥스웰의 이론은, 반대로,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여 통합되고 갈음되었다. 각각의 경우에 진보는 더 많은 정보성이 있어서 논리적으로 확률이 낮은 이론을 향하여 이룩되었다: 순전히 논리적 의미에서, 더 쉽게 반박될 수 있는 예측을 하였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었던 이론을 향하여.
이론이 생산하는 저 새롭고 대담하고 비개연적인 예측들을 시험함으로써 논박되지 않는 이론은, 이 엄격한 시험들에 의하여 입증된다고 언급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여러분에게 갈레(Galle)의 해왕성 발견, 헤르츠(Hertz)의 전자파 발견, 에딩튼(Eddington)의 일식 관측, 엘자서(Elsasser)가 데이비슨(Davisson)의 극한치들(maxima)을 드 브로이(de Broglie) 파동(波動)의 간섭 주름으로 해석한 것, 그리고 최초의 유카와 중간자(Yukawa mesons)를 파월(Powell)이 관측한 것을 상기시킬 것이다.
이 모든 발견은 엄격한 시험들에 의한 - 우리가 지닌 이전 (시험되어 입증된 이론 이전) 지식에 비추어 고도로 비개연적이었던 예측들에 의한 - 입증을 대표한다. 다른 중요한 발견들이, 그 발견들이 이론의 입증이 아니라 논박을 초래했다 할지라도, 이론을 시험하는 중에 또한 이룩되었다. 최근에 있었던 중요한 경우는 반전성(反轉性: parity)에 대한 논박이다. 그러나 밀폐된 공간에서 촛불이 타는 동안 공기의 용적이 줄어듦을, 혹은 타는 쇠-부스러기의 무게가 증가함을 증명하는 라부아지에(Lavoisier)의 고전적 실험들은 연소에 대한 산소 이론을 확립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실험들에는 열소(熱素: 플로지스톤: phlogiston) 이론을 논박하는 경향이 있다.
라부아지에의 실험들은 신중하게 고안되었다; 그러나 심지어 대부분의 소위 ‘우연적 발견들’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논리적 구조를 지닌다. 그 까닭은 이 소위 ‘우연적 발견들’이 대체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생각되던 이론들에 대한 논박이기 때문이다: 그 발견들은 (이 이론들에 기초한) 우리의 기대 중 몇 가지가 예기치 않게 빗나갔을 때 이룩된다. 그리하여 수은의 촉매성 속성은, 수은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예상되지 않던 화학 반응이 수은이 있는 상태에서 가속화되는 것이 우연히 발견되었을 때, 발견되었다. 그러나 외르스테드(Oersted)의 발견과 뢴트겐(Röntgen) 발견과 베크렐(Becquerel)의 발견도, 플레밍(Fleming)의 발견도 우연적인 구성요소가 있다할지라도, 실제로 우연적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 모두는 자신이 발견한
? 특히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부록 ix 참조
종류의 효과를 탐색하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미국 대륙 발견 같은, 어떤 발견들도 동시에 또 다른 이론을 (지구의 크기에 관한 이론과, 인도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에 관한 이론) 논박하는 반면 (구형[球形]의 지구에 관한) 한 가지 이론을 입증한다고 우리는 심지어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발견들은 모든 기대를 부인하는 정도까지 우연한 발견들이어서, 그 발견들이 논박하는 저 이론들에 대한 시험들로서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V
내가 과학적 지식 안의 변화에, 그 지식의 성장이나 그 지식의 진보성에 두는 강조점은, 공리화(公理化: axiomatized)된 연역적 체계로서의 작금의 과학에 대한 이상(理想)과 어느 정도까지는 대조될 것이다. 이 이상(理想)은 유클리드(Euclid)의 플라톤화하는 우주론으로부터 (그 까닭은 내가 믿기에, 이것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이 실제로 의도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뉴튼의 우주론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보스코비치(Boscovič), 맥스웰(Maxwell), 아인슈타인, 보어(Bohr), 슈뢰딩거(Schrödinger), 그리고 디랙(Dirac)의 체계까지 유럽의 인식론에서 지배적이었다. 그 이상은 과학적 활동의 최종적 과제와 목표를 공리화(公理化)된 연역 체계의 구축에서 보는 인식론이다.
이것과 반대로, 나는 이제 이 매우 찬양받을만한 연역 체계들이 목적들로서 보다는 디딤돌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더 풍요롭고, 더 잘 시험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으로 향하는 우리의 길에서 중요한 단계들로서.
그리하여 수단 즉, 디딤돌로서 간주되어, 그 연역 체계들은 틀림없이 완전히 필수불가결한데, 그 까닭은 우리의 이론들을 우리는 연역 체계의 형태로 개발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이론들이 더 훌륭하고 더 잘 시험될 수 있게 되려면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에게 요구해야 하는 논리적인 힘에 의하여, 커다란 정보 내용에 의하여 불가피하게 된다. 우리 이론들이 내놓는 결과들의 풍요로움은 연역적으로 펼쳐져야한다; 그 까닭은 대체로, 이론이란, 하나하나, 그 이론이 지닌 더 멀리 떨어진 결과들 몇 가지를 시험함으로써가 아니면 시험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론을 직감적으로 검사함으로써 즉각 목격될 수 없는 결과들.
그러나 이론을 합리적이고 경험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체계의 놀라운 연역적 전개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이론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체계를 관찰성 시험을 포함하여 시도된 논박에 부치는 것; 그리고 특정한 경우에 이론이 저 비판들과 저 시험들을 - 이 비판들과 시험들 가운데는 그 이론보다 앞선 이론들이 무너진 시험들이 있어서, 때때로 훨씬 더 심화되고 훨씬 더 엄격한 시험들 - 견디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 과학의 합리성이 놓여 있는 곳은 이론의 연역적 발전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이론의 합리적 선택이다.
결과적으로 그 체계를 비판하여 시험하는, 그래서 그 체계를 경쟁하는 체계들과 비판적으로 비교하는, 과제에 관한 요구사항을 넘어서 연역적인 비(非)관습적 체계를 형식화하고 상술하는 데는 장점이 없다. 이 비판적
? 이 견해를 채택하는 데에서 나는, 1956년의 토론에서, 완료된 연역 체계를 목표로서 간주하는 자세가 뉴튼적 개념이 (그리하여 플라톤적이고 유클리드적 전통이 라고 나는 부언할 것이다) 길게 지배한 잔재라고 나에게 확신시켰던 J. 애거시(Agassi) 박사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 훨씬 더 급진적인 애거시 박사의 견해에 관하여 이 장의 마지막 주석 참조.
비교는, 틀림없이, 몇 가지 사소한 관습적이고 자의적인 면(面)을 지니고 있다할지라도, 진보의 기준 덕분에 주로 비(非)관습적이다. 과학의 합리적인 요소와 경험적 요소 모두를 담고 있는 것은 이 비판적 과정이다. 그 과정은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웠고, 그것에 의하여 우리의 과학적 지식을 늘렸음을 증명하는 저 선택들과, 저 배척들과, 그리고 저 결정들을 담고 있다.
VI
그러나 아마도 심지어 과학에 대한 이 묘사도 - 그 합리성이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사실에 놓여있는 과정으로서 - 철저히 만족스럽게 충분하지는 않다. 그 묘사는 과학은 이론에서 이론으로 진보한다는 것, 그래서 과학은 점점 더 나은 연역 체계들의 연속물로 구성된다는 것을 여전히 암시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과학은 문제에서 문제로 - 항상 더 큰 깊이를 지닌 문제로 - 진행하는 것으로서 가시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과학 이론이란 - 설명적 이론 - 무엇인가 하면, 과학적 문제를, 다시 말해서, 설명의 발견과 관련되어 있거나 연결되어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우리의 기대들과, 그리하여 우리의 이론들은 역사적으로 우리의 문제에 앞설 것이다. 그러나 과학은 문제로써만 시작된다. 문제들은 특히 우리의 기대에서 우리가 좌절했을 때, 혹은 우리 이론들로 인하여 우리가 난제에, 모순에 얽혔을 때 생긴다; 그래서 이 문제들은 이론의 내부에서나 혹은 두 가지 다른 이론들 사이에서나, 혹은 이론과 관찰의 충돌의 결과로서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이론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문제를 통해서일 뿐이다. 우리에게 학습할 것을 촉구하는 것은 문제이다; 우리의 지식을 증진할 것을; 실험할 것을; 관찰할 것을.
그리하여 과학은, 관찰로부터가 아니라, 문제들로부터 시작한다; 관찰한 것이 문제를 낳을지라도, 특히 관찰이 예기치 않은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관찰한 것이 우리의 기대나 우리의 이론들과 충돌한다면. 과학자 앞에 놓인 의식적인 과제는 항상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의 구축을 통한 문제 해결이다; 예를 들어 예기치 않아서 설명되지 않는 관찰한 것들을 설명함으로써. 그러나 모든 가치 있는 새로운 이론은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조화에 관한 문제, 새롭고 이전에는 생각되지 않은 관찰성 시험들을 수행하는 문제들. 새로운 이론 자체가 결실이 있음을 확립하는 것은 주로 새로운 문제들을 통해서이다.
그리하여 이론이 과학적 지식의 성장에 할 수 있는 가장 지속적인 기여는 그 이론이 제기하는 새로운 문제들이라고 우리는 말할 것이어서, 우리는 항상 문제로 시작하여 문제로 - 항상 깊어지는 문제와, 새로운 문제들을 제시하는 데서 항상 깊어지는 풍요로움 - 끝나는 것으로 과학과 지식의 성장에 관한 관점으로 다시 인도를 된다.
? 이것과 다음 두 문단을 나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Poverty of Historicism), 28부 121쪽 이하 및 이 책의 1장과 16장을 비교할 것 (이 책의 16장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음. - 역자 주).
2. 객관적 진리에 관한 이론: 사실과의 일치
VII
지금까지 나는, 심지어 진리를 언급하지 않고, 과학과 과학의 진보, 그리고 과학의 진보 기준에 관해서 말했다. 아마도 놀랍게도, 이것은 실용주의나 도구주의에 빠지지 않고도 실행될 수 있다: 과학 이론이 지닌 진리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도 과학에서 진보의 기준에 관한 직감적 만족스러움을 지지하여 논증하는 것이 완전하게 가능하다. 사실상, 내가 타스키(Tarski)의 진리 이론을 알기 전에도?, ‘참(true)’이라는 단어의 사용과 연결된 고도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 너무 깊이 빠지지 않고 진보의 기준을 토론하는 것이 나에게 더 안전하게 보였다.
당시 나의 자세는 이러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하는 바와 같이, 진리에 관한 객관적이나 절대적이나 혹은 일치의 이론을 - 사실과 일치로서의 진리 - 내가 수용했다할지라도 나는 그 화제를 회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까닭은 서술과 사실 사이의 일치에 대한 이 기묘하게 까다로운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나에게 절망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왜 그 상황이 그렇게 절망적으로 보였는지를 환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많은 보기들 중에서 한 가지 보기로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를 그 책의 진리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순진한 묘사 이론, 즉 투사(投射: projection) 이론을 기억하면 된다. 이 책에서 명제는 그 명제가 기술(記述)할 의도를 지닌 사실의 묘사나 투사로서 그래서 그 사실과 동일한 구조를 (혹은 ‘형태[form]’) 지닌 것으로서 생각되었다; 축음기의 레코드가 정말로 소리의 묘사나 투사여서 소리의 구조적 특질 몇 가지를 공유하고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일치를 설명하려는 이 실패적 시도들 중의 또 다른 시도는 슐리크(Schlick)에 기인하는데, 그는 다양한 일치 이론들에 - 묘사나 투사 이론을 포함하여 - 대하여 아름다울 정도로 분명하고 진정으로 파멸적인 비판을? 내놓았지만 불행히도 자신의 차례에 결코 더 우수하지 않은 또 다른 이론을 만들었다. 그는, 이 해석을 논박하는 반례(反例: counterexamples)들이 충분할지라도 (많은 대상물에 적용되는 명칭들, 많은 명칭들에 의하여 지시되는 대상물들) 논란이 되는 일치를 우리가 지닌 명칭들과 지시되는 대상물들 사이의 1 대 1 일치로서 해석했다.
이 모든 것은 진리 및 서술과 사실의 일치에 관한 타스키의 이론에 의하여 바뀌었다. 타스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경험 과학의 철학에 대한 그의 이론의 진정한 중요성은, 의심스럽게 된 절대적이나 상대적 진리에 대한 일치 이론을 그가 재건한 것이다. 그는 진리에 대한 직감적 아이디어의 자유로운 사용을 사실에 대한 일치로서 증명했다. (그의 이론이 오직 형식화된 언어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견해는, 내가 생각하기에, 오류다. 그의 이론은, 우리가 타스키의 분석으로부터 그 언어의 모순을 어떻게 피할지를 배우기만 한다면, 여하한 일관적이고 심지어 ‘자연적인’ 언어에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은, 틀림없이, 얼마간의 ‘인위성(artificiality)’를 - 혹은 조심성 - 그 언어의 사용에 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래 부록 5를 또한 참조.)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84부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 특히 369-374쪽 참조.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특히 4.0141; 2.161; 2.17; 2.223; 3.11 또한 참조.
? 그의 괄목할만한 저서 인식론(Allgemeine Erkenntnislehre), 2판, 1925년의 56-57쪽을 특히 참조.
이 모임에서 청중들이 타스키의 진리에 관한 이론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내가 가정할지라도, 그 이론이, 직감적 관점에서, 사실들에 대한 일치의 개념에 관한 간단한 해명으로 간주될 수 있는 방식을 나는 아마도 설명할 것이다. 나는 거의 하찮은 이 요점을 강조해야 할 텐데, 그 이유는, 그 요점의 하찮음에도 불구하고, 그 요점은 나의 논증에 결정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먼저 ‘진리’를 ‘사실들에 대한 일치’에 대한 동의어로서 생각하기로 명시적으로 결정하여, 그 다음에 (‘진리’에 대하여 완전히 잊고) ‘사실들에 대한 일치’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로 나아간다면 타스키의 아이디어가 지닌 고도로 직감적인 특징은 더 명백해지는 듯이 보인다 (내가 가르치면서 발견한 바와 같이).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다음 두 가지 공식을 고찰할 것인데, 그 공식 각각은 어떤 상황에서 (대상 언어의) 특정 주장이 사실들에 일치하는지 매우 간단히 (상위-언어로) 서술한다.
(1) ‘눈은 희다(Snow is white)’라는 서술 즉, 주장은 눈이 정말로 희다면, 그리고 그 조건에서만 사실들과 일치한다.
(2) ‘풀은 붉다(Grass is red)’라는 서술 즉, 주장은 풀이 정말로 붉다면, 그리고 그 조건에서만 사실들과 일치한다.
(‘정말로[indeed]’라는 단어가 편의를 목적으로 삽입되어, 생략될) 이 공식은, 물론, 철저히 하찮게 들린다. 그러나 그 공식들의 표면적인 하찮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식들이 사실들과의 일치를 설명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음을 발견하는 일은 타스키에게 맡겨졌다.
결정적인 요점은, (1)과 (2)가 그러한 것처럼 사실들과의 일치에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우리가 서술들과 그 서술들이 언급하는 사실들이라는 두 가지 것들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상위 언어를 우리가 사용해야 한다는 타스키의 발견이다. (타스키는 그런 상위 언어를 ‘의미론적[semantical]’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그 속에서 대상 언어에 관하여 말할 수 있지만 그 대상 언어가 언급하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상위 언어는 ‘구문논적[syntactical]’이라고 불린다.) (의미론적) 상위 언어에 대한 필요성이 이해되자마자,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3) ‘“죤이 전화했다”는 사실이다’['"John called" is true']는 본질적으로 그런 상위 언어에 속하는 서술인 반면, (4) ‘죤이 전화한 것은 사실이다’['It is true that John called']는 ‘죤이 전화했다’['John called']와 동일한 언어에 속할 것이다. 그리하여 ‘것은 사실이다’['It is true that']라는 표현은 - 이중부정처럼, 논리적으로 불필요하다 - 상위 언어적 술어 ‘사실이다’['is true']와 크게 다르다. 후자[後者]는 ‘결론이 참이 아니라면, 전제들 모두가 참일 리가 없다’나 ‘죤은 한 번 참인 서술을 했다’와 같은 일반적인 말에 필요하다.)
나는 슐리크(Schlick)의 이론이 오류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이론에 관하여 그가 한 특정 비평이 (전게서) 타스키의 이론을 다소 밝혀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진리의 문제가, 몇 가지 다른 문제들이 실제로 상당히 평범해서 처음 보기에 인상적이지 않았던 반면, 그 몇 가지 다른 문제들이 매우 깊은 수준에 놓여있다고 잘못 상상되었기 때문에 그 다른 문제들의 해답이 쉽게 보이지 않았던 몇 가지 다른 문제들의 운명을 따랐다고 슐리크가 말하기 때문이다. 타스키의 해법은 처음 보기에 인상적이지 않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해법의 풍요로움과 그 해법의 힘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VIII
타스키의 업적 덕분에, 객관적이나 절대적 진리의 개념이 - 다시 말해서 사실들과 일치로서의 진리 - 그 개념을 이해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하여 확신적으로 오늘날 수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의 난제들은 두 가지 근원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첫째로, 매우 단순한 직감적 개념을, 전문적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데서 그 개념이 초래하는 어떤 양의 복잡성과 결합시키는 것; 두 번째로, 만족스러운 진리 이론은 참인 신념에 대한 - 사실에 근거하거나 합리적인 신념 -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널리 퍼져있지만 잘못된 독단. 정말로, 진리에 관한 일치 이론의 세 가지 적(敵)인 - 일관성을 진리로 오해하는 일관성 이론, ‘사실로 알려진’을 ‘사실적’으로 오해하는 증거 이론, 그리고 실용성을 진리로 오해하는 실용적이거나 도구주의적 이론 - 이것들 모두는, 타스키의 객관적 (혹은 ‘상위 논리적’) 이론과 대조되어, 진리에 대한 주관적 (혹은 ‘인식적’) 이론들이다. 그것들은, 예를 들어 그 지식의 역사에 의해서나 다른 신념들에 대한 그 지식의 관계에 의하여 특징지어진, 특별한 종류의 정신 상태로서, 혹은 의향으로서, 혹은 특별한 종류의 신념으로서 지식을 간주할 수 있는 근본적인 주관주의적 견해로부터 그것들 모두가 유래한다는 의미에서 주관적이다.
믿는 것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시작하여, 그리하여 지식을 특별한 종류의 신념으로서 간주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진리를 - 다시 말해서, 참인 지식 - 어떤 훨씬 더 특별한 종류의 신념으로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거나 정당화된 종류의 신념으로서. 이것은, 부분적인 것뿐이라 할지라도, 사실에 근거한 어떤 다소 효과적인 기준이 틀림없이 있음을 의미하리라; 신념에 대한 다른 경험들로부터 사실에 근거한 신념들에 대한 경험을 차별화하는 어떤 징조. 진리에 대한 모든 주관적인 이론들은 그런 기준을 겨냥함이 밝혀질 수 있다: 그 이론들은 우리가 지닌 신념들의 근원이나 시발점으로써,?? 혹은 우리의 검증 작업이나 어떤 일련의 수용 규칙들로써, 혹은 단지 우리가 지닌 주관적인 신념의 특질로써, 진리를 정의(定義)하려고 노력한다. 진리는, 특정 규칙들이나 기준들에 따라서, 우리들이 지닌 지식의 출처들이나 근원들에 대하여 혹은 신념의 신뢰성이나 성공이나 힘에 대하여 혹은 달리 생각할 수 없음에 대하여 우리가 믿거나 수용하는 것에 정당화된다고 그 이론들 모두는, 다소간, 말한다.
객관적 진리의 이론은 매우 다른 견해를 초래한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이것은 알려질 것이다: 이론은 아마도 그 이론을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 이론이 참이라고 믿을 이유가 우리에게 없다 할지라도, 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이론은 그 이론을 수용할 비교적 충분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거짓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진리에 대한 주관적이거나 인식적 이론의 관점에서 고찰되면 이 주장들은 자기-모순적으로 보이리라. 그러나 객관적 이론 안에서, 그 주장들은 일관적일 뿐만 아니라, 철저히 명백하게 참이다.
객관적인 일치 이론이 완전히 자연스럽게 내놓을 유사한 주장은 이러하다: 우리가 참인 이론을 떠올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대체로 단지 상상을 하고 있을 것이어서 그 이론이 참인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2,500년 전에 살았던 제노파네스(Xenophanes)??에 의하여, 분명히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 주장은 진리에 대한 객관적 이론이 정말로 오래되었음을 - 역시 그 주장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앞서서 - 보여준다. 그러나 타스키의 업적으로써만 사실들과 일치로서의 진리에 대한
?? 이 책의 나의 서문,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관하여’ 참조.
?? 위 26쪽 나의 서문, 그리고 152쪽 이하 5장 참조.
객관적 이론이, 우리가 그 이론 없이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기-모순적이거나 (거짓말쟁이의 역설 때문에), 혹은 텅 비었거나 (램지[Ramsey]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효과가 없거나, 혹은 최소한도 불필요할 것이라는 의혹이 제거되었다.
나의 과학적 진보 이론 속에서, 어느 정도까지, 그 이론 없이도 나는 아마도 일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스키 이래, 나는 내가 그 이론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지식 탐구와 힘의 탐색이나 강력한 도구 탐색의, 차이점을 해명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그 이론 없이는 일을 해나갈 수 없다. 그 까닭은 차이점이, 지식 탐구에서, 우리가 참인 혹은 적어도 다른 이론들보다 진리에 더 가까운 이론들을, - 사실들과 더 잘 일치하는 -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력한 도구 탐색에서는 우리가, 많은 경우에, 거짓으로 알려진 이론들에 의하여 매우 충분히 도움을 받는 반면.??
그래서 객관적 즉, 절대적 진리에 관한 이론의 한 가지 커다란 이점은 그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가 - 제노파네스와 함께 -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지만, 언제 진리를 우리가 발견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리에 대한 기준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제적 원리로서의 (칸트나 퍼스[Peirce]가 아마도 말했을 것과 같이) 진리에 대한 개념에 의하여 지도를 받는다고;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기준은 없을지라도 - 아마도 동어반복적인 진리를 제외하고 - 진리를 향한 진보에 대한 기준은 있다고 (내가 곧 설명할 것과 같이).
사실들과의 일치로서, 객관적 의미에서 진리의 위상과, 규제적 원리로서 진리의 역할은 보통 구름에 쌓여있는 산꼭대기의 위상에 비견될 것이다. 등반가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지만은 않을 것이다 - 등반가는, 구름 속에서, 주봉과 부차적 봉우리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언제 산꼭대기에 도달하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산꼭대기의 객관적 존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오류에 대한, 혹은 의구심에 대한 바로 그 생각이 (정상적인 솔직한 의미에서)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객관적 진리에 대한 개념을 암시한다.
등반가가 자신이 정상에 도달했음을 확신하는 일이 불가능할지라도, 등반가가 자신이 정상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혹은 정상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음) 깨닫는 일은 흔히 쉬운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돌출한 절벽에 의하여 등반가가 돌아설 때. 유사하게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우리가 완벽하게 확신할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논증이 가능하게 일관적인 체계들도 사실상 거짓일지도 모르는 이유만으로 일관성은 진리에 대한 기준이 아닌 반면, 논리적 모순은 정말로 오류를 입증한다; 그래서 우리가 운이 좋다면, 우리는 우리가 지닌 이론들 몇 가지의 오류를 발견할 것이다.??
1944년 타스키가 자신의 진리 이론에 대한 연구물의 영어로 된 개요를 (그는 1933년 폴란드에서 그 이론을 발간했다) 최초로 발간했을 때,
?? ‘두 번째 견해’에 (‘도구주의’라고 불리는) 대한 토론은 위 3장에서 참조.
??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의 논문 ‘진리의 의미론적 개념(The Semantic Conception of Truth)’, 철학과 현상학적 탐구(Philosophy and Phenom. Research), 4, 1943-4년, 341쪽 이하 참조. (특히 21부 참조.)
제노파네스의 주장과 같은 주장들을 감히 했던 철학자는 없었다; 그리고 타스키의 논문을 실었던 책이 또한 두 가지 진리에 관한 주관주의적 논문들을 담고 있었던 것은 흥미롭다.??
그 후 사태가 개선되었다 할지라도, 주관주의는 과학철학에서, 그리고 특히 확률 이론 분야에서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확률에 대한 주관주의적 이론은, 확률의 정도(程度: degrees)를 이성적 신념의 정도(程度)로서 해석하는데, 진리에 대한 주관주의적 접근으로부터 - 특히 일관성 이론으로부터 - 직접적으로 유래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타스키의 진리 이론을 수용한 철학자들에 의하여 여전히 포용된다. 적어도 그 철학자들 중 몇몇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이론이 자신들이 검증을 통한 진리 도달이라는 주관주의적 즉, 인식론적 이론으로부터 당초에 기대했던 것을 자신들에게 줄 것이라는 희망에서 확률 이론으로 선회했다; 다시 말해서, 관찰되는 사례들에 근거한, 합리적이고 정당화될 수 있는 믿음에 대한 이론.??
주관주의적 이론들이 논박될 수 없다는 것은 (주관주의적 이론들이 너무 쉽게 비판을 피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 모든 주관주의적 이론들 안에서 어려운 점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세상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이, 혹은 우리가 대수(對數)에 관하여 표기하는 모든 것이 신념 서술로써 틀림없이 갈음될 수 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눈의 희다(Snow is white)’라는 서술을 ‘눈이 희다고 나는 믿는다(I believe that snow is white)’나 혹은 아마도 심지어 ‘이용가능한 모든 증거에 비추어 눈은 희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나는 믿는다(In the light of all the available evidence I believe that it is rational to believe that snow is white)’로 갈음할 것이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객관적인 세상에 대한 주장들을 주관적인 과잉 표현의 하나로 갈음할 수 있다는 것은, 대수표에서 발견되는 주장의 경우에 - 기계들에 의하여 만들어질 - 다소 확신적이 아니라 할지라도, 하찮다. (말이 난 김에 논리적 확률에 대한 주관주의적 해석은 이 주관주의적 대체물들을, 진리에 대한 일관성 이론의 경우에서와 정확하게 같게, 근접 분석으로 통하여 ‘의미론적’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구문론적’으로 판명되는 접근방식과 연결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 그 해석이 ‘의미론적 체계’ 안에서 제시될지라도.)
작은 표의 도움을 받아서 과학적 지식에 대한 객관적 이론과 주관적 이론 사이의 관계를 요약하는 일이 유용할 것이다:
객관적 혹은 논리적 혹은 주관적 혹은 심리학적 혹은
존재론적 이론들 인식론적 이론들
사실들과 일치로서의 우리의 정신 상태의 - 혹은
진리 믿음 - 특질로서의 진리
객관적 확률 주관적 확률
(상황 속에 내재적이어서 (우리의 전체 지식에 근거한
통계적 시험으로 시험 가능) 합리적 믿음의 정도)
객관적 무작위성 지식의 결핍
(통계적으로 시험 가능)
등가확률 지식의 결핍
(물리적이거나 상황적 대칭)
이 모든 경우에 이 두 가지 접근방법이 구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 앞의 주석에서 언급된 책, 특히 279쪽 및 336쪽 참조.
?? 카르납(Carnap)의 확률의 논리적 기초(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 1950년, 177쪽과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84부 참조.
주관주의적 접근방법은 실수에 - 아마도 매혹적인 실수라 할지라도 - 근거한 것으로서, 작은 실책으로서 배척되어한다. 그러나 인식론적 (오른쪽) 부분이 실수에 근거하지 않은 유사한 표도 있다.
진리 추측
시험가능성 경험적 시험
설명적 혹은 예언적 힘 입증도
(다시 말해서, 시혐 결과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보고서)
3. 진리와 내용: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대(對) 확률
IX
많은 다른 철학자들처럼 나에게는 때때로 철학자들을 두 가지 주요 무리에 - 내가 동의하지 않는 무리와 내가 동의하는 무리 -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들을 또한 지식에 대한 (혹은 신념에 대한) 검증주의자들이나 정당화주의적 철학자들과, 지식에 대한 (혹은 추측에 대한) 반증주의자나 오류 가능주의자나 비판적 철학자들로 부른다. 나는 말이 난 김에 내가 또한 동의하지 않는 세 번째 무리를 언급할 것이다. 그들은 실망한 정당화주의자들로 - 비이성주의자들과 회의주의자들 - 불릴 것이다.
첫 번째 무리의 구성원들은 - 검증주의자들이나 정당화주의자들 - 개략적으로 말해서, 확실한 이유에 의하여 지지될 수 없는 모든 것은 믿어질, 혹은 진지하게 고찰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으로, 두 번째 무리의 구성원들은 - 반증주의자들이나 오류 가능주의자들 - 개략적으로 말해서, (현재) 비판에 의하여 원칙적으로 전복될 수 없는 것은 진지하게 고찰될 가치가 (현재) 없다고 말한다; 원칙적으로 그렇게 전복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복시키려는 우리의 모든 비판적 노력에 저항하는 것은 아마도 거짓이겠지만, 아무튼 - 오직 임시적이라 할지라도 - 진지하게 고찰되어 아마도 심지어 믿어질 가치도 없는 반면.
검증주의자들은, 내가 인정하는 바, 이성주의의 가장 중요한 전통을 - 미신과 자의적 권위에 대항하는 이성(理性)의 싸움 - 열심히 지지한다. 그 까닭은 신념이 확실한 증거에 의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우리가 신념을 수용해야 한다고 그들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실로, 혹은 적어도 매우 개연적으로 증명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다시 말해서, 신념이 검증되거나 개연적으로 확증될 수 있다는 조건에서만 우리가 신념을 수용해야 한다고 그들은 요구한다.
반증주의자들은 (내가 속한 오류 가능주의자들의 집단) - 대부분의 비이성주의자들이 또한 믿는 바와 같이 - 첫 번째 무리의 프로그램이 성취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논리적 논증을 발견했다고 믿는다: 이론이 참이라는 믿음을 정당화하는 확실한 이유들을 우리가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러나 비이성주의자들과 달리, 우리 이성주의자들은, 원래 귀납주의적이거나 정당화주의적인 프로그램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의 미신으로부터 이성적인 과학을 구분하는 옛 이상(理想)을 실현하는 방법을 또한 발견했다고 믿는다. 과학의 합리성이 과학의 독단을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의 도움을 받는 과학의 관습에 놓여있는 것이 - 점성가들은 또한 그렇게 한다 - 아니라 비판적 접근에만 놓여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이 이상(理想)이, 매우 간단히, 실현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른 논증들 가운데서, 경험적 증거를 비판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특히 논박에서), 물론, 포함하는 태도에 놓여있다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과학은 확실성이나 확률이나 신뢰성의 추구와 관련이 없다. 우리는 과학적 이론들을 안전하거나 확실하거나 개연적으로 확립하는 데에 관심이 없다. 우리가 지닌 오류 가능성을 의식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에서 우리가 틀렸는지를 알아내기를 희망하며, 과학적 이론들을 비판하고 시험하는 데에 관심을 가질 따름이다;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우리가 운이 좋다면, 저 나은 이론들로 나아가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에.
과학에서 논증의 확실하거나 부정적인 기능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고찰하여, 첫 번째 무리는 - 정당화주의자들 - ‘실증주의자들’이라는 별칭이 붙을 것이고 두 번째 무리는 -내가 속하는 집단 - 비판자들이나 ‘부정주의자(negativists)’로는 별칭이 붙을 것이다. 이것들은, 물론, 별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마도, 우리 비판자들이나 부정주의자들이 진리 추구에 태만하여 효과도 없고 파괴적인 비판에 중독되어 그리하여 분명히 역설적인 견해들을 제시하는 데에 중독되어 있는 반면, 실증주의자들과 검증주의자들만이 진지하게 진리 및 진리 탐구에 관심을 갖는다고 몇몇 사람들이 믿는 이유 몇 가지를 제시할 것이다.
우리들이 지닌 견해에 대한 이 잘못된 묘사는 주로 내가 기술(記述)한 진리에 대한 잘못된 주관주의적 접근방식을, 그리고 정당화주의자들의 프로그램을, 채택하는 데서 발생하는 듯이 보인다.
그 까닭은 우리 역시 과학을 진리 추구로서 보며, 그리고 적어도 타스키(Tarski) 이래, 우리는 더 이상 그렇다고 말하기를 두려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진정으로 우리가 오류를 저지를 수 있지만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기를 희망한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진리 발견인 이 목적에 관해서뿐이다. 실수와 이성적 비판에 관하여 우리가 합당하게 말하도록 허용하여 이성적 토론이 - 다시 말해서, 진리에 더 가깝게 가기 위하여, 이 실수를 가능한 한 많이 제거하려는 진지한 목적을 가지고 실수를 탐색하는 비판적 토론 -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진리에 대한 개념뿐이다. 그리하여 실수에 대한 - 그리고 오류 가능성에 대한 - 바로 그 개념은 객관적 진리의 개념을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기준으로서 포함한다. (진리의 개념이 규제적 개념인 것은 이런 의미에서 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학의 과제가 진리 추구라는, 다시 말해서, 참인 이론 추구라는 (우리는 그 참인 이론들을 획득하지 못할 것이나, 우리가 그 참인 이론들을 획득해도 참으로 알지 못할 것이라고 제노파네스[Xenophanes]가 지적한 바와 같다 할지라도) 생각을 수용한다. 그러나 진리는 과학의 유일한 목표가 아니라고 우리는 또한 강조한다. 우리는 단순한 진리 이상을 원한다: 우리가 찾는 것은 흥미로운 진리이다 - 획득하기 어려운 진리. 그래서 자연과학에서 (수학과 구분되어) 우리가 찾는 것은,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없는 진리를 암시하는 의미에서, 고도의 설명력을 지닌 진리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단순히 진리를 원치 않는다는 것 - 우리는 더 많은 진리를, 그리고 새로운 진리를 원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2 x 2 = 4’에 만족하지 않는다: 위상기하학이나 물리학에서 우리가 난제에 봉착한다면 우리는 구구단표를 암송하여 이용하지 않는다. 단순한 진리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가 찾는 것은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다. 요점은 막스와 모리츠(Max-and-Moritz)로 유명한 독일 해학가이자 시인인 부슈(Busch)에 의한 짧은 동요에서 잘 표현되었다 - 나는 인식론적 보육을 위한 동요를 의미한다:??
2 곱하기 2는 4: 그것은 사실이지,
그러나 너무 공허하고, 너무 진부해.
내가 찾는 것은 실마리이지
그렇게 가볍지 않는 어떤 문제들에 대한.
문제에 - 어렵고 풍요로운 문제, 깊이를 지닌 문제 - 대한 해답이라는 조건에서만 진리나, 진리에 대한 추측은 과학과 연관된다. 이것은 순수수학에서도 그렇고, 이것은 자연과학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후자(後者)에서, 우리는, 이전에 이 분야에서 제시된 최고의 이론이나 추측과 비교되어, 제시된 새로운 해답의 논리적 비개연성이나 설명력의 증가에서 문제의 깊이나 중대성의 논리적 척도와 같은 것을 경험한다. 이 논리적 척도는 본질적으로 내가 위에서 잠재적 만족스러움과 진보에 대한 논리적 기준으로서 기술(記述)한 것과 동일하다.
이 상황에 대한 나의 기술(記述)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결국 우리 부정주의자들에게 심지어 규제적 원리로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유혹을 아마도 받을 것이다. 부정주의자들은 (나와 같은) 흥미로운 문제들 대담한 추측으로써 풀려는 시도를, 비록 그 추측이 곧 거짓으로 판명된다 할지라도, 참이지만 흥미롭지 못한 일련의 주장들을 암송하는 것보다 많이 선호하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있을 리 없다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 부정주의자들은 진리의 개념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 진보와 시도된 문제-해결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진리의 개념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믿기에, 우리 집단이 지닌 자세에 대하여 철저히 잘못된 인상을 주리라. 우리를 부정주의자들이든, 무엇이든 당신들이 원하는 것으로 부르라: 그러나 당신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만큼 - 예를 들어, 법정의 구성원만큼 - 진리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판사가 증인에게 ‘진실을, 모든 진실을,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말할 때, 판사가 찾는 것은 증인이 제시할 수 있는 만큼 관련된 진실에 관한 것이다. 무관한 것 속으로 길을 벗어나기를 좋아하는 증인은, 이 무관한 것들이 자명한 이치여서 ‘전체 진실’의 한 부분이라 할지라도, 증인으로서 불충분하다. 판사가 - 혹은 다른 사람이 - ‘모든 진실’을 요구할 때 원하는 것은 얻어질 수 있는 만큼의 흥미롭고 관련이 있는 참된 정보임이 전적으로 명백하다; 그리고 많은 완벽하게 솔직한 증인들이 사건에 대한 정보의 관련성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중요한 정보를 밝히지 못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부슈(Busch)와 함께, 단순한 진리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고 관련성이 있은 진리에 관심을 갖는다고 강조할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이 수용하는 요점을 강조할 따름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 W. 부슈(Busch)의 가상과 존재(Schein und Sein) (저자의 사후 1909년에 처음 발간됨; 인셀[Insel] 판 1952년의 28쪽)으로부터. 고인이 된 나의 친구 율리우스 크라프트(Julius Kraft)가 교육과 정치(Erziehung und Politik)라는 책에 (미나 스페히트[Minna Specht]를 위한 논문, 1960년) 기고한 철학자로서 부슈에 관한 논문에 의하여 이 동요에 나는 주목하게 되었다; 262쪽 참조. 나의 번역은 아마도 그것을 부슈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동요처럼 만든다.
그래서 그것들이 곧 거짓으로 틀림없이 판명된다 할지라도 우리가 대담한 추측들에 관심을 갖는다면, 이 관심은 그런 대담한 추측들의 도움으로써만 우리가 흥미롭고 관련이 있는 진리를 발견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는 우리의 방법론적 신념 때문이다.
내가 제안하는 바, 논리학자가 분석하는 특수한 과제인 요점이 여기 있다. 여기에 의도된 의미에서, ‘관심’이나 ‘관련’은 객관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관심’이나 ‘관련’은 우리의 문제와 관련된다; 그래서 ‘관심’이나 ‘관련’은 설명력에, 그리하여 정보의 내용이나 비개연성에 의존한다. 앞에서 언급된 (그리고 이 책의 부록에서 전개된) 척도들은 정확하게 정보의 어떤 상대적 내용을 - 가설이나 문제와 관련된 정보의 내용 - 고려하는 것과 같은 그런 척도들이다.
그러므로 나와 같은 반증주의자들은 대담한 추측으로써, 그 추측이 곧 거짓으로 판명된다 할지라도 (그리고 특히 거짓으로 판명된다는 조건으로), 흥미로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일련의 무관한 진부한 표현을 암송하는 것보다, 선호함을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실수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우리의 추측이 거짓임을 발견하면서, 우리가 진리에 대하여 많이 배워서 진리에 더 가까이 갈 것임을 우리가 믿기 때문에.
그러므로 두 가지 개념 모두가 - 사실과 일치라는 의미에서 진리의 개념과, 내용의 개념 (시험가능성과 동일한 척도로써 측정될) - 우리의 고찰에서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역할을 함과, 두 가지 개념 모두가 과학에서의 진보라는 개념을 많이 밝혀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X
과학적 지식의 진보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진리에 얼마나 가깝게 있는지 혹은 진리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점점 더 진리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흔히 정말로 접근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감동을 받아 말했다. 내 자신도 과거에 때때로 그렇게 말했지만, 항상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우리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었음을 내가 신뢰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능한 한 분명하게 우리가 말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이 실제보다 더 분명한 체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전제들로부터 표면적으로 정확한 결과들을 도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발적인 모호함에서나 간혹 사물들에 대하여 우리의 감정들이나 일반적인 직감적 인상들을 표현하는 데에서 어떤 해로움도 없다. 그러나 진리에 더 근접하는 것으로서, 혹은 진리에 대한 일종의 접근방식으로서 과학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내가 쓰거나 말하곤 할 때마다, 우리가 소문자들로써 평범한 방식으로 명백하게 양심적으로 쓸 수 있는 타스키(Tarski)의 ‘진리(truth)’와 구분되어, 모호하고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철저히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정말로 ‘진리(Truth)’를 대문자 T를 사용하여 쓰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느꼈다.??
여기에 포함된 진리의 개념이 결국 실제로 그렇게 위험하게 모호하고 형이상학적인지를 고찰할 과제를 내 자신에게 내가 부여한 것은 겨우 최근이었다.
?? 콰인(Quine)이 진리에 접근하는 개념으로써 일을 해나가는 것에 대하여 퍼스(Peirce)를 비판했을 때 비슷한 의심이 표현되었다. W. V. 콰인(Quine)의 말과 대상(Words and Object), 뉴욕, 1960년, 23 쪽 참조.
거의 즉시 나는 여기에 포함된 진리의 개념이 그렇지 않다는 것과, 타스키의 근본적인 개념을 그 진리의 개념에 적용하는 데에 특별한 난제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까닭은 한 가지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더 잘 사실과 일치한다고 우리가 말해서는 안 되는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초기 단계로 인하여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여기 처음 보기에 대문자 ‘T’를 지닌 진리(Truth)로 보였던 것과 타스키가 의미하는 바에서의 진리 사이에는 실제로 장애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더 나은 일치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까? 진리의 정도(程度: degrees)와 같은 그런 것들이 있는가? 타스키가 말하는 진리가 일종의 계량적이거나 적어도 위상기하학적 공간 어디에 위치하여 우리가 두 가지 이론에 대하여 - 가령 초기 이론 t1과 나중 이론 t2 - t2가 t1보다 진리에 더 가깝게 접근함으로써 t1을 대체했다거나, t1을 넘어 진보했다고 우리가 합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위험스럽게 오도하는 것은 아닌가?
이런 종류의 말이 조금이라도 오도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진리에 대한 더 낫거나 더 못한 근사치라는 이 개념과 같은 것 없이는 우리가 일을 해나갈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 까닭은 우리가 이론 t2에 대하여 또 다른 이론 t1보다 사실과 더 잘 일치한다고, 혹은 우리가 아는 한 이론 t2가 사실과 더 잘 일치하는 듯 보인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거나 흔히 말하기를 원하는 데에 어떤 의심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t2가 - 우리가 아는 한 - 이런 저런 의미에서 t1보다 사실과 더 잘 일치하는 듯이 보인다는 의미에서 t2에 의하여 갈음된다고 우리가 그 유형 속에서 이론 t1에 대하여 말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틀림없이 있는 여섯 유형의 사례를 다소 비체계적인 목록으로 내놓겠다.
(1) t2는 t1보다 더 정확한 주장을 하며, 이 더 정확한 주장은 더 정확한 시험을 견디어낸다.
(2) t2는 (예를 들어 다른 것들이 동일하다면, t2의 주장들이 더 정확한 위의 경우를 포함할) t1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고려하고, 설명한다.
(3) t2는 t1보다 더 상세하게 사실들을 기술(記述)하거나, 설명한다.
(4) t2는 t1이 통과하지 못한 시험들을 통과했다.
(5) t2는 t2가 만들어지기 전에 고려되지 않은 (그리고 t1에 의하여 제시되지도 않고, 아마도 심지어 t1에 적용될 수도 없는) 새로운 실험적 시험들을 제시했다: 그리고 t2는 이 시험들을 통과했다.
(6) t2는 지금까지 관련이 없던 다양한 문제들을 통합하거나 결합하였다.
우리가 이 목록을 심사숙고한다면, 이론 t1과 t2의 내용이 그 목록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내가 a의 경험적 내용을 a를 부인하는 모든 기본적 서술들의 집합으로서 정의[定義]한 반면, 서술이나 이론 a의 논리적 내용이 a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모든 서술의 집합임이 기억될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의 여섯 경우의 목록에서, 이론 t2의 경험적 내용이 이론 t1의 경험적 내용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진리에 대한 개념들과 내용에 대한 개념들을 하나로 - 진리와 더 나은 (혹은 더 못한) 일치의 정도(程度), 혹은 진리와 더 큰 (혹은 더 적은) 비슷함이나 유사함의 정도라는 개념; 또는 위에 이미 언급된 용어를 사용하여 (확률과 대조적으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정도[程度]라는) 개념 - 결함시키는 것을 이것은 의미한다.
?? 이 정의(定義)는, 논리적 내용의 ‘경험적 부분’에 관한 한, 경험적 내용과 논리적 내용의 비교는 항상 동일한 결과들을 낳는다는 정리(定理)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정당화된다; 그리고 서술 a가 가능한 더 많은 경험을 배제할수록 (혹은 금지할수록) 우리가 지닌 경험의 세상에 대하여 더 많이 말한다는 고찰에 의하여 직감적으로 정당화된다. 기본적 서술들에 대해서는 이 책의 부록 1을 또한 참조.
모든 서술이나 이론이 참이거나 거짓일 뿐만 아니라, 자체의 진리 가치와 독립적으로, 어느 정도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을 지니고 있다는 개념은 복합적-가치를 지닌 논리를 - 다시 말해서, 참과 거짓인 두 가지 이상의 진리 가치들을 지닌 논리적 체계 - 낳는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복합적-가치를 지닌 논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들 중 몇 가지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이론에 (그리고 이 책의 부록 3부에서 언급된 관련된 이론들) 의해서 실현되는 듯이 보일지라도.
XI
내가 문제를 보자마자 이 요점에 도달하는 데는 시간이 길게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2와 2를 합치고, 이곳에서부터 진리와 내용에 관한 매우 간단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의 정의(定義)로 나아가는 데는 나에게 긴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논리적 내용이나 경험적 내용을 이용하여, 그리하여 우리가 여기서 경험적 이론들이나 이론들의 경험적 모습들만을 고려한다면 아무튼 하나로 합쳐지는, 박진성에 대하여 두 가지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들을 획득할 수 있다.)
서술 a의 내용을 고찰하자; 다시 말해서, a의 모든 논리적 결과들의 집합. a가 참이라면, 진리는 항상 전제로부터 그 전제의 모든 결론으로 전이되기 때문에, 이 집합은 참인 서술로만 구성될 수 있다. 그러나 a가 거짓이라면, a의 내용은 항상 참인 결과와 거짓인 결과 모두로 구성될 것이다. (보기: ‘일요일에는 항상 비가 온다’는 거짓이지만 그 결과인 지난 일요일에는 비가 왔다는 우연히 참이다.) 그리하여 서술이 참이든 거짓이든, 그 서술의 내용이 더 크거나 더 작은 숫자의 참인 서술로 구성되는지에 따라서, 그 서술이 말하는 것에는 더 많은 진리나 더 적은 진리가 있을 것이다.
a의 참인 논리적 결과들의 집합을 a의 ‘진리-내용(truth-content)’이라고 (독일어 ‘Wahrheitsgehalt'’가 - ‘당신이 말하는 것에는 진리가 있다’는 표현을 상기시키는 - ‘진리-내용’의 번역으로 일컬어질 텐데, 오랫동안 직감적으로 사용되었다) 부르자; 그래서 a의 거짓 결과들의 집합을 - 오직 이것들만을 - a의 ‘거짓-내용(falsity-content)’라고 부르자. (‘거짓-내용’은, 엄격하게 말해서, 그 요소를 형성하는 거짓 서술들의 참인 결론들 어느 것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두 가지 내용의 도움을 받아서 거짓-내용의 척도를 정의[定義]하는 일이 가능하다 - 부록 참조.) 이 용어들은 ‘참’이나 ‘거짓’ 그리고 ‘내용’ 자체들만큼 정확하게 객관적이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t1과 t2 두 가지 이론의 진리-내용과 거짓-내용이 비교될 수 있다고 상정(想定)하기 때문에, 다음 두 조건의 하나라면, 그리고 그 조건만이라면 t2가 t1보다 진리에 더 가깝게 유사하다 즉, 사실과 더 잘 일치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a) t2의 거짓-내용이 아니라 진리-내용이 t1,의 진리-내용을 능가하거나, 혹은
(b) t1의 진리-내용이 아니라 거짓-내용이 t2의 거짓-내용을 능가한다면.
이제 우리가 이론 a의 내용과 진리-내용이 원칙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아마도 허구적) 상정(想定)으로써 작업을 한다면, 우리는 이 정의(定義)를 다소 초월하여 Vs(a)를, 다시 말하여 a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즉, 진리 유사성(truthlikeness)의 척도를 정의(定義)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정의(定義)는
Vs(a) = CtT(a) - CtF(a)로
CtT(a)는 a의 진리-내용의 척도이고, CtF(a)는 a의 거짓-내용의 척도이다. 다소 더 복잡하지만 몇 가지 면에서 선호될 수 있는 정의(定義)가 이 책의 부록 3부에서 발견될 것이다.
Vs(a)가 우리의 두 가지 요구를 충족시킨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 두 가지 요구에 따라서 Vs(a)는 증가하는데
(a) CtF(a)가 증가하지 않는 동안 CtT(a)가 증가한다면, 그리고
(b) CtT(a)가 감소하지 않는 동안 CtF(a)가 감소한다면.
다소 기술적인 본질과 CtT(a) 및 특히 CtF(a)와 Vs(a)에 대한 심층적 고찰이 부록에서 발견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세 가지 기술적이 아닌 요점들을 토론하기만을 원한다.
XII
첫 번째 요점은 이렇다. 진리의 근사치에 대한, 혹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객관적, 즉 절대적 진리의 개념과 동일한 객관적 특징과 및 그 개념과 동일한 이상적(理想的) 즉, 규제적 특징을 지닌다. 그 개념은 - 진리나 내용이 그렇지 않은 것처럼 - 인식론적이거나 인식에 대한 개념이 아니다. (타스키의 용어 사용법으로, 그 개념은 진리처럼, 혹은 논리적 결과처럼, 분명히 ‘의미론적’ 개념이어서 그러므로 내용이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이론 t2가 t1보다 더 높은 정도의 박진성을 지니고 있다고 당신이 말한다면 당신이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이론 t1보다 t2가 더 높은 정도의 박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을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첫 번째 질문에만 답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첫 번째 질문에 달려있고, 진리에 대한 유사한 (비교적이라기보다는 절대적) 질문과 정확하게 유사하다: ‘나는 알지 못한다 - 나는 추측할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추측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고, 그 추측이 엄격한 비판을 견디어낸다면, 이 사실은 그 추측을 지지하는 충분한 비판적 이유로서 생각될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요점은 이렇다. 박진성은 그렇게 정의(定義)되어서 최대 박진성은 참일 뿐만 아니라, 철저히 포괄적으로 참인 이론에 의해서만 이룩되리라: 박진성이 모든 사실과, 말하자면, 물론, 실제 사실과만 일치한다면. 이것은 물론 어떤 사실과의 일치에 (가령, ‘눈은 보통 희다’에서처럼) 지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멀어서 이룩될 수 없는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박진성의 최대 정도에만 유효하고 이론들이 지닌 박진성의 정도에 관한 이론들의 비교에는 유효하지 않다. 이 개념의 비교 용법은 그것의 요점이다; 그리고 박진성의 높거나 낮은 개념은 덜 동떨어져서 더 적용 가능하여 그러므로 아마도 - 본질적으로 훨씬 더 근본적인 - 절대적 진리 자체의 개념보다 과학적 방법의 분석에 관하여 더 중요하다.
이것으로 인하여 나는 나의 세 번째 요점에 다다른다. 박진성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방법 이론에서 어떤 변화를 초래하리라고 나는 제안하지 않음을 나는 먼저 말하고 싶다. 반대로 나는 시험가능성이나 경험적 시험에 의한 입증에 관한 나의 이론은 이 새로운 상위-논리적 개념에 대한 합당한 방법론적 대응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일한 개선은 해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짓 이론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에 관하여, 사실일 이론보다 틀림없이 더 나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 엄격한 시험에 실패한 이론 t1보다 그 시험을 통과한 이론 t2를 선호한다고 나는 자주 말했다.
이것에 우리는 이제, 심지어 t2가 차례에 따라 논박된 후에도, t1 및 t2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할지라도 t1이 통과하지 못한 시험을 t2가 견디어냈다는 사실은 t1의 진리-내용이 t2의 진리-내용을 능가하지 못하는 반면 t1의 거짓-내용이 t2의 거짓-내용을 능가한다는 충분한 표시일 것이기 때문에, t2가t1보다 더 낫다고 우리는 여전히 말할 수 있음을 첨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t2가 반증된 후에도, t1보다 더 잘 사실과 일치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t2를 선호할 것이다.
t2와 t1 사이에서 결정적이던 실험들 때문에 우리가 t2를 수용하는 모든 경우는 이런 종류로 보이고, 특히 t2의 도움을 받아서, t1이 초래했던 것과 다른 결과들을 t2가 초래하는 경우들을 철저히 생각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실험들이 이루어졌던 모든 경우들이 이런 종류로 보인다. 그리하여 뉴튼의 이론을 인하여 우리는 케플러 법칙으로부터의 몇 가지 일탈을 예측할 수 있었다. 이 분야에서 뉴튼 이론의 성공은 케플러의 이론을 논박한 경우에 뉴튼 이론은 실패하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케플러의 이론이 ‘최초의 근사치’로서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진리-내용이 위축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한 반면, 적어도 지금 알려진 케플러 이론의 거짓-내용은 뉴튼 이론의 한 부분이 아니었다.
유사하게 t1보다 더 정확한 이론 t2는 이제 - 그 거짓 내용이 t1의 거짓 내용을 능가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항상 - t1보다 더 높은 정도의 박진성을 갖는다고 밝혀질 수 있다. 그 숫자적 주장이, 거짓일지라도, t1의 숫자적 주장들보다 참인 숫자적 가치들에 더 가까운 t2에게도 동일한 것이 유효하다.
궁극적으로 박진성의 개념은, 기껏해야 근사치인 이론들로써 -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실제로 사실일리가 없다고 알고 있는 이론들 - 우리가 일을 해나가야 한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경우에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사회과학의 경우에 흔히 그러하다.) 이 경우에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더 낫거나 더 못한 근사치에 대하여 여전히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하여 이 경우들을 도구주의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XIII
물론 우리가 두 가지 이론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면서 실수를 저지를 것은 항상 가능하여, 평가는 흔히 논쟁적 문제가 될 것이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우리가 지닌 배경 지식에 혁명적인 변화가 없다면, 두 가지 이론 t1과 t2에 대한 상대적 평가는 안정된 상태로 남아있을 것임은 또한 중요하다. 더욱 중요하게, 우리가 두 이론 중 더 나은 것을 결국 논박한다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우리의 선호도는 변할 필요가 없다. 뉴튼 역학은, 예를 들어, 그 역학이 논박된 것으로 우리가 간주할지라도, 케플러와 갈릴레오의 이론에 대하여 그 우수성을 물론 유지했다. 이유는 뉴튼 이론이 지닌 더 큰 내용이나 설명력이다. 뉴튼 이론은 케플러나 갈릴레오의 이론보다 더 많은 사실들 계속해서 설명한다; 그 사실들을 더 정밀하게 계속해서 설명한다; 이전에는 연결되지 않던 천체 역학과 지구 역학의 문제들을 계속해서 통합한다. 이것들과 같은 상대적 평가의 안정성에 대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론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그 이론들에 대하여 저 결정적인 실험들이 존재하고, 이것들이, 실행되었을 때 뉴튼의 선배들에게 불리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 관계가 그런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뉴튼 이론에 대한 나중의 논박들이 더 오래된 이론들을 지지할 수 없었다: 그 논박들은 더 오래된 이론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거나, (수성[水星]의 근일점[近日點] 운동에 관해서와 같이) 그 논박들이 이전 이론들을 또한 논박했다고 주장되었다.
사실과 더 나은 일치라는, 혹은 박진성의 정도라는 개념을 이 간단한 조사를 목적으로 내가 충분히 분명하게 설명했기를 나는 희망한다.
XIV
박진성과 확률 사이의 혼란의 초기 역사에 관한 짧은 언급이 아마도 여기서 합당할 것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과학 속의 진보는 더 흥미롭고, 덜 사소하여 그리하여 덜 ‘개연적(probable)’인 이론들을 (그 이론들에서 ‘개연적’이란, 내용의 결핍이나 통계적 빈도와 같은, 확률 계산법을 충족시키는 어떤 의미로 생각된다) 향한 진보를 의미하여, 이것은 보통 덜 익숙하고 덜 편안하거나 합당한 이론들을 향한 진보를 의미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더 큰 유사성이라는, 더 나은 근사치라는 개념은 완전히 다른 확률이라는 (‘아마[more likely than not]’, ‘자주[more often than not’,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seems likely to be true'’, ‘합당하게 들린다[sounds plausible]’, ‘확신적으로 들린다[sounds convincing]’라는 그 다양한 의미에서) 개념과 직감적으로 보통 혼동된다. 그 혼동은 매우 오래되었다. 우리는 그 흔적 몇 가지와 아마도 이 혼동의 근원 몇 가지를 알기 위하여 원래 ‘진리와 같은(like the truth)’이나 ‘사실이 듯한(verisimilar)’으로부터 (그리스어로는 'eoikotōs', 'eikotōs', 'eiskos,' 기타 등등; 라틴어로는 'verisimilis'; 독일어로는 'wahrscheinlich') 유래하는 ‘그럴 것 같은(likely)’과 같은, ‘개연적(probable)’에 관한 다른 단어들 몇 가지를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소크라테스 이전 초기 철학자들 중 적어도 두 명은 'eoikota'를 ‘진리와 같은’이나 ‘진리와 유사한’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제노파네스(Xenophanes)에게서 (DK, B 35) 다음 글을 읽는다: ‘이것들은 진리와 같다고 생각합시다.’
확률이나 미완의 확실성에 대한 정도라기보다는 박진성이나 진리 유사성이 여기서 의미되었음은 상당히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생각합시다[let us suppose]’나 ‘추측되도록 하라[let it be conjectured]’나 ‘상상되도록 하라[let it be imagined]’라는 말은 불필요하여, 제노파네스는 ‘이것들은 개연적이라고 언급되도록 하라[These things, let it be said, are probable]’와 같은 말을 썼을 것이다.)
동일한 말을 ('eoikota') 사용하여, 파메니데스(Parmenides)는 이렇게 쓴다 (DK, B 8, 60);??
?? 이 단편에서 'eoikota'는 매우 빈번하게 ‘개연적(probable)’이나 ‘그럴듯한(plausible)’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W. 크란츠(Kranz)는 딜즈-크란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들(Fragmente der Vorsokratiker), 6판에서 그것을 'wahrscheinlich-einleuchtend'' 다시 말해서, ‘개연적이고 그럴듯한(probable and plausible)’으로 번역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 구절을 이렇게 읽는다: ‘이 세상-배열을 (혹은 세상-질서) 나는 그 배열의 모든 부분에서 개연적이고 그럴듯한 것으로서 당신들에게 설명할 것이다.’ ‘(전적으로) 진리 같은[(wholly) like truth]’이나 ‘(전적으로) 그 진리 같은[(wholly) like the truth]’을 번역하면서, 나는 제노파네스로부터 위에 인용된 글에 (DK, B 35) 의하여 (그리고 또한 빌라모비츠[Wilamowitz]가 언급되는 라인하르트[Reinhardt]의 파메니데스[Parmenides], 5쪽 이하에 의하여) 다소 영향을 받는다. 이 책의 서문 7부 또한 참조; 3장 1부의 오지안더(Osiander)로부터의 인용문; 위 5장 12부; 그리고 아래 부록 6.
‘전적으로 진리처럼 보이도록 그렇게 배열된 이 세상에 대하여 이제 나는 당신에게 말하겠다...’
그러나 이미 같은 세대나 다음 세대에, 에피카무스(Epicharmus)는, 제노파네스에 대한 비판에서, 'eikotōs'라는 단어를 ‘그럴듯한(plausible)’이나 그와 같은 것의 의미로 사용했던 듯이 보인다 (DK, 21 A 15); 그가 그 단어를 ‘진리와 같은(like the truth)’의 의미로 사용했을, 그리고 ‘그럴듯한(plausible)’이나 ‘그럴 것 같은(likely)’의 의미로 그 단어를 읽을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는 (우리가 지닌 출처는 형이상학[Met], 1010a4)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을지라도. 약 3세대 후에, 그러나, 'eikos'는 소피스트 안티폰(Antiphon)이 다음과 같이 쓸 때 (DK, B 60) 안티폰에 의하여 ‘그럴 것 같은(likely)’이나 ‘개연적(probable)’의 (혹은 아마도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에’의) 의미로 완전히 명백하게 사용된다: ‘사람이 일을 잘 시작하면 그 일은 잘 마무리될 것 같다.’
이 모든 것은 박진성과 확률 사이의 혼동이 거의 서양 철학의 시초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암시한다: 그리고 제노파네스가 불확실한 짐작이자 기껏해야 ‘진리와 같은(like the truth)’으로 묘사했던 우리가 지닌 지식의 오류성을 제노파네스가 강조했던 것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이것은 이해 가능하다. 이 표현은 ‘불확실하고 기껏해야 꽤 상당한 정도의 확실성을 지닌’으로서 - 다시 말해서, ‘개연적(probable)’ - 해석 오류에 해당되는 듯하다.
제노파네스 자신은 확실성의 정도와 진리 유사함의 정도를 분명히 구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우리가 우연히 최종적 진리를 (다시 말해서, 완벽한 진리 유사함이라고 우리는 부언할 것이다) 발견하여 선언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최종적 진리를 알지 못하리라고 말하는 또 다른 단편으로부터 (5장의 끝, 153쪽으로 위에서 인용된) 출현한다. 그리하여 거대한 불확실성은 거대한 진리 유사성과 양립 가능하다.
우리가 제노파네스에게로 돌아가 박진성과 확률 (확률 계산법으로 확립된 의미로 이 후자[後者] 용어를 사용하여) 사이의 뚜렷한 구분을 다시 도입할 것을 나는 제안한다.
이 두 개념의 구분은 그 개념들이 혼동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중요하다; 두 개념 모두 진리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두 개념 모두 정도(程度: degrees)에 의한 진리에 접근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기 때문에. 논리적 확률은 (우리는 여기서 물리적 확률을 논의하지 않는다), 정보성 내용의 점진적 감소를 통하여, 논리적 확실성이나, 동어 반복적 진리에 접근하는 개념을 의미한다. 다른 한 편으로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은 포괄적 진리에 접근한다는 개념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확률은 진리를 내용 결핍??과 결합시키는 반면 박진성은 진리와 내용을 결합시킨다.
과학이 확률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일이 터무니없다는 느낌은, 내가 제안하는 바, 오도된 ‘직감’으로부터 - 지금 밝혀지는 바와 같이, 철저히 다른 박진성과 확률이라는 두 가지 개념 사이의 직감적 혼동으로부터 - 유래한다.
?? 이것은, 그런데, 절대 확률 p(a)와 상대 확률 p(a,b) 모두에 유효하다; 그리고 박진성에 관하여 상응하는 절대적이고 상대적인 개념들이 있다.
4. 배경 지식과 과학적 성장
XV
문제에 대한 유익한 비판적 토론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일 뿐이라 할지라도, 두 가지 것에 의존한다: 참가자 전원에 의한 진리에 도달하려는, 혹은 적어도 진리에 근접하려는 공동의 목적 수용과, 상당한 양의 공유된 배경 지식. 이것은 두 가지 것 중 어느 하나가 모든 토론의 필수불가결한 기초이거나, 이 두 가지 것 자체가 ‘선험적’이어서 비판적으로 논의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판의 출발점 모두가, 비판적 토론 과정에서 한 번에 하나씩, 도전을 받을 것이라 할지라도, 비판은 무(無: nothing)에서 출발하지 않음을 이것은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의 상정(想定) 각각이 도전을 받을지라도, 동시에 그 상정(想定) 모두에 도전하는 것은 완전히 실행불가능하다. 그리하여 모든 비판이 점진적이어야 (뒤앙[Duhem]이나 콰인[Quine]의 전체론적 견해와 반대로) 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비판적 토론에 관한 근본적인 금언이, 우리가 물론 항상 부차적 문제로 나아가 우리가 지닌 문제를 더 나은 문제로 갈음할지라도,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고수하고, 그리고 실행될 수 있다면 우리가 그 문제를 분할하여 한 번에 한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임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일 따름이다.
문제를 토론하는 동안 우리는 항상 모든 종류의 것들을 문제가 없는 것으로서 (일시적일 뿐이라 할지라도) 수용한다: 그 모든 종류의 것들은 당분간, 그리고 이 특정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내가 우리의 배경 지식(background knowledge)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한다. 이 배경 지식의 부분들은 모든 환경에서 절대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우리에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고, 그 배경 지식의 특정 부분은, 그 배경 지식의 무비판적 수용이 우리가 마주치는 난제들 중 몇 가지 난제들의 원인이 될 것임을 우리가 특히 생각한다면, 어느 때고 도전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비공식적인 토론에서 우리가 끊임없이 사용하는 거대한 양의 배경 지식 거의 전부는, 실제적인 이유들 때문에, 반드시 의문시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배경 지식 모두를 의문시하는 이 오도된 시도는 - 다시 말해서, 무(無)에서 시작하는 것 - 비판적 토론의 붕괴를 쉽게 야기할 수 있다. (아담이 시작했던 곳에서 우리가 경주를 시작한다면, 아담이 갔던 거리보다 더 멀리 우리가 틀림없이 갈 것이라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XVI
대체로 우리가 주어진 순간에 거대한 양의 전통적 지식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그 이유는 우리가 지닌 지식 거의 모두는 전통적이기 때문이다)반증주의자들이나 오류주의자들에게 난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반증주의자나 오류주의자가 이 배경 지식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확립된 것으로서도 상당히 확실한 것으로서도, 그리고 개연적으로서도 아직 수용하지 않는다. 반증주의자나 오류주의자는 배경 지식의 임시적 수용조차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점진적 방식으로서만이라 할지라도 그 지식 모든 편린들이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옳은 지식 편린에 도전하는지를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추구가 확실성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말에는 경험적 시험들에 관한 콰인(Quine)의 전체론적 견해에 대한 나의 답변이 포함되어 있음이 주시될 것이다; 콰인(Quine)이 (뒤앙[Duhem]을 참고하여)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서술은 감각 경험의 법정을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법인체로서 마주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언명하는 견해.?? 이제 우리가 논리적 체계의 커다란 부분만을, 그리고 아마도 전체 체계만을 자주 시험한다는 것과, 이 경우들에서, 그 구성요소들 중 반증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되어야 할 것은 순전히 짐작이라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과거 오랫동안 내가 강조하려고 - 또한 뒤앙(Duhem)을 언급하여 - 애썼던 요점.?? 이 논증은 검증주의자를 회의론자로 변화시킬지라도, 우리가 지닌 모든 이론들은 어떤 정도로든 추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것은 시험에 대한 전체론적 견해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오류주의자와 반증주의자에게 심각한 난제를 야기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보여준다. 다른 한 편으로, 전체론적 논증은 많이 너무 멀리 간다고 언급되어야 한다. 어느 가설이 논박을 야기할지 발견하는 일이 많은 경우에 가능하다; 혹은, 다시 말해서, 가설의 어느 부분이나 어느 무리가 논박된 예측의 도출을 위하여 필수적인지. 그런 논리적 의존 관계들이 발견될 것이라는 사실은 공리화(公理化)된 체계들의 독립 증거들의 실행에 의하여 확립된다; 공리적(公理的) 체계의 특정 공리(公理)들이 나머지 공리(公理)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들. 이 증거들 중에서 더 간단한 증거들은, 그 독립성이 증명될 수 있는 공리(公理)를 제외하고 모든 공리(公理)들을 충족시키는 모형의 - 한 조의 사물들, 관계들, 작동들, 혹은 기능들 - 구축에, 혹은 더 정확하게 발견에 달려있다: 이 한 가지 공리(公理)에 대하여 - 그리고 그리하여 전체로서의 이론에 대하여 - 모형은 반례(反例: counterexample)를 구성한다.
이제 그로 인하여 우리가 특정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으며, 우리가 반례(反例: counterexample)를 발견한다고 예언할 수 있는 공리화(公理化)된 이론적 체계가 - 예를 들어 물리학에 관한 -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자. 이 반례(反例: counterexample)가 그 독립성이 그렇게 확립될 공리(公理)는 제외하고 우리가 지닌 공리(公理) 대부분이나 우리가 지닌 공리(公理) 모두를 충족하는 것으로 발견되지 않는 어떤 이유도 없다. 이것은 모든 시험이나 반례들(反例: counterexamples)의 ‘전 세계적’ 특징에 대한 전체론적 독단이 옹호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우리가 지닌 물리적 이론을 공리화(公理化)하지 않고도, 우리의 체계에 대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어렴풋한 지식을 가질 이유를 설명한다.
이것은, 그런데, 물리학에서 고도로 분석된 이론적 체계들을 사용하여 - 다시 말해서, 모든 가설들을 하나로 융합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우리가 다양한 무리들의 가설들을 분리할 수 있고, 그 무리 각각은 반례(反例: counterexample)에 의하여 논박의 대상이 될 체계들을 사용하여 - 작동하는 것을 옹호하여 말한다. (훌륭한 최근의 보기는, 원자 이론에서, 반전성[反轉性: parity] 법칙이 거부된 것이다: 또 다른 보기는 공액 변수들이 행렬들로서 해석되기 이전에, 그리고 이 행렬들의 통계적 해석 이전에, 공액 변수들에 대한 교환 법칙을 거부한 것이다.)
XVII
과학자가 처한 상황에 특징적인 한 가지 사실은 우리가 부단히 배경 지식을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 W. V, 콰인(Quine), 논리적 관점으로부터(From a Logical Point of View), 1953년, 41쪽 참조.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19에서 22부 참조; 그리고 이 책의 3장 주석 28의 본문.
우리가 배경 지식의 몇 부분을 버린다면, 다른 부분들은, 그 부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남아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뉴튼의 이론을 논박된 것으로서 간주한다할지라도, - 다시 말해서, 그의 아이디어 체계와, 그 체계로부터 출현하는 형식적 연역 체계 - 우리는 여전히 그 이론의 수량적 공식의근사치 진리를, 한계 안에서, 우리가 지닌 배경 지식의 한 부분으로서 상정(想定)할 것이다.
이 배경 지식의 존재는, 과학이 진보를 멈춘다면 과학의 이성적 및 경험적 특징이 사라질 것이라는 나의 주장을 지지하는 (내가 믿기에) 논증들 중 하나의 논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나는 이 논증을 여기서 최소한의 개요로서만 기술(記述)할 수 있다.
진지한 경험적 시험은 항상 논박인 반례(反例: counterexample)를 발견하려는 시도에 달려있다. 반례(反例: counterexample) 탐색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배경 지식을 이용해야 한다; 그 까닭은 우리가 먼저 가장 위험한 예측들인 ‘가장 개연성이 적은... 결과들’을 논박하려고 항상 노력하기 때문이다 (퍼스[Peirce]가 이미 본 바와 같이??); 이것은 우리가 항상 가장 개연적인 종류의 장소에서 가장 개연적인 종류의 반례들(反例: counterexamples)을 - 우리가 그 반례들을 우리의 배경 지식에 비추어 발견하기를 기대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가장 개연적인 -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이론이 많은 그런 시험들을 견디어낸다면, 시험 결과들을 우리의 배경 지식에 통합함으로 인하여, 얼마 뒤에는, (우리가 지닌 새로운 배경 지식에 비추어) 반례(反例: counterexample)들이 고도의 확률로 발생하기를 기대될 수 있는 남겨진 장소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실행하는 시험들의 엄격함의 정도가 감소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흔히 반복되는 시험이 더 이상 중요하다거나 엄격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 이유이다: (우리의 배경 지식에 비추어, 새로운 종류이고, 그러므로 여전히 중요하게 느껴질 시험들과 반대로) 반복되는 시험들로부터 나오는 수익 체감의 법칙과 같은 것이 있다. 이것들은 지식-상황 안에 내재하는 사실들이다; 그래서 이것들은 과학의 귀납주의적 이론에 의해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흔히 - 특히 죤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와 어니스트 네이글(Ernst Nagel)에 의하여 - 기술(記述)되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 모두가 매우 쉽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상황의 유사한 분석에 의하여, 매우 성공적인 이론의 경험적 특징이, 얼마 후에, 왜 진부하게 되는지를 심지어 설명할 수 있다. 이론은 한 조의 암묵적 정의(定義)들이나 협정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 우리가 다시 진보하여, 그 이론을 논박함으로써, 말하자면 그 이론의 실종된 경험적 특징을 재확립할 때까지 - 그러므로 우리는 느낄 것이다 (푸앵카레[Poincaré]가 뉴튼 이론에 대하여 그랬던 것과 같이). (죽은 자에 대해서는 장점만을 말하라[De mortuis nil nisi bene]: 이론이 논박되자마자, 그 이론의 경험적 특징은 안전하고 흠집 없이 빛난다.)
5. 지식의 성장을 위한 세 가지 요건
XVIII
그러나 진리에 근접하는 개념으로 - 사실과 더 잘 일치하는 이론들을 찾는 데로 (위의 10부에서 6가지 비교 항목에 의하여 지적된 바와 같이) - 다시 돌아가자.
?? C. S. 퍼스(Peirce)의 논문 선집, 7권 7.182 및 7.206 참조. 나는 이 언급을 W. B. 갈리(Gallie)에게서 얻었고 (철학 35권, 1960년, 67쪽 참조), 유사한 참고사항을 데이비드 라이닌(David Rynin)에게서 얻었다.
과학자가 처한 일반적인 문제 상황은 무엇인가? 과학자는 자신 앞에 과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는 특정 실험적 사실들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고 싶어한다; 이전 이론들이 성공적으로 설명했던 사실들; 이전 이론들이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다른 사실들; 이전 이론들이 실제로 반증되었던 몇 가지 사실들. 새로운 이론은 또한, 가능하다면, 어떤 이론적 난제들을 (어떤 임시방편적 가설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혹은 두 가지 이론을 어떻게 통합할지와 같은) 해결해야 한다. 이제 과학자가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한다면, 그의 업적은 매우 탁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는 ‘당신은 무엇을 더 원하는가?’라고 질문했다. 나의 답변은 내가 원하는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내가 생각하기에 과학자 자신이 처한 일반적인 문제 상황의 논리에 의하여 요구되는 훨씬 더 많은 것들; 진리에 근접하는 과제에 의하여 요구되는 훨씬 더 많은 것들. 나는 여기서 세 가지 그런 요건들의 토론에 내 자신을 국한시키겠다.
첫 번째 요건은 이렇다. 새로운 이론은 지금까지 연결되지 않던 것들이나 (행성들과 사과들) 사실들이나 (관성 질량 및 중력 질량 같은 것들) 새로운 ‘이론적 실재들’ (장[場: field] 및 입자 같은 것들) 사이의 어떤 연결이나 관계에 (중력적 인력 같은 것들) 관한 어떤 간단하고 새롭고 강력하고 통합하는 생각으로부터 출현해야 한다. 이 단순성의 요건은 다소 모호하여, 그 요건을 배우 명징하게 언명한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 요건은 우리의 이론들이 세상의 구조적 특성들을 기술(記述)해야 한다는 생각과 - 무한 소급에 빠지지 않고 철저히 생각해내기는 어렵다는 생각 -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세상의 특정 구조에 대한 생각이 - 정말로 우리가 순수하게 수학적인 구조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는다면 - 미리 어떤 보편적 이론을 추정하기 때문에 이것은 그러하다; 예를 들어, 원자들의, 혹은 원자 하부의 입자들의, 구조로서 분자들을 해석함으로써 화학의 법칙들을 설명하는 것은, 원자들의 혹은 그 입자들의 속성이나 행태를 규제하는 보편적인 법칙들을 미리 전제한다.) 그러나 단순성의 개념 속에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논리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 그 요소는 시험가능성의 개념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두 번째 요건에 즉각 다다른다.
그 까닭은, 두 번째로, 우리는 새로운 이론이 독립적으로 시험가능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이론이 설명하도록 고안된 모든 피설명항(explicanda)을 설명하는 것과 별도로, 새로운 이론은 새롭고 시험 가능한 결과들을 (가급적이면 새로운 종류의 결과들) 지니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이론은 지금까지 관찰되지 않은 현상들에 대한 예측을 낳을 수 있어야 한다.
이 요건은 그 요건 없이는 우리의 새로운 이론이 아마도 임시방편성이 되기 때문에 나에게 필수불가결하게 보인다; 그 까닭은 주어진 한 조의 피설명항(explicanda)에 들어맞는 이론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항상 가능하기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31-46부 참조. 최근에 나는 (강연에서) 특정 문제나 한 조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경쟁하는 저 가설들에 대한 단순성의 비교들을 상대화할 필요를 강조했다. 단순성의 개념은, 사실들에 대한 한 가지 직감적 묘사로부터 출현하는 통합된 이론의 개념과 직감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가설들의 숫자적 소량과 관련하여 분석될 수 없다. 그 까닭은 모든 (유한하게 공리화[公理化]될 수 있는) 이론은 한 가지 서술로 언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이론과 모든 n에 대하여, n개의 독립된 공리 조가 있는듯하다 (바르샤바 학파의 의미에서 반드시 ‘유기적’ 공리들은 아니라할지라도).
?? 독립적 시험에 관한 개념 대하여 나의 논문 ‘과학의 목적’, 합리(Ratio), 1권, 1957년 참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처음 두 가지 요건은,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의 가능한 해결책들 (그 해결책들 중 많은 해결책들은 흥미롭지 못하다) 가운데 우리의 선택 범위를 제한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우리의 두 번째 요건이 충족되면 우리의 새로운 이론은, 그 새로운 이론의 결과가 어떠하든지, 잠재적인 진보의 발걸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 까닭은 그 새로운 이론이 이전 이론보다 더 잘 시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이론이 이전 이론의 모든 피설명항(explicanda)을 설명하고, 게다가, 새로운 시험을 야기한다는 사실은, 잠재적인 진보의 발걸음을 확실히 하는 데에 충분하다.
더구나, 두 번째 요건은 또한 우리의 새로운 이론이 탐색 도구로서, 어느 정도까지, 결실이 있을 것임을 보증한다. 다시 말해서, 두 번째 요건은 우리에게 새로운 실험들을 제안할 것이고, 이 새로운 실험들이 즉시 그 이론의 논박을 야기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닌 사실적 지식은 새로운 실험들이 낳는 예기치 않은 결과들을 통하여 성장할 것이다. 더구나, 새로운 실험들이 낳는 예기치 않은 결과들로 인하여 우리는 새로운 설명적 이론들에 의하여 해결될 새로운 문제들을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이론에게는 세 번째 요건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세 번째 요건은 이렇다. 우리는 이론이 어떤 새롭고 엄격한 시험들을 통과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XIX
분명히, 이 요건은 특징상 이전의 두 가지 요건들과 완전히 다르다. 이전의 두 가지 요건들은 주로 옛 이론과 새로운 이론을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는 것이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형식적 요건들[formal requirements]’이다.) 다른 한 편으로, 세 번째 요건은 새로운 이론을 경험적으로 시험함으로써만, 충족되거나 충족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세 번째 요건은 경험적 성공에 관한 요건인 ‘실질적 요건[material requirement]’이다.)
게다가, 세 번째 요건은 분명히 이전 두 가지 요건들이 필수불가결하다는 동일한 의미에서 필수불가결할 리가 없다. 그 까닭은 이 두 가지 요건들이 문제의 이론이 검토를 위한 진지한 후보 이론으로서 경험적 시험들에 의하여 조금이라도 수용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에 대하여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말해서, 문제의 이론이 흥미롭고 유망한 이론인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안된 가장 흥미롭고 가장 칭찬받을 만한 이론들도 바로 처음 시험에서 논박되었다. 게다가 논박되지 않을 이유라도 있었던가? 가장 유망한 이론도 새로운 종류의 예측을 한다면 실패할지도 모른다. 한 가지 보기는, 지적(知的) 업적으로서, 아마도 보어(Bohr)의 1913년 수소 원자 이론에 심지어 필적할 1924년의 보어(Bohr), 크라머스(Kramers) 및 슬레이터(Slater)의 놀라운 이론??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이론은 거의 즉시 사실에 의하여 - 보테(Bothe) 및 가이거(Geiger)의 우연히 일치하는 실험에 의하여 논박되었다.?? 이것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물리학자도 자연을 비밀을 미리 예측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그 물리학자의 영감은 추측일 수만 있어서 그의 이론이 논박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 물리학자의, 또는 그의 이론의 잘못이 아니다. 심지어 뉴튼의 이론도 결국에는 논박되었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논박에 성공하여, 모든 새로운 이론을 개선하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그러니 모든 이론이 결국 논박된다면, 왜 처음에는 논박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이론이 6년이나 600년보다는 6개월 후에 논박된다면 그 이론은 역사적 우연이라고 말할 것이다.
?? 철학 잡지(Phil. Mag.)., 47호, 1924년 785쪽 이하.
?? 물리학 잡지(Zeitschr. f. Phys.), 32호, 1925년 63쪽 이하.
논박은 흔히 과학자나, 적어도 과학자의 이론의 실패를 확증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었다. 이것은 귀납주의적 과오라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모든 논박은 커다란 성공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 이론을 논박한 과학자의 성공뿐만 아니라, 논박된 이론을 만들어내서 그리하여 처음 사례에서, 비록 간접적일 뿐이라 할지라도, 논박하는 실험을 제시한 과학자의 성공이기도 한.
새로운 이론이 (보어, 크라머스 및 슬레이터의 이론과 같이) 조기 사망을 맞이한다 할지라도 그 새로운 이론은 잊혀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이론의 아름다움은 기억되어야 하고, 역사는 그 이론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기록해야 한다 - 우리에게 새롭고 아마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실험적 사실들을, 그 사실들과 함께, 새로운 문제들을 물려준 것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이론이 그리하여 그 이론의 성공적이지만 짧은 생애 동안에 과학의 진보에 기여한 봉사활동들에 대하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세 번째 요건이 필수불가결하지 않음을 분명히 적시한다: 심지어 그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이론도 과학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세 번째 요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수불가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보어[Bohr], 크라머스[Kramers] 그리고 슬레이터[Slater]는 과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것 이상을 옳게 겨냥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세 번째 요건을 충족시키는 데에 우리가 합당하게 자주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는 과학에서의 발전적 진보는 불가능하리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과학이 진보가 지속되려면, 그리고 과학의 합리성이 쇠퇴하지 않으려면, 우리에게는 성공적인 논박뿐만 아니라 확실한 성공 또한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새로운 이론에 의하여 제시되고 이전에는 생각되지 않은 새로운 예측을, 특히 새로운 효과를 지닌 예측을, 새로운 실험 가능한 결과를 포함하는 이론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합당하게 자주 성공해야 한다.?? 그러한 새로운 예측은 행성들이 특정 상황에서 케플러의 법칙으로부터 이탈하리라는 것이었다; 또는 빛은, 그 영(零)의 질량에도 불구하고, 중력에 종속되는 것으로 증명되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아인슈타인의 일식-효과). 또 다른 보기는 모든 기초적인 입자에 대하여 반(反)-입자가 있을 것이라는 디랙(Dirac)의 예언이다. 이런 종류의 예언들은 발표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진보가 지속되려면 실험적 증거에 의하여 합당하게 자주 입증되기도 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우리에게는 이런 종류의 성공이 정말로 필요하다; 과학의 위대한 이론들 모두가 미지의 것에 대한 새로운 정복을, 이전에 생각되지 않은 것을 예측하는 데에서 새로운 성공을 의미했다는 것은 무의미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디랙의 (그가 주장하는 반[反]-입자는 그의 이론의 몇 가지 다른 부분의 폐기에서 살아남았다) 성공이나, 유카와(Yukawa)의 중간자(meson) 이론의 성공과 같은 성공들이 필요하다. 성공적이고 고무적인 논박들의 중요성을 (반전성[反轉性: parity])에 대한 논박처럼) 옳게 인식하기위해서만이라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닌 이론들 몇 가지의 성공인, 경험적 입증이 필요하다. 우리의 논박을 이론적 미로(迷路)의 명백한 부분의 탓으로 돌리는 데에 우리가 합당하게 성공적일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우리가 지닌 이론들의 이 일시적 성공을 통해서라는 것은 나에게 완전히 분명하게 보인다. (그 까닭은 우리가 이것에서 - 그 문제에 대하여 뒤앙[Duhem]과 콰인[Quine]의 견해를 수용하는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설명될 수 없는 사실 - 합당하게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논박된 이론들의 지속적인 연속으로 인하여 우리는 곧 당황하고 무기력하게 되리라: 우리가 아마도 잠정적으로 그 이론의 실패의 원인을 물을
?? 나는 3장에서 이런 종류의 ‘새로운’ 예측들에, 그리고 그 예측들의 철학적 중요성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특히 117쪽 이하 참조.
이 이론들 - 혹은 우리가 지닌 배경 지식 - 각각의 부분들에 대한 실마리가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없다.
XX
앞에서 우리가 논박을 획득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과학이 정체하여 과학의 경험적 특징을 잃을 것이라고 나는 의견을 내었다: 이제 우리는 바로 유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예측들에 대한 검증을 획득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과학은 정체하여 그 경험적 특징을 잃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우리의 처음 요건 두 가지를 충족하지만 세 번째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 이론을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하기만 하면. 각각이, 앞선 이론을 논박한 실험들을 포함하여, 그 분야에서 모든 피설명항을 설명할 설명적 이론들의 지속적인 연속을 우리가 만들어낸다고 상상하자; 각 이론은 또한 예측된 새로운 효과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각 이론은 이 예측들이 시험될 때 즉시 논박되리라. 그리하여 각 이론은 우리의 처음 두 가지 요건은 충족시키겠지만, 모든 이론은 세 번째 요건은 충족시키지 못하리라.
이 경우에 우리가, 그 이론들이 지닌 증가하는 시험 가능도(試驗 可能度: degree of testability)에도 불구하고, 임시방편적인 일련의 이론들을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었다고, 그래서 우리가 진리에 조금도 접근하고 있지 않다고 우리는 틀림없이 느낀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정말로, 이 느낌은 정당화될 것이다: 이 모든 일련의 이론들은 아마도 쉽게 임시방편적일 것이다. 그 까닭은 이론이 새로운 종류의 실험에 의하여 독립적으로 시험가능하지 않고, 이전 이론들을 논박한 실험들을 포함하여, 모든 피설명항(explicanda)을 설명만한다는 조건으로 이론이 임시방편적일 것임이 인정된다면, 그 이론이 또한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런 상태로 그 이론이 임시방편적이 아님을 보증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임시방편적 이론이 문제의 독립적 시험들을 통과해야 한다고 우리가 또한 요구하지 않는다면, 사소한 기교로써, 임시방편적 이론을 독립적으로 시험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 항상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이것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임시방편적 이론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혹은 어떤 공상 과학 소설가에게) 발생할 시험 가능하지만 아직 시험되지 않은 탁월한 임시방편적 예측과 (결합적으로)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세 번째 요건은, 두 번째 요건처럼, 사소하고 다른 임시방편적 이론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그러나 그 요건은 훨씬 더 중요한 듯이 나에게 보이는 이유들 때문이 또한 필요하다.
심지어 우리가 가진 최고의 이론들도 더 나은 이론들에 의하여 갈음되고 대체될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하고, 심지어 희망하는 데서 우리가 완전히
?? 저지 기디민(Jerzy Giedymin) 박사는 (‘논박 가능성 공준의 일반화 [A Generalization of the Refutability Postulate]’라는, 논리학 연구(Studia Logica), 10호, 1960년, 특히 103쪽 이하 참조, 논문에서) 우리가 지닌 다양한 과학적 방법의 규칙들이 그가 ‘독재적 전략(獨裁的 戰略: dictatorial strategy)’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경험주의에 관한 일반적인 방법론적 원칙을 언명했다; 다시 말해서 그 규칙들은 이 규칙들에 따라서 수행되는 게임에서 우리가 항상 승리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해야 한다: 자연은 적어도 때때로 우리들에게 틀림없이 패배를 안겨줄 수 있다. 우리가 세 번째 요건을 버리면, 우리는 항상 승리할 수 있어서, ‘훌륭한’ 이론의 구축에 관한 한, 자연을 조금이라도 고려할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 자연이 우리의 질문에 내놓을 답변들에 관한 사색은, 우리의 과거 실패만으로써 항상 완전히 결정될 우리의 문제 상황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진보하고 있다는 우리의 믿음에서 격려에 대한 필요를 우리가 동시에 느낄지라도).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 안에서 이론들이 갈음될 수 있도록 이론들을 단지 만들어내는 자세가 생겨나서는 틀림없이 안 된다.
그 까닭은 과학자로서 우리의 목표가 우리가 지닌 문제에 관하여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이론들을 진리들 발견하려는 진지한 시도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 이론들이 참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 이론들은 진보된 발견들을 위한 도구들인 진리를 향한 중요한 디딤돌들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이론들을 디딤돌들에 지나지 않는 것,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 바라보는 데에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이것이 이론들은 이론적 발견물에 관한 도구들이라는 견해조차 포기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이론들을 어떤 관찰성이나 실용적 목적을 위한 단순한 도구들로서 간주하는 데에 매이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접근방식은, 내가 생각하기에, 심지어 실용적 관점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지 못하리라: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단순한 디딤돌로서 바라보는 데에 만족한다면, 그 이론들 대부분은 심지어 만족스러운 디딤돌도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실을 탐색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인 이론들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되고, 진정으로 설명적인 이론들을 발견하려고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구조에 관하여 진솔한 추측을 해야 한다. 요컨대, 우리는 처음 두 가지 요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의 세 번째 요건 충족은 우리 손아귀에 있지 않다. 아무리 재주가 많아도 성공적인 이론의 구축이 보장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운이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수학적 구조가 진보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그렇게 복잡하지 않는 세상이 또한 필요하다. 그 까닭은 정말로, 우리의 세 번째 요건의 의미에서 우리가 진보하기를 멈춘다면 - 새로운 종류의 예측에 대한 몇 가지 검증을 하는 데서가 아니라 우리의 이론을 논박하는 데서 우리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 세상의 구조가 (조금이라도) 우리의 이해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우리가 지닌 과학적 문제들이 우리에게 너무 어렵게 되었다고 우리는 결정할 것이다. 심지어 이 경우에도 우리는, 잠시 동안, 이론 구축과 비판과 반증을 아마도 진행할 것이다: 과학에 대한 방법의 합리적 측면은, 잠시 동안, 아마도 지속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그러나 특히 과학 방법의 경험적 측면의 기능에 대하여, 두 가지 종류 모두의 성공이 필수적이라고 우리는 느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이론들을 논박하는 데서의 성공, 그리고 우리의 이론들 몇 부분에서 그 이론들을 논박하려는 우리가 지닌 최고의 확고한 시도 적어도 몇 가지에 저항하는 데에서의 성공.
XXI
이것이 과학자들이 채택해야 하는 자세에 - 결국 과학자들의 개인적인 일인 문제 - 대한 단지 훌륭한 심리적 충고라는 것과, 그 이름에 걸맞은 과학적 방법에 대한 이론은 우리들의 세 번째 요건을 지지하여 논리적이거나 방법론적 논증들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는, 반론이 제기될 것이다. 과학자의 자세나 심리의 도움을 받는 대신에, 우리의 과학 이론은 과학자의 자세와 과학자의 심리를, 과학자가 처한 환경의 논리를 분석함으로써, 심지어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에 우리의 방법 이론에 대한 문제가 있다.
나는 이 도전을 수용한다, 그리고 나는 세 가지 이유를 대겠다: 첫째 이유는 진리의 개념으로부터; 두 번째 이유는 진리에 근접하는 개념으로부터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독립적 시험에 대한 그리고 결정적 시험에 대한 우리의 오래된 개념으로부터.
(1) 우리의 세 번째 요건이 그렇게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이렇다. 우리는 우리에게, 더구나, 참인 독립적으로 시험 가능한 이론이 있다면, 그 이론이 우리에게 성공적인 예측들을 (오직 성공적인 예측들을) 제공하리라고 알고 있다. 성공적인 예측들은 - 물론 그 예측들이 이론의 진리에 대한 충분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 그러므로 독립적으로 시험 가능한 이론의 진리에 대한 적어도 필요조건이다. 이 경우에 - 오직 이 경우만 - 우리의 세 번째 요건은, 우리가 진리를 규제적 개념으로 진지하게 수용한다면, ‘필수적’이라고 심지어 일컬어질 것이다.
(2) 두 번째 이유는 이렇다. 우리의 이론이 지닌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을 강화하는 것이, 혹은 진리에 근접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면, 우리는 우리의 이론들이 지닌 거짓-내용을 감소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론들이 지닌 진리-내용을 또한 강화하는 데에 열중해야 한다.
틀림없이 이것은 어떤 경우에 옛 이론에 대한 논박들이 설명되는 (‘현상구제[saving the phenomena]’로, 이 경우에는 논박)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이론을 구축함으로써만 실행될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진보에 관한 다른 경우들이 - 그 경우들의 존재가 진리 내용을 증가시키는 이 방식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보여주는 경우들 - 있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들은 논박이 없는 경우들이다. 갈릴레오의 이론이나 케플러의 이론도 뉴튼 이전에는 논박되지 않았다: 뉴튼이 하려고 했던 것은 보다 일반적인 상정(想定)으로부터 갈릴레오의 이론과 케플러의 이론을 설명하여, 그리하여 그때까지 연관되지 않는 두 가지 연구 분야를 통합하는 것이었다. 동일한 것이 많은 다른 이론들에 대해서도 언급될 것이다: 프톨레미(Ptolemy)의 이론 체계는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의 이론 체계를 만들어냈을 때 논박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이전에 마이컬슨(Michelson)과 몰리(Morley)의 혼란스러운 실험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실험은 로렌츠(Lorentz)와 피츠제랄드(Fitzgerald)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설명되었다.
결정적인 실험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되는 것은 이와 같은 경우들에서이다. 우리가 옛 이론으로부터 습득 불가능했던 새로운 예측들을 (금성의 위상, 섭동[攝動: perturbations], 질량-에너지 등가[mass-energy equation])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도출할 때까지, 그리고 이 새로운 예측들이 성공적임을 우리가 발견할 때까지,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론을 옛 이론보다 더 나은 것으로 간주할 - 새로운 이론이 진리에 더 근접하다고 믿을 - 이유가 없다. 그 까닭은 옛 이론들이 거짓 결과들을 (다시 말해서, 거짓-내용)을 지니고 있던 곳에 새로운 이론이 참인 결과들을 (다시 말해서, 진리-내용) 가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오직 이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적인 실험 어느 것에서 새로운 이론이 논박되었다면 우리에게는 그 새로운 이론을 선호하여 옛 이론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 옛 이론이 완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이것이 보어[Bohr]-크라머스[kramers]-슬레이터[Slater] 이론의 운명이었다.)
이 모든 중요한 경우에 어디에 옛 이론의 결점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론이 필요하다. 틀림없이,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지기 전에 옛 이론의 결점이 이미 알려진다면 상황은 다르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그 경우에는, 새로운 결정적 실험들을 낳는 새로운 이론을 (아인슈타인의 질량-에너지 등가) 알려진 현상을 구제하기만 할 수 있는 이론보다 (로렌츠-피츠제랄드[Lorentz-Fizgerald]) 우수한 것으로 간주하는 다른 경우들과, 충분한 유사점이 있다.
(3) 동일한 요점이 - 결정적인 시험의 중요성 - 이론의 박진성을 증가시키려는 목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나의 옛 논증 한 가지를 - 우리의 설명에 대한 시험들을 독립적으로 만들 필요 - 이용함으로써 만들어질 수 있다.?? 이 필요는 지식 성장의 - 새롭고 의심스러운 지식을, 결과적으로 우리의 이론들에 설명력의 손실이 생기면서, 배경 지식에 통합하는 것의 - 결과이다.
이것들이 나의 주요 논증이다.
XXII
우리의 세 번째 요건은 두 부분으로 나뉠 것이다: 첫 번째는 훌륭한 이론은 그 이론이 내놓는 새로운 예측 몇 가지에서 성공적이어야 한다고 우리는 요구한다; 두 번째로 우리는 훌륭한 이론이 너무 일찍 - 다시 말해서, 뚜렷이 성공적이기 이전에 - 논박되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 두 가지 요건 모두는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첫 번째 요건은 이론과 입증하는 증거 사이의 논리적 관계가, 그 이론이 일시적으로 증거에 앞서는지의 질문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 수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요건은, 이론이 논박될 운명이라면 이론의 내재적 가치가 논박을 연기하는 데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다소 당혹스러운 난제에 대한 우리의 설명은 충분히 간단하다: 새로운 이론에게 우리가 만들어내라고 요구하는 성공적인 새로운 예측들은, 이전 이론에 대한 향상으로서 수용되기에, 그리고 결국 그 이론의 논박을 야기할 진보된 실험적 검토의 가치가 있다고 간주되기에, 충분히 흥미롭게 되기 위하여, 새로운 이론이 통과해야 하는 결정적인 시험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그 난제는 귀납주의적 방법론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죤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같은 귀납주의자들이 예측의 가치가 (이론으로부터 도출되지만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라는 의미에서) 비실재적이라고 주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론의 가치가 이론이 지닌 증거 기초에 대한 이론의 관계에만 놓여있다면, 뒷받침하는 증거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론의 발명에 앞서거나 이론의 발명을 뒤따르는지는 논리적으로 무관하리라. 유사하게 가설적 방법을 세운 위대한 사람들은 ‘현상 구제(saving of the phenomena)’, 다시 말해서, 이론은 알려진 경험을 설명해야 한다는 요구를 강조하곤 했다. 성공적인 새로운 예측은 - 새로운 효과에 대한 - 명백한 이유들 때문에, 최근의 아이디어로 보인다; 언제 그리고 누구로부터 그 아이디어가 시작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알려진 효과들에 대한 예측과 새로운 효과들에 대한 예측 사이의 구분은 명시적으로 실행된 적이 없다. 그러나 어느 예측이 과학을 점점 더 나은 설명적 이론들로 진보하는 것으로서 간주하는지는 인식론의 한 부분으로서 나에게 완전히 필수불가결하게 보인다; 다시 말해서, 연구의 도구들로 뿐만 아니라, 진정한 설명들로도 진보하는 것으로서.
케인즈(Keynes)의 반론은 (이 증거가 이론이 제시되기 전에 알려졌는지, 혹은 그 후에 알려져서 예언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는지는 역사적 우연이었다는 것), 관찰하기를, 다시 말해서, 관찰과 관찰의 해설을 초래하는
?? 나의 논문 ‘과학의 목표(The Aim of Science)’, 합리(Ratio), 1, 1957년 특히 참조.
질문하기를 우리가 배우는 것은 우리의 이론들을 통해서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한다. 이것이 우리의 관찰성 지식이 성장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제시되는 질문들은, 대체로, 경쟁하는 이론들 사이에서 결정하는 답변을 낳을 결정적인 질문들이다. 과학을 이성적으로 만드는 것은, 특정 문제 상황에서, 이론들 사이에서 결정하는 우리의 방식인 우리 지식의 성장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제 지식 성장이라는 개념과 문제 상황이라는 개념 양쪽 모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역사적 개념들이다. 이것은 왜 또 다른 부분적으로 역사적인 개념이 - 이론이 처음 제시되었을 때 알려지지 않은 증거에 대한 진정한 예측의 (그것은 과거의 사실들에 관하여 일 것이다) 개념 - 왜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인지와, 분명히 무관한 시간 요소가 왜 관계가 있게 되는지를 설명한다.??
내가 다룬 두 가지 무리의 철학자들인 검증주의자들과 반증주의자들의 인식론에 관하여 나는 이제 우리의 결과들을 간단하게 요약하겠다.
검증주의자들이나 귀납주의자들은 과학적 신념들은 개연적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거나, 적어도 확립될 수 있음을 밝히려고 (그래서 그들이 실패함으로써, 비이성주의로의 후퇴를 부추기려고) 헛되이 노력하는 반면, 다른 무리인 우리는 우리가 심지어 고도로 개연적인 이론조차도 원치 않음을 발견했다. 합리성을 비판적 태도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할지라도, 이전 이론을 넘어서 진보하는 이론들을 찾는다; 그것은 그 이론들이 더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어서 새로운 시험들 중 몇 가지 시험들을 견디어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증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유효한 확실한 논증을 발견하려고 헛되이 수고하는 반면, 그 이론이 이전 이론들보다 더 낫기 때문에 그 이론을 우리가 선택한다는 사실에 이론의 합리성이 놓여있다는 데에 우리는 우리의 몫으로서 만족한다; 그 이론이 더 엄격한 시험에 부쳐질 수 있기 때문에; 그 이론이, 우리가 운이 좋다면, 심지어 그 시험들을 통과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 이론이 진리에 더 접근할 것이기 때문에.
부록: 아마도 거짓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으로는
고도로 개연적인 비(非)-경험적 서술
이 장의 본문에서 나는 이론들의 시험가능성 정도(程度)나 경험적 내용 혹은 설명력 정도(程度)의 비교에 기초한 진보 및 합리성의 기준에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 정도(程度: degrees)들이 지금까지 별로 논의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했다.
?? 검증주의자들은 내가 여기서 세 번째 요건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이전 토론이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것을 철저히 불필요하게 상술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증주의자들은 달리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두 번째 및 세 번째 요건들로 불리는 것의 구분을 내가 이전에 분명하게 설명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나에게 환기시켜준 것에 대하여 애거시(Agassi) 박사에 크게 빚을 지고 있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느낀다. 애거시 박사로 인하여 나는 그 구분을 여기서 좀 상세하게 서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가 세 번째 요건을 검증주의적 사고 방식의 잔재로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그가 수용할 수 없는 세 번째 요건에 관하여 나와 의견을 달리한다고 나는 언급해야 한다. (그가 자신의 동의하지 않음을 90쪽에서 표현하는 호주아시아 철학지[Australasian Journal of Philosophy] 39호, 1961년의 그의 논문 또한 참조.) 여기에 검증주의의 색깔이 있을 것임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을 탐구 도구로서만 생각하는 어떤 형태의 도구주의의 색깔을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 우리가 참아내야 하는 경우로 나에게 보인다.
이 정도(程度: degrees)들의 비교가, 내가 동시에 제시했고 폭넓게 토론되었던 더 간단한 반증가능성 기준보다 더 중요하고 더 현실적인 기준을 낳는다고 나는 항상 생각했다. 그러나 이 더 간단한 기준도 또한 필요하다. 반증가능성이나 시험가능성 기준에 대한 필요를 과학 이론의 경험적 특징의 기준으로서 보여주기 위하여, 나는 예를 들어 순전히 경험적 용어로 언명되는 간단하고 순전히 존재적인 서술을 토론하겠다. 나는 이 보기가, 순전히 존재적인 서술들을 경험적 과학으로부터 제외하여 그 서술들을 형이상학적으로서 분류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자주 반복되는 비판에 답변을 또한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내가 든 보기는 다음과 같은 순전히 존재적인 이론으로 구성된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합당한 방식으로 낭송되면 곧장 악마가 - 다시 말해서, 두 개의 작은 뿔과 한 개의 갈라진 발굽을 지닌 인간과 같은 괴물이 - 출현하는 라틴어 만가체 2행 연구(聯句)로 된 정형시가 존재한다.’
분명히, 이 시험될 수 없는 이론은, 원칙적으로, 검증될 수 있다. 나의 구획 기준에 따라서, 그 이론이 비경험적이고 비과학적이거나, 여러분이 원한다면, 형이상학적으로서 배제된다 할지라도, 그 이론은 모든 잘 구성된 서술들과 특히 모든 검증 가능한 서술들을 경험적 및 과학적으로서 간주하는 저 실증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렇게 배제되지 않는다.
나의 실증주의자 친구들 몇 명은 자신들이 악마에 관한 나의 실존적 서술이 경험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나에게 정말로 확신시켰다. 그들은 그 서술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경험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거짓 경험적 서술들을 비경험적 서술들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적시하였다.
그러나 그 혼동이, 있다할지라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역시 그 존재적 서술이 거짓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서술이 거짓 형이상학적 서술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그 서술을 경험적으로서 생각하는 사람이 왜 그 서술이 거짓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나는 묻는다. 경험적으로, 그 서술은 논박이 불가능하다. 세상 속의 어떤 관찰도 그 서술의 허위성을 확립할 수 없다. 그 서술의 허위성에 대한 경험적 근거도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 서술은 고도로 개연적임이 쉽게 증명될 수 있다: 모든 존재적 서술들처럼, 카르납(Carnap)의 표현을 빌려서 그 서술은 무한한 (혹은 충분히 커다란) 우주 속에서 거의 논리적으로 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서술을 경험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에게는 그 서술을 배격할 이유가 없고, - 특히 개연적인 신념에 대한 주관적 이론에 근거하여 - 그 서술을 수용하여 그 서술을 신뢰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확률 이론은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경험적 증거가 거의 논리적으로 참인 존재적 서술을 논박할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경험적 증거가 그 서술의 확률을 감소시킬 수 없다는 것 또한 쉽게 증명될 수 있다.?? (그 서술의 확률은 적어도 ‘거의 논리적으로 거짓’인 어떤 정보에 의해서만 감소될 수 있어서 관찰성 증거 서술에 의해서는 감소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악마를 불러내는 주문에 관한 우리 서술의 경험적 확률이나 경험적 확인의 정도(程度)는 (카르납의 의미에서), 사실이 무엇이든지간에, 틀림없이 영원히 1이다.
?? 이것은 확률 계산법의 ‘안정성 원리(principle of stability)’의 결과이다; 종합(Synthese) 15호, 1963년, 2번의 나의 논문 ‘확률 계산법에서의 생산적인 정의(定義)와 비생산적인 정의(定義)(Creative and Non-Creative Definitions in the Calculus of Probability)’ 167-186쪽의 5부, 정리 (26) 참조.
경험적 서술들 가운데 그런 순전히 존재적 서술을 포함시키기 위하여 내가 나의 구획 기준을 수정하는 것은 물론 충분히 쉬우리라. 나는 경험적 서술 가운데서 시험가능하거나 반증 가능한 서술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경험적으로 ‘검증될’ 서술 또한 인정해야만 할 따름이다.
그러나 나의 원래 반증가능성 기준을 수정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나는 믿는다. 그 까닭은 우리가 악마를 불러내는 주문에 관한 나의 존재적 서술을 수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서술의 경험적 특징을 (심지어 가장 원시적인 과학적 주장을 표현하는 데도 그 서술이 충분한 모형 언어로 쉽게 형식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인해야 함을 우리의 보기가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적 서술에 있는 경험적 특징을 부인함으로써, 관찰성 증거가 아닌 근거로써 그 서술을 배격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나는 만들었다. (그런 근거들에 대한 토론을 위하여 8장 2부를 참조하고, 유사한 논증의 형식화를 위하여 11장, 특히 275-277쪽을 참조.)
이것은, 내가 상당한 시간 동안 분명히 하려고 노력해왔던 것처럼, ‘경험적(empirical)’과 ‘잘 구성된(well-formed)’ (혹은 ‘유의미한[meaningful]’)이라는 용어가 일치해야 함을 - 그리고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확률이나 확률주의적 ‘확인가능성(confirmability)’이 서술들이나 이론들의 경험적 특징에 대한 기준으로서 사용될 것임을 상정(想定)한다면 상황이 거의 개선되지 않음을 - 무비판적으로 상정(想定)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까닭은, 여기서 밝혀진 바와 같이, 비경험적이고 아마도 거짓인 서술은 높은 정도의 확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
10
TRUTH, RATIONALITY, AND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1. THE GROWTH OF KNOWLEDGE: THEORIES AND PROBLEMS
I
MY aim in this lecture is to stress the significance of one particular aspect of science - its need to grow, or, if you like, its need to progress. I do not have in mind here the practical or social significance of this need. What I wish to discuss is rather its intellectual significance. I assert that continued growth is essential to the rational and empirical character of scientific knowledge; that if science ceases to grow it must lose that character. It is the way of its growth which makes science rational and empirical; the way, that is, in which scientists discriminate between available theories and choose the better one or (in the absence of a satisfactory theory) the way they give reasons for rejecting all the available theories, thereby suggesting some of the conditions with which a satisfactory theory should comply.
You will have noticed from this formulation that it is not the accumulation of observations which I have in mind when I speak of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but the repeated overthrow of scientific theories and their replacement by better or more satisfactory ones. This, incidentally, is a procedure which might be found worthy of attention even by those who see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in new experiments and in new observations. For our critical examination of our theories leads us to attempts to test and to overthrow them; and these lead us further to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f a kind which nobody would ever have dreamt of without the stimulus and guidance both of our
This lecture was never delivered, or published before. It was prepared for the International Congress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in Stanford, August 1960, but because of its length only a small part of it could be presented there. Another part formed my Presidential Address to the British Society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delivered in January 1961. I believe that the lecture contains (especially in parts 3 to 5) some essential further developments of the ideas of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theories and of our criticism of them. For indeed, the most interesting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were carefully designed by us in order to test our theories, especially our new theories.
In this paper, then, I wish to stress the significance of this aspect of science and to solve some of the problems, old as well as new, which are connected with the notions of scientific progress and of discrimination among competing theories. The new problems I wish to discuss are mainly those connected with the notions of objective truth, and of getting nearer to the truth - notions which seem to me of great help in analysing the growth of knowledge.
Although I shall confine my discussion to the growth of knowledge in science, my remarks are applicable without much change, I believe, to the growth of pre-scientific knowledge also - that is to say, to the general way in which, men, and even animals, acquire new factual knowledge about the world. The method of learning by trial and error - of learning from our mistakes - seems to be fundamentally the same whether it is practised by lower or by higher animals, by chimpanzees or by men of science. My interest is not merely in the theory of scientific knowledge, but rather in the theory of knowledge in general. Yet the study of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is, I believe, the most fruitful way of studying the growth of knowledge in general. For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may be said to be the growth of ordinary human knowledge writ large (as I have pointed out in the 1958 Preface to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But is there any danger that our need to progress will go unsatisfied, and that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will come to an end? In particular, is there any danger that the advance of science will come to an end because science has completed its task? I hardly think so, thanks to the infinity of our ignorance. Among the real dangers to the progress of science is not the likelihood of its being completed, but such things as lack of imagination (sometimes a consequence of lack of real interest); or a misplaced faith in formalization and precision (which will be discussed below in section v); or authoritarianism in one or another of its many forms.
Since I have used the word 'progress' several times, I had better make quite sure, at this point, that I am not a believer in a historical law of progress. Indeed I have before now struck various blows against the belief in a law of progress,? and I hold that even science is not subject to the operation of anything resembling such a law. The history of science, like the history of all human ideas, is a history of irresponsible dreams, of obstinacy, and of error. But science is one of the very few human activities - perhaps the only one - in which errors are systematically criticized and fairly often, in time, corrected. This is why we can say that, in science, we often learn from our mistakes, and why we can speak clearly and sensibly about making progress there. In most other fields of human endeavour there is change, but rarely progress (unless we adopt a
? See especially my Poverty of Historicism (2nd edn., 1960), and ch. 16 of the present volume.
very narrow view of our possible aims in life); for almost every gain is balanced, or more than balanced, by some loss. And in most fields we do not even know how to evaluate change.
Within the field of science we have, however, a criterion of progress: even before a theory has ever undergone an empirical test we may be able to say whether, provided it passes certain specified tests, it would be an improvement on other theories with which we are acquainted. This is my first thesis.
To put it a little differently, I assert that we know what a good scientific theory should be like, and - even before it has been tested - what kind of theory would be better still, provided it passes certain tests. And it is this (meta-scientific) knowledge which makes it possible to speak of progress in science, and of a rational choice between theories.
II
Thus it is my first thesis that we can know of a theory, even before it has been tested, that if it passes certain tests it will be better than some other theory.
My first thesis implies that we have a criterion of relative potential satisfactoriness, or of potential progressiveness, which can be applied to a theory even before we know whether or not it will turn out, by the passing of some crucial tests, to be satisfactory in fact.
This criterion of relative potential satisfactoriness (which I formulated some time ago,? and which, incidentally, allows us to grade theories according to their degree of relative potential satisfactoriness) is extremely simple and intuitive. It characterizes as preferable the theory which tells us more; that is to say, the theory which contains the greater amount of empirical information or content: which is logically stronger; which has the greater explanatory and predictive power; and which can therefore be more severely tested by comparing predicted facts with observations. In short, we prefer an interesting, daring, and highly informative theory to a trivial one.
All these properties which, it thus appears, we desire in a theory can be shown to amount to one and the same thing: to a higher degree of empirical content or of testability.
III
My study of the content of a theory (or of any statement whatsoever) was based on the simple and obvious idea that the informative content of the conjunction, ab, of any two statements, a, and b, will always be greater than, or at least equal to, that of any of its components.
Let a be the statement 'It will rain on Friday'; b the statement 'It
? See the discussion of degrees of testability, empirical content, corroborability, and corroboration in my L. Sc. D., especially sections 31 to 46; 82 to 85; new appendix *ix; also the discussion of degrees of explanatory power in this appendix, and especially the comparison of Einstein's and Newton's theories (in note 7 on p. 401). In what follows, I shall sometimes refer to testability, etc., as the 'criterion of progress', without going into the more detailed distinctions discussed in my book.
will be fine on Saturday'; and ab the statement 'It will rain on Friday and it will be fine on Saturday': it is then obvious that the informative content of this last statement, the conjunction ab, will exceed that of its component a and also that of its component b. And it will also be obvious that the probability of ab (or, what is the same, the probability that ab will be true) will be smaller than that of either of its components.
Writing Ct(a) for 'the content of the statement a', and Ct(ab) for 'the content of the conjunction a and b', we have
(1) Ct(a) ⩽ Ct(ab) ⩾ Ct(b).
This contrasts with the corresponding law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2) p(a) ⩾ p(ab) ⩽ p(b),
where the inequality signs of (1) are inverted. Together these two laws, (1) and (2), state that with increasing content, probability decreases, and vice versa; or in other words, that content increases with increasing improbability. (This analysis is of course in full agreement with the general idea of the logical content of statement as the class of all those statements which are logically entailed by it. We may also say that a statement a is logically stronger than a statement b if its content is greater than that of b - that is to say, if it entails more than b does.)
This trivial fact has the following inescapable consequences: if growth of knowledge means that we operate with theories of increasing content, it must also mean that we operate with theories of decreasing probability (in the sense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Thus if our aim is the advancement or growth of knowledge, then a high probability (in the sense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cannot possibly be our aim as well: these two aims are incompatible.
I found this trivial though fundamental result about thirty years ago, and I have been preaching it ever since. Yet the prejudice that a high probability must be something highly desirable is so deeply ingrained that my trivial result is still held by many to be 'paradoxical'.? Despite this simple result the idea that a high degree of probability (in the sense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must be something highly desirable seems to be so obvious to most people that they are not prepared to consider it critically. Dr Bruce Brooke-Wavell has therefore suggested to me that I should stop talking in this context of 'probability' and should base my arguments on a 'calculus of content' and of 'relative content' (이 문장에서 의미상 of는 on으로 쓰여야 될 것이다. 원문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or in other words, that I should not speak about science aiming at improbability, but merely say that it aims at maximum content. I have given much thought to this suggestion, but I do not think that it would help; a head-on collision with the widely accepted and deeply ingrained
? See for example J. C. Harsanyi, 'Popper's improbability Criterion for the Choice of Scientific Hypotheses', Philosophy, 35, 1960, pp. 332 ff. Incidentally, I do not propose any 'criterion' for the choice of scientific hypotheses: every choice remains a risky guess. Moreover, the theoretician's choice is the hypothesis most worthy of further critical discussion (rather than of acceptance).
probabilistic prejudice seems unavoidable if the matter is really to be cleared up. Even if, as would be easy enough, I were to base my own theory upon the calculus of content, or of logical strength, it would still be necessary to explain that the probability calculus, in its ('logical') application to propositions or statements, is nothing but a calculus of the logical weakness or lack of content of these statements (either of absolute logical weakness or of relative logical weakness). Perhaps a head-on collision would be avoidable if people were not so generally inclined to assume uncritically that a high probability must be an aim of science, and that, therefore, the theory of induction must explain to us how we can attain a high degree of probability for our theories. (And it then becomes necessary to point out that there is something else - a 'truthlikeness' or 'verisimilitude' - with a calculus totally different from the calculus of probability with which it seems to have been confused.)
To avoid these simple results, all kinds of more or less sophisticated theories have been designed. I believe I have shown that none of them is successful. But what is more important, they are quite unnecessary. one merely has to recognize that the property which we cherish in theories and which we may perhaps call 'verisimilitude' or 'truthlikeness' (see section XI below) is not a probability in the sense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of which (2) is an inescapable theorem.
It should be noted that the problem before us is not a problem of words. I do not mind what you call 'probability', and I do not mind if you call those degrees for which the so-called 'calculus of probability' holds by any other name. I personally think that it is most convenient to reserve the term 'probability' for whatever may satisfy the well-known rules of this calculus (which Laplace, Keynes, Jeffreys and many others have formulated, and for which I have given various formal axiom systems). If (and only if) we accept this terminology, then there can be no doubt that the absolute probability of a statement a is simply the degree of its logical weakness, or lack of informative content, and that the relative probability of a statement a, given a statement b, is simply the degree of the relative weakness, or the relative lack of new informative content in statement a, assuming that we are already in possession of the information b. (앞 문장에서 assuming 이하의 분사구문은 문법적 오류이다.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 역자 주).
Thus if we aim, in science, at a high informative content - if the growth of knowledge means that we know more, that we know a and b, rather than a alone, and that the content of our theories thus increases - then we have to admit that we also aim at a low probability in the sense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And since a low probability means a high probability of being falsified, it follows that a high degree of falsifiability, or refutability, or testability, is one of the aims of science - in fact, precisely the same aim as a high informative content.
The criterion of potential satisfactoriness is thus testability, or improbability: only a highly testable or improbable theory is worth testing, and is actually (and not merely potentially) satisfactory if it withstand severe tests - especially those tests to which we could point as crucial for the theory before they were ever undertaken.
It is possible in many cases to compare the severity of tests objectively. It is even possible, if we find it worth while, to define a measure of the severity of tests. (See the Addenda to this volume.) By the same method we can define the explanatory power and the degree of corroboration of a theory.?
IV
The thesis that the criterion here proposed actually dominates the progress of science can easily be illustrated with the help of historical examples. The theories of Kepler and Galileo were unified and superseded by Newton's logically stronger and better testable theory, and similarly Fresnel's and Faraday's by Maxwell's. Newton's theory, and Maxwell's, in their turn, were unified and superseded by Einstein's. In each such case the progress was towards a more informative and therefore logically less probable theory: towards a theory which was more severely testable because it made predictions which, in a purely logical sense, were more easily refutable.
A theory which is not in fact refuted by testing those new and bold and improbable predictions to which it gives rise can be said to be corroborated by these severe tests. I may remind you in this connection of Galle's discovery of Neptune, of Hertz's discovery of electromagnetic waves, of Eddington's eclipse observations, of Elsasser's interpretation of Davisson's maxima as interference fringes of de Broglie waves, and of Powell's observations of the first Yukawa mesons.
All these discoveries represent corroborations by severe tests - by predictions which were highly improbable in the light of our previous knowledge (previous to the theory which was tested and corroborated). Other important discoveries have also been made while testing a theory, though they did not lead to its corroboration but to its refutation. A recent and important case is the refutation of parity. But Lavoisier's classical experiments which show that the volume of air decreases while a candle burns in a close space, or that the weight of burning iron-filings increases, do no establish the oxygen theory of combustion; yet they tend to refute the phlogiston theory.
Lavoisier's experiments were carefully thought out; but even most so-called 'chance-discoveries' are fundamentally of the same logical structure. For these so-called 'chance-discoveries' are as a rule refutations of theories which were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held: they are made when some of our expectations (based upon these theories) are unexpectedly disappointed. Thus the catalytic property of mercury was discovered when it was accidentally found that in its presence a chemical reaction had been speeded up which had not been expected to be influenced by mercury. But neither Oersted's nor Röntgen's nor Becquerel's nor Fleming's discoveries was really
? See especially appendix *ix to my L. Sc. D.
accidental, even though they had accidental components: every one of these men was searching for an effect of the kind he found.
We can even say that some discoveries, such as Columbus' discovery of America, corroborate one theory (of the spherical earth) while refuting at the same time another (the theory of the size of the earth, and with it, of the nearest way to India); and that they were chance-discoveries to the extent to which they contradicted all expectations, and were not consciously undertaken as tests of those theories which they refuted.
V
The stress I am laying upon change in scientific knowledge, upon its growth, or its progressiveness, may to some extent be contrasted with the current ideal of science as an axiomatized deductive system. This ideal had been dominant in European epistemology from Euclid's Platonizing cosmology (for this is, I believe, what Euclid's Elements were really intended to be) to that of Newton, and further to the systems of Boscovič, Maxwell, Einstein, Bohr, Schrödinger, and Dirac. It is an epistemology that sees the final task and end of scientific activity in the construction of an axiomatized deductive system.
As opposed to this, I now believe that these most admirable deductive systems should be regarded as stepping stones rather than as ends:? as important stages on our way to richer, and better testable, scientific knowledge.
Regarded thus as means or stepping stones, they are certainly quite indispensable, for we are bound to develop our theories in the form of deductive systems. This is made unavoidable by the logical strength, by the great informative content, which we have to demand of our theories if they are to be better and better testable. The wealth of their consequences has to be unfolded deductively; for as a rule, a theory cannot be tested except by testing, one by one, some of its more remote consequences; consequences, that is, which cannot immediately be seen upon inspecting it intuitively.
Yet it is not the marvellous deductive unfolding of the system which makes a theory rational and empirical but the fact that we can examine it critically; that is to say, subject it to attempted refutations, including observational tests; and the fact that, in certain cases, a theory may be able to withstand those criticisms and those tests - among them tests under which its predecessors broke down, and sometimes even further and more severe tests. It is in the rational choice of the new theory that the rationality of science lies, rather than in the deductive development of the theory.
Consequently there is little merit in formalizing and elaborating a deductive non-conventional system beyond the requirements of the task of criticizing and testing it, and of comparing it critically with
? I have been influenced in adopting this view by Dr J. Agassi who, in a discussion in 1956, convinced me that the attitude of looking upon the finished deductive systems as an end is a relic of the long domination of Newtonian ideas (and thus, I may add, of the Platonic, and Euclidean, tradition). For an even more radical view of Dr Agassi's see the last footnote to this chapter.
competitors. This critical comparison, though it has, admittedly, some minor conventional and arbitrary aspects, is largely non-conventional, thanks to the criterion of progress. It is this critical procedure which contains both the rational and the empirical elements of science. It contains those choices, those rejections, and those decisions, which show that we have learnt from our mistakes, and thereby added to our scientific knowledge.
VI
Yet perhaps even this picture of science - as a procedure whose rationality consists in the fact that we learn from our mistakes - is not quite good enough. It may still suggest that science progresses from theory to theory and that it consists of a sequence of better and better deductive systems. Yet what I really wish to suggest is that science should be visualized as progressing from problems to problems - to problems of ever increasing depth.
For a scientific theory - an explanatory theory - is, if anything, an attempt to solve a scientific problem, that is to say, a problem concerned or connected with the discovery of an explanation.?
Admittedly, our expectations, and thus our theories, may precede, historically, even our problems. Yet science starts only with problems. Problems crop up especially when we are disappointed in our expectations, or when our theories involve us in difficulties, in contradictions; and these may arise either within a theory, or between two different theories, or as the result of a clash between our theories and our observations. Moreover, it is only through a problem that we become conscious of holding a theory. It is the problem which challenges us to learn; to advance our knowledge; to experiment; and to observe.
Thus science starts from problems, and not from observations; though observations may give rise to a problem, especially if they are unexpected; that is to say, if they clash with our expectations or theories. The conscious task before the scientist is always the solution of a problem through the construction of a theory which solves the problem; for example, by explaining unexpected and unexplained observations. Yet every worthwhile new theory raises new problems; problems of reconciliation, problems of how to conduct new and previously unthought-of observational tests. And it is mainly through the new problems which it raises that it is fruitful.
Thus we may say that the most lasting contribution to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that a theory can make are the new problems which it raises, so that we are led back to the view of science and of the growth of knowledge as always starting from, and always ending with, problems - problems of an ever increasing depth, and an ever increasing fertility in suggesting new problems.
? Compare this and the following two paragraphs with my Poverty of Historicism, section 28, pp. 121 ff., and chs. 1 and 16 of this volume.
2. THE THEORY OF OBJECTIVE TRUTH: CORRESPONDENCE
TO THE FACTS
VII
So far I have spoken about science, its progress, and its criterion of progress, without even mentioning truth. Perhaps surprisingly, this can be done without falling into pragmatism or instrumentalism: it is perfectly possible to argue in favour of the intuitive satisfactoriness of the criterion of progress in science without ever speaking about the truth of its theories. In fact, before I became acquainted with Tarski's theory of truth,? it appeared to me safer to discuss the criterion of progress without getting too deeply involved in the highly controversial problem connected with the use of the word 'true'.
My attitude at the time was this: although I accepted, as almost everybody does, the objective or absolute or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 truth as correspondence with the facts - I preferred to avoid the topic. For it appeared to me hopeless to try to understand clearly this strangely elusive idea of a correspondence between a statement and a fact.
In order to recall why the situation appeared so hopeless we only have to remember, as one example among many, Wittgenstein's Tractatus with its surprisingly naïve picture theory, or projection theory, of truth. In this book a proposition was conceived as a picture or projection of the fact which it was intended to describe and as having the same structure (or 'form') as that fact; just as a gramophone record is indeed a picture or a projection of a sound, and shares some of its structural properties.?
Another of these unavailing attempts to explain this correspondence was due to Schlick, who gave a beautifully clear and truly devastating criticism? of various correspondence theories - including the picture or projection theory - but who unfortunately produced in his turn another one which was no better. He interpreted the correspondence in question as a one-to-one correspondence between our designations and the designated objects, although counterexamples abound (designations applying to many objects, objects designated by many designations) which refute this interpretation.
All this was changed by Tarski's theory of truth and of the correspondence of a statement with the facts. Tarski's greatest achievement, and the real significance of his theory for the philosophy of the empirical sciences, is that he rehabilitated the correspondence theory of absolute or objective truth which had become suspect. He vindicated the free use of the intuitive idea of truth as correspondence to the facts. (The view that his theory is applicable only to formalized languages is, I think, mistaken. It is applicable to any consistent and even to a 'natural' language, if only we learn from Tarski's analysis how to dodge its inconsistencies; which means, admittedly, the introduction of some 'artificiality' - or caution - into its use. See also Addendum 5, below.)
? See my L. Sc. D, especially section 84, and my Open Society, especially pp. 369-374.
? Cp. Wittgenstein's Tractatus, especially 4.0141; also 2.161; 2.17; 2.223; 3.11.
? See especially pp. 56-7 of his remarkable Allgemeine Erkenntnislehre, 2nd edn., 1925.
Although I may assume in this assembly some familiarity with Tarski's theory of truth, I may perhaps explain the way in which it can be regarded, from an intuitive point of view, as a simple elucidation of the idea of correspondence to the facts. I shall have to stress this almost trivial point because, in spite of its triviality, it will be crucial for my argument.
The highly intuitive character of Tarski's ideas seems to become more evident (as I have found in teaching) if we first decide explicitly to take 'truth' as a synonym for 'correspondence to the facts', and then (forgetting all about 'truth') proceed to explain the idea of 'correspondence to the facts'.
Thus we shall first consider the following two formulations, each of which states very simply (in metalanguage) under what conditions a certain assertion (of an object language) corresponds to the facts.
(1) The statement, or the assertion, 'Snow is white' corresponds to the facts if, and only if, snow is, indeed, white.
(2) The statement, or the assertion, 'Grass is red' corresponds to the facts if, and only if, grass, indeed, red.
These formulations (in which the word 'indeed' is only inserted for ease, and may be omitted) sound, of course, quite trivial. But it was left to Tarski to discover that, in spite of their apparent triviality, they contained the solution of the problem of explaining correspondence to the facts.
The decisive point is Tarski's discovery that, in order to speak of correspondence to the facts, as do (1) and (2), we must use a metalanguage in which we can speak about two things: statements; and the facts to which they refer. (Tarski calls such a metalanguage 'semantical'; a metalanguage in which we can speak about an object language but not about the facts to which it refers is called 'syntactical'.) once the need for a (semantical) metalanguage is realized, everything becomes clear. (Note that while (3) '"John called" is true' is essentially a statement belonging to such a metalanguage, (4) 'It is true that John called' may belong to the same language as 'John called'. Thus the phrase 'It is true that' - which, like double negation, is logically redundant - differs widely from the metalinguistic predicate 'is true'. The latter is needed for general remarks such as, 'If the conclusion is not true, the premises cannot all be true' or 'John once made a true statement'.)
I have said that Schlick's theory was mistaken, yet I think that certain comments he made (loc. cit.) about his own theory throw some light on Tarski's. For Schlick says that the problem of truth shared the fate of some others whose solutions were not easily seen because they were mistakenly supposed to lie on a very deep level, while actually they were fairly plain and, at first sight, unimpressive. Tarski's solution may well appear unimpressive at first sight. Yet its fertility and its power are impressive indeed.
VIII
Thanks to Tarski's work, the idea of objective or absolute truth - that is truth as correspondence to the facts - appears to be accepted today with confidence by all who understand it. The difficulties in understanding it seem to have two sources: first, the combination of an extremely simple intuitive idea with a certain amount of complexity in the execution of the technical programme to which it gives rise; secondly, the widespread but mistaken dogma that a satisfactory theory of truth should yield a criterion of true belief - of well-founded, or rational belief. Indeed, the three rivals of the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 the coherence theory which mistakes consistency for truth, the evidence theory which mistakes 'known to be true' for 'true', and the pragmatic or instrumentalist theory which mistakes usefulness for truth - these are all subjective (or 'epistemic') theories of truth, in contradistinction to Tarski's objective (or 'metalogical') theory. They are subjective in the sense that they all stem from the fundamental subjectivist position which can conceive of knowledge only as a special kind of mental state, or as a disposition, or as a special kind of belief, characterized, for example, by its history or by its relation to other beliefs.
If we start from our subjective experience of believing, and thus look upon knowledge as a special kind of belief, then we may indeed have to look upon truth - that is, true knowledge - as some even more special kind of belief: as one that is well-founded or justified. This would mean that there should be some more or less effective criterion, if only a partial one, of well-foundedness; some symptom by which to differentiate the experience of well-founded belief from other experiences of belief. It can be shown that all subjective theories of truth aim at such a criterion: they try to define truth in terms of the sources or origins of our beliefs,?? or in terms of our operations of verification, or of some set of rules of acceptance, or simply in terms of the quality of our subjective convictions. They all say, more or less, that truth is what we are justified in believing or in accepting, in accordance with certain rules or criteria, of origins or sources of our knowledge, or of reliability, or stability, or success, or strength of conviction, or inability to think otherwise.
The theory of objective truth leads to a very different attitude. This may be seen from the fact that it allows us to make assertions such as the following: a theory may be true even though nobody believes it, and even though we have no reason to think that it is true; and another theory may be false even though we have comparatively good reasons for accepting it.
Clearly, these assertions would appear to be self-contradictory from the point of view of any subjective or epistemic theory of truth. But within the objective theory, they are not only consistent, but quite obviously true.
A similar assertion which the objective correspondence theory would make quite natural is this: even if we hit upon a true theory, we shall as a rule be merely guessing, and it may well be impossible for us to know that it is true.
An assertion like this was made, apparently for the first time, by Xenophanes?? who lived 2,500 years ago; which shows that the objective theory of truth is very old indeed - antedating Aristotle, who also held it. But only with Tarski's work has the suspicion been
?? See my Introduction to this volume, 'on the Sources of Knowledge and of Ignorance'.
?? See my Introduction, p. 26, and ch. 5, pp. 152 f., above.
removed that the objective theory of truth as correspondence to the facts may be either self-contradictory (because of the paradox of the liar), or empty (as Ramsey suggested), or barren, or at the very least redundant, in the sense that we can do without it.
In my theory of scientific progress I might perhaps do without it, up to a point. Since Tarski, however, I no longer see any reason why I should try to avoid it (이 문장에서는 since가 [~이래]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동사가 완료시제를 취해야 한다. see라는 단순시제가 올 수 없기 때문에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And if we wish to elucidate the difference between pure and applied science, between the search for knowledge and the search for power or for powerful instruments, then we cannot do without it. For the difference is that, in the search for knowledge, we are out to find true theories, or at least theories which are nearer than others to the truth - which correspond better to the facts; whereas in the search for powerful instruments we are, in many cases, quite well served by theories which are known to be false.??
So one great advantage of the theory of objective or absolute truth is that it allows us to say - with Xenophanes - that we search for truth, but may not know when we have found it; that we have no criterion of truth, but are nevertheless guided by the idea of truth as a regulative principle (as Kant or Peirce might have said); and that, though there are no general criteria by which we can recognize truth - except perhaps tautological truth - there are criteria of progress towards the truth (as I shall explain presently).
The status of truth in the objective sense, as correspondence to the facts, and its role as a regulative principle, may be compared to that of a mountain peak usually wrapped in clouds. A climber may not merely have difficulties in getting there - he may not know when he gets there, because he may be unable to distinguish, in the clouds, between the main summit and subsidiary peak. Yet this does not affect the objective existence of summit; and if the climber tells us 'I doubt whether I reached the actual summit', then he does, by implication, recognize the objective existence of the summit. The very idea of error, or of doubt (in its normal straightforward sense) implies the idea of an objective truth which we may fail to reach.
Though it may be impossible for the climber ever to make sure that he has reached summit, it will often be easy for him to realize that he has not reached it (or not yet reached it); for example, when he is turned back by an overhanging wall. Similarly, there will be cases when we are quite sure that we have not reached the truth. Thus while coherence, or consistency, is no criterion of truth, simply because even demonstrably consistent systems may be false in fact, incoherence or inconsistency do establish falsity; so, if we are lucky, we may discover the falsity of some of our theories.??
In 1944, when Tarski published the first English outline of his investigations into the theory of truth (which he had published in Poland in 1933), few philosophers would have dared to make
?? See the discussion of the 'second view' (called 'instrumentalism') in ch. 3, above.
?? See Alfred Tarski's paper, 'The Semantic Conception of Truth', in Philosophy and Phenom. Research, 4, 1943-4, pp. 341 ff. (Cp. especially section 21.)
assertions like those of Xenophanes; and it is interesting that the volume in which Tarski's paper was published also contained two subjectivist papers on truth.??
Though things have improved since then, subjectivism is still rampant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and especially in the field of probability theory. The subjectivist theory of probability, which interprets degrees of probability as degrees of rational belief, stems directly from the subjectivist approach to truth - especially from the coherence theory. Yet it is still embraced by philosophers who have accepted Tarski's theory of truth. At least some of them, I suspect, have turned to probability theory in the hope that it would give them what they had originally expected from a subjectivist or epistemological theory of the attainment of truth through verification; that is, a theory of rational and justifiable belief, based upon observed instances.??
It is an awkward point in all these subjectivist theories that they are irrefutable (in the sense that they can too easily evade any criticism). For it is always possible to uphold the view that everything we say about the world, or everything we print about logarithms, should be replaced by a belief statement. Thus we may replace the statement 'Snow is white' by 'I believe that snow is white' or perhaps even by 'In the light of all the available evidence I believe that it is rational to believe that snow is white'. That we can (in a way) 'replace' assertions about the objective world by one of the subjectivist circumlocutions is trivial, although in the case of the assertions found in logarithm tables - which might well be produced by machines - somewhat unconvincing. (It may be mentioned in passing that the subjective interpretation of logical probability links these subjectivist replacements, exactly as in the case of the coherence theory of truth, with an approach which, on closer analysis, turns out to be essentially 'syntactic' rather than 'semantic' - though it may be presented within a 'semantical system'.)
It may be useful to sum up the relationships between the objective and subjective theories of scientific knowledge with the help of a little table:
OBJECTIVE OR LOGICAL OR SUBJECTIVE OR PSYCHOLOGICAL OR
ONTOLOGICAL THEORIES EPISTEMOLOGICAL THEORIES
truth as correspondence truth as property of our state
with the facts of mind - or knowledge or belief
objective probability subjective probability
(inherent in the situation, and (degree of rational belief based
testable by statistical tests) upon our total knowledge)
objective randomness lack of knowledge
(statistically testable)
equiprobability lack of knowledge
(physical or situational symmetry)
In all these cases I am inclined to say not only that these two approaches should be distinguished, but also that the subjectivist
?? See the volume referred to in the preceding note, especially pp. 279 and 336.
?? Cp. Carnap, 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 1950, p. 177, and my L. Sc. D., especially section 84.
approach should be discarded as a lapse, as based on a mistake - though perhaps a tempting mistake. There is, however, a similar table in which the epistemological (right hand) side is not based on a mistake.
truth conjecture
testability empirical test
explanatory or predictive power degree of corroboration
(that is, report of the results
'verisimilitude' of tests)
3. TRUTH AND CONTENT: VERISIMILITUDE VERSUS PROBABILITY
IX
Like many other philosophers I am at times inclined to classify philosophers as belonging to two main groups - those with whom I disagree, and those who agree with me. I also call them the verificationists or the justificationist philosophers of knowledge (or of belief), and the falsificationists or fallibilists or critical philosphers of knowledge (or of conjectures). I may mention in passing a third group with whom I also disagree. They may be called the disappointed justificationists - the irrationalists and sceptics.
The members of the first group - the verificationists or justificationists - hold, roughly speaking, that whatever cannot be supported by positive reasons is unworthy of being believed, or even of being taken into serious consideration.
On the other hand, the members of the second group - the falsificationists or fallibilists - say, roughly speaking, that what cannot (at present) in principle overthrown by criticism is (at present) unworthy of being seriously considered; while what can in principle be so overthrown and yet resists all our critical efforts to do so may quite possibly be false, but is at any rate not unworthy of being seriously considered and perhaps even of being believed - though only tentatively.
Verificationists, I admit, are eager to uphold the most important tradition of rationalism - the fight of reason against superstition and arbitrary authority. For they demand that we should accept a belief only if it can be justified by positive evidence; that is to say, shown to be true, or, at least, to be highly probable. In other words, they demand that we should accept a belief only if it can be verified, or probabilistically confirmed.
Falsificationists (the group of fallibilists to which I belong) believe - as most irrationalists also believe - that they have discovered logical arguments which show that the programme of the first group cannot be carried out: that we can never give positive reasons which justify the belief that a theory is true. But, unlike irrationalists, we falsificationists believe that we have also discovered a way to realize the old ideal of distinguishing rational science from various forms of superstition, in spite of the breakdown of the original inductivist or justificationist programme. We hold that this ideal can be realized, very simply, by recognizing that the rationality of science lies not in its habit of appealing to empirical evidence in support of its dogmas - astrologers do so too - but solely in the critical approach: in an attitude which, of course, involves the critical use, among other arguments, of empirical evidence (especially in refutations). For us, therefore, science has nothing to do with the quest for certainty or probability or reliability. We are not interested in establishing scientific theories as secure, or certain, or probable. Conscious of our fallibility we are only interested in criticizing them and testing them, hoping to find out where we are mistaken; of learning from our mistakes; and, if we are lucky, of proceeding to better theories.
Considering their views about the positive or negative function of argument in science, the first group - the justificationists - may also be nicknamed the 'positivists' and the second - the group to which I belong - the critics or the 'negativists'. These are, of course, mere nicknames. Yet they may perhaps suggest some of the reasons why some people believe that only the positivists or verificationists are seriously interested in truth and in the search for truth, while we, the critics or negativists, are flippant about the search for truth, and addicted to barren and destructive criticism and to the propounding of views which are clearly paradoxical.
This mistaken picture of our views seems to result largely from the adoption of a justificationist programme, and of the mistaken subjectivist approach to truth which I have described.
For the fact is that we too see science as the search for truth, and that, at least since Tarski, we are no longer afraid to say so. Indeed, it in only with respect to this aim, the discovery of truth, that we can say that though we are fallible, we hope to learn from our mistakes. It is only the idea of truth which allows us to speak sensibly of mistakes and of rational criticism, and which makes rational discussion possible - that is to say, critical discussion in search of mistakes with the serious purpose of eliminating as many of these mistakes as we can, in order to get nearer to the truth. Thus the very idea of error - and of fallibility - involves the idea of an objective truth as the standard of which we may fall short. (It is in this sense that the idea of truth is a regulative idea.)
Thus we accept the idea that the task of science is the search for truth, that is, for true theories (even though as Xenophanes pointed out we may never get them, or know them as true if we get them). Yet we also stress that truth is not the only aim of science. We want more than mere truth: what we look for is interesting truth - truth which is hard to come by. And in the natural sciences (as distinct from mathematics) what we look for is truth which has a high degree explanatory power, in a sense which implies that it is logically improbable truth.
For it is clear, first of all, that we do not merely want truth - we want more truth, and new truth. We are not content with 'twice two equals four', even though it is true: we do not resort to reciting the multiplication table if we are faced with a difficult problem in topology or in physics. Mere truth is not enough; what we look for are answers to our problems. The point has been well put by the German humorist and poet Busch, of Max-and-Moritz fame, in a little nursery rhyme - I mean a rhyme for the epistemological nursery:??
Twice two equals four: 'tis true,
But too empty, and too trite.
What I look for is a clue
To some matters not so light.
Only if it is an answer to a problem - a difficult, a fertile problem, a problem of some depth - does a truth, or a conjecture about the truth, become relevant to science. This is so in pure mathematics, and it is so in the natural sciences. And in the latter, we have something like a logical measure of the depth or significance of the problem in the increase of logical improbability or explanatory power of the proposed new answer, as compared with the best theory or conjecture previously proposed in the field. This logical measure is essentially the same thing which I have described above as the logical criterion of potential satisfactoriness and of progress.
My description of this situation might tempt some people to say that truth does not, after all, play a very big role with us negativists even as a regulative principle. There can be no doubt, they will say, that negativists (like myself) much prefer an attempt to solve an interesting problem by a bold conjecture, even if it soon turns out to be false, to any recital of a sequence of true but uninteresting assertions. Thus it does not seem, after all, as if we negativists had much use for the idea of truth. Our ideas of scientific progress and of attempted problem-solving do not seem very closely related to it.
This, I believe, would give quite a mistaken impression of the attitude of our group. Call us negativists, or what you like: but you should realize that we are as much interested in truth as anybody - for example, as the members of a court of justice. When the judge tells a witness that he should speak 'The truth, 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 then what he looks for is as much of the relevant truth as the witness may be able to offer. A witness who likes to wander off into irrelevancies is unsatisfactory as a witness, even though these irrelevancies may be truisms, and thus part of 'the whole truth'. It is quite obvious that what the judge - or anybody else - wants when he asks for 'the whole truth' is as much interesting and relevant true information as can be got; and many perfectly candid witnesses have failed to disclose some important information simply because they were unaware of its relevance to the case.
Thus when we stress, with Busch, that we are not interested in mere truth but in interesting and relevant truth, then, I contend, we only emphasize a point which everybody accepts. And if we are
?? From W. Busch, Schein und Sein (first published posthumously in 1909; p. 28 of the Insel edition, 1952). My attention has been drawn to this rhyme by an essay on Busch as a philosopher which my late friend Julius Kraft contributed to the volume Erziehung und Politik (Essays for Minna Specht, 1960); see p. 262. My translation makes it perhaps more like a nursery rhyme than Busch intended.
interested in bold conjectures, even if these should soon turn out to be false, then this interest is due to our methodological conviction that only with the help of such bold conjectures can we hope to discover interesting and relevant truth.
There is a point here which, I suggest, it is the particular task of the logician to analyse. 'Interest', or 'relevance', in the sense here intended, can be objectively analyzed; it is relative to our problem; and it depends on the explanatory power, and thus on the content of or improbability, of the information. The measures alluded to earlier (and developed in the Addenda to this volume) are precisely such measures as take account of some relative content of the information - its content relative to a hypothesis or to a problem.
I can therefore gladly admit that falsificationists like myself much prefer an attempt to solve an interesting problem by a bold conjecture, even (and especially) if it soon turns out be false, to any recital of a sequence of irrelevant truisms. We prefer this because we believe that this is the way in which we can learn from our mistakes; and that in finding that our conjecture was false, we shall have learnt much about the truth, and shall have got nearer to the truth.
I therefore hold that both ideas - the idea of truth, in the sense of correspondence with the facts, and the idea of content (which may be measured by the same measure as testability) - play about equally important roles in our considerations, and that both can shed much light on the idea of progress in science.
X
Looking at the progress of scientific knowledge, many people have been moved to say that even though we do not know how nearer to or how far from the truth we are, we can, and often do, approach more and more closely to the truth. I myself have sometimes said such things in the past, but always with a twinge of bad conscience. Not that I believe in being over-fussy about what we say: as long as we speak as clearly as we can, yet do not pretend that what we are saying is clearer than it is, and as long as we do not try to derive apparently exact consequences from dubious or vague premises, there is no harm whatever in occasional vagueness, or in voicing every now and then our feelings and general intuitive impressions about things. Yet whenever I used to write, or to say, something about science as getting nearer to the truth, or as a kind of approach to truth, I felt that I really ought to be writing 'Truth', with a capital 'T', in order to make quite clear that a vague and highly metaphysical notion was involved here, in contradistinction to Tarski's 'truth' which we can with a clear conscience write in the ordinary way with small letters.??
It was only quite recently that I set myself to consider whether the idea of truth involved here was really so dangerously vague and
?? Similar misgivings are expressed by Quine when he criticizes Peirce for operating with the idea of approaching to truth. See W. V. Quine, Words and Object, New York, 1960, p. 23.
metaphysical after all. Almost at once I found that it was not, and that there was no particular difficulty in applying Tarski's fundamental idea to it.
For there is no reason whatever why we should not say that one theory corresponds better to the facts than another. This simple initial step makes everything clear: there really is no barrier here between what at first sight appeared to be Truth with a capital 'T' and truth in a Tarskian sense.
But can we really speak about better correspondence? Are there such things as degrees of truth? Is it not dangerously misleading to talk as if Tarskian truth were located somewhere in a kind of metrical or at least topological space so that we can sensibly say of two theories - say an earlier theory t1 and a later theory t2 - that t2 has superseded t1, or progressed beyond t1, by approaching more closely to the truth than t1?
I do not think that this kind of talk is at all misleading. on the contrary, I believe that we simply cannot do without something like this idea of a better or worse approximation to truth. For there is no doubt whatever that we can say, and often want to say, of a theory t2 that it corresponds better to the facts, or that as far as we know it seems to correspond better to the facts, than another theory t1.
I shall give here a somewhat unsystematic list of six types of case in which we should be inclined to say of a theory t1 that it is superseded by t2 in the sense that t2 seems - as far as we know - to correspond better to the facts than t1, in some sense or other.
(1) t2 makes more precise assertions than t1, and these more precise assertions stand up to more precise tests.
(2) t2 takes account of, and explains, more facts than t1 (which will include for example the above case that, other things being equal, t2's assertions are more precise).
(3) t2 describes, or explains, the facts in more detail than t1.
(4) t2 has passed tests which t1 has failed to pass.
(5) t2 has suggested new experimental tests, not considered before t2 was designed (and not suggested by t1, and perhaps not even applicable to t1): and t2 has passed these tests.
(6) t2 has unified or connected various hitherto unrelated problems.
If we reflect upon this list, then we can see that the contents of the theories t1 and t2 play an important role in it. (It will be remembered that the logical content of a statement or a theory a is the class of all statements which follow logically from a, while I have defined the empirical content of a as the class of all basic statements which contradict a.??) For in our list of six cases, the empirical content of theory t2 exceeds that of theory t1.
This suggestion that we combine here the ideas of truth and of
?? This definition is logically justified by the theorem that, so far as the 'empirical part' of the logical content is concerned, comparison of empirical contents and of logical contents always yield the same results; and it is intuitively justified by the consideration that a statement a tells the more about our world of experience the more possible experiences it excludes (or forbids). About basic statements see also the Addendum 1 to this volume.
content into one - the idea of a degree of better (or worse) correspondence to truth or of greater (or less) likeness or similarity to truth; or to use a term already mentioned above (in contradistinction to probability) the idea of (degrees of) verisimilitude.
It should be noted that the idea that every statement or theory is not only either true or false but has, independently of its truth value, some degree of verisimilitude, does not give rise to any multi-valued logic - that is, to a logical system with more than two truth values, true and false; though some of the things the defenders of multi-valued logic are hankering after seem to be realized by the theory of verisimilitude (and related theories alluded to in section 3 of the Addendum to this volume).
XI
Once I had seen the problem it did not take me long to get to this point. But strangely enough, it took me a long time to put two and two together, and to proceed from here to a very simple definition of verisimilitude in terms of truth and of content. (We can use either logical or empirical content, and thus obtain two closely related ideas of verisimilitude which however merge into one if we consider here only empirical theories, or empirical aspects of theories.)
Let us consider the content of a statement a; that is, the class of all the logical consequences of a. If a is true, then this class can consist only of true statements, because truth is always transmitted from a premise to all its conclusions. But if a is false, then its content will always consists of both true and false consequences. (Example: 'It always rains on Sundays' is false, but its consequences that it rained last Sunday happens to be true.) Thus whether a statement is true or false, there may be more truth, or less truth, in what it says, according to whether its content consists of a greater or a lesser number of true statements.
Let us call the class of the true logical consequences of a the 'truth-content' of a (a German term 'Wahrheitsgehalt' - reminiscent of the phrase 'there is truth in what you say' - of which 'truth-content' may be said to be a translation, has been intuitively used for a long time); and let us call the class of the false consequences of a - but only these - the 'falsity-content' of a. (The 'falsity-content' is not, strictly speaking, a 'content', because it does not contain any of the true conclusions of the false statements which form its elements. Yet it is possible - see the Addenda - to define its measure with the help of two contents.) These terms are precisely as objective as the terms 'true' or 'false' and 'content' themselves. Now we can say:
Assuming that the truth-content and the falsity-content of two theories t1 and t2 are comparable, we can say that t2 is more closely similar to the truth, or corresponds better to the fact, than t1, if and only if either
(a) the truth-content but not the falsity-content of t2 exceeds that of t1, or
(b) the falsity-content of t1, but not its truth-content, exceeds that of t2.
If we now work with the (perhaps fictitious) assumption that the content and truth-content of a theory a are in principle measurable, then we can go slightly beyond this definition and can define Vs(a), that is to say, a measure of the verisimilitude or truthlikeness of a. The simplest definition will be
Vs(a) = CtT(a) - CtF(a)
where CtT(a) is a measure of the truth-content of a, and CtF(a) is a measure of the falsity-content of a. A slightly more complicated but in some respects preferable definition will be found in section 3 of the Addenda to the present volume.
It is obvious that Vs(a) satisfies our two demands, according to which Vs(a) should increase
(a) if CtT(a) increases while CtF(a) does not, and
(b) if CtF(a) decreases while CtT(a) does not.
Some further considerations of a slightly technical nature and the definitions of CtT(a) and especially CtF(a) and Vs(a) will be found in the Addenda. Here I want only to discuss three non-technical points.
XII
The first point is this. Our idea of approximation to truth, or of verisimilitude, has the same objective character and the same ideal or regulative character as the idea of objective or absolute truth. It is not an epistemological or an epistemic idea - no more than is truth or content. (In Tarski's terminology, it is obviously a 'semantic' idea, like truth, or like logical consequence, and, therefore, content.) Accordingly, we have here again to distinguish between the question 'What do you intend to say if you say that the theory t2 has a higher degree of verisimilitude than the theory t1?', and the question 'How do you know that the theory t2 has a higher degree of verisimilitude than the theory t1?'
We have so far answered only the first question. The answer to the second question depends on it, and it is exactly analogous to the answer to the analogous (absolute rather than comparative) question about truth: 'I do not know - I only guess. But I can examine my guess critically, and if it withstands severe criticism, then this fact may be taken as a good critical reason in favour of it.'
My second point is this. Verisimilitude is so defined that maximum verisimilitude would be achieved only by a theory which is not only true, but completely comprehensively true: if it corresponds to all facts, as it were, and, of course, only to real facts. This is of course a much more remote and unattainable ideal than a mere correspondence with some facts (as in, say, 'Snow is usually white').
But all this holds only for the maximum degree of verisimilitude, and not for the comparison of theories with respect to their degree of verisimilitude. This comparative use of the idea is its main point; and the idea of a higher or lower degree of verisimilitude seems less remote and more applicable and therefore perhaps more important for the analysis of scientific methods than the - in itself much more fundamental - idea of absolute truth itself.
This leads me to my third point. Let me first say that I do not suggest that the explicit introduction of the idea of verisimilitude will lead to any changes in the theory of method. on the contrary, I think that my theory of testability or corroboration by empirical tests is the proper methodological counterpart to this new metalogical idea. The only improvement is one of clarification. Thus I have often said that we prefer the theory t2 which has passed certain severe tests to the theory t1 which has failed these tests, because a false theory is certainly worse than one which, for all we know, may be true.
To this we can now add that even after t2 has been refuted in its turn, we can still say that it is better than t1, for although both have been shown to be false, the fact that t2 has withstood tests which t1 did not pass may be a good indication that the falsity-content of t1 exceeds that of t2 while its truth-content does not. Thus we may still give preference to t2, even after its falsification, because we have reason to think that it agrees better with the facts than did t1.
All cases where we accept t2 because of experiments which were crucial between t2 and t1 seem to be of this kind, and especially all cases where the experiments were found by trying to think out, with the help of t2, cases where t2 leads to other results than did t1. Thus Newton's theory allowed us to predict some deviations from Kepler's laws. Its success in this field established that it did not fail in cases which refuted Kepler's; at least the now known falsity-content of Kepler's theory was not part of Newton's, while it was pretty clear that the truth-content could not have shrunk, since Kepler's theory followed from Newton's as a 'first approximation'.
Similarly, a theory t2 which is more precise than t1 can now be shown to have - always provided its falsity content does not exceed that of t1 - a higher degree of verisimilitude than t1. The same will hold for t2 whose numerical assertions, though false, come nearer to the true numerical values than those of t1.
Ultimately, the idea of verisimilitude is most important in cases where we know that we have to work with theories which are at best approximations - that is to say, theories of which we actually know that they cannot be true. (This is often the case in the social sciences.) In these cases we can still speak of better or worse approximations to the truth (and we therefore do not need to interpret these cases in an instrumentalist sense).
XIII
It always remains possible, of course, that we shall make mistakes in our relative appraisal of two theories, and the appraisal will often be a controversial matter. This point can hardly be over-emphasized. Yet it is also important that in principle, and as long as there are no revolutionary changes in our background knowledge, the relative appraisal of our two theories, t1 and t2, will remain stable. More particularly, our preferences need not change, as we have seen, if we eventually refute the better of the two theories. Newton's dynamics, for example, even though we may regard it as refuted, has of course maintained its superiority over Kepler's and Galileo's theories. The reason is its greater content or explanatory power. Newton's theory continues to explain more facts than did the others; to explain them with greater precision; and to unify the previously unconnected problems of celestial and terrestrial mechanics. The reason for the stability of relative appraisals such as these is quite simple: the logical relation between the theories is of such a character that, first of all, there exist with respect to them those crucial experiments, and these, when carried out, went against Newton's predecessors. And secondly, it is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later refutations of Newton's theory could not support the older theories: they either did not affect them, or (as with the perihelion motion of Mercury) they could be claimed to refute the predecessors also.
I hope that I have explained the idea of better agreement with the fact, or of degrees of verisimilitude, sufficiently clearly for the purpose of this brief survey.
XIV
A brief remark on the early history of the confusion between verisimilitude and probability may perhaps be appropriate here.
As we have seen, progress in science means progress towards more interesting, less trivial, and therefore less 'probable' theories (where 'probable' is taken in any sense, such as lack of content, or statistical frequency, that satisfies the calculus of probability) and this means, as a rule, progress towards less familiar and less comfortable or plausible theories. Yet the idea of greater similitude, of a better approximation to the truth, is usually confused, intuitively, with the totally different idea of probability (in its various senses of 'more likely than not', 'more often than not', 'seems likely to be true', 'sounds plausible', 'sounds convincing'). The confusion is a very old one. We have only to remember some of the other words for 'probable', such as 'likely' which comes originally from 'like the truth' or 'verisimilar' ('eoikotōs', 'eikotōs', 'eiskos,' etc., in Greek; 'verisimilis' in Latin; 'wahrscheinlich' in German) in order to see some of the traces, and perhaps some of the sources, of this confusion.
Two at least of the earliest of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used 'eoikota' in the sense of 'like the truth' or 'similar to the truth'. Thus we read in Xenophanes (DK, B 35): 'These things, let us suppose, are like the truth.'
It is fairly clear that verisimilitude or truthlikeness is meant here, rather than probability or degree of incomplete certainty. (Otherwise the words 'let us suppose' or 'let it be conjectured' or 'let it be imagined' would be redundant, and Xenophanes would have written something like, 'These things, let it be said, are probable'.)
Using the same word ('eoikota'), Parmenides wrote (DK, B 8, 60):??
?? In this fragment 'eoikota' has been most frequently translated as 'probable' or 'plausible'. For example W. Kranz, in Diels-Kranz, Fragmente der Vorsokratiker, 6th edn., translates it 'wahrscheinlich-einleuchtend' that is, 'probable and plausible'; he reads the passage thus: 'This world-arrangement (or world-order) I shall expound to you in all its parts as something probable and plausible.' In translating '(wholly) like truth' or '(wholly) like the truth', I am somewhat influenced by the line (DK, B 35) quoted above from Xenophanes (and also by K. Reinhardt's Parmenides, pp. 5 f., where Wilamowitz is referred to). See also section vii of the Introduction to the present volume; the quotation from Osiander in section 1 of ch. 3; section XII of ch. 5, above; and Addendum 6, below.
'Now of this world thus arranged to seem wholly like truth I shall tell you...'
Yet already in the same generation or the next, Epicharmus, in a criticism of Xenophanes, seems to have used the word 'eikotōs' in the sense of 'plausible', or something like it (DK, 21 A 15); though the possibility cannot be excluded that he may have used it in the sense of 'like the truth', and that it was Aristotle (our source is Met., 1010a4) who read it in the sense of 'plausible' or 'likely'. Some three generations later, however, 'eikos' is used quite unambiguously in the sense of 'likely' or 'probable' (or perhaps even of 'more frequently than not') by the sophist Antiphon when he writes (DK, B 60): 'If one begins a thing well it is likely to end well.'
All this suggest that the confusion between verisimilitude and probability goes back almost to the beginning of Western philosophy: and this is understandable if we consider that Xenophanes stressed the fallibility of our knowledge which he described as uncertain guesswork and at best 'like the truth'. This phrase, it seems, lent itself to misinterpretation as 'uncertain and at best of some fair degree of certainty' - that is, 'probable'.
Xenophanes himself seems to have distinguished clearly between degrees of certainty and degrees of truthlikeness. This emerges from another fragment (quoted above towards the end of chapter 5, p. 153) which says that even if by chance we were to hit upon, and pronounce, the final truth (that is, we may add, perfect truthlikeness), we should not know it. Thus great uncertainty is compatible with greatest truthlikeness.
I suggest that we return to Xenophanes and re-introduce a clear distinction between verisimilitude and probability (using this latter term in a sense laid down by the calculus of probability).
The differentiation between these two ideas is the more important as they have become confused; because both are closely related to the idea of truth, and both introduce the idea of an approach to truth by degrees. Logical probability (we do not discuss here physical probability) represents the idea of approaching logical certainty, or tautological truth, through a gradual diminution of informative content. Verisimilitude, on the other hand, represents the idea of approaching comprehensive truth. It thus combines truth and content while probability combines truth with lack of content.??
The feeling that it is absurd to deny that science aims at probability stems, I suggest, from a misguided 'intuition' - from the intuitive confusion between the two notions of verisimilitude and of probability which, as it now turns out, are utterly different.
?? This, incidentally, holds for both, absolute probability, p(a), and relative probability, p(a,b); and there are corresponding absolute and relative concepts of verisimilitude.
4. BACKGROUND KNOWLEDGE AND SCIENTIFIC GROWTH
XV
People involved in a fruitful critical discussion of a problem often rely, if only unconsciously, upon two things: the acceptance by all parties of the common aim of getting at the truth, or at least nearer to the truth, and a considerable amount of common background knowledge. This does not mean that either of these two things is an indispensable basis of every discussion, or that these two things are themselves 'a priori', and cannot be critically discussed in their turn. It only means that criticism never starts from nothing, even though every one of its starting points may be challenged, one at a time, in the course of the critical debate.
Yet though every one of our assumptions may be challenged, it is quite impracticable to challenge all of them at the same time. Thus all criticism must be piecemeal (as against the holistic view of Duhem and of Quine); which is only another way of saying that the fundamental maxim of every critical discussion is that we should stick to our problem, and that we should subdivide it, if practicable, and try to solve no more than one problem at a time, although we may, of course, always proceed to a subsidiary problem, or replace our problem by a better one.
While discussing a problem we always accept (if only temporarily) all kinds of things as unproblematic: they constitute for the time being, and for the discussion of this particular problem, what I call our background knowledge. Few parts of this background knowledge will appear to us in all contexts as absolutely unproblematic, and any particular part of it may be challenged at any time, especially if we suspect that its uncritical acceptance may be responsible for some of our difficulties. But almost all of the vast amount of background knowledge which we constantly use in any informal discussion will, for practical reasons, necessarily remain unquestioned; and this misguided attempt to question it all - that is to say, to start from scratch - can easily lead to the breakdown of a critical debate. (Were we to start the race where Adam started, I know of no reason why we should get any further than Adam did.)
XVI
The fact that, as a rule, we are at any given moment taking a vast amount of traditional knowledge for granted (for almost all our knowledge is traditional) creates no difficulty for the falsificationist or fallibilist. For he does not accept this background knowledge; neither as established nor as fairly certain, nor yet as probable. He knows that even its tentative acceptance is risky, and stresses that every bit of it is open to criticism, even though only in a piecemeal way. We can never be certain that we shall challenge the right bit; but since our quest is not for certainty, this does not matter. It will be noticed that this remark contains my answer to Quine's holistic view of empirical tests; a view which Quine formulates (with reference to Duhem) by asserting that our statements about the external world face the tribunal of sense experience not individually but only as a corporate body.?? Now it has to be admitted that we can often test only a large chunk of a theoretical system, and sometimes perhaps only the whole system, and that, in these cases, it is sheer guesswork which of its ingredients should be held responsible for any falsification; a point which I have tried to emphasize - also with reference to Duhem - for a long time past.?? Though this argument may turn a verificationist into a sceptic, it does not affect those who hold that all our theories are guesses anyway.
This shows that the holistic view of tests, even if it were true, would not create a serious difficulty for the fallibilist and falsificationist. on the other hand, it should be said that the holistic argument goes much too far. It is possible in quite a few cases to find which hypothesis is responsible for the refutation; or in other words, which part, or group of hypotheses, was necessary for the derivation of the refuted prediction. The fact that such logical dependencies may be discovered is established by the practice of independence proofs of axiomatized systems; proofs which show that certain axioms of an axiomatic system cannot be derived from the rest. The more simple of these proofs consist in the construction, or rather in the discovery, of a model - a set of things, relations, operations, or functions - which satisfies all the axioms except the one whose independence is to be shown: for this one axiom - and therefore for the theory as a whole - the model constitutes a counterexample.
Now let us say that we have an axiomatized theoretical system, for example of physics, which allows us to predict that certain things do not happen, and that we discover a counterexample. There is no reason whatever why this counterexample may not be found to satisfy most of our axioms or even all our axioms except one whose independence would be thus established. This shows that the holistic dogma of the 'global' character of all tests or counterexamples is untenable. And it explains why, even without axiomatizing our physical theory, we may well have an inkling of what has gone wrong with our system.
This, incidentally, speaks in favour of operating, in physics, with highly analysed theoretical systems - that is, with systems which, even though they may fuse all the hypotheses into one, allow us to separate various groups of hypotheses, each of which may become an object of refutation by counterexamples. (An excellent recent example is the rejection, in atomic theory, of the law of parity; another is the rejection of the law of commutation for conjugate variables, prior to their interpretation as matrices, and to the statistical interpretation of these matrices.)
XVII
One fact which is characteristic of the situation in which the scientist finds himself is that we constantly add to our background knowledge.
?? See W. V. Quine, From a Logical Point of View, 1953, p. 41.
?? See my L. Sc. D., especially sections 19 to 22; and this volume, ch. 3, text to note 28.
If we discard some parts of it, others, closely related to them, will remain. For example, even though we may regard Newton's theory as refuted - that is, his system of ideas, and the formal deductive system which derives from it - we may still assume, as part of our background knowledge, the approximate truth, within limits, of its quantitative formulae.
The existence of this background knowledge plays an important role in one of the arguments which support (I believe) my thesis that the rational and empirical character of science would vanish if it ceased to progress. I can sketch this argument here only in its barest outline.
A serious empirical test always consists in the attempt to find a refutation, a counterexample. In the search for a counterexample, we have to use our background knowledge; for we always try to refute first the most risky predictions, the 'most unlikely... consequences' (as Peirce already saw??); which means that we always look in the most probable kinds of places for the most probable kinds of counterexamples - most probable in the sense that we should expect to find them in the light of our background knowledge. Now if a theory stands up to many such tests, then, owing to the incorporation of the results of our tests into our background, there may be, after a time, no places left where (in the light of our new background knowledge) counterexamples can with a high probability be expected to occur. But this means that the degree of severity of our tests declines. This is also the reason why an often repeated test will no longer be considered as signigicant or as severe: there is something like a law of diminishing returns from repeated tests (as opposed to tests which, in the light of our background knowledge, are of a new kind, and which therefore may still be felt to be significant). These are facts which are inherent in the knowledge-situation; and they have often been described - especially by John Maynard Keynes and by Ernst Nagel - as difficult to explain by an inductivist theory of science. But for us it is all very easy. And we can even explain, by a similar analysis of the knowledge-situation, why the empirical character of a very successful theory always grows stale, after a time. We may then feel (as Poincaré did with respect to Newton's theory) that the theory is nothing but a set of implicit definitions or conventions - until we progress again and, by refuting it, incidentally re-establish its lost empirical character. (De mortuis nil nisi bene: once a theory is refuted, its empirical character is secure and shines without blemish.)
5. THREE REQUIREMENTS FOR THE GROWTH OF KNOWLEDGE
XVIII
But let us return again to the idea of getting nearer to the truth - to the search for theories which agree better with the facts (as indicated by the list of six comparisons in section x above).
?? See the Collected Papers of C. S. Peirce, vol. VII, 7.182 and 7.206. I owe this reference to W. B. Gallie (cp. Philosophy, 35, 1960, p. 67), and a similar one to David Rynin.
What is the general problem situation in which the scientist finds himself? He has before him a scientific problem: he wants to find a new theory capable of explaining certain experimental facts; facts which the earlier theories successfully explained; others which they could not explain; and some by which they were actually falsified. The new theory should also resolve, if possible, some theoretical difficulties (such as how dispense with certain ad hoc hypotheses, or how to unify two theories). Now if he manages to produce a theory which is a solution to all these problems, his achievement will be very great.
Yet it is not enough. I have been asked, 'What more do you want?' My answer is that there are many more things which I want; or rather, which I think are required by the logic of the general problem situation in which the scientist finds himself; by the task of getting nearer to the truth. I shall confine myself here to the discussion of three such requirements.
The first requirement is this. The new theory should proceed from some simple, new, and powerful, unifying idea about some connection or relation (such as gravitational attraction) between hitherto unconnected things (such as planets and apples) or facts (such as inertial and gravitational mass) or new 'theoretical entities' (such as field and particles). This requirement of simplicity is a bit vague, and it seems difficult to formulate it very clearly. It seems to be intimately connected with the idea that our theories should describe the structural properties of the world - an idea which it is hard to think out fully without getting involved in a infinite regress. (This is so because any idea of a particular structure of the world - unless, indeed, we think of a purely mathematical structure - already presupposes a universal theory; for example, explaining the laws of chemistry by interpreting molecules as structures of atoms, or of subatomic particles, presupposes the idea of universal laws that regulate the properties and the behaviour of the atoms, or of the particles.) Yet one important ingredient in the idea of simplicity can be logically analysed. It is the idea of testability.?? This leads us immediately to our second requirement.
For, secondly, we require that the new theory should be independently testable.?? That is to say, apart from explaining all the explicanda which the new theory was designed to explain, it must have new and testable consequences (preferably consequences of a new kind); it must lead to the prediction of phenomena which have not so far been observed.
This requirement seems to me indispensable since without it our new theory might be ad hoc; for it is always possible to produce a
?? See sections 31-46 of my L. Sc. D. More recently I have stressed (in lectures) the need to relativize comparisons of simplicity to those hypotheses which compete qua solutions of a certain problem, or set of problems. The idea of simplicity, though intuitively connected with the idea of a unified theory that springs from one intuitive picture of the facts, cannot be analysed in terms of numerical paucity of hypotheses. For every (finitely axiomatizable) theory can be formulated in one statement; and it seems that, for every theory and every n, there is a set of n independent axioms (though not necessarily 'organic' axioms in the Warsaw sense).
?? For the idea of an independent test see my paper 'The Aim of Science', Ratio, 1, 1957.
given set of explicanda. Thus our two first requirements are needed in order to restrict the range of our choice among the possible solutions (many of them uninteresting) of the problem in hand.
If our second requirement is satisfied then our new theory will represent a potential step forward, whatever the outcome of the new tests may be. For it will be better testable than the previous theory: the fact that it explains all the explicanda of the previous theory, and that, in addition, it gives rise to new tests, suffices to ensure this.
Moreover, the second requirement also ensures that our new theory will, to some extent, be fruitful as an instrument of exploration. That is to say, it will suggest to us new experiments, and even if these should at once lead to the refutation of the theory, our factual knowledge will have grown through the unexpected results of the new experiments. Moreover, they will confront us with new problems to be solved by new explanatory theories.
Yet I believe that there must be a third requirement for a good theory. It is this. We require that the theory should pass some new, and severe, tests.
XIX
Clearly, this requirement is totally different in character from the previous two. These could be seen to be fulfilled, or not fulfilled, largely by analysing the old and the new theories logically. (They are 'formal requirements'.) The third requirement, on the other hand, can be found to be fulfilled, or not fulfilled, only by testing the new theory empirically. (It is a 'material requirement', a requirement of empirical success.)
Moreover, the third requirement clearly cannot be indispensible in the same sense as are the two previous ones. For these two are indispensable for deciding whether the theory in question should be at all accepted as a serious candidate for examination by empirical tests; or in other words, whether it is an interesting and promising theory. Yet on the other hand, some of the most interesting and most admirable theories ever conceived were refuted at the very first test. And why not? The most promising theory may fail if it makes predictions of a new kind. An example is the marvellous theory of Bohr, Kramers and Slater?? of 1924 which, as an intellectual achievement, might perhaps even rank with Bohr's theory of the hydrogen atom of 1913. Yet unfortunately it was almost at once refuted by the facts - by the coincidence experiments of Bothe and Geiger.?? This shows that not even the greatest physicist can anticipate the secrets of nature: his inspirations can only be guesses, and it is no fault of his, or of his theory, if it is refuted. Even Newton's theory was in the end refuted; and indeed, we hope that we shall in this way succeed in refuting, and improving upon, every new theory. And if it is refuted in the end, why not in the beginning? one might well say that it is merely a historical accident if a theory is refuted after six months rather than after six years, or six hundred years.
?? Phil. Mag., 47, 1924, pp. 785 ff.
?? Zeitschr. f. Phys., 32, 1925, pp. 63 ff.
Refutations have often been regarded as establishing the failure of a scientist, or at least of his theory. It should be stressed that this is an inductivist error. Every refutation should be regarded as a great success; not merely a success of the scientist who refuted the theory, but also of the scientist who created the refuted theory and who thus in the first instance suggested, if only indirectly, the refuting experiment.
Even if a new theory (such as the theory of Bohr, Kramers, and Slater) should meet an early death, it should not be forgotten; rather its beauty should be remembered, and history should record our gratitude to it - for bequeathing to us new and perhaps still unexplained experimental facts and, with them, new problems; and for the services it has thus rendered to the progress of science during its successful but short life.
All this indicates clearly that our third requirement is not indispensable: even a theory which fails to meet it can make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science. Yet in a different sense, I hold, it is indispensable none the less. (Bohr, Kramers and Slater rightly aimed at more than making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science.)
In the first place, I contend that further progress in science would become impossible if we did not reasonably often manage to meet the third requirement; thus if the progress of science is to continue, and its rationality not to decline, we need not only successful refutations, but also positive successes. We must, that is, manage reasonably often to produce theories that entail new predictions, especially predictions of new effects, new testable consequences, suggested by the new theory and never thought of before.?? Such a new prediction was that planets would under certain circumstances deviate from Kepler's laws; or that light, in spite of its zero mass, would prove to be subject to gravitational attraction (that is, Einstein's eclipse-effect). Another example is Dirac's prediction that there will be an anti-particle for every elementary particle. New predictions of these kinds must not only be produced, but they must also be reasonably often corroborated by experimental evidence, I contend, if scientific progress is to continue.
We do need this kind of success; it is not for nothing that the great theories of science have all meant a new conquest of the unknown, a new success in predicting what had never been thought of before. We need successes such as that of Dirac (whose anti-particles have survived the abandonment of some other parts of his theories), or that of Yukawa's meson theory. We need the success, the empirical corroboration, of some of our theories, if only in order to appreciate the significance of successful and stirring refutations (like that of parity). It seems to me quite clear that it is only through these temporary successes of our theories that we can be reasonably successful in attributing our refutations to definite portions of the theoretical maze. (For we are reasonably successful in this - a fact which must remain inexplicable for one who adopts Duhem's and Quine's views on the
?? I have drawn attention to 'new' predictions of this kind and to their philosophical significance in ch. 3. See especially pp. 117 f.
the matter.) A unbroken sequence of refuted theories would soon leave us bewildered and helpless: we should have no clue about the parts of each of these theories - or of our background knowledge - to which we might, tentatively, attribute the failure of that theory.
XX
Earlier I suggested that science would stagnate, and lose its empirical character, if we should fail to obtain refutations. We can now see that for very similar reasons science would stagnate, and lose its empirical character, if we should fail to obtain verifications of new predictions; that is, if we should only manage to produce theories that satisfy our first two requirements but not the third. For suppose we were to produce an unbroken sequence of explanatory theories each of which would explain all the explicanda in its field, including the experiments which refuted its predecessors; each would also be independently testable by predicted new effects; yet each would be at once refuted when these predictions were put to the test. Thus each would satisfy our first two requirements, but all would fail to satisfy the third.
I assert that, in this case, we should feel that we were producing a sequence of theories which, in spite of their increasing degree of testability, were ad hoc, and that we were not getting any nearer to the truth. And indeed, this feeling may well be justified: this whole sequence of theories might easily be ad hoc. For if it is admitted that a theory may be ad hoc if it is not independently testable by experiments of a new kind but merely explains all the explicanda, including the experiments which refuted its predecessors, then it is clear that the mere fact that the theory is also independently testable cannot as such ensure that it is not ad hoc. This becomes clear if we consider that it is always possible, by a trivial stratagem, to make an ad hoc theory independently testable, if we do not also require that it should pass the independent tests in question: we merely have to connect it (conjunctively) in some way or other with any testable but not yet tested fantastic ad hoc prediction which may occur to us (or to some science fiction writer).
Thus our third requirement, like the second, is needed in order to eliminate trivial and other ad hoc theories.?? But it is needed also for what seem to me even more serious reasons.
I think that we are quite right to expect, and perhaps even to hope, that even our best theories will superseded and replaced by
?? Dr Jerzy Giedymin (in a paper 'A Generalization of the Refutability Postulate', Studia Logica, 10, 1960, see especially pp. 103 ff.) has formulated a general methodological principle of empiricism which says that our various rules of scientific method must not permit what he calls a 'dictatorial strategy'; that is they must exclude the possibility that we shall always win the game played in accordance with these rules: Nature must be able to defeat us at least sometimes. If we drop our third requirement, then we can always win, and need not consider Nature at all, as far as the construction of 'good' theories is concerned: speculations about answers which Nature may give to our questions will play no role in our problem situation which will always be fully determined by our past failures alone.
better ones (though we may at the same time feel the need for encouragement in our belief that we are making progress). Yet this should certainly not induce in us the attitude of merely producing theories so that they can be superseded.
For our aim as scientists is to discover the truth about our problem; and we must look at our theories as serious attempts to find the truth. If they are not true, they may be, admittedly, important stepping stones towards the truth, instruments for further discoveries. But this does not mean that we can ever be content to look at them as being nothing but stepping stones, nothing but instruments; for this would involve giving up even the view that they are instruments of theoretical discoveries; it would commit us to looking upon them as mere instruments for some observational or pragmatic purpose. And this approach would not, I suspect, be very successful, even from a pragmatic point of view: if we are content to look at our theories as mere stepping stones, then most of them will not even be good stepping stones. Thus we ought not to aim at theories which are mere instruments for the exploration of facts, but we ought to try to find genuine explanatory theories: we should make genuine guesses about the structure of the world. In brief, we should not be satisfied with the first two requirements.
Of course, the fulfilment of our third requirement is not in our own hands. No amount of ingenuity can ensure the construction of a successful theory. We also need luck; and we also need a world whose mathematical structure is not so intricate as to make progress impossible. For indeed, if we should cease to progress in the sense of our third requirement - if we should only succeed in refuting our theories but not in obtaining some verifications of predictions of a new kind - we might well decide that our scientific problems have become too difficult for us because the structure (if any) of the world is beyond our powers of comprehension. Even in this case we might proceed, for a time, with the theory construction, criticism, and falsification: the rational side of the method of science might, for a time, continue to function. Yet I believe that we should feel that, especially for the functioning of its empirical side, both kinds of successes are essential: success in refuting our theories, and success on the part of some of our theories in resisting at least some of our most determined attempts to refute them.
XXI
It may be objected that this is merely good psychological advice about the attitude which scientists ought to adopt - a matter which, after all, is their private affair - and that a theory of scientific method worthy of its name should be able to produce logical or methodological arguments in support of our third requirement. Instead of appealing to the attitude or the psychology of the scientist, our theory of science should even be able to explain his attitude, and his psychology, by an analysis of the logic of the situation in which he finds himself. There is a problem here for our theory of method.
I accept this challenge, and I shall produce there reasons: the first from the idea of truth; the second from the idea of getting nearer to the truth (verisimilitude); and the third from our old idea of independent tests and of crucial tests.
(1) The first reason why our third requirement is so important is this. We know that if we had an independently testable theory which was, moreover, true, then it would provide us with successful predictions (and only with successful ones). Successful predictions - though they are not, of course, sufficient conditions for the truth of a theory - are therefore at least necessary conditions for the truth of an independently testable theory. In this sense - and only in this sense - our third requirement may even be said to be 'necessary', if we seriously accept truth as a regulative idea.
(2) The second reason is this. If it is our aim to strengthen the verisimilitude of our theories, or to get nearer to the truth, then we should be anxious not only to reduce the falsity-content of our theories but also to strengthen their truth-content.
Admittedly this may be done in certain cases simply by constructing the new theory in such a way that the refutations of the old theory are explained ('saving the phenomena', in this case the refutations). But there are other cases of scientific progress - cases whose existence shows that this way of increasing the truth content is not the only possible one.
The cases I have in mind are cases in which there was no refutation. Neither Galileo's nor Kepler's theory was refuted before Newton: what Newton tried to do was to explain them from more general assumptions, and thus to unify two hitherto unrelated fields of inquiry. The same may be said of many other theories: Ptolemy's system was not refuted when Copernicus produced his. And though there was, before Einstein, the puzzling experiment of Michelson and Morley, this had been successfully explained by Lorentz and Fitzgerald.
It is in case like these that crucial experiments become decisively important. We have no reason to regard the new theory as better than the old theory - to believe that it is nearer to the truth - until we have derived from the new theory new predictions which were unobtainable from the old theory (the phases of Venus, the perturbations, the mass-energy equation) and until we have found that these new predictions were successful. For it is only this success which shows that the new theory had true consequences (that is, a truth-content) where the old theories had false consequences (that is, a falsity-content).
Had the new theory been refuted in any of these crucial experiments then we should have had no reason to abandon the old one in its favour - even if the old theory was not wholly satisfactory. (This was the fate of the Bohr-Kramers-Slater theory.)
In all these important cases we need the new theory in order to find out where the old theory was deficient. Admittedly, the situation is different if the deficiency of the old theory is already known before the new theory is invented; but logically the case has enough similarity with the other cases to regard a new theory which leads to new crucial experiments (Einstein's mass-energy equation) as superior to one which can only save the known phenomena (Lorentz-Fitzgerald).
(3) The same point - the importance of crucial tests - can be made without appealing to the aim of increasing the verisimilitude of a theory, by using an old argument of mine - the need to make the tests of our explanations independent.?? This need is a result of the growth of knowledge - of the incorporation of what was new and problematic knowledge into background knowledge, with a consequent loss of explanatory power to our theories.
These are my main arguments.
XXII
Our third requirement may be divided into two parts: first we require of a good theory that it should be successful in some of its new predictions; secondly we require that it is not refuted too soon - that is, before it has been strikingly successful. Both requirements sound strange. The first because the logical relationship between a theory and any corroborating evidence cannot, it seems, be affected by the question whether the theory is temporally prior to the evidence. The second because if the theory is doomed to be refuted, its intrinsic value can hardly depend upon delaying the refutation.
Our explanation of this slightly puzzling difficulty is simple enough: the successful new predictions which we require the new theory to produce are identical with the crucial tests which it must pass in order to become sufficiently interesting to be accepted as an advance upon its predecessor, and to be considered worthy of further experimental examination which may eventually lead to its refutation.
Yet the difficulty can hardly be resolved by an inductivist methodology. It is therefore not surprising that inductivists such as John Maynard Keynes have asserted that the value of predictions (in the sense of facts derived from the theory but previously not known) was imaginary; and indeed if the value of a theory would lie merely in its relation to its evidential basis, then it would be logically irrelevant whether the supporting evidence precedes or follow in time the invention of the theory. Similarly the great founders of the hypothetical method used to stress the 'saving of the phenomena', that is to say, the demand that the theory should explain known experience. Successful new prediction - of new effects - seems to be a late idea, for obvious reasons; I do not know when and with whom it originated; yet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rediction of known effects and the prediction of new effects was hardly ever made explicitly. But it seems to me quite indispensable as a part of an epistemology which views science as progressing to better and better explanatory theories; that is, not merely to instruments of exploration, but to genuine explanations.
Keynes' objection (that it is an historical accident whether this support was known before the theory was proposed, or only afterwards so that it could attain the status of a prediction) overlooks the all-important fact that it is through our theories that we learn to
?? See especially my paper 'The Aim of Science', Ratio, 1, 1957.
observe, that is to say, to ask questions which lead to a observations and to their interpretations. This is the way our observational knowledge grows. And the questions asked are, as a rule, crucial questions which may lead to answers that decide between competing theories. It is my thesis that it is the growth of our knowledge, our way of choosing between theories, in a certain problem situation, which makes science rational. Now both the idea of the growth of knowledge and that of a problem situation are, at least partly, historical ideas. This explains why another partly historical idea - that of a genuine prediction of evidence (it may be about past facts) not known when the theory was first proposed - may play an important role here, and why the apparently irrelevant time element may become relevant.??
I shall now briefly sum up our results with respect to the epistemologies of the two groups of philosophers I have dealt with, the verificationists and the falsificationists.
While the verificationists or inductivists in vain try to show that scientific beliefs can be justified or, at least, established as probable (and so encourage, by their failure, the retreat into irrationalism), we of the other group have found that we do not even want a highly probable theory. Equating rationality with the critical attitude, we look for theories which, however fallible, progress beyond their predecessors; which means that they can be more severely tested, and stand up to some of the new tests. And while the verificationists laboured in vain to discover valid positive arguments in support of their beliefs, we for our part are satisfied that the rationality of a theory lies in the fact that we choose it because it is better than its predecessors; because it can be put to more severe tests; because it may even have passed them, if we are fortunate; and because it may, therefore, approach nearer to the truth.
APPENDIX: A PRESUMABLY FALSE YET FORMALLY
HIGHLY PROBABLE NON-EMPIRICAL STATEMENT
In the text of this chapter I have drawn attention to the criterion of progress and of rationality based on the comparison of degrees of testability or degrees of the empirical content or explanatory power of theories. I did so because these degrees have been little discussed so far.
?? Verificationists may think that the preceding discussion of what I have called here the third requirement quite unnecessarily elaborates what nobody contests. Falsificationists may think otherwise; and personally I feel greatly indebted to Dr Agassi for drawing my attention to the fact that I have previously never explained clearly the distinction between what are called here the second and third requirements. He thus induced me to state it here in some detail. I should mention, however, that he disagrees with me about the third requirement which, as he explained to me, he cannot accept because he can regard it only as residue of verificationist modes of thought. (See also his paper in the Australasian Journal of Philosophy, 39, 1961, where he expresses his disagreement on p. 90.) I admit that there may be a whiff of verificationism here; but this seems to me a case where we have to put up with it, if we do not want a whiff of some form of instrumentalism that takes theories to be mere instruments of exploration.
I always thought that the comparison of these degrees leads to a criterion which is more important and more realistic than the simpler criterion of falsifiability which I proposed at the same time, and which has been widely discussed. But this simpler criterion is also needed. In order to show the need for the falsifiability or testability criterion as a criterion of the empirical character of scientific theories, I will discuss, as an example, a simple, purely existential statement which is formulated in purely empirical terms. I hope this example will also provide a reply to the often repeated criticism that it is perverse to exclude purely existential statements from empirical science and to classify them as metaphysical.
My example consists of the following purely existential theory:
'There exists a finite sequence of Latin elegiac couplets such that, if it is pronounced in an appropriate manner at a certain time and place, this is immediately followed by the appearance of the Devil - that is to say, of a man-like creature with two small horns and one cloven hoof.'
Clearly, this untestable theory is, in principle, verifiable. Though according to my criterion of demarcation it is excluded as non-empirical and non-scientific or, if you like, metaphysical, it is not so excluded by those positivists who consider all well-formed statements and especially all verifiable ones as empirical and scientific.
Some of my positivist friends have indeed assured me that they consider my existential statement about the Devil to be empirical. It is empirical though false, they said. And they indicated that I was mistaking false empirical statements for non-empirical ones.
However, I think that the confusion, if any, is not mine (이 문장은 However, I don't think that the confusion, if any, is mine을 쓰는 것이 옳다 - 역자 주). I too believe that the existential statement is false: but I believe that it is a false metaphysical statement. And why, I ask, should anybody who takes it for empirical think that it is false? Empirically, it is irrefutable. No observation in the world can establish its falsity. There can be no empirical grounds for its falsity.
Moreover, it can be easily shown to be highly probable: like all existential statements, it is in an infinite (or sufficiently large) universe almost logically true, to use an expression of Carnap's. Thus, if we take it to be empirical, we have no reason to reject it, and every reason to accept it and to believe in it - especially upon a subjective theory of probable belief.
Probability theory tells us even more: it can be easily proved not only that empirical evidence can never refute an almost logically true existential statement, but that it can never reduce its probability.?? (Its probability could be reduced only by some information which is at least 'almost logically false', and therefore not by an observational evidence statement.) So the empirical probability or degree of empirical confirmation (in Carnap's sense) of our statement about the devil-summoning spell must for ever remain equal to unity, whatever the facts may be.
?? This is a consequence of the 'principle of stability' of the probability calculus; see theorem (26), section V, of my paper 'Creative and Non-Creative Definitions in the Calculus of Probability', Synthese, 15, 1963, No. 2, pp. 167-186.
It would of course be easy enough for me to amend my criterion of demarcation so as to include such purely existential statements among the empirical statements. I merely should have to admit not only testable or falsifiable statements among the empirical ones, but also statements which may, in principle, be empirically 'verified'.
But I believe that it is better not to amend my original falsifiability criterion. For our example shows that, if we do not wish to accept my existential statement about the spell that summons the devil, we must deny its empirical character (notwithstanding the fact that it can easily be formalized in any model language sufficient for the expression of even the most primitive scientific assertions). By denying the empirical character of my existential statement, I make it possible to reject it on grounds other than observational evidence. (See chapter 8, section 2, for a discussion of such grounds, and chapter 11, especially pp. 275-277, for a formalization of a similar argument.)
This shows that it is preferable, as I have been trying to make clear for some considerable time, not to assume uncritically that the term 'empirical' and 'well-formed' (or 'meaningful') must coincide - and that the situation is hardly improved if we assume, uncritically, that probability or probabilistic 'confirmability' may be used as a criterion of the empirical character of statements or theories. For a non-empirical and presumably false statement may have a high degree of probability, as has been shown here.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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