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박
소크라테스여, 아마도 당신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이 생애에서 이것들과 같은 문제들에 관하여 확실한 지식을 습득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완전히 벗어나거나, 적어도 매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전력(全力)을 사용하여, 모든 면에서 그것들을 검토함으로서 자신을 녹초로 만들기 전에 포기하기를 거부하면서, 그것들에 관한 모든 논증을 반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비겁자이리라. 그 까닭은 사람이 두 가지 일 중에서 한 가지는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들에 관한 진리를 그가 배우거나 발견해야 하든지, 혹은 그것이 그의 능력을 벗어나면, 그는 자신에게 최고로 보이고, 그래서 논박에 가장 강력한 저항을 하는 듯 보이는 모든 인간적 이론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더 강력하고, 덜 위험하고, 그래서 더 믿음직한 것에 탈 수 없다면, 뗏목 위에서처럼 그것을 타고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삶은 통하여 그것 위에서 항해를 해야 한다...
플라톤
11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획
요약문
요약되면 나의 주장은 이렇다.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획이 의미와 무의미의 구획과 일치함을 밝히려는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의 반복된 시도는 실패했다. 이유는 ‘의미’('meaning' or 'sense')에 대한 (혹은 검증가능성에 대한, 혹은 귀납적 확인가능성에 대한, 기타 등등) 실증주의적 개념이 이 구획을 완성하는 데에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 형이상학은 과학이 아니라 할지라도 무의미할 필요는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 구획들의 모든 그 변형들 안에서 무의미함에 의한 구획은 동시에 너무 폭 좁고 너무 넓은 경향이 있었다: 모든 의도와 모든 주장에 대항하여, 그 구획은, 심지어 ‘이성적 신학(rational theology)’으로서 알려진 형이상학의 한 부분을 배제하는 데에 실패한 반면, 과학적 이론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배제하는 경향이 있었다.
1. 서문
카르납(Carnap)에 대하여 글을 쓰면서 - 그리고 카르납을 비판하면서 - 내가 그를 처음 그의 세미나에서 만났던 때인 1928년 혹은 1929년이 기억난다. 심지어 훨씬 더 생생하게 아름다운 티롤(Tyrol) 언덕에서 있었던 1932년의 나중 기회가 기억나는데, 그 때 나는 카르납 및 헤르베르트 파이글(Herbert Feigl)과 부부동반으로 긴 비판적 토론을 하면서 우리의 휴일 한 부분을 보내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는 풍부한 햇빛을 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우리 모두는 등산을 조금 했지만 그 등산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
P. A. 쉴프(Schilpp)에 의하여 편집된 살아있는 철학자들의 총서(the Library of Living Philosophers) 안에서 1964년 편찬된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의 철학이라는 편에 1955년 1월에 기고된 논문. 이 논문은, 쉴프 교수의 허락을 받고, 1956년 6월 이래 등사판으로 배포되었다. 작은 문체 수정을 제외하고, 나는 그 논문이 쓰인 이후에 몇 가지 요점을 다양한 출판물에서 더 발전시켰지만, 원문에서 변경을 하지는 않았다; 특히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부록 *iv, 특히 390쪽 이하 참조: 현재 서적의 10장의 부록; 변증법(Dialectica) 11권, 1957년, 354-374쪽의 논문; 정신(Mind), 71호, 1962년, 69-73쪽의 두 가지 주석, 그리고 76호, 1967년, 103-110쪽; 그리고 I. 라카토스(Lakatos) (편집자), 귀납적 논리의 문제(The Problem of Inductive Logic), 1968년. 라카토스와 와트킨스(Watkins)의 그 책에 대한 기고문 또한 참조.
이 길고도 매혹적인 대담을 크게 즐겼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확신컨대 우리들 누구도 어떻게 카르납이 아름답고 거의 뚫을 수 없는 산진달래 덤불을 통하여 가파른 등산으로 길 없는 언덕 위로 우리를 안내했는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화제(話題)로 인하여 파이글(Feigl)이 그 언덕을 ‘Semantische Schnuppe’라고 (‘의미론적 유성’과 같은 것) 이름붙인 아름답고 거의 뚫을 수 없는 논증의 덤불을 통과하여 어떻게 그가 우리를 이끌었는지 - 타스키(Tarski)의 비판에 자극을 받고 카르납이 자신을 논리적 구문론에서 의미론으로 이끌었던 길을 발견하기 전까지 몇 년이 분명히 지났을지라도.?
나는 카르납에게서 내가 만난 가장 매혹적인 사람들 중 한 명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 완전히 몰입하여 헌신적이면서 기꺼이 비판을 듣고자 하던 사상가를 또한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로, 카르납이 버트런드 러셀과 - 카르납과 우리 모두에게 미친 러셀의 영향은 다른 어떤 사람의 영향보다 컸다 - 공유한 몇 가지 다른 특징들 중에서는, 비판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철학에 근본적인 중요성을 갖는 요점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그의 지적(知的) 용기가 있었다.
나는 인식론의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rkenntnistheorie: 'The Two Fundamental Problems of Epistemology')라는 커다란 책의 원고를 가지고 티롤(Tyrol)에 왔다. 그 책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지만, 영어본이 어느 날 출현할 것이다; 그 책의 여러 부분들이 나중에, 많이 축약된 형태로,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에 삽입되었다. ‘두 가지 문제’는 귀납법의 문제와 구획의 -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획 - 문제였다. 그 책에는, 다른 많은 것들 가운데,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의 의미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제거(elimination)’내지 ‘전복(顚覆: overthrow:)’ (Ueberwindung?) 교설에 대한 상당히 상세한 비판이 담겨있었다. 형이상학의 관점으로부터가 아니라, 과학에 흥미를 가져서 이 교설이, 상상되는 적(敵) 형이상학을 패퇴시키기는커녕, 실제로 적(敵)에게 포위된 도시의 열쇠를 제공한다고 두려워하던 사람의 관점으로부터 이 교설을 나는 비판했다.
나의 비판은, 주로, 카르납의 저서 두 권 세계의 논리적 구성(Der logische Aufbau der Welt) (요약하여 ‘구성[Aufbau]’) 및 철학에서의 사이비 문제(Scheinprobleme in der philosophie), 그리고 인식(Erkenntnis) 안의 그의 논문 몇 편을 겨냥했다. 카르납은, 밝혀진 바와 같이,? 내가 나의 견해와 그가 주요 회원이었던 비엔나 학파의 견해 사이의 차이점들을 과장했다고 그가 느꼈을지라도, 나의 비판 일부를 수용했다?.
? 1932년에 카르납은 ‘의미론’을 ‘논리적 구문론’과 동의어로서 사용했다; 인식(Erkenntnis) 3호, 1932년, 177쪽 참조.
? 카르납의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전복’(Ueberwindung der Metaphysik durch logische Analyse der Sprache': 'The Overthrow of Metaphysics through Logical Analysis of Language'), 인식(Erkenntnis), 2호, 1932년, 219쪽 이하 참조.
? 당시 미발간이었던 나의 특정 견해에 대한 카르납의 풍부하게 감식력이 있는 보고서, 인식(Erkenntnis), 3호, 1932년, 223쪽에서 228쪽까지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1959년, 1960년 (1934년에 원래 독일에서 Logik der Forschung으로 발간되었지만 여기서는 항상 'L. Sc. D.'로 인용된다.), 29부의 주석 1에서 내가 그것에 대하여 토론한 것 참조.
? 1935년, 인식(Erkenntnis), 5호, 290-4쪽, 특히 293쪽에 실린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 대한 카르납의 검토 참조: ‘자신의 견해를 특징지으려는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포퍼는] 자신의 견해와 자신의 견해와 매우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견해들 사이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도록 영향을 받는다.,, [포퍼는] 정말로 비엔나 학파의 견해와 매우 근접해있다.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차이점들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보인다.’
이것은 나를 여러 해 동안 침묵시켰는데,? 특히 카르납이 자신의 저서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에서 나의 비판에 그렇게 많은 주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견해들 사이의 차이점이 비실제적임과 거리가 멀다고 항상 느꼈다; 그리고 그 차이점들이 중요하다는 나의 느낌은 확률과 귀납법에 관한 카르납의 최신 논문들과 서적에 의하여 많이 확대되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그 차이점들이 구획의 문제와 관련되는 한, 그 차이점을 토론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내 자신을 차이점을 과장한다는 혐의에 노출시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그러나 카르납이 나의 여생 동안 나를 침묵시킨 것을 우려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데에 방해받지 않기를 나는 희망한다: 나는 이번에는 더 이성적이 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논문을 쓰는 초대를 수락했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하여 나에게는 가능한 한 명백하고 날카롭게 우리의 차이점들을 특징지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남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그 차이점들이 실제적이라는 - 지난 25년 동안 내가 그 차이점들이 실제적이라고 느낀 것만큼 실제적 - 주장을 옹호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 논문의 2부에서 나는 나의 비판의 기초를 이루는 내 자신의 견해 몇 가지를 개괄하려고 노력한다. 그 다음 부에서 나는 - 내가 보는 바와 같이 - 과학과 형이상학의 구획 문제에 관한 카르납의 견해 전개를 추적하려고 노력한다. 전 과정을 통한 나의 접근방식은 역사적이라기보다는 비판적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적 완결성은 아니라할지라도, 역사적 정밀성을 목표로 했다.
2. 그 문제에 관한 나의 견해
경험적 과학에 속하는 것으로서 합당하게 기술(記述)될 수 있는 저 서술들이나 서술들의 체계들과, 아마도 ‘사이비-과학적’이나 (특정 환경에서) ‘형이상학적’으로서 기술되거나, 혹은 아마도 순수 논리학이나 순수 수학에 속하던 다른 서술들이나 서술들의 체계들 사이에 구획의 선을 긋는 문제에 내가 처음으로 직면한 것은 1919년이었다.
이것은, 내가 그 문제에 대한 명시적인 언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베이컨(Bacon)의 시대 이후에 많은 철학자들을 당혹시켰던 문제이다. 가장 폭넓게 수용된 견해는, 사이비 과학과 형이상학이 그것들의 사변적(思辨的: speculative) 방법에 의하여, 혹은 베이컨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들이 ‘정신적 기대(mental anticipations)’에 - 가설과 매우 유사한 것 - 의하여 작동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특징지어지는 반면, 과학은 과학의 관찰성 토대(observational basis)에 의하여, 즉 과학의 귀납적 방법에 의하여 특징지어 진다는 것이었다.
이 견해를 나는 수용할 수 없었다. 물리학에 관한 현대적 이론들은, 특히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1919년에 널리 논의되던), 고도로 사변적이고 추상적이어서 아마도 그것들의 ‘관찰성 토대’로 불릴 것과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것들이 다소 직접적으로 ‘관찰에 기초’했음을 밝히려는 모든 시도들은 확신적이지 않았다. 뉴튼의 이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베이컨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불필요하게 우리의 감각들을 망친다’는 이유로 그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를 출판한 이후 처음 10년 동안 이 견해 차이를 심지어 언급하는 아무 것도 나는 발표하지 않았다 (내가 그 차이점들을 몇몇 강연에서 언급했다 할지라도); 그리고 다음 10년 동안, 다시 말해서 내가 현재의 논문을 시작하기 전까지 거의 아무 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 아무튼, 비트겐슈타인과 슐릭(Schilck)에 대한 몇 마디 비판적 말뿐 (1945년에 처음 출판된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에서; 11장의 주석 51이하, 46, 26, 그리고 48 참조; 본서의 2, 12 및 14장 또한 참조).
체계에 반론을 제기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최고의 물리 이론들은 항상 베이컨이 ‘정신적 기대(mental anticipations)’로서 배척한 것을 닮았다.
다른 한 편으로, 대중적인 책력(almanacs) 및 해몽서에서 발견되는 많은 미신적인 믿음들과 많은 주먹구구식 과정들이 (식물 재배, 기타 등등에 관하여) 의심할 바 없이 귀납법과 같은 것에 흔히 근거하였다. 점성술사들은, 더욱 특히, 자신들의 ‘과학’이 매우 풍부한 귀납적 자료에 근거했다고 항상 주장했다. 이 주장은, 아마도, 근거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주장의 소위 귀납적 자료를 비판적으로 조사함으로써 점성술사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시도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성술은 수용되는 이론들과 방식들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현대 과학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구획에 관한 다른 기준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제안을 공표하기 전에 몇 년이 경과했을지라도) 이론적 체계의 반박 가능성 즉, 반증 가능성이 구획의 기준으로서 고려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 견해를 내가 아직도 지지하는데, 이론 체계는, 관찰한 것들과 충돌할 주장을 내놓는다는 조건으로만 과학적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이론 체계는, 사실상, 그런 충돌들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에 의하여 시험된다; 다시 말해서, 그 체계를 논박하려는 시도들에 의하여. 그리하여 시험가능성은 논박가능성과 동일하며, 그러므로 구획의 기준으로서 똑같이 생각될 수 있다.
이것이 과학의 비판적 접근방식이 과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하는 과학에 관한 견해이다. 그리하여 과학자는 이론을 그 이론이 비판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지의 관점으로부터 쳐다보아야 한다: 그 이론이 모든 종류의 비판에 자체를 노출시키는지; 그리하여 이론이 노출시킨다면 - 이론이 모든 종류의 비판을 견디어낼 수 있는지. 뉴튼의 이론은, 예를 들어, 당시에 관찰되지 않은 케플러의 법칙들로부터의 이탈을 (행성들의 상호작용에 기인하는) 예언했다. 그리하여 이론은 논박의 실패가 이론의 성공을 의미했던 시도된 경험적 논박에 자체를 노출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도 유사한 방식으로 시험되었다. 그래서 정말로, 모든 실제적 시험들은 시도된 논박들이다. 이론이 이 시도된 논박들의 압력을 성공적으로 견디어낸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그 이론이 경험에 의하여 확인되거나 입증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게다가, (내가 나중에 발견한 바와 같이?), 시험가능성의 정도(試驗可能性의 程度: degrees of testability)가 있다. 어떤 이론들은 다른 이론들보다 더 대담하게 자체를 가능한 논박들에 노출시킨다. 예를 들어, 그 이론으로부터 우리가, 다양한 힘의 자기장(磁氣場)에서 원자들에 의하여 방사된 분광 광선을 분기하는 것에 관한 정확한 숫자적 예언들을 추론할 수 있는 이론은, 자기장이 빛의 방사에 영향을 미친다고 예언만 하는 이론보다 더 실험적 논박에 노출될 것이다. 또 다른 이론보다 더 정확하고 더 쉽게 논박이 가능한 이론은 또한 더 흥미로운 이론일 것이다. 그 이론은 더 과감한 이론이기 때문에, 덜 개연적(less probable)인 이론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론은 더 시험 가능한데, 이유는 우리가 하는 시험들을 우리가 더 정확하고 더 엄격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론이 엄격한 시험들을 견디어낸다면, 이 시험들에 의하여 더 잘 확인이 되거나, 더 잘 증명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확인가능성(confirmability)은 (혹은 증명가능성이나 입증가능성[or attestability or corroborability]) 틀림없이 시험가능성(testability)과 함께 증가한다.
?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31부에서 46부까지 참조.
이것은 구획 기준이 절대적으로 뚜렷한 하나가 될 리가 없고 그 자체로 정도(程度: degrees)를 가질 것임을 가리킨다. 잘-시험될 수 있는 이론들과, 거의 시험될 수 없는 이론들과 시험될 수 없는 이론들이 있을 것이다. 시험될 수 없는 이론들은 경험적 과학자들에게 흥미를 주지 못한다. 그 이론들은 형이상학적으로서 기술(記述)될 것이다.
여기서 나는 다시 흔히 오해된 요점을 강조해야 한다. 아마도 나는 나의 요점을 이제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이 오해를 피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과학을 언명할 의도인 언어의 모든 서술 집합을 대표하는 정사각형을 생각하라; 그 정사각형을 위쪽과 아래쪽으로 절반으로 나누면서 넓은 평행선을 그어라; 위쪽에는 ‘과학’과 ‘시험 가능한’을, 그리고 아래쪽에는 ‘형이상학’과 ‘시험 불가능한’을 써라: 그렇다면 구획선이, 과학을 내부에 남기고 형이상학을 유의미한 서술들의 집합으로부터 제외함으로써 형이상학을 금지하면서, 언어의 한계와 일치하는 그런 방식으로 구획선을 긋기를 내가 제안하지 않음을 여러분이 이해하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 반대이다: 이 주제에 대한 나의 최초의 발표로 시작하여,?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유의미한 언어로부터 제외하기 위하여 구획선을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에 긋는 것은 부적절하리라는 사실을 나는 강조했다.
나는 우리가 너무 예리하게 금을 그으려고 애를 써서는 안 된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에 관한 한 가지 이유를 적시하였다. 우리의 과학 이론 대부분이 신화(神話)에서 시작됨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이것은 명백해진다. 예를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자체의 고귀함 때문에 ‘중앙’을 확실히 차지하는 태양광선에 대한 신(新)-플라톤적 숭배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다. 이것은 어떻게 신화(神話)들이 시험 가능한 구성요소들을 발현시킬지를 적시한다. 신화(神話)들은, 토론 과정에서, 결실을 맺어 과학에 관하여 중요하게 된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과학에 매우 중요하게 된 신화(神話)들의 몇 가지 보기들을 들었는데, 그 가운데에 원자론과 빛의 입자설이 있다. 이 이론들이 발전의 한 단계에서 무의미한 헛소리이고, 그 다음에 갑자기 또 다른 단계에서 훌륭한 의미가 된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명징성에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또 다른 논증은 다음과 같다. 특정 서술이 시험 가능하기 때문에, 그 서술의 부정이 시험 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 반면, 과학에 속하여 그 서술이 구획선 아래 놓여야 한다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 그리고 그 일은 중요한 경우로 밝혀질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는 서술들에 - 과학의 보편적인 법칙들 - 관하여 적용되는 경우이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그 서술들이, 특정 목적을 위하여, ‘영원한 운동 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이것은 때때로 ‘열역학 제 1법칙에 대한 플랑크[Planck]의 공식’이라고 불린다) 같은 형태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나는 권유했다; 다시 말해서, 존재성 서술의 부정(negation of an existential statement)이라는 형태로. 상응하는 존재성 서술은 - ‘영원한 운동 기계는 존재한다’ - ‘바다뱀이 존재한다’와 함께, 쉽게 시험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구획선 위에 있는 ‘대영 박물관에 지금 전시되고 있는 바다뱀이 있다’와 반대로, 구획선 아래의 것들에 속할
? 인식(Erkenntnis), 3호, 1933년, 426쪽 이하, 지금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312-14쪽의 ‘이론 체계의 경험적 특징에 대한 기준(Ein Kriterium des empirischen Charakters theoretischer Systeme)’ 참조; 또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4부와 10부 참조.
?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85부, 278쪽.
것이라고 나는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립된 순전히 존재성 주장을 어떻게 시험할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이곳에서 고립된 순전히 존재성 서술들이 시험 불가능한 것으로서 그리하여 과학자의 흥미 범위 밖에 떨어지는 것으로서 분류되어야 한다는 견해의 합당성을 지지하여 논증할 수는 없다.? 이 견해가 수용된다면, 형이상학적 서술들을 무의미하다고 부르거나,?? 그 서술들을 우리의 언어로부터 배제하는 것이 이상하리라 것을 나는 분명히 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존재성 서술의 부정을 유의미한 것으로서 수용한다면, 우리는 존재성 서술 자체를 또한 유의미한 것으로서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가 반증가능성이나 논박가능성을 의미의 (구획이라기보다는) 기준으로서 생각하는 제안으로서, 혹은 우리의 언어로부터 또는 아마도 과학의 언어로부터 존재성 서술들을 배제하는 제안으로서, 반복적으로 기술(記述)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요점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카르납도, 나의 견해를 상당히 자세하게 토론하여 올바르게 보고하는데, 어떤 언어나 다른 언어로부터 형이상학적 서술들을 배제하는 제안으로서 자신이 나의 견해를 해석해야 한다고 느낀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논문 발표로 시작하여 (위 주석 7 참조), 나는 항상 무의미함의 문제를 사이비-문제로서 배격했다; 그래서 그 문제가 구획의 문제와 동일시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항상 반대했다. 이것이 아직도 나의 견해이다.
3. 무의미함에 대한 카르납의 첫 번째 이론
내가 나의 원고에서 (그리고 나중에, 더 간단하게,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비판했던 이론들 중 하나는 형이상학은 의미가 없어서, 무의미한 사이비-명제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이론은?? 형이상학의 ‘전복(顚覆)’을 야기할 것으로 기대되어, 초기
?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15부. 어떤 사람들은, 경험적 특징을 지닌 서술로부터 (‘지금 대영박물관 입구에 전시된 바다뱀이 있다’) 아마도 연역될 수 있다할지라도, 순수하거나 고립된 존재성 서술이 (‘바다뱀이 존재한다’) ‘형이상학적’으로 불려야 한다는 견해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사항을 간과했다: (a) 그 견해가 그렇게 연역 가능한 한, 더 이상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시험 가능한 이론에 속했다, 그리고 (b) 서술이 경험적인 즉, 과학적인 서술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할지라도 이 사실로 인하여 그 서술이 경험적, 즉 과학적이 될 필요는 없다. (어떤 동어반복도 그렇게 연역될 수 있다.)
?? 그러나 사람들은 브로우웨르(Brouwer)의 이론들에서 보편적 서술의 존재성 부정이 무의미한 반면 보편적 서술은 유의미할 수 있다는 암시를 아마도 발견할 것이다.
??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 25부, 26쪽 참조; ‘우리는 포퍼의 반증가능성 원리를 이 언어에 대한 (즉, 존재성 문장들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배제하는 언어에 대한) 선택의 보기로서 생각할 것이다.’ 카르납은 계속해서 말한다: ‘포퍼는 그러나 자신의... [구획에 대한] 원리 언명에서 매우 신중하다; 그는 [존재성] 문장들을 무의미하다고 칭하지 않고 비(非)경험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라고만 칭한다.’ 인용문의 이 두 번째 부분은 철저히 옳아서, 나에게 완전히 명백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카르납은 계속해서 말한다: ‘아마도 그[포퍼]는 언어 전체로부터 존재성 문장들과 형이상학적 문장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경험적 과학의 언어로부터 그것들을 배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왜 카르납은, 내가 반복적으로 반대로 말했을 때, 내가 어떤 언어로부터 그것들을 틀림없이 배제하고 싶어 한다고 상정(想定)할까?
?? 카르납과 비엔나 학파는 그 이론이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훨씬 더 오래되었다. 그 이론은 적어도 홉스(Hobbes)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아래에서 ‘조건(a)’로서 - 관찰될 수 없는 존재들을 지적한다고 주장하는 단어들에는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 기술(記述)된 형태로 그것은 버클리(Berkeley)에 (그리고 다른 유명론자[唯名論者: nominalists]들에) 의하여 명백하고도 강력하게 사용되었다. 6장 참조;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4부에서 내가 흄(Hume)을 언급한 것 또한.
반(反)-형이상학적 철학보다 더 급진적이고 더 효과적으로 형이상학을 파괴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비판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그 이론은 유의미함의 문제에 대한 순진하고 ‘자연주의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이론의 전파자는, 형이상학을 추방하려는 자신들의 고민 속에서, ‘무의미한’ 형이상학적 이론들과 동일한 쓰레기더미 위에 모든 과학 이론들을 던져버리고 있음을 주목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제안하는 바, 구획의 기준을 찾는 대신에 형이상학을 파괴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카르납의 구성(Aufbau)에서의 유의미함과 무의미함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론은 (내가 그 이론을 지칭하는 바와 같이),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를 따르는데, 카르납에 의하여 오래전에 폐기되었다; 그 이론은, 주어진 표현이 그 언어 속의 잘-형성된 공식들이나 문장들을 위한 언명 규칙에 합치된다면, 오직 그 조건으로만, 특정한 (인위적) 언어에서 유의미한 문장이라는 더 정교한 교설에 의하여 갈음되었다.
나의 견해로는, 순진하거나 자연주의적인 이론으로부터 더 정교한 교설로의 발전은 매우 중요하고 바람직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그 발전의 전체 중요성은, 내가 알 수 있는 한, 올바르게 인식되지 못했다; 분명히 그 발전이 형이상학의 무의미함이라는 교설을 파괴할 따름이라는 것이 인식되지 못했다.
내가 이제 이 발전을 좀 상세하게 논의하려고 함은 이 이유 때문이다.
무의미함에 대한 자연주의적 이론으로써, 주장이라고 내세우는 모든 언어적 표현은 유의미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교설을 나는 의미한다; 관습에 의해서나, 혹은 관습에 의하여 세워진 규칙들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식물이 관습적 규칙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실상이나 혹은 본성에 의하여 녹색이거나 녹색이 아닌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실제적 사실의 문제로서나, 혹은 그 본성 때문에 유의미하거나 무의미하다는 교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유명한 의미에 관한 검증 가능성 기준에 따른, 그 기준을 카르납이 수용했는데, 문장-같은 표현, 혹은 일련의 단어들은, 그것들이 조건 (a) 및 (b)를 - 혹은 나중에 서술될 조건 (c) - 충족시킨다면, 그리고 그 조건만이라면, 유의미한 문장이다 (혹은 명제):
(a) 그 문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단어들에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b) 그 문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단어들은 합당하게 조화를 이룬다.
(홉스[Hobbes]와 버클리[Berkeley]에 거슬러 올라가는) 이론의 조건 (a)에 따르면 일련의 단어들은, 그 속의 어떤 단어가 무의미하다면, 무의미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안에서 그것을 언명했다 (6.53;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했다): ‘철학의 올바른 방법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것을 말하고 싶었을 때, 자신의 명제에서 특정 부호들에 자신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에게 밝히는 것.’ 홉스(Hobbes)와 버클리(Berkeley)에 따르면 의미가 단어에 주어지는 유일한 방식은 단어를 특정 관찰 가능한 경험이나 현상과 연결함 (결합함)으로써였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이 요점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 아마도 출현할 이유들 때문에 내가 그 이론을 ‘자연주의적(naturalistic)’이라고 (나는 지금 그 이론을 ‘절대주의적[absolutistic]’ 및 ‘본질주의적[essentialisitic]’으로 또한 지칭한다; 아래 주석 18 참조) 부를지라도, 나는 여기서 이 이유들을 논증할 것을 제안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이론에 대한 나의 비판이 과거나 지금이나 그것이 ‘자연주의적’ 기타 등등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 주석 7에서 언급된 구절들 또한 참조.
카르납은 명시적으로 밝힌다. 자신의 저서 구성(Aufbau)에서 그는 과학에서 사용되는 모든 개념들은 (‘내 자신의’) 관찰성 경험 혹은 지각적 경험에 근거하여 정의(定義)될 수 있었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런 개념 정의(定義)를 개념의 ‘구성(constitution)’으로, 결과적인 개념의 체계를 ‘구성 체계(constitution system)’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구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론의 조건 (b)는 특정한 ‘기호들의 결합’은, 명제들처럼 보이는데, 어떤 역설들이 피해진다면 ‘단순히 거짓이 아니라 틀림없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제안했던 버트런드 러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셀에게는 - 역설들을 피하기 위하여, 문장을 구성하기 위한 어떤 (부분적으로 관습적인) 규칙들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이 결합들을 간주해야 한다고 - 제안을 할 의도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겉으로 유의미한 공식들이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공식들은, 본성이나 본질에서, 무의미한 사이비-명제들이라는 사실. ‘a는 a의 원소이다’나 ‘a는 a의 원소가 아니다’와 같은 공식은 명제처럼 보였다 (그 공식에는 두 개의 주어와 2항의 술어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x는 y의 원소이다’의 형태로 된 공식은 x가 y보다 한 유형별 등급 낮은 조건에서만 - 동일한 기호 ‘a’가 ‘x’ 및 ‘y’ 양쪽 모두를 대신해서 갈음되려면 분명히 충족될 수 없는 조건 - 명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공식은 진정한 명제가 (혹은 문장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어들의 (혹은 단어들에 의하여 지적된 존재들의) 유형별 등급에 대한 무시가 문장-같은 표현들을 무의미하게 만들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와, 더욱 명시적으로, 카르납의 구성(Aufbau)에 따르면, 이 혼동은 형이상학적 헛소리의, 다시 말해서 사이비-명제들을 명제로서 제시함의 주요 근원이었다. 그것은 구성(Aufbau) 안에서 ‘영역의 혼동(confusion of spheres)’으로 불렸다;?? 그것은 오늘날 흔히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로 불리는 혼동과 동일한 종류이다.?? 구성(Aufbau)에 따라서, 예를 들어, ‘내 자신의’ 경험들 (‘das Eigenpsychische’); 물리적 물체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들 (‘das Fremdpsychische’),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영역들이나 유형들이나 범주들에 속하여, 이것들에 대한 혼동은 틀림없이 사이비-명제들과 사이비-문제들을 낳는다. (카르납은 물리적 실재와 심리학적 실재 사이의 차이점을, 한 가지 종류나 범위의 궁극적 실재들 내부에 존재하는 ‘두 가지 유형의 질서’?? 사이의 차이점으로서 기술[記述]하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중립적 일원론[neutral monism]’이라는 방식으로 몸-정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도달했다.)
유의미하고 무의미한 언어적 표현들에 대한 ‘순진한’ 혹은 ‘자연주의적’ 이론??에 관하여 방금 주어진 개요는 이 이론의 한 면만을 다룬다. 그
?? 예를 들어,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 2판, 77쪽 참조.
?? 'Sphaerenvermengung'; 구성(Aufbau), 30부 이하 참조; ‘영역(Sphaere)’은 180부, 254쪽에서 논리적 유형(logical type)과 동일시된다.
?? G. 라일(Ryle)의 정신의 개념(The Concept of Mind), 1949년 참조. ‘범주’라는 표현의 이런 사용은 후설(Husserl)의 용어 ‘의미론적 범주(Bedeutungskategorie)’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의 저서 논리 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2호, 1부 (2판), 1913년, 13 및 318쪽 참조. 후설에 의하여 주어진 범주 오류들의 보기들은: ‘초록은 이다 혹은 (green is or)’ (54쪽); ‘둥글거나 혹은(a round or)’; ‘한 사람 그리고 이다(a man and is)’ (334쪽). 비트겐슈타인의 보기를 비교하라: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Socrates is identical)’. 범주 오류 이론에 대한 비판에 관하여, 아래 12장 이하를 참조; 또한 영국과학철학협회보(B. J. P. S.) 4호, 1953년 227쪽 이하에 실린 J. J. C. ,스마트(Smart)의 매우 두드러진 ‘범주에 대한 기록(A Note on Categories)’ 참조.
?? ‘Ordungsformen’; 구성(Aufbau), 162부, 224쪽 참조. 225쪽의 참고 서적 참조.
?? 현재 나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10부와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 특히 11장에 따라서 나는 그것을 ‘본질주의적’ 이론이라고 부르고 싶다.
개요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소위 조건 (c)로서 언명될 ‘검증가능성 기준(verifiability criterion)’:
(c) 주장되는 명제는 (혹은 문장), 관찰이나 감지를 표현하는 요소 (혹은 원자) 명제의 진리 함수이거나, 혹은 그 명제로 환원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조건만으로, 참이다.
다시 말해서, 주장되는 명제가 몇 가지 관찰 문장들과 그렇게 관련되어서 그 명제의 진실이 이 관찰 문장들의 진실성으로부터 도출된다면, 그리고 그 조건만으로, 그 명제는 유의미하다. ‘일련의 단어들은 그 단어들의 프로토콜-명제들 [관찰 명제들]로부터의 도출가능성 관계들이 주어진다는 조건으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라고 카르납(Carnap)은 쓴다??; 다시 말해서, [그 일련의 단어들의] 검증에 대한 방법이... 알려진다’면.??
한편으로 조건 (a)와 (b),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조건 (c)가 대등하다고 카르납에 의하여 주장되었다.??
이 이론의 결과는, 카르납의 말로,?? ‘형이상학에 관하여 주장되는 문장들은, 논리적 분석에 의하여, 사이비-문장들로서 밝혀진다.’
일련의 말이 지니는 내재적 유의미성이나 무의미성에 대한 카르납의 이론은 곧 수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수정을 판단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나는 여기서 비판의 말 몇 마디를 해야겠다.??
첫째로 (c) 의미의 검증 가능성 기준에 관한 말. 이 기준은 의미의 영역으로부터 모든 과학 이론들을 (혹은 ‘자연 법칙들’) 배제한다; 그 까닭은 소위 형이상학적 사이비-명제들이 그러한 것처럼 모든 과학 이론들이 관찰 보고서들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의미의 기준은 과학과 형이상학에 관하여 잘못된 구획을 초래한다. 이 비판은 카르납에 의하여 자신의 저서 언어의 논리적 의미론(Logical Syntax of Language)?? 및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그의 최신
?? 1932년, 인식(Erkenntnis) 2호, 222-3쪽에 실린 형이상학의 전복(Overthrow of Metaphysics)에 관한 그의 논문 참조. 그 전복-논문은, 무의미함은 문제의 언어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인하여, 엄격히 말해서, 더 이상 무의미함의 첫 번째 이론의 시기에 속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카르납이 다음과 같이 쓰기 때문이다 (220쪽): ‘특정한 주어진 언어 안에서, 문장을 형성하지 않는 일련의 단어들은 정확한 의미에서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 말의 명백한 결과는 아직 도출되지 않아서, 그 이론은 여전히 절대적인 의미에서 주장된다: 우리의 조건 (a) 및 (b)는 220쪽 밑에 언명되어 있고, (c)는 222-223쪽에 (인용된 바와 같이) 언명되어 있다.
?? 전게서, 224쪽
?? 구성(Aufbau), 161부, 222쪽; 그리고 179부 (253쪽 위). 또한 인식(Erkenntnis), 2호, 1932년, 221-224쪽에 실린 카르납의 전복-논문의 중요한 2부 참조. (이 구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 일반적인 방법에 의하여, 후자[後者]에서 검증의 요구가 약화된 것을 제외하고, 카르납의 저서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 속의 환원 원리의 선례가 된다.)
?? 인식(Erkenntnis), 2호, 220쪽. 앞의 주석과 비교할 것.
??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4, 10, 14, 20, 25 및 26부 참조.
?? 321쪽의 82부 첫 번째 및 두 번째 문단의 끝, 특히 비엔나 학파에 대한 카르납의 다음 말을 참조: ‘모든 문장이, 의미를 갖기 위하여, 완전히 검증될 수 있어야 함이 당초에 주장되었다.... 이 견해로써 언어의 문장들 가운데서 자연법칙들에 관한 자리는 없었다.... 그 견해에 따라서 법칙들은 문장들이 아니라는 견해에 대한 세밀한 비판이 포퍼에 의하여 주어진다.’ 이 구절의 뒷부분은 아래, 주석 48에 대한 원문에서 계속된다. 아래 주석 71 또한 참조.
??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 23부의 주석 20과 25를 (그리고 주석 25에 따른 원문),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4부의 주석 7 및 (그리고 원문) 78부의 주석 1과 비교하라.
이론조차도, 내가 아래 6부에서 밝히려고 노력할 바와 같이, 아직도 그 비판에 노출되어 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오직 경험적으로 정의(定義)될 수 있는 단어들이나 기호들만 의미를 지닌다는 (유명론적[唯名論的: nominalistic]) 견해인 교설의 조건 (a)를 고찰한다.
여기서 상황은, 매우 흥미로울지라도, 훨씬 더 나쁘다.
단순성을 위하여, 나는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의 매우 간단한 형태로써 나의 비판을 시작한다. 그것은 모든 비논리적 (혹은, 내가 말하기를 선호하는 바와 같이, 비형성적[非形成的: non-formative]) 단어들은 이름이라는 - 단 하나의 물리적 대상에 관한, ‘파이도(Fido)’와 같거나, 혹은 몇 가지 그런 대상들에 의하여 공유된, ‘개(dog)’와 같은 - 교설이다. 그리하여 ‘개(dog)’는 대상물 파이도(Fido), 캔디(Candy), 그리고 티핀(Tiffin)에 의하여 공유된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다른 단어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견해는 다양한 단어들을 외연적(extensionally)이나 열거적으로(enumeratively) 해석한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 단어들의 ‘의미’는 그 단어들이 이름을 부르는 사물들의 목록이나 열거에 의하여 주어진다: ‘여기서는 이것, 저 건너편에서는 저것...’ 우리는 그런 열거를 이름의 의미에 관한 ‘열거적 정의(定義)’라고 부를 것이다; 그래서 그 언어 안에서 모든 (비논리적이거나 비형성적인) 단어들이 열거되며 정의(定義)되기로 예상되는 언어는 ‘열거적 언어’, 혹은 ‘순전히 유명론적 언어’로 불릴 것이다.
그렇게 순전히 유명론적인 언어가 과학적 목적에는 철저히 부적당함을 이제 우리는 쉽게 밝힐 수 있다. 그 언어의 모든 문장들이 분석적(analytic)이라고 - 분석적으로 참이거나 모순적 - 그리고 어떤 종합적(synthetic) 문장들도 그 언어 속에서 표현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은 표현될 것이다. 혹은 우리가 ‘분석적(analytic)’이나 ‘종합적(synthetic)’라는 용어들을 (현재 콰인[Quine] 교수로부터 맹공격을 받고 있는) 피하는 언명을 우리가 선호한다면 우리는 다음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순전히 유명론적인 언어에서는, 문장 안에서 언급되는 것들에 대한 목록들이나 열거되는 것들을 정의(定義)함을 비교함으로써만 그 진실성이나 거짓이 결정될 수 없었던 어떤 문장도 언명될 수 없다. 그리하여 문장의 진실성이나 거짓은, 그 문장 안에서 발생하는 단어들에게 의미가 주어지자마자 결정된다.
이것이 그러할 것임은 우리의 보기로부터 밝혀질 것이다. ‘파이도(Fido)는 개다’는, 파이도가 ‘개’를 정의(定義)함에서 우리에 의하여 열거되는 것들의 하나였기 때문에 참이다. 이것과 반대로 ‘천키(Chunky)는 개다’는, ‘개’를 정의(定義)하는 우리의 목록을 작성할 때 우리가 지적하는 것들의 하나가 천키가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틀림없이 거짓이다. 유사하게, (1)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종이, (2) 나의 손수건, (3) 저 건너편의 구름, 그리고 (4) 우리가 만든 눈사람을 목록화함으로써 ‘흰(white)’의 의미를 내놓는다면, ‘나는 흰 머리털을 가지고 있다’는 나의 머리털 색깔이 무엇이든지간에 거짓일 것이다.
그런 언어 속에서 가설들이 언명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언어는 과학의 언어일 리가 없다. 그래서 반대로, 과학에 합당한 모든 언어는 그 의미가 열거적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 단어들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혹은, 우리가 말할 바와 같이, 모든 과학적 언어는 진정한 전칭 명제들을, 다시 말해서 아마도 합당하게 명백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할지라도 정의(定義)되든 아니든 무한한 외연을 지닌, 이용해야 한다. (의미의 내포적 분석에 관하여 카르납의 탁월한 저서 의미와 필연[Meaning and Necessity]을 참조.)
정확하게 동일한 비판이 더 복잡한 언어에, 이 방식이 근거하는 근본적 원소들의 집합과 이 원소들 사이의 근본적인 관계들이 목록들에 의하여 외연적으로 주어질 예정이라면, 외연적 추상이라는 방식으로써 (프레게[Frege]와 러셀[Russell]에 의하여 처음 사용된) 자체의 개념들을 소개하는 언어들에 특히, 적용된다. 이제 이것은 카르납의 구성(Aufbau)에서도 그런 경우이다: 카르납은 한 가지 원초적인 관계 ‘Er’(‘기억 경험: Experience of remembering’)을 사용하여 일을 해나가는데, 그것은 쌍들의 목록(list of pairs) 형태로 주어진다고 예상되었다.??
그의 ‘구성 체계(construction system)’에 속하는 모든 개념들은 이 원초적 관계 ‘Er’에, 다시 말해서 이 관계에 의미를 부여했던 쌍들의 목록에 근거하여 외연적으로 정의(定義)될 수 있다고 예상되었다. 따라서 그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었던 모든 서술들은 그 서술들 안에서 발생한 단어들의 (외연적) 의미에 따라서만 참이거나 거짓이었다: 그 서술들은 진정한 보편적?? 단어들의 결핍 때문에, 모두 분석적으로 참이거나 모순적이었다.??
이 부를 끝내기 위하여, 나는 이론에 관한 조건 (b)와, ‘유형 오류’나 ‘범주 오류’로 인한 무의미함의 교설로 선회한다. 이 교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a는 집합 a의 요소다’와 같은 표현이 틀림없이 무의미하다는 - 말하자면 절대적으로나 내재적으로나, 혹은 본질적으로 - 러셀의 이론으로부터 도출되었다.
이제 이 이론은 그 후 오랫동안 오류로 판명되었다. 확실히, 그 안에서 문제의 표현이 잘-형성된 공식이 아닌, (유형 이론을 구현하는) 언어를 러셀과 함께 우리가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체르멜로(Zermelo) 및 그의 후계자들과 (프랑켈[Fraenkel], 베만[Behmann], 폰 노이만[von Neumann], 베르나이스[Bernays], 레스니에프스키[Leśniewski], 콰인[Quine], 아커만[Ackermann]) 함께 그 안에서 문제의 표현이 잘-형성되어서 유의미한 언어들을 우리가 구축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언어들 중 몇 가지 언어들에서는 문제의 표현이 심지어 참인 서술이다 (a의 특정 값에 대하여).
이것들은 물론 잘 알려진 사실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재적으로’나 ‘자연적으로’나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표현이라는 개념을 철저히 파괴한다. 그 까닭은 ‘a는 집합 a의 원소다’라는 표현이 한 언어에서는 무의미하지만 또 다른 언어에서는 유의미한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표현이 어떤 언어들에서는 무의미하다는 증거가 내재적 무의미함의 증거로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립한다.
내재적 무의미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는 주장되는 서술이, 어떤 작가나 화자(話者)에 의하여 주장되어서 제출되는데, 모든 (일관적인) 언어들에서 무의미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문제의 작가나 화자(話者)에 의하여 자신이 말하고자 의도한 것의 대안적 언명으로서
?? 특히 구성(Aufbau)의 108부 참조. 카르납은 그곳에서 자신의 정리(定理) 1에 대하여 그 정리의 비대칭이 (경험적으로 주어진) 쌍들의 목록에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경험적 정리라고 말하는데, 그 정리는 원초적 관계 ‘Er’의 비대칭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Er’을 ‘구성했거’나 정의(定義)한 쌍들의 동일한 목록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정리(定理) 1의 부정(否定)을, 다시 말해서 ‘Er’은 대칭적이라는 정리(定理)를 초래할 쌍의 목록은, 153부에서 155부까지에서 특히 명백한 바와 같이, ‘Er’에 대한 합당한 목록으로서 해석될 수 없었다.
?? 이것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파이글(Feigl)에게 한 구성(Aufbau)에 대한 비판이다. 1~2년 후에 티롤(Tyrol)에서의 모임을 주선했던 것은 파이글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나에게는 중요한 것으로 판명된 모임이었다.
?? ‘개별적인 개념들과 보편적인 개념들 사이의 차이점’이 구성(Aufbau)의 158부에서 논의되었다; 그것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14 및 25부에서 간단하게 비판되었다.
인정될 유의미한 문장이 (일관적인 언어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증거가 어떻게 제시될 수 있는지를 제안한 적이 없다.
내재적 무의미함에 대한 증거가, 경험적 과학에 대하여 충분한 모든 언어에 관하여 뿐만 아니라, 모든 일관적인 언어에 관하여 틀림없이 유효할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형이상학적 서술들이 경험적 과학 분야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자는 거의 없다; 그리고 형이상학의 서술들이 이 과학들 내부에서 (혹은 이 과학들에 적합한 어떤 언어 내부에서) 언명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는 이유로 아무도 형이상학을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결국, 비트겐슈타인과 카르납의 원래 주장은 형이상학이 절대적으로 무의미하다는 - 다시 말해서 완벽한 헛소리이며 다른 것이 아니라는 - 것이었다; 형이상학은, 아마도, 한숨이나 신음이나 눈물의 (혹은 초현실주의적 시[詩]의) 특징을 지니지만, 뜻을 가진 어구로 된 말의 특징을 지니지는 않는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과학의 요구에 충분한 언어로 증거가 표현될 수 없다는 결과로 증거를 만들어내는 것은 철저히 불충분하리라.
그러나 심지어 이 불충분한 증거도, 과학을 위하여 형이상학 없는 언어를 구축하려는 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진 적이 없다. 이 시도들 중 몇 가지가 다음 두 개의 부에서 논의될 것이다.
4. 카르납과 과학의 언어
카르납이 생각했던 원래의 형이상학의 ‘전복(顚覆: overthrow)’은 성공하지 못했다. 무의미함에 관한 자연주의적 이론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으며, 그 전체 결과는 형이상학에서와 마찬가지로 과학에서도 똑같이 파멸적이었던 교설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방향을 잘못 잡은 비판으로써 (베이컨에 의하여 코페르니쿠스에게 가해진, 혹은 뒤앙[Duhem]과 마흐[Mach]에 의하여 원자론에 가해진 것과 같이) 과학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을 때마다, 말하자면 점진적으로 다양한 과학으로부터 형이상하적 요소들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형이상학을 전체로 파괴하려는 지각없는 시도의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의미에 과한 자연주의적 이론은 카르납에 의하여 오래 전에 포기되었다. 그 이론은, 언어적 표현이 잘 형성되었는지 아닌지는 그 표현이 속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언어의 규칙들에 의존한다는 이론에 의하여 갈음되었다; 언어의 규칙들은 종종 그 문제를 결정할 정도로 충분히 정확하지 않아서, 우리가 더 정확한 규칙들을 도입해야 한다는 - 그리고 그 규칙들과 함께, 인위적 언어 체계를 - 이론과 함께.
내가 이것을 매우 중요한 발전으로서, 그리고 상당한 수의 흥미로운 문제들에 열쇠를 제공하는 발전으로서 간주한다는 것을 나는 반복하여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구획 문제를 정확히 과거의 그 위치에 남겨둔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다.
완전히 다르게 표현해서, 앞의 부에서 논의된 유의미함에 관한 순진하거나 자연주의적이거나 본질주의적인 이론은 오류여서, 잘 형성된 공식의, 그리고 그것과 함께, 분명한 규칙들에 종속되는 데에서 인위적인 언어들의 이론에 의하여 갈음되어야 했다. 이 중요한 과제는 그 후 카르납에 의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며 수행되었다. 그러나 유의미함의 개념에 대한 이 수정은 형이상학의 유의미함에 관한 교설을 완전히 파괴한다. 그리고 그 수정으로 인하여 무의미함에 관하여 수정된 개념을 토대로 이 교설을 재구축할 희망이 우리에게는 없다.
불행히도 이것은 간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까닭은 카르납과 그의 학파가 (노이라트[Neurath]가 특히 영향력을 지녔었다) ‘과학 언어’를 구축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인데, 형이상학적 이론 하나도 그 과학 언어 안에서 표현될 수 없었을 것인 반면 - 용어사용법이 이용될 수 없었거나, 혹은 그것을 표현하는 잘 형성된 공식이 없었기 때문에 - 그 과학 언어 안에서 모든 과학의 합당한 서술이 잘 형성된 공식이었을 언어.
나는 인위적 모형 언어들을 과학의 언어로서 구축하는 과제를 흥미로운 과제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과제를 형이상학을 파괴하는 과제와 (형이상학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결합시키려는 시도가 반복적으로 재앙을 초래했음을 밝히려고 나는 노력할 것이다. 반(反)-형이상학적 편견은, 이론 체계 구축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작업을 합당하게 수행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일종의 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편견이다.
나는 이 부에서 이것을 (a) 물리주의적 언어, (b) 통합 과학의 언어, (c) ‘논리적 구문론’의 언어에 관하여 간단하게, 그리고 5부에서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에서 제시된 것들에 관하여 더 자세하게 밝히려고 노력할 것이다.
(a) 물리주의적 언어. 카르납의 구성(Aufbau)은 자신이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으로 - 자신의 경험을 과학의 개념이 (그리하여 과학의 언어가) 구축되어야 하는 토대로서 생각하는 것 - 부르는 것을 제창하였다. 1931년경 카르납은, 노이라트(Neurath)의 영향을 받고, 이것을 포기했고 물리주의의 주장을 채택했는데, 그 주장에 따르면 시공에서의 물리적 물체들과 그 물체들의 움직임에 관하여 말하는 한 가지 통합된 언어가 있었다. 모든 것은 이 언어에서 표현될 수 있었거나 그 언어로 번역될 수 있었는데, 특히 심리학이 과학적인 한 그러했다. 심리학은 급진적으로 행동주의적이 될 수 있었다; 심리학의 모든 유의미한 서술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물리적 물체들의 시공적(時空的) 움직임에 관한 서술로 번역될 수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경향은 명백하다: 인간의 영혼에 관한 서술은 신(神)에 관한 서술처럼 무의미하게 될 수 있었다. 이제 영혼에 관한 서술과 신(神)에 관한 서술을 동일한 수준에 놓는 것이 충분히 공평할 것이다. 그러나 반(反)-형이상학적이고 반(反)-신학적인 경향들이, 우리의 모든 주관적 경험들을, 혹은 더 정확하게 그 경험들에 관한 모든 서술들을 형이상학의 서술들과 동일한 수준에 놓음으로써 많이 촉진되었는지는 의문시된다. (신학자들이나 형이상학자들은 ‘하느님은 존재한다’나 ‘영혼은 존재한다’와 같은 서술들이 ‘나는 의식적인 경험을 한다’나 ‘감정들이 존재한다 - 사랑이나 증오같은 - 항상은 아니라할지라도 흔히 그것들을 동반하는 몸의 움직임들과 구분될 수 있는 상태로’와 정확하게 동일한 수준에 있음을 알고 아마도 매우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주의적 철학이나 번역가능성 주장의 장점들이나 단점들을 검토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언어적 장식품들에서 유물론적 형이상학에 지니지 않는다 - 그래서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장식품 없이 그것과 마주하기를 선호한다): 형이상학을 죽이려는 시도로서 이 철학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함을 우리는 안다. 보통, 반(反)-형이상학자의 빗자루는 너무 많이, 동시에 또한 너무 적게 휩쓸어간다.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정연하지 못하고 완전히 옹호될 수 없는 구획이 남겨진다.
‘너무 많고 너무 적음’에 관한 예시로서 나는 아마도 카르납의 ‘물리적 언어 안에서의 심리학(Psychology Within the Physical Language)’에서 다음 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물리학에는, 완전히, 마흐(Mach)와 푸앵카레(Poincaré)와 아인슈타인의 노력 덕분에 실제로 형이상학이 없어졌다; 심리학에서는, 물리학을 형이상학이 없는 과학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시작되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 ‘형이상학이 없는’은, 카르납에게, 프로토콜 명제로의 환원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심지어 전위차계(a potentio-meter) 기능에 관한 가장 간단한 서술조차도 - 보기는 카르납이 든 것이다?? - 그렇게 환원될 수 없다. 또한 나는, 물리학에서 (옛것이나 새로운 것에서) 전도체의 특질을 ‘전기 유체(electric fluid)’나 ‘전자 가스(electronic gas)’의 가설로써 설명하는 일이 우리에게 허용된다면, 우리가 정신적 상태를 우리의 설명적인 심리학 이론들에게 도입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요점은 모든 물리 이론들이 우리가 시험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말한다는 것이다. 이 ‘더 많이’가 물리학에 합당하게 속하는지, 혹은 그것이 ‘형이상학적 요소’로서 이론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하는지는 말하기가 항상 쉽지 않다. 마흐(Mach)가 더욱 특히 자신이 (다른 많은 실증주의자들과 함께) 물리학의 형이상학적 요소라고 간주했던 원자론의 최종적 제거를 기대했기 때문에, 마흐(Mach)와 푸앵카레(Poincaré)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대한 카르납의 언급은 불행한 일이었다. (그는 너무 많이 제거했다.) 푸앵카레(Poincaré)는 물리 이론을 함축적 정의(定義)로서 해석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견해는 카르납에게 더 수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오랫동안, ‘물리적으로 실재적(physically real)’이라는 개념으로써 자유롭게 일을 해나가면서, 형이상학에 대한 신봉자였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우리들만큼 방자한 형이상학적 장광설을 싫어할지라도.??a 물리학이 사용하여 일을 해나가는, 힘과 장(場) 그리고 심지어 전자와 다른 입자들과 같은 것들과 같은 대부분의 개념들은, 버클리(Berkeley)가 (예를 들어) ‘신비로운 성질(qualitates occultae)’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우리의 심리학적 설명 속에서 의식적 상태들을 상정(想定)하는 것은, 나무 막대의 ‘힘’을 설명하기 위하여 힘을 - ‘신비로운 성질(qualitas occulta)’ - 상정(想定)하는 것과 흡사함을 카르납은 밝혔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에 의하여 흔히 저질러진다 할지라도, 그가 제안한 바, 물리학자는 저지르지 않는 ‘실체화의 오류를 그런 견해가 저지른다’??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그 구조만으로 (카르납이 제안한 바와 같이??) 막대의 힘을 설명할 수 없지만, 버클리(Berkeley)처럼, 카르납이 초자연적으로 비난했던 ‘숨겨진 힘’을 충분히 이용하는 법칙들과 함께 그 구조만으로써 설명할 수는 있다.
?? 1932년 인식(Erkenntnis), 3호 117쪽 참조.
?? 전게서 140쪽
??a (교정시 추가). 내가 이것을 썼을 때,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생존해있었다.
?? 전게서 115쪽.
?? 전게서 116쪽.
?? 전게서 115쪽.
?? 전게서 114쪽.
요점 (a)를 끝내기 전에 나는 이 물리주의가, 나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면에서 너무 물리적이라 할지라도, 다른 면에서 충분히 물리적이 아니라고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싶다. 그 까닭은 정말로 내가, 우리가 과학적 서술을 관찰성 시험에 부치고 싶어 할 때마다, 이 시험은 어떤 의미에서 틀림없이 물리주의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지닌 물리적일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인 가장 추상적인 이론들로부터 물리적 물체들의 행태??에 관한 서술들을 도출함으로써, 우리는 그 이론들을 시험한다고.
물리적 물체들의 관찰될 수 있는 상태를 쉽게 기술(記述)하는 단순한 기술적(記述的) 서술을 나는 ‘기초적 서술(basic statements)’이라고 불렀고, 시험이 필요한 경우들에서 우리가 ‘사실들’과 비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 기초적 서술??이라는 것과, 이 서술들과 이 사실들이 매우 쉽게 비교될 수 있기 때문에 상호주관적으로 매우 쉽게 시험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주장했다.
그리하여 나의 견해에 따라 우리는, 그런 기초적 시험을 목적으로, 우리 자신의 관찰성 경험에 관한 보고서를 (상호주관적으로 시험하기가 어렵다)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관찰했던 물리적 물체들에 관한 - 전위차계를 포함하여 - 보고서를 (검사하기가 쉽다) 선택한다.
시험 서술의 ‘물리주의적’ 특징에 관한 나의 이론 중 이 이론이,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과학의 외부 세계’를 우리가 구축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저 널리 수용되는 이론들 모두와 근본적으로 반대가 되기 때문에 그 요점은 중요하다. 이 생각이 (그것은 아직도 폭넓게 유지된다) 편견이라고 나는 항상 믿었다; 그리고, 철저히 합당하게, ‘우리 자신의 경험들’이 상호주관적으로 시험 가능한 견해들을 따름을 우리가 확신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당시 이 요점에 관한 카르납과 노이라트(Neurath)의 견해는 훨씬 덜 ‘물리주의적’이었다. 사실상 그들은 카르납의 원래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의 한 가지 형태를 여전히 지지했다. 그 까닭은 모든 시험의 ‘경험적 토대’를 (나의 언어사용법으로) 형성했던, 그래서 그들이 ‘프로토콜-문장들’이라고 불렀던 문장들은, 물리적 언어로,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몸에 관한 보고서로서 표현된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관찰성 경험들에 관한 보고서이어야 한다고 그들이 가르쳤기 때문이다.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의 언명으로, 그러한 프로토콜 문장은, 따라서, 매우 기묘한 형태를 띨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쓴다:?? ‘완벽한 프로토콜 문장은 아마도 예를 들어 이렇게 읽힐 것이다: “3시 17분에 오토(Otto)의 프로토콜 명제: [오토의 언어화된 생각는 3시 16분에 있었다: (이 방안에는 3시 15분에 탁자가 있었다, 오토에 의하여 관찰됨)]”.’ 사람들은 그 시도가 여기서 옛 출발점을 -
?? 이 행동은, 그러나, 항상 특정 이론들에 (그리고 그 이론들은 순환성[循環性: circularity]의 위험을 초래한다) 비추어 해석된다. 나는 여기서 그 문제를 완전히 토론할 수는 없지만, 사람의 행동은 심리학적 이론들에 의하여 예언되어 거의 항상 순전히 물리적 움직임으로가 아니라, 이론에 비추어 해석된다면 ‘유의미한’ 물리적 움직임으로 구성된다고 언급할 것이다. (그리하여 환자가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심리학자가 예언한다면, 환자가 ‘나는 지난밤에 나쁜 꿈을 꾸었다’라고 보고하든지, 혹은 ‘나는 충격적인 꿈을 꾸었다고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고 보고하든지, 자신이 옳았다고 그는 느낄 것이다; 두 가지 ‘행동’, 즉 ‘입술의 움직임들’은 부정(否定)에 상응하는 움직임들이 긍정에 상응하는 움직임들과 다를 것과 비교하여 더 크게 육체적으로 다를지라도.
?? ‘기초적 서술(basic statement)’과 (‘기초적 명제[basis proposition]’ 혹은 ‘기초적 문장[basic sentence]’: ‘Basissatz’) ‘경험적 토대(empirical basis)’라는 용어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7부 및 25부에서 30부까지에 소개되었다; 그 후 그것들은 유사한 의미와 다른 의미로 다른 저자들에 의하여 자주 사용되었다. (본서의 부록 1부 또한 참조.)
?? 인식(Erkenntnis) 3호, 1932년, 207쪽.
관찰자 자신의 주관적 경험, 다시 말해서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 - 통합하기 위하여 행하여짐을 안다.
카르납은 나중에 나의 견해를 수용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그가 매우 친절하게도 나의 이 견해를 ‘... 지식 이론 안에서... 현재 옹호되는 과학적 언어의 형태 중에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불렀던 논문에서 (‘프로토콜-문장에 관하여’??), 나의 견해와 노이라트(Neurath)의 견해 사이의 차이점은 근본적인 요점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될 것과 같이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에서 명백하게 통찰된) 그는 완전히 통찰하지 못했다: 우리의 시험에서 간단하고, 관찰 가능하고, 물리적인 사실들의 도움 또는 ‘우리 자신의 감각-경험들’의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 도움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 그러므로 그렇지 않았다면 찬양받을만한 나의 견해에 대한 그의 보고서에서, 그가 ‘기록하고 있는 주체 S의 관찰 서술’에 도달했을 때;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감각-경험의 서술에 도달했을 때 시험하는 주체 S는 ‘실제로, 자주 자신의 시험을 중단시킬’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반면 나는, 그가 쉽게 그리고 상호주관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어떤 물리적 물체의 행동에 (그 순간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던) 관한 서술에 도달했을 때 그가 중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언급된 요점은, 물론, 노이라트(Neurath)는 귀납법을 신뢰한 반면, 내가 귀납법이 (귀납법에 관해서는 ‘우리 자신의 경험들로부터’ 시작함이 자연스럽게 보인다) 아니라, 우리의 이론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예측들을 시험하는 방법을 신뢰했다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당시 나는, 나의 견해를 보고할 때, 카르납은 귀납법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할지라도, 그는 그 후 귀납법으로 복귀했다.
(b) 통합 과학의 언어(The Language of Unified Science). 물리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것은 물리주의적 언어가 그 안에서 유의미한 모든 것이 언급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라는 견해였다, ‘물리적 언어는 보편적이다’라고 카르납은 썼다.?? ‘보편적 언어로서의 그 특징 때문에, 우리가 물리학 언어를 과학의... 언어로서 채택한다면, 모든 과학은 물리학으로 변한다.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것으로서 제외된다.?? 다양한 과학은 통합 과학의 부분이 된다.’
한 가지 통합 과학에 대한 한 가지 보편적 언어라는 주장은 형이상학의 제거에 대한 주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형이상학적 과학자가, 그 규칙들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표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한 가지 언어로 말하고 싶어 할 모든 것을 표현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처음 보기에 사실인 경우와 같은 것이, 형이상학은 ‘합리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추측에 찬성하여 이해되었으리라. (물론 그 추측은 아직도 확립되기에는 거리가 매우 멀 것이다.)
이제 한 가지 보편적인 언어에 대한 이 주장에 관하여 기묘한 것은, 그것이 발표되기 (1932년 12월 30일) 전에 비엔나 학파에 속하던 카르납의 동료 중 한 명에 의하여 그 주장이 논박된 것이다. 그 까닭은 괴델(Gödel)이,
?? 'Ueber Protokollsätze'. 인식(Erkenntnis) 3호, 1932년, 215-228쪽.
?? 전게서, 228쪽;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 참조 (아래 주석 60과, 여기 다음 주석 참조).
?? 카르납의 보고서에 대한 간단한 비판에 관하여,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29부 주석 1 및 2 참조. (29부의 주석 2 다음의 원문 속의 인용구절은 카르납의 보고서에서 가져왔다.)
?? 인식(Erkenntnis), 3호, 1932년, 108쪽.
?? 전게서,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한 것임.
자신의 유명한 두 가지 불완전성 정리(定理)로써, 한 가지 통합된 언어가 심지어 기초적 숫자 이론을 목적으로도 충분히 보편적이지 않을 것임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이 이론의 모든 주장이 표현될 수 있는 언어를 우리가 구축한다할지라도, 그런 언어는 (어떤 다른 언어에서) 증명될 수 있는 저 주장들의 모든 증거를 언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한 가지 보편적 과학에 대한 한 가지 보편적 언어라는 교설을 즉시 포기하는 것이 (특히 그 언어 자체에서 언어의 일관성을 토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소용없음을 증명한 괴델[Gödel]의 두 번째 정리[定理]를 고찰하여) 매우 좋았으리라. 그러나 보편적 언어라는 주장의 불가능성을 확립하는 더 많은 일이 그 후 발생했다. 나는 특히 모든 보편주의적 언어는 역설적이라는 타스키의 증거를 (1933년 폴란드어로 처음, 그리고 1935년 독일어로 발표된)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교설은 살아남았다; 적어도, 나는 포기 선언을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소위 ‘통합 과학의 국제 백과사전은, 그의 교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는데 (1935년, 파리에서 열린 ’과학 철학의 첫 번째 모임에서 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사전은, 예전에 노이라트(Neurath)에 의하여 열정적으로 생각되어 반(反)-형이상학적 성전(聖戰)에서 주요 무기로 찬란하게 사용되면서, 형이상학적 교설에 대한 기념비로 남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의심할 바 없이 이 힘차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그 자신의 기준으로써, 고무했던 강력한 철학적 믿음이 순전히 ‘형이상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기 미안하지만, 통합 언어로의 통합 과학은 실제로 어불성설이다; 그것도 이런 종류의 일관적인 언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타스키에 의하여 증명되었기 때문에 증명될 수 있게 그러하다. 통합 언어의 논리는 그 언어 밖에 있다. 통합 언어의 형이상학은 왜 통합 언어 밖에 또한 존재해서는 안 되는가?
?? 그 교설은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 속의 모든 본질적 요소에서 (보다 조심스러운 분위기라 할지라도) 여전히 유지되며, 1950년에 다양한 구절에 추가된 수정과 부언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래 주석 50과 원문 참조. 그의 저서 의미론 입문(Introduction to Semantics)의 탁월하고 지금은 유명한 구절에서 (39부), 카르납은 ‘[그의] 초기 저서인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The Logical Syntax of Language)에서 밝혀진 견해들이 주로 의미론의, 새로운 견해의 결과로서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구문론(the Syntax)은, 통합 언어로의 통합 과학이라는 교설을 계속해서 지지했을지라도 (286쪽 아래 74부, 그리고 280쪽 이하를 특히 참조) 이 교설을 더 철저히 조사하지 않았다; 그것이 아마도 왜 카르납이 이 교설을 수정할 필요를 간과했는지의 이유일 것이다.
?? 파리에서, 나는 백과사전(the Encyclopedia)의 창설을 반대했다. (나는 그 학파에 속할 정도로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을지라도, 노이라트[Neurath]는 나를 그 학파의 ‘공식적 반대파[the official opposition]’라고 부르곤 했다). 다른 것들 중에서, 나는 노이라트(Neurath)가 상상하는 것처럼 그것이 백과사전과 조금도 유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인식(Erkenntnis) 논문들의 또 다른 연재물로 밝혀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이라트[Neurath]가 지닌 백과사전에 대한 이상[理想]에 관하여, 예를 들어 인식[Erkenntnis)], 5호, 353쪽에서 365쪽까지, 특히 2부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 관한 그의 비판적 논문 참조.) 카르납이 참석하지 않았던 1936년의 코펜하겐 회의에서, 나는 과학 통합과 한 가지 보편적 언어에 관한 교설이 타스키의 진리 이론과 양립할 수 없음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노이라트(Neurath)는 나의 강연 뒤에 이어진 토론에서 그것에 대하여 진리 개념에 관한 타스키의 이론들이 틀림없이 옹호될 수 없다는 의견을 내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기억이 옳다면), 그리하여 타스키를 논박하려는 희망에서, 역시 참석한 아르네 내스(Arne Naess)로 하여금 ‘진리’라는 말의 용법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떠맡도록 격려했다. 의미론 입문(the Introduction to Semantics), 29쪽에 있는 내스(Naess)에 관한 카르납의 합당한 비평 또한 참조.
나는 물론 카르납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 못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통합 언어로의 통합 과학이라는 교설에 대한 그 모든 것의 파멸적 효과를 그는 보지 못했다고 나는 의견을 낸다.
내가 통합 언어라는 교설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엄격하게 형식화된 과학이 의도되지 않았다는 것에는 아마도 반대의견이 제시될 것이다. (예를 들어 노이라트[Neurath]는, 특히 자신의 나중 출판물에서, ‘보편적 속어[universal slang]’에 관하여 말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가 형식화된 보편적 언어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나는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견해는, 다시, 형이상학의 무의미함이라는 교설을 파괴한다. 그 까닭은 보편적 속어에 관한 엄격한 형성 규칙들이 없다면, 우리가 그 속어로 형이상학적 서술들을 표현할 수 없다는 주장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주장은 위 3부에서 비판된 무의미함에 대한 순진한 자연주의적 견해로 우리를 다시 이끌어갈 뿐이다.
이 상황에서 괴델(Gödel)이 (그리고 처치[Church]가) 발견한 것들이 또한 실증주의가 매우 관심을 갖는 교설들 중 또 다른 교설의 (그리고 내가 가장 혐오하는 것들 중 하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언급될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가 조금이라도 표현될 수 있다면, 그 문제는 또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를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 교설은, 카르납에 의하여 ‘구성(Aufbau)’??에서 ‘합리적 과학의 전능(全能: omnipotence)에 대한 자랑스러운 주장’으로 불렸는데,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가 쓰이기 오래 전에 발표된 브로우웨르(Brouwer)의 개념들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심지어 그 교설이 처음 출현했을 때에도 옹호될 수 없었다. 괴델(Gödel)과 (특히 결정불가능성에 관한 그의 제2정리[定理]와 함께) 처치(Church)와 함께, 그 교설의 상황은 훨씬 더 악화되었다; 그 까닭은 그들로부터 심지어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의 방식들을 완료할 수 없음을 우리가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술의 의미가 검증될 수 있는 (수학에서: 증명되든 혹은 논박되든) 방식에 놓여있다는 의미의 기준을 우리가 채택한다면 잘 형성된 수학적 문제도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가능한 해답 중 어느 것이 참인지를 우리가 어떻게 발견할지에 관하여 조금의 지식 없이도 우리가 문제를 (그리고, 유사하게, 그 문제에 대한 가능한 해답을) 언명할 수 있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주장’의 천박함을 드러낸다.
카르납은 괴델(Gödel)이 발견한 것들의 엄청난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철학자여서, 그는 그 발견한 것들을 철학 세계에 알리려고 최선을 다했다. 괴델(Gödel)이 얻은 결과가 비엔나 학파의 교설들 안에서 (내가 생각하기에, 너무 악착같이 주장되는 의심할 바 없고 분명하게 형이상학적인 교설들) 언어와 과학의 범위에 관하여 그 결과가 초래해야 했던 변화를 초래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더 놀랍다.
?? 또 다른 것은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의 6.1251이다 (6.1261 또한 참조): 사소하거나 (다시 말해서 ‘논리’가 두 가지의 가치를 지닌 명제 계산에 국한된다면) 명백하게 오류인, 그리고 6.234: ‘수학은 논리의 한 방법이다’를 고찰하여 매우 오도적인 ‘논리에는 놀라운 것들이 그러므로 있을 리가 없다’. 거의 모든 수학적 증거는 놀라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맙소사, 이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유클리드가 피타고라스의 공식을 도출한 것을 처음 마주했을 때 홉스(Hobbes)는 말했다.
??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6.5. 우리는 거기서 이런 글을 읽는다: ‘표현될 수 없는 해답에 대하여 문제 역시 표현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 주장은 (예를 들어 골드바흐[Goldbach]의 추측) 증명될 수 있는가?’일 것이다. 그리고 참인 해답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우리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일지도 모른다.
?? 구성(Aufbau), 183부, 261쪽, ‘문헌(Literature)’ 참조.
(c) 카르납의 논리적 구문론(Logical Syntax)은 정말로 일등급의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서 기술(記述)될 수 있는 드문 철학적 서적 중의 하나이다. 틀림없이 그 책의 논증과 교설 중 몇 가지는, 타스키가 발견한 것들에 주로 기인하여, 카르납 자신이 자신의 저서 의미론 입문(Introduction to Semantics)의 저 유명한 마지막 문단에서 솔직하게 설명한 바와 같이, 갈음된다. 분명히 그 책은 읽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독일어로보다는 영어로 읽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금세기 전반의 합리적 철학에 관한 역사가 쓰인다면, 이 책은 그 역사 안에서 첫 번째 위치를 틀림없이 차지한다는 것이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나는 여기서 (비판적 분석들 사이에 박혀) 심지어 그 책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시도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요점을 적어도 나는 언급해야 한다. 철학 세계가, 폴란드의 서쪽까지, 처음으로 ‘상위-언어’ 안에서 언어들을 분석하는, 그리하여 ‘대상-언어들’을 구축하는 방법에 - 논리학 및 수학의 기초들에 대한 그 중요성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방법 - 소개된 것은 이 책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이 방법이 과학 철학에 관하여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닌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되어, 내가 믿는 바, 완전히 실증된 것은 이 책에서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말을 한다면, 그 책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몇 개월 전에 출간되고, 나의 책이 인쇄된 중에 내가 읽은), 내가 진리의 개념에 관한 타스키의 위대한 논문을 읽기 (1935년, 독일어 번역본으로) 전에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가 믿기에, 그 책의 실제 내부적 난점들 때문에) 할지라도, 내 자신의 철학적 사고(思考)에서 혁명의 시작을 기록한다. 그 후 나는, 물론, 구문론적 상위-언어식 분석은 불충분하여, 타스키가 ‘의미론’이라고 부른 것으로써 갈음되어야 함을 깨달았다.
물론 나는 구획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구문론(the Syntax) 안에서 커다란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나의 비판 중 몇 가지가 이 책에서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물론’이라고 말한다. 관련된 구절의 한 부분이 위에서 (주석 24에서) 인용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관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것은 인용구 바로 뒤에 오는 구절이다; 그 구절은, 내가 믿기에, 카르납이 나의 비판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여기에 제시된 견해는, 일반적인 과학이나 물리학의 언어에서 새로운 원초적 개념들과 새로운 원초적 문장들을 소개하는 데에 커다란 자유를 허용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견해는 실제 과학적 개념들과 문장들로부터 사이비-개념들과 사이비-문장들을 차별화하는 가능성과, 그리하여 후자(後者)를 제거하는 가능성을 간직한다’라고 그는 쓴다. (이 문장에서 원문 표기는 전자[前者]이지만 번역 상 후자[後者]이기에 후자[後者]로 표기했다. - 역자 주). 여기서 우리는, 다시, 형이상학의 무의미함에 대한 옛 주장을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겨우 조금이라 할지라도, 이 구절의 즉각적인 부언에 (카르납은 그 부언을 괄호 안에 넣어서, 그에 의하여 앞 쪽에서 언급된 나의 비판의 영향을 그 부언은 보여준다) 의하여 완화된다. ‘이 제거는, 그러나, 비엔나 학파의 초기 입장에 근거하여 출현했던 것과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은데, 그 입장은 본질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었다. 그 견해에 의하여 그것은 절대적 의미에서 “그 언어(the language)”의 문제였다; 개념들과 문장들이 그 언어에 들어맞지 않으면 개념들과 문장들 모두를 배척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었다.’
?? 구문론(Syntax), 82부, 322쪽 위. (이탤릭체는 카르납이 표시함)
이 구절들에 의하여 지적된 입장은 (위 주석 24에서 간단하게 인용된 것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될 것이다:
(1) 몇 가지 난점들이,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의미에 관한 검증가능성 기준의 난점들이 인정된다; 또한 내가 유의미함의 ‘자연주의적’ 이론이라고 (그것은 사물들은 그 속에서 단순히, 사물들의 본성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유의미하거나 유의미하지 않은 ‘그 언어’에 대한 믿음과 일치한다) 부른 것의 부적합함.
(2) 그러나 우리가, 어떤 교묘한 업적으로써, 다른 것들은 말고 ‘형이상학적’ 개념들과 문장들을 정확하게 무의미하게 만드는 재주를 부리는 한 가지 언어를 우리가 확립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직도 유지된다.
(3) 심지어 우리가 통합 과학의 한 가지 보편적인 언어를 구축할 수 있다는 믿음은, (2)의 결과로, 아직도 유지된다; 그러나 그 믿음은 강조되지 않고, 세부적으로 검토되지도 않는다. (위의 이 부에서 요점 (b) 참조, 그리고 특히 위 주석 43에서 언급된 구문론[the Syntax]의 74부, 286쪽에서 나온 구절 참조.)
이 상황은 나의 쪽에서 더 이상의 비판을 요구하지 않는다: 실제로 언급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나는 이미 언급했는데, 특히 이 접근방식은 타스키의 의미론을, 그리고 그 의미론과 함께 논리적 추론에 관한, 즉 논리에 관한 이론 대부분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 오직 한 가지 언급이 -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 필요하다.
카르납이 저술한 이 훌륭하고 중요한 책의 난제 중 한 가지는 언어의 구문론이 그 언어 자체로 언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책이 강조하는 데에 놓여있다. 상위-언어가 대상-언어의 한 부분을 형성할 것이라고 지금 강조되기 때문에, 독자가, 결국, 자신이 상상했던 것처럼 구분이 그렇게 철저히 완전하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 독자가 대상-언어와 상위-언어 구분하기를 거의 배우지 못했던 이유로 이 난제는 그만큼 더 커진다.
카르납의 강조는, 의심할 바 없이, 잘못 놓여졌다. 상위-언어의 한 부분이 (즉, 상위 언어의 ‘구문론’) 대상-언어의 한 부분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괴델(Gödel)의 저술로부터 아는 바와 같이, 그 사실의 주된 용도는 자체를-언급하는 문장의 구축 속에 있는데, 그 구축은 고도로 전문화된 문제이다. 대상-언어와 상위-언어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촉진시킨다는 관점에서, 상위-언어를 대상-언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취급하는 일이 의심할 바 없이 더 현명했으리라. 적어도 상위-언어의 한 부분이 - 그리고 괴델(Gödel)의 목적에는 충분한 - 상위-언어 전체가 그렇게 표현될 수 있다는 잘못된 주장을 강조하지 않고, 대상-언어로 표현될 것임은 물론 여전히 증명될 수 있었으리라.
이제 그의 저서의 난제들에 그렇게 많이 기여하는 이 강조로 카르납을 이끌었던 것은 그 안에서 한 가지 통합 과학이 표현될 수 있었던 한 가지 보편적 언어라는 교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까닭은 자동적으로 형이상학을 제거할 통합 언어를 구축하기를 그가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 탁월한 서적이 반(反)-형이상학적 독단에 의하여 - 그리고 형이상학과 함께, 논리학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을 제거하는 틀린 구획에 의하여 - 오염된 것을 발견하는 일은 매우 유감스럽다.
구문론(The Syntax)은 다음 형태로 형이상학의 무의미함이라는 교설을 계속한다: 유의미한 모든 문장들은 과학의 언어에 속하든지, 혹은 (만약 철학적이라면) 그 문장들은 그 언어의 구문론 안에서 표현될 수 있다. 이 구문론은, 철학과 과학의 논리가 ‘형식적 화법(formal mode of speech)’으로 번역될 수 있는 한, 철학과 과학의 논리 전체를 포함한다; 게다가, 이 구문론은, 우리가 원한다면, 그 안에서 모든 과학들이 언명될 수 있는 동일한 보편적 (‘대상-’) 언어로서 언명될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은 한 가지 보편적 언어라는 교설만이 아니다: 나는 또한 내가 말하는 것이 유의미하기 위하여 (혹은 카르납에 의하여 이해되기 위하여) ‘형식적 화법’으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나는 또한 수용할 수 없다. 의심할 바 없이 사람은 가능한 한 분명하게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카르납이 ‘형식적 화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실질적 화법(the material mode)’이라고 (그리고 나는,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도, 그렇게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어도, 형식적 화법을 흔히 사용하였다) 부르는 것보다 흔히 선호된다. 그러나 형식적 화법이 반드시 선호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왜 형식적 화법이 반드시 선호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마도 철학의 본질이 언어 분석이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본질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자신을 더 잘 이해되도록 만드는가는 사고(思考)와 경험의 문제가 될 수만 있다.
그래서 왜 모든 철학이 언어적 분석이어야 하는가? 의심할 바 없이 문제를 언어-구축으로써 표현하는 것이 흔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왜 모든 철학적 문제들이 이런 종류여야 하는가? 혹은 이것이 철학에 관한 유일무이한 비(非)-언어적 주장인가?
실증주의적 공격은,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치에 닿는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을 집어넣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과 우리가 말하는 방법에서 더 신중하게 되었고, 이것 모두는 이득이 된다. 그러나 언어 분석은 철학에서 모든 것이라는 철학적 주장이 역설적임을 확신하자. (나의 비판 중 이 비판은 이런 형태로, 더 이상 역설적이지 않은 제안으로써 그 주장을 갈음하는 시험가능성과 의미에 적용되지 않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 제안이 그 주장의 개정판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그 제안을 지지하여 어떤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그 제안을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 이유가 되지 않는 듯이 나에게 보인다.)
5. 시험가능성과 의미
카르납의 저서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와 진리 개념에 관한 타스키의 논문의 독일어 판본 사이의 기간에 쓰인 경험 과학의 철학 분야에서 모든 논문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흥미롭고 가장 중요한 논문이다. 그 저서는 위기의 기간에 쓰여서, 저자의 견해에서 커다란 변화들을 표시한다. 동시에 그 저서가 주장하는 바는 매우 겸손하다. ‘이 논문의 목적은 해답들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저서는 오히려 심화된 탐구를 자극함을 목표로 한다.’ 이 목적은 충분히 실현되었다: 그 저서로부터 유래한 탐구는 틀림없이 수백 건에 이른다.
‘검증가능성(verifiability)’을 ‘시험가능성’으로 (혹은 ‘확인가능성[confirmability]’로 갈음하면서,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는, 그 제목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주로 우리가 지닌 핵심적인 문제에 관한 논문이다. 그 저서는 여전히 형이상학을 과학의 언어로부터 배제하려고 시도한다: ‘... 확인가능성이나 시험가능성에 관한 요건을 의미의 기준으로서 서술함으로써, 경험주의의 원리를 보다 정확한 방식으로 언명하려는 시도가 행하여질 것이다’라고 우리는 1부에서 읽는다; 그리고 27부에서 (33쪽) 이 암시는 상술된다: ‘경험주의자로서, 우리는 과학의 언어가 특정한 방식으로 제한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기술적(記述的) 술어들과 그리하여 구문론적 문장들이, 가능한 관찰들과 어떤 연관성을 갖지 않으면, 수용될 수 없음을 요구한다...’ ‘수용될 수 없는’ 것은, 물론, 형이상학이다: ‘... L이 모든 과학에 적합한 언어라 할지라도... [우리는] 예를 들어 [L 안에서] 형이상학자들의 책 속에서 발생하는 많거나 혹은 아마도 대부분의 문장들에 [상응하는] 문장들을... 가지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주요 개념은 - L의 잘 형성된 공식들인 과학의 언어로부터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 - 변하지 않는다. 역시 변하지 않는 것은 과학의 한 가지 언어라는 개념이다: 카르납이 이제는 매우 분명하게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선택할 수 있으며, 다양한 과학자들은 그 언어를 다양한 방식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는 우리가 보편적인 언어를 수용하기를 제안하며, 그래서 그는 심지어 물리주의에 대한 주장을 수정된 형태로 옹호한다. 그는 흔히 (인용된 구절들에서와 같이) 과학의 그 언어(the language)에 관하여, 혹은 모든 과학에 관한 언어를 갖는 가능성에 관하여, 혹은 과학의 전체(whole) 즉, 합계(total) 언어에 관하여 말한다:?? 그런 언어의 불가능성을 그는 여전히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카르납은 자신의 새로운 개념들을 언명함에서 매우 신중하다. 그는 우리가 많은 과학의 언어들 사이에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경험주의의 교설’은 - 형이상학의 무의미함이라는 교설에 대한 또 다른 이름으로 밝혀지는데 - 과학의 언어를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가급적이면 주장으로서가 아니라, ‘제안이나 요건(proposal or requirement)’??으로서 언명되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 언명으로써, 형이상학을 무의미한 것으로서 배제하려는 생각이 사실상 포기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까닭은 형이상학자가 그런 제안을 수용할 필요도 없고, 분명히 그런 제안을 수용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자는 그에 따라 형이상학이 유의미하게 될 (합당한 언어로) 또 다른 제안을 그 자리에 할 따름이리라. 그러나 이것은 카르납이 상황을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다. 카르납은 형이상학이 없는 과학의 언어를 구축함으로써 형이상학의 무의미함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는 것을 오히려 반(反)-형이상학자에게 부과된 과제나 임무로서 바라본다. 그리고 이것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나는 걱정한다.
나의 옛 논증들을 사용하여, 그런 언어가 구축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은 쉽다.
나의 주장은 과학에 대한 만족스러운 언어는, 잘 형성된 공식과 함께, 그 공식의 부정(否定)을 포함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언어가 보편적 문장들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존재성 문장들을 또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언어가 카르납, 노이라트(Neurath), 그리고 모든 다른 반(反)-형이상학자들이 항상 형이상학적이라고 여겼던 문장들을 틀림없이 포함함을 의미한다. 이것을 완전히 명백하게 만들기 위하여 나는, 극단적인
?? 시험가능성(Testability), 18부 (5쪽).
?? 시험가능성(Testability), 15부 (467쪽 이하) 그리고 27부 (33쪽), 18부 (5쪽)의 인용된 것과, 16부 (469, 470쪽) 참조.
?? 27부 (33쪽).
보기로서, ‘으뜸-상위형이상학적 주장(the arch-metaphysical assertion)’으로 불릴 것을 선택한다:?? ‘전능(全能)하고, 도처에 존재하며, 전지(全知)한 인격적 영혼이 존재한다.’ 나는 이 문장이 시험가능성과 의미(Testability and Meaning)에 제시된 언어들과 완전히 유사한 물리주의적 언어에서 어떻게 잘 형성 되거나 유의미한 문장으로서 구축될 수 있는지를 간단하게 밝히겠다.
우리는 다음 네 가지 물리주의적 술어를 원초적으로서 생각할 수 있다:
(1) ‘사물 a는 위치 b를 점유한다’ 혹은 더 정확하게, ‘a는 (지점 혹은) 영역 b가 한 부분인 위치를 점유한다; 기호로 ‘Pos(a,b)’.??
(2) ‘사물 (기계, 혹은 물체, 혹은 사람...) a는 사물 b를 위치 c에 넣는다’; 기호로 ‘Put(a,b,c)’.??
(3) ‘a는 b라는 언급을 한다’; 기호로 ‘Utt(a,b)’.
(4) ‘a는 b인지 아닌지 질문된다 (다시 말해서 가령 진실을 말하게 하는 약을 복용하고 한 발언에 의하여 충분하게 자극을 받아)’; 기호로 ‘Ask(a,b)’.
우리의 언어 속에서, ‘Pos(a,b)’, ‘Put(a,b,c)’, 기타 등등의 도움으로 아래에 소개된 것들 몇 가지를 포함하여, ‘Pos(a,b)’, ‘Put(a,b,c)’, 기타 등등의 형태로 된 모든 표현들의 명칭들을 우리가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가정한다. 나는 간단함을 위하여, 인용 명칭들(quotation names)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과정이, 특히 (14)에서처럼 인용부호 속의 변수들이 묶여있는 곳에서,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난제는 극복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1)과 (2)를 사용하는 명시적 정의(定義)들의 도움을 받아서, 다음을 도입할 수 있다: ??
(5) ‘a는 도처에 존재한다’ 혹은 ‘Opos(a)’.
(6) ‘a는 전능하다’, or ‘Oput(a)’.
?? 아버지-살해의 형태로서 실증주의의 반(反)-형이상학적 열정을 진단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심리-분석의 ‘과학적’ 특징을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형이상학적 단계에 놓여 있다) 신뢰할 필요는 없다.
?? ‘Pos(a,b)’는 간단함을 위하여 사용된다; 우리는, 실제로, 위치 및 운동량으로써, 혹은 a의 ‘상태’로써 작업을 한다. 필요한 수정은 사소하다. 나는 변항 ‘a’, ‘b’, 기타 등등 모두가 동일한 형태나 의미론적 범주에 속한다고 미리 상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 또는, 카르납이 표현할 것과 같이, ‘a는 완전한 문장 “Pos(b,c)”을 참으로 만들 수 있다’; 시험가능성(Testability), 11부, 455쪽, 설명 2에 나오는 자신의 원초적인 ‘실현가능한(realizable)’에 (그러나 나의 ‘둔다[put]’와 구분되는 상위-언어의 한 용어) 대한 카르납의 설명 참조.
?? 정의(定義)들은: (5) Opos(a) ≡ (b)Pos(a,b).-(6) Oput(a) ≡ (b)(c)Put(a,b,c).-그 다음 우리는 ‘상호적인 환원 문장’을 갖는다: (7) Ask(a,b) ⊃ (Th(a,b) ≡ Utt(a,b)).-남는 정의(定義)들은: (8) Thp(a) ≡ (Eb)Th(a,b).-(9)Sp(a) ≡ (Thp(a) & ((b)~Pos(a,b)) v Opos(a)).-대안은 (혹은 정의항에 대한 추가) 아마도 ‘Sp(a) ≡ (Thp(a) & (b) ∼ Utt(a,b))’.-(10) Knpos(a,b,c) ≡ (Pos(b,c) & Th(a, ‘Pos(b,c)’))일 것이다.-(11) Knput(a,b,c,d) ≡ (Put(b,c,d) & Th(a,‘Put(b,c,d)’)).-(12) Knth(a,b,c) ≡ (Th(b,c) & Th(a,‘Th(b,c)’)).-(13) Unkn(a) ≡ ((Eb) (c) (Th(a,b) & (a ≠ c ⊃ ∼Knth(c,a,b))).-(14) Kn(a,b) ≡ ((c)(d)(e)((b = ‘Pos(c,d)’ & Knpos(a,c,d)) v (b = ‘Put(c(c,d,e)’ & Knput(a,c,d,e)) v (b = ‘Th(c,d)’ & Knth(a,c,d))).-(15) Verax(a) ≡ (b)(Th(a,b) ≡ (Kn(a,b)).-(16) Okn(a) ≡ (b)(c)(d)(e)(f)(g)(h)(((a ≠ b) ⊃ (Knput(a,b,c,d) ≡ Put(b,c,d)))& ((a ≠ e) ⊃ (Knpos(a,e,f) ≡ Pos(e,f))) & ((a ≠ g) ⊃ (Knth(a,g,h) ≡ Th(g,h)))) & Verax (a)).- 우리는 ‘Unka(a) & Okn(a)’가 a의 독특함을 의미함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양자택일로, 우리가 데카르트의 공리(公理) a ≠ b ⊃ (Ec) ((Pos(a,c) & ~ Pos(b,c)) v (~ Pos(a,c) & Pos (b,c)))를 채택한다면, 아마도 스피노자(Spinoza)의 도움을 받았을 논증들을 따라서, ‘Oposa(a)’로부터 독특함을 증명할 수 있다.
(교정 시에 추가됨.) 우리의 정의(定義)들은 타스키의 의미론적 술어 ‘a는 참인 서술이다’를 의미하는 ‘T(a)’ 사용함으로써 단순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14)는 Kn(a,b) ≡ Th(a,b) & T(b)에 의하여 갈음될 것이다; (15)는 Verax(a) ≡ (b)Th(a,b) ⊃ T(b)에 의하여; 그리고 (16)은 Okn(a) ≡ (b)T(b) ⊃ Kn(a,b)에 의하여 갈음될 것이다.
게다가, (3)과 (4)의 도움을 받아서, 카르납의 환원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는
(7) ‘a는 b를 생각한다’ 혹은 ‘Th(a,b)’를 도입할 수 있다.
카르납은 그런 술어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권장한다??. (7)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다음을 명시적으로 정의(定義)할 수 있다:
(8) ‘a는 생각하는 인격이다’, 혹은 ‘Thp(a)’.
(9) ‘a는 (인격적인) 정신이다’, 혹은 ‘Sp(a)’.
(10) ‘a는 b가 위치 c에 있다는 것을 안다’, 혹은 ‘Knpos(a,b,c)’.
(11) ‘a는 b가 c를 위치 d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혹은 ‘Knput(a,b,c,d)’.
(12) ‘a는 b가 c를 생각한다는 것을 안다’, 혹은 ‘Knth(a,b,c)’.
(13) ‘a는 이해될 수 없다’, 혹은 ‘Unkn(a)’.
(14) ‘a는 사실 b 안다’, 혹은 ‘Kn(a,b)’.
(15) ‘a는 진실하다’, 혹은 ‘Verax(a)’.
(16) ‘a는 전지(全知)하다’, 혹은 ‘Okn(a)’.
이제 으뜸-상위형이상학적 주장을 표현하는 존재성 공식을 내놓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다: 생각하는 인격 a가, 도처에 자리를 잡고, 존재한다는 것; 무엇이든 어느 곳에나 놓을 수 있다; 모든 것을 그리고 사실상 참인 것만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은 a가 생각하는 것에 관하여 철저히 알지 못하는 채. (이런 종류의 a가 지닌 독특함은 a의 속성들로부터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a를 기독교의 하느님과 일치시킬 수는 없다. 물리주의적 토대로써 ‘도덕적으로 훌륭한’을 정의[定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정의[定義]가능성의 문제들은 - 수학을 제외하고 - 어떤 정도로든, 본질주의자들에게는 제외하고, 고도로 재미없다: 아래 참조.)
우리가 지닌 순전히 존재성인 으뜸-상위형이상학적 공식이 여하한 과학적 시험에 제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공식을 반증할 - 그 공식이 거짓이라면 그 공식이 거짓임을 알아낼 - 어떤 희망도 없다. 이 이유 때문에 나는 그 공식을 형이상학적으로서 - 과학의 영역 밖에 떨어지는 것으로서 - 기술(記述)한다.
그러나 그 공식이 과학의 밖이나 과학의 언어 밖에 떨어진다고, 혹은 그 공식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자격이 카르납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공식의 의미는 완전히 분명한 듯 나에게 느껴진다; 몇몇 논리적 분석가들이 틀림없이 그 공식의 경험적 신뢰불가능성을 무의미함으로 오해했던 것이 또한 분명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공식을 아마도 확인할, 카르납의 의미에서, 다시 말해서, 그 공식을 ‘약하게 검증할’ 실험들을 심지어 상상할 수 있으리라; 주석 67에 대한 원문 참조.) 시험가능성(Testability)??에서 ‘문장의 의미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그 문장의 진실성과 거짓을 결정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리고 그런 결정이 가능하다는 조건으로만 문장은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우리가 듣는다면 우리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구절로부터 한 가지 일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 으뜸-상위형이상학적 공식과 같은 공식에게 의미를 허용하는 것이 카르납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 의도는 실현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의도는 실현될 수 없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는다.
우리의 으뜸-상위형이상학적 존재성 공식을 구축하는 데에 내가 가진 유일한 관심은 잘 형성됨과 과학적 특징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없음을 밝히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과학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은 포함하지만, 형이상학적으로서 항상 간주되는 저 문장들을 배제하는 과학의
?? 시험가능성(Testability), 18부, 5쪽, S1.
?? 시험가능성(Testability), 1부, 첫 문단의 끝.
언어를 구축하는 방법의 문제는 절망적인 문제이다. 그 문제는 전형적인 사이비-문제이다. 그리고 아무도 왜 그 문제가 풀기에 (그 문제가 풀릴 수 있다면) 흥미로운지 설명한 적이 없다. 아마도 이전과 같이 형이상학은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 그러나 이것은 이전에 그 문제가 의미했던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a
그러나 적어도 오래된 비트겐슈타인의 꿈 한 부분을 실현하여, 형이상학을 무의하게 만드는 것이 여전히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될지도 모른다. 그 까닭은 아마도 카르납이, 우리가 ‘a는 b를 c 속으로 집어넣을 수 있다’와 ‘a는 b를 생각한다’ (후자[後者]는 b를 말하는 의향으로서 규정된다)와 같이, 의향적 술어들(dispositional predicates)을 우리가 사용하는 데서 너무 너그러울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思考) 성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희망을 내밀 수 없다. 내가 3부에서 구성(Aufbau)을 토론할 때 밝히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과학에서 우리에게는 진정한 비(非)-외연적 일반 개념들(genuine non-extensional universals)이 필요하다. 그러나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나는 간단하게, - 구성(Aufbau)의 ‘환원주의적(reductionist)’?? 개념들이 그 저자에 의하여 포기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간단하게 - 모든 일반 개념들이 의향적이라고 지적했다; ‘녹을 수 있는(soluble)’과 같은 술어뿐만 아니라, ‘녹고 있는(dissolving)’이나 ‘녹아버린(dissolved)’ 또한.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줄여서 ‘L.Sc.D.’)로부터 내가 인용한다면: ‘모든 기술적(記述的) 서술은 일반 개념들을... 사용한다; 모든 서술에는 이론의, 가설의 특징이 있다.
??a (교정 시에 추가됨:)
나의 ‘으뜸-상위형이상학적 공식’에 대한 나의 실증주의자 친구들의 반응은 (나는 아직 카르납의 반응을 보지 못했지만, 바-힐렐[Bar-Hillel]로부터 보고서를 받았다) 이것이었다. 이 공식이 잘 형성되었기 때문에, ‘유의미하다’ 그리고 또한 ‘과학적’이다: 물론, 과학적이나 경험적으로 사실은 아니다; 그러나 다소 과학적이나 경험적으로 거짓이다; 혹은, 더 정확하게, 경험에 의하여 확인되지 않았다. (나의 실증주의자 친구들 몇 명은 내가 붙인 이름 ‘으뜸-상위형이상학적’에는 역사적 정당성이 있음을 또한 부인하여, 비엔나 학파의 반(反)-형이상학적 경향들이 반(反)-신학적 경향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것도 고전적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현대판으로서 의도되었던 노이라트[Neurath]의 물리주의에 불구하고 그렇다.)
이제 누군가가 나의 으뜸-상위형이상학적 공식이 잘 형성되어서 그리하여 경험적으로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인정하는 데까지 간다면 그가 이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빼내는 데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어떻게 사람이 나의 으뜸-상위형이상학적 공식이 거짓, 아니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옹호할 수 있을까?이기 때문이다. 그 공식은 틀림없이 반증될 수 없으며, 확인될 수 없지는 않다. 사실상 그 공식은
(Ex)G(x)로
표현될 수 있는데 - 말로는: ‘하느님의 속성들을 지닌 것이 존재한다.’이다. 그리고 ‘G(x)’가 경험적 술어라는 상정(想定)을 토대로, 우리는 그것의 확률이 틀림없이 1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카르납의 확률의 논리적 기초[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 571쪽 참조). 나는, 더 나아가, 그것의 확률이 경험적 정보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그 논리적 확률이 영[零: zero]과 다른 정보에 의하여) 감소될 수 없음을 이것이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카르납의 논리적 기초(Logical Foundations)에 따라서, 그것의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가 1이라는 것과, 그것이 확인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 내가 여기서 주장한 바와 같이- 의미한다. (위 249쪽 이하를 또한 참조.)
그렇다면 나의 실증주의자 친구들은 어떻게 경험적 서술 ‘(Ex) G(x)’가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 서술은, 아무튼, 과학적 이론보다 더 잘 확인된다.
내 자신의 견해는 그 서술이 시험될 수 없어서 그러므로 비(非)-경험적이며 비과학적이라는 것이다.
?? ‘환원주의(reductionism)’이라는 용어는 콰인(Quine)의 것으로 보인다. (그 용어는 내 자신의 용어 ‘귀납주의[inductivism]’에 밀접하게 상응한다. 예를 들어 인식[Erkenntnis], 3호, 1932년, 223-4쪽 참조.)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4부, 34쪽의 나의 말 또한 참조하는데, 그곳에서, 콰인(Quine)이 ‘환원주의(reductionism)’이라고 불렀던 것을 비판하여, 나는 이렇게 썼다: ‘옛 실증주의자들은 기초적 경험들로 (감각-자료, 인상[印象: impressions], 감지[感知:perceptions], 기억 경험 [구성<Aufbau>에서 카르납이 사용한 용어], 기타 등등) 환원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개념들만을 (혹은 용어들) 과학적으로서 수용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14부, 특히 주석 4 및 6과, 원문 또한 참조.
“여기에 한 잔의 물이 있다”는 서술은 어떤 관찰성 경험에 의해서도 검증될 수 없다. 이유는 그 서술 안에서 발생하는 일반 개념들이 특정 관찰성 경험과 상호 관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잔(glass)”이라는 단어로써, 우리는 특정 법칙 같은 행태를 보이는 물리적 물체들을 가리킨다. 일반 개념들은... “구축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일반 개념들은 구성[Aufbau]의 방식으로 정의[定義]될 수 없다.)??
그렇다면 ‘녹을 수 있는(soluble)’과 같은 의향적 용어를 정의(定義)하거나 도입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무엇인가? 해답은 단지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카르납이 ‘환원-문장’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써, ‘x를 물에 넣어서 용해된다면, 그 조건만으로 x를 물에 넣었을 때 물에서 용해될 수 있다면’과 같이, 조작적 시험을 기술(記述)하면서, ‘x는 물에서 용해될 수 있다’를 ‘환원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상정(想定)하라. 우리는 무엇을 얻었는가? 우리는 여전히 ‘물(water)’과 ‘용해된다(dissolves)’를 환원해야 한다; 그리고 물(water)을 규정하는 조작적 시험들 가운데서, 우리가 다음 것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에서 녹을 수 있는 것이 x 속에 넣어지면, x가 물이라면, 그 물체는 용해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녹을 수 있는(soluble)’을 도입하면서, ‘물’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그 물은 아마도 심지어 더 높은 정도(程度)로 의향적이다, 또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순환성에 빠진다; 그 까닭은 ‘녹을 수 있는(soluble)’ 없이는 차례에 따라서 조작적으로 도입될 수 없는 용어 (‘물’)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녹을 수 있는(soluble)’을 도입하기 때문이다; 기타 등등, 무한적으로.
‘x는 녹고 있다(x is dissolving)’이나 ‘x는 녹았다(x has dissolved)’에 관한 상황도 매우 유사하다. 이 과정의 특정 흔적들이 발견됨을, 그리고 필요하다면 우리가 용해되었다가 나중에 회수된 물질의 부분들을, 회수된 물질이 다시 용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것들 가운데서, 확증해야 할 시험들로써 x의 부분들과 우리가 심지어 동일시 할 수 있음을, 밝힐 수 있기를 (가령, 물을 증류함으로써) 기대한다는 조건으로만 x가 용해되었다고 (x가 사라졌다 라기보다는) 우리는 말한다.
환원이나 도입의 분명한 순서를 확립함으로써 이 순환이 깨질 수 없다는 매우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우리들이 하는 실제 시험은 확정적이지 않고 항상 일시적이다. 특정 시점에서 - 가령, 원초적 술어에 도달할 때 - 우리의 시험을 중단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결정에 우리가 동의해서는 안 된다. 모든 술어는 과학자들에게 동등하게 의향적으로, 다시 말해서 의심을 받을 수 있고 시험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경험적 토대에 관한 이론의 주요 개념 하나이다.??
?? 그 구절은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 있다 (25부 끝; 14부 및 20부 또한 참조). 이 구절이, ‘녹을 수 있는(soluble)’이라는 용어에 관한 카르납의 관련 구절과 (시험가능성[Testability], 7부, 440쪽) 함께, 아마도 소위 ‘반(反)-사실적 조건 명제들(counter-factual conditionals)의 문제’를 시작하는 데에 기여했을지라도, 나는, 줄기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혹은 더 정확하게, 사람들이 본질주의나 현상주의나 의미-분석을 지지하지 않을 때 이 문제의 남은 것.
?? 시험가능성[Testability]에서 카르납은 나의 용어 사용법 대부분을 (‘경험적 토대[empirical basis]', '기초적 문장[basic sentences]’, 기타 등등; ‘관찰 가능한[observable]’이라는 용어를 그가 도입하는 것과 사용하는 것을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28부, 59쪽과 또한 비교할 것) 포함하여 경험적 토대에 관한 나의 이론 대부분을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25부에서 30부) 수용한다. 심지어 작지만 중요한 격차가 (내가 여기서 그의 ‘방법론적 유아론[唯我論]’ 시절로부터의 생존으로서 해석했고 - 위 주석 38에서 40의 원문 참조 -,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29부, 주석1과, 주석 2의 원문에서 비판했던 격차) 이제 시정되었다. (시험가능성[Testability], 20부; 특히 12쪽의 ‘결정 2’와 13쪽의 주석 7의 원문 참조). 동의된 몇 가지 다른 요점들은 (카르납 자신이 언급하는 요점들과 별도로) 다음과 같다: (통합적) 문장을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데에 ‘관습적 요소’가 있다는 주장과 (시험가능성[Testability], 426쪽의 3부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127쪽의 30부를 비교할 것), 궁극적 사실들을 서술하는 원자 문장이라는 교설의 거부 (시험가능성[Testability], 448쪽, 9부를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127쪽, 38부와 비교할 것). 그러나 이 광범위한 의견일치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차이점이 남는다; 나에게는 논박가능성과 동일한 시험가능성이 지닌 부정적인 견해를 나는 강조한다: 그래서 나는 확인이 성공적이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논박하려는 시도들의 결과라는 조건으로만 확인을 수용한다. 카르납에게, 시험가능성과 논박가능성은 검증의 약화된 형태들로 남는다. 이 차이점의 결과는 아래 6부에서 내가 확률과 귀납법을 토론하는 데서 분명해질 것이다.
‘녹을 수 있는(soluble)’이 덜 의향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사실에 관해서는 이만큼 하자. 이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나의 주장에 관하여, 나는 수학과 논리학을 제외하고는 정의(定義)가능성의 문제가 대부분 근거가 없다고 (다시)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 의미가 용법에 의하여 - 이론의 문맥에서 그 용어들이 사용되는 방식으로써, 그리고 실험실의 절차와 관행들로서 - 불확실하게 정해졌을 뿐인 많은 정의(定義)되지 않은 용어들??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그리하여 이 개념들의 의미는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의(定義)란 정의(定義)된 용어의 의미를 정의(定義)되지 않은 용어들의 의미로 환원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정의(定義)된 개념들을 포함하여 모든 개념들에 관해서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정의(定義)에 대한 요구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로크(Locke)를 훨씬 지나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 전통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사람이 자신이 사용한 단어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면, 이것은 그 단어에 ‘그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 (비트겐슈타인), 그러므로 무의미한 말을 하고 있었음을 이것이 증명했다는 믿음. 그러나 이 비트겐슈타인적 믿음은, 모든 정의(定義)가 틀림없이 정의(定義)되지 않은 용어들로 궁극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내가 이 모든 것을 다른 곳에서?? 논의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것에 관하여 더 말하지 않겠다.
이 부를 마무리 지으면서, 나는 시험가능성과 확인가능성이, 만족스럽게 분석된다할지라도, 옛 검증가능성의 기준보다 의미의 기준으로서 작동하기에 조금도 더 적당하지 않다는 요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부연하여 나는 ‘시험(test)’, ‘시험 가능한(testable)’, 기타 등등이나 ‘확인(confirmation)’에 대한 카르납의 분석을 수용할 수 없음 나는 말해야겠다. 이유는, 다시, 그가 쓰는 용어들이, 법칙들은 검증될 수 없다는 반대의견을 피하기 위하여 조금 약화되어, ‘검증(verification)’, ‘검증 가능한(verifiable)’, 기타 등등에 대한 대체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충은, 우리가 이 논문의 다음 부와 마지막 부에서 볼 것과 같이, 부적당하다. 과학에서 수용가능성은, 진리-대체물 같은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의 엄격성에 의존한다.??
?? 시험가능성(), 470쪽, 16부에서 카르납은 우리가 한 가지 정의(定義)되지 않은 단항 술어를 (‘밝은[bright]’이나, 대안적으로 ‘단단한[solid]’) 토대로 모든 용어를 우리가 도입할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환원 쌍(a reduction pair)의 도움을 받는 이 토대로써 다른 용어를 도입할 수 없다; 적어도 두 가지 다른 ‘주어진’ 술어가 심지어 한 가지 상호 환원 문장을 위하여 필요하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적어도 한 가지의 2항의 관계가 필요하다.
?? 예를 들어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Open Society), 11장, ii부 참조.
?? 결과적으로, 아래 ‘내용-조건’이나 ‘수반 조건’은 무효이다: ‘x가 y를 포함한다면 (다시 말해서 y의 내용이 x의 내용의 한 부분이라면), y는 틀림없이 적어도 x만큼 잘 확인된다’; 내용 조건의 무효성은, 내용이 시험가능성 및 [절대적인] 논리적 비개연성의 정도(程度: degree)와 동일시되고, 내용 조건의 무효성이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가 논리적 확률과 동일시됨을 파괴함이 밝혀진,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82 및 83부에서 (33부 이하와 비교하라) 지적되었다. 그러나 시험가능성(Testability)에서 환원에 관한 카르납의 전체 이론은 이 조건에 의존한다. (434쪽, 6부의 문단 1과 435쪽 정의[定義] I.a.를 비교하라.) 확률(Probability), 474쪽에서 (397쪽과 비교하라), 카르납은 수반 조건의 (혹은 ‘귀결 조건’) 무효성을 주목한다; 그러나 그는 그 무효성으로부터 (내가 믿기에 필요한)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는 확률과 일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나는 이 결론을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부록 *ix에서 재확인했다. 아래 주석 74 및 77 이하와 원문을 비교할 것.)
6. 확률과 귀납
확인을 일종의 약화된 검증인양 확인에 접근하는 것의 전체 결과들은 확률에 관한 카르납의 두 가지 서적에서만 - 큰 서적은 확률의 논리적 기초(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라고 (여기서는 ‘확률[Probability]’로서 언급된다) 제목이 붙었고 작은 진행 보고서는 귀납적 방법의 연속(The Continuum of Inductive Methods)으로 (여기서는 ‘방법[Methods]’으로 언급된다) 제목이 붙었다 - 명백해진다.??
이 두 가지 서적의 주제는 우리가 지닌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 주제들은 귀납 이론을 다루며, 그래서 귀납법은 항상 과학에 관한 구획의 가장 대중적인 기준의 하나였다; 그 까닭은 경험 과학은, 대체로, 그 과학의 방법들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방법들은, 그 다음에, 보통 귀납적으로서 규정된다.??
?? 구문론(Syntax)과 확률(Probability) 사이에 발간된 세 권의 서적 중 두 권에는 - 의미론 입문(Introduction to Semantics)과, 의미와 필연(Meaning and Necessity) (그리고 그 서적들 사이에 출간된 논리의 형식화[Formalization of Logic]에도, 내가 알 수 있는 한 아무 것도 없다) - 구획이라는 특정 문제와의 관련성이 없다. 입문(Introduction)에서 나는 (a) 타스키의 진리 개념에 대한 노이라트(Neurath)의 반대를 언급한 것으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발견할 따름이다. (카르납은 그것에 대하여 탁월하고 관용적[寬容的]인 답변과 (vii쪽 이하), (b) 아르네 내스[Arne Naess]의 설문지 방법의 관련성에 대한 거부만을 (29쪽) 내놓는다; 위의 나의 주석 44 및 원문 또한 참조.) 내가 한 사람으로서 카르납의 저서 중 최고의 저서로 믿는 의미와 필연(Meaning and Necessity)에는 (그 저서는 아마도 격렬하게 공격을 받았던 저서이기도 하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언급과 함께, 카르납이 여전히 형이상학의 무의미함을 믿는 것을 나타내는 듯한 존재론과 형이상학에 관한 몇 가지 말이 있다 (43쪽); 그 까닭은 그 언급이 이렇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 문장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가능한 경우 중 어느 경우에 그 문장이 참일 것이고 어느 경우에 참이 아닐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내가 확신적으로서 알고 있는 카르납의 주요 결론과 갈등을 일으키는 듯이 나에게 보인다. 그 까닭은 인용된 구절이, 의미에 대한 내포적(intensional) 접근과는 반대로, 카르납이 외연적(extensional) 접근이라고 부른 것을 개괄함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주어진 표현의 의미 이해와 그 의미가 적용되는지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조사하는 것’을 우리가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결론들...이다’ (202쪽, 이탤릭체는 내가 표시함), 그리고 의미는 내포의 도움을 받아서, 적용은 외연의 도움을 받아서 설명된다. 우리의 문제와 연관된 것은 또한 8쪽 이하의 자신의 ‘해설(explication)’이라는 개념에 대한 카르납의 ‘해설(explication)’이다; 아래 참조.
?? 구획에 관한 우리의 문제는 확률(Probability), 31쪽의 ‘경험주의의 원리(principle of empiricism)’에 관한 언급과 (또한 30쪽 71쪽에서 언급된다), 179쪽 이하 자연의 ‘통일성 원리’에 관한 경험적 특징(the empirical character of the 'principle of uniformity' of nature)에 대한 토론을 제외하고 이 두 권의 책에서 명시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 두 가지 구절은 아래에서 언급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카르납의 견해이다: 그의 새로운 구획 기준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확인가능성(confirmability)이다. 그래서 이 두 권의 책에서 카르납은 문장을 확인하는 방법은 귀납법과 동일하다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획의 기준이 이제, 더 정확하게, 귀납법에 의한 확인가능성이 된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적 표현은, 그 표현을 귀납법에 의하여, 혹은 귀납적 증거에 의하여 확인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조건만으로 경험 과학들에 속할 것이다.
내가 2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 구획 기준은 나의 요건들을 충족시키지 않는다: 모든 종류의 사이비-과학들이 (점성술과 같은 것) 분명하게 배제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한 답변은, 의심할 바 없이, 그 기준에는 내가 ‘사이비-과학들’이라고 부른 것을 배제할 의도가 없다는 것과, 이 사이비 과학들은 형이상학적인 확인 불가능한(non-confirmable) 문장들로 라기보다는, 거짓 문장들이나 아마도 확인되지 않은(disconfirmed) 문장들로만 구성된다는 것이리라. 나는 이 답변에 의하여 만족하지 않지만 (예를 들어 점성술을 배제하여 많은 문제들과 관련하여 매우 유효한 것으로 판명된 기준이 나에게 있다고 내가 믿는다할지라도) 나는, 논증을 목적으로, 그 답변을 수용하여, 이전과 같이, 그 기준이 틀린 구획을 초래함을 밝히는 데에 내 자신을 국한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검증가능성 기준에 대한 나의 비판은 항상 이러했다: 그 기준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도에 반하여, 그 기준은 명백한 형이상학적 서술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준은 모든 과학적 서술들, 다시 말해서, 과학 이론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서술인 자연에 관한 보편적 법칙들을 정말로 배제했다. 이제 어떻게 이 두 무리의 서술들이 새로운 기준 하에서 진행되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 서술들에 관하여, 나의 으뜸-상위형이상학적 존재성 공식이, 카르납의 체계 안에서, 높은 확인 가치를 획득함이 밝혀진다; 그 까닭은 그 공식이 그 확인 가치가 1이거나, 충분한 규모의 유한한 세상에서, 1과 구분이 될 수 없는 거의-동어반복적인 (‘거의 논리적 참인’) 문장들에 속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공식은, 내가 의미하는 바에서 시험들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공식에 대하여 심지어 실험적 확인이 상상될 수 있는 일종의 서술이다??: 그 공식을 논박할 상상 가능한 방법은 없다. 그 공식의 논박가능성 결핍으로 인하여 그 공식은 나의 구획 기준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문장들의 집합에 들어간다. 다른 한편으로, 카르납이 의미하는 바에서 그 공식의 높은 확인 가치로 인하여 틀림없이 그 공식은 어떤 과학적 법칙보다 크게 우월하고 더 과학적이다.
그 까닭은, 카르납의 이론에 따라서, 카르납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어떤 의미에서 무한한 (시간적 무한성이 충분하다) 세상에서, 모든 보편적 법칙들은 영(零: zero)의 확인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지어 유한한 세상에서도 이 세상의 사건들이나 사물들의 숫자가 충분히 크다면 그 법칙들의 가치는 영(零: zero)과 구분될 수 없으리라. 이 모든 것은 확인가능성과 확인이, 카르납이 의미하는 바에서, 단지 검증가능성과 검증의 다소 약화된 형태라는 사실의 분명한 결과이다. 보편적 법칙들이 검증될 수 없는 이유는 그러므로 그 법칙들이 확인될 수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 보편적 법칙들은 세상에 대하여 많은 것을 - 우리가 ‘검증하’거나 ‘확인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것을 - 주장한다.
?? 상상컨대 스베덴보리(Swedenborg)와 같은 예언자들이 있을 것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우리들의 존재성 공식이 (276쪽 참조) 참인 그 a에 의하여 지금 영감을 받는다고 우리에게 말할 때마다 (진실을 말하게 하는 약들의 영향을 받아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하여 정확한 예언을 한다; 그래서 상상컨대 우리는 그 약들을 대신해서 항상 진리를 말하여 예언하는 것으로 판명되는 (특정 상황 하에서) 라디오 수신기들을 - a-영향력 수신기들 -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확률(Probability), 571쪽, 110부 이하 참조. 유사한 결과에 관하여,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257쪽 이하, 80부 참조: ‘사람들은 아마도, 가령 [아직] 시도되지 않은 저 모든 [상상 가능한] 시험들과 비교하여 그 가설에 의하여 통과된 모든 시험들 사이의 비율을 평가함으로서 계산된 확률을.. 가설의 [논의된 가설들은 보편적 법칙들이다] 탓으로 돌릴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도, 역시, 효과가 없다; 그 까닭은 이 평가가 정확하게 계산될 수 있고, 그 결과는 항상 확률이 영(零: zero)이기 때문이다.’ (이 쪽[page]으로부터 다른 구절이 아래 주석 70에 인용된다.)
자신의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대한 정의(定義)에 따라서, 자연 법칙들이 확인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사실에 직면하여, 카르납은 두 가지 과정을 채택한다: (a) 그는 (조건을 충족시킨[qualified]??) ‘법칙 l의 사례 확인’으로 불리는 임시방편적인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는데, 그 개념은 그렇게 정의(定義)되어서 우리는, 영(零: zero) 대신에, 1에 근접한 확인 가치를 때때로 획득한다; (b) 그는 자연 법칙들이 실제로 과학에서 필요하지 않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 법칙들 없이도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검증주의로 인하여 그 법칙들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확인주의는 그 법칙들을 불필요하게 만들 따름이다: 이것은 검증가능성 기준의 약화가 초래하는 소득이다.)
나는 이제 (a)와 (b)를 좀 더 완전하게 토론할 것이다.
(a) 물론 카르납은 모든 법칙들에 대한 자신의 영(零: zero)-확인이 반(反)-직감적임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그는 법칙의 사례에 대한 확인도(確認度)로써 법칙의 직감적 ‘신뢰성’을 측정할 것을 제안한다 (위 주석 68 참조). 그러나 확률(Probability)의 572쪽에 도입된 이 새로운 척도가 실제로 앞 571쪽에서 세워진 합당성의 기준 하나도, 그리고 정리(定理) 하나도 충족시키지 않음을 그는 어느 곳에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하며, 그 이유는 증거 e를 토대로 한 법칙 l의 ‘사례 확인’이 다만 l과 e의 확률 함수가 아니라는 ((l과 e의 ‘정식 c-함수’가 아니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것이 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570쪽까지, 확인에 관한 상세한 이론이 (확률1의 의미에서) 주어진다. 571쪽에서 우리는 한 법칙에 대하여 이 확인이 영(零: zero)임을 발견한다. 우리는 이제 다음 대안을 마주한다: (i) 우리는 그 결과를 옳은 것으로서 수용하여, 결과적으로 잘-지지된 법칙에서 합리적 신뢰도가 영(零: zero)과 - 또는 논박된 법칙의 합리적 신뢰도나 심지어 자기 모순적인 문장의 합리적 신뢰도 - 상당히 다르지 않다고 말하거나; 혹은 (ii) 우리의 이론이 우리에게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관한 합당한 정의(定義)를 제공했다는 주장에 대한 논박으로서 그 결과를 우리가 받든지. 새로운 척도의 임시방편적 도입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수용가능한 제3의 가능성이 아니다. 그러나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은 이 중요한 조치를 - 지금까지 사용된 ‘해설’의 방법과의 결별 (아래 주석 69 참조) - 독자에게 경고하지 않고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소한 조정만 이루어졌다는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확률이나 확인을 조금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하려면, 그 조정은 더 없이 근본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조정은 가치가 영(零: zero)인 확인 함수를 가치가 흔히 1에 근접할 또 다른 확인 함수로 가름한다. 우리가, 1에 가까운 확률이 ‘법칙의 신뢰성에 의하여 모호하게 의미되는 것을 훨씬 더 정확하게...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영(零: zero)의 확률이 반(反)-직감적이라는 것보다 결코 더 낫지 않은 정당화를 지닌 새로운 조치를 도입하는 자유를 우리 자신에게 허용한다면, 우리는 어떤 문장에 대해서도 우리가 원하는 어떤 확률도 (또는 확인도[確認度]) 획득할 수 있다.
?? 나는 나의 토론을 카르납이 ‘조건을 충족시킨(qualified)’ 사례 확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확률[Probability], 572쪽 이하) 한정한다; (a) 카르납이 우리의 직감을 ‘훨씬 더 정확하게’ 의미한 것으로서 그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리고 (b) (충분히 많은 술어들을 지닌) 충분히 복잡한 세상에서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례 확인은 모든 흥미로운 경우들에서 매우 낮은 확인 가치를 낳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조건을 충족시킨 사례 확인’은 (이것을 나는 지나가는 길에 언급한다) 소위 ‘확인의 역설(paradox of confirmation)’에 의하여 정통으로 공격을 받는다 (확률[Probability], 469쪽 참조). 그러나 이것은 내가 발견했던 바, 항상 수정될 수 있는 - 이 경우에 573쪽 (15)의 정의항의 두 가지 논증을, l에 대한 두 가지 논리적으로 대등한 함축적 언명들에 관하여 대칭적으로 만듦으로써 - 결점이다; 그것들은 각각 (단순화 이후에), ‘j ⊃ h'’ 및 ‘e.(h' ⊃ j)’이 된다. 이것은 역설을 피한다.
?? 확률(Probability), 572쪽. 의미와 필연(Meaning and Necessity), 2부, 7쪽 이하와 비교하라: ‘모호하거나 완전히 정확하지 않은 개념을 더 정확하게 만드는 과제는... 논리적 분석의 가장 중요한 과제들에 속한다... 우리는 이것을 초기 개념에 대한 해설을 내놓는... 과제라고 부른다...’ (확률[Probability], 2부, 3쪽 또한 참조) 나는 여기서 (다시 말이 나온 김에만) 해설에 관한 카르납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을 해야겠다. 나의 요점은 사람들이, 특정한 주어진 목표를 - 특정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목표 - 위하여 충분한 정확성이라는 상대적 의미에서를 제외하고, 정확함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념들을 그 자체로서 ‘해설될’ 수 없고, 명백한 문제-상황의 틀 내부에서만 해설될 수 있다. 혹은 다시 말해서, ‘해설’이나 ‘분석’이 수행되는 해결을 위한 진정한 문제가 (그 문제는 나중에 해설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합당성은 판단될 수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카르납은 새로 도입된 사례 확인이 합당하거나, 적어도 일관적임을 (그렇지 않다; 위 주석 68 참조) 밝히려고 어디에서도 시도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논박된 모든 법칙은 시험을 견디어낸 어떤 법칙보다 더 낮은 사례 확인을 획득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이 최소 요건이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은 (심지어 모순을 수정한 후에도) ‘모든 백조는 희다’는 법칙인 카르납의 보기의 도움을 받아 밝혀질 것이다. 이 법칙은, 우리의 증거가 한 마리의 검은 백조와 가령 1000마리의 흰 백조로 구성된다면, 반증된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증거로써, 사례 확인은, 영(零: zero)인 대신에, 1에 매우 근접할 것이다. (1과의 정확한 격차는 위에 논의된 매개변수 λ의 선택에 의존할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이론이 평균적으로 n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수학적으로 대등한 결과를 야기하는 라이헨바흐(Reichenbach)의 이론??을 토론하면서, 그의 이론의 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파멸적(devastating)'으로서 나는 기술(記述)했다. 20년이 지나서, 나는 아직도 그 결과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b) 과학에서 법칙은 없어야 할 것이라는 그의 교설에 대하여, 카르납은 실제로 자신이 검증주의의 절정기에 지녔다가 구문론(Syntax) 및 시험가능성(Testability)에서 포기했던 입장과 (다시 말해서 과학의 언어는 ‘분자적’이라는 것) 매우 유사한 입장으로 복귀한다. 비트겐슈타인과 슐릭(Schlick)은, 자연 법칙이란 검증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이것으로부터 자연 법칙들은 진정한 문장들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연 법칙들을 ‘무의미한 사이비-문장들’이라고 부르게 됨을 간과하고). 밀(Mill)과 다르지
?? 확인 가치들은 카르납의 λ가 (아래 참조) 영(零: zero)이라면 동일하다; 그리고 유한한 λ에 관하여, 카르납의 사례 확인 가치는 무한히, 축적되는 증거에 따라서, 라이헨바흐(Reichenbach)의 이론에 대한 나의 옛 토론에서 나에 의하여 비판된 가치에 근접한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257쪽, 80부로부터, 현재의 경우에 들어맞는 한, 나는 인용한다: ‘이 가설의 [나는 완전히 일반적으로 보편적 법칙들에 관하여 말을 하고 있다] 확률은 그렇다면 그 가설과 일치하는 [다시 말해서 그 가설의 사례들인] [단칭] 서술들의 진리 빈도에 의하여 결정되리라. 가설은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가설이 이 순서의 모든 두 번째 서술에 의하여 [다시 말해서 모든 두 번째 사례에 의하여] 부정된다면, ½의 확률을 지니리라! 이 파멸적인 결과로부터 도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아마도 두 가지 더 많은 방편을 여전히 시도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방편 중 한 가지는 모든 보편적 법칙들의 영[零: zero] 확률을 야기한다: 그 구절은 위의 주석 67에서 인용된다.)
않게 그들은 다른 진정한 문장들로부터 (초기 조건들) 진정한 (단칭) 문장들의 - 법칙의 사례들 - 도출을 위한 규칙들로서 자연 법칙들을 기술(記述)했다. 나는 이 교설을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비판했다; 그리고 카르납이 구문론(Syntax)과 시험가능성(Testability)에서 나의 비판을 수용했을 때?? 나는 그 교설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르납이 검증주의로 복귀함으로써 (약화된 형태로), 그 교설은 부활했다 (약화된 형태로서): 나는 그 교설의 생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면에서 카르납은 슐릭보다 훨씬 더 멀리 간다. 슐릭은 법칙들 없이는 우리는 예측을 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카르납은 ‘법칙 사용은 예언을 하는 데에 필수불가결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 기타 등등에 관한 서적들에서 보편적 법칙들을 서술하는 것은 쓸모가 있다. 과학자들에 의하여 서술되는 이 법칙들에 고도의 확인이 없다 할지라도 이 법칙들에는 고도로 조건을 충족시킨 사례 확인이 있다....’고 그는 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법칙들의 확인도가 더 낮을 리가 없기 때문에, 억제된 표현이다)
나의 논문의 이 부를 읽어가면서, 아가시(Agassi) 박사는 내가 여기서 보고하는 것을 자신이 허용했던 간단한 (그리고 내가 믿기에 새로운) 귀납적 확인의 역설을 발견했다.??a 그 역설은 내가 ‘아가시-술어(Agassi-predicate)’로 - 우리의 수중에 있는 증거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개체에게 (사건들이나, 혹은 사물들) 유효하도록 그렇게 선정된 사실적 술어 ‘A(x)’; 그러나 다른 것들 대부분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 부를 것을 제안하는 것을 이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A(x)’를 ‘x는 1965년 1월 1일 이전에 발생했다 (또는 관찰되었다)’로서 정의(定義)하기로 결정할 (지금) 것이다. (또 다른 선택은 - 말하자면 ‘버클리[Berkeley]’의 선택 - ‘x는 감지되었다’가 되리라.) 그렇다면 카르납의 이론으로부터, 증가하는 증거와 함께 ‘A(a)’의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가 세상의 (현재, 과거, 혹은 미래) 개체 a에 대하여 1과 틀림없이 구분할 수 없게 됨이 도출된다. 보편적 법칙 ‘(x)A(x)’의 - 세상의 (현재, 과거, 혹은 미래) 모든 사건들이 1965년 이전에 발생한다고 서술하는 법칙 - (조건을 충족시키었거나 혹은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례 확인에도 마찬가지다; 그 법칙은 세상의 지속에 대하여 1965년을 상한선으로 만든다. 분명히 창조에 관한 근사 기간이라는 유명한 우주론적 문제도 똑같이 쉽게 다루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론에 관한 책들 안에서 아가시(Agassi)의 보편적 법칙들과 같은 보편적 법칙들을 서술한다는 것은 소용이 되지 않으리라 - 그 법칙들의 높은 사례 확인에도 불구하고.
시험가능성(Testability)의 마지막 쪽들에서 카르납은 ‘모든 정신이... 우주에서 소멸된다 할지라도, 별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길을 계속 갈 텐데’라는 문장을 토론했다. 루이스(Lewis)와 슐릭(Schlick)은 이 문장이 검증될 수 없다고 올바르게 주장했다; 그래서 카르납은, 잘 확인된 보편적 법칙들에 그 문장이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장이 완전히 합법적인 과학적
??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4부의 주석 7 및 8, 그리고 78부의 주석 1 참조; 그리고 시험가능성(Testability), 19쪽 23부의 주석 2. 또한 위 주석 24 이하 참조.
?? 확률(Probability), 575쪽.
??a (교정 시에 추가됨.) 넬슨 굿맨(Nelson Goodman) 교수는, 그에게 내가 이 논문의 등사판 사본을 보냈는데, 이 역설의 발견과 내가 여기서 ‘아가시-술어’로 불렀던 것의 발견에서 자신이 아가시(Agassi) 박사를 앞선다고 나에게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굿맨의 사실, 허구, 그리고 예언(Fact, Fiction, & Forecast), 1955년, 74쪽 이하 참조.
주장이라고 똑같이 올바르게 (내가 생각하기에) 대답했다. 그러나 지금쯤, 보편적 법칙들은 제거하기 쉽게 되었다; 그러나 보편적 법칙들 없이는 문제의 문장이 도저히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사람들은 아가시(Agassi)의 논증으로부터 문제의 문장을 부정하는 문장은 최대한으로 확인될 수 있음을 쉽게 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한 가지 경우를 - 자연 법칙들의 위상 - 카르납의 확인 분석들이, 그리고 그것과 함께 그의 구획 기준이, 부적당하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나의 주요 논증으로서 이용할 의도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여 자연 법칙들의 경우와 완전히 독립적인 논증들을, 그 논증들로 인하여 우리가 왜 이 부적당함이 카르납의 이론에서 출현하게 되어 있는지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을지라도, 제시하는 데로 이제 나아간다.
나의 비판에 대한 금언으로서 나는 아래 카르납의 도전적인 구절을 생각한다:??
‘... 또 다른 방법이, 예를 들어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대한 새로운 정의(定義), 특정한 경우들에서 c*에 의하여 제공되는 숫자적 가치들보다 더 합당한 숫자적 가치들을 초래함이 밝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중요한 비판이 되리라. 혹은 어떤 사람이... 합당한 설명항(explicatum)이 틀림없이 어떤 요건을 충족함과, c*가 그 요건을 충족시키지 않음을 밝힌다면, 그것은 아마도 더 나은 해결책을 향한 도움이 되는 최초의 걸음이 될 것이다.
나는 이 도전의 양쪽 대안 모두를 수용하겠지만 그 대안들의 순서를 뒤집을 것이다: (1) 나는 확인의 합당한 개념이 확률 계산법의 전통적인 규칙들을 충족시킬 수 없음을 밝히겠다. (2) 나는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대한 대안적 정의(定義)를 내놓겠다.
마지막으로 나는 (3) 카르납의 확인 이론이 (a) 무한 소급과 (b) 같은 술어들을 지닌 모든 원자 문장들(atomic sentences)의 상호 의존에 관한 선험적 이론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임을 밝히겠다.
(1) 우선 나는 우리가 논리적 확률 (확률1)과 상대적 빈도 (확률2) 뿐만 아니라, 카르납이 하는 바와 같이,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개념들을 - 세 번째 개념은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이다 - 구분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확실히, 처음 제안으로서 이것에는 반대의견이 제시될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적당한 조사 이후에, 논리적 확률이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대한 피설명항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결정할 수 있으리라. 카르납은, 불행히도, 그 문제를 예단한다. 그는, 더 토론하지 않고, 나의 옛 책의 경고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두 가지 확률 개념들의 구분이 충분하다고 상정(想定)한다.
확인은, 카르납 자신이 이 개념을 이해하는 바와 같이, 논리적 확률일 리가 없음이 밝혀질 수 있다. 나는 세 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 확률(Probability), 563쪽 110부.
??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79부 이전: ‘가설의 “확률”을 토론하는 대신에 우리는 그 가설이 얼마나 입증되었는지를 [혹은 확인되었는지]... 평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혹은 82부: ‘가설의 입증도(立證度: degree of corroboration)를 결정하는 것은 입증하는 [확인하는] 사례들의 숫자라기보다는 문제의 가설이... 종속되었던 다양한 시험들의 엄격성임을 이것은 보여준다. [이것은] 그 자체로 가설의... 시험가능도(試驗可能度: the degree of testability)에 의존한다...’ 그리고 83부: ‘이론은 더 잘 시험 가능할수록 그만큼 더 잘 입증될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시험가능성은 논리적 확률에... 반대가 된다...’
(a)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확률’이라고 부를 종류의 것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그 까닭은 우리 두 사람이 확률 계산 법칙들을 충족시키는 것을 ‘확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더욱 특히, 카르납은 논리적 확률1의 개념에 대하여 그 확률이 어떤 공리(公理) 체계와, 여하한 경우에도 (특별한) 덧셈 원리 및 (일반적인) 곱셈 원리를 충족시킨다고 말한다.?? 이제 그것은 서술이 많이 주장할수록 그 서술의 개연성은 그만큼 적어진다는 후자(後者)의 기초적 결과이다. 이것은 주어진 증거 y를 토대로 한 문장 x의 논리적 확률이 x의 정보성 내용이 증가할 때 감소한다고 말함으로써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도의 확률이 과학의 목표들 중 한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밝히기에 충분하다. 그 까닭은 과학자란 높은 내용을 지닌 이론들에 매우 흥미를 갖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고도로 개연적인 하찮은 것들을 좋아하지 않고 대담하고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는 (그리고 엄격하게 시험되는) 가설들을 좋아한다. (카르납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 높은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가 과학에서 우리가 겨냥하는 것들 중의 하나라면,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는 확률과 동일시될 수 없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나 높은 확률이 과학의 목표라면, 과학자들은 가능한 한 적게 말을 해야 하고, 가급적이면 동어반복만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목표는 과학을 ‘진보시키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과학의 내용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과학의 확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편적 법칙들의 높은 내용을 참작하면, 그 법칙들의 확률이 영(零: zero)임을 발견하는 일이 놀랍지도 않고, 과학은 높은 확률을 겨냥해야 한다고 믿는 저 철학자들이 이것들과 같은 그런 사실들을 공정히 취급하지 못함을 발견하는 것도 놀랍지 않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에 의하여 보편적 법칙들의 언명이 (그리고 시험)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간주된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 혹은 과학의 상호주관적인 시험가능성이 이 법칙들에 달려있다는 것 (내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의 8부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금까지 언급된 것을 고찰하면 합당하게 정의(定義)된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는 확률을 위한 일반적인 곱셈 원리를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이 분명하다.??
?? 정신(Mind), 1938년, 47호, 275쪽 이하의 주석에서, 나는 ‘다양한 해석들 중 어떤 해석에 의하여 해석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확률을 위한 ‘공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나는 말했는데, 그 다양한 해석들 중에서 ‘세 가지 가장 많이 토론되는 것은: (1) 동등하게 가능한 경우들에 대한 선호되는 것의 비율로서 확률의 고전적 정의(定義). (2) 빈도 이론... (3) 확률을 문장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의 정도(程度)로서 해석하는, 논리적 이론...’ (나는 이 구분을 (2)와 (3)의 순서를 뒤바꾸어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의 48부로부터 가져왔다 (원문에 닫힌 괄호가 누락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괄호가 닫혀야 될 것이다. - 역자 주). 유사한 구분이 확률(Probability), 24쪽에서 발견될 수 있다. 나의 정신(Mind) 주석에서의 확률 함수의 논증들에 대한 토론을 확률(Probability)의 10부, A 및 B, 그리고 52부와 대조하라. 이 주석에서 나는 이후 내가 많이 단순화한 독립적인 형식적 공리 체계를 내놓았다. 그 체계는 1955년, 영국과학철학회보(B.J.P.S.) 6호, 53쪽에 발표되었다. (나의 정신[Mind] 주석은 이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320-2쪽에 재수록 되었다.)
?? 확률(Probability), 53부, 285쪽; 또한 62부, 337이하 또한 참조.
?? 이것은 ‘내용 조건’과 대등하다 (위의 주석 63 참조). 카르납이 이 조건을 무효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확률[Probability], 87부, 474쪽 ‘귀결 조건’), 내가 믿기에 그는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가 ‘정식 확인 함수(regular confirmation function)’, 다시 말해서 확률1일 리가 없음을 동의하게 된다.
??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396-8쪽의 나의 주석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의 4-5부 참조. Y. 바힐렐(Bar-Hillel) 박사는 나의 보기 몇 가지가 카르납에 의하여 확률(Probability), 71부, 394쪽 이하 3b의 경우에 의하여 예측되었다는 사실에 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카르납은 내가 내놓은 보기들로부터 내용 조건은 (위의 주석 63 및 77 참조) ‘무효’라고 추론하지만, 모든 ‘정식 확인 함수들’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추론하는 데는 실패한다.
요점 (a)를 요약하여. 우리는 과학에서 높은 내용을 겨냥하기 때문에, 우리는 높은 확률을 겨냥하지 않는다.
(b) 서술이나 이론에 대하여 가능한 시험들의 엄격성은 (다른 요인들 가운데서) 그것이 주장하는 것에, 그리고 그것의 예언력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의 정보성 내용에 (그 정보성 내용은 이 두 가지 요인에 따라서 증가한다). 이것은 서술의 시험가능도(the degree of testability of a statement)는 서술의 내용과 따라서 증가한다고 말함으로서 표현될 것이다. 그러나 서술은 더 잘 시험될 수 있을수록 더 잘 확인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서술에 대한 시험들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술을 확인하는 기회들은, 그리고 따라서 서술의 확인가능성 즉, 입증가능성 즉, 증명가능성의 정도(程度: degree)는 서술의 시험가능성에 따라서, 그리고 서술의 내용에 따라서 증가함을 발견한다.??
요점 (b)를 요약하여. 우리가 높은 정도의 확인을 (또는 입증) 원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높은 내용이 (그리하여 낮은 절대 확률) 필요하다.
(c) 확인을 확률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높은 정도의 확률이 바람직하다고 틀림없이 믿는다. 그들은 함축적으로 이 규칙을 수용한다: ‘항상 가장 개연적인 가설을 선택하라!’
이제 이 규칙이 다음 규칙과 대등하다는 것이 쉽게 밝혀질 수 있다: ‘증거를 가장 적게 넘어서는 가설을 항상 선택하라!’ 그리고 이것은 그 자체로 ‘가장 낮은 내용을 지닌 (당신의 과제 한계 안에서, 예를 들어, 당신의 예측 과제) 가설을 항상 수용하라!’ 뿐만 아니라, ‘가장 높은 정도의 임시방편적 특성을 지닌 (당신의 과제 한계 안에서) 가설을 항상 선택하라!’에 대등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이것은 고도로 개연적인 가설은 알려진 사실들에 들어맞으며 가능한 한 그 사실들을 적게 넘어서는 가설이라는 사실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나 임시방편적 가설들은 과학자들에 의하여 혐오의 대상임은 잘 알려져 있다: 그 가설들은, 기껏해야, 임시대용물이지 진정한 목표가 아니다. (과학자들은 대담한 가설이 더 엄격하게 시험될 수 있고,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기 때문에 대담한 가설을 선호한다.)
요점 (c)를 요약하여. 높은 확률을 겨냥하는 것은 임시방편적 가설들을 선호하는 반(反)-직감적 규칙을 포함한다.
이 세 가지 논증은 내 자신의 관점을 예시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확인하는 사례(a confirming instance) 안에서 엄격한 시험의 결과를, 혹은 이론에 대한 시도된 (그러나 성공적이지 못한) 논박의 결과를 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엄격한 시험들을 찾지 않고, 오히려 ‘검증’이라는 옛 개념의 의미에서 (혹은 그것의 약화된 의미에서) ‘확인’을 찾는 사람들은 확인가능성의 다른 개념에 도달한다: 문장은 더 거의 검증될 수 있을수록, 혹은 더 거의 관찰 문장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을수록 더 많이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보편적 법칙들은 (우리의 분석에서와 같이) 고도로 확인 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의 높은 내용 때문에 그 법칙들의 확인가능성은 영(零: zero)일 것임이 분명하다.
(2) 확인에 대하여 더 나은 정의(定義)를 구축하는 도전을 수용하면서, 나는 먼저 내가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정의(定義)를 내놓는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음을 말하고 싶다. 내가 지닌 이유는 매우 기술적으로 그리고 그 이론을 논박하려는 충실한 노력으로 시험된 이론은 느슨하게 시험된
?? 더 완벽한 논증을 위하여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82부 이하 참조.
이론보다 더 높은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를 지닐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정교하고 충실한 시험으로써 우리가 의미하는 것을 완전히 형식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대한 합당한 정의(定義)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견해로 가능한 최상의 정의[定義]를 내는, 만약 있다면, 중요성은 그런 정의[定義]가 귀납 이론들인 체하는 모든 확률 이론들의 부당함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나는 다른 곳에서 내가 합당하게 적절한 정의(定義)라고 여기는 것을 내놓았다.?? 나는 여기서 다소 더 간단한 정의(定義)를 내놓을 것이다 (그 정의[定義]는 동일한 여러 요건[desiderata]이나 적절성의 조건들을 충족시킨다):
C(x,y
여기서 ‘C(x,y)’는, ‘p(x,y)’ 및 ‘p(x)’가 각각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확률인 반면, ‘y에 의한 x의 확인도’를 의미한다. 그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이 상대화될 수 있다:
C(x,y,z
여기서 y는 (새로운) 설명적 가설인 x를 확인한다고 주장될 저 (새로운) 관찰성 결과들을 (z로부터 제외된) 대표하는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 반면, z는, 우리가 원한다면, 수용된 이론들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배경 지식’으로서 (옛 증거, 그리고 옛 초기 조건들 및 새로운 초기 조건들) 생각되어야 한다.??
나의 정의(定義)는, 다른 적절성의 조건들 가운데,?? 서술의 확인가능성은 - 서술의 가능한 최고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 - 그 서술의 내용과 (다시 말해서 그 서술의 시험가능도[the degree of its testability]) 동일하다는 조건을 충족시킨다.
이 개념의 또 다른 중요한 속성은, (시험-사례의 비개연성에 의하여 측정되는) 시험의 엄격성은 이론의 결과적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거의 추가적 영향을 미친다는 조건을 그 개념이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적어도 직감적 요구들 중 몇 가지 요구가 충족됨을 보여준다.
나의 정의(定義)는 임시변통적 가설들을 자동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지만, 임시변통적 가설들을 배제하는 규칙과 결합된다면 매우 합리적인 결과들을 내놓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 주석 78에서 언급된 나의 기록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의 끝부분 참조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402쪽).
??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 395쪽 이하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 402쪽의 나의 다음 말과 비교하라: ‘C(x,y)가 여기서 정의(定義)되는 특정 방식을 나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중요할 것은 여러 요건(desiderata)과, 그 요건들이 함께 충족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다시 말해서, 전체 증거 e는 y 및 z로 분할될 수 있다; 그리고 y와 z는, 이용 가능한 전체 증거를 토대로, C(x,y,z)에게 x에 대하여 가능한 최고의 값을 주는 것으로 그렇게 선택되어야 한다.
?? 문제의 주석에서 ‘여러 요건(desiderata)’으로 불렸다. 케미니(Kemeny)는 적절성의 조건들이 설명항(explicatum)에 들어맞도록 도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올바르게 강조했다. 이것이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아마도 내가 이제 나의 여러 요건(desiderata)을 바꾸지 않고도 나의 정의(定義)를 (그 정의[定義]를 단순화함으로써) 개선했다는 사실에 의하여 가장 잘 증명된다.
?? 임시방편적 가설들을 배제하기 위한 규칙은 아래의 형태를 취할 것이다: 가설은 증거나, 혹은 그 증거의 연접 요소도 반복해서는 안 된다 (완전히 일반화된 형태로는 제외하고). 다시 말해서 x = ‘이 백조는 희다’는, ‘모든 백조는 희다’가 수용될 수 있으리라 할지라도, 증거 y = ‘이 백조는 희다’를 설명하는 가설로서 수용될 수 없다; 그래서 y에 대한 설명 x는 y의 (비과잉적) 연접 요소에 관하여 이 의미에서 순환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위와, 확률[Probability], 110부 H, 특히 575쪽 참조) 카르납은 보편적 법칙들 없이도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믿는 반면, 보편적 법칙들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서 강조함을 초래한다.
내 자신의 현재 실증적 이론에 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그 이론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를 상당히 초월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결정적인 과제로 돌아가야 한다: 나의 실증적 이론이, 카르납에 의하여 철저히 포기되지 않은 - 나의 비판에 쏟아진 주시에서 불구하고 - 검증주의적이자 귀납주의적인 접근방식에 오류가 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귀납적 논리는 불가능하다. 나는 이것을 (나의 옛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 따라서) 나의 마지막 결정적인 요점으로서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3) 나는,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귀납적 논리가 틀림없이 (a) (흄[Hume]에 의하여 발견된) 무한 소급이나, 혹은 (b) 어떤 종합적 원리를 선험적으로 유효한 것으로서 수용하는 것을 (칸트와 함께)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카르납의 귀납 이론이 (a)와 (b)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비판될 수 있다는 강력한 의심을 갖고 있다.
(a) 귀납을 개연적으로서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연의 통일성 원리와 같은 (개연적인) 귀납의 원리가 필요하다면, 우리에게는 첫 번째 원리의 귀납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두 번째 그런 원리가 또한 필요하다. 카르납은, ‘귀납의 전제’??를 다룬 부에서 통일성 원리를 도입한다. 그는 소급에 대한 반대의견을 언급하지 않지만, 자신의 세부 설명에 있는 말은 자신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가리키는듯하다: ‘반대자는 통일성의 확률에 대한 서술이 사실적 서술로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아마도 말하리라.... 우리의 답변은:... 이 서술 자체가 분석적이다’라고 그는 쓴다 (181쪽). 나는 카르납의 논증에 의하여 전혀 확신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정당화와 귀납적 방법의 전제에 관한
?? 확률(Probability), 41부, F., 177쪽 이하, 특히 179 및 181쪽.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로부터의 구절들에 대하여, 1부, 28쪽 이하, 그리고 81부, 263쪽 이하.
전체 문제’가 ‘보다 정확한, 기술적 용어들로’ 나중의 책에서 다루어질 것이라고 그가 지적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 그런 통일성 원리가 분석적이 될 리가 없다는 (특수한 의미에서 ‘분석적’임을 제외하고) 증거를 제시하려는 나의 욕망을 억제함이 아마도 더 낫다; 특히 요점 (b)에 대한 나의 토론이 아마도 이런 중류의 증거가 아마도 나아갈 방향을 가리킬 것이기 때문에.
(b) 자연 법칙들은, 더 일반적으로, 과학적 이론들은, 인과적 특징을 지녔든 통계적 특징을 지녔든, 어떤 의존에 관한 가설들이다. 그 사건들의 순전히 논리적인 관계들에 관한 한 그 사건들이 독립적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개괄적으로 말해서, 특정 사건들이 (혹은 그 사건들을 기술[記述]하는 서술들) 다른 사건들과 실제로 독립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처음에 상정(想定)하여, 완전히 연결되지 않고 (가령 ‘천키는 영리하다[Chunky is clever]’와 ‘샌디는 영리하다[Sandy is clever]’), 두 가지 서술 x와 y에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두 가지 가능한 사실들을 생각하자. 그렇다면 누군가가 그들이 연관이 되어 있다고 (천키는 샌디의 친척이라고) - 아마도 실수로 - 추측할 것이다; 그리고 정보나 증거인 y가 x의 확률을 증가시킨다고. 그가 틀렸다면, 다시 말해서, x와 y가 독립적이라면, 우리는
(1) p(x,y) = p(x)를 가지는데
그것은
(2) p(x,y) = p(x)p(y)와 대등하다
이것은 독립성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定義)이다.
사건들이 연결되어 있다거나 상호-의존적이라는 추측이 옳다면, 우리는
(3) p(x,y) > p(x)를 갖는데
다시 말해서, 정보 y는 x의 확률을 그 ‘절대적’이거나 ‘초기의’ 값 p(x) 이상으로 올린다.
사건들의 상호-의존이나 상관관계에 관한 그런 추측은, 그 추측을 가능한 한 고도로 시험 가능하도록 만들 목표를 지니고, 처음에는 신중한 언명의 과정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엄격한 경험적 시험들에 제출되도록 별개의 가설로서, 혹은 자연 법칙으로서 (‘영리함은 혈통에 있다’) 언명되어야 한다고 - 대부분의 경험주의자들이 믿는 바와 같이 - 나는 믿는다.
카르납은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는 ‘샌디는 영리하다’라는 증거가 개체 A에 대하여 - ‘A’가 고양이, 개, 사과, 테니스공의 이름이든 성당의 이름이든 관계없이 - ‘A는 영리하다’의 확률을 증가시킨다는 결과로 우리가 원리를 (개연적으로서) 수용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한다. 이것은 그가 제안하는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에 관한 정의(定義)의 결과이다. 이 정의(定義)에 따라서, 동일한 술어와 (‘영리한[clever]’이나 ‘아픈[sick]’) 다른 주어들을 갖는 두 가지 문장들은, 주어들이 무엇이든지간에, 그리고 그 주어들이 세상 어디에 자리 잡고 있든, 상호-의존적이거나 확실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그의 통일성 원리의 실제적 내용이다.
나는 그가 자신의 이론이 초래한 이 결과들을 깨달았는지 결코 확신하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그가 어디에서도 그 결과들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λ라고 부르는 보편적 매개변수를 도입한다; 그리고 λ + 1은, 간단한 수학적 계산을 토대로, 동일한 술어와 다른 주어들을 지닌 두 가지 문장에 관하여 ‘논리적 상관 계수’??의 역수(逆數: reciprocal)로 판명된다.?? (λ가 무한하다는 상정[想定]은 독립성의 상정[想定]과 일치한다.)
카르납에 따르면, 확률1 함수에 대한 우리의 정의(定義)를 선택하기를 우리가 원할 때 우리는 λ의 유한값을 선택하게 되어있다. λ의 선택과, 그 선택과 함께 동일한 술어를 지닌 두 가지 문장 사이의 상관 정도(相關 程度: the degree of correlation)의 선택은, 그리하여 ‘결정’이나 ‘규약’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확률의 정의(定義)의 선택. 그러므로 λ의 선택에는 세상에 관한
?? x와 y의 ‘논리적 상관 계수’는 (p(xy) - p(x)p(y))/(p(x)p(y)p(x(-))p(y(-)))½로서 정의(定義)될 수 있다. 모든 (‘정식’) 확률 함수로서 이 공식을 수용함은, 그 안에서 모든 원자 문장들이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특별한 확률 함수를 위하여, 케미니(Kemeny)와 오펜하임(Oppenheim)의 ‘실제적 지지도(Degree of Factual Support)’, 과학 철학(Philos. of Sci.), 19호, 314쪽, 공식 (7)에 만들어진 제안을 다소 일반화한 것을 의미한다. (우연히도 이 특별 함수가 합당한 유일한 함수라고 나는 생각한다.)
?? 우리는 예를 들어, 방법(Methods), 30쪽의 공식 (9-8)을 생각하고, s = sM = 1; w/k = c(x) = c(x(-)) = c(y)로 표현하고; 그리고 ‘c(hM.eM)’을 ‘c(x,y)’로 갈음함으로써 이것을 증명할 수 있다. 우리는 λ = c(x(-)y)/(c(xy) - c(x)c(y))를 얻는데, 그것은 λ가 의존도(dependence-measure)의 역수(逆數)임을 밝히며,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1/(λ + 1) = (c(xy) - c(x)c(y))/c(x(-))c(y)를 얻는데 그것은, c(x) = c(x(-)) = c(y)와 같이, 논리적 상관 계수이다. - 내가 ‘의존(dependence)’이라는 용어를 케인즈(Keynes)와 카르납(Carnap)의 용어 ‘관련(relevance)’보다 선호한다고 나는 여기서 아마도 말할 것이다: (카르납처럼) 확률을 일반화된 연역적 논리로서 바라보면서, 나는 확률주의적 의존을 논리적 의존의 일반화로서 생각한다.
서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λ에 대한 우리의 선택이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의존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주장과 대등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선택은, 각각이 세상에서 같은 술어들을 지닌 두 가지 사건들의 동일한 의존도(degree of dependence)를 주장하면서, 술어들이 있는 것만큼 그렇게 많은 자연 법칙들의 수용과 대등하다. 그리고 세상에 관한 그런 상정(想定)은 시험될 수 없는 행동의 형태로 - 정의(定義)의 도입 - 이루어지기 때문에 포함된 선험론(apriorism)의 요소가 있는 듯이 나에게 보인다.
언급된 의존성들이 정의(定義)의 결과이고 (확률이나 확인도[確認度: degree of confirmation]의 결과), 그 결과는 규약이나 ‘결정’에 의존하여 그러므로 분석적이기 때문에 여기에 선험론(apriorism)이 없다고 사람들은 아마도 여전히 말할 것이다. 그러나 카르납은 이 견해에 들어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확인 함수를 자신이 선택하는 데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내놓는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두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확인 함수가,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철저히 부적절하지는 않은’ 유일한 확인 함수라는 (제시되는 것들 중에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의심받지 않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 (혹은 해설하는 데) 부적절한. 이제 이 사실은 경험적이다; 그 적절성이 이 사실을 설명하거나 이 사실과 결합되는 능력에 의하여 판단되는 이론은 분석적인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λ 선택을 지지하는 카르납의 논증은 (그 논증이 선험론[apriorism]이라고 나는 의심하고 있다) 칸트나 러셀이나, 혹은 제프리즈(Jeffreys)의 논증과 동일함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 논증은 칸트가 ‘선험적(transcendental)’ 논증으로 (‘지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불렀던 것으로, 우리에게 경험적 지식이 있다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 중 두 번째 이유는 합당한 λ의 채택은 (무한한 λ는 독립성과 대등하기 때문에, 무한하지도 않고 영[零: zero]도 아닌 합당한 λ) 거의 모든 세계에서 (모든 개체들이 독립적이거나 같은 속성들을 지닌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들에서는 제외하고) 더
?? 확률(Probability), 110부, 565쪽; 방법(Methods), 18부, 53쪽과 비교할 것.
성공적이리라는 것이다. 이 모든 이유들은, λ의 선택이, 다시 말해서 확인 함수의 선택이 이 세상에서 그 선택의 성공에, 혹은 그 선택의 성공 확률에 의존할 것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나에게 보인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그 선택은 - 정의(定義)의 선택에 관한 ‘결정’이기도 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 분석적은 아니리라. 이것이 어떻게 그러할지는 설명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한다면, ‘진리(truth)’라는 단어를 그 단어가 우리가 보통 ‘거짓(false)’이라고 부르는 저 서술들 몇 가지를 포함하도록 정의(定義)할 수 있다. 유사하게 우리는 터무니없는 서술들이 ‘높은 확률’을 지니도록 ‘개연적인(probable)’이나 ‘확인된(confirmed)’을 정의(定義)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이 정의(定義)들을 ‘합당한 해설들’로서 생각하지 않는다면, 순전히 규약적이거나 언어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문제는 더 이상 규약적이거나 분석적이 아니다. 그 까닭은 우연한 사건 혹은 사실적 서술 x에 대하여 그것이, ‘참(true)’이라는 단어의 합당한 의미에서,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적 서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x는 (지금) 고도로 개연적이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x는 y에 강력하게 의존한다’와 ‘x는 y에 독립적이다’에 - 그 서술들의 운명이 우리가 λ를 선택할 때 결정되는 서술들 -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λ의 선택은 그러므로 정말로, 세상의 일반적인 상호의존성이나 통일성에 관한, 언명되지는 않지만 포괄적인 서술을 채택하는 선택과 대등하다.
그러나 이 서술은 경험적 증거 없이 채택된다. 정말로 카르납은 우리가 이 서술을 채택하지 않고는 경험적 증거로부터 배울 수 없다고 (자신의 지식 이론에 따라서) 밝힌다.?? 그러므로 경험적 증거는 유한한 λ를 채택하기 이전에는 중요하지도 않고 중요할리도 없다. 이것이 유한한 λ가 선험적으로 채택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충분한 경험적 토대가 없는 사실적 (종합적) 문장의 단언에 의해서거나, 또는 특정 사실적 문장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경험적 토대가 필요하지 않다고 그 단언이 주장할 때 선험론(apriorism)의 단언에 의해서만, 경험주의의 원리가 위배될 수 있다’고 카르납은 또 다른 문맥에서 쓴다.?? 여기서 우리가 관찰한 것은 경험주의 원리를 위배하는 세 번째 방법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귀납의 원리 - 세상은 사람들이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장소임을 (또는 매우 개연적으로 그런 장소임) 실제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원리 - 없이는 일을 해나갈 수 없는 지식 이론을 구축함으로써 경험주의의 원리가 어떻게 위배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세상이 미래에도 그렇게 남을 것이라고 (매우 개연적으로 그렇게 남을 것) 실제로 우리에게 말해주는 원리. 이런 우주론적 원리가 순수한 논리의 원리가 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 원리가 그런 방식으로 도입되어서 경험에도 근거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 원리는 선험적 형이상학 외에는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듯이 나에게 보인다.
λ의 종합적이고 사실적인 특징만이, 주어진 세상에서 λ의 어느 가치가 매우 성공적인지를 우리가 시험할 것이라는 카르납의 제안을 설명할 수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유한한 λ의 사전 채택 없이는 경험적 증거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시행착오의 방식에 의하여 선택된 λ를 시험하는 데에 대한 분명한 절차는 있을 리가 없다. 내 자신의 느낌은 내가 어떤 경우에도 시행착오의 방식을, 상호주관적인 과학에 관하여 필수적인 보편적 법칙들에 적용하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 법칙들은 명백하고도 확실하게 사실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법칙들을, 오류로 발견될 수 있는 저 모든 이론들 제거할 목표로, 엄격하게 시험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에 성공할 것이다.
나는 이 문제들을 나의 머리에서 - 물리주의자들이 아마도 말할 것처럼, 나의 가슴으로부터 - 떨쳐버릴 기회가 주어져서 기쁘다. 티롤(Tyrol)에서 또 다른 휴가를 갖게 되어 의미론적 유성(Semantische Schnuppe)의 언덕을 오르게 되면 카르납과 나는 이 요점들 대부분에 동의하는 데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우리 두 사람 모두가, 내가 믿기에, 이성주의자들의 우정 - 논증하여 서로로부터 배우려고 열심인 사람들의 우정 -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 사이의 물리적 격차가 좁혀질 수 없어 보이기 때문에 나는 지금 바다를 건너 그에게 - 곧 내가 되돌려 받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 나의 이 최고로 비판적인 화살들을 쏘아 보낸다, 나의 형제적 존경과 함께.
?? 확률(Probability), 110부, 556쪽.
?? 확률(Probability), 10부, 31쪽.
-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
REFUTATIONS
I think, Socrates, as presumably you do yourself, that in this life it is either altogether beyond our powers, or at least very difficult, to attain certain knowledge about matters such as these. And yet a man would be a coward if he did not try with all his might to refute every argument about them, refusing to give up before he has worn himself out by examining them from all sides. For he must do one of two things: either he must learn or discover, the truth about these matters, or if that is beyond his powers, he must grasp whatever human theory seems to him to be the best, and to offer the hardest resistance to refutation; and, mounting on it as upon a raft, he must venture into danger and sail upon it through life, unless he can mount on something stronger, less dangerous, and more trustworthy...
PLATO
11
THE DEMARCATION BETWEEN SCIENCE AND METAPHYSICS
Summary
PUT in a nut-shell, my thesis amounts to this. The repeated attempts made by Rudolf Carnap to show that the demarcation between science and metaphysics coincides with that between sense and nonsense have failed. The reason is that the positivistic concept of 'meaning' or 'sense' (or of verifiability, or of inductive confirmability, etc.) is inappropriate for achieving this demarcation - simply because metaphysics need not be meaningless even though it is not science. In all its variants demarcation by meaninglessness had tended to be at the same time too narrow and too wide: as against all intentions and all claims, it has tended to exclude scientific theories as meaningless, while failing to exclude even that part of metaphysics which is known as 'rational theology'.
1. INTRODUCTION
WRITING about Carnap - and in criticism of Carnap - brings back to my mind the time when I first met him, at his Seminar, in 1928 or 1929. It brings back even more vividly a later occasion, in 1932, in the beautiful Tyrolese hills, when I had the opportunity of spending part of my holidays in prolonged critical discussions with Carnap and with Herbert Feigl, in the company of our wives. We had a happy time, with plenty of sunshine, and I think we all tremendously enjoyed these long and fascination talks, interspersed with a little
A paper contributed in January 1955 to the volume, The Philosophy of Rudolf Carnap, published in 1964 in the Library of Living Philosophers, ed. P. A. Schilpp. It has been, with the permission of Professor Schilpp, distributed in a stencilled version since June 1956. Apart from small stylistic corrections, I have made no changes in the text, although, in the years since it was written, I have further developed a number of points in various publications; see especially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appendix *iv, especially pp. 390 f.: the appendix to chapter 10 of the present volume; an article in Dialectica, 11, 1957, pp. 354-374; two Notes in Mind, 71, 1962, pp. 69-73, and 76, 1967, pp. 103-110; and I. Lakatos (editor), The Problem of Inductive Logic, 1968. See also Lakatos's and Watkins's contributions to that volume.
climbing but never interrupted by it. None of us will ever forget, I am sure, how Carnap once led us in a steep climb up a trackless hill, through a beautiful and almost impenetrable thicket of alpine rhododendrons; and how he led us, at the same time, through a beautiful and almost impenetrable thicket of arguments whose topic induced Feigl to christen our hill 'Semantische Schnuppe' (something like 'Semantical Shooting Star') - though several years had to elapse before Carnap, stimulated by Tarski's criticism, discovered the track which led him from Logical Syntax to Semantics.?
I found in Carnap not only one of the most captivating persons I had ever met but also a thinker utterly absorbed in, and devoted to, his problems, and eager to listen to criticism. And indeed, among some other characteristics which Carnap shares with Bertrand Russel - whose influence upon Carnap and upon us all was greater than anyone else's - is his intellectual courage in changing in his mind, under the influence of criticism, even on points of fundamental importance to his philosophy.
I had come to the Tyrol with the manuscript of a large book, entitled 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rkenntnistheorie ('The Two Fundamental Problems of Epistemology'). It is still unpublished, but an English translation may appear one day; parts of it were later incorporated, in a much abbreviated form, in my Logik der Forschung. The 'two problems' were the problems of induction and of demarcation - the demarcation between science and metaphysics. The book contained, among much else, a fairly detailed criticism of Wittgenstein's and Carnap's doctrine of the 'elimination' or 'overthrow' (Ueberwindung?) of metaphysics through meaning-analysis. I criticized this doctrine not from a metaphysical point of view, but from the point of view of one who, interested in science, feared that this doctrine, far from defeating the supposed enemy metaphysics, in effect presented the enemy with the keys of the beleaguered city.
My criticism was directed, largely, against two books of Carnap's, Der logische Aufbau der Welt ('Aufbau', for short) and Scheinprobleme in der philosophie, and some of his articles in Erkenntnis. Carnap accepted part of it,? although he felt, as it turned out,? that I had exaggerated the differences between my views and those of the Vienna Circle of which he was a leading member.
? In 1932 Carnap used the term 'Semantics' as a synonym for 'logical syntax'; see Erkenntnis, 3, 1932, p. 177. ? See Carnap's 'Ueberwindung der Metaphysik durch logische Analyse der Sprache' ('The Overthrow of Metaphysics through Logical Analysis of Language'), Erkenntnis, 2, 1932, pp. 219 ff.
? See Carnap's generously appreciative report on certain of my views which were then still unpublished, in Erkenntnis, 3, 1932, pp. 223 to 228, and my discussion of it in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 Sc. D.), 1959, 1960 (originally published in German in 1934 as Logik der Forschung, but here always referred to as 'L. Sc. D.'), note 1 to section 29.
? See Carnap's review of my L. Sc. D. in Erkenntnis, 5, 1935, pp. 290-4, especially 293: 'By his efforts to characterize his position clearly [Popper] is led to over-emphasize the differences between his views and those... which are most closely allied to his... [Popper] is very close indeed to the point of view of the Vienna Circle. In his presentation, the differences appear much greater than they are in fact.'
This silenced me for many years,? especially as Carnap paid so much attention to my criticism in his Testability and Meaning. But I felt all the time that the differences between our views were far from being imaginary; and my feeling that they were important was much enhanced by Carnap's most recent papers and books on probability and induction.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discuss these differences, so far as they concern the problem of demarcation. It is with reluctance that I expose myself again to the charge of exaggerating differences. (But I hope that Professor Carnap won't be prevented from speaking his mind by an apprehension of silencing me for the rest of my days: I promise to be more reasonable this time.) I have, however, accepted the invitation to write this paper; and this leaves me no alternative but to try to characterize our differences as clearly and as sharply as possible. In other words, I must try to defend the thesis that these differences are real - as real as I have felt them to be for the last 25 years.
In section 2 of this paper I try to give a brief outline of some of my own views which form the basis of my criticism. In the later sections I try to trace the development - as I see it - of Carnap's views on the problem of the demarcation between science and metaphysics. My approach throughout is critical rather than historical; but I have aimed at historical accuracy, if not at historical completeness.
2. MY OWN VIEW OF THE PROBLEM
It was in 1919 that I first faced the problem of drawing a line of demarcation between those statements and systems of statements which could be properly described as belonging to empirical science, and others which might, perhaps, be described as 'pseudo-scientific' or (in certain contexts) as 'metaphysical', or which belonged, perhaps, to pure logic or to pure mathematics.
This is a problem which has agitated many philosophers since the time of Bacon, although I have never found an explicit formulation of it. The most widely accepted view was that science was characterized by its observational basis, or by its inductive method, while pseudo-sciences and metaphysics were characterized by their speculative method or, as Bacon said, by the fact that they operated with 'mental anticipations' - something very similar to hypotheses.
This view I have never been able to accept. The modern theories of physics, especially Einstein's theory (widely discussed in the year 1919), were highly speculative and abstract, and very far removed from what might be called their 'observational basis'. All attempts to show that they were more or less directly 'based on observations' were unconvincing. The same was true even of Newton's theory. Bacon had raised objections against the Copernican system on the
? I published nothing even alluding to these differences of opinion during the first ten years after the publication of my L. Sc. D. (although I alluded to them in some lectures); and next to nothing during the next ten years, i. e. until I started on the present paper - no more, at any rate, than a few critical remarks on Wittgenstein and Schlick (in my Open Society, first published in 1945; see notes 51 f, 46, 26, and 48 to ch. 11; see also chs. 2, 12, and 14 of the present volume).
ground that it 'needlessly did violence to our senses'; and in general the best physical theories always resembled what Bacon had dismissed as 'mental anticipations'.
On the other hand, many superstitious beliefs, and many rule-of-thumb procedures (for planting, etc.) to be found in popular almanacs and dream books, have had much more to do with observations, and have no doubt often been based on something like induction. Astrologers, more especially, have always claimed that their 'science' was based upon a great wealth of inductive material. This claim is, perhaps, unfounded; but I have never heard of any attempt to discredit astrologer by a critical investigation of its alleged inductive material. Nevertheless, astrology was rejected by modern science because it did not fit accepted theories and methods.
Thus there clearly was a need for a different criterion of demarcation; and I proposed (though years elapsed before I published this proposal) that the refutability or falsifiability of a theoretical system should be taken as the criterion of demarcation. According to this view, which I still uphold, a system is to be considered as scientific only if it makes assertions which may clash with observations; and a system is, in fact, tested by attempts to produce such clashes; that is to say, by attempts to refute it. Thus testability is the same as refutability, and can therefore likewise be taken as a criterion of demarcation.
This is a view of science which takes its critical approach to be its most important characteristic. Thus a scientist should look upon a theory from the point of view of whether it can be critically discussed: whether it exposes itself to criticism of all kinds; and - if it does - whether it is able to stand up to it. Newton's theory, for example, predicted deviations from Kepler's laws (due to the interactions of the planets) which had not been observed at the time. It exposed itself thereby to attempted empirical refutations whose failure meant the success of the theory. Einstein's theory was tested in a similar way. And indeed, all real tests are attempted refutations. only if a theory successfully withstands the pressure of these attempted refutations can we claim that it is confirmed or corroborated by experience.
There are, moreover, (as I found later?), degrees of testability: some theories expose themselves to possible refutations more boldly than others. For example, a theory from which we can deduce precise numerical predictions about the splitting up of the spectral lines of light emitted by atoms in magnetic fields of varying strength will be more exposed to experimental refutation than one which merely predicts that a magnetic field influences the emission of light. A theory which is more precise and more easily refutable than another will also be the more interesting one. Since it is the more daring one, it will be the one which is less probable. But it is better testable, for we can make our tests more precise and more severe. And if it stands up to severe tests it will be better confirmed, or better attested, by these tests. Thus confirmability (or attestability or corroborability) must increase with testability.
? See L. Sc. D., sections 31 to 46.
This indicates that the criterion of demarcation cannot be an absolutely sharp one but will itself have degrees. There will be well-testable theories, hardly testable theories, and non-testable theories. Those which are non-testable are of no interest to empirical scientists. They may be described as metaphysical.
Here I must again stress a point which has often been misunderstood. Perhaps I can avoid these misunderstandings if I put my point now in this way. Take a square to represent the class of all statements of a language in which we intend to formulate a science; draw a broad horizontal line, dividing it into an upper and lower half; write 'science' and 'testable' into the upper half, and 'metaphysics' and 'non-testable' into the lower: then, I hope, you will realize that I do not propose to draw the line of demarcation in such a way that it coincides with the limits of a language, leaving science inside, and banning metaphysics by excluding it from the class of meaningful statements. on the contrary: beginning with my first publication on this subject,? I stressed the fact that it would be inadequate to draw the line of demarcation between science and metaphysics so as to exclude metaphysics as nonsensical from a meaningful language.
I have indicated one of the reasons for this by saying that we must not try to draw the line too sharply. This becomes clear if we remember that most of our scientific theories originate in myths. The Copernican system, for example, was inspired by a Neo-Platonic worship of the light of the Sun who had to occupy the 'centre' because of his nobility. This indicates how myths may develop testable components. They may, in the course of discussion, become fruitful and important for science. In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 gave several examples of myths which have become most important for science, among them atomism and the corpuscular theory of light. It would hardly contribute to clarity if we were to say that these theories are nonsensical gibberish in one stage of their development, and then suddenly become good sense in another.
Another argument is the following. It may happen - and it turns out to be an important case - that a certain statement belongs to science since it is testable, while its negation turns out not to be testable, so that it must be placed below the line of demarcation. This is indeed the case with the most important and most severely testable statements - the universal laws of science. I recommended, in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that they should be expressed, for certain purposes, in a form like 'There does not exist any perpetual motion machine' (this is sometimes called 'Planck's formulation of the First Law of Thermodynamics'); that is to say, in the form of a negation of an existential statement. The corresponding existential statement - 'There exists a perpetual motion machine' - would belong, I suggested, together with 'There exists a sea-serpent' to those below the line of demarcation, as opposed to 'There is a sea-serpent now on view in the British Museum' which is well above
? See 'Ein Kriterium des empirischen Charakters theoretischer Systeme', Erkenntnis, 3, 1933, pp. 426 ff., now in L. Sc. D., pp. 312-14; see also L. Sc. D., especially sections 4 and 10.
? L. Sc. D., section 85, p. 278.
the line since it can easily be tested. But we do not know how to test an isolated purely existential assertion.
I cannot in this place argue for the adequacy of the view that isolated purely existential statements should be classed as untestable and as falling outside the scientist's range of interest.? I only wish to make clear that if this view is accepted, then it would be strange to call metaphysical statements meaningless,?? or to exclude them from our language. For if we accept the negation of an existential statement as meaningful, then we must accept the existential statement itself also as meaningful.
I have been forced to stress this point because my position has repeatedly been described as a proposal to take falsifiability or refutability as the criterion of meaning (rather than of demarcation), or as a proposal to exclude existential statements from our language, or perhaps from the language of science. Even Carnap, who discusses my position in considerable detail and reports it correctly, feels himself compelled to interpret it as a proposal to exclude metaphysical statements from some language or other.??
But it is a fact that beginning with my first publication on this subject (see note 7 above), I always dismissed the problem of meaninglessness as a pseudo-problem; and I was always opposed to the idea that it may be identified with the problem of demarcation. This is my view still.
3. CARNAP'S FIRST THEORY OF MEANINGLESSNESS
One of the theories which I had criticized in my manuscript (and later, more briefly, in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was the assertion that metaphysics was meaningless, and consisted of nonsensical pseudo-propositions. This theory?? was supposed to
? L. Sc. D., section 15. I suppose that some people found it hard to accept the view that a pure or isolated existential statement ('There exists a sea-serpent') should be called 'metaphysical', even though it might be deducible from a statement of an empirical character ('There is now a sea-serpent on view in the entrance hall of the British Museum'). But they overlooked the fact that: (a) in so far as it was so deducible, it was no longer isolated, but belonged to a testable theory, and (b) if a statement is deducible from an empirical or a scientific statement then this fact need not make it empirical or scientific. (Any tautology is so deducible.)
?? But one may perhaps find in Brouwer's theories a suggestion that a universal statement could be meaningful while its existential negation was meaningless.
?? See Testability and Meaning, section 25, p. 26; 'We may take Popper's principle of falsifiability as an example of the choice of this language' (viz. of a language that excludes existential sentences as meaningless). Carnap continues: 'Popper is however very cautious in the formulation of his... principle [of demarcation]; he does not call the [existential] sentences meaningless but only non-empirical or metaphysical.' This second part of the quotation is perfectly correct, and seems quite clear to me; but Carnap continues; 'Perhaps he[Popper] wishes to exclude existential sentences and other metaphysical sentences not from the language altogether, but only from the language of empirical science.' But why does Carnap assume that I should wish to exclude them from any language, when I have repeatedly said the opposite?
?? Carnap and the Vienna Circle attributed it to Wittgenstein, but it is much older. The theory goes back to Hobbes, at least; and in the form described below as 'condition (a)' - asserting that words purporting to denote unobservable entities cannot have any meaning - it was clearly and forcefully used by Berkeley (and other nominalists). See ch. 6; also my reference to Hume, L. Sc. D., section 4.
bring about the 'overthrow' of metaphysics, and to destroy it more radically and more effectively than any earlier anti-metaphysical philosophy. But, as I pointed out in my criticism, the theory was based on a naïve and 'naturalistic'?? view of the problem of meaningfulness; moreover its propagators, in their anxiety to oust metaphysics, failed to notice that they were throwing all scientific theories on the same scrap-heap as the 'meaningless' metaphysical theories. All this, I suggested, was a consequence of trying to destroy metaphysics instead of looking for a criterion of demarcation.
The 'naturalistic' theory (as I called it) of meaningfulness and meaninglessness in Carnap's Aufbau, which here followed Wittgenstein's Tractatus, was abandoned by Carnap long ago; it has been replaced by the more sophisticated doctrine that a given expression is a meaningful sentence in a certain (artificial) language if, and only if, it complies with the rules of formulation for well-formed formulae or sentences in that language.
In my opinion, the development from the naïve or naturalistic theory to the more sophisticated doctrine was a highly important and desirable one. But its full significance has not been appreciated, as far as I can see; apparently it has not been noticed that it simply destroys the doctrine of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It is for this reason that I am now going to discuss this development in some detail.
By the naturalistic theory of meaninglessness I mean the doctrine that every linguistic expression purporting to be an assertion is either meaningful or meaningless; not by convention, or as a result of rules which have been laid down by convention, but as a matter of actual fact, or due to its nature, just as a plant is, or is not, green in fact, or by nature, and not by conventional rules.
According to Wittgenstein's famous 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 which Carnap accepted, a sentence-like expression, or a string of words, was a meaningful sentence (or proposition) if, and only if, it satisfied the conditions (a) and (b) - or a condition (c) which will be stated later:
(a) all words which occurred in it had meaning, and
(b) all words which occurred in it fitted together properly.
According to condition (a) of the theory (which goes back to Hobbes and Berkeley) a string of words was meaningless if any word in it was meaningless. Wittgenstein formulated it in his Tractatus (6.53; italics mine): 'The right method of philosophy is this: when someone... wished to say something metaphysical, to demonstrate to him that he had given no meaning to certain signs in his proposition.' According to Hobbes and Berkeley the only way in which a meaning was given to a word was by linking (associating) the word with certain observable experiences or phenomena. Wittgenstein himself
?? Although I called the theory 'naturalistic' (I now also call it 'absolutistic' and 'essentialistic'; cp. note 18 below) for reasons which may perhaps emerge, I do not propose to argue these reasons here; for my criticism of the theory was not, and is not, that it is 'naturalistic' etc., but that it is untenable. See also the passages referred to in note 7 above.
was not explicit on this point, but Carnap was. In his Aufbau, he tried to show that all concepts used in the sciences could be defined on the basis of ('my own') observational or perceptual experience. He called such a definition of a concept its 'constitution', and the resulting system of concepts a 'constitution system'. And he asserted that metaphysical concepts could not be constituted.
Condition (b) of the theory goes back to Bertrand Russell who suggested?? that certain 'combinations of symbols', which looked like propositions, 'must be absolutely meaningless, not simply false', if certain paradoxes were to be avoided. Russell did not mean to make a proposal - that we should consider these combinations as contrary to some (partly conventional) rules for forming sentences, in order to avoid the paradoxes. Rather, he thought that he had discovered the fact that these apparently meaningful formulae expressed nothing; and that they were, in nature or in essence, meaningless pseudo-propositions. A formula like 'a is an element of a' or 'a is not an element of a' looked like a proposition (because it contained two subjects and a two-termed predicate); but it was not a genuine proposition (or sentence) because a formula of the form 'x is an element of y' could be a proposition only if x was one type-level lower than y - a condition which obviously could not be satisfied if the same symbol, 'a', was to be substituted for both, 'x' and 'y'.
This showed that a disregard of the type-level of words (or of the entities designated by them) could make sentence-like expressions meaningless; and according to Wittgenstein's Tractatus and, more explicitly, Carnap's Aufbau, this confusion was a major source of metaphysical nonsense, i. e. of the offering of pseudo-propositions for propositions. It was called 'confusion of spheres' in the Aufbau;?? it is the same kind of confusion which nowadays is often called a 'category mistake'.?? According to the Aufbau, for example, 'my own' experiences ('das Eigenpsychische'); physical bodies; and the experiences of others ('das Fremdpsychische'), all belong to different spheres or types or categories, and a confusion of these must lead to pseudo-propositions and to pseudo- problems. (Carnap describes the difference between physical and psychological entities as one between 'two types of order'?? subsisting within one kind or range of ultimate entities, which leads him to a solution of the body-mind problem on the lines of 'neutral monism'.)
The outline just given of the 'naïve' or 'naturalistic' theory?? of
?? See, for example, Principia Mathematica, 2nd edn., p. 77.
?? 'Sphaerenvermengung'; see Aufbau, section 30 f.; the 'Sphaere' is identified with the logical type in section 180, p. 254.
?? See G. Ryle, The Concept of Mind, 1949. This use of the expression 'category' may be traced back to Husserl's term 'semantical category' ('Bedeutungskategorie'); see his Logische Untersuchungen, 2, part I (2nd edn.), 1913, pp. 13, 318. Examples of category mistakes given by Husserl are: 'green is or' (p. 54); 'a round or'; 'a man and is' (p. 334). Compare Wittgenstein's example: 'Socrates is identical'. For a criticism of the theory of category mistakes, see chs. 12 f., below; also J. J. C. Smart's very striking 'A Note on Categories', B. J. P. S., 4, 1953, pp. 227 f.
?? 'Ordungsformen'; see Aufbau, section 162, p. 224; see also the bibliography, p. 225.
?? At present I should be inclined to call it an 'essentialist' theory, in accordance with my book The Poverty of Historicism, section 10, and my Open Society, especially ch. 11.
meaningful and meaningless linguistic expressions covers only one side of this theory. There is another side to it: the so-called 'verifiability criterion' which may be formulated as the condition (c):
(c) an alleged proposition (or sentence) is genuine if, and only if, it is a truth function of, or reducible to, elementary (or atomic) propositions expressing observations or perceptions.
In other words, it is meaningful if, and only if, it is so related to some observation sentences that its truth follows from the truth of these observation sentences. 'It is certain', Carnap writes,?? 'that a string of words has meaning only if its derivability relations from protocol-sentences [observation sentences] are given...'; that is to say, if 'the way to [its] verification... is known.'??
The condition (a) and (b) on the one hand, and (c) on the other hand, were asserted by Carnap to be equivalent.??
A result of this theory was, in Carnap's words,?? 'that the alleged sentences of metaphysics stand revealed, by logical analysis, as pseudo-sentences'.
Carnap's theory of the intrinsic meaningfulness or meaninglessness of strings of words was soon to be modified; but in order to prepare a basis for judging these modifications I must say a few words of criticism here.??
First, a word on (c), the 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 This criterion excludes from the realm of meaning all scientific theories (or 'laws of nature'); for these are no more reducible to observation reports than so-called metaphysical pseudo-propositions. Thus the criterion of meaning leads to the wrong demarcation of science and metaphysics. This criticism was accepted by Carnap in his Logical Syntax of Language?? and in his Testability and Meaning;?? but
?? See his paper on the Overthrow of Metaphysics, Erkenntnis 2, 1932, pp. 222-3. The Overthrow-paper belongs, strictly speaking, no longer to the period of the first theory of meaninglessness, owing to its recognition of the fact that meaninglessness depends upon the language in question; for Carnap writes (p. 220): 'Meaningless in a precise sense is a string of words which, within a certain given language, does not form a sentence.' However the obvious consequences of this remark are not yet drawn, and the theory is still asserted in an absolute sense: our conditions (a) and (b) are formulated at the bottom of p. 220, and (c) on pp. 222-3 (as quoted).
?? Ibid., p. 224
?? Aufbau, section 161, p. 222; and section 179 (top of p. 253). See also the important section 2 of Carnap's Overthrow-paper, Erkenntnis, 2, 1932, pp. 221-224. (This passage in many ways anticipates, by its general method, the doctrine of reduction in Carnap's Testability and Meaning, except that in the latter the demand for verification is weakened.)
?? Erkenntnis, 2, p. 220. Cp. the foregoing note.
?? See L. Sc. D., especially sections 4, 10, 14, 20, 25, and 26.
?? See the end of the first paragraph and the second paragraph on p. 321, section 82, especially the following remarks of Carnap's on the Vienna Circle: 'It was originally maintained that every sentence, in order to be significant, must be completely verifiable.... On this view there was no place for the laws of nature amongst the sentences of the language.... A detailed criticism of the view according to which laws are not sentences is given by Popper.' The continuation of this passage is quoted below, text to note 48. See also note 71, below.
?? Cp. especially notes 20 and 25 (and the text following note 25) to section 23 of Testability and Meaning with note 7 to section 4 (and text), and note 1 to section 78 of L. Sc. D.
even his latest theories are still open to it, as I shall try to show in section 6 below.
Next we consider condition (a) of the doctrine, the (nominalistic) view that only empirically definable words or signs have meaning.
Here the situation is even worse, although it is very interesting.
For the sake of simplicity, I begin my criticism with a very simple form of nominalism. It is the doctrine that all non-logical (or, as I prefer to say, non-formative) words are names - either such as 'Fido', of a single physical object, or as 'dog', shared by several such objects. Thus 'dog' may be the name shared by the objects Fido, Candy, and Tiffin; and so with all other words.
This view may be said to interpret the various words extensionally or enumeratively; their 'meaning' is given by a list or an enumeration of the things they name: 'this thing here, and that thing over there...' We may call such an enumeration an 'enumerative definition' of the meaning of a name; and a language in which all (non-logical or non-formative) words are supposed to be enumeratively defined may be called an 'enumerative language', or a 'purely nominalistic language'.
Now we can easily show that such a purely nominalistic language is completely inadequate for any scientific purpose. This may be expressed by saying that all its sentences are analytic - either analytically true or contradictory - and that no synthetic sentences can be expressed in it. Or if we prefer a formulation which avoids the terms 'analytic' and 'synthetic' (which at present are under heavy fire from Professor's Quine's guns) then we can put it in this way: in a purely nominalistic language no sentence can be formulated whose truth or falsity could not be decided by merely comparing the defining lists, or enumerations, of the things which are mentioned in the sentence. Thus the truth or falsity of any sentence is decided as soon as the words which occur in it have been given their meaning.
That this is so may be seen from our example. 'Fido is a dog' is true because Fido was one of the things enumerated by us in defining 'dog'. As opposed to this 'Chunky is a dog' must be false, simply because Chunky was not one of the things to which we pointed when drawing up our list defining 'dog'. Similarly, if I give the meaning of 'white' by listing (1) the paper on which I am now writing, (2) my handkerchief, (3) the cloud over there, and (4) our snowman, then the statement, 'I have white hair' will be false, whatever the colour of my hair may be.
It is clear that in such a language hypotheses cannot be formulated. It can not be a language of science. And conversely, every language adequate for science must contain words whose meaning is not given in an enumerative way. Or, as we may say, every scientific language must make use of genuine universals, i. e. of words, whether defined or undefined, with an indeterminate extension, though perhaps with a reasonably definite intensional 'meaning'. (For the intensional analysis of meaning see Carnap's excellent book Meaning and Necessity.)
Precisely the same criticism applies to more complicated languages, especially to languages which introduce their concepts by the method of extensional abstraction (used first by Frege and Russell) provided the class of the fundamental elements upon which this method is based, and the fundamental relations between these elements, are supposed to be given extensionally, by lists. Now this was the case in Carnap's Aufbau: he operated with one primitive relation, 'Er' ('Experience of remembering'), which was assumed to be given in the form of a list of pairs.??
All concepts belonging to his 'constitution system' were supposed to be extensionally definable on the basis of this primitive relation 'Er ', i. e. of the list of pairs which gave a meaning to this relation. Accordingly all statements which could be expressed in his language were true or false simply according to the (extensional) meaning of the words which occurred in them: they were all either analytically true or contradictory,?? owing to the absence of genuine universal?? words.
To conclude this section, I turn to the condition (b) of the theory, and to the doctrine of meaninglessness due to 'type mistakes' or 'category mistakes'. This doctrine was derived, as we have seen, from Russell's theory that an expression like 'a is an element of the class a' must be meaningless - absolutely, or intrinsically or essentially, as it were.
Now this doctrine has long since turned out to be mistaken. Admittedly, it is true that we can, with Russell, construct a language (embodying a theory of types) in which the expression in question is not a well-formed formula. But we can also, with Zermelo, and his successors (Fraenkel, Behmann, von Neumann, Bernays, Leśniewski, Quine, Ackermann) construct languages in which the expression in question is well-formed and thus meaningful; and in some of them it is even a true statement (for certain values of a).
These are, of course, well-known facts. But they completely destroy the idea of an 'inherently' or 'naturally' or 'essentially' meaningless expression. For the expression 'a is an element of the class a' turns out to be meaningless in one language but meaningful in another; and this establishes that a proof that an expression is meaningless in some languages must not be mistaken for a proof of intrinsic meaninglessness.
In order to prove intrinsic meaninglessness we should have to prove a great deal. We should have to prove not merely that an alleged statement, asserted or submitted by some writer or speaker, is meaningless in all (consistent) languages, but also that there cannot
?? See especially Aufbau, section 108. Carnap said there of his Theorem 1, which asserts the asymmetry of the primitive relation 'Er', that it is an empirical theorem, since its asymmetry can be read off the list of (empirically given) pairs. But we must not forget that this is the same list of pairs which 'constituted', or defined, 'Er'; moreover, a list of pairs which would lead to the negation of theorem 1, i. e. to the theorem that 'Er' is symmetrical, could not have been interpreted as an adequate list for 'Er', as is particularly clear from sections 153 to 155.
?? This is the criticism of the Aufbau which I put to Feigl when we first met. It was a meeting which for me proved momentous, for it was Feigl who a year or two later arranged the vacation meeting in the Tyrol.
?? 'The Difference Between Individual Concepts and Universal Concepts' was discussed in the Aufbau, section 158; it was criticized briefly in L. Sc. D., sections 14 and 25.
exist a meaningful sentence (in any consistent language) which would be recognized by the writer or speaker in question as an alternative formulation of what he intended to say. And nobody has ever suggested how such a proof could possibly be given.
It is important to realize that a proof of intrinsic meaninglessness would have to be valid with respect to every consistent language and not merely with respect to every language that suffices for empirical science. Few metaphysicians assert that metaphysical statements belong to the field of the empirical sciences; and nobody would give up metaphysics because he is told that its statements cannot be formulated within these sciences (or within some language suitable for these sciences). After all, Wittgenstein's and Carnap's original thesis was that metaphysics is absolutely meaningless - that is sheer gibberish and nothing else; that it is, perhaps, of the character of sighs or groans or tears (or of surrealist poetry), but not of articulate speech. In order to show this, it would be quite insufficient to produce a proof to the effect that it cannot be expressed in languages which suffice for the needs of science.
But even this insufficient proof has never been produced by anybody, in spite of the many attempts to construct metaphysics-free languages for science. Some of these attempts will be discussed in the next two sections.
4. CARNAP AND THE LANGUAGE OF SCIENCE
Carnap's original 'overthrow' of metaphysics was unsuccessful. The naturalistic theory of meaninglessness turned out to be baseless, and the total result was a doctrine which was just as destructive of science as it was of metaphysics. In my opinion this was merely the consequence of an ill-advised attempt to destroy metaphysics wholesale, instead of trying to eliminate, piecemeal as it were, metaphysical elements from the various sciences whenever we can do this without endangering scientific progress by misplaced criticism (such as had been directed by Bacon against Copernicus, or by Duhem and Mach against atomism).
But the naturalistic theory of meaning was abandoned by Carnap a long time ago, as I have said. It has been replaced by the theory that whether a linguistic expression is well-formed or not depends on the rules of the language to which the expression is supposed to belong; together with the theory that the rules of language are often not precise enough to decide the issue, so that we have to introduce more precise rules - and with them, an artificial language system.
I wish to repeat that I regard this as a very important development, and as one that provides the key to a considerable number of interesting problems. But it leaves the problem of demarcation between science and metaphysics exactly where it was. This is my thesis.
To put it quite differently, the naïve or naturalistic or essentialistic theory of meaningfulness discussed in the previous section is mistaken, and had to be replaced by a theory of well-formed formulae, and with it, of languages which are artificial in being subject to definite rules. This important task has since been carried out by Carnap with great success. But this reformation of the concept of meaningfulness completely destroys the doctrine of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And it leaves us without a hope of ever reconstructing this doctrine on the basis of the reformed concept of meaninglessness.
Unfortunately this seems to have been overlooked. For Carnap and his circle (Neurath was especially influential) tried to solve the problem by constructing a 'language of science', a language in which every legitimate statement of science would be a well-formed formula, while none of the metaphysical theories would be expressible in it - either because the terminology was not available, or because there was no well-formed formula to express it.
I consider the task of constructing artificial model languages for a language of science an interesting one; but I shall try to show that the attempt to combine this task with that of destroying metaphysics (by rendering it meaningless) has repeatedly led to disaster. The anti-metaphysical bias is a kind of philosophical (or metaphysical) prejudice which prevented the system builders from carrying out their work properly.
I shall try to show this briefly, in this section, for (a) the Physicalistic Language, (b) the Language of Unified Science, (c) the languages of the 'Logical Syntax', and later, in section 5, more fully for those proposed in 'Testability and Meaning'.
(a) The Physicalistic Language. Carnap's Aufbau had sponsored what he called a methodological solipsism - taking one's own experiences as the basis upon which the concepts of science (and thus the language of science) have to be constructed. By 1931 Carnap had given this up, under Neurath's influence, and had adopted the thesis of physicalism, according to which there was one unified language which spoke about physical things and their movements in space and time. Everything was to be expressible in this language, or translatable into it, especially psychology in so far as it was scientific. Psychology was to become radically behavouristic; every meaningful statement of psychology, whether human or animal, was to be translatable into a statement about the spatio-temporal movements of physical bodies.
The tendency underlying this programme is clear: a statement about the human soul was to become as meaningless as a statement about God. Now it may be fair enough to put statements about the soul and about God on the same level. But it seems questionable whether anti-metaphysical and anti-theological tendencies were much furthered by placing all our subjective experiences, or rather all statements about them, on the same level of meaninglessness as the statements of metaphysics. (Theologians or metaphysicians might be very pleased to learn that statements such as 'God exists' or 'The Soul exists' are on precisely same level as 'I have conscious experiences' or 'There exist feelings - such as love or hate - distinguishable from the bodily movements which often, though not always, accompany them'.)
There is no need, therefore, to go into the merits or demerits of the behavourist philosophy, or the translatability thesis (which, in my opinion, is nothing but materialist metaphysics in linguistic trappings - and I, for one, prefer to meet it without trappings): we see that as an attempt to kill metaphysics this philosophy was not very effective. As usual, the broom of the anti-metaphysicist sweeps away too much, and also too little. As a result we are left with an untidy and altogether untenable demarcation.
For an illustration of 'too much and too little' I may perhaps cite the following passage from Carnap's 'Psychology Within the Physical Language':?? 'Physics is, altogether, practically free from metaphysics, thanks to the efforts of Mach, Poincaré, and Einstein; in psychology, efforts to make it a science free from metaphysics have hardly begun.' Now 'free from metaphysics' means here, for Carnap, reducible to protocol-statements. But not even the simplest physical statements about the functioning of a potentio-meter - the example is Carnap's?? - are so reducible. Nor do I see any reason why we should not introduce mental states in our explanatory psychological theories, if in physics (old or new) we are permitted to explain the properties of a conductor by the hypothesis of an 'electric fluid' or of an 'electronic gas'.
The point is that all physical theories say much more than we can test. Whether this 'more' belongs legitimately to physics, or whether it should be eliminated from the theory as a 'metaphysical element' is not always easy to say. Carnap's reference to Mach, Poincaré, and Einstein was unfortunate, since Mach, more especially, looked forward to the final elimination of atomism which he (with many other positivists) considered to be a metaphysical element of physics. (He eliminated too much.) Poincaré tried to interpret physical theories as implicit definitions, a view which can hardly be more acceptable to Carnap; and Einstein has for a long time been a believer in metaphysics, operating freely with the concept of the 'physically real'; although, no doubt, he dislikes pretentious metaphysical verbiage as much as any of us.??a Most of the concepts with which physics works, such as forces, fields, and even electrons and other particles are what Berkeley (for example) called 'qualitates occultae'. Carnap showed?? that assuming conscious states in our psychological explanations was exactly analogous to assuming a force - a qualitas occulta - in order to explain the 'strength' of a wooden post; and he believed that 'such a view commits the fallacy of hypostasization'?? of which, he suggested, no physicist is guilty, although it is often committed by psychologists.?? But the fact is that we cannot explain the strength of the post by its structure alone (as Carnap suggested??) but only by its structure together with laws which make ample use of 'hidden forces' which Carnap, like Berkeley, condemned as occult.
?? See Erkenntnis, 3, 1932, p. 117
?? Op. cit., p. 140.
??a (Added in proof). When I wrote this, Albert Einstein was still alive.
?? Op. cit., p. 115.
?? Op. cit., p. 116.
?? Op. cit., p. 115.
?? Op. cit., p. 114.
Before concluding point (a) I wish to mention only briefly that this physicalism, although from my point of view too physicalistic in most respects, was not physicalistic enough in others. For I do believe, indeed, that whenever we wish to put a scientific statement to an observational test, this test must in a sense be physicalistic; that is to say, that we test our most abstract theories, psychological as well as physical, by deriving from them statements about the behaviour?? of physical bodies.
I have called simple descriptive statements, describing easily observable states of physical bodies, 'basic statements', and I asserted that in cases in which tests are needed, it is these basic statements?? which we try to compare with the 'facts' and that we choose these statements, and these facts, because they are most easily comparable, and intersubjectively most easily testable.
Thus according to my view we do not, for the purpose of such basic tests, choose reports (which are difficult to test intersubjectively) about our own observational experiences, but rather reports (which are easy to check) about physical bodies - including potentiometers - which we have observed.
The point is important because this theory of mine concerning the 'physicalist' character of test statements is radically opposed to all those widely accepted theories which hold that we are constructing the 'external world of science' out of 'our own experience'. I have always believed that this is a prejudice (it is still widely held); and that, quite properly, we never trust 'our own experiences' unless we are confident that they conform with intersubjectively testable views.
Now on this point Carnap's and Neurath's views were much less 'physicalistic' at that time. In fact they still upheld a form of Carnap's original 'methodological solipsism'. For they taught that the sentences which formed the 'empirical basis' (in my terminology) of all tests, and which they called 'protocol-sentences', should be reports about 'our own' observational experiences, although expressed in a physical language, i. e. as reports about our own bodies. In Otto Neurath's formulation, such a protocol-sentence was to have, accordingly, a very queer form. He wrote:?? 'A complete protocol-sentence might for example read: "Otto's protocol at 3.17: [Otto's verbalized thinking was at 3.16: (in this room at 3.15 was a table, observed by Otto)]".'
?? This behaviour, however, is always interpreted in the light of certain theories (which creates a danger of circularity). I cannot discuss the problem fully here, but I may mention that the behaviour of men, predicted by psychological theories, nearly always consists, not of purely physical movements, but of physical movements which, if interpreted in the light of theories, are 'meaningful'. (Thus if a psychologist predicts that a patient will have had dreams, he will feel that he was right, whether the patient reports 'I dreamt badly last night', or whether he reports 'I want to tell you that I have had a shocking dream'; though the two 'behaviours', i. e. the 'movements of the lips' may differ physically more widely than the movements corresponding to a negation may differ from those corresponding to an affirmation.)
?? The terms 'basic statement' ('basic proposition' or 'basic sentence': 'Basissatz') and 'empirical basis' were introduced in L. Sc. D., sections 7 and 25 to 30; they have often been used since by other authors, in similar and in different senses. (See now also section I of the Addenda to the present volume.)
?? Erkenntnis, 3, 1932, p. 207.
One sees that the attempt is made here to incorporate the old starting point - the observer's own subjective experiences, i. e. 'methodological solipsism'.
Carnap later accepted my view; but in the article ('on Protocol-Sentences'??) in which he very kindly called this view of mine 'the most adequate of the forms of scientific language at present advocated... in the... theory of knowledge',?? he did not yet quite appreciate the fact (appreciated clearly in Testability and Meaning, as we shall see) that the difference between my view and Neurath's concerned a fundamental point: whether or not to appeal in our tests to simple, observable, physical facts or to 'our own sense-experiences' (methodological solipsism). He therefore said, in his otherwise admirable report of my views, that the testing subject S will, 'in practice, often stop his tests' when he has arrived at the 'observation statements of the protocolling subject S'; i. e. at statements of his own sense-experience; whereas I held that he would stop only when he had arrived at a statement about some easily and intersubjectively observable behaviour of a physical body (which, at the moment did not appear to be problematic).??
The point here mentioned is, of course, closely connected with the fact that I never believed in induction (for which it seems natural to start 'from our own experiences') but in a method of testing predictions deducible from our theories, while Neurath believed in induction. At that time I thought that, when reporting my views, Carnap had given up his belief in induction. If so, he has returned to it since.
(b) The Language of Unified Science. Closely connected with physicalism was the view that the physicalist language was a universal language in which everything meaningful could be said. 'The physical language is universal', Carnap wrote.?? 'If, because of its character as a universal language, we adopt the language of physics as the... language of science, then all science turns into physics. Metaphysics is excluded as nonsensical.?? The various sciences become parts of the unified science.'
It is clear that this thesis of the one universal language of the one unified science is closely connected with that of 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 if it were possible to express everything that a non-metaphysical scientist may wish to say in one language which, by its rules, makes it impossible to express metaphysical ideas, then something like a prima facie case would have been made out in favour of the conjecture that metaphysics cannot be expressed in any 'reasonable' language. (Of course, the conjecture would be still very far from being established.)
Now the queer thing about this thesis of the one universal language is that before it was ever published (on the 30th of December 1932) it had been refuted by one of Carnap's colleagues in
?? 'Ueber Protokollsätze'. Erkenntnis, 3, 1932 pp. 215-228.
?? Op. cit., p. 228; cp. Testability and Meaning (see below, note 60, and the next footnote here).
?? See also for a brief criticism of Carnap's report, notes 1 and 2 to section 29 of L. Sc. D. (The quotation in the text next to note 2 of section 29 is from Carnap's report.)
?? Erkenntnis, 3, 1932, p. 108.
?? Loc. cit., italics mine.
the Vienna Circle. For Gödel, by his two famous incompleteness theorems, had proved that one unified language would not be sufficiently universal for even the purposes of elementary number theory: although we may construct a language in which all assertions of this theory can be expressed, no such language suffices for formalizing all the proofs of those assertions which (in some other language) can be proved.
It would have been best, therefore, to scrap forthwith this doctrine of the one universal language of the one universal science (especially in view of Gödel's second theorem which showed that it was pointless to try to discuss the consistency of a language in that language itself). But more has happened since to establish the impossibility of the thesis of the universal language. I have in mind, especially, Tarski's proof that every universalistic language is paradoxical (first published in 1933 in Polish, and in 1935 in German). But in spite of all this the doctrine has survived; at least, I have nowhere seen a recantation.?? And the so-called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which was founded upon his doctrine (despite my opposition,?? at the 'First Congress for Scientific Philosophy', in Paris, 1935) is still being continued. It will remain a monument to a metaphysical doctrine, once passionately held by Neurath and brilliantly wielded by him as a major weapon in the anti-metaphysical crusade.
For no doubt the strong philosophical belief which inspired this forceful and lovable person was, by his own standards, purely 'metaphysical'. A unified science in a unified language is really nonsense, I am sorry to say; and demonstrably so, since it has been proved, by Tarski, that no consistent language of this kind can exist. Its logic is outside it. Why should not its metaphysics be outside it too?
?? The doctrine is still maintained, in all essentials (although in a more cautious mood) in Testability and Meaning, and not touched upon in the corrections and additions added to various passages in 1950; see below, note 50, and text. In an excellent and by now famous paragraph of his Introduction to Semantics (section 39) Carnap indicated 'how the views exhibited in [his] earlier book, The Logical Syntax of Language, have to be modified as a result, chiefly, of the new point of view, of semantics'. But the Syntax, although it continued to subscribe to the doctrine of the unified science in a unified language (see especially section 74, the bottom of p. 286, and pp. 280 ff.) did not investigate this doctrine more fully; which may perhaps be the reason why Carnap overlooked the need to modify this doctrine.
?? In Paris, I opposed the foundation of the Encyclopedia. (Neurath used to call me 'the official opposition' of the Circle, although I was never so fortunate as to belong to it.) I pointed out, among other things, that it would have no similarity whatever to an encyclopedia as Neurath conceived it, and that it would turn out to be another series of Erkenntnis articles. (For Neurath's ideal of an encyclopedia, see for example his critical article on L. Sc. D., Erkenntnis, 5, pp. 353 to 365, especially section 2.) At the Copenhagen Congress, in 1936, which Carnap did not attend, I tried to show that the doctrine of the unity of science and of the one universal language was incompatible with Tarski's theory of truth. Neurath thereupon suggested in the discussion which followed my lecture that Tarski's theories about the concept of truth must be untenable; and he inspired (if my memory does not deceive me) Arne Naess, who was also present, to undertake an empirical study of the usages of the word 'truth', in the hope of thus refuting Tarski. See also Carnap's appropriate remark on Naess, in the Introduction to Semantics, p. 29.
I do not, of course, suggest that Carnap did not know all this; but I suggest that he did not see its devastating effect upon the doctrine of the unified science in the unified language.
It may be objected, perhaps, that I am taking the doctrine of the unified language too seriously, and that a strictly formalized science was not intended. (Neurath, for example, used to speak, especially in his later publications, of a 'universal slang', which indicates that he did not think of a formalized universal language.) I believe that this is true. But this view, again, destroys the doctrine of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For if there are no strict rules of formation for the universal slang, then the assertion that we cannot express metaphysical statements in it is gratuitous; and it can only lead us back to the naïve naturalistic view of meaninglessness, criticized above in section 3.
It may be mentioned in this context that Gödel's (and Church's) discoveries also sealed the fate of another of the pet doctrines of positivism (and of one of my pet aversions??). I have in mind Wittgenstein's 'The riddle does not exist. If a question can be put at all, it can also be answered.'??
This doctrine of Wittgenstein's, called by Carnap in the 'Aufbau'?? 'the proud thesis of the omnipotence of rational science', was hardly tenable even when it first appeared, if we remember Brouwer's ideas, published long before the Tractatus was written. With Gödel (especially with his second theorem of undecidability) and Church, its situation became even worse; for from them we learned that we could never complete even our methods of solving problems. Thus a well-formed mathematical question may become 'meaningless' if we adopt a criterion of meaning according to which the meaning of a statement lies in the method by which it can be verified (in mathematics: proved or disproved). This shows that we may be able to formulate a question (and, similarly, the possible answers to it) without an inkling as to how we might find out which of the possible answers is true; which demonstrates the superficiality of Wittgenstein's 'proud thesis'.
Carnap was the first philosopher who recognized the immense importance of Gödel's discoveries, and he did his best to make them known to the philosophical world. It is the more surprising that Gödel's result did not produce that change which it should have produced in the Vienna Circle's tenets (in my opinion, undoubtedly and obviously metaphysical tenets, all too tenaciously held) concerning the language and the scope of science.
?? Another is 6.1251 of the Tractatus (see also 6.1261): 'Hence there can never be surprises in logic' which is either trivial (viz. if 'logic' is confined to the two-valued propositional calculus) or obviously mistaken, and most misleading in view of 6.234: 'Mathematics is a method of logic'. I think that nearly every mathematical proof is surprising. 'By God, this is impossible', Hobbes said when first encountering Euclid's derivation of the Pythagorean theorem.
?? Tractatus, 6.5. We also read there: 'For an answer which cannot be expressed the question too cannot be expressed.' But the question may be 'Is this assertion (for example Goldbach's conjecture) demonstrable?' And the true answer may be, 'We don't know: perhaps we may never know, and perhaps we can never know.' ?? See Aufbau, section 183, p. 261, under 'Literature'.
(c) Carnap's Logical Syntax is one of the few philosophical books which can be described as of really first-rate importance. Admittedly, some of its arguments and doctrines are superseded, owing mainly to Tarski's discoveries, as Carnap himself explained frankly in that famous last paragraph of his Introduction to Semantics. Admittedly, the book is not easy to read (and even more difficult in English than in German). But it is my firm conviction that, if ever a history of the rational philosophy of the earlier half of this century should be written, this book ought to have a place in it second to none. I can not even try here (wedged between critical analyses) to do justice to it. But one point at least I must mention. It was through this book that the philosophical world, to the west of Poland, was first introduced to the method of analysing languages in a 'meta-language', and of constructing 'object-languages' - a method whose significance for logic and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annot be overrated; and it was in this book that the claim was first made, and, I believe, completely substantiated, that this method was of the greatest importance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If I may speak personally, the book (which came out a few months before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and which I read while my book was in the press) marks the beginning of a revolution in my own philosophical thinking, although I did not understand it fully (because of its real internal difficulties, I believe) before I had read Tarski's great paper on the Concept of Truth (in the German translation, 1935). Then I realized, of course, that a syntactic meta-linguistic analysis was inadequate, and must be replaced by what Tarski called 'semantics'.
Of course I believe tha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roblem of demarcation, a great step forward was made in the Syntax. I say 'of course', since I am alluding to the fact that some of my criticism was accepted in this book. Part of the relevant passage is quoted above (in note 24). But what is most interesting from our present point of view is the passage immediately following the quotation; it shows, I believe, that Carnap did not accept enough of my criticism. The view here presented', he writes,?? 'allows great freedom in the introduction of new primitive concepts and new primitive sentences in the language of physics or of science in general; yet at the same time it retains the possibility of differentiating pseudo-concepts and pseudo-sentences from real scientific concepts and sentences, and thus of eliminating the former.' Here we find, again, the old thesis of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But it is mitigated, if only a little, by the immediate continuation of this passage (which Carnap places in square brackets, and which shows the influence of my criticism, mentioned by him on the preceding page). 'This elimination, however, is not so simple as it appeared on the basis of the earlier position of the Vienna Circle, which was in essentials that of Wittgenstein. on that view it was a question of "the language" in an absolute sense; it was thought possible to reject both concepts and sentences if they did not fit into the language.'
?? Syntax, section 82, p. 322 top. (The italics are Carnap's)
The position indicated by these passages (including the one quoted briefly in note 24 above) may be described as follows:
(1) Some difficulties, especially those of Wittgenstein's 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 are recognized; also the inadequacy of what I have called the 'naturalistic' theory of meaningfulness (which corresponds to the belief in 'the language' in which things simply are, or are not, essentially meaningful by their nature).
(2) But the belief is still maintained that we can, by some feat of ingenuity, establish one language which does the trick of rendering meaningless precisely the 'metaphysical' concepts and sentences and no others.
(3) Even the belief that we can construct one universal language of unified science is still upheld, in consequence of (2); but it is not stressed, and not examined in detail. (See point (b) in this section, above, and especially the passage from the Syntax, section 74, p. 286, mentioned in note 43 above.)
This situation does not call for further criticism on my part: practically all that needs to be said I have said already, especially that this approach renders Tarski's Semantics meaningless, and with it most of the theory of logical inference, i. e. of logic. only one further - and I believe important - comment has to be made.
One of the difficulties of this great and important book of Carnap's lies in its emphasis upon the fact that the syntax of a language can be formulated in that language itself. The difficulty is the greater because the reader has hardly learnt to distinguish between an object-language and a meta-language when he is told that, after all, the distinction is not quite as radical as he supposed it to be, since the meta-language, it is now emphasized, may form part of the object-language.
Carnap's emphasis is, undoubtedly, misplaced. It is a fact that part of the meta-language (viz., its 'syntax') can form part of the object-language. But although this fact is very important, as we know from Gödel's work, its main use is in the construction of self-referring sentences, which is a highly specialized problem. From the point of view of promoting the understanding of the relation between object-language and meta-language, it would no doubt have been wiser to treat the meta-language as distinct from the object-language. It could, of course, have still been shown that at least a part of the meta-language - and enough for Gödel's purposes - may be expressed in the object-language, without stressing the mistaken thesis that the whole of the meta-language can be so expressed.
Now there is little doubt that it was the doctrine of the one universal language in which the one unified science was to be expressed that led Carnap to this emphasis which contributes so much to the difficulties of his book; for he hoped to construct a unified language which would automatically eliminate metaphysics. It is a great pity to find this excellent book spoiled by an anti-metaphysical dogma - and by a wrong demarcation which eliminates, together with metaphysics, the most important parts of logic.
The Syntax continues the doctrine of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in the following form: All meaningful sentences either belong to the language of science, or (if philosophical) they can be expressed within the syntax of that language. This syntax comprises the whole of the philosophy and logic of science so far as these are translatable into the 'formal mode of speech'; moreover, this syntax can, if we wish, be formulated in the same universal ('object-') language in which all the sciences may be formulated.
Here it is not only the doctrine of the one universal language which I cannot accept: I also cannot accept the ruling that what I say must be translatable into the 'formal mode of speech' in order to be meaningful (or to be understood by Carnap). No doubt one should express oneself as clearly as possible; and no doubt what Carnap calls the 'formal mode of speech' is often preferable to what he calls 'the material mode' (and I have often used it, in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and before, without having been told to do so.) But it is not necessarily preferable. And why should it necessarily be preferable? Perhaps because the essence of philosophy is language analysis? But I am not a believer in essences. (Nor in Wittgenstein.) How to make oneself better understood can only be a matter of thought and experience.
And why should all philosophy be linguistic analysis? No doubt it may often help to put a question in terms of language-construction. But why should all philosophical questions be of this kind? Or is this the one and only non-linguistic thesis of philosophy?
The positivist attack has put, if I may say so, the fear of God into all of us who wish to speak sense. We have become more careful in what we say, and how we say, and this is all to the good. But let us be clear that the philosophical thesis that language analysis is everything in philosophy is paradoxical. (I admit that this criticism of mine no longer applies in this form to Testability and Meaning which replaces the thesis by a proposal that is no longer paradoxical; no reasons, however, are offered in favour of the proposal, except that it is an improved version of the thesis; and this is no reason, it seems to me, for accepting it.)
5. TESTABILITY AND MEANING
Carnap's Testability and Meaning is perhaps the most interesting and important of all the papers in the field of the philosophy of the empirical sciences which were written in the period between Wittgenstein's Tractatus and the German publication of Tarski's essay of the concept of truth. It was written in a period of crisis, and marks great changes in the author's views. At the same time, its claims are very modest. 'The object of this essay is not to offer... solutions... It aims rather to stimulate further investigations.' This aim was amply realized: the investigations which sprang from it must number hundreds.
Replacing 'verifiability' by 'testability' (or by 'confirmability'), Testability and Meaning is, as its title indicates, very largely a treatise on our central problem. It still attempts to exclude metaphysics from the language of science: '... an attempt will be made to formulate the principle of empiricism in a more exact way, by stating a requirement of confirmability or testability as a criterion of meaning', we read in section 1; and in section 27 (p. 33) this hint is elaborated: 'As empiricists, we require the language of science to be restricted in a certain way; we require that descriptive predicates and hence synthetic sentences are not to be admitted unless they have some connection with possible observations...' What is 'not to be admitted' is, of course, metaphysics: '... even if L were to be a language adequate for all science... [we] should not wish for example to have [in L]... sentences [corresponding] to many or perhaps most of the sentences occurring in the books of metaphysicians.'??
Thus the main idea - excluding metaphysics from the well-formed formulae of L, the language of science - is unchanged. Unchanged, too, is the idea of the one language of science: although Carnap now says, very clearly, that we can choose our language, and that various scientists can choose it in different ways, he proposes that we accept a universal language, and he even defends the thesis of physicalism in a modified form. He often speaks (as in the passages quoted) of the language of science, or of the possibility of having a language for all science, or of the whole or the total language of science:?? the impossibility of such a language he still does not realize.
Carnap is however very careful in the formulation of his new ideas. He says that we have a choice between many languages of science, and he says that the 'principle of empiricism' - which turns out to be another name for the principle of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 should preferably be formulated not as an assertion, but as a 'proposal or requirement'?? for selecting a language of science.
One might think that, with this formulation, the idea of excluding metaphysics as meaningless has in fact been abandoned: for the metaphysician need not, and clearly would not, accept any such proposal; he would simply make another proposal in its place according to which metaphysics would become meaningful (in an appropriate language). But this is not how Carnap sees the situation. He sees it, rather, as the task or duty imposed upon the anti-metaphysician to justify his view of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by constructing a language of science free from metaphysics. And this is how the problem is still seen by many, I fear.
It is easy to show, using my old arguments, that no such language can be constructed.
My thesis is that a satisfactory language for science would have to contain, with any well-formed formula, its negation; and since it has to contain universal sentences, it has therefore to contain existential sentences also.
But this means that it must contain sentences which Carnap, Neurath, and all other anti-metaphysicians always considered to be metaphysical. In order to make this quite clear I choose, as an
?? Testability, section 18 (p. 5).
?? See Testability, sections 15 (pp. 467 f.) and 27 (p. 33), 18 (p. 5), as quoted, and 16 (pp. 469, 470).
?? Section 27 (p. 33).
extreme example, what may be called 'the arch-metaphysical assertion':?? 'There exists an omnipotent, omnipresent, and omniscient personal spirit.' I shall briefly show how this sentence can be constructed as a well-formed or meaningful sentence in a physicalistic language which is quite similar to those proposed in Testability and Meaning.
We can take as primitive the following four physicalistic predicates:
(1) 'The thing a occupies a position b' or more precisely, 'a occupies a position of which the (point or) region b is a part; in symbols 'Pos(a,b)'.??
(2) 'The thing (machine, or body, or person...) a can put the thing b into position c'; in symbols 'Put(a,b,c)'.??
(3) 'a makes the utterance b'; in symbols 'Utt(a,b)'.
(4) 'a is asked (i. e. adequately stimulated by an utterance combined, say, with a truth drug) whether or not b'; in symbols 'Ask(a,b)'.
We assume that in our language we have at our disposal names of all expressions of the form 'Pos(a,b)', 'Put(a,b,c)', etc., including some of those introduced below with their help. I shall use for simplicity's sake, quotation names. (I am aware, however, of the fact that this procedure is not exact, especially where variables in quotes are bound, as in (14); but this difficulty can be overcome.)
Now we can easily introduce, with the help of explicit definitions using (1) and (2):??
(5) 'a is omnipresent' or 'Opos(a)'.
(6) 'a is omnipotent', or 'Oput(a)'.
?? one need not believe in the 'scientific' character of psycho-analysis (which, I think, is in a metaphysical phase) in order to diagnose the anti-metaphysical fervour of positivism as a form of Father-killing.
?? 'Pos(a,b)' is used for the sake of simplicity; we should, really, operate with position and momentum, or with the 'state' of a. The necessary amendments are trivial. I may remark that I do not presuppose that the variables 'a', 'b', etc. all belong to the same type or semantical category.
?? Or, as Carnap would put it, 'a is able to make the full sentence "Pos(b,c)" true'; see Carnap's explanation of his primitive 'realizable' (a term of the meta-language, however, in contradistinction to my 'Put'), in Testability, section 11, p. 455, Explanation 2.
?? The definitions are: (5) Opos(a) ≡ (b)Pos(a,b).-(6) Oput(a) ≡ (b)(c)Put(a,b,c).-Next we have the 'bilateral reduction sentence': (7) Ask(a,b) ⊃ (Th(a,b) ≡ Utt(a,b)).-The remaining definitions are: (8) Thp(a) ≡ (Eb)Th(a,b).-(9)Sp(a) ≡ (Thp(a) & ((b)~Pos(a,b)) v Opos(a)).-An alternative (or an addition to the definiens) might be 'Sp(a) ≡ (Thp(a) & (b) ∼ Utt(a,b))'.-(10) Knpos(a,b,c) ≡ (Pos(b,c) & Th(a, 'Pos(b,c)')).-(11) Knput(a,b,c,d) ≡ (Put(b,c,d) & Th(a,'Put(b,c,d)')).-(12) Knth(a,b,c) ≡ (Th(b,c) & Th(a,'Th(b,c)')).-(13) Unkn(a) ≡ ((Eb) (c) (Th(a,b) & (a ≠ c ⊃ ∼Knth(c,a,b))).-(14) Kn(a,b) ≡ ((c)(d)(e)((b = 'Pos(c,d)' & Knpos(a,c,d)) v (b = 'Put(c(c,d,e)' & Knput(a,c,d,e)) v (b = 'Th(c,d)' & Knth(a,c,d))).-(15) Verax(a) ≡ (b)(Th(a,b) ≡ (Kn(a,b)).-(16) Okn(a) ≡ (b)(c)(d)(e)(f)(g)(h)(((a ≠ b) ⊃ (Knput(a,b,c,d) ≡ Put(b,c,d)))& ((a ≠ e) ⊃ (Knpos(a,e,f) ≡ Pos(e,f))) & ((a ≠ g) ⊃ (Knth(a,g,h) ≡ Th(g,h)))) & Verax (a)).- We can easily prove that 'Unka(a) & Okn(a)' implies the uniqueness of a; alternatively, we can prove uniqueness, along lines which might have appealed to Spinoza, from 'Oposa(a)', if we adopt the Cartesian axiom: a ≠ b ⊃ (Ec) ((Pos(a,c) & ~ Pos(b,c)) v (~ Pos(a,c) & Pos (b,c))).
(Added in proofs.) Our definitions can be simplified by employing the Tarskian semantic predicate 'T(a)', meaning 'a is a true statement'. Then (14) may be replaced by Kn(a,b) ≡ Th(a,b) & T(b); (15) by Verax(a) ≡ (b)Th(a,b) ⊃ T(b); and (16) by Okn(a) ≡ (b)T(b) ⊃ Kn(a,b).
Moreover, with the help of (3) and (4), we can introduce, by Carnap's reduction method,
(7) 'a thinks b' or 'Th(a,b)'.
Carnap recommends?? that such a predicate should be admitted. With the help of (7) we can now define explicitly:
(8) 'a is a thinking person', or 'Thp(a)'.
(9) 'a is a (personal) spirit', or 'Sp(a)'.
(10) 'a knows that b is in position c', or 'Knpos(a,b,c)'.
(11) 'a knows that b can put c into the position d', or 'Knput(a,b,c,d)'.
(12) 'a knows that b thinks c', or 'Knth(a,b,c)'.
(13) 'a is unfathomable', or 'Unkn(a)'.
(14) 'a knows the fact b', or 'Kn(a,b)'.
(15) 'a is truthful', or 'Verax(a)'.
(16) 'a is omniscient', or 'Okn(a)'.
Nothing is now easier than to give an existential formula expressing the arch-metaphyiscal assertion: that a thinking person a exists, positioned everywhere; able to put anything anywhere; thinking all and only what is in fact true; and with nobody else knowing all about a's thinking. (The uniqueness of an a of this kind is demonstrable from a's properties. We cannot, however, identify a with the God of Christianity. There is a difficulty in defining 'morally good' on a physicalistic basis. But questions of definability are anyway, in my opinion, supremely uninteresting - outside mathematics - except to essentialists: see below.)
It is clear that our purely existential arch-metaphysical formula cannot be submitted to any scientific test: there is no hope whatever of falsifying it - of finding out, if it is false, that it is false. For this reason I describe it as metaphysical - as falling outside the province of science.
But I do not think Carnap is entitled to say that it falls outside science, or outside the language of science, or that it is meaningless. (Its meaning seems to me perfectly clear; it is also clear that some logical analysts must have mistaken its empirical incredibility for meaninglessness. But one could even conceive of experiments which might 'confirm' it, in Carnap's sense, that is to say, 'weakly verify' it; see text to note 67.) It helps us very little if we are told, in Testability,?? that 'the meaning of a sentence is in a certain sense identical with the way we determine its truth and falsehood; and a sentence has meaning only if such a determination is possible'. one thing emerges clearly from this passage - that it is not Carnap's intention to allow meaning to a formula like the arch-metaphysical one. But the intention is not realized; it is not realized, I think, because it is not realizable.
I need hardly say that my only interest in constructing our arch-metaphysical existential formula is to show that there is no connection between well-formedness and scientific character. The problem of how to construct a language of science which includes all we wish to say in science but excludes those sentences which have
?? Testability, section 18, p. 5, S1.
?? Testability, section 1, end of first paragraph.
always been considered as metaphysical is a hopeless one. It is a typical pseudo-problem. And nobody has ever explained why it should be interesting to solve it (if it is soluble). Perhaps in order to be able to say, as before, that metaphysics is meaningless? But this would not mean anything like what it meant before.??a
But, it may be said, it may still be possible to realize at least part of the old Wittgensteinian dream, and to make metaphysics meaningless. For perhaps Carnap was simply too generous in allowing us to use dispositional predicates, such as 'a is able to put b into c' and 'a thinks b' (the latter characterized as a disposition to utter b). I cannot hold out any hope to those who pursue this line of thought. As I tried to show when discussing the Aufbau in section 3, we need in science genuine non-extensional universals. But in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 indicated briefly - much too briefly, for I thought that the 'reductionist'?? ideas of the Aufbau had been given up by its author - that all universals are dispositional; not only a predicate like 'soluble', but also 'dissolving' or 'dissolved'.
If I may quote from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Sc.D.', for short): 'Every descriptive statement uses... universals; every statement has the character of a theory, of a hypothesis. The
??a (Added in Proofs:)
The reaction of my positivist friends to my 'arch-metaphysical formula' (I have not yet seen Carnap's reaction, but I received a report from Bar-Hillel) was this. As this formula is well-formed, it is 'meaningful' and also 'scientific': of course, not scientifically or empirically true; but rather scientifically or empirically false; or, more precisely, disconfirmed by experience. (Some of my positivist friends also denied that my name 'arch-metaphysical' had any historical justification, and asserted that the anti-metaphysical tendencies of the Vienna Circle never had anything to do with anti-theological tendencies; and this in spite of Neurath;s physicalism which was intended as a modern version of either classical or dialectical materialism.)
Now should anyone go so far as to commit himself to the admission that my arch-metaphysical formula is well-formed and therefore empirically true or false then I think he will encounter difficulties in extricating himself from this situation. For how could anybody defend the view that my arch-metaphysical formula is false, or disconfirmed? It is certainly unfalsifiable, and non-disconfirmable. In fact, it is expressible in the form
(Ex)G(x)
- in words: 'there exists something that has the properties of God.' And on the assumption that 'G(x)' is an empirical predicate, we can prove that its probability must equal 1. (See Carnap's 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 p. 571). I can prove, further, that this means that its probability cannot be diminished by any empirical information (that is, by any information whose logical probability differs from zero). But this means, according to Carnap's Logical Foundations, that its degree of confirmation equals 1, and that it cannot be disconfirmed - as I asserted here. (See also pp. 249 f., above.)
How then can my positivist friends assert that the empirical statement '(Ex) G(x)' is false? It is, at any rate, better confirmed than any scientific theory.
My own view is that it is non-testable and therefore non-empirical and non-scientific.
?? The term 'reductionism' is, it seems, Quine's. (It corresponds closely to my own term 'inductivism'. See, for example, Carnap's report in Erkenntnis, 3, 1932, pp. 223-4.) See also my remarks in L.Sc.D., section 4, p. 34, where, in criticism of what Quine calls 'reductionism', I wrote: 'The older positivists accepted as scientific only such concepts (or terms) as... could be reduced to elementary experiences (sense-data, impressions, perceptions, experiences of remembrance [Carnap's term in the Aufbau], etc.)' See also L.Sc.D., section 14, especially notes 4 and 6, and text.
statement, "Here is a glass of water" cannot be verified by any observational experience. The reason is that the universals which occur in it cannot be correlated with any particular observational experience... By the word "glass", for example, we denote physical bodies which exhibit a certain law-like behaviour; and the same applies to the word "water". Universals... cannot be "constituted".' (That is, they cannot be defined, in the manner of the Aufbau.)??
What then is the answer to the problem of defining, or introducing, a dispositional term like 'soluble'? The answer is, simply, that the problem is insoluble. And there is no need whatever to regret this fact.
It is insoluble: for assume we have succeeded in 'reducing' 'x is soluble in water' by what Carnap calls a 'reduction-sentence', describing an operational test, such as 'if x is put into water then x is soluble in water if and only if it dissolves'. What have we gained? We have still to reduce 'water' and 'dissolves'; and it is clear that, among the operational tests which characterize water, we should have to include: 'if anything that is soluble in water is put into x, then if x is water, that thing dissolves'. In other words, not only are we forced, in introducing 'soluble', to fall back upon 'water', which is dispositional in perhaps even a higher degree, but in addition, we are forced into circularity; for we introduce 'soluble' with the help of term ('water') which in its turn cannot be operationally introduced without 'soluble'; and so on, ad infinitum.
The situation with 'x is dissolving' or 'x has dissolved' is very similar. We say that x has dissolved (rather than that it has disappeared) only if we expect to be able to show (say, by evaporating the water) that certain traces of this process can be found, and that we can, if necessary, even identify parts of the dissolved and later reclaimed substance with parts of x by tests which will have to establish, among other things, the fact that the reclaimed substance is, again, soluble.
There is a very good reason why this circle cannot be broken by establishing a definite order of reduction or introduction. It is this: our actual tests are never conclusive and always tentative. We never should agree to a ruling telling us to stop our tests at any particular point - say, when arriving at primitive predicates. All predicates are for the scientist equally dispositional, i. e. open to doubt, and to tests. This is one of the main ideas of the theory of the empirical basis in my L.Sc.D.??
?? The passage is from L.Sc.D. (end of section 25; see also sections 14 and 20). Although this passage, together with Carnap's related passage about the term 'soluble' (Testability, section 7, p. 440) may perhaps have contributed to starting the so-called 'problem of counter-factual conditionals', I have never been able, in spite of strenuous efforts, to understand this problem; or more precisely, what remains of it when one does not subscribe either to essentialism, or to phenomenalism, or to meaning-analysis.
?? In Testability, Carnap accepts most of my theory of the empirical basis (L.Sc.D., sections 25 to 30) including most of my terminology ('empirical basis', 'basic sentences', etc.; cp. also his introduction and use of the term 'observable' with L.Sc.D., section 28, p. 59). Even the slight but significant discrepancy (which I have here interpreted - see text to notes 38 to 40, above - as a survival from his days of 'methodological solipsism', and which I criticized in L.Sc.D., note 1, and text to note 2 to section 29) is now rectified (Testability, section 20; see especially 'Decision 2', p. 12, and text to note 7, p. 13). Some other points of agreement (apart from those to which Carnap himself refers) are: the thesis that there is a 'conventional component' in the acceptance or rejection of any (synthetic) sentence (cp. Testability, section 3, p. 426, with my L.Sc.D., section 30, p. 108) and the rejection of the doctrine of atomic sentences which state ultimate facts (cp. Testability, section 9, p. 448, with my L.Sc.D., section 38, p. 127). Yet in spite of this far-reaching agreement, a decisive difference remains; I stress a negative view of testability which, for me, is the same as refutability: and I accept confirmations only if they are the outcome of unsuccessful but genuine attempts at refutation. For Carnap, testability and refutability remain weakened forms of verification. The consequences of this difference will become clear in my discussion of probability and induction in section 6 below.
So much about the fact that 'soluble' cannot be 'reduced' to something that is less dispositional. As to my contention that there is no need to regret this fact, I want only to say (again) that outside mathematics and logic problems of definability are mostly gratuitous. We need many undefined terms?? whose meaning is only precariously fixed by usage - by the manner in which they are used in the context of theories, and by the procedures and practices of the laboratory. Thus the meaning of these concepts will be changeable. But this is so with all concepts, including defined ones, since a definition can only reduce the meaning of the defined term to that of undefined terms.
What then is behind the demand for definitions? An old traditions, reaching back far beyond Locke to Aristotelian essentialism; and as a result of it, a belief that, if a man was unable to explain what a word meant which he used, then this showed that 'he had given no meaning' to it (Wittgenstein), and had therefore been talking nonsense. But this Wittgensteinian belief is nonsense, since all definitions must ultimately go back to undefined terms. However, since I have discussed all this elsewhere,?? I shall say nothing further about it here.
In concluding this section, I wish to stress again the point that testability, and confirmability, even if satisfactorily analysed, are in no way better fitted to serve as criteria of meaning than the older criterion of verifiability. But I must say that, in addition, I am unable to accept Carnap's analysis of either 'test', 'testable', etc., or of 'confirmation'. The reason is, again, that his terms are substitutes for 'verification', 'verifiable', etc., slightly weakened so as to escape the objection that laws are not verifiable. But this compromise is inadequate, as we shall see in the next and last section of this paper. Acceptability in science depends, not upon anything like a truth-surrogate, but upon the severity of tests.??
?? In Testability, section 16, p. 470, Carnap hopes that we may introduce all terms on the basis of one undefined one-termed predicate (either 'bright', or alternatively 'solid'). But one cannot introduce any other term on this basis with the help of a reduction pair: at least two different 'given' predicates are needed even for one bilateral reduction sentence. Moreover, we need at least one two-termed relation.
?? See for example my Open Society, ch. 11, section ii.
?? As a consequence, the following 'content-condition' or 'entailment condition' is invalid: 'If x entails y (i. e. if the content of y is part of that of x), then y must be at least as well confirmed as x'; the invalidity of the content condition was pointed out in my L.Sc.D., sections of 82 and 83 (cp. sections 33 f.) where content is identified with degree of testability and [absolute] logical improbability, and where it was shown that the invalidity of the content condition destroys the identification of degree of confirmation with logical probability. In Testability, however, Carnap's whole theory of reduction rests upon this condition. (Cp. paragraph 1 of section 6, p. 434, and Definition I.a. on p. 435.) In Probability, p. 474 (cp. p. 397), Carnap notes the invalidity of the entailment condition (or 'consequence condition'); but he does not draw from it the (I believe necessary) conclusion that degree of confirmation cannot coincide with probability. (I have re-affirmed this conclusion in appendix *ix to L.Sc.D. Cp. notes 74 and 77 f. below, and text.)
6. PROBABILITY AND INDUCTION
The full consequences of approaching confirmation as if it was a kind of weakened verification become manifest only in Carnap's two books on probability - the big volume entitled Logical Foundations of Probability (referred to here as 'Probability') and the smaller progress-report, The Continuum of Inductive Methods (referred to here as 'Methods').??
The topics of these two books are very closely related to our problem. They deal with the theory of induction, and the method of induction has always been one of the most popular criteria of demarcation for science; for the empirical sciences are, as a rule, considered to be characterized by their methods; and these, in turn, are usually characterized as inductive.??
?? There is very little of relevance to the particular problem of demarcation in two of the three books published between Syntax and Probability - Introduction to Semantics, and Meaning and Necessity (and nothing, so far as I can see, in Formalization of Logic, which comes between them). In the Introduction I only find (a) what I take to be an allusion to Neurath's opposition to Tarski's concept of truth. (Carnap gives an excellent and tolerant reply to it (pp. vii f.), and (b) a just dismissal of the relevance of Arne Naess' questionnaire method (p. 29); see also my note 44 and text, above.) In Meaning and Necessity which I for one believe to be the best of Carnap's books (it is also perhaps the one which has been most fiercely attacked), there are a few remarks on ontology and metaphysics (p. 43) which, together with a reference to Wittgenstein (p. 9 f.), appear to indicate that Carnap still believes in the meaninglessness of metaphysics; for this reference reads: '... to know the meaning of a sentence is to know in which of the possible cases it would be true and in which not, as Wittgenstein has pointed out.' This passage, however, seems to me to be in conflict with Carnap's main conclusions, which I find convincing. For the cited passage outlines, it is clear, what Carnap calls an extensional approach, as opposed to an intensional approach to meaning; on the other hand, 'the main conclusions... are' that we must distinguish between 'understanding the meaning of a given expression and investigating whether and how it applies' (p. 202, italics mine), and meaning is explained with the help of intension, application with the help of extension. Relevant to our problem is also Carnap's 'explication' of his concept 'explication', pp. 8 f.; see below.
?? Our problem of demarcation is not explicitly discussed in these two books except for a remark in Probability, p. 31, on the 'principle of empiricism' (also mentioned on pp. 30 and 71), and a discussion of the empirical character of the 'principle of uniformity' of nature, pp. 179 ff. Both passages will be mentioned below.
This is Carnap's view too: his new criterion of demarcation is, as we have seen, confirmability. And in these two books, Carnap explains that the methods of confirming a sentence are identical with the inductive method. Thus we must conclude that the criterion of demarcation now becomes, more precisely, confirmability by inductive methods. In other words, a linguistic expression will belong to the empirical sciences if, and only if, it is logically possible to confirm it by inductive methods, or by inductive evidence.
As I have indicated in section 2, this criterion of demarcation does not satisfy my requirements: all sorts of pseudo-sciences (such as astrology) are clearly not excluded. The answer to this would be, no doubt, that the criterion is not intended to exclude what I call 'pseudo-sciences', and that these consist, simply, of false sentences, or perhaps of disconfirmed sentences, rather than of metaphysical non-confirmable ones. I am not satisfied by this answer (believing as I do that I have a criterion which excludes for example astrology and which has proved extremely fruitful in connection with a host of problems) but I am prepared to accept it, for argument's sake, and to confine myself to showing, as before, that the criterion produces the wrong demarcation.
My criticism of the verifiability criterion has always been this: against the intention of its defenders, it did not exclude obvious metaphysical statement; but it did exclude the most important and interesting of all scientific statements, that is to say, the scientific theories, the universal laws of nature. Now let us see how these two groups of statements fare under the new criterion.
As to the first, it turns out that my arch-metaphysical existential formula obtains, in Carnap's system, a high confirmation value; for it belongs to the almost-tautological ('almost L-true') sentences whose confirmation value is 1 or, in a finite world of sufficient size, indistinguishable from 1. Moreover, it is a kind of statement for which even experimental confirmation is conceivable,?? although no tests in my sense: there is no conceivable way of refuting it. Its lack of refutability puts it into the class of metaphysical sentences by my criterion of demarcation. Its high confirmation value in Carnap's sense, on the other hand, should make it vastly superior to, and more scientific than, any scientific law.
For all universal laws have zero confirmation, according to Carnap's theory, in a world which is in any sense infinite (temporal infinity suffices), as Carnap himself has shown;?? and even in a finite world their value would be indistinguishable from zero if the number of events or things in this world is sufficiently large. All this is an obvious consequences of the fact that confirmability and confirmation, in Carnap's sense, are just slightly weakened versions of verifiability and verification. The reason why the universal laws are not verifiable is thus identical with the reason why they are not confirmable: they assert a great deal about the world - more than we can ever hope either to 'verify' or to 'confirm'.
In face of the fact that natural laws turn out to be
?? There may, conceivably, be seers like Swedenborg who make accurate predictions of future events whenever they tell us (under the influence of truth drugs) that they are now inspired by that a for which our existential formula (cf p. 276) is true; and we may, conceivably, be able to build radio receivers to take their place - receivers of a-influence - that turn out (under certain circumstances) always to speak, and to predict, the truth.
?? See Probability, section 110 f., p. 571. For a similar result, see my L.Sc.D., section 80, p. 257 f.: 'one might ascribe to a hypothesis [the hypotheses discussed are universal laws].. a probability, calculated, say, by estimating the ratio between all the tests passed by it to all those [conceivable] tests which have not [yet] been attempted. But this way, too, leads nowhere; for this estimate can be computed with precision, and the result is always that the probability is zero.' (Another passage from this page is quoted in note 70, below.)
non-confirmable, according to his definition of 'degree of confirmation', Carnap adopts two courses: (a) he introduces ad hoc a new concept, called the (qualified??) 'instance confirmation of the law l', which is so defined that we sometime obtain, in place of zero, a confirmation value close to 1; (b) he explains that natural laws are not really needed in science, and that we can dispense with them. (Verificationism made them meaningless. Confirmationism merely makes them unnecessary: this is the gain which the weakening of the verifiability criterion achieves.)
I shall now discuss (a) and (b) a little more fully.
(a) Carnap realizes, of course, that his zero-confirmation of all laws is counter-intuitive. He therefore suggests measuring the intuitive 'reliability' of a law by the degree of confirmation of an instance of the law (see note 68 above). But he nowhere mentions that this new measure, introduced on p. 572 of Probability, satisfies practically none of the criteria of adequacy, and none of the theorems, which have been built up on the preceding 571 pages. This is so, however, and the reason is that the 'instance confirmation' of a law l on the evidence e is simply not a probability function of l and e (not a 'regular c-function' of l and e).
And it could hardly be otherwise. We are given, up to p. 570, a detailed theory of confirmation (in the sense of probability1). on p. 571, we find that for a law this confirmation is zero. We are now faced with the following alternatives: either (i) we accept the result as correct, and consequently say that the degree of rational belief in a well-supported law cannot differ appreciably from zero - or from that of a refuted law, or even from that of a self-contradictory sentence; or (ii) we take the result as a refutation of the claim that our theory has supplied us with an adequate definition of 'degree of confirmation'. The ad hoc introduction of a new measure, in order to escape from an unintended result, is hardly an acceptable third possibility. But what is most unsatisfactory is to take this momentous step - a break with the method of 'explication' (see note 69, below) used so far - without giving any warning to the reader: this may result in the serious misconception that only a minor adjustment has been made.
For if we are to take probability, or confirmation, at all seriously, then the adjustment could not have been more radical; it replaces a confirmation function whose value is 0 by another whose value will be often close to 1. If we permit ourselves the freedom thus to introduce a new measure with no better justification than that the zero probability was counter-intuitive while the probability near to 1
?? I confine my discussion to what Carnap calls (Probability, p. 572 f.) the 'qualified' instance confirmation; (a) because Carnap prefers it as representing 'still more accurately' our intuitions; and (b) because in a sufficiently complex world (with sufficiently many predicates) the non-qualified instance confirmation leads in all interesting cases to extremely low confirmation values. on the other hand, the 'qualified instance confirmation' (this I mention only in passing) is squarely hit by the so-called 'paradox of confirmation' (see Probability, p. 469). But this is a defect which (I found) can always be repaired - in this case by making the two arguments of the definiens in (15), p. 573, symmetrical with respect to the two logically equivalent implicative formulations of l; they become respectively (after simplification), ‘j ⊃ h'’ and ‘e.(h' ⊃ j)’. This avoids the paradox.
'seems to represent... still more accurately what is vaguely meant by the reliability of a law',?? then we can obtain for any sentence any probability (or degree of confirmation) we like.
Moreover, Carnap nowhere attempts to show that the newly introduced instance confirmation is adequate, or at least consistent (which it is not; see note 68 above). No attempt is made, for example, to show that every refuted law obtains a lower instance confirmation than any of those which have stood up to tests.
That this minimum requirement cannot be satisfied (even after repairing the inconsistency) may be shown with the help of Carnap's example, the law 'all swans are white'. This law ought to be considered as falsified if our evidence consists of a flock of one black and, say, 1000 white swans. But upon this evidence, the instance confirmation, instead of being zero, will be very near to 1. (The precise difference from 1 will depend upon the choice of the parameter λ discussed below.) More generally, if a theory is again and again falsified, on the average, in every n
In discussing in my L.Sc.D. a theory of Reichenbach's which leads to mathematically equivalent result,?? I described this unintended consequence of his theory as 'devastating'. After 20 years, I still think it is.
(b) With his doctrine that laws may be dispensed with in science, Carnap in effect returns to a position very similar to the one he had held in the heyday of verificationism (viz. that the language of science is 'molecular') and which he had given up in the Syntax and in Testability. Wittgenstein and Schlick, finding that natural laws are non-verifiable, concluded from this that they are not genuine sentences (overlooking that they were thus committed to calling them
?? Probability, p. 572. Cp. Meaning and Necessity, section 2, pp. 7 f.: 'The task of making more exact a vague or not quite exact concept... belongs to the most important tasks of logical analysis... We call this the task of... giving an explication for the earlier concept...' (See also Probability, section 2, p. 3.) I must say here (again only in passing) that I disagree with Carnap's views on explication. My main point is that I do not believe that one can speak about exactness, except in the relative sense of exactness sufficient for a particular given purpose - the purpose of solving a certain given problem. Accordingly, concepts cannot be 'explicated' as such, but only within the framework of a definite problem-situation. Or in other words, adequacy can only be judged if we are given a genuine problem (it must not in its turn be a problem of explication) for the solution of which the 'explication' or 'analysis' is undertaken.
?? The confirmation values are identical if Carnap's λ (see below) is zero; and for any finite λ, the value of Carnap's instance confirmation approaches indefinitely, with accumulating evidence, the value criticized by me in my old discussion of Reichenbach's theory. I quote from my L.Sc.D., section 80, p. 257, so far as it fits the present case: 'The probability of this hypothesis [I am speaking quite generally of universal laws] would then be determined by the truth frequency of the [singular] statements which correspond to it[i. e. which are its instances]. A hypothesis would thus have a probability of ½ if, on the average, it is contradicted by every second statement of this sequence [i. e. by every second of its instances]! In order to escape from this devastating conclusion, one might still try two more expedients.' (One of these two leads to the zero probability of all universal laws: the passage is quoted in note 67, above.)
'meaningless pseudo-sentences'). Not unlike Mill they described them as rules for the derivation of genuine (singular) sentences - the instances of the law - from other genuine sentences (the initial conditions). I criticized this doctrine in my L.Sc.D.; and when Carnap accepted my criticism in the Syntax and in Testability?? I thought that the doctrine was dead. But with Carnap's return to verificationism (in a weakened form), it has come to life again (in a weakened form): I do not think that the odds for its survival are good).
In one respect Carnap goes even further than Schlick. Schlick believed that without laws we could not make prediction. Carnap however asserts that 'the use of laws is not indispensable for making predictions'.?? And he continues: 'Nevertheless it is expedient, of course, to state universal laws in books on physics, biology, psychology, etc. Although these laws stated by scientists do not have a high degree of confirmation', he writes (but this is an understatement, since their degree of confirmation could not be lower), 'they have a high qualified instance confirmation....'
While reading through this section of my paper, Dr J. Agassi has found a simple (and I believe new) paradox of inductive confirmation which he has permitted me to report here.??a It makes use of what I propose to call an 'Agassi-predicate' - a factual predicate 'A(x)' which is so chosen as to hold for all individuals (events, or perhaps things) occurring in the evidence at our disposal; but not for the majority of the others. For example, we may choose (at present) to define 'A(x)' as 'x has occurred (or has been observed) before 1st January 1965'. (Another choice - 'Berkeley's choice', as it were - would be 'x has been perceived'.) Then it follows from Carnap's theory that, with growing evidence, the degree of confirmation of 'A(a)' must become indistinguishable from 1 for any individual a in the world (present, past, or future). And the same holds for the (qualified or unqualified) instance confirmation of the universal law, '(x)A(x)' - a law stating that all events in the world (present, past, or future) occur before 1965; which makes 1965 an upper bound for the duration of the world. Clearly, the famous cosmological problem of the approximate period of the creation can be equally easily dealt with. Nevertheless, it would hardly be expedient to state universal laws like those of Agassi in books on cosmology - in spite of their high instance confirmation.
In the last pages of Testability Carnap discussed the sentence 'If all minds... should disappear from the universe, the stars would still go on in their courses'. Lewis and Schlick asserted, correctly, that this sentence was not verifiable; and Carnap replied, equally correctly (in my opinion) that it was a perfectly legitimate scientific assertion,
?? See L.Sc.D., notes 7 and 8 to section 4, and 1 to section 78; and Testability, note 20 to section 23, p. 19. See also notes 24 f. above.
?? Probability, p. 575.
??a (Added in proofs.) Professor Nelson Goodman, to whom I sent a stencilled copy of this paper, has kindly informed me that he has anticipated Dr Agassi in the discovery of this paradox and of what I have here called an 'Agassi predicate'. See Goodman's Fact, Fiction, & Forecast, 1955, pp. 74 f.
based as it was on well confirmed universal laws. But by now, universal laws have become dispensable; and without them the sentence in question cannot possibly be upheld. Moreover, one sees easily from Agassi's argument that a sentence that contradicts it can be maximally confirmed.
But I do not intend to use this one case - the status of natural laws - as my main argument in support of my contention that Carnap's analyses of confirmation, and with it his criterion of demarcation, are inadequate. I therefore now proceed to offer in support of this contention arguments which are completely independent of the case of natural laws, although they may allow us to see more clearly why this inadequacy was bound to arise in Carnap's theory.
As motto for my criticism I take the following challenging passage of Carnap's:??
'... if it could be shown that another method, for instance a new definition for degree of confirmation, leads in certain cases to numerical values more adequate than those furnished by c*, that would constitute an important criticism. Or, if someone... were to show that any adequate explicatum must fulfil a certain requirement and that c* does not fulfil it, it might be a helpful first step towards a better solution.'
I shall take up both alternatives of this challenge but reverse their order: (1) I shall show that an adequate concept of confirmation cannot satisfy the traditional rules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2) I shall give an alternative definition of degree of confirmation.
Ultimately, I shall show (3) that Carnap's theory of confirmation appears to involve (a) an infinite regress, and (b) a priori theory of the mutual dependence of all atomic sentences with like predicates.
(1) To begin with, I suggest that we distinguish not only between logical probability (probability1) and relative frequency (probability2), as Carnap does, but between (at least) three different concepts - the third being degree of confirmation.
Surely, as a first suggestion this is unobjectionable: we could still decide, after due investigation, that logical probability can be used as the explicandum for degree of confirmation. Carnap, unfortunately, prejudges the issue. He assumes, without any further discussion, that his distinction between two probability concepts is sufficient, neglecting the warnings of my old book.??
It can be shown that confirmation, as Carnap himself understands this concept, cannot be logical probability. I offer three arguments.
?? Probability, section 110, p. 563.
?? L.Sc.D., before section 79: 'Instead of discussing the "probability" of a hypothesis we should try to assess... how far it has been corroborated [or confirmed].' Or section 82: 'This shows that it is not so much the number of the corroborating [confirming] instances which determines its degree of corroboration as the severity of the various tests to which the hypothesis in question... has been subjected. [This] in its turn depends upon the degree of testability... of the hypothesis...' And section 83: 'A theory can be the better corroborated [confirmed] the better it is testable. Testability, however, is converse to... logical probability...'
(a) We can easily agree on the kind of thing we may both call, provisionally, 'probability'; for we both call 'probability' something that satisfies the laws of the calculus of probability.??
More specifically, Carnap says of the concept of logical probability1 that it satisfies certain axiom systems, and in any case the (special) addition principle and (general) multiplication principle.?? Now it is an elementary consequence of the latter that the more a statement asserts, the less probable it is. This may be expressed by saying that the logical probability of a sentence x on a given evidence y decreases when the informative content of x increases.??
But this is sufficient to show that a high probability cannot be one of the aims of science. For the scientist is most interested in theories with high content. He does not care for highly probable trivialities but for bold and severely testable (and severely tested) hypotheses. If (as Carnap tells us) a high degree of confirmation is one of the things we aim at in science, then degree of confirmation cannot be identified with probability.
This may sound paradoxical to some people. But if high probability were an aim of science, then scientists should say as little as possible, and preferably utter tautologies only. But their aim is to 'advance' science, that is to add to its content. Yet this means lowering its probability. And in view of the high content of universal laws, it is neither surprising to find that their probability is zero, nor that those philosophers who believe that science must aim at high probabilities cannot do justice to facts such as these: that the formulation (and testing) of universal laws is considered their most important aim by most scientists: or that the intersubjective testability of science depends upon these laws (as I pointed out in section 8 of my L.Sc.D.).
From what has been said it should be clear that an adequately defined 'degree of confirmation' cannot satisfy the general multiplication principle for probabilities.??
?? In a note in Mind, 47, 1938, p. 275 f., I said that it was 'desirable to construct a system of axioms' for probability, 'in such a way that it can be... interpreted by any of the different interpretations', of which 'the three most discussed are: (1) the classical definition of probability as the ratio of the favourable to the equally possible cases. (2) the frequency theory... (3) the logical theory, defining probability as the degree of a logical relation between sentences....' (I took this classification from L.Sc.D., section 48, reversing the order of (2) and (3). A similar classification can be found in Probability, p. 24. Contrast also the discussion of the arguments of the probability function in my Mind note with Probability, section 10, A & B, and section 52. In this note I gave an independent formal axiom system which, however, I have much simplified since. It was published in the B.J.P.S., 6, 1955, p. 53. (My Mind note has now been reprinted in L.Sc.D., pp. 320-2.)
?? Probability, section 53, p. 285; see also section 62. pp. 337 ff.
?? This is equivalent to the 'content condition' (see note 63 above). Since Carnap considers this condition to be invalid (Probability, section 87, p. 474 'consequence condition'), he is, I believe, committed to agreeing that 'degree of confirmation' cannot be a 'regular confirmation function', i. e. a probability1.
?? See sections 4-5 of my note 'Degree of Confirmation', L.Sc.D., pp. 396-8. Dr Y. Bar-Hillel has drawn my attention to the fact that some of my examples were anticipated by Carnap in Probability, section 71, p. 394 f., case 3b. Carnap infers from them that the content condition (see notes 63 and 77 above) is 'invalid', but fails to infer that all 'regular confirmation functions' are inadequate.
To sum up point (a). Since we aim in science at a high content, we do not aim at a high probability.
(b) The severity of possible tests of a statement or a theory depends (among other factors) on the precision of its assertions and upon its predictive power; in other words, upon its informative content (which increases with these two factors). This may be expressed by saying that the degree of testability of a statement increases with its content. But the better a statement can be tested, the better it can be confirmed, i. e. attested by its tests. Thus we find that the opportunities of confirming a statement, and accordingly the degree of its confirmability or corroborability or attestability, increase with its testability, and with its content.??
To sum up point (b). Since we want a high degree of confirmation (or corroboration), we need a high content (and thus a low absolute probability).
(c) Those who identify confirmation with probability must believe that a high degree of probability is desirable. They implicitly accept the rule: 'Always choose the most probable hypothesis!'
Now it can be easily shown that this rule is equivalent to the following rule: 'Always choose the hypothesis which goes as little beyond the evidence as possible!' And this, in turn, can be shown to be equivalent, not only to 'Always accept the hypothesis with the lowest content (within the limits of your task, for example, your task of predicting)!', but also to 'Always choose the hypothesis which has the highest degree of ad hoc character (within the limits of your task)!' This is an unintended consequence of the fact that a highly probable hypothesis is one which fits the known facts, going as little as possible beyond them.
But it is well known that ad hoc hypotheses are disliked by scientists: they are, at best, stop-gaps, not real aims. (Scientists prefer a bold hypothesis because it can be more severely tested, and independently tested.)
To sum up point (c). Aiming at high probability entails a counter-intuitive rule favouring ad hoc hypotheses.
These three arguments exemplify my own point of view, for I see in a confirming instance the result of a severe test, or of an attempted (but unsuccessful) refutation of the theory. Those, on the other hand, who do not look for severe tests, but rather for 'confirmation' in the sense of the old idea of 'verification' (or a weakened version of it), come to a different idea of confirmability: a sentence will be the better confirmable the more nearly verifiable it is, or the more nearly deducible from observation sentences. It is clear, in this case, that universal laws are not (as in our analysis) highly confirmable, but that owing to their high content their confirmability will be zero.
(2) In taking up the challenge to construct a better definition of confirmation, I wish to say first that I do not believe that it is possible to give a completely satisfactory definition. My reason is that a theory which has been tested with great ingenuity and with the sincere attempt to refute it will have a higher degree of confirmation
?? For a fuller argument see L.Sc.D., sections 82 f.
than one which has been tested with laxity; and I do not think that we can completely formalize what we mean by an ingenious and sincere test.?? Nor do I think that it is an important task to give an adequate definition of degree of confirmation. (In my view the importance, if any, of giving the best possible definition lies in the fact that such a definition show clearly the inadequacy of all probability theories posing as theories of induction.) I have given what I consider a reasonably adequate definition elsewhere.?? I may give here a slightly simpler definition (which satisfies the same desiderata or conditions of adequacy):
C(x,y
Here 'C(x,y)' means 'the degree of confirmation of x by y', while 'p(x,y)' and 'p(x)' are relative and absolute probabilities, respectively. The definition can be relativized:
C(x,y,z
Here z should be taken as the general 'background knowledge' (the old evidence, and old and new initial conditions) including, if we wish, accepted theories, while y should be taken as representing those (new) observational results (excluded from z) which may be claimed to confirm the (new) explanatory hypothesis, x.??
My definition satisfies, among other conditions of adequacy,?? the condition that the confirmability of a statement - its highest possible degree of confirmation - equals its content (i. e. the degree of its testability).
Another important property of this concept is that it satisfies the condition that the severity of a test (measured by the improbability of the test-instance) has an almost-additive influence upon the resultant degree of confirmation of the theory. This shows that some at least of the intuitive demands are satisfied.
My definition does not automatically exclude ad hoc hypotheses, but it can be shown to give most reasonable results if combined with a rule excluding ad hoc hypotheses.??
?? See the end of my note 'Degree of Confirmation' referred to in note 78 (L.Sc.D., p 402).
?? 'Degree of Confirmation', L.Sc.D., p. 395 f. Cp. my remark, p. 402: 'The particular way in which C(x,y) is here defined I consider unimportant. What may be important are the desiderata, and the fact that they can be satisfied together.'
?? That is to say, the total evidence e is to be partitioned into y and z ; and y and z should be so chosen as to give C(x,y,z) the highest value possible for x, on the available total evidence.
?? Called 'desiderata' in the note in question. Kemeny has rightly stressed that the conditions of adequacy should not be introduced to fit the explicatum. That this is not the case here is perhaps best proved by the fact that I have now improved my definition (by simplifying it) without changing my desiderata.
?? The rule for the exclusion of ad hoc hypotheses may take the following form: the hypothesis must not repeat (except in a completely generalized form) the evidence, or any conjunctive component of it. That is to say x = 'This swan is white', is not acceptable as a hypothesis to explain the evidence y = 'This swan is white' although 'All swans are white' would be acceptable; and no explanation x of y must be circular in this sense with respect to any (non-redundant) conjunctive component of y. This leads to an emphasis upon universal laws as indispensable, while Carnap believes, as we have seen (see above, and Probability, section 110. H. esp. p. 575) that universal laws can be dispensed with.
So much about my own present positive theory (which goes very considerably beyond my L.Sc.D.). But I must return to my critical task: I believe that my positive theory strongly suggests that the fault lies with the verificationist and inductivist approach which - in spite of the attention paid to my criticism - has never been completely abandoned by Carnap. But inductive logic is impossible. I shall try to show this (following my old L. Sc. D.) as my last critical point.
(3) I asserted, in my L.Sc.D., that an inductive logic must involve either (a) an infinite regress (discovered by Hume), or (b) the acceptance (with Kant) of some synthetic principle as valid a priori. I have a strong suspicion that Carnap's theory of induction can be criticized as involving both (a) and (b).
(a) If we need, in order to justify induction as probable, a (probable) principle of induction, such as a principle of the uniformity of nature, then we also need a second such principle in order to justify the induction of the first. Carnap, in his section on the 'Presupposition of Induction'?? introduces a principle of uniformity. He does not mention the objection of a regress, but a remark in his exposition seems to indicate that he has it in mind: 'The opponents', he writes (p. 181), 'would perhaps say that the statement of the probability of uniformity must be taken as a factual statement.... Our reply is:... this statement is itself analytic.' I was far from convinced by Carnap's arguments; but since he indicates that 'the whole problem of the justification and the presupposition of inductive method' will be treated in a later volume 'in more exact, technical terms', it is perhaps better to suppress, at this stage, my inclination to offer a proof that no such principle of uniformity can be analytic (except in Pickwickian sense of 'analytic'); especially since my discussion of point (b) will perhaps indicate the lines on which a proof of this kind might proceed.
(b) Natural laws, or more generally, scientific theories, whether of a causal or a statistical character, are hypotheses about some dependence. They assert, roughly speaking, that certain events (or statements describing them) are in fact not independent of others, although so far as their purely logical relations go they are independent. Let us take two possible facts which are, we first assume, completely unconnected (say 'Chunky is clever' and 'Sandy is clever'), described by the two statements x and y. Then somebody may conjecture - perhaps mistakenly - that they are connected (that Chunky is a relation of Sandy's); and that the information or evidence y increases the probability of x. If he is wrong, that is, if x and y are independent, then we have
(1) p(x,y) = p(x)
?? Probability, section 41, F., pp. 177 ff., especially pp. 179, 181. For the passages from L.Sc.D., section 1, pp. 28 f, and 81, pp. 263 f.
which is equivalent to
(2) p(x,y) = p(x)p(y)
This is the usual definition of independence.
If the conjecture that the events are connected or inter-dependent is correct, then we have
(3) p(x,y) > p(x)
that is, the information y raises the probability of x above its 'absolute' or 'initial' value p(x).
I believe - as I think most empiricists do - that any such conjecture about the inter-dependence or correlation of events should be formulated as a separate hypothesis, or as a natural law ('Cleverness runs in families') to be submitted first to a process of careful formulation, with the aim of making it as highly testable as possible, and after that to severe empirical tests.
Carnap is of a different opinion. He proposes that we accept (as probable) a principle to the effect that the evidence 'Sandy is clever' increases the probability of 'A is clever' for any individual A - whether 'A' is the name of a cat, a dog, an apple, a tennis ball, or a cathedral. This is a consequence of the definition of 'degree of confirmation' which he proposes. According to this definition, any two sentences with the same predicate ('clever' or 'sick') and different subjects are inter-dependent or positively correlated, whatever the subjects may be, and wherever they may be situated in the world; this is the actual content of his principle of uniformity.
I am far from certain whether he has realized these consequences of his theory, for he nowhere mentions them explicitly. But he introduces a universal parameter which he calls λ; and λ + 1 turns out, on a simple mathematical calculation, to be the reciprocal of the 'logical correlation coefficient'?? for any two sentences with the same predicate and different subjects.?? (The assumption that λ is infinite corresponds to the assumption of independence.)
According to Carnap, we are bound to choose a finite value of λ when we wish to choose our definition of the probability1 function. The choice of λ, and with it of the degree of correlation between any two sentences with the same predicate, thus appears to be part of a 'decision' or 'convention': the choice of a definition of probability. It looks, therefore, as if no statement about the world
?? The 'logical correlation coefficient' of x and y can be defined as (p(xy) - p(x)p(y))/(p(x)p(y)p(x(-))p(y(-)))½. Admitting this formula for all ('regular') probability functions means a slight generalization of a suggestion which is made in Kemeny and Oppenheim, 'Degree of Factual Support', Philos. of Sci., 19, p. 314, formula (7), for a special probability function in which all atomic sentences are (absolutely) independent. (It so happens that I think that this special function is the only one which is adequate.)
?? We can prove this for example, by taking Methods. p. 30, formula (9-8), putting s = sM = 1; w/k = c(x) = c(x(-)) = c(y); and replacing 'c(hM.eM)' by 'c(x,y)'. We obtain λ = c(x(-)y)/(c(xy) - c(x)c(y)), which shows that λ is the reciprocal of a dependence-measure, and from this 1/(λ + 1) = (c(xy) - c(x)c(y))/c(x(-))c(y), which, as c(x) = c(x(-)) = c(y), is the logical correlation coefficient. - I may perhaps say here that I prefer the term 'dependence' to Keynes' and Carnap's term 'relevance': looking (like Carnap) at probability as a generalized deductive logic, I take probabilistic dependence as a generalization of logical dependence.
was involved in the choice of λ. But it is a fact that our choice of λ is equivalent to the most sweeping assertion of dependence that one can imagine. It is equivalent to the acceptance of as many natural laws as there are predicates, each asserting the same degree of dependence of any two events with like predicates in the world. And since such an assumption about the world is made in the form of a non-testable act - the introduction of an definition - there seems to me an element of apriorism involved.
One might still say, perhaps, that there is no apriorism here since the dependencies mentioned are a consequence of a definition (that of probability or degree of confirmation), which rests on a convention or a 'decision', and is therefore analytic. But Carnap gives two reasons for his choice of his confirmation function which do not seem to fit this view. The first of the two reasons I have in mind is that his confirmation function, as he remarks, is the only one (among those which suggest themselves) 'which is not entirely inadequate';?? inadequate, that is, for explaining (or 'explicating') the undoubted fact that we can learn from experience. Now this fact is empirical; and a theory whose adequacy is judged by its ability to explain or cohere with this fact does not quite look like being analytic. It is interesting to see that Carnap's argument in favour of his choice of λ (which I am suspecting of apriorism) is the same as Kant's or Russell's, or Jeffreys's; it is what Kant called a 'transcendental' argument ('How is knowledge possible?'), the appeal to the fact that we possess empirical knowledge, i. e. that we can learn from experience. The second of the two reasons is Carnap's argument that the adoption of an appropriate λ (one which is neither infinite, for an infinite λ is equivalent to independence, nor zero) would be more successful in nearly all universes (except in the two extreme cases in which all individuals are independent or have like properties). All these reasons seem to me to suggest that the choice of λ, i. e. of a confirmation function, is to depend upon its success, or upon the probability of its success, in the world. But then it would not be analytic - in spite of the fact that it is also a 'decision' concerning the adoption of a definition. I think that it can be explained how this may be so. We can, if we like, define the word 'truth' so that it comprises some of those statements we usually call 'false'. Similarly we can define 'probable' or 'confirmed' so that absurd statements get a 'high probability'. All this is purely conventional or verbal, as long as we do not take these definitions as 'adequate explications'. But if we do, then the question is no longer conventional, or analytic. For to say of a contingent or factual statement x that it is true, in an adequate sense of the word 'true', is to make a factual statement; and so it is with 'x is (now) highly probable'. It is the same with 'x is strongly dependent upon y' and 'x is independent of y' - the statements whose fate is decided upon when we choose λ. The choice of λ is therefore indeed equivalent to that of adopting a sweeping though unformulated statement about the general interdependence or uniformity of the world.
But this statement is adopted without any empirical evidence.
?? Probability, section 110, p. 565; cp. Methods, section 18, p. 53
Indeed, Carnap shows?? that without adopting it we can never learn from empirical evidence (according to his theory of knowledge). Thus empirical evidence does not and cannot count before the adoption of a finite λ. This is why it has to be adopted a priori.
'The principle of empiricism', Carnap writes in another context,?? 'can be violated only by the assertion of a factual (synthetic) sentence without a sufficient empirical foundation, or by the thesis of apriorism when it contends that for knowledge with respect to certain factual sentences no empirical foundation is required.' I believe that what we have observed here shows that there is a third way of violating the principle of empiricism. We have seen how it can be violated by constructing a theory of knowledge which cannot do without a principle of induction - a principle that tells us in effect that the world is (or very probably is) a place in which men can learn from experience; and that it will remain (or very probably remain) so in future. I do not believe that a cosmological principle of this can be a principle of pure logic. But it is introduced in such a way that it cannot be based upon experience either. It therefore seems to me that it cannot be anything else but a principle of a priori metaphysics.
Nothing but the synthetic, the factual, character of λ seems to be able to explain Carnap's suggestion that we may try out which value of λ is most successful in a given world. But since empirical evidence does not count without the prior adoption of a finite λ, there can be no clear procedure for testing the λ chosen by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My own feeling is that I prefer in any case to apply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to the universal laws which are indispensable for intersubjective science; which are clearly, and admittedly, factual; and which we may succeed in making severely testable, with the aim of eliminating all those theories that can be discovered to be erroneous.
I am glad to have been given an opportunity to get these matters off my mind - or off my chest, as physicalists might say. I do not doubt that, with another vacation in the Tyrol, and another climb up the Semantische Schnuppe, Carnap and I could reach agreement on most of these points; for we both, I trust, belong to the fraternity of rationalists - the fraternity of those who are eager to argue, and to learn from one another. But since the physical gap between us seems unbridgeable I now send to him across the ocean - knowing that soon I shall be at the receiving end - these my best barbed arrows, with my best brotherly regards.
?? Probability, section 110, p. 556.
?? Probability, section 10, p. 31.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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