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자본론으로만 충분하지 않다/ 한성안/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11. 22:27

경제경제일반

‘자본론’을 잠시 덮자

등록 :2015-05-10 20:23

한성안의 경제산책

당연히 경제학은 경제적 요인에 주목하며 경제현상을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도하면 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 않은 정책을 만들어낸다. 경제현상을 경제적 논리에 따라서만 해석하는 ‘경제적 일원론’이 그것이다. 모든 경제활동을 경제적 손익관계로 이해하는 주류경제학이 대표적 사례이지만 비주류경제학에서도 그런 관점을 고수하는 경제학자들이 적지 않다.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이 그렇다. 주류경제학이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으로 자본주의를 설명하듯이 이들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으로 모든 경제현상을 설명하고자 한다. 경제는 물론 정치와 도덕마저 자본의 논리로 설명하는 이들은 ‘자본논리학파’로 불린다.

1960년대 후반 독일에서 국가를 <자본론>에 의거하여 도출해내는 시도가 일었다. 자본주의에서 국가가 왜 존재하는가? 이들에 의하면 개별 자본은 각각 자기 이익만을 위해 서로 경쟁한다. 경쟁의 결과는 어떤가? 주류경제학자들의 생각대로 경쟁이 생산성을 높여주며 시장을 안정화시켜 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파괴적 결과를 낳는다. 경쟁압력은 독점이라는 괴물을 탄생시킨다. 그게 끝이 아니다. “잉여노동에 대한 그 억누를 수 없는 열정, 그 인간 늑대적 굶주림”에 미친 개별 자본은 자신의 착취기반인 노동자의 노동능력을 파괴해버리는 우를 범한다. 자본의 이기심과 통제할 수 없는 탐욕이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개별 자본의 이런 맹목적 충동을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전체 자본가들의 재생산을 보장해주는 집합적 자본, 곧 ‘총자본’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국가다. 비록 자본의 외곽에서 공익의 수호자인 척하지만 실상은 자본의 법칙을 보완하고 지도하는 자본의 또다른 측면, 곧 자본의 ‘의식적’ 측면일 뿐이다. 국가가 수도, 전기 등 ‘공공재’를 공급하는 것은 총자본의 재생산을 위함이다.

자본논리학적 설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최저임금을 보장하고 사회복지를 제공하는 것도 노동력의 재생산이라는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사육장을 잘 관리하여 키워 먹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최저임금과 복지제도는 고차원적 공익이라든가 정의와 공공선 등 고상한 도덕적 목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이다. 자본의 경제적 논리로 최저임금과 복지제도를 설명하는 방식이 완전히 잘못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노동자의 고임금과 높은 사회보장 수준이 총수요를 끌어올려 불황 극복에 도움이 된다고 총자본을 설득할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이런 결과만 실현되는 건 아니다. 관련 주제를 다룬 연구논문들 중 약 3분의 2 정도만 총자본의 확대재생산에 도움이 된다고 확인해주고 있을 뿐, 그 경제적 효과도 그리 크지 않았다. 미미한 경제적 효과에 3분의 1의 리스크마저 부담해야 하니 이런 설명방식에 총자본이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한성안 영산대 교수
한성안 영산대 교수
공공재의 공급, 최저임금의 인상, 사회복지의 확충 이 모든 것을 자본의 논리에 기댈 수 없다. 좋은 사회를 희구한다면 자본의 논리를 거스르는 정치적 투쟁과 사회적 연대, 인문학자들의 메시아적 외침, 그리고 지식인들의 양심선언, 시민단체들의 고발과 감시가 필요하다. <자본론>은 물론이고 자본의 논리를 거스르는 ‘정치’경제학과 ‘사회’경제학, 나아가 인권과 민주주의, 정의를 지향하는 ‘인문’경제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성안 영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