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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무상하다/ 천정근/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5. 27. 16:11

사회종교

권력은 무상하다

등록 :2015-05-26 20:57

 

 

빛깔 있는 이야기

멘시코프는 비천한 출신으로 문맹에 가까웠다. 가난 때문에 어려서 빵가게로 보내졌고 배가 고파 군대에 들어갔다. 거기서 황위쟁탈전에서 밀려나 전쟁놀이로 소일하던 미래권력 표트르를 만났다. 저돌적인 충성심만이 그의 유일한 자산이었다. 1689년 표트르는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에 복귀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스만튀르크를 제압하여 러시아를 유럽의 굴국으로 도약시킨 표트르 대제 시대의 개막이었다. 멘시코프의 인생 대회전의 서막이기도 했다.

멘시코프는 러시아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공작이자 대원수가 되었다. 건장한 키에 늘씬한 몸매, 날카로운 콧날에 인상적인 눈매를 지닌 그는 말솜씨가 유창했고 사교에도 능란했다. ‘나는 그에게 묻지 않는 게 없지만 멘시코프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유년 시절 외가 일족이 살해되는 것을 본 황제는 귀족을 믿지 않았다. 예카테리나 황후도 그를 존중했다. 전쟁고아였던 자신을 황제에게 바친 사람이 그였으니까. 표트르 사후 황후는 차르에 추대됐다. 멘시코프는 여황제의 후견인이자 러시아의 실질적 군주였다. 황후가 죽자 맏딸을 11살의 황제와 약혼시키고 섭정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황제는 친위대를 조직해 무방비 상태의 그를 전격 체포했다. 그리고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혐의로 시베리아로 추방됐다. 수리코프의 그림 <베료조프의 멘시코프>는 그의 말년을 서사적으로 보여준다. 어둡고 비좁은 통나무집에 일가족이 앉아 있다. 황후가 되지 못한 맏딸은 부친을 의지해 있고 둘째딸은 십자가 모양의 촛대 아래서 성경을 읽는다. 넋 나간 아들은 촛대를 만지작거린다. 촛대에 초는 없다. 의상만이 희미한 옛 생활을 말해줄 뿐이다. 멘시코프는 담담하고 의연하다. 무언가 응시하는 눈빛만 처절하리만치 형형하다. 무엇을 생각했을까?

멘시코프에겐 적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태생적 원수는 탐욕이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 총독으로 섬 하나를 차지했고 황궁 근처에 저택도 소유했다. 각지에 봉토가 있었고 세금징수의 권리를 가졌다. 그런데도 만족을 몰랐다. 표트르가 횡령 문제로 그를 때린 적도 있었다. “비천하고 욕심만 많은 놈, 나가서 빵장수나 계속하거라.” 멘시코프는 옷을 갈아입고 빵바구니를 메고 황제에게 갔다. “빵 사시오. 빵 사시오. 갓 나온 새 빵이오.” 황제는 기가 막혀 웃고 그를 용서해주었다.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
천정근 목사(안양 자유인교회)
<베료조프의 멘시코프>는 권력의 무상함과 인간의 본질을 환기시킨다. 표트르 시대의 종막을 웅변한다. 멘시코프는 무엇이었을까?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은 다 허황되고 위태롭다. 높은 곳은 깎아내리고 낮은 곳을 끌어올려 평형을 맞추려는 게 자연의 이치다. 마침 언론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몰락하는 멘시코프를 본다. 현실이 과거를 재현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미래의 멘시코프들에게 수리코프의 그림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자기 운명을 볼 수 있을까? ‘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멘시코프는 시베리아에서 벌목공으로 살다가 죽었다. 향년 56, 짧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