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유능한 정부를 기대하지 말라/ 후지이 다케시/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6. 8. 09:47

사설.칼럼칼럼

[세상 읽기] 흐린 날엔 /후지이 다케시

등록 :2015-06-07 18:51

 

강의 준비로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시 읽었다. 주인공은 장인이 경영하는 서울의 제약회사에서 전무 승진을 앞두고 고향인 ‘무진’으로 잠시 내려간다. 그는 거기서 우연히 한 음악선생을 만나고 사랑을 느끼지만 결국 그 여성을 버리고 다시 서울로 떠난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진부하지만, 이 소설은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이번에 읽으면서 눈에 띈 것은 ‘어떤 개인 날’이라는 노래에 관한 부분이었다. 주인공이 술자리에서 만난 음악선생이 대학의 졸업 연주회 때 불렀다는 이 노래는, 실제 그 자리에서 부르게 되는 ‘목포의 눈물’과 대비되고 있다. 예전에 읽었을 때는 서울과 시골이라는 대비 속에서 단지 ‘세련된 서울’을 뜻하는 것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개인 날’은 뒤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주인공과 음악선생은 성관계를 가진 다음 바닷가에 나가는데, 거기서 음악선생이 ‘어떤 개인 날’을 불러 준다고 하자 주인공은 “그렇지만 오늘은 흐린걸” 하고 대꾸한다. 말장난 같은 이 대화를 통해 ‘어떤 개인 날’은 ‘흐린 날’과 대비된다.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어떤 개인 날’은, 버림받은 주인공이 그래도 어떤 갠 날에는 임이 오신다고 믿는 노래다. 이는 ‘무진’에서 탈출만을 꿈꾸는 음악선생의 모습이기도 하다. 애절하긴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헛된 희망에 매달리는 모습 말이다. 이렇게 갠 날이 오기를 꿈꾸는 대신 김승옥은 ‘흐린 날의 윤리’라고 할 만한 것을 제시한다. 위에서 본 둘의 대화 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어진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더 가까이 끌어당겨주기로 하자.”

하지만 결국 주인공은 그 손을 놔버렸다. 결말에서 주인공은 서울로 떠나며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를 통해 김승옥은 1960년대 초반에 외쳐지던 ‘조국 근대화’가 무엇을 외면하는 것인지 말한다. 흐린 날에 잡던 손을 놔버리고 홀로 탈출하는 행위가, ‘경제성장’을 추동한 바로 그 행위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말이다. 하지만 단지 부끄러워하는 것으로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50년 지난 지금은 과연 어떨까. 계속되는 흐린 날에도 서로의 손을 잡지 못하고 ‘어떤 개인 날’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유능한 정부’에 대한 기대는 우리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준다고 믿고 있는 한 우리는 스스로의 무지와 무능을 깨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정부의 무능을 탓할 때,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유능해질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의학을 비롯한 지식들은 결코 특정 전문가들만 알고 있으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그들만이 알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일본에서 2011년 원전사고 이후 많은 시민들이 방사능에 대해 함께 배우며 시민과학자가 되어갔던 사례는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필요를 깨닫게 되면 우리도 언제든지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위기는 우리를 유능하게 만든다. 우리를 무능한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다. 정부가 ‘허위사실’ 유포를 단속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는 우리가 알아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전문가 집단에 대한 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우리의 힘을 더 잘 알고 있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흐린 날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그러니 손을 내밀고, 잡은 손을 좀더 가까이 끌어당기자.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