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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제 18장 유토피아와 폭력

이윤진이카루스 2010. 8. 2. 09:41

        18

    유토피아와 폭력

 

폭력을 증오하여, 폭력의 감소와 가능하면 인간의 생활로부터 폭력을 제거하는 것을 목적으로 일하는 것을 자신들의 최고의 과제들 중 하나이자 동시에 가장 희망찬 과제 중의 하나라고 확신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폭력에 반대하는 희망찬 사람들 중에는 나도 포함된다. 나는 폭력을 증오할 뿐 아니라, 폭력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것이 절대로 희망이 없지 않다고 나는 단호하게 믿는다. 그런 투쟁이 어렵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처음에는 폭력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커다란 성공으로 보였던 것이, 나중에 패배로 변하는 일이 역사의 과정에서 너무 흔하게 발생했음을 나는 깨닫는다.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시작된 새로운 폭력 시대가 전혀 끝나지 않았음을 나는 간과하지 않는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철저하게 분쇄되었지만, 그것이 분쇄되었다고 해서 야만성과 잔인성이 분쇄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나는 인정한다. 반대로 이 가증스러운 생각들이 분쇄되면서도 승리 같은 것을 이룩한 사실에 우리의 눈을 감는 것은 소용이 없다. 히틀러가 우리 서구세계의 도덕적 기준을 타락시켰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날의 세상에는 1차 세계대전 후 10년 동안에서도 인내되었을 것보다 더 많은 폭력과 잔인성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해야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문명이 궁극적으로, 아마도 심지어 2차 세계대전 후 처음 10년 안에 히틀러주의가 우리에게 쓰기를 원했던 새로운 무기들에 의하여 파괴될 가능성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히틀러주의가 패배한 다음에 나치즘의 위협으로 인하여 우리가 개발한 무기들을 우리가 사용했을 때, 히틀러주의의 정신은 우리를 누르고 가장 큰 승리를 이룩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폭력은 분쇄될 수 있다는 데에 이전보다 결코 희망을 적게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지닌 유일한 희망이다; 그리고 서구 역사뿐 아니라 동양 문명들의 긴

 

1947년 브뤼셀의 예술원에서 행한 연설; 1948년 힙베르트 저널(Hibbert Journal) 46호에 처음 실림.

 

역사는 그것이 - 폭력이 감소되어, 이성의 통제를 받을 수 있다는 것 -

헛된 희망일 필요는 없음을 증명한다.

이것이 아마도 내가,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성을 신뢰하는 이유이다; 내가 내 자신을 이성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 내가 이성적인 자세 속에서 폭력에 대한 유일한 대안을 보기 때문에 나는 이성주의자이다.

두 사람이 의견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그들이 지닌 의견이 다르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들이 지닌 이해관계가 다르거나 혹은 두 가지 경우 모두 때문에 그렇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결정되어야할 많은 종류의 의견불일치가 사회생활에는 있다. 문제는, 결정에 실패하면 그 누적 효과가 문제를 결정하는 데에 대한 지속적이고 강렬한 대비상태 같은 참을 수 없는 긴장을 유발할 것이기 때문에,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일 것이다. (군비경쟁이 보기이다.) 결정에 도달하는 것이 필수사항일 것이다.

어떻게 결정에 도달할 수 있는가? 주로 오직 두 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다: 논쟁 (중재에, 예를 들어 어떤 국제재판소에 제출된 논쟁들) 그리고 폭력. 혹은 충돌하는 것이 이해관계라면 두 가지 대안은 합리적인 타협이거나 반대 측 이해관계를 파괴하려는 노력이다.

이성주의자는, 내가 그 말을 사용하는 바와 같이, 폭력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논증에 의하여, 그리고 아마도 어떤 경우에는 타협에 의하여 결정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는 상대방을 힘으로, 위협과 협박으로, 혹은 심지어 설득적인 정치선전으로 누르는 데에 성공하기 보다는 논증에 의하여 상대방을 확신시키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논증으로 사람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과 정치선전으로 사람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것 사이의 차이점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합리성을 사용하여 내가 의미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할 것이다.

그 차이점은 논증을 사용한 데에 놓여있지 않다. 정치선전 또한 흔히 논증을 사용한다. 또한 그 차이점은 우리의 논증이 확정적이어서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확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에도 놓여 있지 않다. 그 차이점은 주고받기의 자세에, 다른 사람을 확신시키겠다는 것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하여 아마도 확신을 받겠다는 마음가짐에 놓여 있다. 내가 합리성의 자세라고 부르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에 의하여 규정될 것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토론을 하자, 이유는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서로 옳다고 주장만 하는 것보다 우리가 참된 이해(理解: understanding)에 더 가까이 갈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합리성의 자세라고 혹은 이성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간의 지적(知的) 겸손을 상정(想定)함이 이해될 것이다. 아마도 자신들이 때때로 틀린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그리고 자신들의 실수를 습관적으로 잊지 않는 사람들만이 그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 우리가 전지(全知)하지 않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지식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빌려온다는 것은 깨달음의 시작이다. 그것은 모든 재판과정의 두 가지 규칙을 일반적인 견해의 분야에 까지 가능한 한 멀리 이전하려고 애쓰는 자세이다: 첫째로 사람은 양 편의 이야기를 항상 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사람은 사건의 한 편에 속한다면 훌륭하게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것.

사회생활에서 서로를 대할 때 우리가 이 합리성에 관한 태도를 실천하는 한에서만 우리는 폭력을 피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다른 태도는 폭력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 - 심지어 부드러운 설득으로 다루어, 논증으로써 그리고 우리가 자랑스럽게 지니고 있는 통찰력과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그 통찰력의 진실성을 보기로써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키려는 일방적인 시도조차도.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이 사랑과 온유함의 종교 때문에 발생했던 지를 우리 모두는 기억해야 한다; 지옥의 영원한 불로부터 영혼을 구하려는 진정으로 친절한 의도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의 육체가 산 채로 화형을 당했는지. 우리가 의견의 영역에서 우리의 권위적인 태도를 포기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가 주고받기의,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확립한다는 조건에서만, 경건함과 의무감에 의하여 고취된 폭력행위를 우리가 억제하기를 바랄 수 있다.

합리성이 급격히 확산되는 것을 막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주요 어려움 중 하나는 토론을 합당하게 만드는 데는 항상 두 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두 편 중 한 편은 상대편으로부터 배우려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여러분으로부터 확신을 받기보다는 여러분을 총으로 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과 여러분은 이성적인 토론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합리성의 자세에는 한계가 있다. 관용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들 모두를 관용하는 원칙을 여러분은 무한정 수용할 수 없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들을 무한정 수용한다면 여러분 자신뿐 아니라 관용의 자세마저 여러분은 파괴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전에 한 말에 지적되어 있다 - 합리성은 주고받기의 자세여야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의 중요한 결과는, 공격과 방어의 구분이 흐려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구분을 굳게 지키면서, 그 기능이 공격과 공격에 대한 저항을 구분하는 것인 사회제도를 (국제적 사회제도와 국가적 사회제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내 자신을 이성주의자라고 칭함으로써 내가 전하고자 했던 것을 분명히 하는 데에 나는 충분히 말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이성주의는 독단적이 아니다. 나의 이성주의를 나는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음을 나는 철저히 인정한다. 나는 폭력을 증오하기 때문에 이성주의를 선택하고 솔직하게 고백하며, 이 증오에 이성적 근거가 있다고 믿도록 내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다. 혹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서 나의 이성주의는 자족적이지만, 합리성의 자세라는 비이성적 신념에 근거한다. 우리가 이것을 초월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키고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확신을 받겠다는 평등하고 상호적인 권리들에 대한 나의 비이성적인 믿음이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이라고 사람들은 아마도 말할 수 있으리라; 혹은 간단히 내가 사람을 신뢰한다고.

내가 사람을 믿는다고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나는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이 전적으로 이성적이라고 말할 꿈도 나는 꾸는 적이 없다. 사람이 감정적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이라거나 또는 그 반대인지와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을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방법은 없다. 인간과 인간사회의 비이성적 행태에 관한 과장에 (주로 심리-분석의 세속화로부터 발생하는) 대하여 내가 항의하고 싶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인간 생활에서 감정이 지닌 힘뿐 아니라, 그 감정의 가치 또한 인식하고 있다. 나는 합리성의 자세를 지니는 것이 우리 삶에서 한 가지 주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유일한 것은 이 자세가 완전히 결여된 적은 없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랑과 같은 커다란 열정에 의해서 지배되는 관계에서도 심지어 완전히 결여된 적 없는.

이성과 폭력의 문제에 대한 나의 근본적 자세는 지금쯤 이해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나의 독자들 몇 명과 그리고 도처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기를 희망한다. 내가 지금 유토피아주의 문제를 논의하기를 제안하는 것은 이 기초에 근거한다.

유토피아주의를 이성의주의 한 가지 형태가 낳은 결과로서 우리가 기술(記述)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해서, 이것이 나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신뢰하는 형태와 매우 다른 형태의 이성주의임을 밝히려고 나는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두 가지 형태의 이성주의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내가 믿기에 올바르고 나머지 하나는 틀린 것임을 밝히려고 나는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틀린 종류의 이성주의는 유토피아주의를 초래함을.

내가 알 수 있는 한, 유토피아주의는 이 명백하게 완전히 불가피하고 자명한 추리방법이 유토피아식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듣고 경악할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수용되는 추리방법의 결과이다. 이 외양만 그럴듯한 추리는 아마도 다음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행동은, 특정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이용 가능한 수단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면, 이성적이라고 주장될 것이다. 목표는 분명히 이성적으로 결정될 수 없을 것이다. 아무튼 어떤 주어진 목표와 관련해서만 우리는 행동을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그 행동을 이성적이거나 적절한 것으로서 기술(記述)할 수 있다. 우리가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조건에서만, 어떤 주어진 목표와 관련해서만, 우리는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논증을 정치에 적용시켜 보자. 모든 정치는 행동들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행동들은 어떤 목표를 추구한다는 조건으로만 이성적일 것이다. 사람의 정치적 행동들이 지닌 목표는 자신의 권력이나 재산 확대일 것이다. 혹은 그 목표는 아마도 국가의 법률 몇 가지를 개선하여 국가나 사회의 구조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후자(後者)의 경우에 정치적 행동은, 우리가 만들고자 의도하는 정치적 변화의 최종적 목표를 우리가 먼저 결정한다는 조건에서만 이성적일 것이다. 그 정치적 행동은 국가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특정 아이디어와 관련해서만 이성적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적 정치 행동에 대한 예비조처로서 우리의 최종적 정치 목표에 관하여 우리는 가능한 한 확실해지려고 먼저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최고라고 여겨야하는 국가의 종류; 그리고 그 다음에야 선택된 목표를 어느 정도 우리가 영향을 미쳐 조정할 역사적 과정의 목표로서 그 국가를 생각하며, 이 국가를 실현하는 데에 혹은 그 국가를 향하여 서서히 움직이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줄 수단을 결정하기 시작할 수 있다.

이제 내가 유토피아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게 이런 견해이다. 이성적이고 이기적이 아닌 정치적 행동에는, 이 견해를 토대로, 우리의 최종적 목표를 향한 몇 단계일 뿐이어서 목표로서 라기보다는 수단으로서 간주되어야 하는 중간 목적이나 부분적 목적만이 아닌, 우리의 최종적 목적에 대한 결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성적 정치 행동은 우리의 이상적 국가에 대한 다소 분명하고 상세한 기술(記述)이나 청사진에, 그리고 또한 이 목표를 향하는 가는 역사적 통로에 대한 계획이나 청사진에, 근거해야 한다.

나는 내가 유토피아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매력적이고, 정말로, 지나치게 매력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내가 유토피아주의가 위험하고 해롭다고 또한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에 유토피아주의는 자멸적이고, 유토피아주의는 폭력을 유발한다.

유토피아주의가 자멸적이라는 것은, 목적을 과학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과 연계되어 있다. 두 가지 목적 사이에서 선택하는 과학적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폭력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들에게 폭력이 없는 삶은 천박하고 하찮으리라. 많은 다른 사람들은, 나도 그 중 한 명인데, 폭력을 증오한다. 이것은 목적에 관한 논쟁이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이것은 폭력에 반대하여 논증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시간낭비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러분이 폭력 찬양자와 논증할 수 없을 것임을 의미할 따름이다. 폭력 찬양자는 자신이 반대-폭력의 위협에 의하여 억제되지 않으면 총알로 논증에 대답하는 방법을 지니고 있다. 폭력 찬양자가 당신을 쏘지 않고 당신의 논증을 기꺼이 청취하려 한다면, 그는 적어도 이성주의에 감염이 되어 있어서 당신을 아마도 그를 설득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논증이 시간낭비가 아니라는 이유이다 -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청취한다면. 그러나 당신은, 논증을 수단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논증을 청취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논증을 수단으로 당신은 모든 논증을 의심하여 이성적 결정보다 폭력적 결정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당신은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특수한 경우일 따름이며, 일반화될 수 있다. 목표에 대한 어떤 결정도 순전히 이성적이거나 과학적 수단으로써 확립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은 목표에 관한 결정에 도달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유토피아주의의 문제에 적용하면서,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그리는 문제가 과학만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확실히 해야 한다. 유토피아주의의 목표는, 적어도, 사회과학자가 자신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할 수 있지 전에 주어져야 한다. 우리는 자연과학에서도 동일한 상황을 발견한다. 물리학의 양이 아무리 많아도 과학자는 쟁기나 항공기나 원자폭탄을 만드는 일이 올바른 일인지 알 수 없다. 목표는 과학자에 의하여 채택되어야 하거나, 과학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과학자로서 그가 하는 일은 이 목적이 실현될 수 있는 수단을 만드는 일뿐이다.

이성적 논증을 통하여 다른 유토피아적 이상들 사이에서 결정하는 어려움을 강조하면서, 나는 이성적 비판의 힘을 완전히 초월하는 영역이 - 목적의 영역과 같은 그런 - 있다는 인상을 남기고 싶지 않다 (목적의 영역이 과학적 논증의 힘을 주로 초월한다고 나는 틀림없이 말하고 싶을지라도). 그 까닭은 내 자신이 이 영역에 관하여 논증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쟁하는 유토피아적 청사진들 사이에서 결정하는 어려움을 지적함으로써, 나는 이런 종류의 이상적 목표를 선택하는 것에 반대하여 논증하려고 한다. 유사하게 이 어려움이 폭력을 유발하기 쉽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나의 노력은, 폭력을 증오하는 사람들에게만 매력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다할지라도, 이성적인 논증으로서 의도된 것이다.

유토피아적 방법이, 그 방법은 사회의 이상적인 상태를 우리의 모든 정치 행동이 부합해야 하는 목적으로서 선택하는데, 폭력을 유발하기 쉽다는 것은 그러므로 밝혀질 수 있다. 우리가 정치적 행동의 궁극적 목적을 과학적으로 혹은 논증이라는 방법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상적인 국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의견차가 논증이라는 방법으로써 항상 해결될 수는 없다. 그 의견차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종교적 차이점의 특징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다른 유토피아적 종교들 사이에는 관용이 있을 수 없다. 유토피아적 목표는 이성적 행동과 토론을 위한 토대로서 작동하도록 만들어져서, 목표가 분명하게 결정된다는 조건에서만 그런 행동이 가능하게 보인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유토피아적 목표를 공유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유토피아적 종교를 신봉하지 않는 유토피아적 상대방을 틀림없이 설득하거나 박멸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할 일이 더 많이 있다. 그는 틀림없이 철저히 모든 이단적 견해들을 제거하고 분쇄한다. 그 까닭은 유토피아적 목표로 가는 길이 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주의자의 정치적 행동이 지닌 합리성은 앞으로 오랜 기간 동안 목표의 일관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은 유토피아주의자가 상대방 유토피아적 종교를 말살할 뿐 아니라, 그 종교에 대한 기억을 가능한 한 멀리 뽑아내버린다는 조건으로 실현될 수 있을 따름이다.

상대방 목표를 억압하기 위한 폭력적 방법사용은 훨씬 더 시급하게 된다. 그 까닭은 불가피하게 유토피아 건설기간이 사회변혁의 기간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토피아적 청사진이 결정되던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 나중에는 덜 바람직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접근방식은 몰락하는 위험에 놓인다. 그 까닭은 우리가 최종적 정치목표를 향하여 움직이려고 노력하는 동안 우리가 그 최종적 정치목표를 변경한다면, 우리가 원에서 맴돌고 있음을 우리는 곧 발견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최종적 정치목표를 설정하고 그 다음에 그 목표를 향하여 움직일 준비를 하는 전체 방식은, 목표가 실현과정에서 변할 것이라면, 틀림없이 소용이 없다. 지금까지 취해진 조치들은 사실상 새로운 목표로부터 멀어짐이 쉽게 밝혀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새로운 목표에 따라서 방향을 바꾼다면 우리는 동일한 위험에 처하게 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우리가 치렀을 모든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확하게 어디에도 이르지 못한다 -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어디에도 없음(nowhere)’을 정확하게 따른 것을 아니라할지라도.

다시, 우리 목표를 그렇게 변경시키는 것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사용하고, 폭력에는 정치선전이 포함된다, 비판을 억압하고 모든 반대의견을 말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과 함께 유토피아 기획자들의, 유토피아 청사진을 그리고 수행하는 유토피아 공학가들의, 지혜와 선견지명에 대한 확인이 진행된다. 유토피아 공학가들은 틀림없이 이런 방식으로 전지전능하게 된다. 그들은 신(神)이 된다. 그대들은 그들 앞에서 다른 신(神)을 섬겨서는 안 된다.

유토피아적 이성주의는 자멸적인 이성주의이다. 아무리 이성주의적 목표가 자비롭다할지라도, 그 목표는 행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하에서 살도록 저주를 받게 되는 잘 알려진 고통만을 가져온다.

이 비판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정치적 이상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나는 정치적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유효한 비판이 아니리라. 예전에는 실현될 수 없다고 독단적으로 선언된 많은 이상들이 실현되었는데, 예를 들어 시민들의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국가 안에서 범죄를 억제하기 위하여 작동될 수 있고 독재적이 아닌 제도를 설치하는 것이다. 다시, 국제 재판소와 국제 경찰력이 국제적 범죄를 막는 데에, 다시 말해서 국가의 공격과 소수민족이나 혹시 다수민족 학대를 막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런 이상을 실현하려는 시도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폭력을 유발하기 때문에 내가 반대하는 자비로운 유토피아적 계획과, 내가 추천하고 싶은 다른 중요하고도 포괄적인 정치 개혁 사이의 차이점은 어디에 놓여있는가?

사회개혁을 위하여 내가 수용될 수 있는 계획과 수용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청사진을 구분하는 방식이나 처방을 내가 내놓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추상적인 선(善)을 실현하기 위해서보다는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하라. 정치적인 수단으로써 행복을 확립하려는 목표를 세우지 말라. 오히려 구체적인 고통을 제거하는 목표를 세우라. 또는 더 실제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직접적인 수단을 통하여 빈곤퇴치를 목적으로 싸우라 -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이 최저임금을 받도록 조처함으로써. 또는 병원과 의학교를 설립함으로써 전념병과 질병과 싸우라. 범죄와 싸우는 것처럼 문맹과 싸우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직접적인 수단으로써 실행하라.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시급한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선정하여,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 악을 제거할 수 있다고 인내심을 가지고 확신시키려고 노력하라.

그러나 전체적으로 훌륭한 사회의 먼 이상을 위하여 고안하고 노력을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이 목적들을 실현하려고 애쓰지 말라. 아무리 크게 당신이 그 이상이 지닌 고무적인 선견지명에 의지할지라도, 당신이 그 이상의 실현을 위하여 일해야 한다고, 또는 다른 사람들의 눈이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보도록 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말라.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당신의 꿈이 이곳에서 지금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외침으로부터 당신을 멀어지게 하지 말라. 우리의 동료인간들에게는 우리의 도움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어떤 세대도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실현될지도 모르는 행복에 대한 이상을 위하여,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인간의 고통은 이성적인 공공정책의 가장 시급한 문제이지 행복은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행복 추구는 사람들의 사적인 노력에 남겨져야 한다.

우리 사회의 가장 참기 어려운 악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그리고 가장 시급한 사회개혁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토론으로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다지 이상한 사실도 아니다. 그런 합의는 사회생활의 어떤 이상적 형태에 관한 합의보다 훨씬 쉽게 이룩될 수 있다. 그 까닭은 악(惡)이 당장 이곳에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빈곤과 실업과 국가의 억압, 전쟁과 질병에 의하여 고통을 받았고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악(惡)은 매일 경험될 수 있고, 그리고 경험되고 있다.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는 우리들은 그 고통을 우리에게 설명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을 매일 만난다. 이것이 악(惡)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악(惡)에 대하여 말하면서 진보할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합리성의 태도로부터 여기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이유. 구체적인 주장들을 경청함으로써, 그 주장들을 가능한 한 공평하게 평가하려고 인내심으로 노력함으로써, 그리고 더 나쁜 악(惡)을 만들지 않고 그 악(惡)을 처리하는 방법을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배울 수 있다.

이상적인 선(善)에 대해서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이 선(善)을 우리의 꿈으로부터 그리고 시인과 예언자의 꿈으로부터만 알고 있다. 이 선(善)은 논의될 수 없고, 세상에 선포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선(善)은 공정한 판사의 이성적 태도가 아니라, 열정에 찬 설교자의 감정적인 태도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유토피아적 태도는 합리성의 태도와 반대가 된다. 유토피아주의는, 이성주의의 탈을 쓰고 흔히 나타날지라도, 사이비-이성주의를 넘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경우를 제시할 때 내가 개괄했던, 피상적으로 이성적인 논증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는 어떤 목표나 목적과 관련해서만 행동의 합리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 완전히 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정치적 행동의 합리성이 역사적 목적과 관련해서만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상황을 미리 생각한 역사적 이상(理想)의 관점으로부터, 소위 역사발전의 궁극적 목표라는 관점으로부터 우리가 고찰해야 함을 이것은 틀림없이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의 목표와 목적들 가운데 인간의 행복과 불행과 관련하여 생각된 것이 있다면, 먼 미래의 인간의 행복에 대한 가능한 기여를 통해서 우리 행동들을 우리는 판단할 뿐 아니라 그 행동들의 더 즉각적인 효과를 통해서도 우리의 행동들을 판단하게 되어 있다. 특정 사회적 상황이 단지 일시적인 역사적 상황임을 근거로 그 사회적 상황이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이라고 우리는 논증해서는 안 된다. 그 까닭은 모든 상황이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한 세대의 고통이 나중 세대의 지속적인 행복을 보장하는 목적만으로서 간주될 것이라고 우리는 논증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주장은 높은 정도의 약속된 행복에 의해서도, 그 행복으로부터 이익을 보는 많은 세대들에 의해서도 바뀌지 않는다. 모든 세대는 일시적이다. 모든 세대는 존중될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있고, 우리의 즉각적인 의무는 틀림없이 현 세대와 다음 세대에 관련되어 있다. 게다가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행복에 견주어 균형을 잡으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이로써 피상적으로 이성적인 유토피아주의의 논증들은 해체되어 없어진다. 미래가 유토피아주의자에게 보일 매혹은 이성적 선견지명과 관계가 없다. 이런 관점에 비추어 유토피아주의가 길러내는 폭력은, 진보주의적 형이상학이, 신경질적인 역사철학이 미래의 찬란함을 위하여 현재를 기꺼이 희생하며 그 원리가 그 다음에 올 어떤 미래의 기간을 위하여 미래 기간 각각을 희생하게 될 것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미쳐 날뛰는 것과 매우 유사하게 보인다; 그리고 비슷하게 인간의 궁극적 미래는 - 인간에 대하여 어떤 운명을 비축하고 있든 간에 - 인간의 궁극적 멸종보다 더 탁월한 것이 될 수 없다.

유토피아주의에 매혹당하는 것은 우리가 지구상에서 천국을 만들 수 없다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내가 믿는 것은, 각 세대에서 삶을 덜 참혹하고 덜 불의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것이 성취될 수 있다. 과거 1세기 동안 많은 것이 성취되었다. 우리 자신의 세대에 의하여 더 많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라도 우리가 아마도 해결할 약하고 병든 자들과 억압과 불의 하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돕는 것과 같은 많은 시급한 문제들이 있다; 실업 없애기; 기회 균등 이루기; 위협과 신(神)과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전지전능한 지도자들에 의하여 선동되는 전쟁과 같은 국제범죄 예방. 오직 우리가 먼 이상에 관한 꿈과,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지닌 유토피아적 청사진에 대한 싸움을 포기한다면 이 모든 것을 우리는 아마도 성취할 것이다. 사람 그 자체를 믿는, 그러므로 폭력과 비이성을 극복하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우리들은 대신에, 그것이 다른 사람들의 평등한 권리와 양립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가꾸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참인 이성주의와 거짓인 이성주의라는 문제가 더 큰 문제의 한 부분임을 알 수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우리의 존재와 그 존재가 지닌 한계를 향한 온전한 태도와 관련된 문제이다 - 자신들을 ‘실존주의자들(Existentialists)’라고 부르는 신(神)이 없는 새로운 신학의 주창자들에 의하여 이제 그렇게 많은 것이 이룩된 바로 그 문제. 신(神)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의 고독에 대한, 그리하여 발생하는 자신과 세상 사이의 긴장에 대한 이 과장된 강조에는 신경증적이고 심지어 히스테리성 요소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히스테리가 유토피아적 낭만주의와 그리고 영웅-숭배라는 윤리인 ‘지배하던지 아니면 굴복하라’의 관계로만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윤리와 매우 밀접하게 닮았다는 데에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히스테리가 그 윤리가 지닌 강력한 매력이라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가 큰 문제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심지어 종교의 분야처럼 이성주의로부터 분명히 동떨어진 분야에서도 참된 이성주의와 거짓 이성주의의 구분과 명백히 닮은 것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밝혀질 수 있다. 기독교 사상가들은 적어도 두 가지 매우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방해하였다. 온전한 방식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사람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불꽃이 있음을 기억하라.’ 나머지 한 방식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긴장과, 인간이 열망할 높은 곳뿐 아니라 인간의 비천함 또한 과장한다. 그 방식은 ‘지배하거나 굴복하라’라는 윤리를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 도입한다. 이 태도의 근저에 신(神)과 같음이나 전능(全能: omnipotence)에 대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꿈이 항상 있는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긴장에 대한 강조가 권력의 문제를 향한 불균형적인 태도로부터만 출현할 수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불균형적인 (그리고 미성숙한) 태도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뿐 아니라 자연환경을 지배하는 - 세계를 전체로서 지배하는 - 권력의 문제에 미혹되어 있다. 내가 유추로서 아마도 ‘거짓 종교(false religion)’라고 부를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신(神)의 권능에 의해서 뿐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는 신(神)의 권능에 의해서도 미혹되어 있다; 유사하게, 거짓 이성주의는 거대한 기계들과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아이디어에 의하여 매료당한다. 베이컨의 ‘지식은 힘이다’와 플라톤의 ‘현자(賢者)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우월한 지적(知的) 재능을 근거로 권력을 주장하는 이 태도의 다른 표현들이다. 참된 이성주의자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지식이 얼마나 적은지를 항상 알아서, 어떤 비판적 능력이나 이성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다할지라도 자신은 지적(知的) 교류를 다른 사람과 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인식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그리고 인간이 지닌 이성을 인간을 결합시키는 결속력으로서 간주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에게 이성은 권력과 폭력이라는 도구와 정확히 반대가 되는 것이다: 이성주의자는 이성을 권력과 폭력을 길들일 수단으로 본다.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

 

 

 

          18

UTOPIA AND VIOLENCE

 

 

 

THERE ARE many people who hate violence and are convinced that it is one of their foremost and at the same time one of their most hopeful tasks to work for its reduction and, if possible, for its elimination from human life. I am among those hopeful enemies of violence. Not only do I hate violence, but I firmly believe that the fight against it is not at all hopeless. I realize that the task is difficult.

I realize that, only too often in the course of history, it has happened that what appeared at first to be a great success in the fight against violence was followed by defeat. I do not overlook the fact that the new age of violence which was opened by the two World wars is by no means at an end. Nazism and Fascism are thoroughly beaten, but I must admit that their defeat does not mean that barbarism and brutality have been defeated. on the contrary, it is no use closing our eyes to the fact that these hateful ideas achieved something like victory in defeat. I have to admit that Hitler succeeded in degrading the moral standards of our Western world, and that in the world of today there is more violence and brutal force than would have been tolerated even in the decade after the first World war. And we must face the possibility that our civilization

may ultimately be destroyed by those new weapons which Hitlerism

wished upon us, perhaps even within the first decade after the

second World war; for no doubt the spirit of Hitlerism won its

An address delivered to the Institut des Arts in Brussels, in June 1947; first published in The Hibbert Journal, 46, 1948.

greatest victory over us when, after its defeat, we used the weapons

which the threat of Nazism had induced us to develop. But in spite of all this I am today no less hopeful than I have ever been that violence can be defeated. It is our only hope; and long stretches in the history of Western as well as of Eastern civilizations prove that it need not be a vain hope - that violence can be reduced, and brought under the control of reason.

This is perhaps why I, like many others, believe in reason; why I call myself a rationalist. I am a rationalist because I see in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the only alternative to violence.

When two men disagree, they do so either because their opinions differ, or because their interests differ, or both. There are many kinds of disagreement in social life which must be decided one way or another. The question may be one which must be settled, because failure to settle it may create new difficulties whose cumulative effects may cause an intolerable strain, such as a state of continual and intense preparation for deciding the issue. (An armaments race is an example.) To reach a decision may be a necessity.

How can a decision be reached? There are, in the main, only two possible ways: argument (including arguments submitted to arbitration, for example to som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and violence. Or, if it is interests that clash, the two alternatives are reasonable compromise or an attempt to destroy the opposing interest.

A rationalist, as I use the word, is a man who attempts to reach decisions by argument and perhaps, in certain cases, by compromise, rather than by violence. He is a man who would rather be unsuccessful in convincing another man by argument than successful in crushing him by force, by intimidation and threats, or even by persuasive propaganda.

We shall understand better what I mean by reasonableness if we consider the difference between trying to convince a man by argument and trying to persuade him by propaganda.

The difference does not lie so much in the use of argument. Propaganda often uses argument too. Nor does the difference lie in our conviction that our arguments are conclusive, and must be admitted to be conclusive by any reasonable man. It lies rather in an attitude of give and take, in a readiness not only to convince the other man but also possibly to be convinced by him. What I call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may be characterized by a remark like this: 'I think I am right, but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in any case let us discuss it, for in this way we are likely to get nearer to a true understanding than if we each merely insist that we are right.'

It will be realized that what I call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or the rationalistic attitude presupposes a certain amount of intellectual humility. Perhaps only those can take it up who are aware that they are sometimes wrong, and who do not habitually forget their mistakes. It is born of the realization that we are not omniscient, and that we owe most of our knowledge to others. It is an attitude which tries as far as possible to transfer to the field of opinions in general the two rules of every legal proceeding: first, that one should always hear both sides, and secondly, that one does not make a good judge if one is a party to the case.

I believe that we can avoid violence only in so far as we practise this attitude of reasonableness when dealing with one another in social life; and that any other attitude is likely to produce violence - even a one-sided attempt to deal with others by gentle persuasion, and to convince them by argument and example of those insights we are proud of possessing, and of whose truth we are absolutely certain. We all remember how many religious wars were fought for a religion of love and gentleness; how many bodies were burned alive with the genuinely kind intention of saving souls from the eternal fire of hell. only if we give up our authoritarian attitude in the realm of opinion, only if we establish the attitude of give and take, of readiness to learn from other people, can we hope to control acts of violence inspired by piety and duty.

There are many difficulties impeding the rapid spread of reasonableness. one of the main difficulties is that it always takes two to make a discussion reasonable. Each of the parties must be ready to learn from the other. You cannot have a rational discussion with a man who prefers shooting you to being convinced by you. In other words, there are limits to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It is the same with tolerance. You must not, without qualification, accept the principle of tolerating all those who are intolerant; if you do, you will destroy not only yourself, but also the attitude of tolerance. (All this is indicated in the remark I made before - that reasonableness must be an attitude of give and take.)

An important consequence of all this is that we must not allow the distinction between attack and defence to become blurred. We must insist upon this distinction, and support and develop social institutions (national as well as international) whose function it is to discriminate between aggression and resistance to aggression (이 문장에서 it은 불필요하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I think I have said enough to make clear what I intend to convey by calling myself a rationalist. My rationalism is not dogmatic. I fully admit that I can not rationally prove it. I frankly confess that I choose rationalism because I hate violence, and I do not deceive myself into believing that this hatred has any rational grounds. Or to put it another way, my rationalism is not self-contained, but rests on an irrational faith in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I do not see that we can go beyond this. one could say, perhaps, that my irrational faith in equal and reciprocal rights to convince others and be convinced by them is a faith in human reason; or simply, that I believe in man.

If I say that I believe in man, I mean in man as he is; and I should never dream of saying that he is wholly rational. I do not think that a question such as whether man is more rational than emotional or vice versa should be asked: there are no ways of assessing or comparing such things. I admit that I feel inclined to protest against certain exaggerations (arising largely from a vulgarization of psycho-analysis) of the irrationality of man and of human society. But I am aware not only of the power of emotions in human life, but also of their value. I should never demand that the attainment of an attitude of reasonableness should become the one dominant aim of our lives. All I wish to assert is that this attitude can become one that is never wholly absent - not even in relationships which are dominated by great passions, such as love.

My fundamental attitude towards the problem of reason and violence will by now be understood; and I hope I share it with some of my readers and with many other people everywhere. It is on this basis that I now propose to discuss the problem of Utopianism.

I think we can describe Utopianism as a result of a form of rationalism, and I shall try to show that this is a form of rationalism very different from the form in which I and many others believe. So I shall try to show that there exist at least two forms of rationalism, one of which I believe is right and the other wrong; and that the wrong kind of rationalism is the one which leads to Utopianism.

As far as I can see, Utopianism is the result of a way of reasoning which is accepted by many who would be astonished to hear that this apparently quite inescapable and self-evident way of reasoning leads to Utopian results. This specious reasoning can perhaps be presented in the following manner.

An action, it may be argued, is rational if it makes the best use of the available means in order to achieve a certain end. The end, admittedly, may be incapable of being determined rationally. However this may be, we can judge an action rationally, and describe it as rational or adequate, only relative to some given end. only if we have an end in mind, and only relative to such an end, can we say that we are acting rationally.

Now let us apply this argument to politics. All politics consists of actions; and these actions will be rational only if they pursue some end. The end of a man's political actions may be the increase of his own power or wealth. Or it may perhaps be the improvement of some of the laws of the state, thus leading to a change in the structure of the state or of society.

In the latter case political action will be rational only if we first determine the final ends of the political changes which we intend to bring about. It will be rational only relative to certain ideas of what a state ought to be like. Thus it appears that as a preliminary to any rational political action we must first attempt to become as clear as possible about our ultimate political ends; for example the kind of state which we should consider the best; and only afterwards can we begin to determine the means which may best help us to realize this state, or to move slowly towards it, taking it as the aim of a historical process which we may to some extent influence and steer towards the goal selected.

Now it is precisely this view which I call Utopianism. Any rational and non-selfish political action, on this view, must be preceded by a determination of our ultimate ends, not merely of intermediate or partial aims which are only steps towards our ultimate end, and which therefore should be considered as means rather than as ends; therefore rational political action must be based upon a more or less clear and detailed description or blueprint of our ideal state, and also upon a plan or blueprint of the historical path that leads towards this goal.

I consider what I call Utopianism an attractive and, indeed, an all too attractive theory; for I also consider it dangerous and pernicious. it is, I believe, self-defeating, and it leads to violence.

That it is self-defeating is connected with the fact that it is impossible to determine ends scientifically. There is no scientific way of choosing between two ends. Some people, for example, love and venerate violence. For them a life without violence would be shallow and trivial. Many others, of whom I am one, hate violence. This is quarrel about ends. It cannot be decided by science. This does not mean that the attempt to argue against violence is necessarily a waste of time. It only means that you may not be able to argue with the admirer of violence. He has a way of answering an argument with a bullet if he is not kept under control by the threat of counter-violence. If he is willing to listen to your arguments without shooting you, then he is at least infected by rationalism, and you may, perhaps, win him over. This is why arguing is no waste of time - as long as people listen to you. But you cannot, by means of argument, make people listen to argument; you cannot, by means of argument, convert those who suspect all argument, and who prefer violent decisions to rational decisions. You cannot prove to them that they are wrong. And this is only a particular case, which can be generalized. No decision about aims can be established by purely rational or scientific means. Nevertheless argument may prove extremely helpful in reaching a decision about aims.

Applying all this to the problem of Utopianism, we must first be quite clear that the problem of constructing a Utopian blueprint cannot possibly be solved by science alone. Its aims, at least, must be given before the social scientist can begin to sketch his blueprint. We find the same situation in the natural sciences. No amount of physics will tell a scientist that it is the right thing for him to construct a plough, or an aeroplane, or an atomic bomb. Ends must be adopted by him, or given to him; and what he does qua scientist is only to construct means by which these ends can be realized.

In emphasizing the difficulty of deciding, by way of rational argument, between different Utopian ideals, I do not wish to create the impression that there is a realm - such as the realm of ends - which goes altogether beyond the power of rational criticism (even though I certainly wish to say that the realm of ends goes largely beyond the power of scientific argument). For I myself try to argue about this realm; and by pointing out the difficulty of deciding between competing Utopian blueprints, I try to argue rationally against choosing ideal ends of this kind. Similarly, my attempt to point out that this difficulty is likely to produce violence is meant as a rational argument, although it will appeal only to those whose hate violence.

That the Utopian method, which chooses an ideal state of society as the aim which all our political actions should serve, is likely to produce violence can be shown thus. Since we cannot determine the ultimate ends of political actions scientifically, or by purely rational methods, differences of opinion concerning what the ideal state should be like cannot always be smoothed out by the method of argument. They will at least partly have the character of religious differences. And there can hardly be tolerance between these different Utopian religions. Utopian aims are designed to serve as a basis for rational political action and discussion, and such action appears to be possible only if the aim is definitely decided upon. Thus the Utopianist must win over, or else crush, his Utopianist competitors who do not share his own Utopian aims and who do not profess his own Utopianist religion.

But he has to do more. He has to be very thorough in eliminating and stamping out all heretical competing views. For the way to the Utopian goal is long. Thus the rationality of his political action demands constancy of aim for a long time ahead; and this can only be achieved if he not merely crushes competing Utopian religions, but as far as possible stamps out all memory of them.

The use of violent methods for the suppression of competing aims becomes even more urgent. For unavoidably, the period of Utopian construction is liable to be one of social change. In such a time ideas are liable to change also. Thus what may have appeared to many as desirable at the time when the Utopian blueprint was decided upon may appear less desirable at a later date. If this is so, the whole approach is in danger of breaking down. For if we change our ultimate political aims while attempting to move towards them we may soon discover that we are moving in circles. The whole method of first establishing an ultimate political aim and then preparing to move towards it must be futile if the aim may be changed during the process of its realization. It may easily turn out that the steps so far taken lead in fact away from the new aim. And if we then change direction in accordance with our new aim we expose ourselves to the same risk. In spite of all the sacrifices which we may have made in order to make sure that we are acting rationally, we may get exactly nowhere - although not exactly to that 'nowhere' which is meant by the word 'Utopia'.

Again, the only way to avoid such changes of our aims seems to be to use violence, which includes propaganda, the suppression of criticism, and the annihilation of all opposition. With it goes the affirmation of the wisdom and foresight of the Utopian planners, of the Utopian engineers who design and execute the Utopian blueprint. The Utopian engineers must in this way become omniscient as well as omnipotent. They become gods.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them.

Utopian rationalism is a self-defeating rationalism. However benevolent its ends, it does not bring happiness, but only the familiar misery of being condemned to live under a tyrannical government.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is criticism fully. I do not criticize political ideals as such, nor do I assert that a political ideal can never be realized. This would not be a valid criticism. Many ideals have been realized which were once dogmatically declared to be unrealizable, for example, the establishment of workable and untyrannical institutions for securing civil peace, that is, for the suppression of crime within the state. Again, I see no reason why an international judicature and an international police force should be less successful in suppressing international crime, that is, national aggression and the ill-treatment of minorities or perhaps majorities. I do not object to the attempt to realize such ideals.

Wherein, then lies the difference between those benevolent Utopian plans to which I object because they lead to violence, and those other important and far-reaching political reforms which I am inclined to recommend?

If I were to give a simple formula or recipe for distinguishing between what I consider to be admissible plans for social reform and inadmissible Utopian blueprints, I might say:

Work for the elimination of concrete evils rather than for the realization of abstract goods. Do not aim at establishing happiness by political means. Rather aim at the elimination of concrete miseries. Or, in more practical terms: fight for the elimination of poverty by direct means - for example, by making sure that everybody has a minimum income. Or fight against epidemics and disease by erecting hospitals and schools of medicine. Fight illiteracy as you fight criminality. But do all this by direct means. Choose what you consider the most urgent evil of the society in which you live, and try patiently to convince people that we can get rid of it.

But do not try to realize these aims indirectly by designing and working for a distant ideal of a society which is wholly good. However deeply you may feel indebted to its inspiring vision, do not think that you are obliged to work for its realization, or that it is your mission to open the eyes of others to its beauty. Do not allow your dreams of a beautiful world to lure you away from the claims of men who suffer here and now. Our fellow men have a claim to our help; no generation must be sacrificed for the sake of future generations, for the sake of an ideal of happiness that may ever be realized. In brief, it is my thesis that human misery is the most urgent problem of a rational public policy and that happiness is not such a problem. The attainment of happiness should be left to our private endeavours.

It is a fact, and not a very strange fact, that it is not so very difficult to reach agreement by discussion on what are the most intolerable evils of our society, and on what are the most urgent social reforms. Such an agreement can be reached much more easily than an agreement concerning some ideal form of social life. For the evils are with us here and now. They can be experienced, and are being experienced every day, by many people who have been and are being made miserable by poverty, unemployment, national oppression, war and disease. Those of us who do not suffer from these miseries meet every day others who can describe them to us. This is what makes the evils concrete. This is why we can get somewhere in arguing about them; why we can profit here from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We can learn by listening to concrete claims, by patiently trying to assess them as impartially as we can, and by considering ways of meeting them without creating worse evils.

With ideal goods it is different. These we know only from our dreams and from the dreams of our poets and prophets. They cannot be discussed, only proclaimed from the housetops. They do not call for the rational attitude of the impartial judge, but for the emotional attitude of the impassioned preacher.

The Utopianist attitude, therefore, is opposed to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Utopianism, even though it may often appear in a rationalist disguise, cannot be more than a pseudo-rationalism.

What, then, is wrong with the apparently rational argument which I outlined when presenting the Utopianist case? I believe that it is quite true that we can judge the rationality of an action only in relation to some aims or ends. But this does not necessarily mean that the rationality of a political action can be judged only in relation to an historical end. And it surely does not mean that we must consider every social or political situation merely from the point of view of some preconceived historical ideal, from the point of view of an alleged ultimate aim of the development of history. On the contrary, if among our aims and ends there is anything conceived in terms of human happiness and misery, then we are bound to judge our actions in terms not only of possible contributions to the happiness of man in a distant future, but also of their more immediate effects. We must not argue that a certain social situation is a mere means to an end on the grounds that it is merely a transient historical situation. For all situations are transient. Similarly we must not argue that the misery of one generation may be considered as a mere means to the end of securing the lasting happiness of some later generation or generations; and this argument is improved neither by a high degree of promised happiness nor by a large number of generations profiting by it. All generations are transient. All have an equal right to be considered, but our immediate duties are undoubtedly to the present generation and to the next. Besides, we should never attempt to balance anybody's misery against somebody else's happiness.

With this the apparently rational arguments of Utopianism dissolve into nothing. The fascination which the future exerts upon the Utopianist has nothing to do with rational foresight. Considered in this light the violence which Utopianism breeds looks very much like the running amok of an evolutionist metaphysics, of a hysterical philosophy of history, eager to sacrifice the present for the splendours of the future, and unaware that its principle would lead to sacrificing each particular future period for one which comes after it; and likewise unaware of the trivial truth that the ultimate future of man - whatever fate may have in store for him - can be nothing more splendid than his ultimate extinction.

The appeal of Utopianism arises from the failure to realize that we cannot make heaven on earth. What I believe we can do instead is to make life a little less terrible and a little less unjust in each generation. A good deal can be achieved in this way. Much has been achieved in the last hundred years. More could be achieved by our own generation. There are many pressing problems which we might solve, at least partially, such as helping the weak and the sick, and those who suffer under oppression and injustice; stamping out unemployment; equalizing opportunities; and preventing international crime, such as blackmail and war instigated by men like gods, by omnipotent and omniscient leaders. All this we might achieve if only we could give up dreaming about distant ideals and fighting over our Utopian blueprints for a new world and a new man. Those of us who believe in man as he is, and who have therefore not given up the hope of defeating violence and unreason, must demand instead that every man should be given the right to arrange his life himself so far as this is compatible with the equal rights of others.

We can see here that the problem of the true and the false rationalism is part of a larger problem. Ultimately it is the problem of a sane attitude towards our own existence and its limitations - that very problem of which so much is made now by those who call themselves 'Existentialists', the expounders of a new theology without God. There is, I believe, a neurotic and even an hysterical element in this exaggerated emphasis upon the fundamental loneliness of man in a godless world, and upon the resulting tension between the self and the world. I have little doubt that this hysteria is closely akin to Utopian romanticism, and also to the ethic of hero-worship, to an ethic that can comprehend life only in terms of 'dominate or prostrate yourself'. And I do not doubt that this hysteria is the secret of its strong appeal. That our problem is part of a larger one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we can find a clear parallel to the split between true and false rationalism even in a sphere apparently so far removed from rationalism as that of religion. Christian thinkers have interrupted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God in at least two very different ways. The sane one may be expressed by: 'Never forget that men are not Gods; but remember that there is a divine spark in them.' The other exaggerates the tension between man and God, and the baseness of man as well as the heights to which men may aspire. It introduces the ethic of 'dominate or prostrate yourself' into the relationship of man and God. Whether there are always either conscious or unconscious dreams of godlikeness and of omnipotence at the roots of this attitude, I do not know. But I think it is hard to deny that the emphasis on this tension can arise only from an unbalanced attitude towards the problem of power.

This unbalanced (and immature) attitude is obsessed with the problem of power, not only over other men, but also over our natural environment - over the world as a whole. What I might call, by analogy, the 'false religion', is obsessed not only by God's power over men but also by His power to create a world; similarly, false rationalism is fascinated by the idea of creating huge machines and Utopian social worlds. Bacon's 'Knowledge is power' and Plato's 'rule of the wise' are different expressions of this attitude which, at bottom, is one of claiming power on the basis of one's superior intellectual gifts. The true rationalist, by contrast, will always know how little he knows, and he will be aware of the simple fact that whatever critical faculty or reason he may possess he owes to intellectual intercourse with others. He will inclined, therefore, to consider men as fundamentally equal, and human reason as a bond which unites them. Reason for him is the precise opposite of an instrument of power and violence: he sees it as a means whereby these may be tamed.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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