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변증법은 무엇인가?
1. 변증법에 대한 설명
그렇게 터무니없고 믿어지지 않는 것치고 이런저런
철학자에 의하여 주장되지 않은 것이 없다.
데카르트
위 금언은 일반화될 수 있다. 이 금언은 철학자들과 철학에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상과 기획의 분야를 통하여 과학, 기술, 공학 및 정치에도 적용된다. 정말로, 이 금언에 의하여 제시되는 무엇인가를 한번 해보려는 경향은 훨씬 더 넓은 영역에서 - 지구상의 생명체가 생산하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형태와 모습에서 - 감지될 수 있다.
그리하여 왜 인간의 사상이 자체가 직면하는 어떤 문제에 대하여 상상가능한 모든 해결책을 철저하게 시험하려는 경향을 지니는지를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고도로 일반적인 종류의 규칙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해결책에 접근하는 방법은 보통 동일하다; 그 방법은 시행착오의 방법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적응과정에서 생명체들에 의하여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 방법의 성공은 주로 시행의 숫자와 다양성에 의존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더 많이 시도할수록, 우리의 시도들 중 한 가지 시도가 성공할 개연성은 더 높다.
우리는 인간 사상의 발전에서, 특히 철학의 발전에서 이용된 방법을 시행착오의 특수한 변종으로서 기술(記述)할 것이다.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론을 제시하여 자기들이 매달릴 수 있는 한 그 이론에 매달리거나 (그 이론이 틀렸다면 그들은 그 이론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론과 함께 심지어
1937년, 뉴질랜드 크라스트처취의 캔터베리 대학에서 개최된 철학 세미나에서 낭독된 논문. 1940년 정신(Mind)의 새 시리즈, 49호에 처음 발표됨.
죽으려할 것이다), 이론의 약점을 보면 그런 이론에 대항하여 싸움으로써 문제에 반응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이 이념들의 갈등은, 명백하게 시행착오의 방법을 통하여 설명될 수 있는데, 인간 사상 속의 발전으로서 불릴 어떤 것에 관하여 특징적으로 보인다. 그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 경우들은, 주로, 특정 이론이나 철학체계가 긴 기간을 통하여 독단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들이다; 그러나 느리고 꾸준하고 지속적이고, 시행착오와 이념들의 갈등에 의해라기보다는 연속적인 개선 단계들에 의하여 진행하는 사상의 발전 사례들은 있다고 해도 극히 드물다.
시행착오 방법이 점점 더 의식적으로 개발된다면, ‘과학적 방법’의 특징을 띠기 시작한다.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술(記述)될 수 있다. 특정 문제에 직면하여 과학자는 어떤 종류의 해결책을 - 이론 - 임시로 제시한다. 이 이론을 과학은 잠정적으로만 수용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문제의 이론을 비판하고 시험할 것은 과학적 방법에 관하여 매우 특징적이다. 비판과 시험은 병행한다; 이론은 취약할 저 요점들을 밝혀내기 위하여 매우 많은 다양한 면들로부터 비판된다. 그리고 이론의 시험은 이 취약한 요점들을 가능한 한 엄격한 시험에 부침으로써 진행된다. 이것은 물론 다시 시행착오 방식의 변종이다. 이론들은 임시적으로 제시되어 철저히 시험된다. 시험의 결과로 인하여 이론이 오류로 밝혀지면, 그 이론은 제거된다; 시행착오 방식은 본질적으로 제거의 방식이다. 그 방식의 성공은 세 가지 조건에 달려 있는데 즉, 그 조건은 충분히 많은 (그리고 정교한) 이론들이 제공되어야 하고, 제공된 이론들에는 충분히 다양해야 하고, 충분히 엄격한 시험들이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운이 좋다면 우리는 덜 적합한 이론들을 제거함으로써 가장 적합한 이론의 생존을 확보할 것이다.
일반적인 인간 사상의 발전과 특정 과학적 사고의 발전에 대한 이 기술(記述)이 다소 올바른 것으로서 수용된다면, 사고의 발전이 ‘변증법적’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것이다.
변증법은 (현대적 의미에서, 특히 헤겔에 사용한 의미에서) 어떤 것이 - 더욱 특히, 인간의 사고 - 소위 변증법적 3화음인 정립(定立: thesis), 반정립(反定立: antithesis), 종합(綜合: synthesis)에 의하여 특징지어지는 방식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첫째로 정립(定立: thesis)이라고 불릴 아이디어나 이론이나 움직임이 있다. 그런 정립은 흔히 반대의 것을 유발하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처럼 정립은 아마도 제한된 가치를 지닐 것이고 그리하여 정립의 약점들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반대되는 아이디어나 움직임은 ‘반정립(反定立: antithesis)’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반정립이 첫 번째 것인 정립을 반대하여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립과 반정립의 갈등은 어떤 해결책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되는데 그 해결책은, 어떤 의미에서, 정립과 반정립 각각의 가치들을 인정하여 그 장점들을 보전하려고 그리고 그 한계점을 피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정립과 반정립을 초월한다. 이 해결책은, 세 번째 단계인데, 종합(綜合: synthesis)이라고 불린다. 이룩되자마자 종합은 다시 새로운 변증법적 3화음의 첫 번째가 될 것인데, 특히 도달된 특정 종합이 일방적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밝혀진다면 그러할 것이다. 그 까닭은 이 경우에 반대의 것이 다시 일깨워질 것이고, 그것은 종합이 새로운 반정립을 유발한 새로운 정립으로서 그렇다면 기술(記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3화음은 그리하여 더 높은 수준으로 진행할 것이고, 두 번째 종합이 이룩될 때 세 번째 수준에 도달할 것이다.
소위 ‘변증법적 3화음’에 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변증법적 3화음이 사상의 역사 속의 특정 단계들을, 특히 아이디어와 이론의 그리고 아이디어나 이론들에 기초한 사회 운동들의 특정 발전들을 상당히 잘 기술(記述)한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변증법적 발전은 우리가 위에서 토론한 시행착오 방법에 일치하여 진행함을 밝힘으로써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발전은 시행착오 이론의 발전과 (위에 기술[記述]된) 정확하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 시행착오 방법에 대하여 우리가 앞서서 한 기술(記述)은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의 비판만을, 혹은, 변증법학자들의 용어사용법을 빌리면,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갈등만을 다루었다; 당초에 우리는 심층적 발전에 관하여 어떤 암시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갈등이 종합을 낳으리라고 암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에 대한 비판 사이의 혹은 정립과 정립에 대한 반정립 사이의 갈등이, 정립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정립의 (혹은 아마도 반정립의) 제거를 유발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론들의 경쟁으로 인하여, 충분한 이론들을 이용할 수 있어서 시험을 위하여 제공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새로운 이론들이 채택될 것이라고.
그리하여 시행착오 방식을 통한 해석은 변증법을 통한 해석보다 다소 폭넓다고 언급될 것이다. 시행착오 방식을 통한 해석은 처음에 한 가지 정립만 제시되는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로 처음부터 몇 개의 다른 정립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제공되는 상황에 쉽게 적용될 수 있는데, 한 가지 정립이 다른 정립에 반대되는 그런 방식으로만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 사상의 특정 분야의 발전이 단 한 가지 아이디어만으로 시작되는 일이 틀림없이 매우 흔히, 아마도 보통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정립이 비판에 노출되어 있을 것이고 그것 안에서 우리가 변증법학자들이 보통 말하는 바와 같이 정립에 대한 반정립을 우리가 ‘만들어내기’ 때문에, 변증법적 도식은 흔히 적용될 것이다.
변증법학자가 강조하는 것에는 변증법이 일반적인 시행착오 이론과 다소 다를 또 다른 요점이 포함되어 있다. 그 까닭은 위에 제시된 바와 같은 시행착오 이론이 만족스럽지 못한 견해는 논박되거나 제거될 것이라고 말하여 만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변증법학자는 이것보다 말할 것이 더 많다고 주장한다. 고찰되고 있는 견해나 이론이 논박되었다할지라도, 조금이라도 제시되어 진지하게 고려되었던 요소가 그 안에 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 정립의 귀중한 요소는 적(敵)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정립을 방어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분명하게 적시되기 쉽다. 그리하여 갈등에 대하여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종합, 즉 정립과 반정립 양쪽의 가장 훌륭한 요점들이 보전되는 이론일 것이다.
사상의 역사에 대한 그런 변증법적 해석은 때때로 매우 만족스러울 것이며, 그 해석이 시행착오를 통한 해석에 몇 가지 귀중한 세부사항을 보태줄 것임은 인정되어야 한다.
물리학의 발전을 보기로 들자. 우리는, 처음 것이 파동설에 의하여 갈음된 다음에 양쪽 모두를 갈음하는 새로운 이론 속에 ‘보전되어’ 남아 있는 빛의 입자론과 같이, 변증법적 도식에 들어맞는 매우 많은 사례들을 발견할 수 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옛 공식은 보통 새로운 공식들의 관점으로부터 근사치로서 기술(記述)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옛 공식들은 매우 근사하게 참으로 보이어서, 우리가 매우 높은 정도의 정확성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에서나 혹은 심지어 적용과 관련된 어떤 제한된 분야들 내부에서 철저하게 정확한 공식들로서, 옛 공식들은 적용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변증법적 관점을 지지하여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인정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예를 들어 변증법학자들에 의하여 사용되어 불행히도 종종 너무 진지하게 고찰되는 몇 가지 비유에 대하여 조심해야 한다. 한 가지 보기는 정립이 자체의 반정립을 ‘낳는다’는 변증법적 언급이다. 실제로 반정립을 낳는 것은 우리가 지닌 비판적 태도일 따름이며, 그런 태도가 결핍된 곳에서는 - 그런 것이 매우 흔한 경우이다 - 반정립이 생겨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유사하게 우리는 종합을 ‘낳는’ 것이 정립과 정립의 반정립 사이의 ‘갈등’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 갈등은 정신들의 한 가지이다; 그리고 이 정신들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은 생산해야 한다: 인간 사상의 역사에는 무(無)로 끝난 헛된 갈등들에 관한 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리고 심지어 종합이 이룩되었을 때도, 그 종합이 정립과 반정립 양쪽의 더 나은 부분들을 ‘보전한다’고 말하는 것은 보통 종합에 대한 다소 조악한 기술(記述)이 될 것이다. 이 기술(記述)은 심지어 그 기술(記述)이 참인 곳에서조차 오해를 낳을 것인데, 그 이유는 종합이 ‘보전하는’ 더 오래된 아이디어들에 덧보태어 종합은 모든 경우에 발전의 이전 단계들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종합은 대개 정립과 반정립에 의하여 제공되는 소재로부터 나오는 압축물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인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변증법적 해석은 심지어 그 해석이 적용될 곳에서조차, 종합이 정립과 반정립에 포함된 아이디어들로부터 틀림없이 구축된다는 자체의 제안에 의하여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에 심지어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몇몇 변증법학자들 자신이 강조한 요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항상 변증법이 사상의 미래 발전을 자신들이 촉진하거나 적어도 예언하는 데에 도움을 줄 기법으로서 사용될 수 있다고 상정(想定)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오해와 혼동들은 변증법학자들이 모순에 대하여 말하는 산만한 방식으로부터 출현한다.
그들은 사상의 역사 속에서 모순은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닌다고 - 정확하게 비판만큼 중요하다고 - 옳게 말한다. 그 까닭은 비판이 변함없이 어떤 모순을 지적하는 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판되는 이론 내부의 모순이거나, 우리가 수용할 어떤 이유를 지니고 있는 이론과 또 다른 이론 사이의 모순이거나, 이론과 특정 사실들 사이의 - 더 정확하게, 이론과 사실에 대한 특정 서술들 사이의 - 모순. 비판은 그런 어떤 모순을 지적하거나 혹은 아마도 이론을 부인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비판은 반정립에 대한 서술일 따름일 것이다). 그러나 비판은,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지적(知的) 발전의 주요 동력이다. 모순이 없다면, 비판이 없다면, 우리의 이론들에는 수정할 이성적 동기가 없을 텐데: 지적(知的) 진보가 없을 텐데.
모순이 - 특히 물론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모순으로 종합의 형태로 진보를 ‘낳는다’ - 매우 풍요롭고, 정말로 사상의 진보에 대한 동력이라고 올바르게 말한 후에, 변증법학자들은 이 풍요로운 모순들을 피할 필요가 없다고 - 우리가 알게 될 것과 같이 그릇되게 -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은 심지어 모순들이, 세상 어디에서도 출현하기 때문에, 회피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은, 두 가지 모순적인 서술들은 함께 참일 수가 없다거나 혹은 두 가지 모순적 서술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서술은 순전히 논리적 근거로 틀림없이 항상 배척된다고 주장하는 법칙인, 소위 전통적 논리의 ‘모순의 법칙’에 대한 (혹은 더 상세하게, ‘모순의 배제 법칙’에 대한) 공격과 같다. 모순들이 지닌 풍요로움의 도움을 받아, 변증법학자들은 이 전통적 논리 법칙이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변증법이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논리학을 - 변증법적 논리학 - 낳는다고 주장한다. 변증법은, 내가 지금까지 역사적 교설로서만 제시했는데 - 사상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이론 - 이렇게 해서 매우 다른 교설로 밝혀질 것이다: 변증법은 동시에 논리적 이론이자 (우리가 알게 될 바와 같이) 세상에 대한 일반론이 될 것이다.
이것들은 엄청난 주장이지만 최소한의 근거도 갖고 있지 않다. 정말로 그것들은 산만하고 혼탁한 화법 이상의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변증법학자들은 모순이 유효하고 풍요롭고 진보를 낳는다고 말하고, 우리는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모순들을 용인하지 않기로 결심하여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이론을 수정하기로 결심한다는 조건에서만 참이다; 다시 말해서 모순을 수용하지 않는 것; 비판 다시 말해서 모순들을 지적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수정하여 그리하여 진보하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결심들 중 이 결심에만 기인한다.
우리가 이 태도를 바꾸어 모순들을 용인하기로 결심한다면, 모순이 즉시 어떤 종류의 풍요로움도 틀림없이 잃게 됨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모순들은 더 이상 지적(知的) 진보를 낳지 못할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모순들을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의 이론들 안에서 모순들을 지적하는 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이론들을 수정하려는 유혹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비판은 (모순들을 적시하는 데에 달려있다) 자체의 힘을 상실할 텐데. 비판은 ‘왜 안 돼?’나 아마도 심지어 열정적인 ‘거기 너희들이 있구나!’라는 말로써 대접을 받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적시된 모순들을 환영함으로써.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모순들을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비판은, 비판과 함께 모든 지적(知的) 진보가, 틀림없이 종언을 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변증법학자에게 양쪽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고 말해야 한다. 변증법학자가 모순들이 지닌 풍요로움 때문에 모순들에 관심을 갖던지: 그렇다면 그는 모순들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 혹은 그가 모순들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던지: 그렇다면 모순들은 무익하여, 이성적 비판과 토론 그리고 지적(知的) 진보는 불가능할 것이다.
변증법적 발전을 추진하는 유일한 ‘힘’은, 그러므로, 정립과 반정립 사이의 모순을 수용하지도 않고 용인하지도 않는 우리의 결심이다. 발전을 촉진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아이디어 내부의 신비로운 힘이 아니오, 이 두 가지 아이디어 사이의 신비로운 긴장도 아니다 - 우리가 모순들을 피하도록 할 새로운 관점을 우리가 찾도록 촉구하는 것은 순전히 모순들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우리들의 결심이자 우리들의 결정이다. 그리고 이 결정은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그 까닭은 사람이 모순들을 수용한다면 과학적 활동을 포기해야 할 것임이 쉽게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두 가지 모순적 서술들이 수용된다면 어떤 서술도 수용되어야 함을 증명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다; 그 까닭은 몇 가지 모순적 서술들로부터 여하한 서술도 유효하게 추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상 실현되지는 않아서, 그러므로 여기서 완벽하게 설명될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하찮지 않아서 모든 사색가들에 의하여 알려지고 이해될 자격이 있는 기초적 논리학에 관한 극소수 사실들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수학처럼 보이는 기호들의 사용을 혐오하지 않는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기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조차도 너무 조급하지 않아서 이 요점에 몇 분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틀림없이 문제를 쉽게 이해한다.
논리적 추론은 특정 추론 규칙들에 따라서 진행된다. 논리적 추론이 도움을 받는 추론 규칙이 유효하다면 그 추론은 유효하다; 그리고 추론 규칙은 참인 전제들로부터 거짓인 결론으로 유도될 수 없다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유효하다; 즉, 다시 말해서 추론 규칙이 전제들의 진실성을 (그 전제들이 모두 참이라는 조건으로) 결론으로 변함없이 이전시킨다면.
우리에게는 그런 두 가지 추론 규칙들이 필요할 것이다. 첫 번째이자 더 어려운 추론 규칙 하나를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는 복합 서술(compound statement)이라는,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그리고 피터는 왕이다’나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현명하거나 피터가 왕이다 (양쪽 모두는 아니다)’나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그리고/또는 피터는 왕이다’와 같은 서술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그런 복합 서술이 구성되는 두 가지 서술들은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그리고 ‘피터는 왕이다’) 요소 서술들(component statements)로 불린다.
이제 여기에 우리로 하여금 흥미를 갖게 하는 한 가지 종류의 복합 서술이 있다 - 그렇게 구축되어서 적어도 그 복합 서술의 두 가지 요소 중 하나가 참이라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참인 복합 서술. ‘그리고/또는’이라는 불쾌한 표현은 그런 복합을 낳는 효과를 정확하게 지녔다: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그리고/또는 피터는 왕이다’라는 주장은 그 주장의 요소 서술들 중 하나나 양쪽 모두가 참이라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참이 될 주장이다; 그래서 그 주장의 요소 서술들 양쪽 모두가 거짓이라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 조건으로만 그 주장은 거짓일 것이다.
논리학에서 ‘그리고/또는’이라는 표현을 기호 ‘v’로써 (‘벨[vel]’로 발음된다) 갈음하여 우리가 원하는 서술을 의미하기 위하여 ‘p’와 ‘q’와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이 관습적이다. 그러므로 ‘p v q’ 형태의 서술은 적어도 그 두 가지 요소인 p와 q중 하나가 참이라는 조건으로 참일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첫 번째 추론 규칙을 언명할 위치에 있다. 그 규칙은 이런 방식으로 언명될 것이다:
(1) 전제 p로부터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p v q’ 형태의 결론이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v 피터는 왕이다’) 유효하게 추론될 것이다.
이 규칙이 틀림없이 유효하다는 것은 우리가 ‘v’의 의미를 기억한다면 즉시 발견될 수 있다. 이 기호는, 적어도 요소들 중 하나가 참일 때마다 참인 복합을 만든다. 따라서 p가 참이라면 p v q는 틀림없이 또한 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규칙은 참인 전제로부터 거짓인 결론으로 유도될 수 없는데, 이것은 우리의 규칙이 유효함을 의미한다.
그 유효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첫 번째 추론 규칙은 자주 그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그 규칙은, 결론에는 전제보다 훨씬 더 적은 정보가 담겨있기 때문에, 정말로 일상생활에서 드물게 사용되는 규칙이다. 그러나 그 규칙은, 예를 들어, 내기에서 때때로 사용된다. 가령 나는 동전을 두 번 던져 앞면이 적어도 한번은 나타날 것이라고 내기를 걸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처음 던질 때 앞면이 나온다 v 두 번째 덜질 때 앞면이 나온다’는 복합 서술의 진실성에 내가 내기를 거는 것과 대등하다. 이 서술의 확률은 3/4이다 (일반적인 계산에 따라서); 그것은, 예를 들어, 그 확률이 1/2인 ‘처음 던질 때 앞면이 나오거나 두 번째 던질 때 앞면이 나온다 (그러나 양면은 나오지 않는다)’라는 서술과는 다르다. 앞면이 처음 던질 때 나왔으면 내가 내기에서 이겼다고 - 다시 말해서, 그 진실성에 내가 내기를 걸고 있던 복합 서술이, 그 첫 번째 요소가 참이었다면, 틀림없이 사실이라고 - 모든 사람은 말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추론의 첫 번째 규칙에 따라서 논증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첫 번째 규칙을 서술할 수 있는데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읽힐 것이다: ‘전제 p로부터 우리는 결론 p v q를 얻는다.’
내가 사용하려는 두 번째 추론 규칙은 처음 것보다 더 익숙하다. 우리가 p의 부정을 ‘~p’로써 표시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서술될 수 있는데
말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2) ~ p와 p v q라는 전제들로부터 우리는 결론 q를 얻는다.
이 규칙의 유효성은, ~ p라는 것이 p가 거짓이라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 조건만으로 참인 서술임을 우리가 고려한다면, 확립될 수 있다. 따라서 첫 번째 전제인 ~ p가 참이라면, 두 번째 전제의 첫 번째 요소는 거짓이다; 그리하여 두 가지 전제들 모두가 참이면, 두 번째 전제의 두 번째 요소는 틀림없이 참이다; 다시 말해서 두 가지 전제가 참일 때마다 q는 틀림없이 참이다.
~ p가 참이면 p는 틀림없이 거짓임을 추론하면서, 우리는 ~ p와 p가 함께 참일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모순의 법칙’을 암묵적으로 이용했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순을 지지하여 논증하는 것이 이 순간 나의 과제라면, 우리는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 나는 단시 추론의 유효한 규칙들을 사용하여 몇 가지 모순적인 전제들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추론할 수 있음을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의 두 가지 규칙들을 사용하여 우리는 정말로 이것을 밝힐 수 있다. 그 까닭은 우리가 두 가지 모순적인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想定)하라 - 가령
(a) 태양은 지금 빛나고 있다.
(b) 태양은 지금 빛나고 있지 않다.
이 두 가지 전제들로부터 우리는 어떤 서술도 - 예를 들어, ‘시저는
반역자였다’ 다음과 같이 추론될 수 있다 (‘다음과’ 앞에 하이픈[-]이 들어가야 하는데 원문에 빠져있다. 원문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첫 번째 전제 (a)로부터 우리는, 규칙 (1)에 따라서, 다음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c) 태양은 지금 빛나고 있다 v 시저는 반역자였다.
이제 (b)와 (c)를 전제들로 취하면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규칙 (2)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d) 시저는 반역자였다.
동일한 방법으로써 아마도 우리가 추론하기를 원했던 다른 서술을 추론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시저는 반역자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2 + 2 = 5’와 ‘2 + 2 ≠ 5’를 - 우리가 원하는 모든 서술뿐만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지 않을 그 서술의 부정도 또한 - 추론할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이론이 모순을 포함하고 있으면 그 이론은 모든 것을 포함하여 그리하여 아무것도 내포하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자체가 주장하는 정보에 그 정보의 부정을 또한 덧붙이는 이론은 우리에게 어떤 정보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모순을 내포하는 이론은 전적으로 무용한 이론이다.
분석된 논리적 상황의 중요성을 참고하여, 동일한 결과를 낳는 다른 추론 규칙 몇 가지를 이제 나는 제시하겠다. 규칙 (1)과 대조적으로, 이제 검토되고 사용될 규칙들은, 우리가 먼저 토론할 다음 규칙 (3)을 제외하고, 삼단 논법이라는 고전적 이론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3) 두 가지 전제 p와 q로부터, 우리는 그것들 중 하나와 - 가령 p - 동일한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혹은 도식적으로,
그 도식의 생소함과, 몇몇 철학자들은 그 도식을 수용하지 않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규칙은 의심할 바 없이 유효하다; 그 까닭은 그 규칙이 틀림없이 전제들이 참일 때마다 참인 결론을 낳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하고, 그래서 정말로 사소하다; 그리고 평범한 담론에서 그 규칙들 군더더기로 만들어서 생소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사소함이다. 그러나 군더더기가 무효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규칙 (3)에 덧보태어 우리에게 내가 ‘간접적 환원 규칙’이라고 불렀던 또 다른 규칙이 필요할 것이다 (삼단 논법이라는 고전적 이론 안에서 그것은 ‘불완전한’ 격을 제 1격이나 ‘완전한’ 격으로 간접적으로 환원하는 데에 암묵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유효한 삼단 논법을 지니고 있다고 상정(想定)하라
(a) 모든 사람은 죽는다
(b) 모든 아테네인들은 사람이다
(c) 모든 아테네인들은 죽는다.
이제 간접 환원 규칙은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전제 (a)와 (b)로부터 나온 추론 (c)의 유효성 덕분에, 우리는
(a) 모든 사람은 죽는다
(~c) 어떤 아테네인들은 죽지 않는다
(~b) 어떤 아테네인들은 사람이 아니다
가 틀림없이 또한 유효함을 발견한다.
방금 서술된 규칙을 약간 변형시킨 것으로서 우리가 사용하려는 규칙은; 이것이다 (원문에서 세미콜론과 그 다음 it을 제외해야 한다. 문장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규칙 (5)는, 예를 들어, ~ ~b로부터 우리가 b를 추론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중부정의 법칙과 함께 규칙 (4)로부터 획득될 것이다. 이제 규칙 (5)가 우리가 선택하는 a, b, c 어느 것에 대해서도 유효하다면 (그리고 그 경우에만 유효하다면) c가 우연히 a와 동일한 경우에도 또한 틀림없이 유효하다; 다시 말해서 다음의 경우가 틀림없이 유효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6)과 (3)은 함께 다음 것을 낳는다
그러나 (7)은 정확하게 우리가 밝히고자 원했던 것을 - 몇 가지 모순적인 전제들로부터, 여하한 결론도 추론될 것 - 서술한다.
이 상황이 논리에 관한 어떤 체계 안에서도 유효한지, 혹은 우리가 그 안에서 모순적 서술들이 모든 서술을 포함하지는 않는 논리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조사했고, 해답은 그런 체계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체계는, 그러나, 매우 취약한 체계로 판명된다. 평범한 추론 규칙들이 남는 것은 드물고, 심지어 ‘p라면 q이다’라는 형태의 서술로부터, p와 함께, 우리가 q를 추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긍정식(modus ponens)도 남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런 체계는, 그와 같은 형식적 체계들을 구축하는 데에 특별하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아마도 얼마간 매력을 지닐지라도, 추론들을 도출하는 데에는 쓸모가 없다.
몇 가지 모순적 서술들로부터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도 도출된다는 사실은 모순적 이론의 무용성(無用性)을 확립하지 않는다고 때때로 언급되었다: 첫째로 이 이론은 모순적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흥미로울 것이다; 두 번째로 그 이론은 자체를 일관적으로 만드는 교정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임시 방편적인방법이라 할지라도 (양자 이론에서 발산을 피하는 방법들과 같은 방법), 우리는 한 가지 방법을 개발할 것인데, 그 방법으로 인하여 그 이론에 의하여 틀림없이 논리적으로 포함된 거짓 결론들을 우리는 획득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완전히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임시방편적인 이론은 이전에 논의된 심각한 위험들을 야기한다: 우리에게 그 이론을 용인하려는 진지한 의도가 있다면 우리들로 하여금 더 나은 이론을 탐색하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된다: 우리가 더 나은 이론을 탐색한다면, 포함된 모순 때문에 우리가 기술(記述)한 그 이론이 나쁜 이론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탐색한다. 모순들을 수용하면 틀림없이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도 여기서도 비판은 끝장나고, 그리하여 과학의 붕괴가 일어난다.
여기서 사람들은 산만하고 비유적인 화법이 가져오는 위험을 본다. 모순들은 피할 수 없고, 모순들은 매우 풍요롭기 때문에 모순들을 피하는 것이 심지어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변증법학자들의 주장이 지닌 산만함은 위험스럽게 오해를 낳는다. 그 산만함은, 소위 모순들의 풍요로움이라는 것이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모순들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결정의 (모순의 법칙과 일치하는 태도) 결과일 따름이기 때문에, 오해를 낳는다. 그리고 그 느슨함은, 모순들은 회피할 필요가 없다고 그리고 심지어 모순들은 회피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틀림없이 과학과 비판의, 다시 말해서 합리성의 붕괴를 야기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것은, 진실과 계발(啓發)을 증진시키고자 원하는 사람은 사물들을 분명하고 명백하게 표현하는 기술(記述)로 자신을 훈련시키는 일이 필수이고 심지어 의무임을 - 비록 이것이 비유와 교묘한 이중적 의미가 주는 우아함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 틀림없이 명백하게 한다.
그러므로 특정 언명(言明)들을 피한 것이 더 좋다. 예를 들어 정립과 반정립과 종합을 말하면서 우리가 사용했던 용어사용법 대신에, 변증법학자들은 흔히 변증법적 3화음을, ‘반정립’ 대신에 ‘(정립의) 부정’을 그리고 ‘종합’ 대신에 ‘부정의 부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술(記述)한다. 그리고 그들은, ‘갈등(conflict)’나 아마도 ‘대립하는 경향’이나 ‘대립하는 관심’, 기타 등등과 같은 용어들이 오해를 덜 야기할 곳에서 ‘모순(contradic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좋아한다. 그들의 용어사용법은, 변증법적 사용과 달리 ‘부정’과 ‘부정의 부정’이라는 용어가 (그리고 유사하게 ‘모순’이라는 용어) 분명하고도 상당히 확정된 의미들을 갖지 않는다면, 해를 끼치지 않을 텐데. 사실상 이 용어들의 악용은 변증법학자들의 토론에서 매우 흔히 발생하는 논리학과 변증법의 혼란에 상당히 기여했다. 흔히 그들은 변증법이 논리학이나 개선되고 현대화된 논리학의 한 부분이라고 - 더 나은 부분 - 생각한다. 그런 자세에 관한 심층적 이유는 나중에 논의될 것이다. 변증법이 논리학과 어떤 종류의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결론을 우리의 분석이 도출하지 않는다고만 나는 현재 말할 것이다. 그 까닭은 논리학이 - 아마도 개략적이지만 현재 우리의 목적들에는 충분하다 - 연역 이론으로서 기술(記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증법이 연역과 관계가 있다고 믿을 이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요약한다: 변증법이 무엇인지는 - 우리가 변증법적 3화음에 분명한 의미를 붙인다는 의미에서의 변증법 - 그러므로 이렇게 기술(記述)될 수 있다. 변증법은, 혹은 더 정확하게 변증법적 3화음이라는 이론은 특정 발전들이 혹은 특정 역사적 과정들이 어떤 전형적인 방식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를 들어 대부분의 생명체들이 어떤 발전 단계에서 자신들의 규모를 증가시켰다가 그 다음에 변화가 없고 마침내 축소되어 죽는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비견될 수 있는, 경험적인 기술성(記述性) 이론이다; 또는 견해들이 처음에는 독단적으로, 그 다음에는 회의적으로, 그 후에는 오직 세 번째 단계에서 과학적인 즉, 비판적인 정신으로 유지된다고 주장하는 이론과 비견될 수 있는. 그런 이론들처럼, 변증법은 - 우리가 변증법적 해석들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 예외 없이 적용될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이론들처럼 변증법에는 논리학과 특별한 관련성이 없다.
변증법이 지닌 애매 모호성은 변증법이 지닌 위험의 또 다른 하나이다. 그 애매 모호성으로 인하여 변증법을 모든 종류의 발전에 그리고 심지어 완전히 다른 것들에 강요하는 일이 너무나 쉬워진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자(種子)를 정론(正論: thesis)과, 이 종자로부터 커나가는 식물을 반론(反論: antithesis)과, 그리고 이 식물로부터 열매를 맺는 모든 씨앗을 종합(synthesis)과 동일시하는 변증법적 해석을 발견한다. 그런 적용이 이미 너무 애매모호한 변증법적 3화음을 그 애매모호함을 위험스럽게 증대시키는 방식으로 확대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적용은, 발전을 변증법적으로서 기술(記述)함으로써 그 적용이 단계들 속의 한 발전이라고 말하여 우리가 더 이상 많은 것을 전하지 못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식물이 자라기 시작할 때 씨앗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식물의 발아가 씨앗의 부정이라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식물에 의하여 많은 새로운 씨앗이 생산되는 것은 부정의 부정이라고 - 더 높은 수준에서의 새로운 시작 - 말함으로써 이 발전을 해석하는 것은 명백하게 말장난일 따름이다. (이것이 엥겔스가 이 보기에 대하여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이유일까?)
논리학과 같은 이론은 ‘근본적(fundamental)’이라고 불려서 그리하여, 그 이론이 모든 종류의 추론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에 항상 모든 과학들에 의하여 사용됨이 지적될 것이다. 우리가 변증법을 합리적으로 적용할 수 있음을 알았다는 의미에서 변증법은 근본적이 아니라 단지 기술적(記述的) 이론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변증법을 논리학의 필수적 부분으로서, 혹은 논리학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간주한다는 것은, 가령 진화론을 그렇게 간주하는 것만큼 거의 동등하게 부적당하다. 우리가 위에서 비판한 산만한 비유적이고 애매모호한 화법만이, 변증법이 어떤 전형적인 발전들을 기술(記述)하는 이론인 동시에 논리학과 같은 근본적인 이론 양쪽 모두가 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사람들은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 매우 신중해야 함이 명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조금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매우 좋을 것이다 - 우리는 시행착오라는 보다 명확한 언어용법을 항상 사용할 수 있다. 예외들은 오해가 발생할 수 없는 곳에서만, 그리고 실제로 3화음 방향을 따라서 정말로 진행하는 이론들의 발전을 우리가 마주하는 곳에서 인정되어야 한다.
2. 헤겔의 변증법
지금까지 나는, 내가 변증법을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들기를 희망하는 방식으로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개괄하려고 노력했다. 이 개괄에서 변증법은 발전 상황들을 기술(記述)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서 제시되었다; 근본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완전히 적합한 다른 방법들 중 한 가지 방법으로서. 이것과는 반대로 한 가지 변증법 이론이 예를 들어 헤겔과 그의 학파에 의하여 제시되었는데, 그 이론은 변증법의 중요성을 과장하여 위험스럽게 오해를 유발한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철학사의 한 장(章)을 - 내가 생각하기에 그다지 훌륭하지 않은 장(章) -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현대 철학사에서 한 가지 주요 문제는 한 편으로 데카르트적 이성주의와 (주로 유럽 대륙적) 다른 한 편으로 경험주의 (주로 영국적) 사이의 갈등이다. 내가 이 논문의 금언으로서 사용한 데카르트의 문장을, 이성주의 학파의 창시자인 그 저자 데카르트가 내가 그 금언을 이용한 방식으로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 금언은 인간의 정신이 어떤 것에 - 다시 말해서 어떤 유용한 해결책에 - 도달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암시로서가 아니라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감히 시도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 비판으로서 의도되었다. 데카르트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인 자신의 문장 뒤에 있던 주요 개념은, 진정한 철학자는 터무니없고 어리석은 개념들을 신중하게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리를 발견하기 위하여 자체의 명료성에서 의하여, 자체의 명징성과 분명함에 의하여 이성을 사로잡는, 요약해서 ‘자명한(自明: self-evident)’ 희귀한 개념들을 그는 수용만하면 된다. 데카르트적 관점은 우리가, 우리의 이성을 이용함으로써만 경험을 참조하지 않고도 과학의 설명적 이론들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모든 이성적 제언들이 (다시 말해서 자체의 명료성에 의하여 자체를 추천하는 제언) 틀림없이 사실들에 대하여 참인 기술(記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략한 개요로써 철학사가 ‘이성주의(rationalism)’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더 나은 이름은 ‘주지주의(intellectualism)’이리라.) 이성주의는 (훨씬 뒤 시기의 언명인, 즉 헤겔의 언명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이성적인 것은 틀림없이 실재적이다.’
이 이론과 반대로, 오직 경험만을 통해서 우리는 과학적 이론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경험주의는 주장한다. 경험주의에 따르면 순수한 이성만은 사실적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 우리는 관찰과 실험을 이용해야 한다. 이런저런 형태의 경험주의는, 아마도 겸손하고 수정된 형태에서라 할지라도, 우리 시대에 진지하게 생각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의 해석일 따름이라고 안전하게 언급될 수 있다. 초기 이성주의자들과 경험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칸트에 의하여 철저하게 토론되었는데, 칸트는 변증법학자가 (칸트가 아니라) 아마도 두 가지 상반되는 견해들의 종합으로서 기술(記述)하는 것이지만, 더 정확하게는, 경험주의의 수정된 형태였던 것을 제시하려고 했다. 칸트의 주요 관심은 순수한 이성주의를 배격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에서 칸트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범위는 가능한 경험의 분야에 제한되며, 이 분야를 초월하는 사변적(思辨的: speculative) 추리는 - 순수 이성으로부터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하려는 시도 - 어떤 정당성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순수 이성에 대한 이 비판은 거의 모든 대륙 철학자들의 희망에 지독한 타격으로서 느껴졌다; 그러나 독일 철학자들은, 칸트의 형이상학 배격에 의하여 확신을 받기는커녕, 타격에서 회복하고 ‘지적 직감(知的 直感: intellectual intuition)을 기초로 하여 새로운 형이상학적 철학체계들을 서둘러 구축하였다. 독일 철학자들은 칸트의 철학체계가 지닌 어떤 특징들을 사용하려고 노력하여, 그리하여 칸트의 비판이 지닌 주요 영향력을 피하기를 희망했다. 발전한 학파는, 보통 독일 관념주의자들의 학파로 불리는데, 헤겔에서 절정에 달했다.
우리가 토론해야 할 헤겔 철학의 두 가지 면이 있다 - 헤겔의 관념론과 헤겔의 변증법.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헤겔은 칸트의 아이디어 몇 가지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지만, 더 멀리 나아가려고 노력하였다. 헤겔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러므로 어떻게 그의 이론이 칸트의 이론을 이용했는지를 밝혀야 한다.
칸트는 과학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이 사실을 설명하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나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세상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가?’ 혹은 ‘우리의 정신은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싶어 했다. (우리는 아마도 이 질문을 인식론적 질문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의 추론은 다소 다음과 같다. 정신은 세상을, 즉 우리에게 나타날 때 세상을 이 세상이 정신과 철저히 다르지는 않기 때문에 - 그 세상이 정신과 같기 때문에 - 이해할 수 있다. 지식을 획득하는, 세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생각은 말하자면 감각들을 통하여 자체에 들어오는 모든 저 재료를 능동적으로 소화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정신은 이 재료를 형성하고 주조하고 있다; 정신은 자체의 내재적 형태들이나 법칙들을 - 우리 사고(思考)의 형태들이나 법칙들 - 자체에 각인시킨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우리에게 나타날 때의 세상 - 이미 우리의 생각들에 의하여 소화되는 세상이자 형성되는 세상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정신에 의하여 흡수되기 때문에, 그 세상은 정신과 같다.
‘우리에게 나타날 때의 세상이 정신과 같기 때문에 정신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답변은 관념론적 논증이다; 그 까닭은 관념론이 주장하는 것이 세상에는 정신의 특징과 관련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칸트의 인식론을 찬성하거나 반대하여 논증할 의도가 나에게는 없으며 그 인식론을 자세하게 토론할 의도도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칸트의 인식론이 분명히 전적으로 관념론적이지는 않다고 나는 지적하고 싶다. 칸트 자신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그 인식론은 - 그 실재론적 요소가, 세상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그 관념론적 요소는 세상이 우리의 정신에 의하여 형성되는 어떤 종류의 재료라는 주장인 반면, 우리의 정신에 의하여 형성된 어떤 종류의 재료이다 이기 때문에 - 어떤 종류의 실재론과 어떤 종류의 관념론의 혼효(混淆: mixture)이거나 종합(synthesis)이다.
칸트가 주장하는 다소 추상적이지만 틀림없이 독창적인 인식론에 대해서는 이 만큼만 하자. 헤겔에게로 나아가기 전에, 철학자들이 아니고 자신들의 일반 상식에 의존하는 데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나는 그 독자들을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 논문에 관한 금언으로서 내가 선택한 문장을 기억해달고 요청해야겠다; 그 까닭은 그 독자들이 이제 들을 것은 자신들에게 - 내가 생각하기에 완전히 타당하게 - 아마도 터무니없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헤겔은 자신이 주장하는 관념론에서 칸트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 헤겔 역시 ‘어떻게 우리의 정신을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적 질문에 고심했다. 다른 관념론자들과 함께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세상은 정신과 같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칸트의 이론보다 더 급진적이다. 그는 칸트처럼 ‘정신이 세상을 소화하거나 형성하기 때문에’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이 세상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혹은 또 다른 언명으로, ‘이성적인 것은 실재적이기 때문에; 실재와 이성은 동일하기 때문에’.
이것이 소위 헤겔의 ‘이성과 실재의 철학’, 즉 줄여서 그의 ‘동일철학’이다. ‘정신이 세상을 형성하기 때문에’라는 칸트의 답변과 ‘정신이 세상이다’라는 헤겔의 동일철학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교량이 - 즉, ‘정신이 세상을 창조한다’라는 피히테(Fichte)의 답변 - 있었다는 것이 지나가는 길에 주목될 것이다.
헤겔의 동일철학인 ‘이성적인 것은 실재적이고, 실재적인 것은 이성적이다; 그리하여 이성과 실재는 동일하다’는 그러므로 의심할 바 없이 새로운 기초 위에 이성주의를 재정립하려는 시도였다. 동일철학으로 인하여 철학자들은 순수한 추리로부터 세상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여 그 이론이 틀림없이 실재 세상에 대하여 참인 이론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동일철학은 칸트가 정확하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을 허용했다. 그리하여 헤겔은 형이상학에 반대한 칸트의 논증들을 논박하기로 노력하게 되어 있었다. 헤겔은 자신의 변증법의 도움을 받아서 그 논박을 수행했다.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칸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너무 많은 세부사항을 피하기 위하여 나는 칸트의 범주표의 3화음적 구축을, 비록 그 구축이 의심할 바 없이 헤겔에게 영감을 주었다할지라도, 논의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나는 이성주의를 배격하는 칸트의 방법을 언급해야 한다. 위에서 우리가 지닌 지식의 범위가 가능한 경험의 분야에 국한된다고 그래서 이 분야를 초월하는 순수한 사고(思考)는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칸트가 주장했다고 나는 언급했다. 자신이 ‘선험적 변증론(Transcendental Dialectic)’이라고 제목을 붙였던 순수 이성 비판의 한 부분에서 칸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순수 이성으로부터 이론 체계를 구축하려고 한다면 - 예를 들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무한하다고 우리가 논증하려고 한다면 (분명히 가능한 경험을 초월하는 개념) -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유사한 논증들의 도움을 받아서 항상 논증하여 그 반대 결과를 또한 얻을 수 있음을 발견하여 당황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형이상학적 주장이 주어지면 우리는 정확한 반정립(反定立: antithesis)을 항상 구축하여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정립을 지지하는 어떤 논증에 대해서도 우리는 반정립을 지지하여 그 논증의 반론을 쉽게 구축할 수 있다. 그래서 두 가지 논증은 동등하게, 혹은 거의 동등하게 합리적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칸트는 이성이 가능한 경험을 초월하여 사용된다면, 자체에 반하는 논증이 되어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고 말했다.
칸트 자신이 했던 것에 대한 칸트 자신의 견해로부터 벗어나, 칸트를 일종의 현대화된 재구축이나 재해석으로 내가 내놓는다면, 합리성이나 자명(自明: self-evidence)에 관한 형이상학적 원리가 분명하게 단 한 가지의 결과나 이론을 낳지 않는다는 것을 칸트가 밝혔다고 나는 말할 것이다. 몇 가지 다른 이론들을, 심지어 반대되는 이론들을 지지하여 논증하면서 유사한 명백한 합리성을 지닌다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적어도 특정 이론들을 제거하라고 우리에게 알려주는 실험들이나 관찰들을 우리가 할 수 없다면 - 즉, 완전히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관찰된 사실들에 반하는 이론들 - 경쟁하는 이론들의 주장을 결정할 희망이 우리에게는 없다.
헤겔은 어떻게 칸트의 이성주의에 대한 논박을 극복했던가? 매우 쉽게, 모순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함으로써. 모순들은 사고(思考)와 이성의 발전에서 틀림없이 발생할 따름이다. 모순들은, 사고(思考) 다시 말해서 이성이 그리고 이성과 함께 실재가 영구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발전하고 있다는 - 우리가 진화의 세상의 살고 있다는 -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 이론의 불충분함을 보여줄 따름이다. 칸트는 형이상학을 논박하였지 이성주의를 논박한 것은 아니라고 헤겔은 말한다. 그 까닭은 헤겔이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변증법’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진화, 운동, 발전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리하여 실재를 안정되고 움직이지 않으면 모순이 없는 것으로서 간주하려고 하는 그런 이성주의적 체계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동일철학을 사용하여 헤겔은, 이성이 발전하기 때문에 세상이 틀림없이 발전하며 사고(思考)나 이성의 발전이 변증법적 발전이기 때문에 세상도 틀림없이 또한 변증법적 3화음으로 발전한다고 추론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헤겔의 변증법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한다.
(a) 칸트가 형이상학에서 ‘독단주의’라고 불렀던 것을 칸트가 논박한 것을 피하려는 시도. 이 논박은, 이성의 발전을 고려하여 모순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변증법적 이성주의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더 좁은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철학체계들에 대해서만 유효한 것으로 헤겔에 의하여 간주된다. 이런 방식으로 칸트의 비판을 피하면서 헤겔은 틀림없이 재앙을 초래하는 극도로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헤겔이 이와 같이 논증하기 때문이다: ‘이성주의가 틀림없이 모순들을 초래한다고 말함으로써 칸트는 이성주의를 논박했다. 나는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논증이 모순의 법칙으로부터 자체의 힘을 끌어온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논증은 이 법칙을 수용하는 그런 철학체계만을, 다시 말해서 모순들이 없으려고 노력하는 그런 체계만을 논박한다. 그 논증은 모순들을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의 철학체계와 같은 철학체계에게는 - 다시 말해서, 변증법적 철학체계에는 - 위험하지 않다.’ 이 논증이 극도로 위험한 종류의 독단주의를 - 어떤 종류의 공격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독단주의 - 설정한다. 그 까닭은 공격은, 여하한 이론에 대한 비판은, 내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론 자체의 내부에서나 이론과 몇 가지 사실들 사이에서, 틀림없이 모순 몇 가지를 지적하는 방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칸트를 갈음하는 헤겔의 방법은 유효하지만, 불행히도 지나치게 유효하다. 헤겔의 방법은 어떤 종류의 비판이나 공격에 대해서도 헤겔의 철학체계를 안전하게 만들어 매우 기묘한 의미에서 독단적이어서, 나는 그 방법을 ‘강화된 독단주의(reinforced dogmatism)’라고 부르고 싶다. (유사한 강화된 독단주의들이 다른 독단적 철학체계들을 지지하는 데에 도움이 또한 된다고 언급될 것이다.)
(b) 변증법과 관련된 이성의 발전이라는 기술(記述)은 상당한 합당성을 지녔던 헤겔철학의 요소이다. 특정 정신적 능력을 가리키기 위하여 주관적인 의미에서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이론들과 사고(思考)들과 아이디어와 기타 등등을 가리키기 위하여 개관적인 의미에서도 헤겔이 ‘이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이것은 분명해진다. 헤겔은 철학이란 추리의 최고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 추리의 발전에 관하여 자신이 말할 때 그는 주로 철학적 사고(思考)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철학적 이론들의 발전에 대한 연구에서보다 변증법적 3화음이 더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곳은 없고, 그리하여 자신의 변증법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헤겔의 가장 성공적인 시도가 자신의 역사철학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성공과 연관된 위험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헤겔의 시대에 - 그리고 심지어 훨씬 뒤에 - 논리학은 보통 추리의 이론이나 사고(思考)의 이론으로서 불리고 정의(定義)되었고 따라서 논리학의 근본적인 법칙들이 보통 ‘사고(思考)의 법칙들’로 불리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리하고 사고(思考)할 때 변증법이 우리의 실제 행보에 대한 참된 기술(記述)이라고 믿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지는 않다할지라도 논리적 이론의 중요한 부분으로 변증법을 만들기 위하여 자신이 논리학을 변경해야 한다고 헤겔이 생각했던 것은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으로 인하여 ‘모순의 법칙’을 폐기하는 일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법칙은 분명히 변증법을 수용하는 데에 중대한 장애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변증법이 논리학과 경쟁할 수 있다는, 변증법이 논리학을 향상시킨 것이라는, 의미에서 변증법이 ‘근본적’이라는 견해의 시작을 경험한다. 나는 이미 변증법의 이 견해를 비판해서, 헤겔 이전이든 이후이든 그리고 과학에서든 수학에서든 혹은 진정으로 이성적인 철학에서든 어떤 종류의 논리적 추론도 항상 모순의 법칙에 근거한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러나 헤겔은 이렇게 쓴다 (논리학[Logic], 81부, (1)): ‘변증법의 본질을 발견하여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최고로 중요하다. 움직임이 있는 곳마다, 생명이 있는 곳마다, 실제 세상에서 어떤 것이 실현되는 곳마다 변증법이 작동한다. 변증법은 진정으로 과학적인 모든 지식의 영혼이기도 하다.’
그러나 변증법적 추리로써 헤겔이 모순의 법칙을 폐기하는 추리를 의미한다면, 그는 분명히 과학에서 그런 추리의 보기를 내놓을 수 있으리라. (변증법학자들에 의하여 인용되는 많은 보기들은 예외 없이 위에 언급된 엥겔스의 보기 - 곡물의 종자와 (-a
변증법과 논리학에 대한 그런 혼동이 지니는 주요 위험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그 혼동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독단적으로 논증하는 도움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논리적 난제에 부딪칠 때 변증법학자들은 마지만 수단으로서 자신들의 반대자에게 그 반대자의 비판이 변증법 대신 평범한 형태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오류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 흔히 발견하기 때문이다; 반대자들이 변증법만을 사용한다면, 자신들이 변증법학자들의 몇 가지 논증에서 발견하는 모순들이 철저히 합당함을 (즉 변증법적 관점에서) 알리라.
(c) 헤겔의 변증법에서 세 번째 요소는 그의 동일철학에 근거한다. 이성과 실재가 동일하고 이성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면 (철학적 사고[思考]의 발전에 의하여 그렇게 잘 예시되는 바와 같이) 실재 또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세상은 변증법적 논리학의 법칙들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한다. (이 관점은 범논리주의[汎論理主義: panlogism[라고 불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상 안에서 변증법적 논리학에 의하여 허용되는 것과 동일한 모순들을 틀림없이 발견한다. 모순의 법칙이 폐기되어야 함을 다른 각도로부터 우리에게 밝히는 것은 세상이 모순들로 가득하다는 바로 이 사실이다. 그 까닭은 어떤 자기-모순적 제언도, 혹은 어떤 모순적 제언의 쌍도 사실일 리가 없다고, 다시 말해서 사실과 일치할 리가 없다고 이 법칙이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에서, 다시 말해서 사실의 세상에서 모순은 발생할 수가 없다고, 그래서 사실들은 서로 모순이 될 수 없다고 그 법칙은 암시한다. 그러나 이성과 실재의 동일성이라는 철학에 기초하여, 아이디어들이 서로 모순이 되기 때문에 사실들이 서로 모순이 된다고, 그리고 사실들은 아이디어들이 그러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모순들을 통하여 발전한다고 주장된다; 그리하여 모순의 법칙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그러나 동일철학이 지닌 철저한 불합리로 나에게 보이는 것을 별도로 하고 (그것에 관해서는 내가 나중에 말하겠다), 우리가 이 소위 모순적 사실들을 조금 세밀히 조사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때때로 아마도 ‘양극성(兩極性: polarity)’라는 단어의 도움을 받아서 기술(記述)될 수 있는 특정 구조를 드러냄을 변증법학자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모든 보기들이 서술할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 구조에 관한 한 가지 보기는 양전기와 음전기의 존재이리라. 예를 들어 양전기와 음전기가 서로 반대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비유적이고 산만한 화법(話法)일 따름이다. 진정한 모순의 보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장이리라: ‘여기 이 물체는 1938년 11월 1일 오전 9시와 10시 사이에 양전기를 띠었다’, 그리고 동일한 물체에 대하여 그 물체가 동시에 양전기를 띠지 않았다고 말하는 유사한 문장.
이것은 두 가지 문장 사이의 모순일 것이고 상응하는 모순적 사실은 물체란 대체로 동시에 양전기와 음전기를 띠어 그리하여 동시에 음전기를 띤 특정 물체들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끌어들이지 않기도 한다는 사실이리라. 그러나 그런 모순적 사실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필요는 우리에게 없다. (심층 분석을 하면 그런 사실들의 부재[不在]는 물리학의 법칙들과 흡사한 법칙들이 아니라, 논리학에 근거함이, 다시 말해서 과학적 언어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들에 근거함이 아마도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 요점들이 있다: (a) 칸트의 반(反)-이성주의와 그 결과인 강화된 독단주의의 지지를 받는 이성주의 재확립; (b) ‘이성’, ‘사고(思考)의 법칙’, 기타 등등과 같은 표현들의 모호성에 근거한, 변증법의 논리학 편입; (c) 헤겔의 범논리주의와 동일철학에 근거한 ‘전 세계’에 변증법 적용. 이 세 가지 요점들은 헤겔의 변증법 안에서 주요 요소들로 나에게 보인다. 헤겔 이후 변증법의 운명을 개괄하기 전에, 나는 헤겔철학에 관한, 그리고 특히 그의 동일철학에 관한 나의 개인적 견해를 밝히고 싶다. 동일철학은 내가 이 논문의 금언으로서 선택한 문장에서 데카르트가 언급하는 저 모든 터무니없고 믿을 수 없는 철학적 이론들 중에서 최악의 이론을 대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동일철학이 여하한 종류의 진지한 논증도 없이 제시된다는 것만이 아니다; 심지어 동일철학이 창안되어 답변하려는 질문도 - ‘어떻게 우리의 정신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 전혀 분명하게 언명되지 않은 듯이 나에게 보인다. 그리고 관념론적 답변 즉, ‘세상이 정신-같기 때문에’는, 여러 관념주의 철학자들에 의하여 분화되었지만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는데, 답변의 외피만을 지니고 있다. ‘어떻게 이 거울은 나의 얼굴을 비출 수 있을까?’ - ‘거울이 얼굴과 같으니까?’와 같은 어떤 유사한 논증을 우리가 고찰하기만 하면 그것이 사실적 답변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논증이 명백하게 철저히 건전하지 못할지라도, 반복해서 언명되었다. 예를 들어 그 논증이 우리 시대에 다음과 같은 방향을 따라서 진스(Jeans)에 의하여 언명됨을 우리는 발견한다: ‘수학은 어떻게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가?’ - ‘세상이 수학과 같으니까.’ 그리하여 그는 실재는 바로 수학의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 세상은 수학적 사고(思考)라고 (그리하여 관념적) - 그는 논증한다. 이 논증은 분명히 다음보다 더 건전하지 못하다: ‘어떻게 언어는 세상을 기술(記述)할 수 있는가?’ - ‘세상은 언어-같으니까 - 세상은 언어적이다’, 그리고 다음보다 더 건전하지 못하다: ‘어떻게 영어는 세상을 기술(記述)할 수 있는가?’ - ‘세상이 내재적으로 영국적이니까.’ 세상에 대한 수학적 기술(記述)이 세상을 기술(記述)하는 어떤 방식일 따름이고 다른 것은 아니라고, 그리고 수학은 우리에게 기술(記述)하는 수단을 - 특별히 풍요로운 언어를 - 제공한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이 후자(後者) 논증이 진스(Jeans)가 제시한 논증과 유사하다는 것이 쉽게 보인다.
아마도 사람들은 하찮은 보기의 도움을 받아서 이것을 매우 쉽게 밝힐 수 있다. 숫자를 사용하지 않고 하나, 둘, 그리고 다수라는 표현의 도움을 받아서 숫자 개념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원시적 언어들이 있다. 그런 언어는 특정 대상들의 집합 사이의 더 복잡한 관계 몇 가지를 기술(記述)할 수 없을 것인데, 그 관계는 숫자적 표현인 ‘셋’, ‘넷’, 기타 등등의 도움을 받아서 쉽게 기술(記述)될 수 있다. 그런 언어는 A가 많은 양(羊)을 소유하고 있고 B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A는 9마리의 양을 소유하고 있는데 B보다 5마리 더 많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서 달리 기술(記述)될 수 없을 더 복잡한 어떤 관계들을 기술(記述)하기 위하여 수학적 부호들이 언어에 도입된다; 자연수의 산술을 포함하는 언어는 합당한 부호가 결여된 언어보다 더 풍요로울 따름이다. 우리가 세상의 자연을 기술(記述)하고 싶어 한다면 수학적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가 세상의 자연에 관하여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세상에는 어느 정도의 복잡성이 있어서 너무 원시적인 기술(記述) 도구로써는 기술(記述)될 수 없는 어떤 관계들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상이, 자신들의 공식들을 세상에 적용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순수 수학자들에 의하여 원래 발명된 수학적 공식들에 우연히 들어맞는 사실에 대하여 진스(Jeans)는 당황했다. 분명히 그는 내가 ‘귀납주의자’라고 불러야 하는 것으로서 원래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이론들은 어떤 다소 단순한 추론 과정에 의하여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 그런 견해로부터 시작한다면 순수하게 사변적(思辨的)인 방식으로 순수 수학자들에 의하여 언명된 이론이 나중에 물리적 세상에 적용될 수 있음이 증명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명백하게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귀납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처음에 순수한 사변(思辨)으로서, 단지 가능성으로서 제시된 이론이 나중에 경험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이 판명되는 일이 매우 빈번히 발생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경험적 이론들로 향하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 흔히 이 사변적(思辨的) 기대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귀납법의 문제는, 그렇게 지칭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여기서 관련된 관념론의 문제와 관계가 있다.)
3. 헤겔 이후의 변증법
사실들이나 사건들이 아마도 상호적으로 서로 모순이 된다는 생각은 바로 무신경의 전형으로서 나에게 보인다.
다피트 힐베르트(DAVID HILBERT)
이성과 실재의 동일성이라는 헤겔의 철학은, 실재가 정신-같거나 혹은 이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서술하기 때문에, 때때로 (절대적) 관념론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나 분명히 그런 변증법적 동일철학은 일종의 유물론이 되기 위하여 쉽게 돌려질 수 있다. 그 철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평범한 사람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실재는 사실상 물질적이거나 물리적 특징을 지닌다고 논증하리라; 그래서 실재는 이성이나 정신과 동일하다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은 정신이 또한 물질적 혹은 물리적 현상이라고 암시하리라 - 또는 그렇지 않다면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의 차이점에는 큰 중요성이 있을 리가 없다고.
이 유물론은, 변증법과의 연계에 의하여 수정되어, 데카르트주의의 어떤 모습의 부활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원래 관념론적 근거를 폐기함으로써, 변증법은 자체를 합당하고 이해 가능하도록 만들었던 모든 것을 잃는다; 변증법을 지지하는 최고의 논증들은 사고(思考)의, 특히 철학적 사고(思考)의 발전에 자체의 적용가능성이 놓여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물리적 실재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는 서술을 - 과학적인 지지를 받을 수가 없어서 유물론적 변증법학자들이, 우리가 이미 기술(記述)하여 비판이 비(非)-변증법적으로서 거부된 위험한 방법을 폭넓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극단적으로 독단적인 주장 - 맹목적으로 직면하고 있다. 그리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은 위에서 논의된 요점 (a) 및 (b)와 일치하지만, 내가 그 변증법적 특징들에 이점이 없다고 생각할지라도 변증법적 유물론은 요점 (c)를 상당히 변경시킨다. 이 의견을 피력하면서, 내가 내 자신을 유물론자로서 기술(記述)해서는 안 될지라도 나의 비판은 유물론을 겨냥하지 않으며, 내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한다면 (다행히도 나는 그렇지 않다) 관념론보다는 유물론을 개인적으로 선호한다는 점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변증법적 관념론보다 훨씬 더 나쁘게 나에게 보이는 것은 변증법과 유물론의 결함일 따름이다.
이 말들은 마르크스에 의하여 발전된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에 특히 적용된다. 이 이론 속의 유물론적 요소는, 그 요소에 대하여 심각한 반대의견이 제시될 수 없을 정도로 비교적 쉽게 언명될 수 있으리라. 내가 알 수 있는 한 요점은 이렇다: 자연과학들이 평범한 사람이 지닌 현실주의적 견해를 기초로 나아갈 수 있는 동안 헤겔철학에 의하여 제공되는 것과 같은 관념론적 배경이 사회과학들에게 필요하다고 상정(想定)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자연과학 분야에서 지니고 있던 견해들의 무익함이 - 적어도 자연과학자들에게는 - 너무 명백했던 반면, 헤겔이 국가에 대한 자신의 관념론적 이론을 사용하여 사회과학들에 강한 영향을 끼쳐 심지어 사회과학들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였던 사실 때문에, 그런 상정(想定)이 마르크스의 시대에 자주 발생했다. 유물론을 강조하는 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관심사 중 하나는, 사람의 이성적이거나 영혼적인 본성을 언급하면서 사회학은 관념론적이나 영혼적인 기초나 이성의 분석에 근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제거하는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들에 대한 공정한 해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견해는 의심할 바 없이 건전하다; 그리고 나는 이 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여가 실제적 중요성과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상의 역사가 사상의 시작 상황이나 사상창시자가 처한 상황을, 그 상황 중에서 경제적인 면(面)이 매우 중요한데, 언급하지 않고 다루어진다면 (그런 다루어짐이 흔히 커다란 장점을 지닌다할지라도) 심지어 사상의 발전도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은 마르크스로부터 터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경제주의(economism)가 - 여하한 종류의 발전의 궁극적 기초로서 경제적 배경에 대한 그의 강조 - 오류이어서 사실상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특정 상황에서 사상의 영향력은 (아마도 정치선전의 도움을 받아서) 경제력을 능가하여 갈음할 수 있음을 사회적 경험이 분명히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정신적 발전의 경제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정신적 발전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예를 들어 과학적이나 종교적 사상의 발전을 이해하지 않고 경제적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적어도 그만큼 불가능하다.
현재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경제주의를 분석하는 일은 마르크스의 철학체계 안에서 변증법에게 발생했던 것을 아는 것만큼 중요하지 않다. 두 가지 요점이 나에게 중요하게 보인다. 하나는 사회학에서 역사적 방법을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으로 내가 ‘역사주의(historicism)’라고 불렀던 경향이다. 나머지 하나는 마르크스 변증법의 반(反)-독단적 경향이다.
첫 번째 요점에 관하여, 헤겔이 역사적 방법의 창시자들 중 한 명인 역사적으로 발전을 기술(記述)하면서 사람은 그 발전을 인과적으로 설명했다고 믿는 사상가들의 학파의 설립자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인류가 어떻게 특정 사회제도들을 서서히 발전시켰는지를 밝힘으로써 사람들은 예를 들어 특정 사회제도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이 학파는 믿었다. 오늘날 사회 이론에 관한 역사적 방법의 중요성이 많이 과장되었음이 흔히 인정된다; 그러나 이 방법에 대한 신뢰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다른 곳에서 (특히 나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에서) 이 방법을 비판하려고 노력했다. 마르크스의 사회학이 헤겔로부터 그 방법이 역사적이어야 한다와 역사 및 사회학도 사회적 발전에 관한 이론들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 뿐 아니라, 이 발전은 변증법적 관계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견해 또한 채택하였음을 나는 여기서 강조하고 싶을 따름이다. 헤겔에게는 역사가 아이디어의 역사였다. 마르크스는 관념론을 버렸지만 역사적 발전의 역동적인 힘이 변증법적 ‘모순들’, ‘부정(否定)들’ 그리고 ‘부정(否定)들의 부정(否定)들’이라는 헤겔의 교설을 지켰다. 다음 인용구로써 밝혀질 것과 같이 이 점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헤겔을 정말로 매우 가깝게 추종했다. 헤겔은 자신의 저서 철학백과사전(Encyclopaedia) (1부 6장 81쪽)에서 변증법을 ‘자체를 아무리 안전하고 안정되어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 앞에서는 아무 것도 머무를 수 없는 보편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서 기술(記述)했다. 유사하게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반듀링론[Anti-Dühring] 1부, ‘변증법: 부정[否定]의 부정[否定]’): ‘그러므로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은 무엇인가? 자연과 역사와 사상의 발전에 관한 매우 일반적인... 법칙; 동식물 왕국에서, 지질학에서, 수학에서, 역사에서, 그리고 철학에서 유효한... 법칙.’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이 변증법적 힘들이 역사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밝혀서 그리하여 역사의 과정을 예언하는 것이 사회과학의 주요 과제이다; 혹은 그가 자본론(Capital) 서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현대사회의 움직임에 관한 경제적 법칙을 밝히는 것이 이 저서의 궁극적 목표이다’.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인 움직임에 관한 이 변증법적 법칙은 자본주의의 임박한 종말에 대한 마르크스 예언의 기초를 제공한다 (자본론[Capital], I권, 24장, § 7): ‘생산의 자본주의적 양식은... 첫 번째 부정(否定)이다... 그러나 자연법칙의 불가피성 때문에 자본주의는 자체의 부정(否定)을 낳는다. 그것이 부정(否定)의 부정(否定)이다.
일월식과 다른 천문학적 사건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예언들이 확실하게 반드시 비과학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헤겔의 변증법은, 혹은 그 변증법의 유물론적 해석은, 과학적 예언을 위한 건전한 기초로서 수용될 수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모든 예언들은 사실로 밝혀졌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통 대답한다. 마르크스의 예언 모두가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다. 많은 보기들 중에서 한 가지 보기를 인용한다: 자본론[Capital]에서 인용된 구절 바로 다음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산업혁명보다 자연스레 비교할 수 없이 덜 ‘지리하고, 폭력적이며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각주에서 그는 ‘유우부단하고 무저항적인 유산계급’을 언급함으로써 이 예언을 확대한다. 이 예언이 실증되었다고 오늘날 말할 마르크스주의자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변증법에 근거한 예언이 나타난다할지라도 몇 가지 예언은 사실이 될 것이고 어떤 예언들은 사실이 되지 못할 것이다.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분명히 예기치 않은 상황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은 충분히 애매하고 신축적이어서 변증법이 예언해서 우연히 사실이 된 상황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만큼 이 예기치 않은 상황을 잘 설명한다. 어떤 상황전개도 변증법적 도식에는 들어맞는 경향이 있다; 변증법학자는 미래의 경험에 의하여 논박당하는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오류인 것은 변증법적 접근방식만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발전에 관한 이론이라는 아이디어 - 과학적 사회학은 대규모의 역사적 예언들을 목표로 한다는 아이디어 - 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에서 우리와 관련이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적 방법에서 변증법이 하는 역할과 별도로 마르크스의 반(反)-독단적 자세가 논의되어야 한다. 과학은 최종적이고 잘-확립된 지식의 혹은 ‘영원한 진리(eternal truth)’의 집합체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발전하고 진보하는 것으로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장했다. 과학자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진리탐구를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과학적 이론체계는 발전한다; 그리고 과학적 이론체계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이 요점에 반대하여 말할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 과학발전에 대한 변증법적 기술(記述)이 강요되지 않는다면 항상 적용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과학적 발전을 덜 욕심을 내고 덜 애매한 방식으로, 예를 들어 시행착오 이론으로 기술(記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내가 개인적으로 생각할지라도. 그러나 나는 이 비판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과학에 관한 마르크스의 진보적이고 반(反)-독단적인 관점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하여 자신들의 활동분야 안에서 적용된 적이 없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중요하다. 진보적이고 반(反)-독단적인 과학은 비판을 한다 - 비판은 그 과학의 생명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하여 용인된 적이 없다.
헤겔은 철학이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겔 자신의 철학체계는 이 발전의 최종적이자 최고의 단계로 남아서 갈음될 수 없을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철학체계를 향하여 동일한 자세를 취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반(反)-독단적 자세는 이론에서만 존재하고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관행에서는 존재하지 않아서, 변증법은 엥겔스의 반듀링론(Anti-Dühring)을 보기로 하여 주로 변호(apologetics)를 목적으로 - 비판에 대항하여 마르크스의 철학체계를 변호하기 위하여 -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하여 이용된다. 비판자들은 보통 변증법이나 무산자의(proletarian) 과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배신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는다. 변증법 때문에 반(反)-독단적 자세가 사라졌고, 마르크스주의는 자체의 변증법적 방법을 사용하여 더 많은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충분히 신축적인 독단주의로 자체를 확립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는 내가 강화된 독단주의(reinforced dogmatism)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강화된 독단주의보다 과학의 성장에 더 나쁜 장애물은 있을 수가 없다. 사상의 자유로운 경쟁 없이는 과학적 발전이 있을 수 없다 - 이것은 예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의하여 그렇게 강력한 지지를 받았던 반(反)-독단적 자세의 본질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든 사상에 대하여 자유가 없다면 과학적 사고(思考)에서 자유로운 경쟁이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변증법은 철학의 발전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이론의 발전에서도 매우 불행한 역할을 했다. 이 불행한 역할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어떻게 마르크스가 원래 그런 이론을 개발하게 되었는지를 우리가 알려고 노력한다면 더 쉬워질 것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고찰해야 한다. 자신의 사상에서 진보적이고, 진화적이고 심지어 혁명적인 젊은이인 마르크스는, 가장 유명한 독일 철학자인 헤겔의 영향 하에 들어왔다. 헤겔은 프러시아 반동세력의 대표자였다. 헤겔은 이성과 실재의 동일성이라는 자신의 원리를 현존하는 권력을 지지하기 위하여 - 존재하는 것은 이성적이기 때문에 - 그리고 절대국가(Absolute State)라는 개념을 (오늘날 ‘전체주의[Totalitarianism]’로 불리는 개념) 옹호하기 위하여 이용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을 찬양했지만 매우 다른 정치적 기질을 지니고 있었는데, 자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기초할 철학이 필요했다. 헤겔의 변증법 철학이 그 철학의 주인에게 쉽게 되돌려 겨냥될 수 있다는 것을 - 변증법이 보수적이고 변호적인 정치이론보다는 혁명적인 정치이론을 지지한다는 것 - 발견하고 마르크스가 받은 흥분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것 외에도 헤겔의 변증법 철학은 혁명적일 뿐 아니라 낙관적인 이론에 - 모든 새로운 단계가 전진하는 단계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진보를 예언하는 이론 - 대한 자신의 욕구에 훌륭하게 부합했다.
이 발견은, 헤겔의 제자에게는 그리고 헤겔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부인할 수 없이 매혹적이었다 할지라도, 헤겔철학과 함께 지금은 모든 중요성을 상실하여, 자격도 없이 유명한 스승의 사상에서 결점을 찾아내는 탁월한 젊은 학생의 기발한 재주 이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소위 ‘과학적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자체가 아마도 할 수 있었던 과학적 발전을 방해함으로써 그것은 마르크스주의를 독단적 철학체계로 전환시키는 데에 일조하였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자체의 적들에게 설립자 마르크스에 의하여 원래 사용되었던 것과 동일한 논증만을 반복하면서, 수 십 년 동안 자체의 독단적 자세를 지켰다. 오늘날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헤겔의 논리학 - 낡았을 뿐 아니라 과학이전이자 심지어 논리이전 사고방식의 전형이기도 한 - 읽기를, 과학적 방법론 연구를 위한 기초로서 공식적으로 추천하는지를 보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이해를 쉽게 만든다. 그것은 아르키메데스의 역학을 현대 공학의 기초로서 추천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
변증법의 전체 발전상황은 철학적 체제구축 속에 내재한 위험들에 대한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 발전상황은 철학이 어떤 종류의 과학 체계의 초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철학자들은 자신의 주장에서 훨씬 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매우 유용하게 이룩할 수 있는 한 가지 과제는 과학의 비판적 방법들에 대한 연구이다.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
15
WHAT IS DIALECTIC?
1. DIALECTIC EXPLAINED
There is nothing so absurd or incredible that it has not been
asserted by one philosopher or another.
DESCARTE
THE above motto can be generalized. It applies not only to philosophers and philosophy, but throughout the realm of human thought and enterprise, to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politics. Indeed, the tendency to try anything once, suggested by the motto, can be discerned in a still wider realm - in the stupendous variety of forms and appearances which are produced by life on our planet.
Thus if we want to explain why human thought tends to try out every conceivable solution for any problem with which it is faced, then we can appeal to a highly general sort of regularity. The method by which a solution is approached is usually the same; it is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This, fundamentally, is also the method used by living organisms in the process of adaptation. It is clear that the success of this method depends very largely on the number and variety of the trials: the more we try, the more likely it is that one of our attempts will be successful.
We may describe the method employed in the development of
human thought, and especially of philosophy, as a particular variant
A paper read to a philosophy seminar at Canterbury University College, Christchurch, New Zealand, in 1937. First published in Mind, N.S., 49, 1940.
of the trial and error method.
If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is developed more and more consciously, then it begins to take on the characteristic features of 'scientific method'. This 'method' can briefly be described as follows. Faced with a certain problem, the scientist offers, tentatively, some sort of solution - a theory. This theory science accepts only provisionally, if at all; and it is most characteristic of the scientific method that scientists will spare not pains to criticize and test the theory in question. Criticizing and testing go hand in hand; the theory is criticized from very many different sides in order to bring out those points which may be vulnerable. And the testing of the theory proceeds by exposing these vulnerable points to as severe an examination as possible. This, of course, is again a variant of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Theories are put forward tentatively and tried out. If the outcome of a test shows that the theory is erroneous, then it is eliminated;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is essentially a method of elimination. Its success depends mainly on three conditions, namely, that sufficiently numerous (and ingenious) theories should be offered, that the theories offered should be sufficiently varied, and that sufficiently severe tests should be made. In this way we may, if we are lucky, secure the survival of the fittest theory by the elimination of those which are less fit.
If this description of the development of human thought in general and of scientific thought in particular is accepted as more or less correct, then it may help us to understand what is meant by those who say that the development of thought proceeds on 'dialectic' lines.
Dialectic (in the modern sense, i. e. especially in the sense in which Hegel used the term) is theory which maintains that something - more especially, human thought - develops in a way characterized by what is called the dialectic triad: thesis, antitheses, and synthesis. First there is some idea or theory or movement which may be called a 'thesis'. Such a thesis will often produce opposition, because, like most things in this world, it will probably be of limited value and will have its weak spots. The opposing idea or movement is called the 'antithesis', because it is directed against the first, the thesis. The struggle between the thesis and the antithesis goes on until some solution is reached which, in a certain sense, goes beyond both thesis and antithesis by recognizing their respective values and by trying to preserve the merits and to avoid the limitations of both. This solution, which is the third step, is called the synthesis. once attained, the synthesis in its turn may become the first step of a new dialectic triad, and it will do so if the particular synthesis reached turns out to be one-sided or otherwise unsatisfactory. For in this case opposition will be aroused again, which means that the synthesis can then be described as a new thesis which has produced a new antithesis. The dialectic triad will thus proceed on a higher level, and it may reach a third level when a second synthesis has been attained.
So much for what is called the 'dialectic triad'. It can hardly be doubted that the dialectic triad describes fairly well certain steps in the history of thought, especially certain developments of ideas and theories, and of social movements which are based on ideas or theories. Such a dialectic development may be 'explained' by showing that it proceeds in conformity with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which we have discussed above. But it has to be admitted that it is not exactly the same as the development (described above) of a theory by trial and error. Our earlier description of the trial and error method dealt only with an idea and its criticism, or, using the terminology of dialecticians, with the struggle between a thesis and its antithesis; originally we made no suggestions about a further development, we did not imply that the struggle between a thesis and an antithesis would lead to a synthesis. Rather we suggested that the struggle between an idea and its criticism or between a thesis and its antithesis would lead to the elimination of the thesis (or, perhaps, of the antithesis) if it is not satisfactory; and that the competition of theories would lead to the adoption of new theories only if enough theories are at hand and are offered for trial.
Thus the interpretation in terms of the trial and error method may be said to be slightly wider than that in terms of dialectic. it is not confined to a situation where only one thesis is offered to start with, and so it can easily be applied to situation where from the very beginning a number of different theses are offered, independently of one another, and not only in such a way that the one is opposed to the other. But admittedly it happens very frequently, perhaps usually, that the development of a certain branch of human thought starts with one singly idea only. If so, then the dialectic scheme may often be applicable because this thesis will be open to criticism and in this we 'produce', as dialecticians usually say, its antithesis.
The dialectician's emphasis involves still another point where dialectic may differ slightly from the general trial-and-error theory. For the trial-and-error theory as suggested above will be content to say that an unsatisfactory view will be refuted or eliminated. The dialectician insists that there is more to be said than this. He emphasizes that although the view or theory under consideration may have been refuted, there will most probably be an element in it which have been offered at all and taken seriously. This valuable element of the thesis is likely to be brought out more clearly by those who defend the thesis against the attacks of their opponents, that adherents of the antithesis. Thus the only satisfactory solution of the struggle will be a synthesis, i. e. a theory in which the best points of both thesis and antithesis are preserved.
It must be admitted that such a dialectical interpretation of the history of thought may sometimes be quite satisfactory, and that it may add some valuable details to an interpretation in terms of trial and error.
Let us take the development of physics as an example. We can find very many instances which fit the dialectic scheme, such as the corpuscular theory of light which, after first have been replaced by the wave theory, remains 'preserved' in the new theory which replaces them both. To put it more precisely, the old formulae can usually be described, from the standpoint of the new ones, as approximations; that is to say, they appear to be very nearly correct, so that they can be applied, either if we do not demand a very high degree of exactitude, or even, within certain limited fields of application, as perfectly exact formulae.
All this can be said in favour of the dialectic point of view. But we have to be careful not to admit too much.
We must be careful, for instance, about a number of metaphors used by dialecticians and unfortunately often taken much too seriously. An example is the dialectical saying that the thesis 'produces' its antithesis. Actually it is only our critical attitude which produces the antithesis, and where such an attitude is lacking - which often enough is the case - no antithesis will be produced. Similarly, we have to be careful not to think that it is the 'struggle' between a thesis and its antithesis which 'produces' a synthesis. The struggle is one of minds; and these minds must be productive of new ideas: there are many instances of futile struggles in the history of human thought, struggles which ended in nothing. And even when a synthesis has been reached, it will usually be a rather crude description of the synthesis to say that it 'preserves' the better parts of both the thesis and the antithesis. This description will be misleading even where it is true, because in addition to older ideas which it 'preserves', the synthesis will, in every case, embody some new idea which cannot be reduced to earlier stages of the development. In other words, the synthesis will usually be much more than a constriction out of material supplied by thesis and antithesis. Considering all this, the dialectic interpretation, even where it may be applicable, will hardly even help to develop thought by its suggestion that a synthesis should be constructed out of the ideas contained in a thesis and an antithesis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 Considering all this는 All this being considered나 If we consider all this로 고쳐 써야 한다. 분사구문의 오류이다. - 역자 주). This is a point which some dialecticians have stressed themselves; nevertheless, they nearly always assume that dialectic can be used as a technique that will help them to promote, or at least to predict, the future development of thought.
But the most important misunderstanding and muddles arise out of the loose way in which dialecticians speak about contradictions.
They observe, correctly, that contradictions are of the greatest importance in the history of thought - precisely as important as is criticism. For criticism invariably consists in pointing out some contradiction; either a contradiction within the theory criticized, or a contradiction between the theory and another theory which we have some reason to accept, or a contradiction between the theory and certain facts - or more precisely, between the theory and certain statements of fact. Criticism can never do anything except either point out some such contradiction, or, perhaps, simply contradict the theory (i. e. the criticism may be simply the statement of an antithesis). But criticism is, in a very important sense, the main motive force of any intellectual development. Without contradictions, without criticism, there would be no rational motive for changing our theories: there would be no intellectual progress.
Having thus correctly observed that contradictions - especially, of course, the contradiction between a thesis and an antithesis, which 'produces' progress in the form of a synthesis - are extremely fertile, and indeed the moving forces of any progress of thought, dialecticians conclude - wrongly as we shall see - that there is no need to avoid these fertile contradictions. And they even assert that contradictions cannot be avoided, since they occur everywhere in the world.
Such an assertion amounts to an attack upon the so-called 'law of contradiction' (or, more fully, upon the 'law of the exclusion of contradictions') of traditional logic, a law which asserts that two contradictory statements can never be true together, or that a statement consisting of the conjunction of two contradictory statements must always be rejected as false on purely logical grounds. Appealing to the fruitfulness of contradictions, dialecticians claim that this law of traditional logic must be discarded. They claim that dialectic leads in this way to a new logic - a dialectical logic. Dialectic, which I have so far presented as a merely historical doctrine - a theory of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ought - would turn out in this way to be a very different doctrine: it would be at the same time a logical theory and (as we shall see) a general theory of the world.
These are tremendous claims, but they are without the slightest foundation. Indeed, they are based on nothing better than a loose and woolly way of speaking.
Dialecticians say that contradictions are fruitful, or fertile, or productive of progress, and we have admitted that this is, in a sense, true. It is true, however, only so long as we are determined not to put up with contradictions, and to change any theory which involves contradictions; in other words, never to accept a contradiction; it is solely due to this determination of ours that criticism, i. e. the pointing out of contradictions, induces us to change our theories, and thereby to progress.
It cannot be emphasized too strongly that if we change this attitude, and decide to put up with contradictions, then contradictions must at once lose any kind of fertility. They would no longer be productive of intellectual progress. For if we were prepared to put up with contradictions, pointing out contradictions in our theories could no longer induce us to change them. In other words, all criticism (which consists in pointing out contradictions) would lose its force. Criticism would be answered by 'And why not?' or perhaps even by an enthusiastic 'There you are!'; that is, by welcoming the contradictions which have been pointed out to us.
But this means that if we are prepared to put up with contradictions, criticism, and with it all intellectual progress, must come to an end.
Thus we must tell the dialectician that he cannot have it both ways. Either he is interested in contradictions because of their fertility: then he must not accept them. Or he is prepared to accept them: then they will be barren, and rational criticism, discussion, and intellectual progress will be impossible.
The only 'force' which propels the dialectic development is, therefore, our determination not to accept, or to put up with,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thesis and the antithesis. It is not a mysterious force inside these two ideas, not a mysterious tension between them which promotes development - it is purely our decision, our resolution, not to admit contradictions, which induces us to look out for a new point of view which may enable us to avoid them. And this resolution is entirely justified. For it can easily be shown that if one were to accept contradictions then one would have to give up any kind of scientific activity: it would mean a complete breakdown of science. This can be shown by proving that if two contradictory statements are admitted, any statement whatever must be admitted; for from a couple of contradictory statements any statement whatever can be validly inferred.
This is not always realized, and will therefore be fully explained here. It is one of the few facts of elementary logic which are not quite trivial, and deserves to be known and understood by every thinking man. It can easily be explained to those readers who do not dislike the use of symbols which look like mathematics; but even those who dislike such symbols should understand the matter easily if they are not too impatient, and prepared to devote a few minutes to this point.
Logical inference proceeds according to certain rules of inference. It is valid if the rule of inference to which it appeals is valid; and a rule of inference is valid if, and only if, it can never lead from true premises to a false conclusion; or, in other words, if it unfailingly transmits the truth of the premises (provided they are all true) to the conclusion.
We shall need two such rules of inference. In order to explain the first and more difficult one, we introduce the idea of a compound statement, that is to say, of a statement such as 'Socrates is wise and Peter is a King', or perhaps 'Either Socrates is wise or Peter is a King (but not both)' or perhaps 'Socrates is wise and/or Peter is a King'. The two statements ('Socrates is wise'; and 'Peter is a King') of which such a compound statement is composed are called component statements.
Now there is one kind of compound statement which interests us here - the one which is so constructed that it is true if and only if at least one of its two components is true. The ugly expression 'and/or' has precisely the effect of producing such a compound: the assertion 'Socrates is wise and/or Peter is a King' is one which will be true if and only if one or both of its component statements are true; and it will be false if and only if both of its component statements are false.
It is customary in logic to replace the expression 'and/or' by the symbol 'v' (to be pronounced 'vel') and to use such letters as 'p' and 'q' to represent any statement we like. We can then say that a statement of the form 'p v q' will be true if one at least of its two components, p and q, is true.
We are now in a position to formulate our first rule of inference. It may be formulated in this way:
(1) From a premise p (for example, 'Socrates is wise') any conclusion of the form 'p v q' (for example, 'Socrates is wise v Peter is a King') may be validly deduced.
That this rule must be valid can be seen at once if we remember the meaning of 'v'. This symbol makes a compound which is true whenever at least one of the components is true. Accordingly, if p is true, p v q must also be true. Thus our rule can never lead from a true premise to a false conclusion, which means that it is valid.
In spite of its validity, our first rule of inference often strikes those who are not used to such things as strange. And it is indeed a rule which is rarely used in everyday life, since the conclusion contains much less information than the premise. But it is sometimes used, for example, in betting. I may, say, toss a penny twice, betting that heads will turn up at least once. This, obviously, is tantamount to my betting on the truth of the compound statement 'Heads turn up at the first toss v heads turn up at the second toss'. The probability of this statement equals 3/4 (according to usual calculations); it is thus different, for example, from the statement 'Heads turn up at the first toss or heads turn up at the second toss (but not both)', whose probability is 1/2. Now everybody will say that I have won my bet if heads turned up at the first toss - in other words, that the compound statement on whose truth I was betting must be true if its first component was true; which shows that we argued in accordance with our first rule of inference.
We can also state our first rule in this way
which may be read: 'from the premise p we obtain the conclusion
p v q.'
The second rule of inference which I am going to use is more familiar than the first. If we denote the negation of p by 'non-p', then it can be stated in this way
which may be put in words:
(2) From the two premises non-p, and p v q, we obtain the conclusion q.
The validity of this rule can be established if we consider that non-p is a statement which is true if and only if p is false. Accordingly, if the first premise non-p, is true, then the first component of the second premise is false; thus if both premises are true, the second component of the second premise must be true; that is to say, q must be true whenever the two premises are true.
In reasoning that, if non-p is true, p must be false, we have made implicit use, it may be said, of the 'law of contradiction' which asserts that non-p and p cannot be true together. Thus if it were my task at this moment to argue in favour of contradiction, we should have to be more cautious. But at this moment, I am only trying to show that using valid rules of inference, we can infer from a couple of contradictory premises any conclusion we like.
Using our two rules we can indeed show this. For assume we have the two contradictory premises - say
(a) The sun is shining now.
(b) The sun is not shining now.
From these two premises any statement - for example, 'Caesar was a traitor' can be inferred, as follows (can 앞에 하이픈 [-]이 들어가야 할 것이다. 원문의 오류로 보인다. 역자 주).
From the first premise (a) we can infer, in accordance with rule (1), the following conclusion:
(c) The sun is shining now v Caesar was a traitor.
Taking now (b) and (c) as premises, we can ultimately deduce, in accordance with rule (2)
(d) Caesar was a traitor.
It is clear that by the same method we might have inferred any other statement we wanted to infer; for example, 'Caesar was not a traitor'. We may thus infer '2 + 2 = 5' and '2 + 2 ≠ 5' - not only every statement we like, but also its negation, which we may not like.
We see from this that if a theory contains a contradiction, then it entails everything, and therefore, indeed, nothing. A theory which adds to every information which it asserts also the negation of this information can give us no information at all. A theory which involves a contradiction is therefore entirely useless a theory.
In view of the importance of the logical situation analysed, I shall now present some of other rules of inference which lead to the same result. In contradistinction to rule (1), the rules now to be examined, and to be used, form part of the classical theory of the syllogism, with the exception of the following rule (3) which we shall discuss first.
(3) From any two premises, p and q, we may derive a conclusion which is identical with one of them - say p; or schematically,
In spite of its unfamiliarity, and of the fact that some
philosophers have not accepted it, this rule is undoubtedly valid; for it must infallibly lead to a true conclusion whenever the premises are true. This is obvious, and indeed trivial; and it is this very triviality which makes the rule, in ordinary discourse, redundant, and therefore unfamiliar. But redundancy does not mean invalidity.
In addition to this rule (3) we shall need another rule which I have called 'the rule of indirect reduction' (because in the classical theory of the syllogism it is implicitly used for the indirect reduction of the 'imperfect' figures to the first or 'perfect' figure).
Assume we have a valid syllogism such as
(a) All men are mortal
(b) All Athenians are men
(c) All Athenians are mortal.
Now the rule of indirect reduction says:
For example, owing to the validity of the inference of (c) from the premises (a) and (b), we find that
(a) All men are mortal
(non-c) Some Athenians are non-mortal
(non-b) Some Athenians are non-men
must also be valid.
The rule we are going to use as a slight variant of the one just stated; it is this (이 문장에서 세미콜론과 그 다음 it을 제외해야 한다. 문장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Rule (5) may be obtained, for example, from the rule (4) together with the law of double negation which tells us that from non-non-b we may deduce b. Now if rule (5) is valid for any statements a, b, c, which we choose (and only then is it valid) then it must also be valid in case c happens to be identical with a ; that is to say, the following must be valid
But (7) states exactly what we wanted to show - that from a couple of contradictory premises, any conclusion may be deduced.
The question may be raised whether this situation holds good in any system of logic, or whether we can construct a system of logic in which contradictory statements do not entail every statement. I have gone into this question, and the answer is that such a system can be constructed. The system turns out, however, to be an extremely weak system. Very few of the ordinary rules of inference are left, not even the modus ponens which says that from a statement of the form 'If p then q' together with p, we can infer q. In my opinion, such a system is of no use for drawing inferences although it may perhaps have some appeal for those who are specially interested in the construction of formal systems as such.
It has sometimes been said that the fact that from a couple of contradictory statements anything we wish follows does not establish the uselessness of a contradictory theory: first, this theory may be interesting in itself even though contradictory; secondly, it may give rise to corrections which make it consistent; and ultimately, we may develop a method, even if it is an ad hoc method (such as, in Quantum Theory, the methods of avoiding the divergencies), which prevents us from obtaining the false conclusions which admittedly are logically entailed by the theory. All this is quite true; but such a makeshift theory gives rise to the grave dangers previously discussed: if we seriously intend to put up with it then nothing will make us search for a better theory; and also the other way round: if we look for a better theory, then we do so because we think the theory we have described is a bad one, owing to the contradiction involved. The acceptance of contradictions must lead here as everywhere to the end of criticism, and thus to the collapse of science.
One sees here the danger of loose and metaphorical ways of speaking. The looseness of the dialectician's assertion that contradictions are not avoidable and that it is not even desirable to avoid them because they are so fertile is dangerously misleading. It is misleading because what may be called the fertility of the contradictions is, as we have seen, merely the result of our decision not to put up with them (an attitude which accords with the law of contradiction). And it is dangerous, because to say that the contradictions need not be avoided, or perhaps even that they cannot be avoided, must lead to the breakdown of science, and of criticism, i. e. rationality. This should make it clear that anybody wishing to further truth and enlightenment it is a necessity and even a duty to train himself in the art of expressing things clearly and unambiguously - even if this means giving up certain niceties of metaphor and clever double meaning (이 문장에서 anybody 앞에 for를 넣거나 This should make it clear for anybody wishing to further truth and enlightenment that it is a necessity ~로 써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It is therefore better to avoid certain formulations. For instance, instead of the terminology we have used in speaking of thesis, antithesis, and synthesis, dialecticians often describe the dialectic triad by using the term 'negation (of the thesis)' instead of 'antithesis' and 'negation of the negation' instead of 'synthesis'. And they like to use the term 'contradiction' where terms like 'conflict' or perhaps 'opposing tendency' or 'opposing interest', etc., would be less misleading. Their terminology would do no harm if the terms 'negation' and 'negation of the negation' (and similarly, the term 'contradiction') had not clear and fairly definite logical meanings, different from the dialectical usage. In fact the misuse of these terms has contributed considerably to the confusion of logic and dialectic which so often occurs in the discussions of the dialecticians. Frequently they consider dialectic to be a part - the better part - of logic, or something like a reformed, modernized logic. The deeper reason for such an attitude will be discussed later. At present I shall only say that our analysis does not lead to the conclusion that dialectic has any sort of similarity to logic. For logic can be described - roughly, perhaps, but well enough for our present purposes - as a theory of deduction. We have no reason to believe that dialectic has anything to do with deduction.
To sum up: What dialectic is - dialectic in the sense in which we can attach a clear meaning to the dialectic triad - can be described thus. Dialectic, or more precisely, the theory of the dialectic triad, maintains that certain developments, or certain historical processes, occur in a certain typical way. It is, therefore, an empirical descriptive theory, comparable, for instance, with the theory which maintains that most living organisms increase their size during some stage of their development, then remains constant, and finally decrease until they die; or with the theory which maintains that opinions are held first dogmatically, then sceptically, and only afterwards, in a third stage, in a scientific, i. e. critical, spirit. Like such theories, dialectic is not applicable without exceptions - unless we force the dialectic interpretations - and like such theories, dialectic has no special affinity to logic.
The vagueness of dialectic is another of its dangers. It makes it only too easy to force a dialectic interpretation on all sorts of developments and even on quite different things. We find, for instance, a dialectic interpretation which identifies a seed of corn with a thesis, the plant which develops from this seed with the antithesis, and all the seeds which develop from this plant with the synthesis. That such an application expands the already too vague meaning of the dialectic triad in a way which dangerously increases its vagueness is obvious; it leads to a point where by describing a development as dialectic we convey no more than by saying that it is a development in stages - which is not saying very much. But to interpret this development by saying that germination of the plant is the negation of the seed because the seed ceases to exist when the plant begins to grow, and that the production of a lot of new seeds by the plant is the negation of the negation - a new start on a higher level - is obviously a mere playing with words. (Is this the reason why Engels said of this example that any child can understand it?)
The standard examples presented by dialecticians from the fields of mathematics are even worse. To quote a famous example used by Engels in the brief form given to it by Hecker, 'The law of the higher synthesis... is commonly used in mathematics. The negative (-a
A theory like logic may be called 'fundamental', thereby indicating that, since it is the theory of all sorts of inferences, it is used all the time by all sciences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 indicating that 이하는 분사구문으로 쓸 수 없고 다른 표현이 사용되어야 한다. 분사구문의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We can say that dialectic in the sense in which we found that we could make a sensible application of it is not a fundamental but merely a descriptive theory. It is therefore about as inappropriate to regard dialectic as part and parcel of logic, or else as opposed to logic, as it would be so to regard, say, the theory of evolution. only the loose metaphorical and ambiguous way of speaking which we have criticized above could make it appear that dialectic can be both a theory describing certain typical developments and a fundamental theory such as logic.
From all this I think it is clear that one should be very careful in using the term 'dialectic'. It would be best, perhaps, not to use it at all - we can always use the clearer terminology of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Exceptions should be made only where no misunderstanding is possible, and where we are faced with a development of theories which does in fact proceed along the lines of a triad.
2. HEGELIAN DIALECTIC
So far I have tried to outline the idea of dialectic in a way which I hope makes it intelligible, and it was my aim not to be unjust about its merits. In this outline dialectic was presented as a way of describing developments; as one way among others, not fundamentally important, but sometimes quite suitable. As opposed to this, a theory of dialectic has been put forward, for example by Hegel and his school, which exaggerates its significance, and which is dangerously misleading.
In order to make Hegel's dialectic intelligible it may be useful to refer briefly to a chapter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 in my opinion not a very creditable one.
A major issue in the history of modern philosophy is the struggle between Cartesian rationalism (mainly continental) on the one hand, and empiricism (mainly British) on the other. The sentence from Descartes which I have used as a motto for this paper was not intended by its author, the founder of the rationalist school, in the way in which I have made use of it. It was not intended as a hint that the human mind has to try everything in order to arrive at something - i. e. at some useful solution - but rather as a hostile criticism of those who dare to try out such absurdities. What Descartes had in mind, the main idea behind his sentence, is that the real philosopher should carefully avoid absurd and foolish ideas. In order to find truth he has only to accept those rare ideas which appeal to reason by their lucidity, by their clarity and distinctness, which are, in short, 'self-evident'. The Cartesian view is that we can construct the explanatory theories of science without any reference to experience, just by making use of our reason; for every reasonable proposition (i. e. one recommending itself by its lucidity) must be a true description of the facts. This, in brief outline, is the theory which the history of philosophy has called 'rationalism'. (A better name would be 'intellectualism'.) It can be summed up (using a formulation of a much later period, namely that of Hegel [이 분사구문은 through a formulation of a much later period, namely that of Hegel 또는 by means of a formulation ~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 - 역자 주]) in the words: 'That which is reasonable must be real.'
Opposed to this theory, empiricism maintains that only experience enables us to decide upon the truth or falsity of a scientific theory. Pure reasoning alone, according to empiricism, can never establish factual truth; we have to make use of observation and experiment. It can safely be said that empiricism, in some form or other, although perhaps in a modest and modified form, is the only interpretation of scientific method which can be taken seriously in our day. The struggle between the earlier rationalists and empiricists was thoroughly discussed by Kant, who tried to offer what a dialectician (but not Kant) might describe as a synthesis of the two opposing views, but what was, more precisely, a modified form of empiricism. His main interest was to reject pure rationalism. In his Critique of Pure Reason he asserted that the scope of our knowledge is limited to the field of possible experience, and that speculative reasoning beyond this field - the attempt to build up a metaphysical system out of pure reason - has no justification whatever. This criticism of pure reason was felt as a terrible blow to the hopes of nearly all continental philosophers; yet German philosophers recovered and, far from being convinced by Kant's rejection of metaphysics, hastened to build up new metaphysical systems based on 'intellectual intuition'. They tried to use certain features of Kant's system, hoping thereby to evade the main force of his criticism. The school which developed, usually called the school of the German idealists, culminated in Hegel.
There are two aspects of Hegel's philosophy which we have to discuss - his idealism and his dialectic. In both cases Hegel was influenced by some of Kant's ideas, but tried to go further. In order to understand Hegel we must therefore show how his theory made use of Kant's.
Kant started from the fact that science exists. He wanted to explain this fact; that is, he wanted to answer the question, 'How is science possible?' or, 'How are human minds able to gain knowledge of the world', or, 'How can our minds grasp the world?' (We might call this question the epistemological problem.)
His reasoning was somewhat as follows. The mind can grasp the world, or rather the world as it appears to us, because this world is not utterly different from the mind - because it is mind-like. And it is so, because in the process of obtaining knowledge, of grasping the world, the mind is, so to speak, actively digesting all that material which enters it by the senses. It is forming, moulding this material; it impresses on it its own intrinsic forms or laws - the forms or laws of our thought. What we call 'nature' - the world in which we live, the world as it appears to us - is already a world digested, a world formed, by our minds. And being thus assimilated by the mind, it is mind-like.
The answer, 'The mind can grasp the world because the world as it appears to us is mind-like' is an idealistic argument; for what idealism asserts is just that the world has something of the character of mind.
I do not intend to argue here for or against this Kantian epistemology and I do not intend to discuss it in detail. But I want to point out that it certainly is not entirely idealistic. It is, as Kant himself points out, a mixture or a synthesis, of some sort of realism and some sort of idealism - its realist element being the assertion that the world, as it appears to us, is some sort of material formed by our mind, whilst its idealist element is the assertion that it is some sort of material formed by our mind.
So much for Kant's rather abstract but certainly ingenious epistemology. Before I proceed to Hegel, I must beg those readers (I like them best) who are not philosophers and who are used to relying on their common sense to bear in mind the sentence which I chose as a motto for this paper; for what they will hear now will probably appear to them - in my opinion quite rightly - absurd.
As I have said, Hegel in his idealism went further than Kant. Hegel, too, was concerned with the epistemological question, 'How can our minds grasp the world?' With the other idealists, he answered: 'Because the world is mind-like.' But his theory was more radical than Kant's. He did not say, like Kant, 'Because the mind digests or forms the world'. He said, 'Because the mind is the world'; or in another formulation, 'Because the reasonable is the real; because reality and reason are identical'.
This is Hegel's so-called 'philosophy of reason and reality', or, for short, his 'philosophy of identity'. It may be noted in passing that between Kant's epistemological answers, 'Because the mind forms the world', and Hegel's philosophy of identity, 'Because the mind is the world', there was, historically, a bridge - namely Fichte's answer, 'Because the mind creates the world'.
Hegel's philosophy of identity, 'That which is reasonable is real, and that which is real is reasonable; thus, reason and reality are identical', was undoubtedly an attempt to re-establish rationalism on a new basis. It permitted the philosophers to construct a theory of the world out of pure reasoning and to maintain that this must be a true theory of the real world. Thus it allowed exactly what Kant had said to be impossible. Hegel, therefore, was bound to try to refute Kant's arguments against metaphysics. He did this with the help of his dialectic.
To understand his dialectic, we have to go back to Kant again. To avoid too much detail, I shall not discuss the triadic construction of Kant's table of categories, although no doubt it inspired Hegel. But I have to refer to Kant's method of rejecting rationalism. I mentioned above that Kant maintained that the scope of our knowledge is limited to the field of possible experience and that pure reasoning beyond this field is not justified. In a section of the Critique which he headed 'Transcendental Dialectic' he showed this as follows. If we try to construct a theoretical system out of pure reason - for instance, if we try to argue that the world in which we live is infinite (an idea which obviously goes beyond possible experience) - then we can do so; but we shall find to our dismay that we can always argue, with the help of analogous arguments, to the opposite effect as well. In other words, given such a metaphysical thesis, we could always construct and defend an exact antithesis; and for any argument which supports the thesis, we can easily construct its opposite argument in favour of the antithesis. And both arguments will appear to be equally, or almost equally, reasonable. Thus, Kant said, reason is bound to argue against itself and to contradict itself, if used to go beyond possible experience.
If I were to give some sort of modernized reconstruction, or reinterpretation, of Kant, deviating from Kant's own view of what he had done, I should say that Kant showed that the metaphysical principle of reasonableness or self-evidence does not lead unambiguously to one and only one result or theory. It is always possible to argue, with similar apparent reasonableness, in favour of a number of different theories, and even of opposite theories. Thus if we get no help from experience, if we cannot make experiments or observations which at least tell us to eliminate certain theories - namely those which although they may seem quite reasonable, are contrary to the observed facts - then we have no hope of ever settling the claims of competing theories.
How did Hegel overcome Kant's refutation of rationalism? Very easily, by holding that contradictions do not matter. They just have to occur in the development of thought and reason. They only show the insufficiency of a theory which does not take account of the fact that thought, that is reason, and with it (according to the philosophy of identity) reality, is not something fixed once and for all, but is developing - that we live in a world of evolution. Kant, so says Hegel, refuted metaphysics, but not rationalism. For what Hegel calls 'metaphysics', as opposed to 'dialectic', is only such a rationalistic system as does not take account of evolution, motion, development, and thus tries to conceive of reality as something stable, unmoved and free of contradiction. Hegel, with his philosophy of identity, infers that since reason develops, the world must develop, and since the development of thought or reason is a dialectic one, the world must also develop in dialectic triads.
Thus we find the following three elements in Hegel's dialectic.
(a) An attempt to evade Kant's refutation of what Kant called 'dogmatism' in metaphysics. This refutation is considered by Hegel to hold only for systems which are metaphysical in his more narrow sense, but not for dialectical rationalism, which takes account of the development of reason and is therefore not afraid of contradictions. In evading Kant's criticism in this way, Hegel embarks on an extremely dangerous venture which must lead to disaster, for he argues something like this: 'Kant refuted rationalism by saying that it must lead to contradictions. I admit that. But it is clear that this argument draws its force from the law of contradiction: it refutes only such systems as accept this law, i. e. such as try to be free from contradictions. It is not dangerous for a system like mine which is prepared to put up with contradictions - that is, for a dialectic system.' It is clear that this argument establishes a dogmatism of an extremely dangerous kind - a dogmatism which need no longer be afraid of any sort of attack. For any attack, any criticism of any theory whatsoever, must be based on the method of pointing out some of contradiction, either within the theory itself or between the theory and some facts, as I said above. Hegel's method of superseding Kant, therefore, is effective, but unfortunately too effective. It makes his system secure against any sort of criticism or attack and thus it is dogmatic in a very peculiar sense, so that I should like to call it a 'reinforced dogmatism'. (It may be remarked that similar reinforced dogmatisms help to support the structures of other dogmatic systems as well.)
(b) The description of the development of reason in terms of dialectic is an element in Hegel's philosophy which had a good deal of plausibility. This becomes clear if we remember that Hegel uses the word 'reason' not only in the subjective sense, to denote a certain mental capacity, but also in the objective sense, to denote all sorts of theories, thoughts, ideas and so on. Hegel, who holds that philosophy is the highest expression of reasoning, has in mind mainly the development of philosophical thought when he speaks of the development of reasoning. And indeed hardly anywhere can the dialectic triad be more successfully applied than in the study of the development of philosophical theories, and it is therefore not surprising that Hegel's most successful attempt at applying his dialectic method was his History of Philosophy.
In order to understand the danger connected with such a success, we have to remember that in Hegel's time - and even much later - logic was usually described and defined as the theory of reasoning or the theory of thinking, and accordingly the fundamental laws of logic were usually called the 'laws of thought'. It is therefore quite understandable that Hegel, believing that dialectic is the true description of our actual procedure when reasoning and thinking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 when reasoning and thinking은 분사구문으로 쓸 수 없고 when we reason and think로 써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held that he must alter logic so as to make dialectic an important, if not the most important, part of logical theory. This made it necessary to discard the 'law of contradiction', which clearly was a grave obstacle to the acceptance of dialectic. Here we have the origin of the view that dialectic is 'fundamental' in the sense that it can compete with logic, that it is an improvement upon logic. I have already criticized this view of dialectic, and I only want to repeat that any sort of logical reasoning, whether before or after Hegel, and whether in science or in mathematics or in any truly rational philosophy, is always based on the law of contradiction. But Hegel writes (Logic, Section 81, (1)): 'It is of the highest importance to ascertain and understand rightly the nature of Dialectic. Wherever there is movement, wherever there is life, wherever anything is carried into effect in the actual world, there Dialectic is at work. It is also the soul of all knowledge which is truly scientific.'
But if by dialectic reasoning Hegel means a reasoning which discards the law of contradiction, then he certainly would be able to give any instance of such reasoning in science. (The many instances quoted by dialecticians are without exception on the level of Engels's examples referred to above - the grain and (-a
The main danger of such a confusion of dialectic and logic is, as I said, that it helps people to argue dogmatically. For we find only too often that dialecticians, when in logical difficulties, as a last resort tell their opponents that their criticism is mistaken because it is based on logic of the ordinary type instead of on dialectic; if they would only use dialectic, they would see that the contradictions which they have found in some arguments of the dialecticians are quite legitimate (namely from the dialectic point of view).
(c) A third element in Hegelian dialectic is based on his philosophy of identity. If reason and reality are identical and reason develops dialectically (as is so well exemplified by the development of philosophical thought) then reality must develop dialectically too. The world must be ruled by the laws of dialectical logic. (This standpoint has been called 'panlogism'.) Thus, we must find in the world the same contradictions as are permitted by dialectic logic. It is this very fact that the world is full of contradictions which shows us from another angle that the law of contradiction has to be discarded. For this law says that no self-contradictory proposition, or no pair of contradictory propositions, can be true, that is, can correspond to the facts. In other words, the law implies that a contradiction can never occur in nature, i. e. in the world of facts, and that facts can never contradict each other. But on the basis of the philosophy of the identity of reason and reality, it is asserted that facts can contradict each other since ideas can contradict each other and that facts develop through contradictions, just as ideas do; so that the law of contradiction has to be abandoned.
But apart from what appears to me to be the utter absurdity of the philosophy of identity (about which I shall say something later), if we look a little closer into these so-called contradictory facts, then we find that all the examples proffered by dialecticians just state that the world in which we live shows, sometimes, a certain structure which could perhaps be described with the help of the word 'polarity'. An instance of that structure would be the existence of positive and negative electricity. It is only a metaphorical and loose way of speaking to say, for instance, that positive and negative electricity are contradictory to each other. An example of a true contradiction would be two sentences: 'This body here was, on the 1st of November, 1938, between 9 and 10 a. m., positively charged', and an analogous sentence about the same body, saying that it was at the same time not positively charged.
This would be a contradiction between two sentences and the corresponding contradictory fact would be the fact that a body is, as a whole, at the same time both positively and not positively charged, and thus at the same time both attracts and does not attracts certain negatively charged bodies. But we need not say that such contradictory facts do not exist. (A deeper analysis might show that the non-existence of such facts is not a law which is akin to laws of physics, but is based on logic, that is, on the rules governing the use of scientific language.)
So there are three points: (a) the dialectic opposition to Kant's anti-rationalism, and consequently the re-establishment of rationalism supported by a reinforced dogmatism; (b) the incorporation of dialectic in logic, grounded on the ambiguity of expressions like 'reason', 'laws of thought', and so on; (c) the application of dialectic to 'the whole world', based on Hegel's panlogism and his philosophy of identity. These three points seem to me to be the main elements within Hegelian dialectic. Before I proceed to outline the fate of dialectic after Hegel, I should like to express my personal opinion about Hegel's philosophy, and especially about his philosophy of identity. I think it represents the worst of all those absurd and incredible philosophic theories to which Descartes refers in the sentence which I have chosen as the motto for this paper. It is not only that philosophy of identity is offered without any sort of serious argument; even the problem which it has been invented to answer - the question, 'How can our minds grasp the world?' - seems to me not to be at all clearly formulated. And the idealist answer, which has been varied by different idealist philosophers but remains fundamentally the same, namely, 'Because the world is mind-like', has only the appearance of an answer. We shall see clearly that it is not a real answer if we only consider some analogous argument, like: 'How can this mirror reflect my face?' - 'Because it is face-like.' Although this sort of argument is obviously utterly unsound, it has been formulated again and again. We find it formulated by Jeans, for instance, in our own time, along lines like these: 'How can mathematics grasp the world?' - 'Because the world is mathematics-like.' He argues thus that reality is of the very nature of mathematics - that the world is a mathematical thought (and therefore ideal). This argument is obviously no sounder than the following: 'How can language describe the world?' - 'Because the world is language-like - it is linguistic', and no sounder than: 'How can the English language describe the world?' - 'Because the world is intrinsically British.' That this latter argument really is analogous to the one advanced by Jeans is easily seen if we recognize that the mathematical description of the world is just a certain way of describing the world and nothing else, and that mathematics supplies us with the means of description - with a particularly rich language.
Perhaps one can show this most easily with the help of a trivial example. There are primitive languages which do not employ numbers but try to express numerical ideas with the help of expressions for one, two, and many. It is clear that such a language is unable to describe some of the more complicated relationships between certain groups of objects, which can easily be described with the help of the numerical expressions 'three', 'four', 'five', and so on. It can say that A has many sheep, and more than B, but it cannot say that A has 9 sheep and 5 more than B. In other words, mathematical symbols are introduced into a language in order to describe certain more complicated relationships which could not be described otherwise; a language which contains the arithmetic of natural numbers is simply richer than a language which lacks the appropriate symbols. All that we can infer about the nature of the world from the fact that we have to use mathematical language if we want to describe it is that the world has a certain degree of complexity, so that there are certain relationships in it which cannot be described with the help of too primitive instruments of description.
Jeans was uneasy about the fact that our world happens to suit mathematical formulae originally invented by pure mathematicians who did not intend at all to apply their formulae to the world. Apparently he originally started off as what I should call an 'inductivist'; that is, he thought that theories are obtained from experience by some more or less simple procedure of inference. If one starts from such a position it obviously is astonishing to find that a theory which has been formulated by pure mathematicians, in a purely speculative manner, afterwards proves to be applicable to the physical world. But for those who are not inductivists, this is not astonishing at all. They know that it happens quite often that a theory put forward originally as a pure speculation, as a mere possibility, later proves to have its empirical applications. They know that often it is this speculative anticipation which prepares the way for the empirical theories. (In this way the problem of induction, as it is called, has a bearing on the problem of idealism with which we are concerned here.)
3. DIALECTIC AFTER HEGEL
The thought that facts or events might mutually contradict each other appears to me as the very paradigm of thoughtlessness.
DAVID HILBERT
Hegel's philosophy of the identity of reason and reality is sometimes characterized as (absolute) idealism, because it states that reality is mind-like or of the character of reason. But clearly such a dialectical philosophy of identity can easily be turned round so as to become a kind of materialism. Its adherents would then argue that reality is in fact of material or physical character, as the ordinary man thinks it is; and by saying that it is identical with reason, or mind, one would imply that the mind is also a material or physical phenomenon - of if not, that the difference between the mental and the physical cannot be of great importance.
This materialism can be regarded as a revival of certain aspects of Cartesianism, modified by links with dialectic. But in discarding its original idealistic basis, dialectic loses everything which made it plausible and understandable; we have to remember that the best arguments in favour of dialectic lay in its applicability to the development of thought, especially of philosophical thought. Now we are faced blankly with the statement that physical reality develops dialectically - an extremely dogmatic assertion with so little scientific support that materialistic dialecticians are forced to make a very extensive use of the dangerous method we have already described whereby criticism is rejected as non-dialectical. Dialectical materialism is thus in agreement with points (a) and (b) discussed above, but it alters point (c) considerably, although I think with no advantage to its dialectic features. In expressing this opinion, I want to stress the point that although I should not describe myself as a materialist, my criticism is not directed against materialism, which I personally should prefer to idealism if I were forced to choose (which happily I am not). It is only the combination of dialectic and materialism that appears to me to be even worse than dialectic idealism.
These remarks apply particularly to the 'Dialectical Materialism' developed by Marx. The materialistic element in this theory could be comparatively easily formulated in such a way that no serious objections to it could be made. As far as I can see the main point is this: there is no reason to assume that whilst the natural sciences can proceed on the basis of the common man's realistic outlook the social sciences need an idealist background like the one offered by Hegelianism. Such an assumption was often made in Marx's time, owing to the fact that Hegel with his idealist theory of the State appeared strongly to influence, and even to further, the social sciences, while the futility of views that he held within the field of the natural sciences was - at least for natural scientists - only too obvious. I think it is a fair interpretation of the ideas of Marx and Engels to say that one of their chief interests in emphasizing materialism was to dismiss any theory which, referring to the rational or spiritual nature of man, maintains that sociology has to be based on an idealist or spiritualist basis, or on the analysis of reason. In opposition they stressed the material side of human nature - such as our need for food and other material goods - and its importance for sociology.
This view was undoubtedly sound; and I hold Marx's contributions on this point to be of real significance and lasting influence. Everyone learned from Marx that the development even of ideas cannot be fully understood if the history of ideas is treated (although such a treatment may often have its great merits) without mentioning the conditions of their origin and the situation of their originators, among which conditions the economic aspect is highly significant. Nevertheless I personally think that Marx's economism - his emphasis on the economic background as the ultimate basis of any sort of development - is mistaken and in fact untenable. I think that social experience clearly shows that under certain circumstances the influence of ideas (perhaps supported by propaganda) can outweigh and supersede economic forces. Besides, granted that it is impossible fully to understand mental developments without understanding their economic background, it is at least as impossible to understand economic developments without understanding the development of, for instance, scientific or religious ideas.
For our present purpose it is not so important to analyse Marx's materialism and economism as to see what has become of the dialectic within his system. Two points seem to me important. one is Marx's emphasis on historical method in sociology, a tendency which I have called 'historicism'. The other is the anti-dogmatic tendency of Marx's dialectic.
As for the first point, we have to remember that Hegel was one of the inventors of the historical method, a founder of the school of thinkers who believed that in describing a development historically one has causally explained it. This school believed that one could, for example, explain certain social institutions by showing how mankind has slowly developed them. Nowadays it is often recognized that the significance of the historical method for social theory has been much over-rated; but the belief in this method has by no means disappeared. I have tried to criticize this method elsewhere (especially in my book The Poverty of Historicism). Here I merely want to stress that Marx's sociology adopted from Hegel not only the view that its method has to be historical, and that sociology as well as history have to become theories of social development, but also the view that this development has to be explained in dialectical terms. To Hegel history was the history of ideas. Marx dropped idealism but retained Hegel's doctrine that the dynamic forces of historical development are the dialectical 'contradictions', 'negations', and 'negations of negations'. In this respect Marx and Engels followed Hegel very closely indeed, as may be shown by the following quotations. Hegel in his Encyclopaedia (Part I ch. VI, p. 81) described Dialectic as 'the universal and irresistible power before which nothing can stay, however secure and stable it may deem itself'. Similarly, Engels writes (Anti-Dühring, Part I, 'Dialectics: Negation of the Negation'): 'What therefore is the negation of the negation? An extremely general... law of development of Nature, history and thought; a law which... holds good in the animal and plant kingdom, in geology, in mathematics, in history, and in philosophy.'
In Marx's view it is the main task of sociological science to show how these dialectic forces are working in history, and thus to prophesy the course of history; or, as he says in the preface to Capital, 'It is the ultimate aim of this work to lay bare the economic law of motion of modern society'. And this dialectic law of motion, the negation of the negation, furnishes the basis of Marx's prophecy of the impending end of capitalism (Capital, I. ch. XXIV, § 7): 'The capitalist mode of production... is the first negation... But capitalism begets, with the inexorability of a law of Nature, its own negation. It is the negation of the negation.'
Prophecy certainly need not be unscientific, as predictions of eclipses and other astronomical events show. But Hegelian dialectic, or its materialistic version, cannot be accepted as a sound basis for scientific forecasts. ('But all Marx's predictions have come true', Marxists usually answer. They have not. To quote one example out of many: In Capital, immediately after the last passage quoted, Marx said that the transition from capitalism to socialism would naturally be a process incomparably less 'protracted, violent, and difficult' than the industrial revolution, and in a footnote he amplified this forecast by referring to the 'irresolute and non-resisting bourgeoisie'. Few Marxists will say nowadays that these predictions were successful.) Thus if forecasts based on dialectic are made, some will come true and some will not. In the latter case, obviously, a situation will arise which has not been foreseen. But dialectic is vague and elastic enough to interpret and to explain this unforeseen situation just as well as it interpreted and explained the situation which it predicted and which happened to come true. Any development whatever will fit the dialectic scheme; the dialectician need never be afraid of any refutation by future experience. As mentioned before, it is not just the dialectical approach, it is, rather, the idea of a theory of historical development - the idea that scientific sociology aims at large-scale historical forecasts - which is mistaken. But this does not concern us here.
Apart from the role dialectic plays in Marx's historical method. Marx's anti-dogmatic attitude should be discussed. Marx and Engels strongly insisted that science should not be interpreted as a body of final and well-established knowledge, or of 'eternal truth', but rather as something developing, progressive. The scientist is not the man who knows a lot but rather the man who is determined not to give up the search for truth. Scientific systems develop; and they develop, according to Marx, dialectically.
There is not very much to be said against this point - although personally I think that the dialectical description of scientific development is not always applicable unless it is forced, and that it is better to describe scientific development in a less ambitious and ambiguous way, as for example, in terms of the trial and error theory. But I am prepared to admit that this criticism is not of great importance. It is, however, of real moment that Marx's progressive and anti-dogmatic view of science has never been applied by orthodox Marxists within the field of their own activities. Progressive, anti-dogmatic science is critical - criticism is its very life. But criticism of Marxism, of dialectical materialism, has never been tolerated by Marxists.
Hegel thought that philosophy develops; yet his own system was to remain the last and highest stage of this development and could not be superseded. The Marxists adopted the same attitude towards the Marxian system. Hence, Marx's anti-dogmatic attitude exists only in the theory and not in the practice of orthodox Marxism, and dialectic is used by Marxists, following the example of Engels' Anti-Dühring, mainly for the purposes of apologetics - to defend the Marxist system against criticism. As a rule critics are denounced for their failure to understand the dialectic, or proletarian science, or for being traitors. Thanks to dialectic the anti-dogmatic attitude has disappeared, and Marxism has established itself as a dogmatism which is elastic enough, by using its dialectic method, to evade any further attack. It has thus become what I have called a reinforced dogmatism.
Yet there can be no worse obstacle to the growth of science than a reinforced dogmatism. There can be no scientific development without the free competition of thought - this is the essence of the anti-dogmatic attitude once so strongly supported by Marx and Engels; and in general there cannot be free competition in scientific thought without freedom for all thought.
Thus dialectic has played a very unfortunate role not only in the development of philosophy, but also in the development of political theory. A full understanding of this unfortunate role will be easier if we try to see how Marx originally came to develop such a theory. We have to consider the whole situation. Marx, a young man who was progressive, evolutionary and even revolutionary in his thought, came under the influence of Hegel, the most famous German philosopher. Hegel had been a representative of Prussian reaction. He had used his principle of the identity of reason and reality to support the existing powers - for what exists, is reasonable - and to defend the idea of the Absolute State (an idea nowadays called 'Totalitarianism'). Marx, who admired him, but who was of a very different political temperament, needed a philosophy on which to base his own political opinions. We can understand his elation at discovering that Hegel's dialectical philosophy could easily be turned against its own master - that dialectic was in favour of a revolutionary political theory, rather than of a conservative and apologetic one. Besides this, it was excellently adapted to his need for a theory which should be not only revolutionary, but also optimistic - a theory forecasting progress by emphasizing that every new step is a step upwards.
This discovery, although undeniably fascinating for a disciple of Hegel and in an era dominated by Hegel, has now, together with Hegelianism, lost all significance, and can hardly be considered to be more than the clever tour de force of a brilliant young student revealing a weakness in the speculations of his undeservedly famous master. But it became the theoretical basis of what is called 'Scientific Marxism'. And it helped to turn Marxism into a dogmatic system by preventing the scientific development of which it might have been capable. So Marxism has for decades kept its dogmatic attitude, repeating against its opponents just the same arguments as were originally used by its founders. It is sad but illuminating to see how orthodox Marxism today officially recommends, as a basis for the study of scientific methodology, the reading of Hegel's Logic - which is not merely obsolete but typical of prescientific and even pre-logical ways of thinking. It is worse than recommending Archimedes' mechanics as a basis for modern engineering.
The whole development of dialectic should be a warning against the dangers inherent in philosophical system-building. It should remind us that philosophy must not be made a basis for any sort of scientific system and that philosophers should be much more modest in their claims. one task which they can fulfil quite usefully is the study of the critical methods of science.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측과 논박 제 17장 여론과 자유주의적 원칙들 (0) | 2010.08.02 |
---|---|
추측과 논박 제 16장 사회과학에서 예측과 예언 (0) | 2010.08.02 |
추측과 논박 제 14장 평범한 언어로 자기-언급과 의미 (0) | 2010.08.02 |
추측과 논박 제 13장 몸-정신 문제에 관한 기록 (0) | 2010.08.02 |
추측과 논박 제 12장 언어와 몸-정신 문제 (0) | 2010.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