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2
알려지지 않은 제노파네스(XENOPHANES)
그의 위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
제노파네스는... 그리스 철학사에서 실수로 명사(名士)가 되었다.
(해롤드 F. 처니스 [Harold F. Cherniss])
제노파네스는 시를 지어서 읊는 사람이었고, 역사가이도 했는데 아마도 진정으로 역사의 시조였다. 고도로 창의적인 사상가로서 특별히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자신을 비판하는 데에 독특했고, 그리스 계몽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아낙시맨더(Anaximander)의 우주론을 발전시켜 옹호하며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의 이론에 대항하였다. 그가 설파한 매우 독창적인 이성주의적 신학은, 말년에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천문학적 발견의 영향을 받아 다다랐을 우주론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는 아마도 최초의 문학평론가였으며 도덕주의자였다. 그는 오늘날 지구과학과 기상학이라고 불리는 것을 창시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시 사회와 사회제도에 대한 최초의 날카로운 비판자였다. 그리고 서구과학과 철학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하며 그는 지식 이론인 인식론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문명에 대한 이 위대한 공헌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공적으로 치부되었거나, 무시되었거나, 부분적으로 망각되었거나 오해를 받았을 따름이다. 이 논문에서 나는 제노파네스와 그의 업적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기에 이전 것보다 더 공정하고 역사적으로 합당한 설명을 제시한다.}
{이 논문의 1부는 포퍼 자신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다른 부분과 서문은 이 논문의 부록에 따라오는 편집자 주에 기술된 계획에 따란 저자의 유고로부터 편집되었다. 편집자.}
1 그리스 계몽철학의 시조
내가 인용구로서 선정한 명쾌한 문장은 탁월한 그리스 철학 역사가인 (그러나 심지어 ‘실수로’도 ‘철학의... 역사에서 명사가 된’ 적이 없는 사람으로 내가 유감스러워 하는) 해롤드 F. 처니스 (Harold F. Cherniss)의 펜에서 유래한다. 내가 인용한 문장은, 처벌을 받지 않고 제노파네스를 욕하는 것을 허용하는 전통인 어떤 형태와 일치한다.
이 형태의 뿌리는 제노파네스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동시대인인 위대한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게서 기인하는 거장의 냉소에서 감지될 것이다 (DK B400:
모든 것을 안다고 하여 무엇을 아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유인즉 그것이 헤시오드(Hesiod)가 지식을 갖는 데 도움을
주지도 못했고 피타고라스에게도 그러했고 제노파네스나
헤카타이오스(Hecataeus)에도 그러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냉소를 목적으로 했지만, 비의도적으로 제노파네스를 찬양을 받는 무리의 한 사람으로 만들어서 결국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게다가 헤라클리투스는 여기서 그가 많이 안다고 믿는다 - 올바로 알지는 못하지만 다소 너무 많이 안다고. 올바른 지식은 아마도 낮과 밤이 (그래서 모든 반대가 되는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아는 것인데 이유인즉 밤이 없으면 낮이 존재하지 않고 반대의 경우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라클리투스의 냉소는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 냉소는 헤라클리투스가 피타고라스를 단순한 점쟁이로서, 무당으로서 여기지 않았다는 논증으로서 - 물론, 보다 약한 논증 - 사용될지도 모르는데 그 이유는 헤라클리투스가 피타고라스를 제노파네스와 동일선상에 놓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신(神)의 존재를 믿었던 당신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키케로(Cicero)에 따르면, 제노파네스가 ‘미래를 점치는 관행을 강력하게 거부했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의심할 바 없이 제노파네스는 샤마니즘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가 또한 된다.
내가 생각하기에 위에 언급된 형태를 설명하는 것은 초기 계몽철학에서 제노파네스의 지도력이었다: 그를 제외시키는 옛 전통. 모든 실제적인 철학의 본질과 대조적으로 계몽철학의 깊이가 철저히 부족하기 때문에 계몽철학을 경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실제로 철학자가 될 수 없다는 상투적인 말을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유인즉 만약 당신이 철학자라면 당신은 깊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헤겔(Hegel)이 당신에게 있다고 믿는 그 고귀한 깊이 (‘die erhabene Tiefe’)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물론, 쇼펜하우어가 재빨리 간파한 바와 같이 지루함에 해당하는 순전히 은유이다 [이 부분의 원문은 This, of course, is an unmixed metaphor that works out to flatness, as Schopenhauer was quick to see.이지만 that works out to flatness의 의미를 ‘지루함에 해당하는’으로 번역했으나 역자로서 확신할 수 없다. - 역자 주]. 그러나 헤겔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사고가 지닌 무한한 깊이 때문에 자신은 다른 사람 위로 솟구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다른 철학자들보다 더 유행바람을 타도록 만드는 것은 이 ‘그들이 지닌 지식’이다. 그리고 계몽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 지식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철학사에 겨우 ‘실수’에 의해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제노파네스는 유럽 계몽주의가 내놓았던 이념들의 선례에 근접했다. 그러나 이 이념들은 지식인들 가운데서 존중을 받지 못했는데 그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 특히 성직자들의 권력이나 (나중에) 정치적인 권력 -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이 이념들을 오용했다. 이 이념들의 오용은 자신들이 내놓은 이념들이 깊이가 있다고 하여 - 자신들이 지닌 초월적으로 (다시 말해서, 비경험적으로) 영감을 받은 - 심지어 신성한 - 근원이 있다고 하여, 자신들이 내놓는 예언적 중요성이 있다고 하여 - 사람들을 위압하려는 기도와 항상 연관되어 있었다.
이 이념의 오용 얼마간을, 매우 드물지만, 우리는 심지어 소크라테스 이전의 위대한 철학자들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헤라클리투스가 ‘불투명한 자(the obscure)’로 지칭되었을 때,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탁월한 발언에 예언적 풍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발언에는 예언적 풍취가 많지 않아서 그는, 의심할 바 없이 핵심적인 비난으로부터 그를 구한 것은 그의 ‘불투명성(obscurity)’이었을지라도, 계몽주의에 속했다고 (예를 들어 DK B43, 44, 55와 또한 B47-54를 비교하라) 언급될 것이다: 그는 깊이가 없다는 비난을 받은 적이 없는데, 그 비난은 제노파네스에 대한 표준적인 비난이다.)
그 비난은 깊이가 없는 많은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는 비난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으로 그들이 자신들이 지닌 경박함으로부터 자신들을 떼어놓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그들이 - 그 비난을 다른 사람에게 돌림으로써 - 그리고, 물론, 또한 이해될 수도 없고 위압하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폭넓게 이용한다. ‘나는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이 철학이다’라고 매우 천재적인 젊은 물리학자는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하는 바를 듣고 매우 확신적으로 말했다. (나는 인정한다: 만약 이것이 철학이라면 제노파네스는 실수로 철학사에 들게 되었다.)
제노파네스를 폄하하는 사람들 모두가 계몽주의의 적(敵)이라고 나는 말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하라. 헤라클리투스를 포함하여 밀레투스학파의 위대한 창시자들 모두가 다양한 정도로 계몽주의의 어느 단계에 속했다. 그리고 아래 3부에서 논의된 제노파네스의 우주론에 대한 오해와, 이 오해에서 비롯된 제노파네스에 대한 공격은 반(反)-계몽주의적 경향과 관련이 없다; 그것들은 단지 제노파네스가 자신의 비판자들에게 완전히 머리가 돈 사람으로 보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그러나 갈렌(Galen)이 제노파네스를 옹호한 것을 보면 이 비판자들 몇 명은 정말로 반(反)-제노파네스와 반(反)-계몽주의 전통에 속했다.
내가 제안하는 바, 제노파네스가 유럽 계몽주의의 모든 주요 이념의 선례가 되어서 강력하게 그 주요 이념을 대표했다는 것은 제노파네스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이다. 이 이념들 가운데는 진실을 위하여 투쟁하고 애매모호함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이념이 있다; 명료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말하고 글을 쓰는 이념; 반어법 사용하기와 특히 자신에 대하여 반어법을 사용하는 이념; 심오한 사상가인 체하기를 피하는 이념;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는 이념; 세상의 경외감으로, 그리고 남에게 전염을 시키는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이념.
2 제노파네스의 초년과 밀레토스학파와의 만남
빠른 걸음으로 밀레토스(Miletus)의 북쪽으로 약 사나흘 거리인 소아시아의 콜로폰(Colophon) 출신 제노파네스는 기원전 570년에 태어났다. 콜로폰은 유구한 문학적 전통을 지닌 부유한 이오니아의 도시였는데 예전에는 ‘초창기 시가(詩歌)와 관련하여 이오니아의 수도였다’. 콜로폰은 내륙 도시였다.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포카이아(Phocaea) 항구가 있었고, 남쪽으로 밀레토스보다 가까운 곳에 거대한 도시 에베소(Ephesus)가 있었다. 포카이아와 밀레토스 두 도시 모두는 제노파네스 생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젊은 시절 제노파네스는, 기원전 610년에 밀레토스에서 태어난 밀레토스 자연 철학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아낙시맨더(Anaximander)의 제자가 되었다. 아낙시맨더의 가르침은 우주기원론과 우주론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 세상이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서 세상의 현재 구조가 어떠한지를 기술(記述)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설명하는 원리는 명료하고 근본적이었다: 헤시오드가 만든 신화의 신(神)들을, 자연을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대체하라. 아낙시맨더는 이오니아학파의 창시자인 탈레스(Thales)의 제자였으며 또한 그의 친척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학파창시자의 가르침을 변함없이 받드는 것을 자신들의 주요 임무로서 여길 모든 다른 학파와 뚜렷이 구별되어, 비판을 해서 학파 창시자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다른 학파 구성원들의 가르침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오니아학파의 전통이었다. 아마도 이런 이유 때문에 이오니아학파는 세대별로 적어도 한 가지 중요한 학설을 내놓았고, 그 학설을 주창한 사람의 이름이 공개적으로 전해졌다. 이것은 교설이나 이론이나 그 수정이 전통적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두 번째-질서의 방법론적 충고가 이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론들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라! 이론들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라, 이유는 이론들이란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자기-비판적 방법론이 학파창시자인 탈레스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아낙시맨더에 의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특히 아낙시메네스(Anaximenes)와 제노파네스에게 계승되었다고 나는 의견을 밝힌다.
아낙시맨더가 자신의 제자들과 토론한 핵심적인 문제들 중 하나는 지구와 지구의 안정성 문제였다. 탈레스는 지구가 물 위에 (그리하여 지진이 설명된다) 떠 있다고 가르쳤는데, 물이 만물의 ‘원리’이자 근원으로 더 이상 설명이 불가능했고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낙시맨더는 이 모든 것을 수정했다. 그가 말하는 지구는 (북[drum]같은 모양으로 짧은 원형 기둥이다; DK 12A10, 11) 어떤 것에 의해서도 지탱되지 않고 있다: 지구는 만물의 핵심부에 자유롭게 떠 있는데, 텅 비거나 거의 텅 빈 무한 공간에서 - 창공(ether) 즉, ‘텅 빈’ 공간과 다소 유사한 - 만물이 내뿜는 균형적인 인력에 의하여 만물의 핵심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무한 공간을 그는 아페이론(Apeiron, apeiron = ‘무한한[infinit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만물의 원리이자 근원인 물을 (실제로 아페이론과 동일한) 전체 무한 공간을 채우고 있는 무한히 세밀한 물질인 이 아페이론(= 무한자[the unbounded])으로, 영원하여 모든 다른 물질이 태어나는 그 아페이론으로 대체했다. 물과 대조적으로 가공된 가설적 물질로 아낙시맨더가 사용하는 ‘아페이론’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아는 한 최초의 전문적 용어 (technical term)였다. 비록 아페이론이, 탈레스가 주장하는 물처럼, 지구를 밑에서 떠받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분명히 지구가 떠 있고 균형이 잡혀있다는 데 조금 도움을 준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작용하며 분명히 모든 천체로부터 나오는 힘에 의하여 자리를 잡고 자유롭게 떠 있는 지구라는 이 이론은, 과학사에서 가장 대담하고 가장 독창적인 이론의 하나다. 이 다소 추상적인 이론의 대담성은 창의력이 떨어지는 제자 아낙시메네스에게는 너무 혁명적이었다: 아낙시메네스는 아페이론을 좀 더 익숙한 것, 즉 증기와 두꺼운 구름을 포함하는 공기(Air)로 바꾸고자 했다. 공기에서 구름이 생기는 것은 태양이나 달과 별같이 - 그리고 정말로 곤충이나 새들처럼 공중을 나는 동물들 - 공기에서 떠 있는 훨씬 더 단단한 물체의 가능성이 있는 출현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낙시메네스는 증기에 의하여 지탱되는 주전자의 단단한 뚜껑처럼, 지구가 공기에 의하여 지탱된다는 가정으로 지구의 안정성을 설명했다.
젊은 제노파네스가 아낙시맨더의 편을 들었던 것은 두 가지 경쟁하는 원리 아페이론과 공기에 관한 아낙시맨더와 아낙시메네스 사이의 논쟁에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제노파네스의 개입은 결국 결정적인 오해를 불러왔다 (아래 3부에 설명된 바와 같이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의 의한 오해로, 엠페도클레스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저지른 오해). 이 오해의 결과로 우리에게는, 제노파네스의 지구 이론과 그의 우주론에 관한 우리의 역사적 증거를 구성하는 두 가지 뚜렷이 반대가 되어 실제로 모순적인 전통적 보고서가 남게 되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아페이론-공기 논쟁에서 자신이 개입한 것에 관한 제노파네스 자신의 재빠른 해명이 있다 (DK 21B280:
우리 발아래서 지구가 어떻게 지구의 최고 한계로 공기와 접촉하는지
볼 수 있다;;;;;; 지구의 최저 한계로 지구는 아페이론에 도달한다.
gaivhϛ me`n tovde pei'raϛ a]nw para` possi`n o;ra'tai
h`evri prosplavzon, to` kavtw d' ve`ϛ a]peiron i;knei}tai.
At our feet we can see how the Earth with her uppermost limit
Borders on air; with her lowest, she reaches down to Apeiron.
밀레토스학파였던 제노파네스가 쓴 이 두 구절로써 제노파네스는 아낙시메네스에게 대항하여, 즉 지구가 공기 위에 떠 있다는 이론에 대항하여 아낙시맨더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음이 나에게는 분명해 보인다. 아니, 이 시 구절을 소리 내어 읽어보라.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공기는 지구의 위 부분 (또는 위 표면) 위에 있다; 그러나 아래 부분 밑에는 아페이론이 있을 따름이다 - 그리하여 지구를 지탱하는 물질이 없다 (물도 공기도 없다).
정말로 (제노파네스는 계속 주장했을 것이다), 지구가 탈레스가 주장하는 물이나 아낙시메네스가 주장하는 공기처럼 어떤 구체적인 물체에 의하여 지탱되기 때문에 지구가 안정되어 있다는 이론은 터무니없다. 까닭인즉 아낙시맨더가 그런 이론은 ‘그러면 물은 무엇이 지탱하는가? 혹은 공기는 무엇이 지탱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틀림없이 무한회귀에 도달하고 만다. 아낙시맨더는 (제노파네스는 질문하는 듯하다) 지구가 만물로부터 등거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평형상태에 있다는 아름다운 지구이론을 헛되이 창안했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B 28 구절은 아래와 같은 그림으로 증명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아페이론
공기
아페이론 지구 아페이론
아페이론
여기서 지구는 아낙시맨더가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으로부터 보고되는 바와 같이 공기는 (평편한 나뭇잎을 지탱할 것같이) 지구를 지탱하고 있지 않다. 제노파네스의 글 B28에 근거하여 글을 쓰면서 찰스 H. 칸 (Charles H. Kahn)은 자신의 탁월한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아페리온이라는 개념은 이오니아학파의 우주론에서 영원한 특징이다.’ 그는 또한 강조하기를 우리는 ‘밑으로 {또는 아래로} 아페이론까지... 도달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칸은 계속해서 말한다: ‘아마도 {제노파네스}는 아낙시맨더의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그가 의미했던 바는 심플리키우스(Simplicius)에게만큼 우리에게도 모호했다 (제노파네스 A47)’. 그러나 제노파네스의 글 B28은 {위에서 내가 평했던 바와 같이} 아낙시메네스에 대항하여 지구의 위치에 관한 아낙시맨더의 이론을 옹호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제노파네스가 개입했던 (추측되는) 문제 상황을 기술하려고, 그리하여 내가 번역했던 바와 같이 그가 재빨리 끼워 넣었던 시구에서 함축된 내용을 도출하려고 노력해왔다. (내가 옳다면, B28은 제노파네스가 아낙시맨더의 제자였음을 강조하는 보고서를 독립적으로 증명한다.) 아무튼 - 나 자신처럼, 제노파네스의 글 두 행을 (DK B28) 밀레토스학파가 지녔던 지구의 안정성과 지탱에 관한 문제와 연결시키는 세 명의 저술가를 내가 알고 있다할지라도 - 나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철학 문건을 알고 기억하는 한, 나 홀로 그렇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그 세 사람은 C. H. 칸(Kahn), F. M. 콘포드(Cornford) 그리고 J. 만스펠트(Mansfeld)이다.
나는 이제 방향을 돌려 나의 번역과 해석을 토론하고 옹호하겠다. 두 명의 탁월한 학자인 찰스 H. 칸과 펠릭스 M. 클리브 (Felix M. Cleve)를 제외하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번역은 제노파네스의 두 번째 행을 다소 다음과 같이 끝냈다:
더 낮은 곳에서 그것은{= 지구} 아래로 무한에 다다른다.
이 번역은 - 내가 아는 한, 칸과 클리브를 제외하고 보편적으로 수용되는데 - 지구에 낮은 면이나 낮은 끝이 있다는 클리브와 나의 해석과 대조적으로, 지구는 무한히 혹은 무한정으로 아래로 즉, 측정되지 않을 정도로 아래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이것은 또 ‘무한’에 근접한다; 무한은 칸과 내가 (클리브는 아니다) 아낙시맨더의 원리와 - 그가 주장하는 아페이론 - 일치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클리브는 제노파네스에 관한 자신의 책에서 아낙시맨더나 아낙시메네스를 언급하지 않는다. 제노파네스와 아낙시맨더는 콘포드에 의하여 그의 저서 지식의 원리 (Principium Sapientiae)에서 언급되고, 만스펠트에 의하여 그의 제노파네스의 글 2행에 관한 그리고 ‘아페이론’이라는 용어에 관한 비평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아낙시맨더와 아낙시메네스를 밀레토스학파의 토론과 연관시킨다. 그러나 만스펠트는 두 사람의 글을 두 번이나 통상적인 방식으로 해석한다 (‘무한 속으로 [ins Unermessliche]’나 인용한 책 208쪽에서 ‘무한을 향하여 [hin ins Unbegrenzte]’); 그리고 그는 ‘아페이론’이라는 용어에 관하여 ‘이 경우에... 이 밀레토스학파의 개념은 여기서 원래 방식으로 재해석된다: 아낙시메네스가 주장하는... 공기가 지구를 지니고 있지 않고 지구 자체가 한 방향으로 무한하다’ (다시 말해서, 아래쪽으로). 그래서 나의 해석은, 부분적으로, 칸과 클리브에 의하여 증명되고, 또 다른 면에서 콘포드와 만스펠트에 의하여 증명되지만 또한 만스펠트에 의하여 부정되기도 한다. 총체적으로 네 사람은 그 해석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듯하다고 나는 느낀다.
나의 해석은, 언어학적 관점에서, 칸 및 클리브의 해석과 거의 동일하다. 우리의 해석이 서로 다른 곳은 분명히 2행의 몇 단어를 해석하는 데 관해서이다: 'to katō d'es apeiron ikneitai'는 칸과 클리브와 내가 문자 그대로
‘아래 {한계나 끝}은 아페이론에 다다른다’고 읽을 것이다. 결정적인 요점은 우리가 이 구절을 ‘(최)상층 한계는... 공기에 근접한다’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지구의 상층 한계는 공기와 근접하고,
지구의 하층 한계는 아래로 내려가 무한에 {다시 말해서 아페이론}
다다른다.
The upper limit of the Earth borders on Air,
The lower limit of the Earth reaches down to the Unlimited, {i.e. the Apeiron}.
칸과 클리브와 나에게 이것은 그리스어를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밀레토스학파에서 이 중요한 우주론적 토론에 관한 문제 상황이었다고 내가 생각한 것에 의해서 크게 강화된다. 대부분의 번역자들은 ‘하층(the lower)’이 ‘한계’를 의미한다고 그리스어 원문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묵시적으로 (DK로써) 상정(想定)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지구가 무한으로 내려간다면 ‘하층 한계’는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라는 빤히 들여다보이는 모순을 간과할 뿐 아니라, 'Apeiron'이 실제로 아낙시맨더가 주장하는 원리(αrchē)의 이름인 반면 es Apeiron이 ‘무한으로’나 ‘무한하게’를 의미한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제노파네스의 논증은, 전형적으로 몇 행의 탁월하고 명료한 시구로 압축되어, 오해를 받았다.
고대에는 많은 무한성이 제노파네스의 창작품이라고 잘못 전해져서, 다음 부에서 토론되듯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글에 고무를 받아 제노파네스 전설을 형성하였다. 그 무한성을 거부한 다음에야 우리는 제노파네스가 과학에 관한 위대하고 창조적인 철학자였음을 알기 시작할 수 있다. 그는 태양과 별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 그는 태양과 별을 불타는 가스 덩어리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런 것들은 지구 위에서 목격될 수 있다 - 늪지대 위에서 불타는 가스나, 화산에서 돌출하는. 재노파네스는 nephos라는 용어를 태양과 별은 불타는 가스 {덩어리}라는 자신의 탁월한 추측을 형성하기 위하여 사용했던 듯하다. 이것은 내가 보기에 아낙시맨더의 이론을 향상시킨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아낙시맨더 및 헤라클리투스와, 태양은 불타는 돌이라는 유명한 아낙사고라스의 이론 사이의 거의 필수적인 중간단계이다. (그 이론은 DK A32에서 보고된다.)
아낙시맨더는 기원전 546년에 사망하여 (DK 12 A1), 우리는 제노파네스가 이때쯤 밀레토스학파를 떠나 북쪽으로 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콜로폰으로 돌아와서 그는 자신이 그곳에서 발견한 사회적 및 지적(知的) 분위기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다 (DK 21B3).
다음 해인 기원전 545년은 이오니아의 그리스인에게 재앙의 해였다. 메디아 장군 하르파구스(Harpagus)가 지휘하는 거대한 페르시아 군대가 이오니아를 침공하여 이오니아의 자유를 짓밟았다. 제노파네스는 콜로폰을 떠나 망명했다. 우리에게는 이 망명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제노파네스가 포카이아 시민들과 합류하여 격렬하게 모험적인 망명을 길을 동행했다는 테오도르 곰페르츠 (Theodor Gomperz)의 의견이 내가 보기에 너무 과장된 것은 아니다. (아래 7부 참조.)
3. 오해를 받은 제노파네스의 우주론
이제 나는 우주론자로서 제노파네스를 핵심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라고 불릴 것에 왔다; 어리석고 심지어 모순적인 교설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오해. 그 이야기는 정말로 흥미진진하다.
이 오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 때문에 생겨났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천체에 관하여(De Caelo) (294a21)에서 제노파네스가 지구가 아래로 무한히 펼쳐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이유를 찾는 수고를 면제받으려고’ (다시 말해서, 지구가 지닌 명백한 안정성에 대한 이유) 이 견해를 고수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제노파네스가 쓴 결정적인 두 행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유인즉 그에게는 더 나은 증거가 부족하여 대신에 엠페도클레스가 쓴 경멸적인 시구 3행을 인용하는데, 엠페도클레스는 ‘지구의 깊이와 풍부한 에테르는 무한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제노파네스에 대한 비판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엠페도클레스의 시구 3행을 인용하여 지지한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동일한 문맥 어느 곳에서, 엠페도클레스가 지구의 무한한 ‘뿌리’라는 터무니없는 이론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죄인 한 사람으로서 제노파네스를 지명했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또는 그렇게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글은 (천체에 관하여 [De Caelo] 294a21 = DK 31B39), 그 글 속에서 그가 다소 성급하게 제노파네스에 대한 엠페도클레스의 조롱성이면서 오만한 공격을 인용하고 수용하여 지지하는데, 제노파네스의 글 B28을 거의 보편적으로 오해하는 유일한 근원이며 정말로, 이 최초이자 근본적인 오해의 모든 결과인 다른 오해 모두의 근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 정말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자신의 이 오해가 낳은 어떤 결과를 날카롭게 부인하는 말을 제노파네스에 관하여 말했다.
우리가 다소 과장한다면 제노파네스의 우주론에 관한 두 가지 보고서가 있다. 첫 번째 보고서는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하나의 신(神)과 우주는 둘 다 제한적이고 구형적(球形的)이어서 합치된다는 교설이 제노파네스의 것이라고 묵시적으로 말하는 보고서이다. 분명히 이 보고서는,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시작되는데, 제노파네스를 파메니데스의 선두주자로 만들어 제노파네스를 파메니데스에게 흡수시킨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언어적 이유가 이 두 사람 사이의 (느슨한) 관계를 대변하지만 이 두 사람을 흡수시키려는 시도는 내가 보기에 믿을 수 없다. 아무튼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을 따름이다. 두 번째 보고서는 지구가 (그리하여 우주 또한) 깊이에서 유한하다는 (그리고 또한 아마도 너비에서는 심지어 무한하다) 가르침이 제노파네스에게서 나온다고 말한다; 태양이 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견해로서 제노파네스에게서 그 근원을 잘못 찾는 결과를 낳는다: 즉, 태양이 무한한 지구 위를 무한 직선으로 움직여서 무한히 멀어지기 때문에 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이라는 교설. (제노파네스가 그랬던 바와 같이 이 교설을 대양을 항해한 사람들에게 말해보라!) 그러므로 태양은 매일 새로워져야 하고, 더 정확하게는, 동쪽에서 새로운 천체로서 재창조되어야 한다. {이것에 대한 보충설명을 위하여 아래 포퍼의 글 11을 참조. 편집자.}
이것은 제노파네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불가능한 이론의 하나일 따름이다. 아마도 그만큼 중요한 것은 탈레스의 원리 (물), 아낙시메네스의 원리 (공기) 그리고 헤라클리투스의 원리 (불)과 같은 원리가 그에게서 기인한다는 것이고 게다가 그의 ‘원리’는 - 네 번째 - 지구였다. 그래서 다른 ‘원리들’처럼 지구는 무한해서 더 이상 지탱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보고서에 속하는 보고서 몇 가지 속에 첫 번째 보고서의 몇 가지 교설이 포함되어 있다.
이제 두 번째 보고서에 의하여 제노파네스의 가르침으로 치부되는 것은 - B28이 칸, 클리브, 그리고 내가 (그리고 원문) 제시하는 대로 번역된다면 - 제노파네스 자신이 작성한 글 B27과 29 어디에서도 증명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B28에 대한 해석은 정말로 결정적이다: 이 글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석하는 바와 같이 해석된다면, 두 번째 보고서 속의 이야기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합당해진다. 칸과 클리브와 내가 번역하는 바와 같이 B28이 번역된다면 이 이야기들은 거부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야기 속의 오류도 궁극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가 부추긴 오해에 기인한다고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보고서는 주로 첫 번째 보고서에 속한다 (천체에 관하여 안에 있는 치명적인 구절을 제외하고). 두 사람 모두 제노파네스에게서 엘레아(Elea)학파인 파메니데스의 선두주자를 보는데 두 사람은 하나에 - 다시 말해서 구형(球形)으로 등분 불가능한 우주 - 관한 파메니데스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저서 형이상학(Metaphysics) (986b21 - DK A30)에서, 제노파네스가 (우주를 언급하면서) 하나(the one)는 신(神)이다 ('to hen einei... ton theon')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로써 자신의 불평을 예시하면서, 제노파네스가 말했던 것이 별로 명백하지 않다고 제노파네스에 대하여 불평한다. 이것은 정말로 모호한 말이어서, 아마도 플라톤처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를 파메니데스의 선두주자로 여겼음을 예시하는 것을 넘어서, 제노파네스에 대하여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첫 번째 보고서에 속하는 다른 나중 보고서 속에 파메니데스에 대한 제노파네스의 선두주자 역할이 상술되어 있다.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하나의 신(神)은 -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간을 닮지 않는다’ (DK B23) - 구형(球形)의 몸을 지닌다고 언급된다: 정말로 인간의 형체를 닮지 않았다! 그리고 도처에서 이 몸은 물리적 우주와 동일시되는데, 그 동일시는 (B25를 고려하면: ‘단지 사고[思考]와 의도에 의하여 그가 다스리는 모든 것 위에 노력도 하지 않는’) 다소 수용하기 어렵다. 물론 이것으로 인하여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물리적 우주는, 파메니데스가 말하는 우주처럼, 또한 유한하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오직 유한한 몸만이 (구형[球形]) 형체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지닌 B28의 두 행에 대한 무제한적 해석과 충돌하여 두 번째 보고서와 충돌하는 전통이 있었음을 적시한다.
그러므로 칸과 클리브와 나의 B28에 대한 유한적인 해석이 수용된다면, 첫 번째 보고서가 수용될 것이지만 두 번째 보고서는 오해에 근거한 것으로서 거부되어야 한다. 그러나 첫 번째 보고서가 수용될 것인지 아닌지는 더 어려운 문제이다; 이유인즉 아마도 그것은 플라톤이 파메니데스가 탁월한 구성원이었던 엘레아학파를 창시한 사람이 제노파네스라고 주장한 결과일 따름이다.
이것은 견해를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고인이 된 나의 친구 W. K. C. 거스리(Guthrie)가 자신의 탁월한 저서 그리스 철학사 (History of Greek Philosophy) 1권에서 내놓은 정교한 논증이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논증으로 보이며, 그 논증들은 B28에 대한 나의 번역과 해석에 (거스리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번역했다) 의하여 강화되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매우 칭찬하지만, 자신의 저서 파메니데스[Parmenides]에서 그가 제노파네스에 대하여 말하는 것에 대하여 특히, 내가 자주 동의하지 않는) 재능이 많은 칼 라인하르트 (Karl Reinhardt)가 최초로 언급한 가능성을 심각하여 고려해야 한다. 라인하르트가 말하는 바, (자신이 혐오하는) 제노파네스는 생애의 말기에 자신보다 젊은 파메니데스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텐데 파메니데스는 어느 단계에서 제노파네스의 제자였다고 일컬어진다. 이것은 - 혹은 두 사람 사이의 영향력은 - 틀림없이 중요한 가능성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제노파네스가 - 혹시 B28을 고수하거나 또는, 아페이론으로 둘러싸인 공기 주머니에 의하여 먼저 둘러싸인 지구라고 B28을 수정하는 반면 - 파메니데스가 주장하는 구형(球形) 지구를 지지하여 아낙시맨더가 주장하는 원통형 지구를 버리게 되었다는 개연성이 생길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첫 번째 보고서의 모든 내용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게 될 것이다.
나는 두 명의 위대한 고대 학자가 제노파네스에 관한 당시 보고서에 불만스러워 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이 부분을 마치고자 한다. 심플리키우스(Simplicius)는 천체에 관하여(De Caelo) (522.7 = DK A47)에 대한 자신의 비평에서, 제노파네스가 무한히 깊은 지구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옳은지, 그리고 우리가 혹시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를 오해하지나 않는지 자신은 의심이 든다고 불평했다. 그는 자신이 제노파네스 자신의 말을 - 우리가 알고 있는 B28? - 발견할 수 없어서 확신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물리학(Physics) (22. 22 = DK A31)에 대한 자신의 비평에서도 심플리키우스는, 명백하게 첫 번째 보고서와 두 번째 보고서의 상반되는 보고내용 때문에, 제노파네스에 대하여 당혹스러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다른 위대한 고대 학자는 갈렌(Galen)이다. 그의 말은 매우 명시적이다. 그는 이렇게 글을 쓴다 (DK A36): ‘악의적이고 중상모략적인 방식으로 제노파네스를 비평하는 몇몇 사람들은 제노파네스에 대하여 거짓말을 했다.’ 갈렌은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원리’는 지구라고 명백하게 보고했던) 사비누스(Sabinus)를 언급하고 계속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유인즉 제노파네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어느 곳에서도 밝혀질 수 없다.’ 이 말로 인하여 갈렌은 자연에 관하여 (On Nature)에서 실종된 제노파네스의 글을 접할 수 있었고, 그 글에는 내가 여기서 두 번째 보고서라고 불렀던 것이 제노파네스가 했다고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말이 전혀 없었을 개연성이 높다.
4. 철학적 신학자로서 제노파네스와 파메니데스의 영향
우리가 아낙시맨더로부터 물려받은 짧은 글에 (B1) 의하면, 세상의 과정은 자연적인 과정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날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지라도, 이것은 깊은 사고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 특히 그것이 고도로 독창적인 자연과학자로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 시적(詩的)-철학적 개념이라고 모든 사람은 느낄 것이다. 헤라클리투스의 글 또한 시적(詩的) 효과를 발휘한다. 그의 경구(警句)는, 많은 경구가 두드러지게 위엄을 드러내는데, 당시 운율적 작시(作詩)의 의미에서 운문에 속하지 않을지라도, 현대에서 때때로 ‘자유시(free verses)’로 불리는 운문의 형태에 속한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물론 파메니데스 또한 시를 지었고, 또한 아낙시맨더나 헤라클리투스처럼 일종의 예언자로서 시를 쓴다: 그도 역시 매우 중요한 요지를 지니고 있어서 역시 독자들에게 위엄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
이 네 명 중 종교적 문제에 가장 큰 흥미를 지녔던 듯한 제노파네스는 자신을 예언자로 간주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는, 파메니데스처럼, 우리와 이성적으로 대화한다; 그러나 그가 지닌 요지에는, 파메니데스가 지닌 요지처럼, 신적(神的)인 권위가 없다: 그는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는 또한 도덕주의자이지만 설교를 하지는 않는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편안함과 겸손의 느낌이 배어있다. 제노파네스가 사용하는 언어에는 거명된 네 명 중에서 가장 위엄이 적다. 그는 자신의 우월한 지혜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추측하기에, 독일 학자들이 - 그리고 혹시 몇몇 그리스 철학자들이 - 제노파네스에게서 감명을 받지 못하는 주요 원인의 하나이다. 두 번째 이지만 매우 다른 이유는 그리스 철학총서 전통에서 위에 언급된 그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에서 발견될 수 있다.)
제노파네스는 심지어 논증을 신학 속으로 끌고 간다. 호머와 헤시오드(Hesiod)의 시를 전문적으로 암송하는 음유시인으로서, 그는 밀레토스학파의 영향을 받아서 호머와 헤시오드 두 사람 모두를 진지하게 비판하는 사람으로 변신한다: 그는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관점에서 두 사람을 비판했다. 그는 두 사람이 만든 이야기에 반대했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神)들이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강간을 한다. 그래서 그는 매우 비판적인 관점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신학을 재고하려는 충동을 받았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오늘날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sm)’으로 불리는 사고방식을 발견하여 공격한 것이다: 그는 호머와 헤시오드가 지어낸 이야기가 진지하게 고려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단순히 이유는 그 이야기들이 신(神)들을 마치 사람처럼 기술(記述)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운문 형태로 쓰인 제노파네스의 논증을 인용한다 (내가 거의 직역한 것; B16, B15):
에티오피아인들은 자신들의 신(神)들이 납작코에 흑인이라고 말하고,
트라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신(神)들이 벽안에 붉은 머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나 말이나 사자에게 손이 있어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사람들처럼 조각을 할 수 있다면, 말은 신을
말처럼, 소는 소처럼 그려서, 각각은 자신의 신(神)들의 몸을
각각 자신과 비슷한 모양으로 조형할 텐데.
Aἰqίopeϛ te {qeoὺϛ sfetevrouϛ} simoὺϛ melanάϛ te
Θrh'ikevϛ te glaukou`ϛ kai` purrouvϛ {fasi pevlesqai}.
ajll'eij χei'raϛ e]χon boveϛ {i]ppoi t'} hjej levonteϛ
ἤ gravyai χeivressi kai` e]rga telei'n a]per a]ndreϛ,
ippoi mevn q'ippoisi boves dev te bousi`n o`moίaϛ
kaί {ke} qew'n ijdevaϛ e]grafon kaὶ swvmat' epoίoun
toiau'q' oi'ovn per kau;toi; devmaϛ ei'χon {e]kastoi}.
The Ethiops say that their gods are flat-nosed and black,
While the Thracians say that theirs have blue eyes and red hair.
Yet if cattle or horses or lions had hands and could draw
And could sculpture like men, then the horses would draw their gods
Like horses, and cattle like cattle, and each would then shape
Bodies of gods in the likeness, each kind, of its own.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모두는, 항상 다른 견해를 지닌 사람들로부터 배우면서, 진리를 찾기 위한 비판적 - 고도로 비판적인 - 탐구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피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이것보다 말할 것이 더 많다. 우리가 말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오류 몇 가지를 수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혹시 우리 모두는 진리에 더 다가갈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제노파네스는 자신의 문제에 도달한다: 신인동형론에 대한 이 비판을 주목한 후에 우리는 신(神)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의 답변의 편린을 담고 있는 네 편의 글이 있다. 그 답변은 일신론이다 (10계명 중에서 1계명을 번역한 루터처럼, 제노파네스는 이 일신론을 공식화함에서 복수 ‘신(神)들’을 사용할지라도; B23, B26, B25, B24):
신(神)들과 인간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의 신(神)만 가장 위대하다.
정신에서도 몸에서도 그는 인간과 닮지 않았다.
항상 한 곳에 그는 머무른다, 움직이지 않고.
또한 그가 이제나 저제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 것은 합당치 않다.
만물 위에서 노력하지 않고 그는 생각과 의도로 지배한다.
그의 모든 것은 시각이다; 모든 것은 지식이다; 모든 것은 청각이다.
ei|" qeov", e]n te qeoi'si kai; a;nqrwvpoisi mevgisto"
ou]ti devma" qnhtoi'sin o;moivio" ou;de; novhma.
ai;ei; d' e;n tau;tw'i mivmnei kinouvmeno" ou;devn
ou;de; metevrχesqaiv min e;piprevpei a]llote a]llhi.
a;ll' a;pavineuqe povnoio novou freni` pavnta kradaivnei
ou|lo" o;ra}i, ou|lo" de; noei', ou|lo" dev t' a;kouvei.
One God alone among gods and alone among men is the greatest.
Neither in mind nor in body does he resemble the mortals.
Always in one place he remains, without ever moving.
Nor is it fitting for him to wander now hereto now thereto.
Effortless over the All he reigns by mere thought and intention.
All of him is sight; all is knowledge; and all is hearing.
이 시구는 제노파네스의 사색적 신학을 설명하는 글이다. (DK B 25의 ‘그가 지배한다’라는 나의 번역에 관해서는 이 논문의 부록 1을 참조하라.) 이 시구는, 처음에 그를 신인동형론을 거부하게 만들고 그 다음에 일신론을 발견하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신(神)은 정신과 육체에서 인간과 다르다는 통찰로 이끌었던 그가 최고 권력의 논리를 분석한 결과에 대하여 보고한다.
이 완벽하게 새로운 이론이 제노파네스에게는 난제였던 문제의 해결이었음은 분명하다. 사실상 그 새로운 이론은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인 우주의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지식심리학에 관하여 지식이 있는 어떤 사람도 이 새로운 통찰이 제노파네스에게 계시처럼 틀림없이 출현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론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분명하고도 솔직하게 출발했다. 그것은 전례가 없는 자기 비판적 승리로 그가 지닌 지적(知的) 솔직함과 그가 지닌 겸손함의 승리였다. 제노파네스는 이 자기비판을 완벽하게 자신의 특징인 방식으로 일반화했다: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낸 이론에 대하여 자기가 발견한 것은 - 그 직관적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그 이론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이론에도 틀림없이 적용된다는 것이 그에게 분명했다: 모든 것은 추측일 따름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바 그 이론은, 심리학적으로 그가 자신의 이론을 추측으로 간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을 폭로한다.
키케로(Cicero)와 (A34) 섹스투스 엠피리쿠스 (Sextus Empiricus) (A35),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A31)와, 자신의 저서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위에 인용) 제노파네스는 자신의 유일신을 우주와 동일시했다고 부언했던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이후 그리스철학 연구가들은 그가 주장하는 유일신의 형상은 구형(球形)이라는 교설을 제노파네스에게 귀속시켰다. 나는 두 가지 주장 모두 오류하고 생각하는데 후자(後者)는 아마도 일원적인 엘레아학파에 대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적 주장의 과장에 기인하는 것이다. 3부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제노파네스가, 칼 라인하르트가 제안하는 바와 같이, 늙어서 파메니데스를 만났을 테지만, 그가 훨씬 어린 파메니데스로부터 배운 것은 이 무리의 학자들이 믿는 것과 아마도 다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늙은 나이에 배웠을 최대의 것은 지구는 구형(球形)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를 사로잡았을 것이고, 파메니데스의 초기 천문학적 발견과 관련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제노파네스의 이름이 신(神)의 형상이 구형(球形)이라는 옹호될 수 없는 견해에 달라붙게 되었을 것이다.
5 제노파네스의 지식론
이제 나는 제노파네스의 지식론으로 향한다. 우리는 이전에 그가 고도로 비판적인 사상가였음을 알았다: 직선적이지만 미묘하고, 거의 기만적인 단순성과 강건함을 지닌 매우 간단한 언명으로 제시된 충분히 사색되어 고도로 말끔해진 논증들로써 명징한. 나는, 물론, 그가 2행으로 아낙시메네스의 이론을 수정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의 신학적 비판 - 신인동형론이 지닌 터무니없음을 심지어 한 마디 비판도 없이 폭로하는 방식으로 그가 신인동형론을 제시한 것 (그가 - 다시 놀라운 몇 마디의 말로 - 공개적으로 비판하여 거칠게 공격할 수 있다할지라도).
DK 21B38의 2행을 고찰하자:
신(神)이 엷은 노란색의 꿀을 만들기로 작정하지 않았다면
많은 사람들은 무화과 열매가 훨씬 더 달콤하다고 생각할 텐데.
ei; mh; χlowro;n e]fuse qeo;" mevli, pollo;n e]faskon
gluvssona su}ka pevlesqai.
If God never had chosen to make the light-yellow honey,
Many a man would think of figs as being much sweeter.
물론, 이것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머릿속에 ‘무화과 열매보다 더 달콤한이 이제 그에게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꿀과 비교함으로써 무화과 열매의 달콤함이라는 충격이 감소되기 때문이다’라고 부언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부언한다면 당신은 정신적으로 활발하도록 영향을 받은 것이다 - 자신의 제자를 계발하고 싶어 하는 모든 스승의 목표 중 하나. 그러므로 이 시구는 아마도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러나 묘사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시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명징하고, 노력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 실제로 매우 적은 노력 - 누구에게도 오해의 여지가 없다.
이 경구의 내용에 관하여, 어떤 사람들은 제노파네스가 여기서 지식론적 상대주의를 설교하고 - 혹은 가르치고 -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해이다. 반대로 이 경구의 내용은 심리학적 상대주의일 따름이다: 사실성을 (객관적 사실성) 판단하려고 노력하면서, 그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당신의 즉각적인 반응이 흔히 비교에 의하여 오염되어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이 20 드라크마를 기대했을 때 100 드라크마는 많은 금액이지만, 당신이 200 드라크마를 기대했을 때 100 드라크마는 실망스러운 금액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100 드라크마는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금액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객관적 세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고 싶어 한다면, 제노파네스가 가르치는 바, 당신 자신을 알고 당신 스스로 소유한 인상(印象)을 불신하라! 분명히 쉬운 사례로 설명된 초기 비판적 경험주의 (critical empiricism)이다.
그러나 이 시구 속에는 더 많은 것이 있다: 이 시구는 아마도 최초의 성질과 두 번째 성질 사이를 구별하는 최초의 단계를 의미한다. 즉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 시구는 한편으로 훨씬 뒤에 ‘두 번째 성질’이라고 불린 것과 다른 한편으로 ‘최초의 성질’이라고 - 어떤 감각의 초기화에 기인한 성질 - 불리는 것을 더 잘 구별하고 있다.
제노파네스는, 아마도 3부에 기술된 우주 문제에 자신이 계시와 같은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비판적 지식론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4행의 아름다운 시구로 서술한다 (내가 그 시구를 운문 형태로 번역하려면 6행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 철학사에서 B34만큼 비판적이고 자기-비판적이고 올바르며 진실한 글을 없다: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관해서는 아무도 그 진리를 알지 못했다,
또한 누구도 그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신(神)들에 대해서도
또한 내가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연히 누군가가 완벽한 진리를 말한다할지라도
그 자신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하리라;
이유인즉 모든 것이 상상으로 짜인 거미줄이기 때문이다.
kaiv to; me;n ou\n safe;" ou[ti" a`nh;r [iden ou`dev ti" e]stai
ei;dw;" a;mfi; qew'n te kai; a]ssa levgw peri; panvtwvn:
eij ga;r kai; ta; mavlista tuvcoi tetelesmevnon eijpwvn,
aujto;" o{mw" oujk oi\de: dovko" dvejpi; pa'si tevtuktai.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The perfect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아래에서 나는 먼저 나의 번역을 옹호할 것이고, 그 다음에 나의 번역을 해설할 것이다.
(a) to; safevs를 ‘확실한 진리’보다는 ‘확실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아마도 원문에 다소 근접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 ‘확실한 진리 (certain truth)’가 영어에서 좀 더 나을 뿐만 아니라 보다 명시적이어서 계몽된 교사로서 제노파네스의 의도에 보다 근접한다.
나는 또한 나의 번역 5행에 ‘진리(truth)’라는 말을 넣었다. 여기서 나는 다시 원문에 의하여 (tetelesmevnon eijpwvn = ‘가장 완벽한 현실성을 말하기 [speaking the most perfect reality]’) 그 말이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자신들이 그 글을 번역하면서 동일하게 ‘진리’라고 두 번이나 번역했던 커크(Kirk), 레이븐(Raven), 스코필드(Schofield)의 도움을 나는 심지어 요청할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2판, 캠브리지, 1983, 179쪽). 그들은 B34를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신(神)들에 대한 진실과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진실을
아무도 모르거나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이유인즉 누군가가 우연히
완벽한 진리를 말한다할지라도, 자신이 그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물에 대하여 느낌만 형성된다.
No man knows, or ever will know, the truth about
the gods and about everything I speak of; for even if one
chanced to say the complete truth, yet oneself knows it
not; but seeming is wrought over all things.
나는 그들의 번역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비록 내 자신의 번역을 내가 선호할지라도), 번역상의 의미는 나의 번역과 동일하다고 나는 느낀다: ‘이유인즉 누군가가 우연히 말한다할지라도 (for even if one chanced to say)’는 나의 번역 ‘그리고 우연히 누군가가 말한다할지라도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가 진실로 보다 원문에 다소 가깝겠지만, 차이점은 미미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러나 만물에 대하여 느낌만 형성된다 (but seeming is wrought over all things)’는, 가령, ‘이유인즉 모든 것이 상상의 작품이다 (For all is guesswork)’나 ‘모든 것으로 섞어 짠 상상 (guesses interwoven with everything)’보다 훌륭하지 못한 영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후자인 두 가지 번역 때문에 나는 시적(詩的) 자유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했다: ‘이유인즉 모든 것이 상상으로 짜인 거미줄이기 때문이다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짜다(weave)’를 의미하는 teuvcw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오디세이(odyssey) 7.235와 8.276-81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을 참조하라.
동일한 행에서 나는 dovko"를 (명사로서 거의 존재하지 않는) ‘느낌(seeming)’보다는 ‘추측(conjectures)’으로 번역하고 싶다; 그리고 ‘상상(guesses)’을 나는 여기서 ‘추측(conjectures)’에 대한 시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이로 인하여 나의 번역에 대한 상세한 언어적 옹호는 끝난다.
(b) 나는 이제 글의 내용을 해석하겠는데, 나의 해석은 동시에 헤르만 프렌켈 (Hermann Fränkel)에게서 기인하는 공격에 대하여 B34의 의미를 옹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좁은 지식에도 이 공격은 제노파네스의 가장 중요하여 정말로 걸작인 4행의 중요성을 파괴하려는 가장 정교한 노력으로 보인다.
제노파네스의 이 시구에는 인간의 지식이 지닌 추측성 특징에 관한 이론 이상의 것이 담겨있다. 이 시구에는 객관적 지식 이론이 담겨있다. 이유인즉 여기서 제노파네스는,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일는지도 모르지만 나도 다른 사람 누구도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객관적임을 의미한다: 진리는, 그 일치가 유효한지를 내가 알던지 모르던지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아는 것과 별개로 일치가 유효함을 의미한다: 진리는 객관적이다; 내가 말한 것의 진실이나 거짓은 사실에만 달려있다.
게다가 이 시구에는 또 다른 매우 중요한 이론이 담겨있다. 이 시구는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확신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있다. 이유인즉 제노파네스가, 심지어 내가 가장 완벽한 진리를 말할 때에도 나는 그것을 확신적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것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가설적 의미의 ‘안다(know)’에서 진리를 알 것이지만, 우리는 그 진리에 도달했음을 알 수 없다. 진리에 대해서는 무오류의 기준이 없다. 우리가 오류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리는 실제로 확신할 수 없거나 확신하기 어렵다: 우리가 지닌 이성은 완벽하게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제노파네스는 지식론적 비관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연구가였다; 그래서 자신의 긴 생애동안 그는, 비판적 재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추측 특히 자신의 과학이론을 개선시킬 수 있었다. B18에서 제노파네스는 자신의 연구 자유로 불릴 것을 언명한다:
처음부터 신(神)들은 모든 것을
인간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연구를 통하여 인간들은 사물을 더 잘 알게 되리라.
ou]toi a;p va;rch'" pavnta qeoi` qnhtoi'sv u;pevdeixan,
+a`lla` crovnwi zhtou'nte" e`feurivskousin a]meinon.
The gods did not reveal, from the beginning,
All things to the mortals; but in the course of time,
Through seeking they may get to know things better.
제노파네스는 또한 ‘사물을 더 잘 아는 것 (to know things better)’이 의미하는 것을 설명한다: 그는 객관적 진리에 대한 근접을 의미한다: 진리에 대한 가까움, 진리와의 유사성. 이유인즉 (B35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진리와 유사하다고 추측하자 (Let us conjecture that these things are like the truth).
(내가 여기서 ‘추측’으로 번역하는) doxazein이라는 용어를 그가 이 글 속에서 사용할 때, 제노파네스는 신(神)에 대한 자신의 일신론을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제노파네스의 인간 지식론이 다음과 같은 요점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 우리의 지식은 진술로 구성된다.
2. 진술은 사실이거나 거짓이다.
3. 진리는 객관적이다. 진리는 진술의 내용과 사실의 일치이다.
4. 심지어 우리가 가장 완벽한 진리를 표현할 때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신하여 알 수 없다. 우리는
충분한 이성을 지닐 수 없다.
5. 통상적 의미에서 ‘지식’이란 ‘확실한 지식’이기 때문에, 지식이란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추측성 지식만 있을 수 있다: ‘이유인즉 모든 것이
상상으로 짜인 거미줄이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우리가 지닌 추측성 지식 속에는 보다 나은 것으로 향하는
진보가 있을 수 있다.
7. 더 우수한 지식은 진리에 더 우수한 근접이다.
8. 그러나 그 지식도 항상 추측성 지식으로 남는다 - 상상으로 짜인
거미줄.
제노파네스의 지식론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확신을 분명하게 구별했음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객관적 진리는, 우리가 알든 - 확실하게 알던 - 모르든, 사실과 진술의 일치이다. 그리하여 진리는 확신이나 혹은 확실한 지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어떤 일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틀림없이 진리를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어떤 일을 추측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알지 못하지만 그의 추측이 실제로 사실인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제노파네스가 암시하는 바는 아무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많은 진리들이 - 그리고 중요한 진리들 -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추측할지라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진리들. 그는 더 나아가 암시하기를 심지어 추측도 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말에서 그는 옳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우리가 진리를 소유한다면 진리는 우리들에게 중요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많다; 다시 말해서 진리를 확실하게 안다면. 그러나 추측성 지식의 존재를 아는 것이 - 그래서 소유되지 않은 진리 -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오직 행운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진리들이 있다; 다른 진리들은 열심히 연구해서 접근할 수 있다. 우리의 길은, 거의 항상, 실수를 통과하며 굽어있다; 그리고 진리가 없다면 실수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실수가 없으면 오류가능성도 없다).
내가 방금 기술한 견해 몇 가지는 내가 제노파네스의 글을 읽기 전에 이미 나에게 명백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심지어 우리가 지닌 최고의 지식도 상상으로 짜인 거미줄이라는 것, 그 지식도 불확실하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업적을 통하여 나에게 명백해졌다.
훨씬 후에 {제노파네스가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 수중에 있는 가장 증명이 잘 된 이론 속에도 오류가 숨어 있을 것임을 또한 밝히는} 다음 경우에서 밝혀질 것처럼, 나는 과학에 관하여 케플러(Kepler)가 유사한 견해를 지녔음을 발견했다. 케플러는 화성 궤도로 티코(Tycho)가 측정한 원에서 편차를 걱정했다. 그 편차는, 그가 티코의 동료 크리스텐 롱고몬타누스 (Christen Longomontan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매우 작았다: ‘그래, 크리스텐, 내가 {편차} 8분을 의심만 하고 싶었다면, 나는 지난해인 1604년 내내 엄청난 수고를 하지 않았을 텐데.’
왜 그는 8분의 편차가 모든 측정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부정확성에 기인했다고 상정(想定)하지 않았던가? 티코의 측정이 행하여진 장소인 지구가 그 움직임이 당시 완전히 결정되지 않아서 움직이는 플랫폼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명백한 문제였다. 해답은 다음과 같다: 티코의 측정은, 화성의 해(年)로 몇 년에 걸쳐 수행되었는데, 그 측정으로 인하여 태양에서 화성의 거리가 항상 동일한 장소에서 (원 가설을 기초로 산정된) 기대되는 거리를 능가하게 되었다; 그 편차는 체계적 오차였을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케플러는 느꼈다. 그래서 그는 원형궤도와 다른 궤도를 시험했다: 둥근 배가 사과를 닮은 것과 같이 원을 닮은 비-원형궤도! 이것이, 문자 그대로, 그가 한 일이었다. 그는 원으로부터 기인하는 편차가 수학적 순수성에서 기인하는 경험적 세상의 편차라고 느꼈고, 그래서 그는 타원을 - 잘 알려진 수학적 존재 -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채소 형태를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타원이 결국 들어맞을 것임을 기억하기 전에 몇 가지 채소 모형을 시험했다. 그것은 들어맞았다.
그래서 케플러는 자신의 타원 가설을 티코의 측정으로부터 도출하지 않았다: 그는 시험과 오류제거의 방식으로 일을 했다: 추측과 논박의 방법으로.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이 경우는 또한 이 논문의 두 번째 부록의 네 번째 원리의 중요성을 - 우리 수중에 있는 가장 잘 증명된 이론에서 오류를 찾으면 가장 중대한 발견을 할 것 - 예시한다.}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의 추측성 특징이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업적 없이 나에게 분명해졌으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특징이 2,500년 전에 제노파네스에게 어떻게 분명할 수 있었는지 자문했다. 가능한 답변은 이렇다. 처음에 제노파네스는 세계와 신(神)들에 대한 호머의 묘사를 신뢰했다. 이 묘사는, 뉴튼의 묘사가 나에게서 박살난 것처럼, 그에게서 박살이 났다. 그에게는 그 묘사가 그 자신이 호모를 비판함으로써 박살났다; 호머가 만든 신(神)들은 신인동형이라는 것을 자신이 발견함으로써; 나에게서는 적어도 뉴튼의 이론만큼, 그리고 심지어 뉴튼의 이론보다 더 잘 사실을 설명하는 대체 이론을 아인슈타인이 발견함으로써, 뉴튼의 이론이 박살났다. 제노파네스는, 아인슈타인처럼, 비판을 받는 우주에 대한 묘사를 다른 묘사로 바꾸었고,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묘사가 추측성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제노파네스가 2,500년이나 나의 지식론을 앞서갔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겸손해지는 것을 배웠다. 지적(知的) 겸손의 중요성도 역시 그만큼 오래전에 제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앞서갔다.
소크라테스는 회의적 전통에 대한 두 번째이지만 훨씬 더 영향력이 있는 설립자였다. 그는 이렇게 가르쳤다: 자신이 현명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자만이 현명하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임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당신 자신을 알라 (Know thyself)!’가 ‘당신이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알라 (Know how little you know)!’를 의미함을, 그리고 정치가는 현명해야 된다거나 적어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lover of wisdom: a philosopher)’이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렇게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정치가에게 자신의 무지를 항상 인식해야 한다고 그가 요구하는 의도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가 플라톤의 변명[Apology]을 통하여 알고 있는) 이 요구가, 철학자들이 왕이 되어야 하고 왕은 완전히 훈련된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해석과 (국가[the Republic]에서) 어떻게 충돌하는지 인식한 사람은 거의 없다.
소크라테스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거의 동일한 시기에, 서로 독립적으로, 동일한 윤리적 발견을 해냈다. 두 사람은, 매우 유사한 말로, 이렇게 말한다: ‘불의를 저지르느니 불의를 당하는 게 낫다’ (데모크리투스, DK 68B45). 볼테르(Voltaire)가 나중에 가르친 바와 같이 관용을 낳았던 것은 - 우리가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과 결합되어 - 이 통찰이었다.
6 제노파네스의 도덕에 관하여: 신(神)들에 대항한 문명 옹호
{이제 나는 제노파네스의 자기비판적 철학 즉, 그의 윤리적 자세의 중요성을 토론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하여,} 나는 먼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반대의견을 고찰하겠다. 제노파네스와 데모크리투스와 소크라테스가 아는 게 없었다는 게 옳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지식결핍을 인정했다는 것은 정말로 지혜였고, 아마도 그들이 진리연구의 자세를 취했다는 것은 훨씬 더 현명한 일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 더 정확하게는 동시대의 과학자들 - 여전히 진리 연구자이지만, 오늘날 과학자들은 연구자일 뿐 아니라 발견자이기도 하다. 이유인즉 그들이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과학적 지식이 심각한 문제가 될 정도로.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 부족이라는 소크라테스식 주장을 기초로 우리의 지식론을 아직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수 있다.
그 반대의견은 옳지만 다만 네 가지 매우 중요한 제한사항이 있다.
첫째: 현대과학이 많이 알고 있다는 의견은 물론 옳지만 여기서 사용된 ‘지식’이라는 개념은, 명백하게 무의식적으로, 제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가 지녔던 개념과 완전히 다르고, 일상적인 사용에서 강조하여 사용될 때 부여되는 의미와도 다르다. 이유인즉 우리가 비의도적인 방식으로 지식에 관해서 말할 때, ‘지식’으로 우리는 항상 ‘확실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누가 ‘나는 오늘이 화요일임을 알고 있지만 나는 오늘이 화요일임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진술 전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후반에서 철회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은 확실한 지식이 아닐 따름이다. 그 지식은 항상 수정에 노출되어 있다. 그 지식은 시험될 수 있는 추측으로 구성된다 - 기껏해야 가장 엄격한 시험에 부쳐졌던 추측; 그러나 역시 추측만으로 구성된다. 그 지식은 가설적 지식이요 추측성 지식이다. 이것은 나의 첫 번째 비평이고 그 자체로 제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통찰을 현대과학에 적용하는 것을 완전히 옹호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나의 두 번째 의견은 이렇다: 거의 모든 새로운 과학적 업적과 함께 - 과학적 문제에 대한 모든 가설적 해결책과 함께 - 미해결된 문제의 숫자와 그 문제들이 지닌 난해성의 폭 모두가 증가한다; 그것들은 해결책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한다. 그래서 우리가 지닌 추측성 지식이 유한한 반면, 우리의 무지는 무한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다. 미해결된 문제에 대하여 느낌을 지니고 있는 진정한 과학자에게는, 세상은 점점 더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나의 세 번째 비평은 이렇다: 우리가 제노파네스나 소크라테스보다 오늘날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알고 있다’를 주관적 의미에서 해석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옳지 않다. 상상컨대 우리들 중 누구도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는 더 많은 것이 알려졌다는 말을 들었으며 또한 우리는 더 다양한 것들을 알고 있다. 우리는 특정 이론을, 특정 가설을, 특정 추측을 다른 것들로 대체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더 나은 것들로 대체했다: 진리에 보다 더 근접했다는 의미에서 더 나은 것들.
이 이론과 가설과 추측의 내용은, 주관적이거나 인격적인 지식과 반대로, 객관적 의미에서 지식으로 불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물리학 백과사전의 내용은 비인격적 즉, 객관적인 지식이다 - 여전히, 물론 추측성 지식일지라도. 그러나 그 지식은 가장 박식한 물리학자가 혹시 ‘알고 있을’ (그 단어의 여하한 의미에서) 수 있는 지식을 훨씬 능가한다. 물리학자가 알고 있는 것은 - 즉, 더 정확하게, 추측 - 그가 지닌 인격적 즉, 주관적 지식으로 지칭될 것이다. 비인격적 즉, 객관적 그리고 인격적 즉, 주관적 지식 모두는 대체로 가설적이어서 개선이 가능하다. 그러나 오늘날 비인격적 지식은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있는 지식을 훨씬 능가할 뿐 아니라, 비인격적인 객관적 지식에서의 진보가 매우 빨라 인격적 지식은 적은 분야에서만 그리고 짧은 기간 동안에만 유지될 수 있다; 그 지식은 항상 대체된다.
여기서 우리는 제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가 심지어 오늘날에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네 번째 이유를 지니게 된다. 이유인즉 이 낡은 인격적 지식은 거짓으로 판명된 이론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낡은 지식은 그러므로 명백하게 지식이 아니며, 적어도 그 단어의 통상적 의미로도 지식이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심지어 오늘날에도 소크라테스식 통찰인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고, 거의 모른다 (I know that I do not know, and hardly that)’가 매우 논리적으로 적용될 수 있음을 - 내가 생각하기에 소크라테스의 시대보다 훨씬 더 그러한 - 증명하는 네 가지 고찰 사항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관용을 옹호하여 이 소크라테스식 통찰로부터 에라스무스(Erasmus)와 몽테뉴(Montaigne)와 볼테르(Voltaire)와 레싱(Lessing)이 도출해냈던 윤리적 결론을 도출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심지어 더 나아간 결론을 도출할 것이다.
모든 이성적 토론은, 다시 말해서, 진실을 찾는 데 바쳐진 모든 토론은 원칙에 근거하는데 그 원칙은 실제로 윤리적 원칙이다. 나는 그 원칙 중 세 가지를 서술하고 싶다.
1. 오류가능성의 원칙. 혹시 내가 틀리고 혹시 당신이 옳다; 그러나 물론 우리 모두 틀릴지도 모른다.
2. 이성적 토론의 원칙. 우리에게는, 물론 가능한 한 비인격적으로, 논쟁의 대상인 다양한 (비판 가능한)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시험할 필요가 있다.
3. 진리 접근의 원칙. 그런 비판적 토론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는 거의 항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거의 항상, 심지어 우리가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의 이해를 향상시킬 수 있다.
이 세 가지 원칙이 지식론적인 동시에 또한 윤리적 원칙임은 괄목할만하다. 그 까닭은 그 원칙들이, 다른 것들 가운데서, 관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게다가 내가 배우기를 원한다면 진실을 위하여 나는 당신을 관용할 뿐 아니라 당신을 잠재적 동료로서 인정해야 한다; 인간의 잠재적 통합과 모든 인간의 잠재적 평등은 우리가 문제를 이성적으로 토론하려는 우리의 의지에 전제조건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심지어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에도, 토론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원칙이다. 그 까닭은 이성적 토론이 우리의 오류 몇 가지를 밝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윤리적 원칙이 과학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모든 그런 윤리적 원칙 중 가장 중요한 원칙은, 객관적 진리가 모든 이성적 토론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규제적 개념이라는 원칙이다. 더 나아가 윤리적 원칙은 진리를 연구하는 우리의 약속과 진리근접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구체화 한다; 그래서 지적(知的) 솔직성과 오류가능성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약속을 구체화 하는데, 그 중요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기 비판적 태도와 관용에 다다른다. 우리가 윤리학 분야에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논문의 부록 2에서 내가 새로운 전문적 윤리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구성하는 12가지 원칙을, 제노파네스가 2,500년 전에 언명하여 실행에 옮겼던 관용과 지적[知的] 솔직성에 대한 요구와 밀접하게 연관된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나는 이것을 밝혔다.}
위에 밝혀진 바와 같이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진리를 목적으로 한 ‘연구 자유’는 지식론적이고 윤리적인 요구나 원칙 양쪽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 요구나 원칙은 비판과 자기 비판을 주요 동력으로 한다. 진리 연구와 비판적 방법론 사이의 이 동력은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을까? 아마도 음유시인으로서 제노파네스가 경험한 결과로서 발생했는데, 제노파네스는 헤시오드(Hesiod)와 호머(Homer)의 고전 작품을 암송했지만 또한 틀림없이 자작시를 포함하여 동시대 시인들의 작품을 암송했고 그 장소는 그런 시 암송에 다양한 기대와 생각을 지닌 매우 많은 문화들이 마주치는 지중해 지역이었다.
제노파네스의 시대에 문화충돌이 예술세계에서도 느껴질 수 있었고, 그래서 그의 직업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령 동양적 드라마와 그리스적 드라마 사이에서 발견하는 일은 오랫동안 연구할 필요도 없었다. 예를 들어 동양 극작가들은 필연적으로 신성한 작업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신(神)들 앞에 절을 하는 경배 몸짓을 포함시켰는데 이런 종류의 복종은 그리스 연극의 전통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리스 극작가들은 신(神)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심지어 신(神)들이 무의미하게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신(神)들은 더 이성적이고 책임감을 느끼라는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폭군들이어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당신들은 우리와 장난을 치지만, 우리 인간들은 당신의 장난을 폭로할 것이다!’
내가 제안하는 바, 신(神)들의 가족과 그들의 변덕에 대항하는 이 문명 방어로 인하여 제노파네스는 세상의 존재와 인류애로 이루어진 세상의 존재는 공평이나 정의로움에 달려있다는, 그리고 최고 권력의 윤리는 전능한 신(神)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견해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견해는 전쟁에 반대하는 우리 인간의 평화연구와 우리의 투쟁에 대한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나는 더 나아가 제안하는 바, 제노파네스는 이 견해를 지식론과 학의 영역에 까지, 우리의 진리 연구까지 가져갔다.
내가 보기에 제노파네스의 일신론은 여기서 기독교적 일신론이나 유태교적 일신론과 동일하거나 더 훌륭하다 (구약의 하느님은 질투하여 복수를 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제노파네스의 도덕은 과학과 정치에서의 현재 상황을 훨씬 더 잘 특징짓고, 영향력이 있지만 무책임한 몇몇 지식인들의 암호인 ‘무슨 일이든 통한다 (anything goes)!’와 같은 현대적 구호가 표출하는 얼빠진 짓보다 분명히 우선될 수 있다.
7 제노파네스는 역사적 서술의 시조인가?
{2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나는 헤로도투스의 글에 있는 한 구절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이 부의 질문에 답변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끝을 마치고자 하는데 헤로도투스는 서양 문명의 한 시기에 대하여 최초의 역사적 설명을 내놓았다고 전통적으로 간주된다.}
자신이 92살이 되었을 때 쓴 제노파네스의 글로부터 (B8과 B22) 우리는 그가 아낙시맨더가 사망한 무렵에 (기원전 546년) 밀레토스를 떠났으며, 그 다음 해 그가 25살이었을 때 그가 여생동안 추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감동적인 글은 또한 우리에게 제노파네스가 조국을 떠났던 해와 (기원전 545년) 그가 태어난 해를 (기원전 570년) 우리에게 알려준다:
내가 그리스의 여러 곳을 통하여 이곳저곳으로 삶의 짐을
끌고 다닌 게 이제 67년이 되었구나.
내가 태어난 해로부터 세어보니 나는 당시 25세였지
- 내가 아직도 올바르게 기억한다면.
이것은 사람이 겨울에 난롯가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이지,
편안하게 누워서, 달콤한 포도주를 음미하고 견과를 우물거리며:
‘친구여, 당신은 누구며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다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나이는 몇이고 메데아 인이 침공했을 때
당신은 몇 살이었던고?’
Sixty-seven years it is now that the burden of life
I am dragging to and fro through the regions of Greece.
Counting the years from the day of my birth, I was then twenty-five
- If I still correctly remember.
This is the stuff one best talks about by the fire in winter,
Comfortably inclined, sipping sweet wine and nibbling some nuts:
'Tell me, who are you, my friend, and where do you come from?
How old are you, my dear, and what was your age
At the time of the Median invasion?'
두 번째 글에서 제기된 마지막 질문은, 페르시아 왕 사이러스(Cyrus)가 메데아인들과 리디아인들을 상대로 벌인 전격 정복 전쟁의 결과로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에게 덮치어, 심지어 그들이 페르시아인들과 메데아인들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기 오래 전에 기습을 당하여 강제로 소아시아 지역에 있는 자신들의 정착지를 떠나야 했던 재앙을 언급한다. 이 사건들은 제노파네스가, 엘레아(Elea: Hyele) 건설에 관한 설명이 또한 들어있는 긴 서사시에서 제노파네스가 기술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콜로폰(Colophon) 설립을 기술했던 또 다른 서사시가 실종된 것처럼, 이 서사시도 실종되었다.
이 혹독하지만 또한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에 관하여 알려진 것이 헤로도투스가 저술한 역사(History) (I.163-7)에 있는 상세한 서술이다. 그것은 자유에 대한 사랑이 자신의 국가의 대한 사랑과 충돌하는 이야기인데 그 국가 안에서 예속에 저항하려는 결심이 궁극적인 패배로 끝난다. 그 이야기는 간략하게 이렇다. 메데아 장군 하르파구스(Harpagus)가 지휘하는 페르시아 군대가 이오니아를 침공하여 포카이아(Phocaea)를 포위했을 때 (제노파네스는 하르파구스 장군을 ‘메데아인’이라고 언급한다), 포카이아의 모든 시민들은 만장일치로 예속되느니 떠나겠다고 결정한다. 그들은 분명히 많은 수의 선박과 (척당 50개의 노가 장착된 아마도 60척 이상의 배) 함께 떠나서 키로스인들로부터 사람이 살고 있던 몇 개의 작은 섬을 구매하려고 했다. 섬 구매에 실패하여 그들은 포카이아로 돌아왔는데 고향에서 그들은 하르파구스가 남겨놓았던 수비대를 살해했다. 그 다음에 그들 사이에 깊은 분열이 일어났다: 그들 모두가 함께 행동하겠다는 훌륭한 서약을 했을지라도, 시민들 절반이상이 그 서약을 어겼다. 시민들의 한 부분은 고향을 그리워하여 포카이아에 잔류하기를 선택했고, 우리가 나중에 들은 바와 같이, 다른 시민들은 코르시카 (Corsica: 키르노스[Kyrnos])를 향하여 출발했는데 그 이유가 그 섬에 관해서가 아니라 영웅 키르노스(Kyrnos)에 관하여 말하는 왜곡된 신탁(神託) 때문이었다. 코르시카에서 그들은 ‘먼저 와 있던’ 동포들과 합류했다. 거기서 그들은 정착하여 가옥을 짓고 사원을 건설했다. 나중에 그들 중 몇몇이, 제노파네스도 그들에 끼었는데, 동료 시민들 몇몇이 이웃인 티르헤니아인들 (Tyrrhenians)과 카르체도니아인들 (Carchedonians)에게 불의한 짓을 저지른 후에 남부 이탈리아를 향해 떠났다. 나폴리 남부 이곳에서 그들은 엘레아(Elea) 시를 건설했는데, 그 도시에서 제노파네스는 아마도 위에 제시된 글 두 편을 썼고, 그 글은 초기 콜로폰 생활 방식에 대한 그의 비평과 함께 우리가 지닌 유일한 자서전적 글인 듯하다.
그러나 테오도르 곰페르츠 (Theodor Gomperz)가 옳다면, 헤로도투스가 쓴 이야기는 아마도 제노파네스가 자신의 생애의 매우 비극적이고 실제로 파멸적인 기간을 자서전적으로 설명한 것에 대한 개요이다. 이 흥미로운 가설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증거가 있는 것으로 나는 느낀다.
(i) 헤로도투스는, 간혹 그러는 바와 같이, 자신은 이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어서 안다고 (예를 들어 I. 170의 첫 문장 참조) 말하지 않는다.
(ii) 헤로도투스에게 주관심사는 이런 문맥에서 이오니아와 사이러스 그리고 하르파구스의 이야기이다; I.162-4는 이 ‘계획’에 들어맞는다.
I.165와 함께 중요한 일탈이 시작된다: 여기서 그의 관심사는 포카이아 피난민들의 비극적 이야기로 방향을 튼다.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 이야기는 흥미롭고 비극적일지라도 - 나중의 글이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헤로도투스가 어떤 요점을 설명하는 것처럼 개략적으로 쓰였다. 그리하여 특히 I.165 안에서 코르시카와 알랄리아(Alalia) 건설에 대한 포카이아인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시작이 마지막 부분에, 그 장이 끝나기 전에 삽입되기 때문에 첫 문장이 매우 길어진다. 그 다음에 포카이아인들이 왜 아르가소니우스(Arganthonius)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는지를 설명하는 또 다른 짧은 문장이 나온다. 이 모든 것은 긴 시가 잘려서 이용당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그다지 잘 되지 않는다: 생략된 것을 삽입하기 위하여 수정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가해져야 하는데, 그 까닭은 그렇지 않으면 I.166의 첫 부분에 있는 나중 구절이 (tw'n pro?teron ajpikomevnwn: 먼저 온 사람들 - 역자 주) 일관적이지 못하거나 틀림없이 오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 도착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먼저 온’ 사람들에 관하여 말하는 구절은 (I.166) 또한, 그 이야기가 실제로 먼저 도착했던 포카이아인들과 동반해서가 아니라 나중 이민자들의 무리와 함께 항해했던 사람의 개인적인 보고서임을 암시한다.
(iii) 헤로도투스에게 이야기의 출처가 있었다면, 그 출처는 제노파네스의 서사시였을 수 있을까? 헤로도투스는 그 사건이 일어난 지 100년 후에 자신의 저서 역사를 썼는데 의심할 바 없이 기록된 문건을 얻으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또 다른 문건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역사의 아버지’보다 앞서서 약 100년 전에 역사를 썼던 저술가는 쉽게 접근되지 않았다; 그리고 제노파네스가 그런 저술가였음을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제노파네스가 정말로 지금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의 출처일 것 같다.
원문에는 함축적이거나 명시적인 몇몇 비평이 들어있다. I.165의 첫 문장에는 키오스인들(the Chians)의 이기적인 태도가 언급되어 있다. 나중에 포카이아인들 절반 이상이 서약을 위반했을 때 그 위반은 분명히 비난을 받았지만 그 서약을 위반했던 사람들의 약점에 대해서는 비난이 매우 관용적이었다. 간략한 서술은, 현장에 있었고 자신이 원칙적으로 비난했던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지닌 한 사람의 보고서로부터 나온 개괄로 읽힌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제노파네스의 인간적인 도덕성을 생각한다.
헤로도투스는 이 이야기의 비극적 사건에 감동을 받았던 듯하고, 그리하여 그는 그 이야기를 매우 간단하게 서술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주제로 또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한 사람으로서 나는 - 다른 한 사람이자 나의 선배 (아무튼 헤로도투스의 이야기를 심지어 언급하지 않았던) 곰페르츠(Gomperz) - 그 이야기의 출처는 제노파네스의 서사시라는 느낌을 지니고 있는데, 제노파네스는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항하여 동료애 서약을 했던 포카이아 시민들 중 6분의 1 이하가 살아남았던 참혹한 모험을 목격하고 참가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헤로도투스의 이야기에 대한 이 해석이, 어떻게 서구 과학과 철학이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그것이 고도로 박식하고 교육을 받은 피난민들에 의하여 그리스 본토와 그리스 전역으로 옮겨졌는지에 대한 설명과 잘 들어맞는다. 이 이민자들 중의 가장 중요한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는 사모스(Samos)의 피타고라스(Pythagoras), 콜로폰의 제노파네스, 클라조메나이(Klazomenai)의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그리고 할리카르나수스(Halicarnassus)의 헤로도투스를 꼽을 수 있다. 이 위대한 과학자들과 학자들의 독특한 문화적 발달이 우리 서양 문명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이 내가 (제노파네스가 동료 시민들을 위하여 노래했던) 그 비극적 사건이 낳은 매우 다행스러운 비의도적인 결과라고 생각함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부록 1
위 4부 제노파네스의 글에서
(DK 21B25) 따온 인용구에 대한 주석
나는 제노파네스의 글 B25 (kradaivnei)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1) 만물 위에서 노력하지 않고 그는 단지 사고(思考)와 의도로 지배한다.
이 번역에서 ‘지배한다(reign)’라는 단어는, 다음과 같은 내 자신의 초기 번역을 포함하여,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이전 번역과 차이가 있다:
(2) 그는 노력 없이 모든 것을 흔든다, 단지 사고와 의도로써.
‘흔든다(swing)’라는 단어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창처럼 휘둘러서 움직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의 최초 동력자 (first mover)와 같은 것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리하여 ‘흔든다’ 대신 우리는 ‘움직인다(move)’를 넣는다. 번역 (2)는 헤르만 딜즈(Herman Diels의 견해를 따르는데 그는 칼 라인하르트 (Karl Reinhardt)에 의하여 칼 라인하르트의 유명한 저서 파메니데스(Parmenides: 1916년, 112쪽 이하) 안에서 혹독하게 비판을 받는다; 라인하르트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수용했던 또 다른 해석을 제시했는데 아마도 다음과 같이 영어로 번역될 것이다:
(3) 노력 없이 그는 단지 사고와 의도로써 만물을 흔든다.
라인하르트를 참고하여 이 번역은 발터 크란츠 (Walter Kranz)가 수용하였고,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글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DK, 1934-7)의 5판에 이용되었으며, 그리하여 거의 전 세계적인 승인과 권위를 획득했다.
분명히, 이 세 가지 다소 다른 번역 중에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그리스어 원전은 신중하게 분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나는 번역 (1)이 - 항상 언어학적으로 옹호될 수 있다면 - 내가 보기에 솔직하고, B25의 문맥과 (아마도 문제가 있는) 더 넓은 문맥 B23, 26, 25 및 24의 문맥 모두에 가장 잘 맞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번역 (1)은 그리스어 단어 사용과 관련하여 실제로 수용가능한가? 처음 보기에 그렇지 않다. 사전에는 kradaivnw에 관하여 ‘다스리다(rule)’라는 의미가 없다. 사전들이 불완전한 것인지, 혹은 대안으로 수정이 되어야 하는지 나는 증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리델(Liddel)과 스콧(Scott)의 사전에 (존스[Jones]가 수정함) 따르면, kradainō는 kradaō의 또 다른 형태로 이렇게 번역된다: ‘흔들다(swing), 흔들다(wave), 휘두르다(brandish)’ {특히 창을}. ‘진동하다(quiver)’ {창이 땅에 꽂힌 다음}, 그리고 또한 ‘떨게 만들다 (make tremble)’; 이스킬러스(Aeschylus)가 라인하르트의 해석을 (전게서 112쪽 각주 2에서 언급됨) 가장 잘 옹호하는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Bound), 1047행에서 기술하는 바와 같이, 심지어 지진이나 우주적 융기를 일으키다. 명백하게 라인하르트의 해석은 언어학적 관점에서 완벽하게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들어맞지 않는 듯하다.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신(神)은 매우 힘이 강해서 아미도 지구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주도 흔들리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제노파네스는 신인동형론에 대하여 혹심하게 비판했으며, 호머와 헤시오드가 자신들이 만든 신(神)들에게 모든 종류의 인간적인 악행과 죄악과 분노를 귀속시키는 것을 맹렬히 반대했다. 그래서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신(神)은 제우스(Zeus)처럼 분노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이해할 것이다: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신은, 제우스처럼, 사고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인간적이지 않다. 그 신은 자신이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슬이 묶인 프로메테우스에서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를 다루는 것은 최고의 존재에 대한 제노파네스의 개념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데, 제노파네스가 생각하는 신은 그 동물적 잔인성과 복수와 파괴의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또는 내가 보기에 그렇다). 그리고 그 신은 라인하르트가 또한 언급하는 또 다른 유명한 장면으로 (일리아드[Iliad] 1.530) 제우스가 자신의 무거운 머리를 끄덕여서 자신의 약속을 확인하여 올림포스 산 (Olympus)을 떨게 만드는 장면과도 동일하게 거리가 멀다. 그러나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신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토론하고 있는 단어는 - kradainō - 이 호머의 글에 나타나지 않아서 이 언급은 관계가 없다. 또한 충분한 정도로 호머가 기술하는 장면은 합당하지 않은데 이유인즉 제우스가 무의식적으로 올림포스 산을 흔들기 때문이다 - 올림포스 산이 흔들리는 것은 단순히 발생하는 사건일 따름이다. 이런 이유로 노력이나 노력의 결핍은 이 상황에 들어맞지 않고, 이 장면에 대한 언급은 제노파네스에게 발생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장면은 다시 신인동형론적이다; 그래서 (단순히 올림포스 산만이 아니라 만물을 떨게 만들어서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신이 제우스를 능가하게 하고 싶어 한다는) 라인하르트의 제안은 내가 보기에 제노파네스의 주요 성향과 충돌한다. 요컨대 라인하르트의 해석 (3)은 내가 보기에 전문적으로 가능하지만 문맥과 통하지 않는 듯하다.
딜즈(Diels)의 해석 (2)는, 내가 한 때 수용하여 지지했는데, 또한 내가 보기에 가능하다. kradainō는 분명히 창을 휘두른다는 의미에서 ‘흔들다(swing)’을 의미할 수 있다 - ‘창을 휘두르다’나 ‘창으로 위협하다’가 아마도 더 흔하게 의미하는 바일지라도, 호머의 글에는 비교적 많이 이 의미로 쓰인다. 아무튼 용사가 ‘무서운 창’을 (일리아드 7.213; 오디세이 19.438) 흔들어서 던질 수 있다면 신(神)은 별이 빛나는 하늘을 흔들어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도 생각하기에 이 생각은 제노파네스가 의도하는 것에 대하여 다시 너무 신인동형론적이다. 제노파네스가 말하는 신은 만물을 통치한다. 그렇다면 왜 제노파네스는 직선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가?
이것으로 나는 나의 해석 (1)을 옹호하는 데로 왔다: 제노파네스는 직접적이고 솔직한 방식으로 자신이 말하는 신이 우주를 다스리거나 주재한다고 정말로 말하는 가설로.
이 가설은 내가 보기에 두 개의 그리스 사전 단어 사이의 기묘한 (그리고 지금까지 인식되지 않은) 유사성을 고려하여 언어학적으로 옹호될 수 있다: kradainō(혹은 kradaō)가 이 단언들의 첫 번째이고 kraainō (또한 kraiainō 및 krainō의 형태로 나타나는)가 다른 한 단어이다. 첫 번째 단어 kradainō에는 기초적 의미 한 가지로서 ‘창을 휘두르다’라는 (다시 말해서 날카롭게 만든 막대기) 의미가 있다. 두 번째 단어인 kraainō나 krainō에는 기초적 의미 한 가지로서 ‘통치 막대를 휘두르다’라는 (권력의 상징이 돼버린 막대의 의미인 홀[笏: skeptron혹은 sceptre]; 소포클레스[Sophocles]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Oedipus Coloneus] 449 참조) 의미가 있어서 그러므로 또한 ‘권위를 행사하다’나 ‘주재하다’를 (전게서 296, 926; 오디세이 8.391) 뜻한다. 분명히 관계가 없지만 매우 유사한 두 가지 단어의 (kraiainō에는 긴 첫음절이 있는 반면 kradainō에서는 첫음절이 짧을지라도) 의미에서의 이 유사점은 우연일 수가 없다. 이 두 단어는, 어근에 의하여 혹은 아마도 어떤 종류의 혼동에 의하여 어떤 정도로든 틀림없이 관계가 있다. 아무튼 번역 (1)은 내가 보기에 수정이 있든 없든 언어학적으로 정당화되어 있다.
부록 2
제노파네스의 진리론에 근거한 새로운 직업윤리에
대한 몇 가지 원칙
나는 새로운 직업윤리에 대한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싶은데, 그 윤리는 내가 오랫동안 느끼기에 매우 필요하고, 제노파네스의 진리론에 근거한 원칙들이며 제노파네스의 도덕주의와 지적(知的) 솔직성과 연관되어 있다.
그런 목적으로 나는 먼저 낡은 직업윤리를 규정하고, 나중에 내가 제시하는 새로운 직업윤리와 비교하고 대조하기 위하여, 아마도 조금 그 윤리를 희화화(戱畵化)할 것이다. 이 새로운 윤리가 지식인의 직업에 관한 전통적 윤리보다 - 과학자 의사, 변호사, 기술자, 건축가, 그리고 또한 공무원,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정치가들의 윤리 - 인간행동에 대한 더 나은 지침으로 판명된다면, 나는 심지어 윤리 분야에서도 새로운 것들이 습득될 수 있다고 주장해도 될 것이다.
낡은 직업윤리와 새로운 직업윤리 모두는, 물론, 진실이라는 이성이라는 지적(知的) 책임이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그러나 낡은 윤리는 인격적 지식과 확신에 도달하는 가능성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므로 권위라는 개념에 기초를 두었다. 대조적으로 새로운 윤리는 객관적 지식이라는 그리고 불확실한 지식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둔다. 이것은 사고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데, 그와 함께 진리라는 이성이라는 그리고 지적(知的) 솔직성과 책임이라는 개념이 수행하는 역할에서의 변화를 의미한다.
낡은 이상은 진리와 확실성 모두를 소유하여, 가능한 곳에서, 증거를 통하여 진리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이 이상은,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수용되는데, 현자(賢者)의 개인적 이상과 일치한다 - 물론 소크라테스식 지혜의 이상과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창시적 선지자라는 플라톤적 이상과 일치한다: 동시에 제왕적 통치자요 권위자인 플라톤적 철학자의 이상.
지식인들에 대한 낡은 지침은 이렇다: ‘권위자가 되라! (적어도 당신이 선택한 전문적 지식의 분야에서라도) 모든 것을 알고 있어라!’ 당신이 권위자로 인정되는 순간부터 당신의 권위는 당신의 동료들에 의하여 보호되리라; 그리고 물론 당신은 동료들의 권위를 보호함으로써 답례해야 한다.
여기에 기술된 낡은 윤리는 오류의 여지가 없다. 오류는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류를 고백하는 일이 허용되지 않는다. 나는 이 낡은 직업윤리가 불관용적이라고 강조할 필요조차 없다. 게다가 그 윤리는 지적(知的)으로 항상 솔직하지 못했다: 그 윤리는 특히 의학과 정치에서 권위를 위하여 오류를 은폐하는 결과를 낳았다 (‘붕당’).
그러므로 나는 새로운 직업윤리가 과학자에게도 들어맞을 뿐 아니라 다음 12 가지 원칙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1 우리가 지닌 객관적인 추측성 지식은 한 사람이 정복할 수 있는 것을 점점 더 지속적으로 능가한다. 그러므로 권위자들이란 없다. 이것은
심지어 다양한 의학적 전문지식에도 적용된다.
2 모든 종류의 오류를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심지어 그 자체로 피할
수 있는 저 모든 오류도 피할 수 없다. 모든 과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오류를 저지른다. 오류를 피할 수 있고 그러므로 사람은 오류를 피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낡은 개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 개념 자체가 오류이다.
3 오류를 피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의무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가 오류를 피하면서 난관과,
아무도 오류 모두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함은 정확하게
오류를 피하려는 목적이다; 심지어 직관의 안내를 받는 가장 창조적인
과학자들도 오류를 피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가 직관 없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지라도 직관은 올바르기보다는 더 자주 틀린다.
4 오류는 우리가 지닌 가장 증명이 잘된 이론 속에서도 숨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오류를 찾아내는 것이 과학자의 특별한 임무이다.
잘 증명된 이론이나 많이 사용되는 실용적 기술이 오류임을 발견하면
가장 중요한 발견이 된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에 대한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의 실제적 윤리개혁이 시작되어야 하는 곳은 여기이다. 이유인즉
낡은 직업윤리의 자세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의 오류를 은폐하고
비밀로 감추고 가능한 한 그 오류에 대하여 모두 잊으려고 한다.
6 새로운 기본 원리는, 우리가 저지를 필요보다 더 많은 오류를 저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로부터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오류를 은폐하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다.
7 그러므로 우리는, 오류를 부단히 경계해야 하는데, 특히 우리 자신이
저지르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오류를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오류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것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모든 면에서 그 오류를 분석해야 한다.
8 자기비판적 자세, 솔직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개방성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지닌 의무의 한 부분이다.
9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로부터 배워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그 오류들이 우리에게 지적됨을 수용하는 것을, 정말로 감사하면서 수용하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오류에 대하여 지적할 때,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이
유사한 오류를 저질렀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과학자들도 커다란 오류를 저질렀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가 일반적으로 용인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주의가 느슨해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류를 피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여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오류를 지적할 때 우리는 그것 또한 지적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것이다.
10 우리는 우리의 정신에서 우리의 오류를 몇 가지를 발견하여 수정하는
데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특히 다른 생각을 지니고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 이것 또한 관용을 낳는다.
11 우리는 자기비판이 최고의 비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의한 비판도 필수적임을. 다른 사람의 비판은 거의
자기비판만큼 훌륭하다.
12 이성적 (혹은 객관적) 비판은 항상 명확해야 한다: 그 비판은 특정
서술인 특정 가설이 왜 거짓으로 보이는지, 혹은 특정 논증이 무효인지 명확한 이유를 내놓아야 한다. 그 비판은 객관적 진리에
보다 가까이 접근한다는 개념에 의하여 통제를 받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비평은 비인격적이어야 하지만 또한 동정적이기도 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제시하는 것을 독자들이 제안으로서 고려하기를 나는 요구한다. 그것들은, 윤리 분야에서도 또한, 제노파네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처음 발견한 사람들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바와 같이, 비판적 토론에 의하여 토론되고 향상될 것인 제안을 우리가 제시할 수 있음을 지적하는 의도를 지닌다.
과학의 추측성 특징을 다소 보편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잘못된 이론들에 대한 논박을 향한 과학자들의 자세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하는데 심지어 과학자 자신이 내놓는 잘못된 이론도 그러하다. 인간적인 오류가능성에 대한 자세의 유사한 변화가 정치 안에서와 우리가 지닌 다양한 상황 속에서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내가 민주적 유토피아를 꿈꾼다면, 그 유토피아는 국회의원 후보가 지난 해 자신은 31가지의 중대한 오류를 범했는데 겨우 13가지 오류를 고칠 수 있었다고 자랑함으로써 표를 얻을 수 있는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의 경쟁자 후보는, 자신의 오류 중 13가지를 수정했다고 시인할지라도, 겨우 27가지 오류를 발견한 반면. 이것은 관용의 유토피아가 될 것임을 나는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ESSAY 2
THE UNKNOWN XENOPHANES
An attempt to establish his greatness
Xenophanes... has become a figure in the history of Greek
philosophy by mistake.
(Harold f. Cherniss)
Xenophanes was a poet and rhapsode, and he was a historian, perhaps the real father of history. As a highly creative thinker, unusually critical, and unique in his self-criticism, he became the founder of the Greek enlightenment. He developed Anaximander's cosmology in defending it against Anaximenes. His very original rationalist theology was closely connected with the cosmology that, late in life, he may have arrived at under the influence of the astronomical discoveries of Parmenides. He was a literary critic, perhaps the first, and a moralist. He was the founder of what today are called geology and meteorology. He was an acute critic, again the first, of society and of social institutions. And of decisive importance to Western science and philosophy, he was the founder of epistemology, the theory of knowledge. {Yet most, if not all, of these great contributions to our civilization have been either attributed to somebody else, ignored, partly forgotten, or simply misunderstood. In this essay I propose a more just and historically plausible picture of Xenophanes and his achievements than I think has been drawn before.}
{Section 1 of this essay was completed by Popper himself. The other sections and the preamble have been compiled from the Author's Nachlass according to a plan described in the editorial note following the addenda to this essay. Ed.}
1 Founder of the Greek Enlightenment
The crisp lines that I have chosen as a motto stem from the pen of Harold F. Cherniss, an outstanding historian of Greek philosophy (but one, I am afraid, who may never 'become a figure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even 'by mistake'). The lines I have quoted conform to a pattern, to a tradition that allows anyone to abuse Xenophanes with impunity.
The roots of this pattern may be discerned in a masterly sneer, due to the great Heraclitus, a younger contemporary of Xenophanes (DK B40):
To know everything does not help to know anything. For it helped neither Hesiod to know, nor Pythagoras, neither Xenophanes nor Hecataeus.
Although this was no doubt intended as a sneer, unintentionally it paid homage to Xenophanes by making him a member of an exalted company. Moreover, Heraclitus credits him here with knowing much - rather too much, yet not the right thing. The right thing was, presumably, to know that day and night (and so all the opposites) were one; because day cannot exist without night, and vice versa.
But Heraclitus' sneer may tell us even more: it seems to me that it might be used as an argument - admittedly a weaker one - that Heraclitus did not look upon Pythagoras as a mere soothsayer, as a shaman, since he put him together with Xenophanes. For of all the philosophers of the period who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gods, Xenophanes was, according to Cicero, 'the only one who strongly repudiated the practice of divining the future'. This, no doubt, makes Xenophanes also a strong opponent of shamanism.
I think it was Xenophanes' leadership of the early Enlightenment which explains the pattern mentioned before: the old tradition of dismissing him. We know all too well the platitude that you cannot be a real philosopher unless you despise the Enlightenment for its total lack of depth in contrast to the Essence of all real philosophy. For if you are a philosopher, you must be deep. You must try to attain that lofty depth ('die erhabene Tiefe') that Hegel credits to himself. (This, of course, is an unmixed metaphor that works out to flatness, as Schopenhauer was quick to see. But what Hegel really meant was that he was elevated beyond everybody else because of the bottomless depth of his thought.) It is this 'knowledge of themselves' that makes some philosophers more fashionable than others. And since followers of the Enlightenment cannot attain this knowledge, they can get into the history of philosophy only 'by mistake'.
I think that Xenophanes came most close to anticipating the ideas of the European Enlightenment. But these ideas were never respected among intellectuals, who practised the misuse of ideas for the sake of enlarging their own power - especially priestly power or (later) political power. This misuse of ideas was always connected with the attempt to impress people by the depth of one's ideas - by their transcendentally (that is, non-empirically) inspired - even divine - source, by their prophetic significance.
Some of this, but very little, we can find even among the great Presocratics. When Heraclitus was called 'the obscure', it was presumably because his brilliant formulations had a prophetic flavour. But in fact, there was not much of it in them, and he may well be said to have himself belonged to the Enlightenment (compare, for example, DK B43, 44, 55, but also B47-54), although it was, no doubt, his 'obscurity' that saved him from the central accusation: he is never accused of superficiality, which is the standard accusation against Xenophanes.
It is an accusation greatly feared by the many who are superficial; and it is therefore widely used by them because they hope to distance themselves from their own superficiality - by directing the accusation towards others - and, of course, also by the use of an ununderstandable and impressive language. 'I did not understand a word; but I knew: this is philosophy' was the deep conviction of a highly gifted young physicist after he had heard Heidegger speak. (I admit: if this is philosophy, then Xenophanes entered the history of philosophy by mistake.)
Note that I do not suggest that all those who belittle Xenophanes are enemies of the Enlightenment. All the great founders of the Milesian School belonged in their different ways to a phase of the Enlightenment, including Heraclitus. And the misunderstanding of Xenophanes' cosmology discussed below in Section 3, and the attacks on him provoked by these misunderstandings, have hardly anything to do with anti-Enlightenment tendencies; they were simply due to the fact that he seemed to his critics to be completely muddleheaded. But from Galen's defence of Xenophanes it emerges that some of these critics did indeed belong to the anti-Xenophanes and anti-Enlightenment tradition.
I suggest that it was one of Xenophanes' greatest achievements that he anticipated and strongly represented all the main ideas of the European Enlightenment. Among these were the ideas of fighting for truth and against obscurity; of talking and writing lucidly and modestly; of practising irony and especially self-irony; of avoiding the pose of a deep thinker; of looking critically at society; and of looking upon the world with wonder, and with an infectious curiosity.
2 Xenophanes' early years and his encounter
with the Milesian School
Xenophanes of Colophon in Asia Minor, about three or four day's brisk walking north of Miletus, was born in 570 BC. Colophon was a wealthy Ionian city with a long literary tradition, once 'the capital of Ionia with respect to the poetry of the earliest period'. It was an inland city. Not very far to the north was the great harbour of Phocaea, and to the south, less distant than Miletus, was the great city of Ephesus. Phocaea and Miletus both played an important part in the life of Xenophanes.
In his youth Xenophanes became a pupil of Anaximander, born in 610 BC at Miletus, the greatest of the Milesian natural philosophers. Anaximander's teaching amounted to a cosmogony and a cosmology: he attempted to describe how the world originated and, in so doing, what its present structure was. His principle of explanation was clear and radical: replace the gods, the mythology of Hesiod, by something we can come to understand by studying nature. Anaximander had himself been a pupil of Thales, the founder of the Ionian School, and was one of his relatives. In sharp contrast to all other known schools, which typically would have as one of their main preoccupations the upholding of the founder's teaching unchanged, it was part of the Ionian School tradition to be critical, and to try to improve not only the founder's teaching, but also that of the later members. Perhaps for this reason, each generation produced at least one important change, and the name of the innovator is openly transmitted. This must have been due to the fact that not only were the doctrines, the theories, and the innovations traditionally transmitted, but so was a kind of second-order methodological advice: 'Try to improve upon the theories! Try to make them better, for they are not perfect!' I suggest that this self-critical methodology must have come from the founder, Thales, and that it was transmitted by Anaximander to his followers, especially to Anaximenes and Xenophanes.
One of the central problems Anaximander discussed with his students was the Earth and its stability. Thales had taught that it was floating on water (thus explaining earthquakes), water being the 'principle' and origin of all things, incapable of further explanation and not requiring any explanation itself. Anaximander changed all this. His Earth (of drumlike shape, a short circular column; DK 12A10, 11) was not supported by anything: it was freely suspended in the centre of things and kept there by a symmetrical attraction exerted by all things, in empty or almost empty, infinite space - somewhat like our ether or 'empty' space - which he called the Apeiron (apeiron = 'infinite'). And he replaced Water as the principle and origin of all things by this Apeiron (= the unbounded), an infinite fine substance that fills the entire infinite space (with which it is, indeed, identical), that Apeiron which is eternal and out of which all other substances emerge. In contradistinction to water, the apeiron is an invented hypothetical substance, and the term 'Apeiron' as used by Anaximander is the first technical term of which we have any knowledge. Although it does not, as does Thales's Water, support the Earth from below, it does undoubtedly help a little to keep the Earth suspended and balanced,
This theory of a freely suspended Earth, held in place by forces acting at a distance and apparently emanating from all heavenly bodies, is one of the boldest and most ingenious theories in the history of science. The boldness of this rather abstract theory was too revolutionary for Anaximander's more pedestrian pupil Anaximenes: he wanted to replace the Apeiron by something more familiar, namely Air - including mist and heavy clouds. The emergence of clouds from air seems to demonstrate the possible emergence of even more solid matter floating in air, such as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 - and, indeed, airborne animals such as insects and birds. Anaximenes explained the stability of the Earth by the assumption that it is supported by air, as the solid lid of a kettle is supported by steam.
I suggest that it was in this debate between Aanximander and Anaximenes over the two competing principles, Apeiron and Air, that the young Xenophanes intervened on the side of Anaximander; and intervention that led to a crucial misinterpretation (due to Empedocles and, through him, to Aristotle, as described below in Section 3). As a consequence of this misinterpretation, we are left with two sharply conflicting and indeed contradictory sets of traditional reports that constitute our historical evidence about Xenophanes' theory of the Earth, and about his cosmology.
Fortunately, we have Xenophanes' own brisk wording of his intervention in the Apeiron-Air debate (DK 21B280;
gaivhϛ me`n tovde pei'raϛ a]nw para` possi`n o;ra'tai
h`evri prosplavzon, to` kavtw d' ve`ϛ a]peiron i;knei}tai.
At our feet we can see how the Earth with her uppermost limit
Borders on air; with her lowest, she reaches down to Apeiron.
It seems to me almost obvious that with these two verses, written by a member of the Milesian School, Xenophanes was defending Anaximander's theory against Anaximenes, that is, against the theory that the Earth floats on Air. No, say these two verses: the air is, as we can see, above the upper side (or the upper surface) of the Earth; but below the lower side there is just the Apeiron - and thus no supporting body (neither Water nor Air).
Indeed (Xenophanes may have continued), the theory that the Earth is stable because it is supported by some body or bodies such as Thales' Water or Anaximenes' Air is absurd. For did not Anaximander indicate that any such theory would merely raise the question 'and what supports the water? Or, what supports the air?' We should arrive at an infinite regress. Had Anaximander (Xenophanes seems to ask) invented in vain his beautiful theory of the Earth being in a state of equilibrium, owing to its being equidistant from everything?
We may {thus} assume that B 28 can be supported by a drawing like the following:
Apeiron
air
Apeiron Earth Apeiron
Apeiron
Here the Earth is Anaximander's; and air does not support it (as it would a flat leaf) as reported of Aanximenes' theories. Writing on Xenophanes' fragment B 28, Charles H. Kahn in his splendid book on Anaximander says: 'The conception of apeiron... surrounding the world is a permanent feature of Ionian cosmology.' He also stresses that we have to translate as 'reaching... below {or down} to apeiron'. Kahn continues: 'Presumably {Xenophanes} had the theory of Anaximander in mind, but exactly what he meant is as obscure to us as it was to Simplicius (Xenoph. A47)'. Yet Xenophanes' fragment B28 is {as I have suggested above} an attempt to support Anaximander's theory of the position of the Earth against Anaximenes.
I have tried to describe the (conjectured) problem situation in which Xenophanes intervened, and to extract the implied content of the brisk two verses of his intervention, as I have translated them. (If I am right, then B28 supports independently the reports that assert that Xenophanes was a pupil of Anaximander.) However, I must admit that, so far as I know and remember the literature on Presocratic philosophy, I am alone in my interpretation - although I know of three authors who, like myself, connect the two lines of Xenophanes (DK B28) with the Milesian problem of the stability and support of the Earth. They are C. H. Kahn, F. M. Cornford and J. Mansfeld.
I now turn to discuss and defend my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With the exception of the two excellent scholars, Charles H. Kahn and Felix M. Cleve, all translations known to me have ended Xenophanes' second line somewhat as follows:
on the lower side, it {= the Earth} reaches down to infinity.
This translation - universally accepted, so far as I know, with only the exception of Kahn and Cleve - says that the Earth goes down infinitely, or indefinitely, or down into the inmeasurable, in contrast to Cleve's and my interpretation, which attributes to the Earth a lower side or end. This, in its turn, borders on the 'infinite'; which Kahn and I (but not Cleve) propose to identify with Anaximander's 'principle' - his Apeiron.
Cleve mentions in his chapter on Xenophanes neither Anaximander nor Anaximenes. Both are mentioned by Cornford, in his Principium Sapientiae, and by Mansfeld, in his commentaries on the two lines of Xenophanes and on the term 'apeiron'; and they associate them with the discussions of the Milesian School. Yet Mansfeld translates them twice in the usual way (with 'ins Unermessliche' or, op. cit., p. 208, 'hin ins Unbegrenzte'); and he comments on the term 'apeiron' that 'in this case... this Milesian concept is here in an original manner reinterpreted: not the... Air of Anaximenes is carrying the Earth, but the Earth itself is unlimited, in one direction' (that is, downward). So my interpretation is, in part, supported by Kahn and Cleve and, in another part, by Cornford and Mansfeld, but also contradicted by Mansfeld. In combination, the four seem to me to support strongly the interpretation.
My translation is, from a linguistic point of view, almost the same as Kahn's and Cleve's. Where we differ from others is clearly over the translation of a few words of the second line: 'to katō d'es apeiron ikneitai', which Kahn, Cleve and I would read, word for word, 'the lower {limit or end} to the Apeiron reaches'. The decisive point is that we construe this phrase as a parallel to 'the upper(most) limit... borders on Air'. Thus we get:
The upper limit of the Earth borders on Air,
The lower limit of the Earth reaches down to the Unlimited, {i.e. the Apeiron}.
To Kahn, Cleve and me this seems to be the most natural rendering of the Greek. And it is greatly strengthened by what I take to have been the problem situation of this important cosmological discussion in Miletus at the time. Most translators assume silently (with DK) that 'the lower' refers to 'limit', as the Greek text suggests. In this way, however, they do not only overlook the glaring contradiction that 'the lower limit' simply does not exist if the Earth goes down the unlimited, but they also take es Apeiron to mean 'to infinity' or 'infinitely', whereas 'Apeiron' is really the name of Anaximander's principle (αrchē). Thus Xenophanes' argument, typically compressed into a few brilliant and lucid verses, was misunderstood.
Many infinities were wrongly attributed to Xenophanes in antiquity forming the Xenophanes legend which was encouraged by the passage from Aristotle, discussed in the next section. only after their rejection can one begin to see that Xenophanes was a great and original philosopher of science. He gives a new version of the theory of the Sun and the stars: he proposes to see them as burning masses of gas. Such things can be seen on Earth - igniting gases over swamps, or emerging from volcanoes. It seems that Xenophanes used the term nephos for formulating his excellent conjecture that the Sun and the stars are {balls of} burning gas. This seems to me an improvement in Anaximander's theory. Moreover, it is an almost necessary intermediate step between Anaximander's and Heraclitus' theories and the famous theory of Anaxagoras that the Sun is a glowing stone. (It is reported in DK A32.)
Anaximander died in 546BC (DK 12 A1), and we may assume that Xenophanes left Miletus at about this time, going north. Returning to Colophon, he did not much like any longer the social and intellectual atmosphere he found there (DK 21B3).
The next year, 545, was a year of catastrophe for the Ionian Greeks. A huge Persian army, commanded by Harpagus, a Median general, invaded Ionia and destroyed its freedom. Xenophanes left Colophon and emigrated. We have no detailed reports about the circumstances of this emigration. But Theodor Gomperz's suggestion that Xenophanes joined the citizens of Phocaea and shared their wildly adventurous emigration does not seem to me too far-fetched. (See Section 7 below.)
3. The misunderstood cosmology of Xenophanes
I now come to what may be called the central misunderstanding of Xenophanes as a cosmologist; a misunderstanding that is responsible for attributing to him silly and even contradictory doctrines. The story is, indeed, very exciting.
This misunderstanding is due to the authority of Aristotle, who wrote in De Caelo (294a21) that Xenophanes is one of those who hold that the Earth extends downward infinitely; and that these people adhere to this view 'in order to save themselves the trouble of looking for a reason' (that is, a reason for the apparent stability of the Earth). That Aristotle did not know the two crucial verses of Xenophanes (that is, DK B28) is obvious, for he cites instead, lacking better evidence, three contemptuous verses by Empedocles, who derides those who hold that 'the depth of the Earth and the ample ether are infinite'. From the fact that Aristotle cites the lines of Empedocles in order to endorse them as a criticism of Xenophanes, we must conclude (or so it seems) that, somewhere in the same context, Empedocles named Xenophanes as one of the culprits responsible for this silly theory of the infinite 'roots' of the Earth.
This passage of Aristotle (De Caelo 294a21 = DK 31B39), in which, somewhat rashly, he quotes, accepts, and endorses Empedocles' derisive and arrogant attack on Xenophanes, is the sole source of the almost universal misinterpretation of Xenophanes' B28, and indeed of a whole lot of other misinterpretations which are all the consequences of this first and basic misinterpretation. But we must not accept Aristotle's authority here. Indeed, Aristotle himself said things about Xenophanes which sharply contradict certain consequences of this Aristotelian misinterpretation.
There are, if we over-simplify things a little, two sets of reports about Xenophanes' cosmology. The first set consists of reports that attribute implicitly to Xenophanes the doctrine that his one god and the universe are both finite and spherical, and a unity. Clearly, these reports, which began with Plato and Aristotle, make Xenophanes a forerunner of Parmenides, and tend to assimilate him to the latter. I think that certain linguistic reasons speak for a (loose) connection between the two, but the attempt to assimilate them seems to me suspicious. However, we just don't know. The second set of reports attributes to Xenophanes the teaching that the Earth (and therefore also the universe) is finite in depth (and also, perhaps, even infinite in width); a view that makes the setting of the Sun impossible, thus leading on to a perverse attribution to Xenophanes: to the doctrine that the Sun moves in an infinite straight line over the infinite Earth and does not set but disappears because it becomes infinitely distant. (Tell this to a man who has sailed the oceans, as Xenophanes did more than once!) So the Sun has to be daily renewed or, rather, recreated as a new body in the East. {For further comments on this, see Popper Fragment 11, below. Ed.}
This is only one of the impossible theories attributed to Xenophanes. Just as important, perhaps, is the attribution to him of a 'principle' like those of Thales (Water), Anaximenes (Air) and Heraclitus (Fire), and that his 'principle' - the fourth - was Earth. So, like the other 'principles', the Earth was infinite and so needed no further support. And in some of the reports belonging to the second set, several doctrines of the first set are included.
Now, the teaching attributed to Xenophanes by the second set of reports is nowhere supported in the fragments B27 and 29 written by Xenophanes himself - provided that B28 is translated as Kahn, Cleve and I (and the text) suggest. So the interpretation of B28 becomes indeed crucial: if this fragment is translated as almost everybody else translates it, then the stories in the second set of reports become at least in part plausible. If it is translated as Kahn, Cleve and I translate it, these stories not only can be rejected, but their mistakes can be explained as ultimately due to a misinterpretation encouraged by Aristotle's authority.
But Plato's and Aristotle's own reports belong mainly to the first set (with the exception of that fatal passage in De Caelo). Both see in Xenophanes a precursor of Parmenides of Elea, whose teachings about The one - that is, a spherical indivisible universe - they emphasize. Aristotle complains in his Metaphysics (986b21 - DK A30) of Xenophanes that what he said was not very clear, illustrating his complaint by the story that Xenophanes said (referring to the universe) that The one was God ('to hen einei... ton theon'). This, indeed, is a vague saying, and it does not give us much information about Xenophanes, beyond perhaps illustrating that Aristotle, like Plato, took him to be a forerunner of Parmenides. But in other and later reports belonging to the first set, Xenophanes' anticipation of Parmenides is elaborated. Xenophanes' one God - who 'does neither in body nor in mind resemble the mortals' (DK B23) - is said to have a body of spherical shape: indeed, not resembling the human shape! And elsewhere this body is identified with the physical universe, an identification that is a little difficult to accept (in view of B25: 'Effortless over the All he reigns by mere thought and intention'). Of course, this would make the physical universe of Xenophanes also finite, like that of Parmenides, since only a finite body can have a (spherical) shape.
All this indicates that there is a tradition that clashes with the infinitist interpretation of our two verses, B28, and with the second set of reports.
If, therefore, Kahn's and Cleve's and my finitist interpretation of B28 is accepted, the first set of reports may be accepted, but the second set must be rejected as based on a misinterpretation. But whether or not the first set should be accepted is a more difficult question; for it could be, perhaps, just the result of Plato's ascription to Xenophanes (in the Sophist 242d5) of founding the Eleatic School, whose outstanding member was Parmenides.
This is a problem on which it is difficult to have a opinion. The elaborate arguments of my late friend W. K. C. Guthrie, in volume I of his great History of Greek Philosophy, seem the best I know, and they seem strengthened by my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of B28 (which Guthrie translated with the majority). However, we should take seriously a possibility first mentioned by the ingenious Karl Reinhardt (whom I greatly admire, but with whom I very frequently disagree - especially with what he says about Xenophanes in his book Parmenides). Reinhardt says that Xenophanes (whom he dislikes) may have been, late in life, influenced by the younger Parmenides, who is said to have been, at some stage, a disciple of Xenophanes. This - or a mutual influence between the two - is certainly a serious possibility. It would make it probable that Xenophanes was led to drop Anaximander's drum model of the Earth in favour of Parmenides' spherical Earth - while adhering, perhaps, to B28, or else correcting it to an Earth surrounded, first, by an envelope of Air, which in turn was surrounded by the Apeiron. And it would make Plato's and Aristotle's remarks and all the reports of the first set much easier to understand.
I cannot close without mentioning that two very great ancient scholars were dissatisfied with the then current reports about Xenophanes. Simplicius in his commentary on De Caelo(522.7 = DK A47) complained that he felt doubtful whether Aristotle was correct in his ascription to Xenophanes of an infinitely deep Earth; and whether we might not perhaps even misunderstand Aristotle. He says that he could not find Xenophanes' own words - our B28? - and could therefore not feel sure. At another place, in his commentary on Aristotle's Physics (22. 22 = DK A31), Simplicius seems to be confused about Xenophanes, obviously owing to the conflicting reports of the first and the second set.
The other great scholar of antiquity I have in mind is Galen. He is most explicit. He writes (DK A36): 'In a malicious and slanderous way some commentators on Xenophanes have lied about him.' He mentions Sabinus (who apparently reported that Xenophanes' 'principle' was Earth), and continues: 'For nowhere can Xenophanes be found to have said anything like that.' This remark makes it probable that Galen still had access to Xenophanes' lost writings On Nature, and that they did not contain any of the preposterous remarks attributed to him by what I have here called the second set of reports.
4 Xenophanes as a philosophical theologian
and the influence of Parmenides
The one short fragment (B1) we possess from Anaximander tells us that the world process is not merely a natural process but a moral process; and although few may agree with it today, everyone will feel that this is a poetico-philosophical idea that deserves to be called a deep thought - especially as it originates from a highly creative natural scientist. Heraclitus also achieves a poetic effect. Although his aphorisms, many of which are strikingly impressive, do not belong to poetry in the contemporary sense of metrical composition, they might be said to belong to the form of poetry now sometimes called 'free verses'. Parmenides, of course, also writes poetry, and he too writes, like Anaximander and Heraclitus, as a kind of prophet: he too has an all-important message, and he also wishes to impress us with it.
Xenophanes who, of these four, seems to have the greatest interest in religious problems, is the only who does not think of himself as a prophet. He argues with us rationally, as does Parmenides; but his message has no divine authority, as has Parmenides': he is very conscious of his fallibility. He is also a moralist, but he does not preach. All this gives his language a touch of ease, and of modesty. Xenophanes' language is the least impressive of the four mentioned. He is not speaking to us as a man conscious of his superior wisdom. (This, I conjecture, is one main reason why German scholars - and perhaps also some Greek philosophers - are not impressed by him. A second, and very different, reason, is to be found in the above-mentioned misunderstandings of his teachings in the Greek doxographic tradition.)
Xenophanes even carries argument into theology. As a rhapsode reciting the poems of Homer and Hesiod professionally, he turn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Milesians, into a severe critic of both of them: he criticized them from a moral and educational point of view. He objected to their stories, which made the gods steal, lie, and commit adultery. So he was moved to reconsider their theologies from a highly critical point of view. one of his main achievements was to discover and attack a way of thinking that today we call 'anthropomorphism': he discovered that the stories of Homer and of Hesiod must not be taken seriously, simply because they describe the gods as if they were men. I quote Xenophanes' arguments in verse form (from my almost literal translation; B16, B15):
Aἰqίopeϛ te {qeoὺϛ sfetevrouϛ} simoὺϛ melanάϛ te
Θrh'ikevϛ te glaukou`ϛ kai` purrouvϛ {fasi pevlesqai}.
ajll'eij χei'raϛ e]χon boveϛ {i]ppoi t'} hjej levonteϛ
ἤ gravyai χeivressi kai` e]rga telei'n a]per a]ndreϛ,
ippoi mevn q'ippoisi boves dev te bousi`n o`moίaϛ
kaί {ke} qew'n ijdevaϛ e]grafon kaὶ swvmat' epoίoun
toiau'q' oi'ovn per kau;toi; devmaϛ ei'χon {e]kastoi}.
The Ethiops say that their gods are flat-nosed and black,
While the Thracians say that theirs have blue eyes and red hair.
Yet if cattle or horses or lions had hands and could draw
And could sculpture like men, then the horses would draw their gods
Like horses, and cattle like cattle, and each would then shape
Bodies of gods in the likeness, each kind, of its own.
What all this teaches us is that we must never relax our critical - a highly critical - search for truth, always trying to learn from those who hold a different view. But in order to avoid relativism we have to say more than this. What we should say is: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talking things over rationally we may be able to correct some of our mistakes; and we may perhaps both of us get nearer to the truth.'
Thus Xenophanes arrived at his problem: how should we think of our gods, after taking account of this criticism of anthropomorphism? There are four fragments that contain part of his answer. The answer is monotheistic (even though Xenophanes, like Luther in his translation of the First Commandment, uses the plural 'gods' in the formulation of this monotheism; B23, B26, B25, B24):
ei|" qeov", e]n te qeoi'si kai; a;nqrwvpoisi mevgisto"
ou]ti devma" qnhtoi'sin o;moivio" ou;de; novhma.
ai;ei; d' e;n tau;tw'i mivmnei kinouvmeno" ou;devn
ou;de; metevrχesqaiv min e;piprevpei a]llote a]llhi.
a;ll' a;pavineuqe povnoio novou freni` pavnta kradaivnei
ou|lo" o;ra}i, ou|lo" de; noei', ou|lo" dev t' a;kouvei.
One God alone among gods and alone among men is the greatest.
Neither in mind nor in body does he resemble the mortals.
Always in one place he remains, without ever moving.
Nor is it fitting for him to wander now hereto now thereto.
Effortless over the All he reigns by mere thought and intention.
All of him is sight; all is knowledge; and all is hearing.
These are the fragments that give an account of Xenophanes' speculative theology. (As to my translation 'he reigns' in DK B 25, see Addendum 1 to this essay.) They report on the results of his analysis of the logic of supreme power that first led him to a rejection of anthropomorphism, then to the discovery of monotheism, and finally to the insight that God is, in body and mind, unlike man.
It is clear that this completely new theory was the solution of a difficult problem for Xenophanes. In fact, it came to him as a solution of the greatest of all problems, the problem of the universe. Nobody who knows anything about the psychology of knowledge can doubt that this new insight must have appeared like a revelation to Xenophanes.
Yet he started clearly and honestly that his theory was no more than a conjecture. That was a self-critical victory without equal, a victory of his intellectual honesty and of his modesty. Xenophanes generalized this self-criticism in a manner that was completely characteristic of him: it was clear to him that what he had discovered about his own theory - that in spite of its intuitive power of persuasion it was nothing more than a conjecture - must be true of all human theories: everything is only conjecture. But it also seems to me to reveal that, psychologically, it was not easy for him to view his own theory as conjecture.
Later scholars of Greek philosophy such as Cicero (A34), Sextus Empiricus (A35), Simplicius (A31), and Aristotle, who in his Metaphysics (quoted above) adds that Xenophanes identified his one God with the universe, have ascribed to Xenophanes the doctrine that the shape of his one God is spherical. I consider both assertions mistaken, the latter probably due to an exaggeration of the Platonic-Aristotelian thesis of an Eleatic Unitary School. As mentioned in Section 3, it may be that Xenophanes encountered Parmenides late in life, as Karl Reinhardt suggests, but what he learnt from the much younger Parmenides is most probably different from what this group of scholars believe. I think that the most he may have learnt in his old age is that the Earth is a sphere. This would have appealed to him, and it could be related to an early astronomical result of Parmenides. And this may have led to Xenophanes' name being attached to the untenable view that the shape of God is spherical.
5 Xenophanes' theory of knowledge
I now turn to Xenophanes's epistemology. We have seen before that he was a highly critical thinker: straightforward yet subtle, lucid with well thought-out and highly polished arguments presented in briefest formulations of almost deceptive simplicity and robustness. I am thinking, of course, of his two-line rectification of Anaximenes; his theological criticism - his presentation of anthopomorphism in a manner that shows its absurdity without even a word of criticism (although he can be openly critical and hit hard, again with astonishing few words).
Let us consider the two verses of DK 21B38:
ei; mh; χlowro;n e]fuse qeo;" mevli, pollo;n e]faskon
gluvssona su}ka pevlesqai.
If God never had chosen to make the light-yellow honey,
Many a man would think of figs as being much sweeter.
Admittedly, reading this, one has to add in one's mind 'sweeter than figs appear to him now, because the comparison with honey reduces the impact of the sweetness of figs'. Yet if you make this addition, you have been induced to be mentally active - one of the aims of any teacher who wants to enlighten his students. So these lines are perhaps only a little difficult; but the simplicity of the picture ensures that they are nevertheless very lucid, and cannot be misunderstood by anybody unless he is not prepared to make an effort - a very modest effort indeed.
Regarding the content of this parable, some people have said that Xenophanes was here preaching - or teaching - an epistemological relativism. This is a misunderstanding. It is, on the contrary, merely a psychological relativism: in trying to judge reality (objective reality) don't forget, he repeatedly reminds us, that your immediate reaction is often tainted by comparison: 100 drachmae are a lot when you expected 20, but they are disappointing when you expected 200. But objectively they are the same in each case.
So if you wish to obtain knowledge of the objective world, Xenophanes teaches, know thyself and mistrust your own impression! Obviously an early version of critical empiricism, explained with easy examples.
Yet there is more in these verses: they probably represent the first step towards a distinction between primary and secondary qualities. Or rather, they contain a better distinction between what were much later called 'secondary qualities', on the one hand, and 'primary qualities' on the other - qualities due to a certain priming of the senses.
Xenophanes most probably arrived at his critical theory of knowledge in connection with his revelation-like solution to the problem of the universe, described in Section 3. He states his theory in four beautiful verses (I need six verses to translate them in verse form). To me there is nothing in the whole literature of philosophy that is so critical, so self-critical, so correct, and so true as B34:
kaiv to; me;n ou\n safe;" ou[ti" a`nh;r [iden ou`dev ti" e]stai
ei;dw;" a;mfi; qew'n te kai; a]ssa levgw peri; panvtwvn:
eij ga;r kai; ta; mavlista tuvcoi tetelesmevnon eijpwvn,
aujto;" o{mw" oujk oi\de: dovko" dvejpi; pa'si tevtuktai.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The perfect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In what follows I shall first defend this translation, and afterwards I shall give my interpretation of it.
(a) It would perhaps be slightly closer to the text to translate to; safevs by 'certainty' rather than by 'certain truth'. But I find that 'certain truth' not only sounds a little better in English, it is also more explicit and therefore closer to Xenophanes' intention as an enlightened teacher.
I have also inserted the word 'truth' in line 5 of my translation. Here again I find it implied by the text (tetelesmevnon eijpwvn = 'speaking the most perfect reality'). I may even call for support from Kirk, Raven, and Schofield, who likewise have 'truth' twice in their translation of the fragments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2nd edn, Cambridge, 1983, p. 179). They translate B34 as follows:
No man knows, or ever will know, the truth about
the gods and about everything I speak of; for even if one
chanced to say the complete truth, yet oneself knows it
not; but seeming is wrought over all things.
I find their translation very good (although I prefer my own), and it seems to me that the intended meaning is the same as in my translation: 'for even if one chanced to say' may indeed be slightly closer to the text than my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but the difference is negligible. on the other hand, 'but seeming is wrought over all things' seems to me less good English than, say, 'For all is guesswork' or 'guesses interwoven with everything', which with a slight degree of poetic licence led me to my version: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For teuvcw meaning 'weave', see, for example, the famous passage in the odyssey 7.235 and 8.276-81.
In the same line I prefer to translate dovko" by 'conjectures' rather than by 'seeming' (which hardly exists as a noun); and 'guesses' I regard here as poetic for 'conjectures'.
This ends the detailed verbal defence of my translation.
(b) I now proceed to give my interpretation of the fragment, which is at the same time a defence of the significance of B34 against the onslaught due to Hermann Fränkel. To my limited knowledge this onslaught is the most elaborate attempt to destroy the significance of these most important and indeed masterly four verses of Xenophanes.
The verses contain more than a theory of the conjectural character of human knowledge. They contain a theory of objective knowledge. For here Xenophanes teaches that, whilst something I say may be true, neither I nor anybody else will know that it is true. This means, however, that truth is objective: truth is the correspondence with the facts of what I say, whether I know or do not know that the correspondence holds. But this means that the correspondence holds independently of my knowing it: truth is objective; the truth or falsity of what I have said depends only upon the facts.
In addition these lines contain another very important theory. They contain a clue to the difference between objective truth and subjective certainty. For Xenophanes says that, even when I utter the most perfect truth, I cannot know this with certainty: I can only conjecture it. Thus we may know the truth in a hypothetical sense of 'know', but we cannot know that we have reached it. There is no infallible criterion of truth. We can never, or hardly ever, be really sure that we are not mistaken: our reasons are never fully sufficient.
However, Xenophanes was not an epistemological pessimist. He was a searcher; and during the course of his long life he was able, by way of critical re-examination, to improve some of his own conjectures, especially his scientific theories. In B18 Xenophanes formulates what may be called his licence to search:
ou]toi a;p va;rch'" pavnta qeoi` qnhtoi'sv u;pevdeixan,
+a`lla` crovnwi zhtou'nte" e`feurivskousin a]meinon.
The gods did not reveal, from the beginning,
All things to the mortals; but in the course of time,
Through seeking they may get to know things better.
Xenophanes also explains what he means by 'to know things better': he means the approximation to objective truth: closeness to truth, affinity with truth. For (in B35) he says:
Let us conjecture that these things are like the truth.
It is possible that when he uses the word doxazein (which I here translate by 'conjecture') in this fragment, Xenophanes alludes to his own monotheistic theory of deity.
We can say that Xenophanes' theory of human knowledge contains the following points:
1 Our knowledge consists of statements.
2 Statements are either true or false.
3 Truth is objective. It is the correspondence of the content of a statement with the facts.
4 Even when we express the most perfect truth, we cannot know
this - that is, we cannot know it with certainty. We can never
have sufficient reasons.
5 Since 'Knowledge' in the usual sense of the word is 'certain
knowledge', there can be no knowledge. There can only be
conjectural knowledge: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6 But in our conjectural knowledge there can be progress to
something better.
7 Better knowledge is a better approximation to the truth.
8 But it always remain conjectural knowledge - a web of guesses.
For a full understanding of Xenophanes' theory of truth, it is especially important to appreciate his clear distinction between objective truth and subjective certainty. Objective truth is the correspondence of a statement with the facts, whether we know this - know it for certain - or not. Thus, truth must not be confused with certainty or with certain knowledge. Admittedly, he who knows something for certain must know the truth. But it often happens that someone conjectures something without knowing it for certain; and that his conjecture is actually true, without his knowledge. Xenophanes implies that there are many truths - and important truths - that nobody knows for certain; yes, that nobody can know, even though they may be conjectured by some. He further implies that there are truths that nobody can even conjecture. And, of course, he is correct in all that.
Even today there are many philosophers who think that truth can be of significance for us only if we actually possess it; that is, know it with certainty. Yet the very knowledge of the existence of conjectural knowledge - and so, of unpossessed truth - is of great importance. There are truths that we can approach only by luck; others, only by laborious searching. Our path, nearly always, winds its way through error; and without truth there can be no error (and without error there is no fallibility).
Some of the views that I have just described were already more or less clear to me before I read Xenophanes' fragments. I would otherwise, perhaps, not have understood his words. It had become clear to me through Einstein's achievement that even our best knowledge is a woven web of guesses, that it is uncertain.
Much later I found that Kepler had a similar view of science, as may be seen from the following case {which also shows that mistakes may be hidden in our best-corroborated theories as Xenophanes taught. The story is briefly this}. Kepler had been worried about a deviation from circularity of Tycho's measurements of the orbit of the planet Mars. The deviation was a very small one, as he explains in a letter to Christen Longomontanus, Tycho's collaborator: 'Yes, my Christen, had I wished to leave {a difference} of 8 minutes in doubt, I could have saved myself the enormous effort of the whole last year 1604.'
Why did he not assume that the 8 minutes' difference was due to the unavoidable inaccuracy of every measurement? It would seem an obvious way out, in view of the fact that the Earth, from where Tycho's measurements were made, was a moving platform whose movements had not yet been fully determined. The answer is: Tycho's measurements, taken over several Mars-years, made the distance of Mars from the Sun exceed the expected distance (calculated on the circle hypothesis) always at the same place: the inaccuracy would have been a systematic inaccuracy.
This, Kepler felt, was unacceptable. So he tried other trajectories than circular ones: non-circular orbits that resemble a circle as a fat pear resembles an apple! This was, quite literally, what he did. He felt the deviation from the circle to be a deviation of the empirical world from mathematical purity, and so he did not think of an ellipse - a well-known mathematical entity - but rather of vegetable shapes. Thus he tried several vegetable models before he remembered that an ellipse might fit after all. It did.
So Kepler did not derive his ellipse hypothesis from Tycho's measurements: he operated by trial and the elimination of error: by the method of conjecture and refutation. {As mentioned above, this case also illustrates the importance of the fourth principle of Addendum 2 to this essay - that searching for mistakes in our best-corroborated theories may lead to discoveries of the greatest importance.}
I do not believe that the conjectural character of all our knowledge would ever have become clear to me without the work of Newton and Einstein; and so I asked myself how it could have become clear to Xenophanes 2,500 years ago. A possible answer is this. Originally Xenophanes believed in Homer's picture of the world and the gods. This picture was shattered for him, just as my Newtonian picture was shattered for me. For him it was shattered by his own criticism of Homer: by his discovery that the Homeric gods were anthropomorphic; for me Newton's theory was shattered by Einstein's discovery of an alternative theory that explains the facts at least as well as Newton's, and even better than Newton's. Xenophanes, like Einstein, replaced the criticized picture of the universe by another, and each of them was aware that his new picture was conjectural.
The realization that Xenophanes had anticipated by 2,500 years my theory of knowledge taught me to be modest. But the importance of intellectual modesty too had been anticipated as long ago, by both Xenophanes and Socrates.
Socrates was the second, and much more influential, founder of the sceptical tradition. He taught: only he is wise who knows that he is not. Although many people are aware that this is Socrates' teaching, few realize that his 'Know thyself!' means 'Know how little you know!', and that his demand that the statesman should be wise, or at least a 'lover of wisdom' (a 'philosopher'), is intended to demand of the politician, who bears such immense responsibilities, that he should be constantly aware of his ignorance. Few have seen how this demand (which we know of through Plato's Apology) clashes with Plato's interpretation of it (in the Republic) that philosophers ought to be kings, and kings fully trained philosophers.
Socrates and, at about the same time, Democritus, independently of each other, made the same ethical discovery. Both said, in very similar words: 'It is better to suffer injustice than to inflict it' (Democritus, DK 68B45). It was this insight - combined with the knowledge of how little we know - that led to toleration, as Voltaire taught later.
6 on Xenophanes' moralism: the defence of
civilization against gods
{I shall now discuss the significance of Xenophanes' self-critical philosophy or his ethical attitude. But in order to do so,} I shall first consider the following important objection. It is correct, somebody might say, that Xenophanes, Democritus, and Socrates did not know anything; and it was indeed wisdom that they recognized their own lack of knowledge, and perhaps even wiser of them to adopt the attitude of searchers for truth. Today, we - or more correctly contemporary scientists - are still searchers for the truth, but today's scientists are not only searchers, but also finders. For they know a great deal; so much that the very volume of our scientific knowledge has become a grave problem. So it hardly can be right that we should still build our philosophy of knowledge on the basis of the Socratic thesis of lack of knowledge.
The objection is correct, but only with four very important qualifications.
Firstly: The suggestion that present-day science knows a great deal is of course correct, but the idea of 'knowledge' employed here, apparently unconsciously,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at of Xenophanes and Socrates, and from the meaning given to it when used, with emphasis, in everyday usage. For when we speak of knowledge in a non-casual way, by 'knowledge' we always mean 'certain knowledge'. If someone should say 'I know that today is Tuesday, yet I am not sure that today is Tuesday', then he would be contradicting himself, for he is retracting in the second half of his statement what he is saying in the first half.
But scientific knowledge simply is not certain knowledge. It is always open to revision. It consists of testable conjectures - at best, of conjectures that have been subjected to the most stringent tests; yet still, of conjectures only. It is hypothetical knowledge, conjectural knowledge. This is my first comment, and by itself a full defence of the application to modern science of the insights of Xenophanes and of Socrates.
My second comment on the remark that we know so much nowadays is this: with almost every new scientific achievement - with every hypothetical solution of a scientific problem - both the number of unsolved problems and the degree of their difficulty increase; they increase much faster than do the solutions. And it would be correct to say that whilst our conjectural knowledge is finte, our ignorance is infinite. But not only that. For the genuine scientist with a feeling for unsolved problems, the world is becoming more and more difficult to understand.
My third comment is this: when we say that we know more today than did Xenophanes or Socrates, then it is probably incorrect as long as we interpret 'know' in a subjective sense. Presumably none of us knows more, rather we have heard that more is known, and also we know a greater variety of things. We have replaced particular theories, particular hypotheses, particular conjectures by others; admittedly in most cases by better ones: better in the sense of being better approximation to the truth.
The content of these theories, hypotheses, conjectures may be called knowledge in the objective sense, as opposed to subjective or personal knowledge. For example, the contents of an encyclopaedia of physics is impersonal or objective knowledge - though still, of course, conjectural knowledge. But it far exceeds what the most learned physicist can possibly 'know' (in any sense of the word). What a physicist knows - or, more exactly, conjectures - may be called his personal or subjective knowledge. Both impersonal, or objective, and personal, or subjective, knowledge are, on the whole, hypothetical and capable of improvement. But these days not only does impersonal knowledge exceed by far that which any human can know for himself, but the advances in impersonal, objective knowledge are so rapid that personal knowledge can keep up only in small areas and for short periods of time; it is being superceded all the time.
Here we have a fourth reason for saying that Xenophanes and Socrates are right, even today. For this outdated personal knowledge consists of theories that have been found to be false. Outdated knowledge is, therefore, definitely not knowledge, at least not in the ordinary sense of the word.
We have thus four considerations that show that even today the Socratic insight, 'I know that I do not know, and hardly that', is highly topical - I think even more so than in Socrates' time. And we have reason, in the defence of toleration, to derive from this Socratic insight those ethical consequences that were derived by Erasmus, Montaigne, Voltaire, and Lessing. We may even derive further consequences.
Every rational discussion, that is, every discussion devoted to the search for truth, is based on principles, which in actual fact are ethical principles. I should like state three of them.
1. The principle of fallibility. Perhaps I am wrong and perhaps you are right; but, of course, we may both be wrong.
2. The principle of rational discussion. We need to test critically and, of course, as impersonally as possible the various (criticizable) theories that are in dispute.
3. The principle of approximation to truth. We can nearly always come closer to the truth with the help of such critical discussions; and we can nearly always improve our understanding,
even in the cases where we do not reach agreement.
It is remarkable that these three principles are epistemological and, at the same time, also ethical principles. For they imply, among other things, toleration: if I can learn from you, and if I want to learn, then in the interest of truth I have not only to tolerate you but also to recognize you as a potential equal; the potential unity of man and the potential equality of all humans are prerequisites of our willingness to discuss matters rationally. Of further importance is the principle that we can learn from a discussion, even when it does not lead to agreement. For a rational discussion can help to shed light upon some of our errors.
All this shows that ethical principles form the basis of science. The most important of all such ethical principles is the principle that objective truth is the fundamental regulative idea of all rational discussion. Further ethical principles embody our commitment to the search for truth and the idea of approximation to truth; and the importance of intellectual integrity and of fallibility, which lead us to a self-critical attitude and to toleration. It is also very important that we can learn in the field of ethics.
{In Addendum 2 to this essay I have demonstrated this by proposing twelve principles constituting what I have called a new professional ethics, principles closely connected with the demand for toleration and intellectual honesty which Xenophanes formulated and practised 2,500 years ago.}
As shown above, Xenophanes' 'licence to search' for truth is rooted in both epistemological and ethical demands or principles, which have criticism and self-criticism as their main impetus. How could this dynamism between a search for truth and a critical methodology have come about? Most probably as a result of Xenophanes' experience as a rhapsode, who recited the classic works of Hesiod and Homer but also, no doubt, performed contemporary poetry, including his own poetry, in parts of the Mediterranean region where a great many cultures were meeting with all their different expectations and conceptions of such performances.
In Xenophanes' time culture-clash could be felt also in the world of art, and in his profession it was not necessary to search long to find fundamental differences between, say, oriental and Greek drama. For example, while oriental dramatists would by necessity include a prostrating gesture of reverence before their gods as part of their divine service, this kind of submission is not part of Greek dramatic tradition. on the contrary, Greek dramatists argue with the gods, even accusing them of senseless cruelty. The gods are told to be more rational and responsible: 'You are despots and ought to be ashamed of yourselves. You play with us, but we humans shall show up your play!'
I suggest that this defence of civilization against the family of gods and their whims led Xenophanes to the view that the existence of the world and the world of humanity depends on equity or righteousness, and that the ethics of the supreme power presupposes that God, the almighty, must be right; and that this view ought to be a guiding principle for our human search for peace and our fight against war. I further suggest that Xenophanes carried over this view to the domains of epistemology and science, to our search for truth.
It seem to me that Xenophanes' monotheism is here as good as, or better than, the Christian or Jewish monotheism (the Old Testament God being a jealous and avenging god). Xenophanes' moralism much better characterizes the present-day situation in science and politics, and is certainly to be preferred to the idiocy expressed by modern slogans such as 'Anything goes!', the password of some influential but irresponsible intellectuals.
7 Did Xenophanes inaugurate historical writing?
{As announced in Section 2, I shall end by trying to answer the question of this section by a new interpretation of a passage in Herodotus, who is traditionally considered to have given the first historical account of a period of Western civilization.}
We know from two fragments of Xenophanes (B8 and B22), written when he was 92 years old, that he left Miletus at about the time when Anaximander died (546BC) and that the following year, when 25 years old, he was forced into exile for the rest of his life. These moving fragments also give us the year in which Xenophanes emigrated (545) and the year of his birth (570):
Sixty-seven years it is now that the burden of life
I am dragging to and fro through the regions of Greece.
Counting the years from the day of my birth, I was then twenty-five
- If I still correctly remember.
This is the stuff one best talks about by the fire in winter,
Comfortably inclined, sipping sweet wine and nibbling some nuts:
'Tell me, who are you, my friend, and where do you come from?
How old are you, my dear, and what was your age
At the time of the Median invasion?'
The last question posed in the second fragment relates to the catastrophe which hit the Ionian Greeks as a consequence of the sudden war of conquest launched by the Persian king Cyrus against the Medians and Lydians, and forced the Greeks, who were taken by surprise long before they had even learnt to distinguish between Persians and Medians, to leave their settlements in Asia Minor. We know that these events were described by Xenophanes in a long epic poem in which there also was an account of the founding of Elea (Hyele). This epos is lost, as is another one that described the founding of Colophon.
What is known about this terrible but also very human story is a detailed account in Herodotus' History (I.163-7). It is a story in which the love of freedom clashes with the love of one's country, in which determination to resist enslavement ends in ultimate defeat. The story is briefly this. When the Persian army, commanded by Harpagus, a Median general, invaded Ionia and besieged Phocaea (Xenophanes speaks of him as 'the Mede'), all citizens of Phocaea decided unanimously to leave rather than to be enslaved. They left apparently with a great number of ships (perhaps more than 60, each of 50 oars) and tried to buy from the Chians some small inhabited islands. Being unsuccessful, they returned to Phocaea, where they killed the garrisons that Harpagus had left. Then there arose a deep division among them: although they had sworn a great oath that they would all continue together, more than half the citizens broke their oath. one part of them, longing for their home city, preferred to stay in Phocaea (Herodotus says nothing about their fate), while the others left for Corsica (Kyrnos) - as we are told later, because of a misunderstood oracle that had spoken of the hero Kyrnos, not of the island. In Corsica they joined some of their countrymen 'who had come first'. There they settled down, and built houses and temples. Later some of them, Xenophanes among them, departed after some of their fellow-citizens had done injustice to their neighbours, the Tyrrhenians and Carchedonians, and left for southern Italy. Here, south of Naples, they founded the city of Elea, where presumably Xenophanes wrote the two fragments rendered above, which together with his earlier critique of the Colophonian life style seem to be the only autobiographical passages we possess.
But if Theodor Gomperz is right, then the story in Herodotus is, possibly, an outline of Xenophanes' autobiographical report of a most tragic and indeed devastating period of his life. There seem to me to be three kinds of evidence that could support this interesting hypothesis:
(i) Herodotus does not say, as he sometimes does, that he knows this story from hearsay (see, for example I.170, the first sentence).
(ii) For Herodotus, the main interest is in this context the story of Ionia, of Cyrus and Harpagus; I.162-4 fits this 'plan'.
With I.165, a major deviation begins: here the interest turns to the tragic story of the Phocaean refugees. From here on - though the story is exciting and tragic - it is sketchy and written as if Herodotus were explaining certain points only because later passages demanded their insertion. Thus especially in I.165, the first sentence becomes very long because the beginning of the story of the relations of the Phocaeans to Corsica and the founding of Alalia is squeezed in at the end, before the full stop. Then there is another squeezed-in short sentence that explains why the Phocaeans did not get any help from Arganthonius. All this suggests that a long poem is being cut and exploited, and not too well: corrections have to be made later to insert omissions somehow and somewhere because otherwise the later passages at the beginning of I.166 (tw'n pro?teron ajpikomevnwn) would be incoherent, or would be necessarily misunderstood: one would not know who had arrived first! The passage (I.166) that tells about those 'who had come first' also suggests that the story told is in fact a personal report by one who sailed not with those Phocaeans who arrived first, but with a later wave of immigrants.
(iii) If Herodotus had a source, could this have been Xenophanes' epos? Herodotus, who wrote his History about 100 years after the events, would undoubtedly have tried to get some written source, and it is most unlikely that another written source existed: an author writing history 100 years before the 'Father of History' was not easily come by; and as we know that Xenophanes was such an author, its is likely that he was indeed the source of what we can now read in Herodotus.
There are several implicit or explicit evaluations in the text. In the first sentence of I.165, the egotistic attitude of the Chians is just touched upon. Later, when the oath is broken by more than half the Phocaeans, the breach is clearly condemned, but the condemnation is very tolerant towards the weakness of those who broke the oath. The brief description reads like an outline from a report of one who was present and who had some sympathy with those he had to condemn on principle. This reminds one of Xenophanes' humane moralism.
Herodotus seems touched by the tragic events of this story, and therefore he tells it very succinctly; perhaps he also wishes to get back to his main topic. But I for one - the other and earlier one was Gomperz (who, however, does not even refer to Herodotus' story) - get the feeling that the source was the epos by Xenophanes, who witnessed and participated in this terrible adventure from which survived fewer than one-sixth of the citizens of Phocaea who had taken the oath of comradeship against the Persian threat.
{I think this interpretation of Herodotus fits well into the account of how Western science and philosophy originated in the Greek colonies in Asia Minor and the Ionian islands and how it was transported to the mainland of Greece and Graecia Magna by highly learned and educated refugees. Among the most important of these emigrants we may count Pythagoras of Samos, Xenophanes of Colophon, Anaxagoras of Klazomenai, and Herodotus of Halicarnassus. I need hardly say that I consider it a most fortunate unintended consequence of the tragic events, about which Xenophanes sang for his fellow-citizens, that the unique cultural development of these great scientists and scholars was brought to bear upon our Western civilization.}
ADDENDUM 1
A NOTE TO THE QUOTATION FROM XENOPHANES (DK 21B25) IN SECTION 4 ABOVE
I suggest that Xenophanes B25 (kradaivnei) be translated as follows:
(1) Effortless over the All he reigns by mere thought and intention.
The word 'reigns' in this translation deviates from most previous translations known to me, including my own earlier translation, which was:
(2) Effortless he swings the All, by mere thought and intention.
The word 'swing' may be interpreted as an illusion to something like a pre-Aristotelian 'first mover' who sets in motion the starry heavens by swinging them like a lance; thus instead of 'swing' we may put 'move'. Translation (2) follows a suggestion of Herman Diels, who was severely criticized by the Karl Reinhardt in his famous book Parmenides (1916, pp. 112f.); Reinhardt proposed another interpretation that was accepted by most scholars and might be turned into English verse perhaps as follows:
(3) Effortless he shakes the All by mere thought and intention.
With a reference to Reinhardt, this translation was accepted by Walter Kranz and used in the 5th edition of Die Fragmente der Vorsokratiker (DK, 1934-7), and it has thereby acquired almost universal approval and authority.
Obviously, the Greek text must be scrutinized with care in order to decide between these three somewhat different translations. But before doing this I wish to say that translation (1) seems to me straightforward and best fitting the context, both the context of B25 and the (perhaps problematic) wider context of B23, 26, 25, and 24 - always provided that it can be linguistically defended.
But is translation (1) really acceptable with a view to the Greek wording? Not at first appearance. The dictionaries do not give for kradaivnw a meaning like 'to rule'. I shall try to show that either the dictionaries are incomplete, or alternatively, an emendation should be adopted.
The dictionary of Liddel and Scott (revised by Jones) tells us that kradainō is another form of kradaō, giving as translations: 'to swing, wave, brandish' {especially a lance or a spear}, 'to quiver' {of a lance after it has fixed itself in the ground}, and also 'to make tremble'; even to cause an earthquake or a cosmic upheaval, as described by Aeschylus in Prometheus Bound, in line 1047, the best passage in support of Reinhardt's interpretation (referred to him, op, cit., p. 112, footnote 2).
Clearly, Reinhardt's interpretation is perfectly possible from a linguistic point of view. Yet to me it does not seem to fit. Xenophanes' God is most powerful, and so he could perhaps cause not only the Earth but even the universe to quake. But Xenophanes was a great critic of anthropomorphism and bitterly opposed to Homer's and Hesiod's attribution to their gods of all kinds of human vices, misdeeds, and outbursts of temper. So we may take it that his God is not given to outbursts of temper, as Zeus is: he is not, like Zeus, human in his ways of thinking and in his emotions. He would not display his power in order to prove that he is powerful. Zeus' treatment of Prometheus in Prometheus Bound would not fit at all Xenophanes' idea of Godhead, which is (or so it seems to me) far removed from that scene of brutal cruelty, revenge, and destruction. And it its equally far removed from another famous scene to which Reinhardt also refers (Iliad 1.530) a scene in which Zeus makes Olympus tremble by nodding his heavy head and thereby affirming his promise. But Xenophanes' God does not move! Incidentally, the word we are discussing - kradainō - does not occur in this Homeric passage, so that this reference is hardly relevant. Also for good measure, Homer's scene does not fit because Zeus clearly shakes Olympus unintentionally - it just happens. For this reason, neither an effort nor the lack of an effort fits the situation, and an allusion to this scene could hardly occur to Xenophanes. Besides, the scene is again anthropomorphic; and Reinhardt's suggestion (that Xenophanes wants his god to outdo Zeus by making the All tremble rather than merely Olympus) seems to me to clash with the main tendencies of Xenophanes. To sum up, Reinhardt's interpretation (3) seems to me technically possible, but not to fit the context.
Diels's interpretation (2), which I once accepted and supported, also seems to me possible. kradainō certainly can mean 'swing' in the sense of swinging a lance - there are comparatively many occurrences of this meaning in Homer, although 'brandish a lance' or 'threaten with a lance' is perhaps more often what is meant. At any rate, if a hero can swing, and set in motion, 'an awful lance' (Iliad 7.213; Odyssey 19.438), then a god can swing, and set in motion, the starry heavens. And yet, I now think that this idea is, again, too anthropomorphic for what Xenophanes intends. Xenophanes' God is the ruler of the All. Why, then, does Xenophanes not say so, in a straightforward way?
With this I come to the defence of my own interpretation (1): to the hypothesis that Xenophanes did indeed say, in a direct and straightforward way, that his God rules or reigns over the universe.
This hypothesis seems to me linguistically defensible in view of a strange (and, it seems, so far unnoticed) similarity between two Greek dictionary words: kradainō(or kradaō) is the first of these words and kraainō (also occurring in the forms kraiainō and krainō) is the other. The first word, kradainō, has as one of its basic meanings 'to brandish a lance' (that is, a sharpened stick). The second word, kraainō or krainō, has as one of its basic meanings 'to brandish the staff of rule' (the stick that has become a symbol of power, the skeptron or sceptre; see Sophocles, Oedipus Coloneus 449), and it therefore also means 'to exercise sway' or 'to reign' (ibid. 296, 926; Odyssey 8.391). This similarity in meaning of two apparently unrelated yet very similar words (though kradainō has a short first syllable while kraiainō has a long first syllable) can hardly be an accident. The two words must be somehow related, either by origin or possibly by some kind of muddle. At any rate, translation (1) seems to me linguistically justified, with or without emendation.
ADDENDUM 2
SOME PRINCIPLES FOR
A NEW PROFESSIONAL ETHICS
BASED on XENOPHANES' THEORY OF TRUTH
I should like to put forward some principles for a new professional ethics, which for a long time I have felt is badly needed, principles based on Xenophanes' theory of truth and connected with his moralism and intellectual honesty.
For this purpose I shall first characterize the old professional ethics, and perhaps caricature it a little, in order to compare and contrast it later with the new professional ethics that I propose. Should this new ethics turn out to be a better guide for human conduct than the traditional ethics of the intellectual profession - the ethics of scientists, physicians, lawyers, engineers, architects, and also civil servants, and most importantly, the ethics of politicians - then I may be allowed to claim that new things can be learnt even in the field of ethics.
Both the old and the new professional ethics are based, admittedly, upon the ideas of truth, of rationality, and of intellectual responsibility. But the old ethics was based upon the ideas of personal knowledge and of the possibility of reaching certainty; and therefore upon the idea of authority. The new ethics, by contrast, is based upon the ideas of objective knowledge and of uncertain knowledge. This means a fundamental change in thinking, and with it a change in the role played by the ideas of truth, of rationality, and of intellectual honesty and responsibility.
The old ideal was to possess both truth and certainty and, whenever possible, to guarantee truth by means of a proof. This ideal, which to this day is widely accepted, corresponds to the personal ideal of the sage - not, of course, to the Socratic ideal of wisdom, but rather to the Platonic ideal of the initiated seer: of the Platonic philosopher who is, at the same time, a royal ruler, an authority.
The old imperative for the intellectual was: 'Be an authority! Know everything (at least in your chosen field of expertise)!' once you are recognized as an authority, your authority will be protected by your colleagues; and you must, of course, reciprocate by protecting their authority.
The old ethics here described leaves no room for mistakes. Mistakes are not allowed; and therefore the confession of mistakes is not allowed. I do not need the stress that this old professional ethics is intolerant. Moreover, it has always been intellectually dishonest: it leads especially in medicine and politics to the covering up of mistakes for the sake of authority ('closing ranks').
I suggest, therefore, that a new professional ethics, fit not only for scientists, be based upon the following twelve principles.
1 Our objective conjectural knowledge continues to exceed more and more what one person can master. Therefore there are no
authorities. This holds true even within the various medical
specialities.
2 It is impossible to avoid all mistakes, or even all those mistakes
that are, in themselves, avoidable. Mistakes are continually being
made by all scientists. The old idea that mistakes can be avoided
and that one is therefore in duty bound to avoid them must be
revised: it is itself a mistake.
3 It still remains our duty to do everything we can to avoid mistakes. But it is precisely in order to avoid them that we must
be aware of the difficulty in avoiding them, and of the fact that
nobody succeeds in avoiding them all; not even the most creative scientists who are guided by intuition succeed. Although
we can do nothing without it, intuition is more often wrong than
right.
4 Mistakes may be hidden in our best-corroborated theories, and
it is the specific task of the scientist to search for such mistakes. Finding that a well-corroborated theory or a much-
used practical technique is mistaken may be a discovery of the
greatest importance.
5 We must therefore change our attitude to our mistakes. It is here that our practical ethical reform must begin. For the
attitude of the old professional ethics leads us to cover up
our mistakes, keep them secret, and to forget all about them
as soon as possible.
6 The new basic principle is that in order to avoid making more
mistakes than we need make we must learn from the mistakes
we do make. To cover up mistakes, therefore, is the greatest
intellectual sin.
7 We must, therefore, be constantly on the lookout for mistakes,
especially our own mistakes. When we find them we must
remember them; and we must scrutinize them from all aspects,
in order to understand better what went wrong.
8 A self-critical attitude, frankness, and openness towards oneself
become, therefore, part of everyone's duty.
9 Since we must learn from our mistakes, we must also learn to
accept, indeed accept with thanks, their being pointed out to us
by others. When we draw other people's attention to their mistakes, we should always remember that we ourselves have
made similar mistakes. And we should remember that the greatest scientists have made great mistakes. This is certainly not meant to imply that our mistakes are, generally, forgivable: we must never let our attention slacken. But it is humanly impossible to avoid making mistakes, and when we draw the attention of others to their mistakes, we might help them by pointing this out too.
10 We must be clear in our minds that we need other people to
discover and correct some of our mistakes (as they need us);
especially people who have grown up with different ideas, in
a different cultural atmosphere. This too leads to toleration.
11 We must learn that self-criticism is the best criticism; but
that criticism by others is a necessity. It is nearly as good as
self-criticism.
12 Rational (or objective) criticism must always be specific: it must
give specific reasons why specific statements, specific hypotheses appear to be false, or specific arguments invalid.
It must be guided by the idea of getting nearer to objective
truth. In this sense it must be impersonal, but also sympathetic.
I ask the reader to consider what I am proposing here as suggestions. They are meant to point out that, in the field of ethics too, one can put forward suggestions which may be discussed and improved by critical discussion, as Xenophanes and his successors, it seems, were among the first to discover.
The more or less universal acceptance of the conjectural character of science has meant a fundamental change in the attitude of scientists towards refutations of mistaken theories, even their own. A similar change in attitude to human fallibility has not yet taken place in politics and within our different institutions. If I dream of a democratic utopia, it will be one in which a parliamentary candidate can hope to attract votes by the boast that he discovered during the last year 31 serious mistakes made by himself and managed to correct thirteen of them; while his rival discovered only 27, even though he admitted correcting thirteen of his own mistakes. I need not say that this will be a Utopia of toleration.
Editorial note
Owing to its fairytale origin, which is now related in the E야색‘s Preface, no part of this volume got into 'the Popper Archive', so from that point of view The World of Parmenides may be considered Sir Karl Popper's last philosophical publication on which he worked to the end of his life. Essay 2 on Xenophanes, which is the only essay among those printed here that Sir Karl left unfinished, has been completed from numerous handwritten drafts and other documents, kindly made available by Mr and Mrs Raymond Mew, Sir Karl's literary executors, according to two main lists of contents found among the papers of Sir Karl's Nachlass: (X1) three structurally similar lists with various keywords added over a period of time, and (X2) one list entirely different from the others.
The X1-lists comprise seven sections and carry a number of keywords (here written in brackets): (I) 'Xenophanes as a Co-founder of the Greek Enlightenment' (a teacher who wanted to teach so as to become unnecessary!); (II) 'Notes on the Life of Xenophanes' (Colophon, Miletus, Anaximander; refugee); (III) 'The Misunderstood Cosmology' (fields of force in which disturbances cause vibrations that spread like waves); (IV) 'Relation to Parmenides' (demas versus melea or melea - melea hardly occurs in Xenophanes? Cartesian Rationalism, sphere); (V) 'Enlightened Theology' (the Logic of Supreme Power, the Ethics of Supreme Power; the Critique of Anthropomorphism is fundamental, see Mansfeld I, p. 16, Back to Anaximander! das Zitat); (VI) 'Moralism: the Defence of Civilization Against the Gods' (the dramatists; Die Existenz der Welt und der Menschenwelt beruht auf Gerechtigkeit: Gott, der Mächtige, muss gerecht sein); (VII) 'Logic and Epistemology'. (Between Section VI and VII a reference to E. R. Dodds, The Greeks and the Irrational, 1951, is noted.)
The X2-list of contents also sketched out seven sections, but with different titles, and it gives other keywords and carries the heading 'on the Greatness of Xenophanes': (1) ‘Anti-Anthropomorphism, Theology'; (2) 'The Summary of Theology, B34, Truth versus Certainty' (Monotheism - as good, or better, than the Christian or Jewish one. The Old Testament God is an envious god: you must not have other gods besides me!); (3) Two Popular Senses of Scepticism' (both deriving from 'no criterium of truth'); (4) 'Two Kinds of Objects of Knowledge: Laws and Stable Environment - the Momentary Dangers and Gain-Situations'; (5) 'Xenophanes the First and Best of Greek Epistemologists' (he said 'no criterion of truth, but, if we go on searching, then our conjectural knowledge may become better'. This is the only sound epistemology); (6) 'B27 and Empedocles' Misinterpretation, confirmed by Aristotle’. (All B27 is correct: the Sun is a big gas ball); (7) '"The Spherical God"' (Three possibilities: (i) The god is spherical according to Aristotle: the unmoved mover; (ii) Xenophanes got it from Parmenides; (iii) Xenophanes' god is not spherical. We cannot know, but I would opt for the third (1), the first (2), the second (3)).
Destiny allowed Sir Karl to cover only a part of the topics indicated in these lists of contents and, for some of them, only in a very first approximation. This has invariably affected both the order of presentation and the contents of the present sections of the Xenophanes essay. No doubt, had this essay been completed by Sir Karl himself its shape would have been different; however, the main topics and arguments have been saved and reproduced according to his views on Xenophanes - although with an emphasis and detail less characteristic than he would have given it had he been allowed to write out as a whole his original reconstruction of Xenophanes' contribution to 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present version of Essay 2, Section 1, which originally introduced the essay, describes Xenophanes as a founder of the Greek Enlightenment. The Preamble that now precedes Section 1 comes from a separate, handwritten note. The first part of Section 2 on Xenophanes' early life has been carried over from a larger manuscript beginning with the words 'Xenophanes had a hard life', while the second part of this section stems from typescript entitled 'Three Notes on Xenophanes'; the model of Xenophanes' Earth and the text to notes 11 and 12 as well as the text to note 18 have been copied from an inscription made by Sir Karl in June 1984 on the flyleaf and p.{1} of his master copy of 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rkenntnistheorie, Tübingen, 1979. The main text of Section 3 on Xenophanes' misunderstood cosmology also comes from 'Three Notes on Xenophanes'. Section 4 about Xenophanes' theology has been compiled from one manuscript joined with several shorter manuscripts and comments noted in separate handwritten documents. The same holds for Section 5 on Xenophanes' theory of knowledge, where the first part (including the paragraphs to which notes 24 and 25 refer) has been adapted from two manuscripts, while the last part draws on some pages of a paper entitled 'Toleration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 published in K. R. Popper, In Search of a Better World, London, 1992, where Xenophanes' theory of truth is outlined; the four paragraphs on Kepler come from a footnote which Sir Karl prepared in 1990 for a revised version of the latter paper when he still wanted it included as an essay in the present collection. The main text of Section 6 on Xenophanes' moralism comes from the paper on toleration, while the last four paragraphs of this section have been pieced together from scattered remarks, some of which were noted directly on the lists of contents. The main text of Section 7 comes from shorter manuscripts in German and English; the hypothesis about Xenophanes as a precursor of Herodotus has been carried over from the Manuscript starting 'Xenophanes had a hard life'. Addendum 1 comes from 'Three Notes on Xenophanes' and Addendum 2 had been adapted from the paper on toleration. (Wording in square brackets has been inserted to connect manuscript fragments not originally combined by Sir Karl himself. Notes indicated or planned by the author have been tentatively written out by the editor and similarly bracketed. The titles of Sections 2-7, not in brackets, have been adapted from the preliminary lists of contents to announce the main themes of the appropriate sections. Ed.)
Among the restored notes to Essay 2 a few words on note 20 should be added. The distinction between four sets of traditional reports on Xenophanes' cosmology with which Popper operates in his analysis are not unequivocal. With some emendation the following version of the note may be preferable: 'In the first set of reports we have Plato and Aristotle, and in the second set of reports Empedocles and again Aristotle. {In another manuscript dealing with the misunderstandings of Xenophanes' cosmology, Popper talks about three sets of traditional reports, and on a separate sheet he has enlarged the two mentioned sets (corresponding to respectively (1) and (2) + (3) as follows: (1) Plato (A29), Aristotle (A30), Cicero (A34), Sextus (A35), Theodoretus (A33), MXG (A28, 7); (2) Empedocles (DK 31B39), Aristotle (A47), Aetius (B27, A41, 41a, 47), Hippolytus (A33); and he counts as a third set (3) Ps. Plutarch Stromateis (A32) and Strobaeus (A36); finally, a fourth set is mentioned as a "neutral" group, including (4) Galen (A36) and Simplicius (A31, 47).' 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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