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3
달이 달빛을 파메니데스의 두 가지
길에 비추는 방식 (I)
나는 파메니데스(Parmenides)를 - 아낙시맨더(Anaximander), 제노파네스(Xenophanes),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와 함께 - 젤러(Zeller)의 작품 걸작(magnun opus: magnun은 magnum의 오기로 보임. - 역자 주)의 후기본을 편집한 사람으로서 유명한 빌헬름 네스틀러 (Wilhelm Nestle)의 번역서에서 처음 만났다. 나는 15세 내지 16세였고 그 만남에서 압도를 당했다. 그 만남이 뉴튼에게로 가는 첫 번째 단계가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詩)는 빛나는 빛을 내뿜는 태양신 헬리오스(Helios)에 대한 달의 여신 셀레네(Selene)의 사랑을 다룬 파메네데스의 이야기였다 (DK 28 B14-15). 그러나 나는 그 번역이 (그것들의 독일어 이름의 성에 따라서) 달을 남성으로 해를 여성으로 만든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 성을 바로잡기 위하여 ‘달의 여신과 태양신’이나 혹시 ‘셀레네(Selene)와 헬리오스(Helios)’와 같은 제목을 독일어로 된 대구(對句: the couplet)에 붙이는 생각이 나에게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번역을 고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소유하고 있는 그 책은 그런 흔적을 많이 보여준다.
당시 나는 열광적인 뉴튼주의자여서 (나는 아직도 그렇다), 물론, 달에 대한 이론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메니데스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 어떻게 달의 여신이 태양신의 광선을 보는지 지켜보는 생각이 나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태양의 빛을 선물로 받아 밤에 빛나며
달은 지구 주위를 방황하는구나,
항상 자신의 응시를
태양신의 광선 쪽으로 향하게 하고.
nuktifaejς perij gai'an ajlwvmenon ajllovtrion fw'ς,
aijeij paptaivvnousa projς aujgajς hjelivoio.
Bright in the night with the gift of his light,
Round the Earth she is erring,
Evermore letting her gaze
Turn towards Helios' rays.
74-75년 전에 내가 이 시구를 (네스틀러의 번역으로) 처음 읽은 날 이후 나는 달의 여신을 볼 때마다 어떻게 달의 여신의 응시가 태양신의 광선 쪽으로 정말로 향하는지 (태양신이 흔히 지평선 밑에 있을지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감사하며 파메니데스를 기억했다.
이 논문은 계간 고전 (the Classical Quarterly), N.S. 42, 1992년, 12-19 쪽에 실린 논문을 확충 수정한 것이다. 다르게 명시된 곳을 제외하고 모든 번역은 저자가 한 것이다. {두 번째 논문인 ‘파메니데스 II’에 대한 설명은 아래 포퍼의 글 0-5로 인쇄되었다. 편집자}
1 파메니데스의 서사시의 구조
파메니데스의 서사시는 서시(序詩)로 구성되는데 두 가지 본사(本詞)가 뒤따른다: 진리의 길과 인간 추측의 길 (내가 두 번째 본사[本詞]를 그렇게 지칭한다면); 또는 진실한 지식의 길과 추측성 지식의 길.
서시에서 파메니데스는 여신(女神)에게로 자신이 여행한 것과 - 매혹의 경험 - 그녀의 친절한 환대를 기술한다. 그 서시는 그녀가 곧 밝힐 계시에 대하여 간단하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는 (5행으로 된) 요약글로 끝난다. 우리는 그 서시를 완벽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에 여신의 계시 첫 부분인 - 1부 - 진리의 길이 온다. 이것을 우리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가지고 있어서 그 첫 부분의 두 가지 요지는 매우 놀랍지만 완전히 명백하다. 그 요지들은 신(神)들에게 알려진 바와 같은 지식이론이고 현실 세상에 대한 이론이다. 두 가지 요지는 여신이 신적(神的) 권위로써 제공하지만 독단의 정신이 없다. 청취자인 파메니데스는 비판적 사색가로서 취급된다. 계시는 파메니데스의 지성과 아마도 파메니데스의 지적(知的) 자만심에 쏟아진다.
2부인 인간 추측의 길은 무질서하다. 남은 것은 열 두 갈래의 간단한 글의 단편으로 매우 흥미롭고 시적(詩的)이다. 그 단편들은 우주기원론과 천문학 및 인간 생물학에 속한다. 그 단편 중 하나는 (DK B10) 시(詩)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의 계획이고, 이것을 플루타크에게서 기인하는 매우 흥미로운 보고서가 증명한다. 이 두 구절로 인하여 우리는 이 부분에서 얼마나 많은 글이 실종되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플루타크는 자신이 파메니데스의 작품 중 이 부분을 확충된 것으로서, 그리고 고도로 독창적인 것으로서 간주함을 분명히 한다.
2 여신의 계시
그러나 흥분상태를 야기했던 것은 1부 진리의 - 여신이 밝힌 바와 같은 증명 가능한 진리의 - 길이다. 여기서 여신은 파메니데스에게 매우 기괴하여 논리적 증거가 주어지지 않으면 수용될 수 없는 두 가지 것을 밝힌다.
첫째는 우리가 우리의 감각을 신뢰해서는 안 되고, 오직 이성과 논리적 증거만을 (혹은 반증)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현실 세상은 가득 차있다는 것이다: 현실 세상은 지속적인 물질로 된 구형(球形) 덩어리이다. (파메니데스는 순수한 사고력을 신뢰하는 유물론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세상 안에는, 움직임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낳는다.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이 가르침이 틀림없이 거짓일 뿐 아니라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파메니데스의 시에서 충격적인 (그리고 신적[神的]인 지식과 인간이 지닌 오류 가능한 추측을 구분하는 낡은 전통과 완전히 결별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세상이 거짓이고 망상적임을 여신이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제정신을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불가능하고 심지어 정신 나간 듯이 보일 현실적 이론을 그녀가 밝혀서 진리라고 주장하는 - 심지어 증명하는! - 것이다. (우리는 약 1세기가 지난 후에 플라톤이 저술한 파메니데스 128d에서,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저술한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De Gen. et Corr.) 325a13에서 이것에 대한 반향을 읽는다; 그리고 거의 500년이 지나서 다시 플루타크가 모랄리아(Moralia) 1113f의 콜로테스에 대한 반박 (Adv. Col.)에서.
3 문제
그러나 파메니데스는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여신의 진짜 계시와 여신이 자신에게 말했던 것을 기술하려고 노력한다. 진짜 계시가 - 위대한 빛의 섬광이 - 있었다. 이것이 그가 특히 서시에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위대한 계시로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 계시는 그에게 틀림없이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 문제는 무엇일까?
파메니데스가 지녔던 문제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리고 계시에 대한 그의 매료된 감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여기 이것이 내가 지닌 문제이다.
4 나의 문제에 대하여 제시된 해결책
파메니데스는 (뉴튼의 자연철학[philosophia naturalis]의 의미에서) 자연 철학자였다. 매우 중요한 천문학적 발견 전부가 그의 업적으로 치부된다: 샛별(the Morning Star)과 개밥바라기(the Evening Star)가 동일한 별이라는 것; 지구는 (아낙시맨더가 생각한 바와 같은 원주형태의 북[drum]이라기보다는) 구형(球形)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빛을 받은 달의 반구(半球)가 지구에서 목격되고 달의 상(相)은 그 변하는 모습 때문이라는 그의 발견이다.
이것 전에는, 달의 상(相)에 대한 가장 창조적인 이론이 헤라클리투스에게서 나왔다. 달은 태양은 지구 주위를 선회하는 (금속?) 주발들 안에 갇힌 불이라고 상정(想定)함으로써 그는 달의 상(相)과 일월식을 설명했다: 달과 태양은 우리를 향하여 자신의 등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체적으로 돌릴 수 있었다. 이 이론에 따라서 달은 더 이상 차거나 이지러지지 않고 있었지만 달의 상(相)은 여전히 달 안에서의 실제적인 움직임의 결과였다. 그러나 파메니데스의 새로운 발견에 따라서 달의 상(相)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달의 상(相)은 달 안에서의 실제적인 변화나 움직임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달의 상(相)은, 오히려, - 빛과 그림자가 하는 장난의 기만적 결과인 - 망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각을 우리를 오도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감각을 우리를 기만한다: 우리는, 실제로 달이 움직이지 않는데 달이 움직인다고 믿는다; 그 대신에 빛이 달의 검고 변하지 않는 몸체에서 장난을 친다.
그러면 빛은 무엇인가? 물체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다. 빛은 저항하지 않는다 - 빛은, 열과 차가움이 (가령 우리의 얼굴로써 느껴질 수 있을지라도) 몸체를 지니고 있지 않은 바와 꼭 마찬가지로, 몸체를 지니고 있지 않다. 빛은 현상일 뿐이고 단지 우리의 감각인 우리의 눈에 영향을 미친다. 빛에는 현실성이, 현실적 존재가 없다. 우리는 빛에게 이름을 부여한 적이 없다: 오직 현실적이고 존재하는 것만 이름을 부여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의 감각은 거부되어야 한다. 우리의 감각으로 인하여 우리는 불가능한 추측을 하게 된다.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움직임을 매우 분명하게 본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심지어 증명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달의 상(相)에서 예전에 보았던 움직임을 반증할 수 있다 (B7):
없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득세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탐구로부터 당신의 사고를 철회하라; 많이 시험당한
버릇인 경험이 당신을 얽매도록 하지 말라. 그리고 당신의
보이지 않는 눈이나 들리지 않는 귀나 심지어 반증으로서
내가 당신에게 여기서 설명한 흔히 논쟁의 대상이 되는 논증을
방황하지 않게 하라.
Never shall it prevail that things that are not are existing.
Keep back your thought from this way of inquiry; don't let
experience,
Much-tried habit, constrain you. And do not let wander your
blinded
Eye, or your deafened ear, or even the often-contested
Argument that I have here expounded to you as disproof.
이것이 여신의 지성주의나 이성주의이고 경험주의에 대한 그녀의 반증인데 특히 감각을 지식의 근원으로서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나 위대한 발견자는 자신의 발견을 일반화 하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다. 셀레네는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런 움직임을 정말로 지니고 있지 않다. 아마도 우리는 이것을 일반화 할 수 있을까?
그 후 위대한 지적(知的) 영감인 계시가 왔다: 한 번의 섬광으로 파메니데스는 실재란 (달처럼) 농밀한 물체로 된 검은 구(球)임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증명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정말로 불가능했다.
증거는 (다소 단순화하여) 다음과 같았다:
(1) 오직 존재하는 것만 존재한다.
(2) 비존재(the nothing, the non-being)는 존재할 수 없다.
(3) 비존재는 존재의 결여일 것이다: 비존재는 무(無)일 것이다.
(4) 무(無)는 존재할 수가 없다.
(5) 세상은 충만하다: 덩어리이다.
(6)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파메니데스가 말하는 진리의 길 첫 번째 행에 함께 언명되고 자신이 첫 번째 길이라고 명명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그의 기본적인 이성적 가설 (1)과 (2)에 관한 파메니데스의 글 B2를 인용하면:
들어라! 그리고 당신들이 그 뜻을 이해하면 나의 요지를 지니고 떠나라!
사색이 가능한 유일한 두 가지 의문의 방법을 주목하라:
한 가지는 현재 존재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비존재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설득의 길로, 진실의 시녀이다; 이제 다른 방법으로!
이 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가 아닐 것이다.
그 길은 - 나로부터 가져가라! - 다만 사색될 수 없는 길이다.
이유인즉 당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행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또한 당신을 그것을 말할 수 없다.
추론과 직감적인 논리적 사고를 근거로 두 번째 길을 배척함으로써 (아마도 국지적 회전을 제외한) 움직임이 파괴되고, 동시에 상식이 파괴된다.
내가 여기에 인용한 진리의 길에 대한 파메니데스의 첫 번째 언명에서 그는 주어 ‘그것(it)’을 생략함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더 자연스럽게 말을 한다. 그는 자신의 주제를 지칭함으로써 자신이 질문을 구걸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듯하다: 존재에 대한 질문. 그러나 이 생략은, 당돌한 이론을 그 이론에 대하여 탁월하게 간단하고 직감적으로 확신을 주는 증거를 제시하는 놀라운 배합을 통하여, 조금도 주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질문이다.
5 흔적인가? 아니면 증거인가?
내가 제시한 해결책은, 위대한 발견은 강력한 섬광처럼 그 발견자의 눈을 멀게 만들어 그 발견이 실제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 아마도 모든 것을 - 설명한다고 믿게 만든다는 확립된 사실을 이용한다.
파메니데스가 달의 상(相)에 대한 사실적 설명을 발견한 것은 위대한 발견이었다. 그 발견은 곧 월식에 대한 설명으로,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의 선배노릇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물론 내가 제시한 해결책은 증명될 수 없다. 그 해결책은 한 인간의 사색에 대한 역사적 가설이다. 그 사색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 사색이 어떤 설득력을 지니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한 우리가 지닌 글에는 몇 가지 흔적이 있지만, 나의 이론에 비추어 그 흔적들은 매우 잘 이해될 것이다. 그 흔적들은 나의 이론을 위하여 증거와 같은 것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데 물론 약한 증거이다.
나의 이론은 여신의 말 1부와 2부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나의 이론은 특히, 여신이 말하는, 두 부분을 연결하는 인간의 지식론적 추락에 (칼 라인하르트 [Karl Reinhardt]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der Südenfall der Erkenntnis) 관한 매혹적인 이야기를 설명한다. 여기에 해석된 바와 같이 파메니데스에 따르면 그 추락은, 오직 하나 - 밤, 어두운 달, 어둡고 무거운 물질 - 대신에 두 가지 것에 - 빛과 밤 -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달려있다. 금지된 움직임은 ‘빛’에 - 비물질에 -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 지적(知的) 죄인인 인간들 - ‘길을 잘못 들어선’ 장소이다. 그로 인하여 인간들은 비물질과 무(無)와 공간과, 그리하여 움직임(의 가능성)을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가설은, ‘밤(night)’라는 이름이 허용될 것인 반면, ‘빛’을 금지된 이름으로 골라낸다: 달이 본질적으로 그러하듯이 물질도 본질적으로 빛이 물질 위에서 노닐지 않으면 암흑이다. 비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만하고 우리가 지닌 세계-그림과 우리의 추측과 우리의 ‘견해’를 도착(倒錯)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신은 서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B1: 31-2), 추락 이야기를 (B8: 53-61)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약속을 한다:
그러나 망상적 추측이, 사실로 수용되기로 되어, 만물을 통과하여
길을 뚫는다는 것이 어떻게 왔는지 당신은 또한 배울 것이다.
But you also shall learn how it came that the illusive conjecture,
Bound to be taken for real, was forcing its way through
all things.
그 다음에 여신이 실제로 진리의 길 끝에 그리고 우리의 지적(知的) 추락에 대한 이야기에 왔을 때,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B8: 50-2):
여기서 나는,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정도까지, 나의 담론과 진리에 대한
나의 분명한 생각을 끝낸다. 당신이 매혹적으로 정돈된 나의 시를
기꺼이 듣고자 할 때, 이제 인간의 추측에 대하여 배우라.
Here I am ending my discourse, so far as it can be relied on,
And my clear thoughts about truth. Now learn of human conjectures,
When you will listen to my so beguilingly ordered verses.
그러나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인간의 추측을 다루는 이 매혹적인 시구로써 그녀가 시작하기 전에, 그녀는 우리의 지적(知的) 추락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내가 보기에 매우 중요하다. 그 이야기는 나의 역사적 가설에 비추어 보면 이전 (설명을 위하여 흔히 헤시오드[Hesiod]의 영향이 요청되었을 때) 보다 이해하기가 정말로 더 쉽다.
나는 그 이야기를 인용할 것이다; ‘그들’은 추락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지적(知的) 죄인들임을 기억하라 (B8: 53-4):
그들은 두 가지 형체에 이름을 붙이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중에서 하나는 주어진 이름을 갖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이 그들이 길을 잘못 들어 선 장소이다...
Two forms they made up their minds that they would give
names to;
But of these two, one was not permitted to have a name given.
This is where they have gone astray...
이름이 붙은 두 가지 ‘형체’는, 언급된 바와 같이, 빛과 밤(night)이다. 그것들은 나의 이론에 대한 시금석이라고 거의 주장될 것을 나에게 제공한다.
이유인즉 지금까지 (내가 검토한 모든) 대부분의 학자들은 직감적인 근거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명될’ 수 있었던 것은 빛이라고 상정(想定)했으며, 명명되지 말았어야 할 것은 비실재적인 밤(night)이라고 상정(想定)했다; 나의 가설은 반대로 제시하는 반면. 누가 옳은가?
내가 나의 가설을 (빛은 명명되지 않았어야 한다는 가설을 포함하여) 언명한 후 겨우 1년이 지나서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나에게 떠올랐다. 그 방법을 아주 쉬웠다. 반대되는 것의 명단을 만드는 것! 내가 분명하게 생각하지만 이로 인하여, 밤(night)이 어둠과 무거움과 몸체와 (B8: 59, pukinojn devmaς - 가장 결정적인 장소), 추위와 늙은 나이와 죽음과 비동작과, 물질의 편에 있는 반면, 빛은 비존재와 무(無)와 비실재와 변화와 움직임과, 따뜻함과 젊음과, 사랑과 망상과 욕망 (예를 들어 헬리오스의 광선, B15) 편에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밤은 실재적인 존재이다; 밤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시간이 없는 진리이다.
모든 사람은 이것을 검토할 수 있다. 그것은 진리의 길과 추측의 길을 융합하여 하나의 잘-언명된 - 그러나 비관적인 - 총체적 작품을 만든다. 파메니데스는 삶을 그 따뜻함과 움직임과 아름다움과 시 속에서 본다. 그러나 얼음과 같은 진리는 죽음이다.
6 몇 가지 산재하는 비평들
나는 나의 이야기의 종점에 왔다. 나는 다만 내가 충격적인 오역으로 간주하는 것에 관하여 몇 마디 비평을 덧붙이고자 한다. (그 오역은 1897년 발간된 딜즈의 파메니데스의 책 이후 더 악화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오역 중 최악의 오역은 B16에 대한 번역이다. 나는 그 번역 몇 가지가 충격적으로 오역되었음을 나의 저서 추측과 논박에서 (1963년 초판본 발행, 1898년 5판으로 그 판본에 서술된 비판은 부분적으로 나의 현재 비판을 보완한다), 나는 논의했지만 나의 옛 비판은 무시되었던 듯하다: 나는 몇 년 후 새롭고 매우 진지한 번역을 발견했다. 유명한 학자들은 (인정되는 바와 같이 난해한) 원문을 이해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내가 믿기에 최고의 번역은 헤르만 딜즈 (Hermann Diels)의 번역이었다. 표본 번역은, 불행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해주는 원문 형이상학 (Metaphysics) 1009b22-5에서 대표적인데, - 테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의 원문이 더 낫다 - 데이비드 로스 경(Sir David Ross)의 번역으로 (나는 그가 형이상학을 번역한 것인 1928년의 2판으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다음과 같다:
이유인즉 많이 굽은 사지(四肢)가 구성될 때마다와 같이,
인간의 정신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모든 사람에게서
생각하는 것은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 그들의 사지(四肢)의 본질:
이유인즉 더 많은 것이 있는 것은 사고(思考)이기 때문이다.
For as at each time the much-bent limbs are composed,
So is the mind of men; for in each and all men
'Tis one thing thinks - the substance of their limbs:
For that of which there is more is thought.
나는 이것이 영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단어들은 영어이지만 그 단어들은 - 거의 고의적으로 - 투시되지 않는 안개 속으로 짜여 들어갔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다른 번역들도 동일하다 (아마도 딜즈가 한 번역을 제외하고; 딜즈-크란츠[Diels-Kranz]는 최악의 번역을 했다). 그러나 여신이 밝히는 두 가지 주요 진리 중 하나를 - 파메니데스의 공격적인 반-경험주의 혹은 반-감각주의 - 고려하면, B16은 완벽하게 명료하고 대단히 흥미로워진다: 합당하게 번역되어지면, 그 글은 감각적 경험주의에 대한 - 실제로, 처음에 감각에 들지 않은 것은 지성에 들지 않는다 (Nihil est in intellectu quod non antea fuerat in sensu)는 유명한 (그러나 다소 약한) 언명에서 잘 알려진 가르침에 대한 - 신랄하고도 고도로 냉소적인 공격이다. (지금까지 이런 종류 중 최초로 알려진 교설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교설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교설을 틀림없이 프로타고라스의 교설보다 반세기 앞서 존재했다. 물론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s] 1009b13에서 언급되어 가볍게 비판을 받지만 시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래 참조.)
우리는 B16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s) 1009b21과 테오프라스투스의 감각론(De Sensu) (DK A46)이라는 글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투스 두 사람 모두가 파메니데스의 글 DK B16에 대한 자신들의 글을 보고하고 토론하는 문맥은 감각 감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고(思考)는 감각 감지이며 감각 감지는 물리적 변화라고 상상하는’ 철학자들을 중요하게 언급하면서 인용이 발생하는 문단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알게 될 것처럼 파메니데스가 B16에서 신랄하게 비아냥거리며 공격하는 정확하게 사고에 대한 감각주의적인 (그리고 기계주의적인) 그 이론을 명확하게 언명한 것. 테오프라스투스는 더 나은 원문을 전해주는데 그 원문을, 역시 감각 감지를 토론하지만 주로 B16과 관련이 없는 문제로써 토론하며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예를 들어 DK 31B90) 글의 한 가운데에 둔다: 우리가 추위로써 추위를 감지하는지, 달콤함으로써 달콤함을 감지하는지, 혹은 반대되는 것으로 감지하는지 - 뜨거움으로 추위를 그리고 쓴 것으로 달콤함을 - 또는 그렇지 않은지. (테오프라스투스는 이 문제를 B16과 역시 관련이 없는 또 다른 문제와 연결한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투스는 감각 감지에 관한 문맥으로 B16을 보고하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번역에서 이것을 드러내는 것은 없다. 그들은 (μέλος의 복수 소유격인) μϵλέων을 ‘사지(四肢)’로 해석한다. 그러나 당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지체에 관해서 (De Partibus Animalium) 645b36-646a1에서 다음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지체의 보기는 코, 눈, 얼굴이다; 이것들 각각은 μέλος라고 이름이 붙는다.’ 이것을 로엡(Loeb) 판은 ‘“사지(四肢)” 혹은 “기관(器官)”’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어가 아니다! 누가 코나 눈이나 얼굴을 영어로 ‘사지(四肢)’나 ‘기관(器官)’으로 부를 것인가? 물론 우리는 코나 눈을 감각 기관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리고 얼굴 또한, 우리가 감지를 위하여, 가령, 찬바람에 대하여 얼굴을 사용한다면, 그렇다. 그러나 사전에는 ‘사지(四肢)’나 ‘기관(器官)’으로 나와 있지 ‘감각 기관’으로 표기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합당한 영어가 아닐지라도 그것이 전부다 (이 문맥에서 Glied[사지<四肢>]가 올바른 독일어가 아닐 뿐인 바와 꼭 마찬가지로; 딜즈가 바른 용어를 사용하면서 깨달았던 바와 같이).
나는 이제 아리스토텔레스의 문맥과 (테오프라스투스의 문맥은 아니다) 파메니데스의 이성주의와, 감각주의에 대한 파메니데스의 증오 및 경멸과, 그리고 분명히 그가 증오하는 교설에 대한 증오와 경멸을 기억하면서, 그 글에 대한 번역으로 선회한다: 이성적 사고 (지성[intellect])는 물리적 변화와 연결된 감각 감지이다. 그리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투스 두 사람 모두 μέλος가 다음을 의미함을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냄새를 맡기 위한 코나 보기 위한 눈이나 듣기 위한 귀. 결과적으로 번역은 이제 다음과 같이 보인다:
어느 한 때 그들이 지닌 많이 잘못을 저지르는 감각기간의
혼합물인 것,
그것이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것으로서 사고에 대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이유인즉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력과,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의 본성이나 합성물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이 혼합물에서 우세한 것이 사고가 된다.
What is, at any one time, in their much-erring sense organs' mixture,
That's what men use as standby for thought. For they treat,
as if equal,
Reasoning powers of man, and his sense organs' nature or
compound.
What in this mixture prevails becomes thought, for each man
and all.
이것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기에 파메니데스가 옹호하고 있던 바로 그 이론을 격렬하게 비아냥거리며 제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정적인, 그리고 파메니데스에게는 매우 특징적인, 단어인 ‘많이 잘못을 저지르는 [much-erring]’을 잘못 기억하여 그 단어를 ‘많이 비하되는 [much-humbled]’이라는 단어로 대체하여 파메니데스가 감각들이 평가 절하되는 것에 대항하여 감각들을 옹호하고 싶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칼 라인하르트는 파메니데스의 조소와 경멸을 잘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 라인하르트는 B16이 여신의 말 2부에서 발견되는 거짓이지만 진지한 인간 추측의 한 가지라고 믿었다. 나는 이것이 가능함을 인정한다: 그것은 바보들의 (혹은 이중 머리들의) 정신이 작동하여 진지하게 추측하는 것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문맥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없다. 나에게는 B16이 B6처럼 직선적인 풍자적 공격이며 그것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쉽다.
내가 지닌 이유는 여신이 결국 파메니데스를 통하여 (B2: 1)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위하여 그러나 감각주의에 반대하여 선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탁월한 추측 가운데서, 인간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지만 감지할 수만 있어서 자신들의 감각 인상을 사색으로 오해할 수 있을 따름이라는 견해를 전파하는 일과 결합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어느 문맥 안에서 B16이 발생했는지 알지 못할 따름이라고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강요를 받는다면 나는 B6 근처의 진리의 길에 있는 장소에 찬성의 표를 던지겠다.
B7과 별도로, 파메니데스가 자신의 논리적 사고 방식을 또한 분석했다는 표시가 내가 믿기에 B5이다:
... 내가 어디서 시작하는지는 나에게 마찬가지다:
바로 그 장소로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 It's all the same to me where I begin:
Just to that very place I shall come back again.
내가 생각하기에 B5는 그가 자신의 직감적인 논리적 단계를 일방적인 추론들이라기보다는 논리적으로 동등한 것들로 보았음을 밝힌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단계인 (6)단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7 간단한 평가
내가 생각하기에 파메니데스는 최초의 위대한 이론가로 최초로 연역 이론을 창안한 사람이었다: 역사상 바로 최고로 위대한 사상가의 한 분. 그는 최초로 연역법을 구축했을 뿐 아니라 가장 야심적이고 가장 대담하며 충격적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논리적 유효성은 직감적으로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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