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미국 서부여행/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6. 11. 15:06

esc

존 웨인처럼, 인디언처럼 캐니언에서 하룻밤을

등록 :2015-06-10 19:51수정 :2015-06-10 20:44

[esc 커버스토리] 캠핑으로 떠나는 미국 서부 자이언·브라이스·그랜드캐니언 국립공원과 모뉴먼트밸리 여행

브라이스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
화려한 유흥의 도시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벗어나 달린 지 얼마나 됐을까? 주 경계선을 넘으려는 우리를 배웅하는 건 고속도로 휴게소의 마지막 카지노다. 도박이 합법인 네바다주답다. 애리조나주의 귀퉁이를 살짝 거쳐 유타주로 들어섰다. 반나절 만에 3개 주 땅을 밟은 셈이다.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자이언 국립공원. 자이언캐니언으로도 통하는데, 거대한 협곡이라기보다는 시냇물보다 조금 더 넓은 버진강이 흐르는 바위산 지대라 보면 된다. 자이언은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 시온 언덕의 영어식 표현이다. 19세기 중반 이곳을 처음 발견한 모르몬교도가 ‘신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여러 트레킹 코스 중 ‘에메랄드풀스 트레일’을 걸었다. 버진강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걷는 코스로, 2시간이 채 안 걸린다. 걷다 뒤를 돌아보니 아름다운 절벽과 새파란 하늘이 인자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것 같다. 포근하다. 신의 품, 아니,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안온하다. 자이언은 이름처럼 안식의 땅이다.

다시 차를 타고 동쪽으로 130여㎞ 떨어진 브라이스캐니언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역시 모르몬교도인 에버니저 브라이스가 발견해 그의 이름을 붙였다. 캐니언이라 부르지만, 물이 흐르는 협곡은 아니다. 오래된 지층이 융기작용으로 솟은 뒤 비와 바람에 깎이고 단단한 부분만 남아 ‘후두’라 부르는 탑 모양 사암이 됐다. 자연이 빚은 예술품들이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는 광경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니 우주의 어느 행성에 온 것만 같다. 때마침 드리운 저녁놀이 더욱 비현실적인 경관으로 만든다. 아래로 내려가는 1~20㎞의 여러 트레킹 코스가 있지만, 맛보기로 살짝만 걷고는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인근 캠핑장으로 옮겼다. 텐트를 치는 대신 인디언 천막인 ‘티피’를 빌렸다. 모닥불을 피우고 준비해 간 갈비를 구웠다. 배불리 먹고 티피에 들어가 누웠다. 브라이스캐니언은 해발 2500m의 고지대다. 6월에도 새벽에는 기온이 5℃ 밑으로 떨어진다. 두툼하게 챙겨 입고 침낭에 파묻혀 얼굴만 내놓고 잠을 청했다. 코가 시렸다.

눈을 뜨니 어느덧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아침이다.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오는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차에 올랐다. 이제 모뉴먼트밸리에 갈 차례다. 인디언 최대 부족인 나바호의 성지로, 배우 존 웨인을 스타로 만든 서부영화의 고전 <역마차>(1939)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달리기 장면과 사막을 배경으로 하는 광고로도 익숙한 이곳은 국립공원이 아니다. ‘나바호국’이라는 인디언 자치구역에 속한 나바호 부족 공원이다. 나바호 인디언들이 관리를 맡고 있다.

우주의 어느 행성 온 듯
자연이 빚은 예술품
트레킹 코스도 다양
인디언 천막 티피에서
모닥불 피우고 캠핑

모뉴먼트밸리
모뉴먼트밸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3개가 눈에 들어온다. 붉은빛과 흙빛이 섞인 이런 바위들을 모뉴먼트(기념비)라 부른다. 자신을 존이라 소개한 인디언이 운전하는 4륜구동차를 타고 속살로 들어갔다. 인디언의 안내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곳곳에 자리한 여러 모양의 모뉴먼트에는 제각각 이름이 붙었다. 미튼 바위, 메릭 바위, 코끼리 바위, 세자매 바위…. 바위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저 높은 바위 꼭대기에서 말 탄 인디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환영이 보인다. “이 모래언덕은 지속적으로 조금씩 높아지고 있고, 50년 뒤에는 이 바위 모양도 조금은 바뀌어 있을 것이다. 자연은 신비롭다.” 존이 말했다. 경이로운 대자연 앞에 고개를 숙이게 되는 순간이다.

모뉴먼트밸리 호건
모뉴먼트밸리 호건
모뉴먼트 계곡에서 ‘나바호 타코’로 저녁식사를 하고 인디언 전통 흙집인 ‘호건’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동쪽으로 난 문을 빼고는 사방이 막혔다. 다만 공기순환을 위해 천장 가운데를 뚫었다. 이곳은 전기도 수도도 없다. 물티슈로 몸을 닦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호건 안은 따뜻했다. 새벽녘에 잠을 깨 밖에 나와 보니 밤하늘에 보름달과 별이 총총히 떠 있었다. 하늘과 땅과 바위와 내가 하나로 이어진 듯한 느낌. 인디언들이 왜 이곳을 성지로 삼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모뉴먼트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역마차>의 존 포드 감독 이름을 딴 ‘존 포드 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었다. 단 하룻밤을 보냈을 뿐이지만, 신성한 기운으로 몸과 마음이 정화된 듯했다.

그랜드캐니언
그랜드캐니언
이제 미국 서부 여행 코스에서 자이언·브라이스와 함께 꼽는 ‘3대 캐니언’의 맏형 격인 그랜드캐니언이 남았다. 애리조나주에 자리한 세계 최대 협곡이다. 총길이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거리와 비슷한 460㎞, 너비 6~30㎞, 평균 깊이는 설악산 높이와 비슷한 1600m에 이른다. 1540년 금을 찾아 미국에 온 스페인 탐험대가 발견해 거대하다는 뜻의 스페인어 ‘그란데’로 표현한 것이 지금의 이름이 됐다. 협곡을 흐르는 콜로라도강을 기준으로 북쪽을 노스림, 남쪽을 사우스림이라 부른다. 보통 관광객들은 사우스림에서 노스림 쪽을 바라본다.

자이언 국립공원
자이언 국립공원
패키지여행이라면 라스베이거스에서 5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와서는 잠시 둘러보고 사진 찍고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러기엔 그랜드캐니언이 너무도 넓고 깊다. 사우스림을 따라 걷거나 콜로라도강까지 내려가는 트레킹 코스를 경험해봐야 그랜드캐니언의 속살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다. 체력과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면 바닥까지 내려가는 건 무리다. 이번 여정을 인솔한 재미동포 투어리더 케니 지(지성진)는 “강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려면 최소 10시간 넘게 걸리는데다 고지대여서 일반적인 등산보다 훨씬 더 힘들다. 경험하고 싶다면 1시간 정도만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게 좋다”고 말했다. 내려가는 대신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을 따라 난 오솔길을 걸었다. 넘어가는 석양빛에 바위 색깔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불어오는 바람이 귀에 대고 뭐라 뭐라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무슨 뜻인지는 바람만이 알았을 터다.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래는 그날 밤 그랜드캐니언 캠핑장 텐트에 누울 때까지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헬기를 탔다. 1인당 30여만원을 내면 45분 동안 협곡을 한바퀴 돈다. 협곡 위를 날던 헬기가 노스림의 절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사우스림에서 보기에 다들 엇비슷해 보였던 절벽의 실핏줄까지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가슴이 벅차올라 사진 찍을 생각조차 잊었다. 그 순간의 감동만으로도 큰돈이 아깝지 않았다. 헬기에서 내린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유타·애리조나/글·사진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취재협조 미국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