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부 지역의 캐니언에는 자이언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만 있는 게 아니다. 이 셋보다 규모는 한참 작아도 아름다움만은 결코 뒤지지 않는 앤틸로프캐니언이 있다. 애리조나주의 작은 도시 페이지에서 지프를 타고 10여분 가면 앤틸로프캐니언 입구에 닿는다. 나바호 인디언 자치구역이라 모든 투어 프로그램은 인디언이 운영한다.
앤틸로프캐니언은 무척 좁은 사암 협곡이다. 인디언 소녀가 잃어버린 가축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앤틸로프는 ‘영양’을 뜻한다. 이곳이 관광객에게 개방된 건 1997년부터다. 사람이 입구부터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어퍼 캐니언과 폭이 너무 좁아 사다리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로어 캐니언으로 나뉜다. 일반적인 관광객은 어퍼 캐니언으로 들어간다.
1997년 공개한 앤틸로프캐니언
사진가들이 사랑하는 출사지
최초 대륙횡단 고속도로 ‘루트66’
문화·역사 여행지로 거듭나
이곳은 빛의 마법이 일어나는 곳이다. 좁은 틈새로 들어오는 빛의 각도에 따라 협곡의 색깔이 천양지차로 바뀐다. 눈으로 볼 때보다 사진으로 찍었을 때 아름다움이 극대화된다. 때문에 사진가들이 특히 사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인디언 가이드를 따라 사진을 찍으며 한바퀴 돌고 나오는 관광객 투어 코스와 2시간30분 동안 삼각대를 이용해 자유롭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가 투어 코스가 있다. 태양이 꼭대기에서 수직으로 내리쬐는 정오께가 가장 좋은 시간대다.
인디언 가이드는 “카메라의 화이트밸런스를 ‘구름’ 모드로 놓으면 사진이 더욱 멋지게 나온다”고 귀띔했다. 알려준 대로 하니 사진 속 협곡 벽면의 색깔이 더욱 환상적으로 바뀌었다. 협곡을 흘렀을 물과 바람과 빛이 빚어낸 도자기를 보는 듯했다. 폭이 워낙 좁은 곳이라 비가 조금만 와도 입장이 금지된다. 1997년 유럽에서 온 관광객 10여명이 갑자기 불어난 물에 숨진 적이 있다고 한다. 자연은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이다. 사람은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해야 한다.
앤틸로프캐니언 부근에 있는 ‘호스슈 벤드’도 작지만 아름다운 자연의 작품이다. 절벽 위에서 300m 발아래 콜로라도강이 말발굽 모양으로 휘돌아 가는 광경을 감상할 수 있다. 말발굽 전체를 한 장의 사진에 담으려면 광각렌즈가 필요하다. 주차장에서 호스슈 벤드까지 뜨거운 사막을 1㎞ 넘게 걸어야 하므로 물과 모자, 선글라스를 꼭 챙기는 게 좋다.
앤틸로프캐니언과 호스슈 벤드가 자연이 뚫은 길이라면, 사람이 뚫은 것이 관광 코스가 된 길도 있다. 냇 킹 콜의 노래로도 유명한 ‘루트66’이다. 1926년 개통된 루트66은 미국 최초 대륙 횡단 고속도로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미시간 호수에서 시작해 미주리,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거쳐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 해변까지 8개주 4000㎞ 거리를 관통한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좇아 동부에서 서부로 삶의 터전을 옮기려는 이주민들의 주요 이동경로이자, 많은 이들의 추억이 서려 있는 특별한 길이다. 미국의 대문호 존 스타인벡은 대공황에 처한 1930년대 미국의 농민과 이주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다룬 소설 <분노의 포도>에서 루트66을 ‘마더 로드’(어머니의 길)라 표현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렇게 부른다.
루트66 복원이 시작된 애리조나 소도시 셀리그먼.
그러나 1950년대에 더 넓고 빠른 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루트66을 찾는 이들이 급격히 줄었다. 1985년에는 아예 고속도로의 자격을 잃었다. 루트66이 지나는 애리조나 소도시 셀리그먼의 이발사 에인절 델가디요는 이를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는 1987년 ‘애리조나 루트66 보호협회’를 만들고 쇠락한 옛길의 명성을 복원하는 데 앞장섰다. 이런 움직임은 다른 주로도 퍼져나갔고, 결국 ‘히스토릭 루트66’이란 이름의 문화 역사 도로로 거듭났다. 픽사 애니메이션 <카>(2006)는 루트66이 지나는 쇠락한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다뤘다. 존 래시터 감독은 구상 단계에서 에인절 델가디요를 만나 많은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랜드캐니언에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셀리그먼은 높아봐야 2층 건물이 전부인 작은 도시였다. 곳곳에 루트66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기념품 가게들이 즐비했다. 에인절 델가디요의 이발소는 이제 관광 거점이 됐고, 작고한 그의 사촌 형이 운영했던 햄버거·아이스크림가게 ‘스노캡’은 이 길을 지나는 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명소가 됐다. 스노캡 문을 열고 들어가니 관광객들이 벽에 붙여놓은 명함들로 가득했다.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뒷마당에 가니 <카>에 등장하는 자동차 캐릭터들을 재현한 차들이 눈에 띄었다.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았다.
다시 차에 몸을 싣고 루트66을 따라 라스베이거스로 향했다. 운전하던 재미동포 인솔자는 “미국 사람들은 이 길에서 추억의 팝송을 듣지만, 우리에게는 7080 가요가 있다”며 ‘쎄시봉’ 노래를 틀었다. 평온한 루트66의 풍광과 기묘하게 잘 어울렸다.
애리조나/글·사진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미국 서부 여행 정보
15인승 승합차. 자유여행형 상품에선 이 차를 많이 타게 될 것이다.
미국 서부의 속살을 제대로 즐기려면 자동차를 타고 자유여행을 하는 것이 제격이다. 자이언캐니언, 브라이스캐니언, 그랜드캐니언 등에는 유료 캠핑장이 있어 텐트를 치고 야영하기 편리하다. 화장실, 샤워실 등도 갖춰져 있다. 다만 고지대여서 밤에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만큼 여름에도 두툼한 침낭과 겨울용 옷도 준비해 가야 한다. 그랜드캐니언이나 모뉴먼트밸리에는 호텔이나 통나무집도 있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 한참 전에 예약해야 한다. 미국관광청 누리집 www.discoveramerica.co.kr
철저한 준비가 필요한 자유여행이 여의치 않다면 자유여행형 상품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이동과 숙식을 같이 해결하고, 여행지에서의 일정은 각자 자유롭게 하는 식이다. 미 대륙 전문 여행사 ‘트렉아메리카’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출발해 자이언캐니언·브라이스캐니언·모뉴먼트밸리·그랜드캐니언을 도는 4일 코스 상품을 1인당 800달러대에 내놓았다. 주로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과 미국인 투어리더의 인솔에 따라 15인승 승합차로 움직이며 캠핑을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글로벌 문화를 접할 수 있다. 다만 트렉아메리카 상품은 만 18~39살만 이용 가능하다. 나이대가 안 맞는다면 자매상품 ‘그랜드 아메리칸 어드벤처’를 고려해볼 만하다. 나이 제한 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기간도 최소 일주일 이상으로 긴 편으로, 여행 방식은 트렉아메리카와 대동소이하다.
휴가기간이 길어야 일주일인 한국인에게 맞춘 상품 ‘골드러시’도 있다. 매주 월요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해 라스베이거스·그랜드캐니언·모뉴먼트밸리를 돌고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오는 5일 코스 상품이 1인당 800달러대다. 한국말을 하는 재미동포 투어리더가 인솔하며, 한국인들끼리 여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매콤한 고국 음식을 그리워할 것을 대비해 한국 컵라면도 준다.
이들 상품 예약을 현지에서 하기보다는 국내여행사 ‘허클베리핀’을 통하는 것이 편하다. 허클베리핀이 트렉아메리카의 한국사무소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허클베리핀의 고진석 대표는 “미 서부뿐 아니라 동부, 대륙횡단 등 다양한 자유여행 상품이 있다”고 말했다. (02)778-6778. www.fintour.co.kr
글·사진 서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