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인터뷰 ①
“국민 가운데 구조 못보는 ‘구조맹’ 많아
박근혜 대통령은 앉혀지고 얹힌 존재
개인에 초점 맞추면 세상 제대로 못봐”
“120년 전 동학혁명 때와 현재, 너무 닮아
서구 추종 근대화·성장 패러다임 등
이제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할 때 되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가 지난 2월 자신의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대한민국 역사에서 박근혜 정권의 등장이 유의미한 것은, 박근혜야 말로 박정희 신화를 스스로 허물어뜨린 것, 그것이 유일한 역사적 기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얘기가 있을 정도인데, 정말 그렇게 되는 걸까요?”
“두고 봐야겠지만. 그럴 듯한데요.
특히 경상도 사람들 말이에요, 내가 칼럼에 쓰려고 하는 것 중에 ‘구조맹’이라는 게 있는데요. 이 세상을 구조로 보지 않고 인물로 보는 우리 사회의 후진적 정치의식, 정치문화를 뜻해요. 60대 이상 사람들이 대부분 구조맹인데, 이명박 박근혜가 각기 다른 당 소속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정치적 인과관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대통령의 권한이 여전히 막강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문제죠. 저는 박근혜가 정권 재창출에 모든 걸 걸고 있는 보수지배세력에 얹혀 있다고 봐요.” “결국 박근혜 현상이라는 것이 10년의 민주정부 시절에 박탈감을 느낀 구보수세력의 반란인데, 내 식으로 말하면 서서히 진행되는 쿠데타, 합법적인 틀을 지닌 쿠데타라 할 수 있어요. 이게 과거의 구보수와 다른 점은 10년의 민주세력 집권 때의 박탈감 때문에 그만큼 업그레이드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대표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앉혀 놓은 것이란 점이죠. 우리가 그걸 잘 봐야 합니다.” “나는 박근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즉 문제의 초점을 흐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근혜 현상은 퇴행적 현상입니다. 이명박, 박근혜가 합리적 보수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반공보수를 끌어안았다는 게 우리 역사의 큰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 그 취약성이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헤게모니의 부재인데, 이 사람들이 돈도 있고, 재벌 쪽도 다 그들 편이고, 우리 사회의 지식인과 언론인들 또한 그쪽 편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습니까. 잘 하면 진보세력을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거든요. 이른바 소수의 진보세력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잘하면 전체적으로 보수가 헤게모니를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단 말이죠. 정말 사람들이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보수 지지를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데, 이런 조악한 시장논리,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시장논리가 아니라 아주 합리적인 시장론에 입각해서 공정한 법치를 확립하고 공안기관이 마음대로 설치지 않게 하면서도 얼마든지 언론기관들까지 길들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할 능력이 없는 거죠.” “무기정학 뒤 복학은 언제?” “1년 꿇었죠. 예전에 <한겨레> 있었던 진재학씨, 거기는 나하고 똑같은 처지였는데 경찰서에 2번 잡혀 가면 제명이었는데, 나는 1번 가서 무기정학을 받은 거죠. 같은 사건인데. 제명된 사람들은 박정희 죽을 때까지 복교를 못했습니다.” “1년 동안의 무기정학은 학교나 당국으로서는, 어디 고생 좀 해봐라, 말하자면 손 떼라 이거였는데, 오히려 그때가 본격 운동권 학생을 만든 양성기였군요.” “그렇게 됐죠.” “동학농민혁명 이후 120년간 이어져 온 식민지, 분단, 서구 추종 근대화와 물량주의 성장 패러다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는 생각이 들어요. 120년 전 상황과 지금이 너무 비슷해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이처럼 시시콜콜(?) 자신의 생각과 주변 얘기를 털어놓은 적이 달리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올해 초 한겨레신문사가 본격적인 서평 잡지 발간을 준비하면서 창간호 ‘특집’의 하나로 김동춘 교수와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올해가 광복 70년(사실상 분단 70년)인데다 한일협정 체결 50년이 되는 해여서, 한국 사회 변혁을 위한 올바른 진로 모색과 변혁주체 형성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온 사회과학연구 제3세대 선두주자인 그를 만나 한국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려 했다. 인터뷰는 지난 2월6일 한겨레신문사 본사, 2월12일 성공회대 김 교수 연구실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됐고, 정식 인터뷰는 아니지만 따로 한 차례 더 만나 내용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 내용의 일부가 ‘우리 경험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일반이론 만들어야죠’라는 제목으로 4월16일(17일 일부 수정) <한겨레> ‘지금 집필중’ 연재(제5회) 지면에 소개됐다. 당시 김 교수는 ‘해방 70년 대한민국은 어떤나라인가’(가제)라는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그 테두리를 훌쩍 넘어 꽤 멀리까지 갔다. 그런데 그 두 차례의 인터뷰를 제대로 정리할 여유도 갖지 못한 가운데, 여의치 못한 사정으로 서평지 작업은 3월에 일단 중단됐다. 따라서 인터뷰도 사장될 상황에 처했다. 다행이 그 일부를 추가 취재로 보완해 ‘지금 집필중’ 기사로 내보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덮어두어야 하는 데 대한 아쉬움이 컸다. 시간이 좀 지났지만, 이번에 디지털뉴스팀과 상의해 내용 전체를 소개할 수 있게 된 건, 그래서 정말 다행스럽다. 시간이 지났어도 인터뷰할 당시의 문제의식과 내용 자체의 시의성은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두 차례 인터뷰 중 나중에 한 2월12일 인터뷰부터 먼저 내보낸다. 내용은 거의 수정도 가공도 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여서 거친 느낌을 줄지 모르나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다가오는 면도 있을 것이다. 2월6일 인터뷰도 뒤이어 곧 공개할 예정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특히 경상도 사람들 말이에요, 내가 칼럼에 쓰려고 하는 것 중에 ‘구조맹’이라는 게 있는데요. 이 세상을 구조로 보지 않고 인물로 보는 우리 사회의 후진적 정치의식, 정치문화를 뜻해요. 60대 이상 사람들이 대부분 구조맹인데, 이명박 박근혜가 각기 다른 당 소속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정치적 인과관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대통령의 권한이 여전히 막강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문제죠. 저는 박근혜가 정권 재창출에 모든 걸 걸고 있는 보수지배세력에 얹혀 있다고 봐요.” “결국 박근혜 현상이라는 것이 10년의 민주정부 시절에 박탈감을 느낀 구보수세력의 반란인데, 내 식으로 말하면 서서히 진행되는 쿠데타, 합법적인 틀을 지닌 쿠데타라 할 수 있어요. 이게 과거의 구보수와 다른 점은 10년의 민주세력 집권 때의 박탈감 때문에 그만큼 업그레이드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대표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앉혀 놓은 것이란 점이죠. 우리가 그걸 잘 봐야 합니다.” “나는 박근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즉 문제의 초점을 흐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근혜 현상은 퇴행적 현상입니다. 이명박, 박근혜가 합리적 보수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반공보수를 끌어안았다는 게 우리 역사의 큰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 그 취약성이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헤게모니의 부재인데, 이 사람들이 돈도 있고, 재벌 쪽도 다 그들 편이고, 우리 사회의 지식인과 언론인들 또한 그쪽 편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습니까. 잘 하면 진보세력을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거든요. 이른바 소수의 진보세력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잘하면 전체적으로 보수가 헤게모니를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단 말이죠. 정말 사람들이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보수 지지를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데, 이런 조악한 시장논리,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시장논리가 아니라 아주 합리적인 시장론에 입각해서 공정한 법치를 확립하고 공안기관이 마음대로 설치지 않게 하면서도 얼마든지 언론기관들까지 길들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할 능력이 없는 거죠.” “무기정학 뒤 복학은 언제?” “1년 꿇었죠. 예전에 <한겨레> 있었던 진재학씨, 거기는 나하고 똑같은 처지였는데 경찰서에 2번 잡혀 가면 제명이었는데, 나는 1번 가서 무기정학을 받은 거죠. 같은 사건인데. 제명된 사람들은 박정희 죽을 때까지 복교를 못했습니다.” “1년 동안의 무기정학은 학교나 당국으로서는, 어디 고생 좀 해봐라, 말하자면 손 떼라 이거였는데, 오히려 그때가 본격 운동권 학생을 만든 양성기였군요.” “그렇게 됐죠.” “동학농민혁명 이후 120년간 이어져 온 식민지, 분단, 서구 추종 근대화와 물량주의 성장 패러다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는 생각이 들어요. 120년 전 상황과 지금이 너무 비슷해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이처럼 시시콜콜(?) 자신의 생각과 주변 얘기를 털어놓은 적이 달리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올해 초 한겨레신문사가 본격적인 서평 잡지 발간을 준비하면서 창간호 ‘특집’의 하나로 김동춘 교수와의 인터뷰를 추진했다. 올해가 광복 70년(사실상 분단 70년)인데다 한일협정 체결 50년이 되는 해여서, 한국 사회 변혁을 위한 올바른 진로 모색과 변혁주체 형성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여 온 사회과학연구 제3세대 선두주자인 그를 만나 한국 사회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려 했다. 인터뷰는 지난 2월6일 한겨레신문사 본사, 2월12일 성공회대 김 교수 연구실에서 각각 한 차례씩 진행됐고, 정식 인터뷰는 아니지만 따로 한 차례 더 만나 내용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 내용의 일부가 ‘우리 경험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일반이론 만들어야죠’라는 제목으로 4월16일(17일 일부 수정) <한겨레> ‘지금 집필중’ 연재(제5회) 지면에 소개됐다. 당시 김 교수는 ‘해방 70년 대한민국은 어떤나라인가’(가제)라는 책을 쓰고 있었는데, 그 얘기로 인터뷰를 시작했지만 이야기는 그 테두리를 훌쩍 넘어 꽤 멀리까지 갔다. 그런데 그 두 차례의 인터뷰를 제대로 정리할 여유도 갖지 못한 가운데, 여의치 못한 사정으로 서평지 작업은 3월에 일단 중단됐다. 따라서 인터뷰도 사장될 상황에 처했다. 다행이 그 일부를 추가 취재로 보완해 ‘지금 집필중’ 기사로 내보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덮어두어야 하는 데 대한 아쉬움이 컸다. 시간이 좀 지났지만, 이번에 디지털뉴스팀과 상의해 내용 전체를 소개할 수 있게 된 건, 그래서 정말 다행스럽다. 시간이 지났어도 인터뷰할 당시의 문제의식과 내용 자체의 시의성은 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두 차례 인터뷰 중 나중에 한 2월12일 인터뷰부터 먼저 내보낸다. 내용은 거의 수정도 가공도 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여서 거친 느낌을 줄지 모르나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다가오는 면도 있을 것이다. 2월6일 인터뷰도 뒤이어 곧 공개할 예정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경북 영주입니다. -영주 읍내입니까?
=행정구역상으로는 영주읍(현재 영주시)이지만, 시내 중심은 아니고 약간 떨어진 집성촌이죠. -그 쪽에서 학교를?
=중학교까지 거기서 다녔지요. 고등학교는 대구 계성고, 대학 때 서울에 온 거죠. -서울에는 연고가?
=별다른 연고가 없었죠. 기숙사에도 있었고, 하숙생활도 했고, 자취도 했어요. -고향엔 지금 친인척들이 남아 있습니까?
=예, 남아 있습니다. 거기가 집성촌인데, 원래 100호 정도에 주민이 500명 이상 되었지만 지금은 십여 호 정도만 남아 있어요.
본이 청도 김인데요, 비중이 큰 성은 아니죠. 경주 김의 일파예요.
영주에는 400년 전쯤 조상들이 정착한 듯하고. 원래 우리 집안 시조가 고려 시절 평창사(平章事)였던 분, 청도의 경주 김이었는데, 벼슬을 한 뒤 청도 김으로 새 본관을 받은 거죠. -그러면, 서울 생활을 시작한 게 몇 년도입니까?
=1977년 입학생이니까. -그럼 서울 생활이 향토 생활보다 훨씬 더 길어졌습니다.
=그럼요. 훨씬 깁니다. -시골 마을은 아무래도 좀 보수적이잖아요.
=물론 지금도 그렇죠. -김 교수님 활동이나 학문 활동 자체가 그 사람들에게는 좀 삐딱하게 보이겠네요.
=그렇죠. 거의 뭐 내논 사람이죠. 대1 때 무기정학 뒤 사회 눈떠…보수적 집안 탓에 운동 대신 대학원
=있죠. <전쟁과 사회> 책 앞부분에 약간 언급했는데, 우리 집안에서도 일제 때부터 그런 사람들이 있었죠. 우리 집안은 큰 대지주는 아닙니다. 경남지역만 해도 토지가 좀 넓지 않습니까. 경북, 특히 경북 북부지역은 다 자영농이예요. 대농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주-소작 관계가 경남이나 전라도처럼 심한 갈등을 겪진 않았죠. 반상의 차별은 물론 엄격했겠지만, 그게 뭐 계급 갈등 정도는 아니었고, 다 고만고만한 자영농들인데. 그렇지만 어쨌든 일제 때부터 공부를 좀 한 사람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고 그랬지요. 다른 지역들처럼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계속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랐죠. -주변에 피해자가 있었다든가. 좌든 우든, 그런 일들이 있었나요? 연구자들의 관심사, 연구 분야가 그런데서 비롯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아버지가 우익이에요. 우리 아버지는 일제 때 일본에 유학을 했는데, 지역사회에서 상당한 지식인, 유지 중의 한 사람이었죠. 일가친척들 중에 한 사람은 일제 때부터 대구사범, 박정희가 다녔던 거기서 이른바 언더(지하) 독서회 사건으로 감옥도 갔다 오고, 해방 뒤에 좌익 활동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북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고, 해방 뒤 지역에서 독촉대표 등 우익의 중심적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었죠.
예전에 연세대 총장 했던 김찬국 선생, 그 분이 항열로는 제 조카뻘 돼요. 그 분 부친(김완식)이 기독교 쪽이었는데, 우리 집안에서 거의 유일하게 개종한 사람으로 영주에서 신간회 활동도 했어요. -집성촌 내에서는 불교 쪽이 강했나요?
=워낙 불교적인 게 강하니까 기독교가 되는 건 소수였지요. 불교는 할머니와 아줌마들이 그냥 믿었지만 독실한 신자라고 하긴 어렵고. -옛날에는 예수쟁이라 해서 시골사람들이 불신하거나 경원하고들 했지요. 워낙 보수적인 지역이라 기독교가 뚫고 들어가기 힘들었을 텐데.
=지금도 좀 갈등이 남아있지요. -우리나라 어디든 안 그런 데가 있을까요. 연구 활동이나 사회학과 선택에 그런 일들이 단초가 됐거나 영향을 끼쳤다고 보십니까?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서 세상에 눈을 떴는데, 1학년 때 활동을 하다가 무기정학을 당했어요. -1학년 때 벌써 무기정학을?
=1977년인데 그때 뭘 알았겠어요. 그런 일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눈을 뜨게 됐죠. 관심을 갖게 된 거죠. 1학년 때죠. 잘 몰랐는데, 피해를 당하고 그러다 보니까 아버지한테서, 일제 때부터 경험을 한 사람이니까, 이런저런 얘기도 듣고 아버지가 경험한 진보파 사람들에 관한 얘기도 듣고 하면서 그런 주변 이야기에 눈을 뜨게 된 거죠. 1학년 때 그걸 겪고 나서부터. -무기정학 뒤 복학은 언제?
=1년 꿇었죠. 예전에 <한겨레> 있었던 진재학씨, 거기는 나하고 똑같은 처지였는데 경찰서에 2번 잡혀 가면 제명이었는데, 나는 1번 가서 무기정학을 받은 거죠. 같은 사건인데. 제명된 사람들은 박정희 죽을 때까지 복교를 못했습니다. -1977년 몇 월이었나요?
=1977년 11월11일 사건이라고 했죠. 그 전에는 1학년들은 웬만하면 봐줬는데, 그때는 워낙 서슬이 시퍼래서 1학년도 무조건 잘리고 그랬죠. 유신의 광기가 극에 달했었습니다. -그때는 잡혀가면 형량도 많았지요. 처음부터 사회학과를 택했습니까?
=저는 원래 사대 교육계열 입학생이었고, 교육계열로 들어가서 1년 꿇고, 그래서 78학번들하고 1년 2학기를 같이 다녔는데. 심상정(국회의원, 정의당 원내대표)씨가 78학번인데, 한반이었어요. -과는 몇 학년 때 정했죠?
=2학년 올라 갈 때 정합니다. -그때 사회학과로?
=아니요. 학부에서는 지리교육학을 했어요. 무기정학 하고 한 해 꿇으면서 이른바 운동권에 본격적으로 들어가죠. 언더로. -1년 동안의 무기정학은 학교나 당국으로서는, 어디 고생 좀 해봐라, 말하자면 손 떼라 이거였는데, 오히려 그때가 본격 운동권 학생을 만든 양성기였군요.
=그렇게 됐죠. -무기정학 기간에 고향에 내려가 있기도 했나요?
=그러기도 했지만 누구 집 아들, 서울 가더니 완전히 빨갱이 됐다는 얘기도 들리고, 그래서 고향에 있을 수가 없어 다시 서울로 갔죠. 못 견뎌서. -금방 도로 올라오셨네요. 사회학 정한 건 언제?
=대학원 갈 때죠. 학부 때는 거의 학생운동에 몰두했지요. 내가 그 뒤 다시 잡혀가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서클 활동은 계속했죠. 졸업 후 진로를 정할 당시, 아무래도 장남이다 보니 고민을 하다가 집안을 설득할 자신도 없고 감당도 안 될 것 같아서 공부를 해야겠다 마음먹고 대학원 사회학과로 간 거죠. -몇 형제입니까?
=밑에 동생 하나밖에 없지만, 부모님이 연세가 많으셔서. 늦게 낳아 가지고. 집에서 굉장히 기대도 많았고 해서 내가 운신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죠. 운동에 전면으로 뛰어드는 것은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것 같아서 공부를 하기로 했고 사회학을 택했어요.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가 가토 슈이치라는 사람 얘기를 하면서 굉장히 좋은 집안에서 자라 해외 유학도 한 귀족적인 삶을 산 그가, 일본이 고도성장하면서 많은 운동권들이 변절을 하거나 기득권층에 흡수되어 버린 뒤에도 오히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꾸준히 간 점을 평가한 적이 있는데, 김 교수도 대학원 가길 잘한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하여튼 뭐 그때부터 사람들의 유형을 보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기도 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고, 제일 앞장섰던 사람들이 변절하기도 하고 뭐 온갖 유형이 다 있죠. 그 당시에는 대학원 가면 배신자 취급당하는 분위기가 있었죠. 노동자 연구로 박사학위…박사후과정 때 전쟁 연구 -주요 저작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자유라는 화두>(1999), <독립된 지성은 존재하는가>(2001), <전쟁과 사회>(2000),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2004),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2006), <편견을 넘어 평등으로>(2006), <분단과 한국사회>(2006),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2008), <복합적 갈등 속의 한국 민주주의-민주주의와 사회운동 총서 1>(2008), <대한민국 잔혹사>(2013),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2013), <전쟁정치-한국정치의 메커니즘과 국가폭력>(2013), <트라우마로 읽는 대한민국>(2014).
빠진 것 없습니까?
=제일 먼저 나온 게, 단독 저작은 아니지만, 박태순 소설가 하고 같이 쓴 <1960년대의 사회운동>입니다. 이게 <월간 중앙>에 실렸는데, 1990년에 4·19혁명 30돌을 맞아 대표적인 4·19세대 가운데 한 분인 박태순씨가 같이 하자고 해서. -그 분과 선후배 사이인가요?
=그 분은 영문과 출신이죠. 4·19 세대하고 젊은 세대가 같이 한번 작업 하자고 해서 공동작업을 했고, <월간 중앙>에 1년 연재하고 책으로 낸 거죠.
또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1997)도 빠졌는데, 논문들 엮은 거죠.
김동춘 교수가 가장 심혈을 기울여 썼다고 밝힌 ‘전쟁과 사회’.
=거기에 대해선 연구자들끼리 많이 하는 말이 있어요. 박사논문 이상 가는 새로운 저작을 내면 대가라는 말이죠. 박사 논문은 누구나 가장 심혈을 기울여서 쓰거든요. 그러니까 나이도 젊고, 몇 년 동안 완전히 전업 학생으로 몰입해서 쓰잖아요. 그래서 대부분은 박사 논문을 뛰어넘기 힘들다, 박사 논문을 뛰어넘으면 거의 대가급이다 이런 말들을 하는 거죠. 그래서 아무래도 제일 심혈을 기울인 박사논문을 책으로 쓴 <한국사회의 노동자연구>(1995), 이게 내가 1993년에 학위를 받고 1995년에 책으로 낸 거예요. 이것하고 <전쟁과 사회>, 그 두 권이 제일 심혈을 기울인 책이라고 할 수 있죠. -<전쟁과 사회>는 쓰게 된 계기가?
=<한국사회의 노동자 연구>를 내고 나서 미국에 박사후 과정(포스트 닥터)으로 1년 가 있었는데, 그때 노동문제를 심층적으로 들어가다 보니 전쟁연구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 전 1998년인가 <한겨레>에서 젊은 연구자 시리즈 열전 비슷한 걸 연재한 적이 있는데 내가 첫 인터뷰자였습니다. 당시 김보근 기자가 나를 인터뷰했어요. 젊은 연구자들이 요즘 뭘 하는가 하는 동향 취재였죠. 그때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국회 앞에서 의문사 관련 유족들이 400일 동안 텐트 농성을 할 때 내가 농성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김보근 기자와 인터뷰를 한 거죠. 그 자리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있냐기에 가칭 ‘전쟁과 사회’라는 책을 쓰고 있다고 했고 그게 기사로 나가자 돌베개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책 내자고. 그때까지 출판사는 정하지도 않고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박사후 과정 기간이 언제였습니까?
=1996년 1년간이죠. -어디에 있었어요?
=캘리포니아대학(UCLA) 로스앤젤레스 캠퍼스죠. -처음에 노동에서 시작해서 한국전쟁으로. 추이가, 흐름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울 수 있는데. 노동운동 연구와 전쟁 연구가 동시에 진행됐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니죠. 노동 연구를 하다가, 박사논문 쓰고, 하다가 전쟁으로 옮겨 간 거죠. 그 뒤에도 이쪽 연구를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지만, 무게 중심은 현대사 쪽으로 옮겨 갔지요. 사회학은 대학원에서 했지만, 현대사 공부는 이미 학부 때부터 했죠. 당시 언더 서클에서는 현대사 공부를 기본적으로 다 했죠. 그리고 박사과정 들어가기 전에도 했고요. 이른바 재야 학회라고 해야 할까, 그런 데서 계속 현대사 연구를 했어요. -공부그룹이 있었어요?
=군대 제대한 이후 1986년께 망원 한국사 연구실이라고, 한홍구씨 등이 주도한 단체에서 세미나 모임에 참가했지요. 1989년에 역사문제연구소와 인연을 맺었고, 그 무렵 박원순 지금 서울시장하고 만났죠. 그쪽, 이른바 재야연구단체에서 현대사 연구를 쭉 했어요. 그렇지만 제가 사회학자로서 노동문제를 한번 정리해야겠다 싶어서 박사논문 주제를 노동으로 삼았고,. 그러고나서 다시 현대사로 가야되겠다 해서 다시 한국전쟁으로 갔고 그래요. 완전히 새로 시작한 건 아니었죠. 당대 역사 이해 위해 한때 문학작품 많이 읽어…박완서 작품은 ‘연구’하기도 -사회학자들이 그렇지만, 교수님도 글 쓰신 거 보면 문학작품도 많이 읽어요. 인용도 많이 하시고. 사회과학자, 역사학자에게 문학이라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사료로서의 의미?
=문인들이 욕을 하죠. 학자들은 작품도 자료로서 활용한다고.(웃음) -당대의 사회상, 분위기를 전해주는 게 문학작품이니까.
=그렇죠. 그렇지만 1970년대는 다 아시지만, 1980년대 운동권과는 달리 운동권 학생들도 문학작품 열심히 읽었죠. 김수영 김우창 황석영 이청준 조세희 고은 등 시나 소설들, 단편소설들을 기본적으로 많이 봤죠. 이병주의 <지리산> 같은 소설도 당시에 많이 봤기 때문에 1980년대 이후의 정치화된 운동권 학생들하고는 교양의 차원이 다르죠. 그 시절의 운동권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문학 철학 소양이 있었죠. 사회과학책을 보면서도 문학은 또 생생한 현실감 같은 게 있고 해서…, 나도 1990년대까지는 많이 읽었죠. 지금은 많이 읽진 못하지만. -의식적으로 문학작품을 접하나요?
=좀 그렇죠. 사회과학 공부하다가 문학 읽는 건 일종의 휴식이잖아요. 그런 측면이 있죠. 기분전환 같은. -지금은?
=요즘은 거의 못 봐요. -우리나라 연구자뿐 아니라 외국 연구자들도 문학작품 많이 보는데요.
=예, 많이 봐요. 인용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는 게 읽는 사람한테도 훨씬 유리한 거 같아요. 글쓰는 것도 문학작품 들어가는 것하고 안 들어가는 것은 다르니까. 쓰는 사람도 문학적 품성이나 상상력 같은 것 갖고 있는 게 좋은 거지요? 논문이든 뭐든 잘 읽혀야 되는 거니까.
=그렇죠. 그래서 내가 2, 3년 전에 여성문학회에서 박완서 작가에 대해 발표한 적이 있어요. -박완서를 특히 좋아하십니까?
=박완서는 워낙 내가 하는 현대사 분야하고 일치하잖아요. 박완서의 평생 화두가 6·25 때 숨진 자신의 오빠니까. 그것과 관련해서 다 얘기들이 나오고 하니까. 특히 박완서 소설을 많이 보죠. -그런 식의 흐름, 곧 노동문제에서 계급문제, 지배구조 문제로 들어가고, 다시 전쟁 문제로. 뿌리로 가면 이데올로기 갈등, 친일·친미까지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지금의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바로 연결된다, 대충 그렇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교수님 책 중에서 제일 많이 팔린 책은?
=내 책들이 많이 팔리진 않았는데. -적게 팔리지도 않았지요.
=꾸준히 나가죠. <전쟁과 사회>가 제일 많이 나가죠. 지금도 계속 나가요. 한 15년 됐는데. 얼마나 나갔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원래 계획으로는 <전쟁과 사회> 제2탄이 나오게 돼 있는데요?
=결국 1탄으로 끝났죠. ‘반공국가’를 주제로 새로 한 권 준비하고 있어요. -이런 유의 책이 일반 문학작품처럼 선풍적으로 팔리는 건 아니지만, 꾸준하게 팔리고, 또 대학교 같은 데서 교재로서 쓰이는 책이니까 출판사에서 김 교수에게 계속 책을 쓰자고 하는 거지요. 일정한 수요가 있다고 봐야겠지요.
=그렇죠. 그런 요구가 있죠. 출판사 하는 사람들이 ‘저 사람의 기본독자는 얼마얼마’ 하는 식으로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가장 큰 관심사 또는 지향점이라고 해야 할지. 그리고 요즘 작업하고 있는 것은?
=지금은 올해 안에 낼 요량으로, 해방 70년을 염두에 둔 대중서를 하나 쓰고 있고요. 내년쯤 <전쟁과 사회> 제2편이라 할 수 있는 <반공국가>를 좀 더 학술적인 책으로 써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한 그 <반공국가> 말고요?
=그건 따로 곧 출간됩니다. 그건 독일과 우리나라 학자들 개별 논문들을 엮은 것이죠. 내가 연구 책임자로 돼 있어요. 공동작업을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 개인들이 따로 쓴 개별 논문들 모음집 형태죠. -독일도 분단국가였으니까, 우리하고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까?
=독일은 전쟁은 안 했지만, 1950년대의 독일은 지금의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통진당 해산과 유사한 일도 겪었죠. 독일도 1950년대에 공산당을 해산했죠. 한국 100년사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절반의 성공’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8월1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니까 예를 들면, 흔히 얘기하듯이 경제는 성공했는데 민주주의가 뒤처졌다, 그런 예기를 많이 하는데 그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경제가 다른 문제하고 별개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쪽은 뒤처졌는데 경제만 발전할 수는 없게 되어 있어요.
우리 사회가 지금 그 병목지점, 더는 넘어서기 어려운 문턱 지점에 걸려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60년대 한국은 그야말로 후진국가였고 배가 고팠지요. 나는 뼈저린 가난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몹시 가난했죠. 그때에 비해 1990년대 아이엠에프 위기(외환위기)가 나기 직전의 상황을 비교하면 한국은 틀림없이 성공한 나라죠. 배고픔을 해결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렇죠.
문제는 그게 폴 크루그먼이 이야기했듯이 엄청난 저임 노동력과 물자를 집중적으로 투입(요소투입)해 단기간에 성과를 올릴 수는 있어도 지속 가능한 체제로 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어요.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가 그걸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요.
결국은 이른바 선진국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서구 열강이 아닌 나라들, 말하자면 후발 국가였던 나라들 중에서 이른바 서구적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동시에 이룩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하다고 봐요. 한국은 아닌 것 같아요. 100년 동안 발버둥쳐 왔는데도 지금 시점으로 봐서는. 일본도 굉장히 문제가 많은 사회지만 한국은 그 일본을 따라잡지도 못했어요.
성공이라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일종의 ‘절반의 성공’이라고 보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사회의 다수 국민, 다수 서민 대중의 엄청난 고통과 착취 위에서 얻은, 일종의 굉장히 ‘굴절된 성공’이라고나 할까. 사회든 도덕이든 그걸 엄청 망가뜨리고 얻은 대가라고 할까.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는 것까지 부인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절반의 성공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일본처럼 식민지도 없었죠. 일본의 성공이라는 게 한반도의 식민지배와 착취를 토대로 가능했죠.
=식민지배 플러스 한국전쟁. 이 두 가지를 통해 오늘의 일본이 있는 거죠. -식민지 근대화론 얘기들을 합니다만, 이광수 같은 친일세력은 틀림없이 일본이 그렇게 단기간에 망할 줄은 몰랐겠죠. 당시의 부역자들, 일본제국 체제에 대해 어떤 의심도 없이 살아갔던 다수의 사람들, 그리고 일제시대가 돼서야 비로소 생활이 피어나고 잘먹고 잘살게 된 사람들에게는 식민지적 상황이든 무슨 상황이든 그게 발전이고 좋은 사회가 된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객관적 사실과는 무관하게, 그런 사람들이 보기엔 세상이 잘 된 것일 테니까. 지금 우리가 성공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그와 유사한 게 아닐까요?
=어느 사회나 그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는 지배자의 가치에서 나온 거니까요. 일제시대 때, 조선보다 그때가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겠죠. 물론 당시의 지주, 부르주아. 한국은 부르주아 세력이 크진 않았지만, 그 사람들이 일제 치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고등문관 시험 같은 걸 통과해서 판사나 변호사가 되고 관리가 됐던 사람들.
그리고 조선시대에 굉장히 차별을 받았던 중인 출신들. 이광수 최남선 등이 다 중인 출신이죠. 그런 사람들로서는 계급적 족쇄, 어쩌면 민족문제보다 계급문제가 더 근본적인 문제라 볼 수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일제 식민지의 수혜자가 상당히 존재했던 거죠. 물론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자존심의 훼손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그러나 물질적인 혜택 같은 게 더 크니까 그 정도의 자존심은 양보할 수 있었겠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죠. 한국이 통일이 안 되고, 분단이 지속돼 북한하고 적대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영원히 미국에 넘겨주더라도, 뭐 인간인 이상 굴욕감 같은 게 없을 순 없겠지만, 현재 여기서 누리는 부나 권력의 단맛이 훨씬 더 크니까 이런 상태가 계속 가기를 바라는 세력들이 있을 테니까. 이승만과 윤치호의 후예가 오늘 대한민국의 주류 -자기합리화가 가능할 것 같아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내가 갖고 있는 신분적 한계를 해소하면서 또 우리 민족 전체를 위해서도 좋은 거니까 하는 식으로 타협해버릴 수 있잖아요.
=그 사람들이 사실은, 어느 정도는 당시나 지금이나 진보, 선진화라는 표현들을 쓰지요. 박세일 교수가 얘기하는 선진화 같은 거죠. 한일강제병합 직전의 일진회의 명칭도 원래 진보회였거든요. 그 사람들 시각에서는 시골의 고리타분한 노인네들, 양반 상놈 얘기하는 노인들이 너무 후진적인 거예요. 한국이 이런 상황에서 독립을 하는 것은 더 불행할 수도 있겠다, 차라리 일본의 그늘 속이 더 나을 수 있다, 이게 윤치호의 이야기죠. -윤치호는 결국 자살하지요.
=자살했는데, 윤치호가 흥미롭게도 서얼 출신, 서자 출신이었죠. 서자였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서 차별받았고,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가져다 준 기회의 평등이라는 게 훨씬 좋았을 수 있어요. 그에게는. -조선시대에 서자면 출세해봤자 한계가 있으니까.
=기독교인들 중에도 상당수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봐야죠. -기독교도 신분해방의 측면이 있군요.
=그렇죠. 그런 측면이 있죠. 기독교의 해방적인 측면이 있고, 실제로 기여를 한 게 사실이죠. 여성해방 요소도 있죠. 그런데 친서방, 친미, 물질주의적이고 한국 문화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시하는 어두운 점도 있어요. 기독교도 결국 한국의 근대를 상징적으로 집약해 주는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죠. -친일, 친미 세력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겠네요.
=전형적으로 이승만의 일생이 그걸 보여주거든요. 이승만이 초기에는 독립협회 회원이기도 했잖아요. 이승만이 과거시혐 몇 번이나 봤는데도 떨어졌어요. 이게 꼭 실력이 없어서 떨어졌다기보다는 당시 과거시험이 워낙 썩고 타락한 탓도 있는데, 이것 안 되겠다 해서 움직이다 결국 감옥 가서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영어 배우지요.
결국은 미국이 시대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걸 간파했고, 그래서 미국 가서 국내에서 독립운동하는 사람들 비웃으면서, 백날 해 봐라 독립이 되나, 그러면서, 세계가 강대국 권력정치의 판도에 따라 움직이는데,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하는지가 결국 조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건데, 그 안에서 되지도 않을 독립을 위해 목총 들고 일본놈들 상대하겠다는 놈들, 정말 한심하다. 그게 이승만의 생각이었죠. 그 이승만하고 윤치호하고 그 후예들이 지금의,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다. 지금의 주류가 그런 거죠. 그게 제가 쓰고 있는 책에도 나와요. -지금도 주로 미국 유학 갔다 오고 그런 사람들, 여기서 한자리 하는 사람들이 다 그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겠죠. 어쩌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대상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그렇죠. -일본 패전 뒤에는 뭔가 정리가 필요했는데. 흔히 친일파라 하는 사람들이 꼭 처단이 아니더라도, 부역했던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언도 좋고, 공직사퇴도 좋고, 한 번은 정화라고 해야 하나, 그런 과정을 거쳤어야 했는데. 우리가 그 과정을 못 거쳤고, 미국이 들어와서, 너무 단순화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거기서부터 모든 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때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떤 식으로 전개됐을까. 어쨌거나 그 뒤의 전쟁과 외세 개입으로 민족통합의 기회는 날아갔죠.
=당시 이승만이나 김일성이나 둘 다 통일을 하려 했죠.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하려 했죠. 미군이 1949년 여름에 다 철수를 하는데, 그해 여름에 철수하면서도 군사고문단 500명을 남겨 둔 까닭은 이승만이 북으로 치고 올라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죠. 미국이 군수물자 제대로 지원 안 해준 것도 이승만이 워낙 호전적으로 북을 쓸어버리겠다고 하니까, 그것 못하게 하려고 했던 안전장치 같은 것이었죠. 인천상륙 뒤 38선 위로 안 넘어갔으면 ‘재통합’ 쉬웠을 것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때 네대의 상륙정이 인원과 장비를 내리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예. 할 수만 있으면 상대를 쓸어버리려고 한 거죠. 아침은 서울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당시 국방장관 신성모도 그랬죠. 북도 마찬가지였고. 지금의 건국절 논란이라는 게 잘못된 게 바로 이 지점인데, 당시는 북도, 남도 서로 다들 임시정부로 생각했고 분단이 이토록 오래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요. 다들 임시로 정부를 만들었고, 각자 자기들 방식대로 남쪽은 남쪽 방식대로, 북은 북쪽 방식대로 통일을 밀어붙일 태세였으니까. 그 연장선상에서 김일성이 내려온 것은 저는 결정적인 오판이라고 보는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착각을 한 거죠. 금방, 보름이면 전쟁 끝낼 수 있다는 이른바 제한전쟁설인데. -실제로 가능할 수 있었죠?
=겨울전쟁 준비를 하지 않고 내려온 거죠. 금방 끝낼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서울에서 3일간 머무른 것도 이해가 안 되고, 그런 여러가지 미스테리가 많은데, 어쨌거나 북은 보름이면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봤던 것 같고, 미국의 개입 여부도 잘못 판단했고. -만약 그때 소련이 유엔을 보이콧하고 있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유엔군 파병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사태 전개가 좀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설사 소련이 당시 거부권을 행사했다 하더라도. 미군은 결국 한반도에 들어왔을 거라고 나는 봐요. 어떤 식으로든 모양새를 갖췄겠지만, 미국이 남한을 포기할 순 없었을 거라고 봐요. -포기해버리면, 미국이 전후 서방진영 리더로서의 지위, 위신 문제도 있었겠죠.
=시험대잖아요. 미국이 한반도를 잃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른바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을 고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도미노 이론이라는 건 베트남전쟁보다는 사실 한국전쟁 때부터 적용된 것이죠. 만약 미국이 남한을 포기한다는 신호를 주면 온 세계에서 발호할 사회주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에 미국은 개입을 안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여전히 거론하기 어려운 것이고 또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라지만, 그때 만일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하는 가정을 해보는 것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바둑도 판이 끝난 뒤 어느 대목이 패착이었는지, 어느 지점부터 대세가 기울기 시작했는지 등을 점검하잖아요. 진영논리를 떠나 우리 역사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냉정하게 복기를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결과적으로 보면, 그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든간에 우리 민족이 철저히 유린당한 거잖아요. 일제시대 말부터 광복과 분단, 전쟁 그리고 기 이후 사태 전개를 지금은 자유롭게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결코 어느 편을 들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게 근본적인 이야기지만, 그것까지 안 가더라도 다른 가정을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어요. 예를 들면, 북이 불법 남침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천상륙 뒤 38선 이북으로 간 게 옳았느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게 유엔의 공론이었고, 인도 총리 네루도 당시 38선 북으로 인민군을 쫓아내는 것은 정당하지만, 남쪽 군대와 유엔군이 위로 올라가는 것은 안 된다고 했다는데. 그런 것도 논란거리가 돼요. 실제로 북으로 밀고 올라갔다가 결국 중국이 개입하면서 패퇴하잖아요. 그러면서 엄청난 희생이 초래됐거든요. 얼마 전에 상영한 <국제시장>를 보니까, 사실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던데, 당시 북에 있다가 함흥 철수 때 내려 온 목사님이나 기독교 신자들이 쓴 글들을 보면, 그들이 공산주의를 욕하는 게 아니라 미국을 욕해요. 왜 책임 못질 일을 벌였느냐, 왜 밀고 올라왔느냐, 당신들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 그런 얘기들을 해요. 왜냐하면 그 가족들이 미군이 들어온 이상 거기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는데, 물러가버리면 다시 들어온 김일성 정권이 그들을 내버려 두겠느냐, 또 죽을 것 아니냐, 그런 얘기였어요. 이젠 어차피 남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됐는데, 왜 미국놈들은 책임 못질 일을 해서 우리를 이 꼴로 만드느냐, 그런 얘기들이 당시에 쓴 수기들에 나와요. -박찬승 교수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돌베개)를 보면 진짜 얼마나 끔찍한 학살이 조직적으로 벌어졌는지 알 수 있죠.
=‘톱질전쟁’이라고 하죠. 이쪽으로 한 번, 또 저쪽으로 한 번 왔다갔다하면서 엄청난 희생자를 냈죠. -만약 38선에서 멈췄고 또 1·4후퇴가 없었다면 희생은 훨씬 덜 했겠지요.
=만약 38선에서 멈추고 거기서 정전회담을 시작했다면 역사는 달라졌겠죠. -그러면 재통합도 훨씬 쉬워질 수 있었을 텐데.
=그렇죠. 당시 중국군이 내려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미군이 중국과의 국경, 말하자면 코앞까지 올라가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국 중국이 개입했죠. -그런 부분에 대한 역사적 가정이 일종의 금기처럼 되어 있는데. 우리가 아직도 까놓고 얘기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그 때문에, 예컨대 미국에 대한 일반대중의 인식이 너무 고착되고 잘못되어 있잖아요. 미국은 무조건 우리를 살려주고 도와줬다, 미국이 없었다면 우린 벌써 끝장났다, 이런 식의 편향된 사고 때문에 미국이 이 땅에 저지른 원죄에 대해서는 누구도 제대로 이야기조차 할 수 없고, 그러니 정상적이고 건설적인 논의 자체가 안 되고, 모든 대안적 가능성들도 닫히게 되고.
=조선시대 때 명나라를 대하던 태도와 다를 바 없어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중국에는 양명학도 있고., 훈고학도 있고, 온갖 불교 유파, 도교도 있어 사상이 풍성한데, 조선은 오로지 주자학밖에 없다. 명을 비판하면 완전히 사문난적 취급을 당하는 일종의 도그마 속에 갇혀 있었는데, 이 도그마는 지금도 한국 지배세력을 지배하고 있죠. -망해가는 명에 매달리다 병자호란도 자초하고.
=그래서 결국 된통 당한 거죠. -지금 미국에 대한 태도를 명에 대한 당시의 지독한 사대주의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을 지경이죠.
=그렇죠. -미국에 대한 전쟁 책임이나, 대한민국 지배권력의 역사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도 이런 논의는 개방되어야 한다, 이건 종북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지금 남쪽 사람들 중에 누가 북 체제를 지지하겠어요? 논의의 틀 자체를 바꿔가야 하지 않을지요?
=그렇습니다.
199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시절 기자회견을 하는 김동춘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민주화, 산업화를 추상적으로 보면 두 차원인데,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로 들어가면 민주화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어요. 그것은 공공성, 사회적 공익을 위해 자기를 헌신하는 과정에서 이뤄진 것인데 비해 산업화는 생계유지를 위해서, 대부분 생존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대다수 보통사람들이 이룩한 것이죠.
문제는 그것을 구상(설계)하고 리드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은 대부분 일제시대의 기술관료, 기술관료 멘탈리티를 지닌 사람들이었죠. 일제 말기 전쟁 시기에 성장률이 높았잖아요. 4·19혁명 때도 분출됐던 탈빈곤 열망이라는 게 있었고, 5·16 쿠데타 세력도 그것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북과의 체제경쟁에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내부 유권자들을 만족시키려면 가시적인 경제성과가 필요했지요. 따라서 권력을 기득권화하는 것이 경제성장과 맞닿아 있었지요.
물론 5·16 이후 국가 리더들 중에는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문제는 그 사람들의 노력이 자신들의 사적 이익과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이에 반해 민주화는 사적 이익을 버림으로써 가능했던 측면이 있거든요.
게다가 산업화의 성공은 미국의 후원 없이는 안 되는 거였죠. 196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이란 미국의 플랜(계획), 즉 동아시아 자본주의 건설 전략에 따라 움직인 결과였죠. 일본을 축으로 주변 나라들이 기러기떼처럼 줄을 지어 날아가는. 그리하여 창출된 동아시아 자본주의 저가 상품을 미국이 사주고, 일본의 안보를 미국이 책임져주는 특혜 속에 한국경제가 성장했고 거기에 여러 변수들이 개입돼 있죠.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의 개입이죠. -반공전략의 교두보 형성, 동아시아를 엔경제권에 편입시키는 과정인데, 1965년의 한일협정 체결도 그랬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도 그랬지요.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왜 대통령이 되려고 했는지, 임기 3년째를 맞고 있는 지금까지도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21세기와는 걸맞지 않은 퇴행적인 사람들을 포진시켜 전임 대통령들이 이뤄 놓은 걸 모조리 무화시키면서 모든 걸 자기 아버지 시대의 기준에 맞추는 과거지향적 국가 재조립 작업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예. 그런데요, 나는 2012년 <한겨레> 칼럼에 ‘박근혜의 화장발’이라는 칼럼을 하나 썼는데, 그때 그 선거 국면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라는 건 과거가 현재를 규정하고, 20대를 어떻게 살았느냐가 평생을 좌우한다. 그런데 박근혜의 과거 이력을 아무리 살펴봐도 복지와는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화장발이라고 했고, 우리가 그걸 믿어도 될까 회의하는 식으로 썼어요. 우선 정치가로서의 박근혜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했지만, 내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있을 때, 그땐 정부 관리로 있었던 거니까 매년 예산, 결산 보고를 하러 국회에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국회 행안위원회에 갔는데, 그때 박근혜가 행안위 위원이었거든요, 박근혜가 국회 위원회에 출석하는 것 딱 한 번밖에 못 봤고, 그것도 10분 정도 앉아 있다가 갔어요. 말하자면 선거의 여왕이라 해서 정치공학적인 측면에는 나름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정치가로서의 박근혜 역할은 거의 제로가 아닌가 생각해요. 정책에 대한 입장이나 법안을 제출한 것에 대한 얘기를 위원회에 가서 밝힌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오로지 정치 입문할 때의 목표는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고, 그건 박근혜의 과거 행적들을 통해서도 다 확인할 수 있어요. 정치가로서의 박근혜를 보면 의정활동에 별 관심이 없어요. 대통령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의정활동에 관심이 없는 건 당연해요.
박정희는 권력지향적인 사람인 게 분명하지만, 좋게 평가하면 동년배 중에서는 비교적 양심적 군인이었던 게 사실이고, 생사의 고비를 몇 번 넘긴 사람이죠. 여순사건으로 옷 벗었다가, 6·25 전쟁 때 다시 군에 복귀하고, 쿠데타 일으키기 전에도 부산으로 좌천당하고, 나름 온갖 굴곡을 많이 겪은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있었고, 독재를 하면서도 밤에는 야당 의원들하고 술도 마시고, 고문하고 두들겨패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과 함께 정치를 하고 그랬는데, 2, 3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박근혜는 자기 힘으로 이룬 게 아니라, 이미 레디메이드된 것을 상속받았기 때문인지, 거기에 대한 경험과 지식, 인간에 대한 이해 등 모든 게 폭이 상당히 제한돼 있는 것 같아요.
박근혜대통령이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는 4월16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진도/ 청와대사진기자단
=본인에겐 일종의 약점일 수 있겠는데, 즉 아버지나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대한 불신감을 갖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전두환 정권 들어서면서 10년 넘게 잊혀진 사람으로 살면서 나름 온갖 굴욕을 겪고, 또 아버지에게 충성하던 사람들이 완전히 돌변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쌓였겠죠.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정상적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가 없고, 충성하는 사람을 의심하면서도 결국은 그들을 계속 붙잡을 수밖에 없는 사정. 초기의 인사파동을 보면, 윤창중 같은 사람을 모두가 그렇게 계속 반대했는데도 끝까지 붙들고 있다가 결국 그 꼴이 났는데, 그러니까 모든 인사에서, 문창극에 이완구까지, 자기에게 충성을 바치느냐 안 바치느냐가 모든 인사의 기준이 돼버리는, 공적 마인드가 없는 사람이죠. -원세훈 전 국정원장 문제 처리도 결국 유죄로 결판이 났죠. NLL 동원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대통령 기록물 가지고 난리친 것도, 채동욱 쫓아낸 것도 마찬가지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지요.
=대선 과정에서 안게 된 자기의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거죠. 그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중의 기본이고, 그게 무너지면 자신이 끝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훨씬 더 방어적으로 나오는 게 아닐까요. -‘종북’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대한민국 역사에서 박근혜 정권의 등장이 유의미한 것은 박근혜야말로 박정희 신화를 스스로 허물어뜨린 것, 그것이 유일한 역사적 기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얘기가 있을 정도인데, 정말 그렇게 될까요?
=두고 봐야겠지만. 그럴 듯한데요. 특히 경상도 사람들 말이에요, 내가 칼럼에 쓰려고 하는 것 중에 ‘구조맹’이라는 게 있는데요, 이 세상을 구조로 보지 않고 인물로 보는 우리 사회의 후진적 정치의식, 정치문화를 뜻해요. 60대 이상 사람들이 대부분 구조맹인데, 이명박 박근혜가 각기 다른 당 소속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정치적 인과관계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 대통령의 권한이 여전히 막강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문제죠. 저는 박근혜가 정권 재창출에 모든 걸 걸고 있는 보수지배세력에 얹혀 있다고 봐요. 얹혀 있는 건데 박근혜를 교체하면, 다른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앉히면 잘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구조맹이라고 하는데, 많은 영남 사람들이 박정희가 잘 했으니까 그 딸도 잘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전형적인 구조맹 현상이죠. 그런 전형적인 구조맹의 문제가 이번에 적나라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보수도 진보도 업그레이드 못해 한국사회 퇴행 -레임덕 얘기까지 나오는데, 남은 3년을 어떻게 끌어갈지 막막할 것 같아요. 대안이 없을 것 같은데.
=나는 박근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든다, 즉 문제의 초점을 흐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근혜 현상은 퇴행적 현상입니다. 이명박, 박근혜가 합리적 보수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반공보수를 끌어안았다는 게 우리 역사의 큰 비극이라고 생각해요.
노무현이 자기가 구시대의 막내라 했던 건 굉장히 정확한 지적이고, 백낙청이 ‘2013체제’라고 표현했던 건 노무현이 구시대의 막내로서, 이른바 과거의 독재 대 민주라는 구도를 넘어서는 걸 상정했던 것인데, 말하자면 이명박 박근혜가 구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모델 창출로 사회를 이끌고 가야 한다는 얘기죠.
그러려면 보수도 신보수가 나와야 하고 진보도 신진보가 나와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건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오히려 더 뒤로 퇴행을 시켰다는 거죠. 이 퇴행은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이른바 범보수 세력이 매우 취약한 사상적, 도덕적, 문화적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걸 보여주는 거라고 봐요. 그 취약성이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헤게모니의 부재인데, 이 사람들이 돈도 있고, 재벌 쪽도 다 그들 편이고, 우리 사회의 지식인과 언론인들 또한 그쪽 편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습니까. 잘 하면 진보세력을 완전히 고립시킬 수 있거든요. 이른바 소수의 진보세력을 완전히 고립시키고, 잘하면 전체적으로 보수가 헤게모니를 확고하게 장악할 수 있단 말이죠. 정말 사람들이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보수 지지를 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데, 이런 조악한 시장논리, 이런 식의 무지막지한 시장논리가 아니라 아주 합리적인 시장론에 입각해서 공정한 법치를 확립하고 공안기관이 마음대로 설치지 않게 하면서도 얼마든지 언론기관들까지 길들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할 능력이 없는 거죠.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
=아, 그럼요. 할 수 있는데도 그걸 안 했거나 할 수 없었거나, 그 두 측면 다 있다고 보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그건 보수의 실패이자 동시에 우리 사회가 지난 1960~70년대 20년 동안 이룩한 민주화의 취약성이 박근혜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거죠. 이 와중에 실질적인 권력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내가 <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에서 얘기했던, 로펌이 법을 만드는 사회, 결국 기업사회로 가고 있어요. 나는 지금 공안경찰이 설치는 것은 허깨비, 구시대의 허상이고, 실질적으로는 대형 로펌, 그리고 대형 로펌과 결탁한 대기업이 이미 우리 사회를 움직여가고 있다고 봐요.
그것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느냐가 장차 중대한 문제죠.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들도 마찬가지로 업그레이드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진보가 업그레이드하지 못하고, 아주 소수를 빼고는 범 민주당 사람들까지 여전히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어요. 문재인씨까지 그래요.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다고 보는데, 새로운 청년층은 디지털 세대로 자라나서 새로운 정서와 문화를 갖고 있는데, 이 세대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대변할 수 있는 비전이나 정치적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 결과가 결국 유신의 찌꺼기와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야당에서 대안을 찾지 못한 50대 이상의 사람들이 박근혜 지지로 기울어지게 만들었죠. 야당이나 진보 쪽도 워낙 대안이 안 되니까 김종인 같은 사람도 진보세력이 힘이 없다고 판단하니까 박근혜를 움직이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그쪽에 붙었는데, 그것마저 또 안 되니까 뛰쳐나왔죠. -김종인 같은 사람조차 진보세력이 제대로 대접해주고 끌어들일 역량이 없는 거란 얘기죠.
=그 사람도 그걸 깨달았는데, 결국 박근혜 현상이라는 것이 10년의 민주정부 시절에 박탈감을 느낀 구보수세력의 반란인데, 내 식으로 말하면 서서히 진행되는 쿠데타, 합법적인 틀을 지닌 쿠데타라 할 수 있어요. 이게 과거의 구보수와 다른 점은 10년의 민주세력 집권 때의 박탈감 때문에 그만큼 업그레이드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대표로 이명박과 박근혜를 앉혀 놓은 것이란 점이죠. 우리가 그걸 잘 봐야 합니다. -민주화 세력 또는 진보세력의 결정적인 약점은, 그들이야말로 완전히 87년 체제에서 멈춰버린 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 보수는 오히려 나아가는 점이 있는데 비해 그쪽은 민주화라는 것, 자기 정당성의 근거인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모셔 놓고 주저앉아 퇴화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요.
=이인영씨가 이번에 민주당 최고위원직에도 출마했지만, 옛날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인 얘길 많이 했는데, 그들이 주로 학생운동의 명망을 이용해 곧바로 정치로 갔는데, 그게 한계예요. 너무 젊은 나이에 출세해서 정치공학에 길들여졌어요. 현실정치 속에서 자기들 입지 넓히는 일에만 골몰해서 결국 하나의 독자적 세력으로도 형성되지 못했고 야당을 혁신하지도 못했으며, 자기네 리더도 창출하지 못했어요. 거기에다 대안적 비전도 만들어내지 못한 그런 모습이 이른바 386, 486 운동권의 가장 큰 문제라고 봐요. 학생운동가들의 벼락 출세와 노동운동의 체제내화 -신뢰를 못 주잖아요.
=그거는 크게 보면,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학생운동의 한계라고 봐요. 이 점에서 최장집 교수와 생각이 비슷해요. 최장집 교수가 좋은 정당이 나와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아요. 좋은 정당은 종속변수고 독립변수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죠. 하지만 운동정치가 결국 그렇게 갈 수밖에 없었다는 데에는 동의해요. 한국 학생운동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힘이 세고, 활력이 있고, 민주화를 성취하게 만든 동력이지만, 그 기본적 한계는 그게 중산층운동이었다는 것, 대학생들이 중산층 출신이었고 학생운동의 중심은 엔엘(NL, 민족해방) 그룹이었다는 한계를 갖고 있어요. 엔엘은 반지성주의 경향이 있지요. 학생정치에서 시작해서 바로 대중적 스타가 된 1980년대 학생운동의 한계가 오늘날 학생운동 출신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한계와 연결돼 있다고 봐요. 밑으로부터, 현장에서 리더로 커간 게 아니라 학생운동 스타가 돼 거기서 바로 정치가가 된 데서 오는 한계.
물론 학생운동에만 책임을 돌릴 순 없지요. 초기의 민주화는 학생들과 지식인이 했고 그것이 시민운동으로까지 연결됐다는 건 맞는 얘긴데,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사회운동, 결국 노동운동이 성장했어야 하는데 그것이 체제내화하면서 좌절한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얽혀 있다고 봐요. 그게 내 박사논문 주제인데, 초기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섰지만, 그 다음에는 사회대중·생산대중, 노동자든 농민이든 그런 사람들이 주체가 돼서 당도 만들고 운동도 끌어가면서 하나의 사회적 세력을 형성해야 되는 거죠. 그것이 커나가면서 정당이라는 것이 나오고, 진보정당도 나오는 것인데. 한국의 노동운동은 1987년 무렵엔 활력이 있었는데 1990년대는 기업별 노조로 정착되고 기업 내에 흡수되는 과정을 거쳤죠. 이게 노동운동의 좌절로 이어지죠.
수십 년의 군사독재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운동기반이 파괴되고 진보세력의 뿌리는 뽑혀버렸죠. 그러면서 학생운동의 역할이 컸는데 1990년대에 학생운동도 사라지게 되죠. 학생운동 대신 사회대중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운동이 역할을 해야 하고 그 핵심이 바로 노동세력이 돼야 하는 거였죠. 그런데 노동세력이 정치화, 사회세력화하지 못하면서 학생운동 세력 출신의 정치가들이 진보당이든 민주계든 대중적 기반을 잃어버렸고, 결국은 디제이(김대중), 와이에스(김영삼)에게 줄을 서야만 했죠. 그렇게 해서 기성정치인하고 다를 바 없게 되는 거죠. 이게 어느 쪽만 일방적으로 탓할 수 없는, 결국은 전체적인 시스템의 문제인 거죠.
1987년 7∼9월 민주노조 건설 등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렇죠. 박사논문 쓸 때, 한국적 조건에서는 계급 담론을 그대로 수입해가지고 노동문제에 곧이곧대로 적용하면 곤란하다, 노동운동이 제도개혁 투쟁과 동시에 시민사회와 손을 잡지 않으면 독자적인 계급 세력으로 성장하기 어렵다고 내가 1990년대부터 주장해왔죠. 그런데 노동 쪽은 당시만 하더라도 계급노선이 압도적 힘을 갖고 있어서 나처럼 이야기하다가는 개량주의적이라는 공격을 받았죠. <한국사회의 노동자 연구>도 공격을 당했죠. 현장에서 이렇게 투쟁하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는 거였죠. 타협할 여지가 어디 있냐, 쟤들이 맨날 우리를 공격해대고 있는데, 라면서.
내 얘기는 비가 와서 우산을 쓰고 가는데 우산이 망가져 빗방울이 안으로 떨어지는데, 우산을 계속 땜질하면서 갈 거냐, 아니면 근본적인 처방을 할 거냐, 그런 관점에서 접근한 거죠. -박근혜 정부가 한심할 정도로 전략도 없이 모든 걸 미국에 기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사일 방어나 사드, 한미 군사훈련, 한미일 군사정보 공유 약정 등을 보면 미일동맹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에 속수무책으로 말려들어갈 것 같아 걱정스러워요. 남북관계도 어렵고. 오바마도 남북관계 개선에 뜻이 없잖아요.
=오바마는 남북 화해에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하고 있죠. -대통령이 일본 아베 총리를 만나지 않는 걸로 한일관계를 적당히 끌고 가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어요. 문제를 터뜨리지 않는 걸 선방으로 호도하면서, 아베 정권의 극우화에 제동을 걸고 한일관계에 새로운 돌파구를 여는 노력은 포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인데요.
=그렇죠. 아베가 추진하는 게 한마디로 전쟁할 수 있는 나라 아닙니까. 그건 결국 120년 전 청일전쟁 상황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는 얘긴데, 일본이 그동안은 미국의 우산 속에 있다가 지금 적극적으로 (평화)헌법을 바꾸거나 재해석 등의 편법을 쓰려 하고 있어요. 그들이 군사적인 행동에 나설 때 그 제1차적 대상은 결국 한국일 수밖에 없잖아요. 한반도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면 일본이 군대를 투입하겠다는 거고, 그것은 결국 청일전쟁의 재판인데, 그럴 경우에 한국인의 운명과 생명, 재산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이를 위한 정치력은 없어 보입니다.
미국은 한국이 그런 구도대로 잘 따라오도록 압박도 넣고, 한국을 자극하지 말도록 일본을 설득도 하지만 아베 지지 쪽으로 기울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최근 행보는 굉장히 위험해요. 이와 관련한 박근혜 정부의 역사의식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 같아요.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게 가장 큰 문제인 거죠. -전쟁국면에 들어갈 경우 우리 안전을 결국 미국에 다 맡기게 될 것 같은데, 대다수 우리 국민들이 다 넘어가지 않을까요. 전작권까지 갖고 있는 미국이 전쟁상태임을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대한민국 안전을 위해 자위대의 한반도 파병이 필수적이라고 얘기하면 누가 거기에 대들 수 있을까요?
=청일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조선사람들이었는데, 청일전쟁은 동학군 진압전쟁이었잖아요. 지금은 북이 그런 구실로 이용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국지전이 일어나면 북을 친다, 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는 명분하에 미사일을 발사하고 그러다 보면 과거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어요. 상상으로만 그칠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며칠 전에, 미국의 싱크탱크가 오바마에게 제안한 걸 보니까, 전쟁 벌이는 것까지 하나의 옵션으로 제시했더라고요. 오바마가 아이에스(IS, 이슬람국가)와 싸우면서 궁지에 몰릴 경우 북한 핵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시나리오죠.
박근혜 정부는 그런 상황 발생 가능성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남북관계만 개선하면 해결될 문제인데, 북에 풍선 띄우는 것 하나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어요.
=남북관계와 관련해 나름의 합리적 보수들도 있는데. 실리적 차원에서라도 5·24 조치 풀고, 물밑 대화도 하면서 러시아-북-남을 연결하는 프로젝트도 추진하면 좋을 텐데. -재벌들도 내심 그걸 원하고 있다는 관측이 많아요.
=재벌들도 그렇겠지만 중소기업들도 원할 텐데요. 중소기업도 지금 개성공단에 투자 못해서 손해 보는 경우가 엄청 많다는데. 하지만 기업인들이 대놓고 얘긴 못하죠. 약점들이 있으니까. 그렇다면 지식인들 중에 북한관계를 풀어야 한다고 조언해 줄 수 있는 합리적 보수들이 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다 쫓겨나니까 다들 입을 닫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강경파들이 득세하고 청와대가 모든 걸 주무르면서 통일자문회의도 들러리 역할만 하고 있어요. 구한말 상황 다시 맞지 않으려면 남북관계 개선해야 -북과의 관계 개선 외에 달리 출구가 없어 보이는데. 혹시 대통령의 전격적인 평양 방문 같은 돌발적 기획으로 돌파구를 열어보겠다는 시도 같은 건 없을까요?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고 봐요. 이제까지 양쪽이 서로 모양새가 좋지 않았지만 모두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에 서로 면을 세워주면서 할 수 있는 방도를 찾지 않을지. 순전히 추측이지만 차기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라도 시도할 수 있다고 봐요. -러시아 시베리아 철도 연결 같은 걸 앞세워 한다면.
=러시아도 좋아하겠지요. 그러잖아도 지금 석유 등 에너지 가격이 급락해 러시아 경제가 위기에 몰려 있고, 우크라이나 사태도 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한국이 미국 쪽으로 완전히 기우는 것도 탐탁지 않을 것이고. -중국도 그러기를 바랄 텐데요. 미국과의 동맹들 사이에서 한국이 몸만 조금 사려줘도 중국으로서는 엄청난 효과가 있을 텐데요.
=그렇죠.
지난 3월11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제10차 한 일 중 고위급 회의에 앞서 이경수 외교부 차관보(가운데), 류전민 중국 외교부 부부장(오른쪽), 스기야마 신스케일본 외무성 외무심의관이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손을 맞잡고 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그렇습니다.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도 1층을 짓지 않고 2층을 지을 수 없다는 말을 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북한 문제를 풀지 않고 중국, 러시아 대륙으로 발을 뻗을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박근혜 정부로서도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유력한 돌파구일 수 있죠. 대체로 보수정권이 보수세력을 달랠 수 있기 때문에 더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거든요. 실은 집권 초기에 박근혜라는 사람에게 은근히 그런 걸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엉뚱하게 나가는 바람에 일이 완전히 뒤틀어져 버렸어요. -그렇게 했다면 정권의 운명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텐데.
=좌파들이 공격할 수 있겠지만, 북한,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하는 게 좋아요. 우리 자본 쪽도 지금 건설 등이 위기를 맞고 있고 해서 돌파구가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북한이 아닌가. 북한 노동력도 질이 높고 자원도 상당하죠. 남한이 살 길은 북한이고, 북이 살 길은 남한인데, 결국은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고 봐요.
북의 위협을 빌미로 튀는 일본의 우익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도 남북관계를 풀어야 합니다. 그러면 일본의 정치지형도 바뀔 수 있어요. -마지막 질문.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덧붙인다면.
=동학농민혁명 이후 120년간 이어져 온 식민지, 분단, 서구 추종 근대화와 물량주의 성장 패러다임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고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라는 생각이 들어요. 120년 전 상황과 지금이 너무 비슷하다, 그때 청일전쟁 거치면서 조선이 무너지고 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붕괴했다, 학문도 시대와 함께 무너졌다는 거죠.
그리고 거기서 밑으로부터의 자생적인 변화라는 선택지는 결국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외세를 등에 업고 근대화를 추진했고, 그런 근대화가 지금까지 120년간 이어져 오면서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룩했다,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그렇게 된 건데요. 하지만 그 발전은 굉장히 기형적이고, 인문적 손실과 사람들의 희생이 너무 컸어요.
그것은 약자들의 고통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근대화요 발전이었죠. 이제 우리가 좀 더 질적인, 사회적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삶의 질이 보장되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국면에 도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지국가로 가야 하는데, 어떤 복지국가로 갈 것인가, 우리가 멕시코 등과 더불어 OECD 최악의 복지 후진국이 된 것은 결국 미국식 시스템을 받아들인 결과다, 지금 미국 일본 한국에 공통적인 복지 후진국의 모습, 불평등이 심하고, 약자에 대해 폭력적인 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사회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한국식 복지국가를 만드는데 모든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런 얘길 하고 싶어요.
120년간의 잘못된 근대화 체제는 고질적인 학력주의를 고착시켰다, 공부 잘 해서 출세하고, 그것이 양질의 노동력으로 국가 발전의 기둥이 되던 시절은 1980년대를 끝으로 지나갔다, 그런 식의 찍어내기 교육, 줄세우기 교육, 출세지향적 교육, 개인적인 권력과 부를 지향하는 그런 식의 교육은 한계에 도달했다, 교육제도를 완전히 새로 바꿔야 할 때가 됐다는 거죠. 탈락한 사람도 자기 소질을 발휘할 수 있는 공생의 교육 패러다임으로 가야 합니다.
저출산을 문제 삼는 것도 문제예요. 내가 볼 때는 인구가 너무 많은 게 문제인데, 인구가 합리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지, 복지와 고령자 부양을 위한 노동인구, 소비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식으로 담론을 끌고 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봐요.
결국 농업의 시대로 갈 것이라는 생각도 해요. 지속 가능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자원과 에너지, 환경, 인구, 교육을 바꿔야 한다는 거죠. 나는 대학은 사실상 무너졌다고 봐요. 그럼에도 과거가 현재의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인데, 결국 평생교육 쪽으로 시스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