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대한민국 제1야당의 모습/ 임미애 혁신위원회 대변인/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7. 18. 12:17

정치국회·정당

대한민국 제1야당이 동네 치킨집보단 나아야지

등록 :2015-07-17 18:51수정 :2015-07-17 22:24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 의장실에서 임미애 새정치연합 혁신위원회 대변인을 만났다. 이날 국회 1층 정론관에서는 새정치연합 당직자들이 집단탈당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임미애씨는 혁신위 첫 회의에서 “소 키우고 땅 일구는 이 촌부한테 대한민국 제1야당이 혁신을 자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9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 의장실에서 임미애 새정치연합 혁신위원회 대변인을 만났다. 이날 국회 1층 정론관에서는 새정치연합 당직자들이 집단탈당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임미애씨는 혁신위 첫 회의에서 “소 키우고 땅 일구는 이 촌부한테 대한민국 제1야당이 혁신을 자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안타까워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임미애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 대변인
50대 아줌마 둘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울었다. 그것도 여의도 한복판에서 정치 얘기를 하다가… 휴지를 찾아서 코를 풀며 멋쩍은 웃음으로 분위기를 수습했지만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분노가 치받쳐 자꾸 목이 메어왔다. 요즘 정치는 눈물이 날 만큼 비통하다.

임미애(49)는 경북 의성 사람이다.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이지만 스물여섯에 결혼해서 의성에 내려가 23년간 농사짓고 소 키우며 사는 동안 의성 사람이 되었다. 이번주에 수박도 거두고 감자도 캐야 하는데, 당최 집에 내려갈 짬이 나지 않는다면서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이자 공동대변인인 그는 요즘 회의와 토론회, 간담회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나는 ‘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새정치연합 사람과의 인터뷰’가 아니라 ‘의성 아줌마가 본 여의도 이야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의 답은 간명했다.

“저, 새정치연합 사람 아니에요.”

2004년 열린우리당 시절에 입당해서, 경북에서 유일한 민주당 선출직 기초의회 의원으로 재선까지 성공했지만, 지난해 정치에서 물러나며 탈당했다. 지금은 소 100여마리 키우며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 산다.

지난 9일 국회의사당에서 임미애를 만나기로 한 날, 신문은 일제히 전날 있었던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사퇴 기자회견을 1면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같은 날 발표된 혁신위원회의 2차 혁신안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혁신안 내용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오히려 새정치연합 내부에서 터져 나왔다. 우리 일행이 인터뷰를 위해 국회 로비에 들어설 무렵, 1층 정론관에서는 새정치연합 당직자들이 집단탈당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어수선하고 심란한 풍경이었다. 새정치연합 빈 회의실을 인터뷰 장소로 잡았지만 직원들은 잡담에 빠진 채 혁신위원에게 물 한 잔 내오지 않았다.

눈물 날 만큼 비통한 요즘 정치

-많이 바쁘시죠?

“어제 2차 혁신안 발표를 했는데 그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 오전 일정을 바꿔서 기자들 만나 설명을 좀 해야 했어요.”

수수하게 질끈 동여맨 머리에 화장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눈매가 고왔다. 안경 너머로 동그랗게 치켜뜬 눈이 소녀처럼 반짝였다.

-(자료를 체크하며) 1966년생이고 서울 출생, 한양여고, 이화여대 경제학과 84학번, 맞나요?

“예, 맞아요.”

-직업을 뭐라고 쓰시죠? 농민? 정치인?

“직업은 농업이죠.”

-군의회 의원도 8년이나 하고 ‘지방의정 봉사대상’도 받으셨는데.

“정치도 해봤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된 것 같아요. 정치를 하면서 행복한 사람도 있는데요, 전 현장에서 일할 때가 훨씬 행복하고 좋아요.”

-현장 일이란 게 뭐예요?

“그냥 사람들하고 농사짓는 거요. 누구네 집에 일손 바쁘다 그러면 복숭아 적과(摘果: 열매 솎아내기)도 해주고요, 마늘도 캐주고 그래요. 자두 적과도 해주고, 봉지도 싸주고. 요즘엔 ‘사회적 경제’를 공부하는 학습동아리도 만들었어요. 협동조합, 마을기업, 복지 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랑 같이 공부해요. 어디서 박람회 같은 것 한다고 하면 같이 가기도 하고요.”

-소를 백 마리 넘게 키우신다면서요? 혁신위 일 때문에 집을 자주 비우실 텐데, 바깥일이 많아서 (개그맨 투로) ‘소는 누가 키우나요?’(웃음)

“김현권씨(남편)가 키우죠. 하하하~”

-이번에 각기 다른 경로로 부군인 김현권(52·새정치연합 군위·의성·청송 지역위원장)씨와 임미애씨가 혁신위원직 제안을 받았다고 하던데, 두 분 중에 임미애씨가 하는 게 좋겠다는 결정은 어떻게 내리게 된 거예요?

“남편이 농업위원회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동안 새정치연합이 농업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남편이 여러 차례 당에 건의도 하고 했는데, 이번 2·8 전당대회에서 그게 만들어졌죠. 근데 이름만 있지 아직은 조직이 없으니까, 남편이 돌아다니면서 그 일(조직원 모으는 일)을 해요. 우리 손으로 농업의 미래를 만들자고. 지금 그 일에서 빠지면 그동안 같이 일하자고 약속한 사람들한테 도리가 아니라고, 자기는 하던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해서.”

-부군 사정은 그렇다 치고, 그래도 임미애씨가 혁신위에 올지 말지 결정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요.

“저도 고민이 많았어요. 썩 내키진 않았지만 제안을 받고 나서 생각한 건 두 가지예요. 하나는 내가 지방에서 당을 경험해보면서 느꼈던 건데 ‘당이 있어야 할 곳에 당이 없구나!’ 하는 생각. 정치가 국민의 생활 속에 있어야 하는 건데 그게 여의도에만, 의원들한테만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해선 안 되잖아요. 전 사실 내년에 누가 (국회의원) 배지를 다느냐보다는 2017년 대선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절박감이 커요. 저처럼 농촌에 살면 정부 농업정책에 따라서 피부에 와닿는 경제가 정말 다르다는 걸 몸으로 느끼게 되죠. 지금의 농업정책이 다음 정부에서 또 지속되고 바뀌지 않는다고 하면, 이건 굉장히 암담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상황으로 계속 치달으면 국민들은 살아가기가 너무 어려운 거죠.”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또 하나는 뭡니까?

“(망설이다가) 이건 굉장히 조심스런 얘긴데, 우리 세대(86세대) 정치인들이 벌써 50대잖아요.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하고 정치를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비난을 많이 받고 있어요. 실제로 잘못한 점도 있고, 거대언론의 프레임에 도맷금으로 넘어간 측면도 있을 거예요. 우리 세대 정치인에게서 내부 자성의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면, 그렇게 하기 위한 따끔한 목소리가 필요하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 ‘86세대’ 정치인의 대명사처럼 얘기되는 사람들이 저랑 한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니, ‘우리 반성할 게 있으면 반성하고 내려놓을 게 있으면 내려놓자’는 얘기를 누군가 꺼내야 한다면, 나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했어요.”

소 100마리 키우는 의성 시골아낙
제1야당의 혁신 자문하는 중
87년 이화여대 총학생회장 출신
경북 유일 민주당 기초의원 지내
부부가 함께 혁신위원직 제안받아

“국민들 절박감 저이들은 알까
의원직이 그렇게 좋은지 모르지만
잘못한 거 있으면 사과 좀 하고…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았으면…
내려올 사람은 내려올 때가…”

“저이들은 이 절박함을 알까요?”

임미애는 오랫동안 중앙정치와 거리를 두고 살았다. 87년 6월항쟁 때 이화여대 총학생회장으로 전대협 1기를 이끈 주요 멤버였지만, 의성에 내려가는 순간 과거 일은 묻어두고 농사꾼으로 충실하게 살자 마음먹었다. 사과나무를 키우고 마늘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웠다. 어린이집 차가 동네까지 들어오지 않아 연년생 두 아들을 데리고 밭일을 다녔다. 아이들은 흙에서 뒹굴며 놀다가 밭고랑에 기대 잠이 들곤 했다. 흙투성이로 애를 포대기에 업고 다니는 임미애를 두고 동네 사람들이 “용산댁(시어머니 택호) 큰며느리는 참 골물스럽다(뼈빠지게 고생하는 티가 난다)”고 혀를 찼다는 얘기는 나중에 들었다.

옛 친구들이 정치신인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도 임미애는 동네 부인회, 새마을지도자 부녀회, 생활개선회 같은 주민모임에서 허드렛일을 했고, 지역의 생산물을 도시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는 농산물 직거래 사이트 ‘농촌과 도시’를 만들어 운영했다. 남편이 중앙당의 도움도 거의 없이, 질 게 뻔한 선거에 야당 후보로 나서서 고군분투할 때도, 자신이 경북에서 유일한 야당 기초의원으로 뛰어다닐 때도, 정치란 보통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뿌리박혀 오래도록 씨를 뿌리는 일이라는 믿음 하나로 당당했다.

밭고랑에서 키운 아이들이 훌쩍 자라서 대학에 들어가고, 이제는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는 농사꾼이 되어 ‘이 정도면 열심히 살았다’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꿈꾸던 세상을 만들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목에 가시처럼 남았다. 억대 소득을 올리는 농부 육성정책으로 돈 잘 버는 농가는 늘어났지만 여전히 절대다수의 농민들은 빈곤층으로 남아 있고, 동네의 조손가정에 밥을 굶는 아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믿었던 친구들이 정치 일선에 자리를 잡았어도 낡은 정당정치는 바뀌지 않았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터널 안에서 꿈을 잃은 사람들은 당장의 생계를 이어가기에 급급하다. 지난달 12일 혁신위 첫 회의가 열리던 날, 그는 말했다.

“제가 오늘 새벽 1시50분에 의성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습니다. 기차 타고 오는 중에 이상하게 눈물이 나더군요. 어쩌다 시골에서 소 키우고 땅 일구는 이 촌부한테 대한민국 제1야당이 혁신을 자문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생각하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첫 회의 때 한 발언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게 왜 화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감정이입이 되었나 보죠. 새벽기차를 타고 올라올 때 심정에….

“그때는 진짜 눈물이 많이 났어요.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왜 눈물이 났을까요?

“많이… 좀… 안타까웠어요. 내가 짐을 들고 기차에 올라타는데 남편이 ‘잘 다녀오라’고 등을 두드려 주더라고요. (울컥해서 말 멈추며) 보내는 남편도 맘이 무거웠을 거예요. 좋은 소리 듣는 자리도 아니고, 욕먹기는 불 보듯 뻔한 일인데, 그런데… (눈물 주르르) 우리는 이렇게 답답한데 여기 있는 이들은 정말 모르는 것 같아요. 이렇게 국민들이 갖는 절박함을 저이들은 알까? 그냥 내 맘 같아서는요, 국회의원들이요… (떨리는 소리로) 그 자리가 그렇게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잘못한 거 있으면 잘못했다고, 정말 잘못했다고 국민들한테 사과하고, 더 이상 욕심부리지 않았으면… 내려올 사람은 내려올 때도 되었잖아요.”

-그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동안 의정활동으로 능력이 입증된 분들은 조금 더 어려운 곳에 가서 일을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가 여기 자갈밭을 옥토로 만들었다!’ 그러면 또 다른 자갈밭으로 가서 좀 희생해주는 자세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야 이 당이 살아나요.”

인터뷰 도중 갑자기 울컥해 눈물을 흘리기도 한 임미애씨는 “당이 있어야 할 곳에 당이 없고, 국민의 생활 속에 있어야 하는 정치가 여의도의 국회의원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느껴왔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인터뷰 도중 갑자기 울컥해 눈물을 흘리기도 한 임미애씨는 “당이 있어야 할 곳에 당이 없고, 국민의 생활 속에 있어야 하는 정치가 여의도의 국회의원들에게만 있는 것처럼 느껴왔다”고 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동네 치킨집도 하는 일을 왜 못해?

-임미애씨도 작년에 탈당했잖아요. 기초의회 활동도 성공적으로 하셨고 지역기반도 다졌는데 왜 탈당하셨어요?

“사실 당에 대한 서운함이 있었어요. 군의원이라고 ‘직책 당비’는 십만원씩 거둬 가면서 정작 우리 지역 사안에 맞는 일을 하려고 하면 나 몰라라 해요. 아무것도 안 해주고, 다 ‘니가 알아서 해’ 하는 식! 그게 쌓인 것도 있었고, 정치하겠다는 사람 많은데 뭐 꼭 나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고.”

-근데 막상 혁신위에서 ‘콜’했을 때 외부 인사로 들어왔어요. ‘와서 이것만큼은 꼭 하겠다’ 그런 게 있나요?

“있어요. 당 지도체계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대의체계가 되려면 당이 실핏줄처럼 국민들 속에 좍 뻗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그게 안 되거든요. 당원 가입은 여전히 ‘지역’으로만 입당이 가능해요. 내가 농업인이면 농업인의 이해와 요구를 가지고 입당할 수 있어야죠. 다양한 사람들이 계층, 세대, 부문별로 나뉘어서 그렇게 활동할 수 있어야 되고, 그렇게 아래로부터 선출된 지도자를 상급의 지도체제로 보낼 수 있어야죠.”

-그걸 왜 못하나요?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온라인 쇼핑몰 가입할 때도 내 관심분야가 뭐, 뭐다 체크해서 보내면 알아서 세일 정보도 보내주는데….

“맞아요.(웃음) 당에는 그렇게 물어보는 시스템이 전혀 안 되어 있어요. 심지어 입당원서도 다운로드받아서 프린터로 출력해서 손으로 직접 써서 보내야 해요.”

-(깜짝 놀라) 온라인 입당이 안 된다고요?

“안 돼요. 이 당에선.”

-디지털 강국을 주장하신 김대중 대통령의 정당에서….

“안 돼요. 우리 남편이 아들을 오랫동안 열심히 꼬셔서 입당을 하게 했어요. 근데 걔는 주소지는 의성이지만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데, 그럼 대학생위원회나 서울지역 활동과 연결해줘야 하잖아요. 근데 여전히 지역당원이에요.”

-왜 그게 안 되죠?

“왜 안 되는지 저도 물어봤어요. ‘서명이 있어야 해서 안 된다’고. ‘전자서명하면 되지 않냐?’니까 비용이 많이 든다는 얘기도 있고….”

-‘당원’에 관심이 없는 거군요. 그렇게밖에는 해석이 안 돼요. 동네 치킨집도 회원가입하면 할인쿠폰 주고요….

“우리도 쇠고기 팔면 적립포인트 드리고, 쌓이면 현금으로 쓸 수 있게 해줘요.(웃음)”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데 대한민국 제1야당은 여전히 고색창연한 구텐베르크 인쇄기 시대의 유물로 남아 있다.

당 지도체계 달라져야 한다고 봐
지역으로만 ‘당원가입’ 가능
서울서 대학 다녀도 의성 당원
입당원서 손으로 직접 쓰는 현실
세상 바뀌는데 제1야당은 ‘유물’

새정치연합 2·3차 연쇄탈당 한다지만
지역·세대·계층 대표체제 만들고
사무총장 없애 ‘결재라인’ 줄이자
비노-친노보다 정권교체 원해
국민과 결합한 생활정당이 희망

탈당선언 있어도 갈 길은 간다

-어제(8일) 혁신위가 내놓은 안에 반발해서 오늘 새정치연합 중견 당직자들이 집단 탈당을 선언하고 앞으로 2차, 3차 연쇄 탈당 사태가 일어날 거라고 예고했어요.

“저희도 확인해봤는데, 공채 출신의 당직자들은 아니고, 이미 탈당을 했거나 당직을 그만둔 전임자들이 많다고 해요. 새정치연합 당직자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이전부터 지적되어온 고질적인 문제였죠. 새누리당은 95%가 공채 출신인데 새정치연합은 그러지 못하거든요. 이 당 저 당 자꾸 합당할 때마다 열다섯, 스무 명씩 데려오니까.”

-그분들 움직임에 크게 동요할 필요 없다고 보시는 것 같네요. 전임자나 이미 탈당한 사람들까지 나서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탈당을 계획하는 다른 정치인들의 첨병 역할을 하겠다는 뜻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봐요.”

-이분들이 얘기하는 건 이래요. ‘최고위원회와 사무총장직을 없애자는 혁신위 주장은 당내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제왕적인 총재를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해예요. ‘최고위원들이 계파싸움 하니까 없애고 사무총장이 공천에 깊이 관여하니까 폐지한다…’ 이렇게들 받아들이시는데 그게 아니고요. 지금까지 최고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았단 말이에요. 사실 계파라는 건 정치를 하다 보면 있을 수밖에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의 최고위원 선출 방식을 보면 지역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계층이나 부문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내가 서울에 지역구가 있는 국회의원인데 최고위원에 나가려고 한다, 그러면 전국을 다니면서 지지를 호소해야 하는데 나와 개인적 연줄이 있는 누군가를 찾아 ‘나 좀 도와줘’ 하는 거지요. 계파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건 문제잖아요. 우리는 지역대표, 세대대표, 계층대표, 부문대표로 이루어진 의결기구로 지도체제를 만들어서 최고위원회를 대체하자는 거예요.”

-사무총장을 철폐하자는 건 왜 그런 거예요?

“나도 8년 정도 당원으로 있으면서 이 당을 경험해 봤잖아요. 도무지 일이 안 돌아가요. 시의적절하게 플래카드 걸어야 할 땐 걸고, 이왕이면 좀 더 이쁘고 세련되게 국민들 눈에 잘 띄게 걸어야 하잖아요. 국민들이 관심 갖는 사안 있으면 이슈파이팅도 하고 정책홍보도 해야 하는데, 늘 한 템포 늦어요.”

-왜 그래요?

“당직자들 만나 보면 항상 그분들 하는 말이 있어요. ‘결재라인을 단순화해 달라’고. 여기는 최고위원 내에서 문제가 생기면 당무가 안 돌아간대요. 결재라인이 너무 복잡해 가지고, 한 단계 올라가서 한 개 (결재) 찍고, 또 한 단계 올라가서 한 개 찍고… 그러다가 세월 다 간다고요. 그래서 사무총장 밑에 조직 직제를 두지 말고, 당대표 밑에 각 국의 위상을 수평적으로 해서 시기적절하게 자율성과 책임감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잔 거예요.”

-선출직 공직자 평가위원회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이 위원회 역할은 뭐예요? 공천에서 배제될 사람을 추려내는 것?

“선거 앞두고 지지도나 선호도 조사를 하긴 했어요. 근데 선거 임박해서 하는 조사 말고 2년에 한 번씩 모든 선출직 공직자에 대해서 객관적 평가를 하자는 거죠. 그 결과가 공천에도 반영되도록.”

-선출직 공직자라는 건, 국회의원하고 자치단체장을 말하는 건가요?

“예예, 광역단체장이요.”

-일반 기업에서도 최소한 1년 단위로 업무평가를 하잖아요. 정례적이고 일상적인 업무로 당연히 해왔어야 하는 걸 지금껏 정당에선 안 해왔다는 거예요? 그렇게 선거에 연패하면서도?

“그렇죠. 공천을 한다는 건, 그 사람에 대해서 우리 정당이 책임지겠다는 뜻인데….”

-당의 ‘브랜드’로 ‘품질보증’을 한다는 거죠.

“그러니 지역주민이 뽑아서 된 사람이라고 해도 임기 중에 품위를 손상하거나 당원으로서 해선 안 될 일들을 한다고 하면 정기적 평가에 반영해야죠.”

-지난번 공개석상에서 임미애씨는 이 평가위원회의 위원 추천권을 혁신위가 가져야 한다고 했는데 위원장 선에서 일축되었어요. 그건 혁신위가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문제제기를 하실 거예요?

“그럴 생각입니다.”

“국민과 결합한 생활정당, 힘들까요?”

-혁신위에서 무슨 말을 하든 친노-비노 프레임에 갇혀서 분란이 커집니다. 친노와 비노의 사상적 정책적 차이가 뭡니까?

“저도 그게 구분이 안 가요. 저랑 가까운 국회의원들한테도 물어봤어요. ‘그대는 비노야, 친노야?’ 이 사람들도 딱히 말을 못해요.”

-지금 새누리당에선 ‘유승민 사태’를 계기로 해서 친박과 비박이 당·청 관계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노선의 차이로 해석되고 있어요.

“이전까진 그렇게 노선으로 구분될 수 없었는데, 유승민 사태 때문에 그렇게 돌출된 거죠.”

-맞습니다. 근데 대체 새정치연합의 비노, 친노는 뭐가 쟁점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에요.

“광주에 갔을 때 어떤 어머님 한 분이 그러시데요. 그냥 일반 시민이신데 ‘내가 니들 찍어줄 때 누가 친노고 누가 비논지 구분 안 하고 찍어줬다’는 거예요. ‘우리는 니들 싸우는 건 관심 없고 2017년에 정권이나 교체해 줬으면 좋겠다’고.”

-혁신위에서 어렵게 애쓰고 있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혁신을 얘기해도 이미 국민은 혁신위에서 상상하는 그 이상을 원합니다. 지금의 당내 기득권을 파기하고 정면돌파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정권을 맡게 된다 해도 별로 기대할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새정치연합 혁신위를 과거 박근혜의 한나라당 비대위와 비교해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박근혜 비대위는 계파해체 선언하고 친박계 일부 인사 불출마 선언하고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도 했지요. 과연 혁신위가 목표한 바를 이룰 힘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전 내년 총선에서 몇 석을 확보했느냐 자체가 혁신의 성공을 가늠하는 잣대라고 보지 않아요. 어떤 중진의원은 ‘원숭이는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정치인은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라고 말해요. ‘당선 가능한 사람을 공천하는 게 최고의 혁신’이고 의석을 다수 확보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근데 거꾸로 전 이렇게 묻고 싶어요. 지금까지 130석이 적은 건가요? 의석이 적어서 일이 안 된 거예요? 나의 판단 기준은 ‘정당의 기초를 얼마나 국민과 결합하는 생활정당으로 바꿀 거냐?’예요. 그 과정을 거치면서 당이 튼튼해질 수 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는 거라고 믿습니다. 그게… 그렇게 힘들까요?”

-제 솔직한 대답을 원하시나요?

내가 물었다. 임미애는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답했다.

“아니요.”

-아니라고요?

“화이트칼라, 많이 배운 분들, 정치에 관심 있다고 하는 분들은 혁신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아요. 근데 평범한 동네 사람들, 더 이상 뭔가 이룰 것도, 물러설 곳도 없는 사람들은요, ‘좀 잘해봐. 뭐든 해봐야지 않겠어?’ 그래요. 이 길밖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예요.”

-이 일이 잘 안되면 임미애씨 개인적으로도 큰 상처가 되겠지요?

“글쎄…두고두고 상처가 될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어쩌겠어요? 이게, 이 시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 걸요.”

누군가는 화염 속에 소화기를 들고 뛰어들고 누군가는 방역복을 두르고 메르스 병동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되는 일을 안되는 대로 차마 내버려둘 수가 없어, 실패를 감수하고 뛰어드는 이들은 적어도, 아무것도 안 하는 이들보다는 아름다운 패자다.

녹취 박성희(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이진순 언론학 박사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