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 봐서는 6자회담이 다시 열리기는 틀렸다고 할 수 있다. 노동당 창건 70주년(10월10일) 전후해서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거나 4차 핵실험을 할 거라는 일부 전문가들의 예상이 맞아 들어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는 정해진 수순이고 북한이 반발하는 와중에 한반도 정세는 요동칠 것이다. 설사 박근혜 정부가 임기 후반 대북정책을 좀 바꿔 보고 싶어도 그럴 여건이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언행을 엄포로만 치부해버리지 않고 그 행간을 잘 읽어 내면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면서 한반도 정세를 안정시킬 수 있는 여지가 없지는 않다. 그동안의 남북관계 현장 경험에 입각해서 볼 때, 북한은 유난히 복선을 깔아 두는 화법을 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식으로 나중에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술도 뛰어나다. 그러기에 우리의 전략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서는 북한의 말속에 숨어 있는 복선부터 찾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조건절이나 단서조항을 잘 해석해야 한다.
실제로 북한은 이번 쿠알라룸푸르에서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식의 조건이나 단서를 다는 화법을 썼다. “미국이 대규모 합동군사연습을 중단하기로 결정한다면, 미국의 우려를 포함한 많은 역내 이슈들에 기회가 생길 것이다”라고 했다. 조건부로 핵과 미사일 문제의 진전을 시사한 것이다. 6자회담에 나갈 수 있다는 뜻도 담겨 있다. “미국이 우리를 군사동맹 강화 구실로 계속 삼는다면, 필연적으로 제2차 한국전쟁 발발로 이어질 것이다.” 이걸 협박으로만 해석하면 대책은 비싼 미제 신무기 구입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이걸 “제발 한-미 합동군사연습 좀 중단해 달라. 최소한 살살 좀 해 달라”고 에둘러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면 대응은 달라질 수 있다. 4차 핵실험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답변했다. 미국의 압박이 계속될 경우 추가 핵실험을 하겠지만 미국이 사인만 좀 보내주면 4차 핵실험을 안 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단 것이다.
북한 엄포의 행간에 이런 복선들이 깔려 있다면, 우리로서는 장계취계(將計就計: 상대의 계략을 알아내서 자기의 전략을 세우는 것) 차원에서 그걸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안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는 대통령과 참모들은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는 자세로 전략을 짜고 실천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는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도 자기 나라에는 불똥도 안 튀는 미국이나 일본을 따라가기보다 그들을 리드해 나가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의 엄포를 협박으로만 간주하고 조건부 대남 제의를 진정성 없는 평화공세나 궤변으로 단정해버리는 단선형적 사고를 해서도 안 된다. 그러면 남북 간에 접점은 만들 수 없고 한반도 상황은 북한이 뜻하는 쪽으로 굴러갈 수밖에 없다. 행간을 읽어 내면서 상황 악화를 막는 유연한 정책을 북한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보수 논객이라면 몰라도,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는 금물 중의 금물이다.
이번 광복절에 통일준비위원회가 작년부터 준비해온 통일헌장이 발표될 공산이 크다. 사실 통일헌장은 남북이 함께 작성해야 하는 건데 우리 쪽에서 일방적으로 작성, 발표해버리면 북한은 체제통일(흡수통일) 음모라며 거친 언사를 또 쏟아낼 것이다. 그리되면 분단 70년 광복절이 새로운 남북갈등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는 대북 자극적인 내용 대신 북한이 박 대통령 임기 후반 남북관계에 대해서 기대를 좀 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최근 북한 대남 언행의 행간에도 우리가 상황 변화를 선도해주기 바라는 속내가 배어 있다. 지난주 이희호 여사 방북수행원 중 몇 사람도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의 이런 속내를 박 대통령이 적극 활용하기 바란다.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
정세현 평화협력원 이사장·전 통일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