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도 대체로 남한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보여왔다. 살짝 비틀면 “‘주체’는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는 거야”쯤 될 것이다.
북한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를 잘 하는 편이 아니었다. 북한은 최근 두 명의 남한 군인이 다친 지뢰 폭발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북한의 유감 표명에 남한은 11년 만에 재개했던 비무장지대에서의 한국 노래와 뉴스 방송 공세를 중단했다. 그러나 북한은 ‘유감’이 사과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고 발생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것이지, 책임 인정이나 사과는 거부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북한이 사과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2002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1970년대와 80년대 북한의 일본인 납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특수기관이 맹동주의적인 영웅 심리에 사로잡혀 납치를 했다.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며 솔직히 사과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처를 취했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사과가 북-일 관계의 새 시대를 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국 관계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올해 봄, 주방글라데시아 북한 대사는 그의 동료 외교관이 금괴를 밀수하려다가 붙잡힌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지난해는 북한 당국이 수백명의 주민이 살고 있던 평양 고층 아파트가 붕괴하자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북한은 미국에도 사과한 적이 있다. 김일성 주석은 악명 높았던 판문점 도끼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북한은 남한에도 사과했다. 북한은 1968년 청와대 습격 시도에 대해 4년 뒤인 1972년 사과했다. 1996년 동해 잠수함 침투에 대해선 ‘깊은 유감’, 2008년 금강산 관광객 사망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시했다.
여전히 남한이 북한의 공식적인 인정과 사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건도 있다. 천안함 침몰 사건이 대표적인데, 북한은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체로 북한은 남한에 무릎을 꿇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의미의 ‘자주’를 넘어 ‘주체’의 뜻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반대말인 ‘사대주의’를 정의하기는 쉽다. 남한이 미국과 맺고 있는 ‘사대주의적’ 의존 관계는, 북한이 다른 나라와 관계 발전을 시도할 때 피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사과는 사대주의자나 하는 것이고, 그래서 북한은 사과를 하지 않으려 한다. 또한 북한 지도자들은 약하지 않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앞으로도 남한이 북한을 쥐어짜서 사과나 ‘깊은 유감’을 받아내는 일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 당국이 그런 기대에 맞춰 정책을 만드는 것은 별로 의미있지 않다. 많은 경우에서 보여줬듯이, 북한의 유감 표명이 그런 행동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남북관계는 ‘말의 교환’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교류를 통해서만 발전할 것이다. 최근 비무장지대의 사건들을 둘러싸고 남북간 긴장이 고조됐지만, 실질적인 교류는 계속됐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북한의 준전시상태 선포에도, 개성공단 기업들은 계속 물건을 생산해냈다. 남한의 선수들이 평양에서 열린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에도 참가했다.
서구의 평판과 달리, 북한 사람들은 아주 실용적이다. 북한의 협상가들은 이데올로기적인 제한 속에서 움직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종종 비즈니스적인 접근법을 취한다. 이런 이유로,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합의문의 구체적인 조항에 대해 남북이 후속조처를 취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과의 중요성을 나도 잘 알고 있다. 희생자들은 그들의 고통이 인정받기를 원한다. 정부 관료들은 자신들이 국민들을 대신해 적극 나서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원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계속 고집하는 것은, 내륙국가로부터 질 좋은 스시를 수입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제 북한의 유감을 받아들이고 남북간 협력 사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 아마도 남북간에 좀더 사랑이 싹튼다면 지금처럼 사과할 필요도 많지 않을 것이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