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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성을 말하다/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0. 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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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성을 말하다

등록 :2015-10-28 21:03수정 :2015-10-28 22:20

 

왼쪽부터 정두리, 김얀.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왼쪽부터 정두리, 김얀.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 여성 섹스 권리장전
‘젖은잡지’ 정두리 편집장-섹스칼럼니스트 김얀 솔직·대담 토크
1998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은 남편의 장시간 노동으로 ‘생과부’ 처지가 된 여성의 법정 소송을 다룬 영화다. 주인공은 남편 회사에 2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데, 판사는 판결 직전 자신의 아내에게 “여보, 당신도 성욕이 있소?”라고 묻는다.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는 대사다. 영화 개봉 이듬해, 배우 서갑숙은 자신의 섹스 경험담을 적은 책 <나도 때론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를 펴냈다. 그는 “음란한 여성”이라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여성에게 ‘섹스’는 정당한 권리로 인식되고 있을까?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섹스는 여성에게 금기시되는 단어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조금씩 균열을 보이고 있다. 여성들은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좀더 적극적으로 섹스 담론을 펼치고 있고, 이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에스엔에스를 발판 삼아 새로운 여성 섹스 담론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젖은잡지>라는 제목의 독립잡지를 정기적으로 내놓는 정두리 편집장은 에스엔에스에서 주목받고 있다. <젖은잡지>가 다루는 욕망은 특별하다.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을 쓴 섹스칼럼니스트 김얀도 에스엔에스와 누리집 ‘김얀닷컴’을 통해 맹활약하고 있다. 은하선 작가가 자신의 생생한 섹스 경험담을 담아 최근 낸 책 <이기적 섹스>는 사회과학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은하선은 그동안 모은 ‘섹스토이’를 전시하고 사용기를 올리는 등 파격적 행보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들에게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말하는 섹스’가 무엇인지 들어보기로 했다. 지난 21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정두리·김얀과 얘기를 나눴다. 독일 유학 중인 은하선은 글을 보내왔다.

“나보고 ‘김치년’이라 하는 남자들이
왜 저는 동남아 가서 성매매하나”

“이성애자 남성 아닌
타자의 욕망 말하고 싶었다”

사회 한국에서 섹스란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다. 여성의 입장으로 드러내놓고 말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김얀(이하 김) 어렸을 때부터 ‘야한 거’에 관심이 많았다. 주변 친구들과 섹스에 관한 경험이라든지 어떤 섹스를 추구하는지 등을 자연스럽게 얘기했다. 트위터가 뜨기 시작하면서, 산부인과에서 각종 검사를 한 얘기들을 올렸더니 반응이 좋더라. 사람들이 “여자가 드러내놓고 이런 얘기도 하는구나” 하며 신기해했다.

정두리(이하 정) 난 반대의 경우다. 오히려 섹스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지 않았다. 미술 전공 학생으로서, 여성주의 작가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보면, 같은 신화를 놓고 그렸지만 유디트의 표정과 육체가 다른 남성 작가의 작품에 비해 더 강인하다. 이 그림을 보면서 ‘시선이 가진 권력’이라는 걸 생각하게 됐다. 현재 만드는 <젖은잡지>도 여성주의 관점의 작업이라 볼 수 있다.

사회 김얀씨는 자신이 경험한 남자를 묶어 책으로 냈다. 어떤 반응이 있었나?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라는 부제의 <낯선 침대 위에 부는 바람>은 13개 나라를 여행하며 만나고 헤어졌던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본질적으로 나의 이십대에 관한 이야기다. 책이 나온 뒤 ‘일베’ 사이트에 내 사진을 올리고 “나라 망신 시키는 김치년”이라고 욕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일베는 동남아 성매매 정보를 공유하는 걸로도 유명한 사이트다. 나보고 욕하면서 왜 저는 동남아 가서 성매매하나. 나는 이런 남자들의 이중성이 우습다. 그들은 여자가 욕망하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는 걸 넘어 본인 자신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맞장구 치며) 맞다.

사회 섹스 얘기 대놓고 하면 속칭 ‘밝힌다’고 생각들 한다.

“시집 다 갔다”고 한다.(웃음) 하지만 섹스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나는 지금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해질 거다.

여러 반응 중에 “대단하다”는 말이 거북스럽다.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는 문제인데, 과도하게 관심을 주는 것 같다. <젖은잡지>가 이 세상에 없는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젊은 여성이 만드는 섹슈얼을 주제로 한 콘텐츠에 대한 상상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스스로 알도록 하고 싶었다.

<젖은잡지>는 여성 동성애 등을 다룬다. 정두리 제공
<젖은잡지>는 여성 동성애 등을 다룬다. 정두리 제공
사회 <젖은잡지>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인가?

잡지가 그동안 다뤘던 주제가 ‘사도마조히즘’(SM), ‘백합’(레즈비언) 등이다. 이성애자 남성이 아닌 타자의 욕망을 말하고 싶었다.

사회 남성들의 시각을 이용한 상업주의라는 지적이 있다.

꼭 <젖은잡지> 안 본 사람들이 상업적이고 음란하다고 한다. 남성 시각을 이용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

사회 예컨대, 남자는 여성의 노출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이용한다는 것이다.

여성이 신체 노출을 하는 것이 남성의 시선에 포획되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그것이 남성 중심적인 시선이다. 내가 노출을 하든, 화장을 하든 자기만족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똑같다.

<젖은잡지> 좋아한다. 내가 좋아해서 내가 잡지 만들겠다는데 뭐가 문젠가. 상업적 이용이나 이런 건 내가 그렇게 생각 안 하면 된다.

사회 정두리 편집장이 지난해 남성잡지 <맥심> 주최 ‘미스 맥심 콘테스트’에 나간 것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당시 <젖은잡지>를 구상하고 제작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런데 미스 맥심 콘테스트 예선만 통과해도 10만원 상금이 주어졌다. 일단 시작해서 끝을 보게 됐지만, 그 자체를 비난할 수 없다고 본다.

사회 자라면서 특별한 경험을 한 건 아닐까라는 추측도 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시집살이를 심하게 하시는 걸 보고 자랐다. 엄마가 정신적으로 많이 고통스러워하셨다. 어렸지만 그 상황이 굉장히 폭력적이라고 생각했다. 한 여자의 삶이 지배당하고 고통받고….

나는 경남 남해 출신이다. 가부장제가 아직도 공고한 곳이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였다. 엄마를 리모컨으로 조종하듯 했다. 그런 아버지와 계속 싸워왔다. 이 문제는 아직까지 끝나지 않은 나의 싸움이다. 그 영향인지 나이 많은 남자를 싫어한다. 항상 연하남을 만났다.(웃음)

많은 젊은 여자들이 갖는 최초의 남성 트라우마가 아버지인 거 같다. 이른바 ‘여혐’을 하는 남자들도 자기 엄마는 욕 안 한다. 그런데 여자들 가운데는 아버지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사회 왜 그럴까?

한국 사회 남자들은 여자를 ‘창녀’ 아니면 ‘성녀’ 두 영역으로만 본다. 성역화되지 않은 여성은 창녀 프레임에 가둔다. 하지만 여자에겐 이런 프레임조차 없다. 아버지도 억압하는 존재일 뿐이다.

아직까지 남성 중심 사고가 너무나 세다. 친한 친구 이름이 상민이, 창민이, 경민이인데, 이들이 전부 여자고 딸 둘 다음에 나온 셋째다. 아들 낳고 싶어 이름을 그렇게 지은 거다. 말 다 했지.

사회 현재 사회 이슈인 ‘여혐’ 현상은 어떻게 보나?

미디어 잘못이 크다고 본다. 남성들이 즐겨 보는 잡지를 보면 가관이다. 심지어 몰카 찍는 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남자들이 멋있는 양 포장해 놓는다. 그러면서 막상 최근 <맥심> 표지 사건처럼 이슈가 터지면 모두들 논의의 장을 마련해주기보다는 입을 닫는다.

모두 힘들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사회 구조적인 모순으로 남자들이 힘들어졌는데, 이에 대한 분노가 국가 같은 권력으로 향하지 않고 약자에게 향하고 있다. 이른바 혐오할 대상을 찾는 거다.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물 등 말이다. 그중 가장 가까운 약자가 여성이다. 예를 들어 김치녀, 맘충 같은 여성 비하적인 발언은 사회에 만연하는데 재벌충이란 말은 없다.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만 강한 현상이 바로 여혐이다.

사회 한국의 성문화가 어떻게 바뀌길 바라나?

남성 중심적인 이중적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는 이성애자 남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성욕을 인정하지 못한다. 동성애자, 장애인, 청소년 등 말이다. 이렇게 성욕을 억압하는데 음성적 성산업은 발달하지 않았나. 10대 연예인들이 섹시하게 몸 흔드는 건 음침하게 바라보면서 10대의 섹스는 용납을 못한다. 그러면서 뒤에선 10대 성매매를 한다.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노동시간이 길다. 삶의 질이 떨어지니 섹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없다. 섹스도 단순히 스트레스 해소라고 생각해버린다. 나에게 어떤 욕망이 있는지 생각할 시간도 안 준다. 섹스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고, 사회에서 공적인 토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사회 마지막으로, 섹스가 뭐라고 생각하나?

많은 사람들이 놀라지만 난 섹스관에 있어선 보수적이다. 결국 사랑으로 가는 시작이라고 본다. 이런 얘기를 하면 “한국 섹스칼럼니스트의 한계”라는 지적도 받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사랑 있는 섹스도 해봤고, 없는 섹스도 해봤다. 섹스를 얘기하는 건 결국 사랑에 대한 얘기다. 사랑으로 가는 정거장 정도다.

난 섹스에 대해 고민을 안 해봤다. 관심 없는 주제다.(웃음) 젠더에 대해선 관심 있지만 성관계라는 작은 의미의 섹스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개인적인 가치관을 밝히고 싶지 않다. (실제 정두리 편집장은 그동안 본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 한번도 밝힌 적이 없다.) 젠더에 대해서는 작업하지만 ‘성관계’라는 의미에서의 섹스는 다루지 않는다. 내 주요 주제는 아니다.

여성들이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성 담론을 제기하는 데 대해 여성학자들은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가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개인의 자유 차원에 그칠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모순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여혐’(여성혐오)에 대항하는 누리집 ‘메갈리아’를 예로 들며 “메갈리안(메갈리아 이용자)들은 개인이 겪은 여성 차별의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사회 자원 배분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사회참여를 하고 있다. 개인의 성 경험을 노출하는 것도 궁극적으로 사회 모순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정리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