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12.12 군사반란 보고받은 미국 "망나니들의 반란"/ 이희호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2. 7. 14:30

정치정치일반

“수십년 ‘정치군인’ 세상에서 남편이 살아남은 건 기적”

등록 :2015-12-06 20:14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15회 12·12군사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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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시해로 ‘유신의 심장’은 멈췄지만 김대중과 이희호는 12월8일 ‘긴급조치 9호’ 해제 뒤에야 자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앞서 5월말 신민당 전당대회 이후 200일, 78년말 서울대병원 석방 이후 263일 만이었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시해로 ‘유신의 심장’은 멈췄지만 김대중과 이희호는 12월8일 ‘긴급조치 9호’ 해제 뒤에야 자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앞서 5월말 신민당 전당대회 이후 200일, 78년말 서울대병원 석방 이후 263일 만이었다.
박정희의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유신체제를 떠받치던 긴급조치 9호는 해제되지 않았다. 이희호의 동교동 집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김대중은 형집행정지 신분이라는 이유로 계속 가택연금을 당했고 정치활동도 할 수 없었다. 박정희 국장이 치러진 1979년 11월3일 김대중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에게 시국 수습 방안을 마련해 보냈다. “국가안보가 우선이고, 국민적 화해 단결이 필요하며, 민주정부를 하루빨리 수립하기 위해 거국적 협의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김대중은 최규하와 직접 만나 국정의 장래를 협의하게 되길 바란다는 말도 했다. 김대중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79년 11월24일 재야민주세력 나서
명동 YWCA 강당 ‘위장결혼식’ 집회
최규하 대행에 ‘민주화 일정’ 요구
계엄당국 “배후 김대중의 선동” 몰아

79년 11월 계엄사령관 정승화 언론에
“그 사람은 용공…대통령 될 수 없다”
보름 뒤 ‘신군부 12·12 쿠데타’로 체포
“당하고 보니 ‘내 파일’도 날조였다”

최규하는 11월10일 ‘시국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새로 제정되는 헌법에 따라 선출되는 새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최대한 빨리 유신헌법을 바꾸고 대통령 직선제로 돌아가라는 민심의 요구와는 사뭇 다른 조처였다. 11월19일 계엄사는 계엄포고 8호를 공고해 전국 대학에 내려졌던 휴교령을 거두어들였다. 다시 학교에 나온 대학생들은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때 남편의 연금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신민당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어요. 김영삼 총재를 당선시키려고 나섰다가 연금당한 것이었는데 항의 한마디 하지 않으니 무척 서운했지요.”

 앞서 1979년 11월24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나 계엄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80년 1월15일 이른바 ‘명동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김병걸이 첫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앞서 1979년 11월24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나 계엄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80년 1월15일 이른바 ‘명동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김병걸이 첫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가 민주화 일정을 밝히지 않자 재야민주화세력은 11월24일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1층 강당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이 사건은 윤보선·함석헌·김대중이 공동의장으로 있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산하의 민주청년협의회가 주도한 것이었다. 계엄사의 감시를 피해 민주청년협의회 회원인 홍성엽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500여명의 민주인사들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대통령 보궐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국민선언문’을 발표하고 유신체제 청산과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바로 그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대회장이 아수라장이 됐고 150여명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중부경찰서에 연행됐다. 집회 참가자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앞서 1979년 11월24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나 계엄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80년 1월15일 이른바 ‘명동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함석헌이 첫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앞서 1979년 11월24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나 계엄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80년 1월15일 이른바 ‘명동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함석헌이 첫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결혼식으로 위장한 집회가 열리기 전 재야세력은 군부의 눈을 피해 바쁘게 움직였다. 국민연합 공동의장인 윤보선의 안국동 집이 모임 장소였다. 김대중은 가택연금으로 움직일 수 없어 측근 김상현을 대신 보냈다. 박종태·양순직·예춘호·백기완·김관석이 윤보선 집의 주요 참석자였다. 윤보선은 최규하를 즉각 퇴진시키고 민주정부를 조속히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대적인 시위를 벌여야 빨리 민주정권으로 이양된다”는 말도 했다. “남편은 윤보선 대통령의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어요. 그런 식으로 대통령 보궐선거를 저지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을 퇴진시키면 안 된다고 했지요.” 김대중은 김상현을 통해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를 강화해 그 체제로 직선제 개헌을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군부가 전면에 나올 수 있다는 걱정을 전했다. 안국동 모임에서 김대중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결국 김대중 쪽 사람들은 와이더블유시에이 집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집회는 함석헌이 대회장을 맡아 열렸다.

12월8일 4년반만에 ‘긴조9호 해제’
200일만에 ‘동교동 가택연금’도 풀려
나흘뒤 ‘반란’ 감행한 전두환 신군부
언론통제·침묵 속 집권음모 ‘착착’

 앞서 1979년 11월24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나 계엄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80년 1월15일 이른바 ‘명동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윤보선이 첫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앞서 1979년 11월24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에 민주화 일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나 계엄당국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80년 1월15일 이른바 ‘명동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된 윤보선이 첫 공판에 출두하고 있다.
군부는 재야세력의 ‘위장 결혼식’ 집회에 과격하게 대응했다. 보안사는 김대중 진영에서 재야와 학생을 동원해 정권 타도를 시도하는 것으로 오판했다. 군인들은 연행자들을 서빙고 보안사 분실로 끌고 가서 내란음모·국가반역 죄목을 들이밀며 악랄하게 고문했다. 가장 끔찍하게 당한 백기완은 뒤에 병보석으로 출감했을 때 몸무게가 반으로 줄었다. 김병걸도 고문 후유증으로 제대로 걷지 못했다. 11월27일 계엄사는 와이더블유시에이 집회에 대해 “전임 대통령과 구정치인이 배후에 숨어 순수한 일부 청년들을 선동하고 전위대로 삼아 자신들의 야망을 달성하려던 정치적 욕망이 깔린 사건”이라고 발표했다. 14명이 구속돼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 사건 이후 민주 진영은 군부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됐고 조기 개헌에 맞춰졌던 투쟁 방향도 계엄 해제로 옮겨졌다.

와이더블유시에이 집회 탄압은 김대중에 대한 신군부의 적대감이 얼마나 컸는지 생생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도 그런 적대감에 감염돼 있었다. 정승화는 11월26일 언론사 사장들을 초대한 점심 자리에서 김대중을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법과 질서를 파괴하고 헌법을 무시하며 정치적 야욕을 달성하려는 자는 용납하지 않겠다. 그 사람은 용공이다. 육군 소위도 못 될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겠나.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쿠데타라도 일으켜 막겠다.” 정승화는 27일 언론사 편집국장, 30일 국방부 출입기자들과 함께한 자리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정승화의 발언이 보도돼 파문을 일으키자 김대중과 가까운 국회의원 이용희가 국회에서 국방부 장관에게 따졌다. “나는 수십년 동안 김대중씨와 정치활동을 같이 해왔다. 김대중씨만큼 진정한 반공주의자도 없다. 김대중씨가 용공이라면 나도 용공이다. 무슨 근거로 용공이라고 하는가?” 국방부 장관 노재현이 계엄사령관을 대신해 국회에서 사과했다. 주한 미국 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도 나서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우리는 김대중씨를 신뢰할 수 있는 민주주의자이며 공산주의 반대론자라고 보고 있다. 만약 군 당국이 그런 왜곡된 견해를 공표한다면 미국의 입장을 밝히겠다.”

정승화는 이 발언을 하고 2주일 뒤에 후배 군인들에게 체포돼 이등병으로 강등됐다. 정승화는 훗날 그 발언에 대해 김대중에게 사과하고 언론에 소회를 밝혔다.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파일’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당하고 나서 ‘정승화 파일’이라는 것을 들어보니 날조된 것이 많았다. 지금은 그런 ‘문서’에 대한 내 생각이 달라졌다.” 이희호는 김대중을 적으로 보는 ‘정치군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남편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 같은 일이라고 회고했다. “남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정치군인들이 하고 있었어요. 공산주의자라고 했어요. 정승화씨도 그랬고요. 그런 생각을 하는 군인들이 수십년 동안 집권했는데, 남편이 죽지 않고 목숨을 지킨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지요.”

1979년 12월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은 군병력을 출동시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김재규 공범’으로 모는 하극상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다. 12월13일 새벽 서울 광화문 앞에 탱크부대가 진주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12월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은 군병력을 출동시켜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김재규 공범’으로 모는 하극상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했다. 12월13일 새벽 서울 광화문 앞에 탱크부대가 진주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군부가 김대중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는 <워싱턴 포스트>기자를 지낸 돈 오버도퍼가 쓴 <두 개의 한국>의 내용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오버도퍼는 이렇게 썼다. “1980년 필자와 한 대담에서 일부 고위 군 관련 인사들은 김대중이 과거에 북한의 사주를 받았거나 현재까지도 사주를 받고 있는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다수는 김대중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김대중과 여러 차례 인터뷰해온 필자로서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80년대 말 중앙정보국(CIA) 전문요원 출신인 제임스 릴리 주한 미국 대사가 각종 기밀 보고서와 경찰 파일을 포함한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면밀하게 조사한 뒤 그가 공산당에 가담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민의 바람과 달리 최규하는 12월6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틀 뒤인 12월8일 0시를 기해 긴급조치 9호가 풀렸다. 발동된 지 4년 6개월 만이었다. “그날 남편도 장기 연금에서 풀려났어요. 신민당 전당대회 직후부터 200일 가까이 집 안에 갇혀 있었지요.” 김대중은 연금에서 풀려난 날 성명을 발표했다. “오늘로써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상당수의 민주인사들이 석방된 것을 만시지탄은 있지만 환영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들의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기타 죄명으로 옥중에 있는 인사들의 석방 조처가 병행되지 않은 데 대해 유감의 심정을 금할 수 없다.”

육사 후배들에게 체포당해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채 고문 수사를 받고 10년 형을 받았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훗날 복권된 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만 보고 용공주의자로 오해했다”며 김대중에게 사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육사 후배들에게 체포당해 이등병으로 강등당한 채 고문 수사를 받고 10년 형을 받았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훗날 복권된 뒤 “중앙정보부의 ‘보고서’만 보고 용공주의자로 오해했다”며 김대중에게 사과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성명에서 자신이 평소에 품고 있던 정치적 신념도 밝혔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유경제를 신봉하며, 복지사회 건설을 열망한다. ‘조속한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나의 신념과 목표는 확고부동하다. 그러나 이를 추진하는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하며, 대화와 인내와 질서 속에서 행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김대중은 “내가 지지하는 것은 간디의 길이지, 호메이니의 길이 아니다”라는 말도 했다. “나는 링컨이 남북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자기 당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위대한 화해와 관용의 정신을 우리가 본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김대중은 성명 마지막에 대통령 최규하에게 ‘거국적 중립 내각 구성’을 다시 요청하고 ‘전 국민적 합의를 집약할 수 있는 협의체를 구성하여 민의를 흡수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날 김대중은 기자회견도 열어 “미명의 빛이 조금 보인다”고 말했다. 나라의 앞날에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성급한 진단일 수도 있음을 김대중도 이희호도 그 시점에서는 뚜렷이 알지 못했다. 최규하는 12월10일 신현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14일에는 과도정부의 새 내각을 출범시켰다. 김대중은 연금은 풀렸지만 복권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최규하가 신현확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이틀이 지난 12월12일 저녁 어둠의 장막을 가르고 서울 하늘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날 저녁 동교동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어요. 용산 근처에 사는 친지한테서 온 전화였는데,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는 거예요. 서울에서 총격 소리가 난다니 믿기지가 않았어요.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그게 군사반란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날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합동수사본부장의 직위를 이용해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체포했다.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고 이루어진 하극상의 반란이었다. 전두환은 정승화에게 김재규와 박정희 암살을 공모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정승화를 체포하는 중에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3명이 사망하고 2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희호의 친지가 들은 총성이 바로 그 총격전에서 난 소리였다.

이날 반란에는 제1군단장 황영시, 9사단장 노태우, 20사단장 박준병, 제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제3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5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 장세동이 주역으로 가담했다. 12·12 반란 부대는 이날 밤 중앙청과 국방부를 장악하고 3군사령관 이건영,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특전사령관 정병주도 체포해 연행했다. 대통령 최규하는 이튿날 새벽에야 전두환의 압박을 못 이기고 정승화 체포를 재가했다. 사후 승인이었다.

12·12 반란이 나기 전 정승화는 ‘하나회’ 장교들을 분산시킬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하고 합동수사본부장 교체를 국방장관 노재현에게 건의했다.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보낼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정승화의 움직임을 입수한 전두환이 선수를 쳐 ‘하나회’ 지휘관들과 모의해 계엄사령관을 잡아들인 것이 12·12 반란이었다. 하나회는 박정희 집권 시절에 만들어져 독버섯처럼 자라난 군대 안 비밀 사조직이었다. 육사 11기가 중심이 되었고 우두머리는 박정희의 총애를 받은 전두환이었다. 박정희 정권 시절 보안사령관 강창성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하나회 회원은 정규 육군사관학교 출신 중에서 기수별로 5% 수준인 10명 내외로 뽑고, 회원 다수를 영남 출신으로 하되 다른 지역 출신을 상징으로 끼워 넣으며, 가입할 때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나회 회원이 받는 가장 큰 특혜는 진급과 보직이었다. 하나회는 공조직을 병들게 하고 무력화한 군부 안의 암세포였다. 이 사조직이 12·12 군사반란의 주체였지만 국민은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정승화는 보안사로 끌려가 무참하게 고문을 당했다. 보안사의 젊은 군인들이 정승화에게 욕을 퍼부었다. “바른 대로 말해, 이 자식. 김재규와 공모했지. 다 알고 있는데, 이 자식, 거짓말해야 소용없어.” 말 그대로 하극상이었다. 미국은 반란세력이 통고도 하지 않고 군대를 이동시키고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데 대해 ‘망나니들의 반란’이라고 표현하며 반발했다. 다음날 아침 글라이스틴은 워싱턴에 보고서를 전했다. “남한은 사실상 군사 쿠데타가 벌어진 상황이다. 유약한 문민정부가 명목상으로 존재하지만 실질 권력은 없으며 모든 정황으로 보아 한국군의 핵심 조직들은 전두환 소장이 이끄는 ‘신군부’ 집단의 치밀한 계획 아래 완전히 장악됐다.” 그러나 글라이스틴도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도 12·12 반란을 무효로 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미국은 대세의 흐름을 추인하고 말았다.

12·12 반란에 성공한 전두환은 12월14일 곧바로 군 인사를 단행했다. 선배 장성들의 옷을 벗기고 육사 동기와 친구들을 핵심 요직으로 불러들였다. 또 이희성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으로 앉혔다. 12·12 반란으로 전두환은 군부의 실권을 장악했다. 이런 엄청난 사실은 신군부의 언론 통제로 그 내막이 알려지지 않았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시간이 계속됐다. 이후 이듬해 5월17일까지 6개월은 반란세력이 또 한 번의 쿠데타를 꾸미는 아주 긴 준비기였지만, 신군부의 움직임은 언론 통제의 장막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다. 12월21일 최규하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12월23일에는 긴급조치 관련자 561명이 사면됐고 1130명이 석방됐으며, 제적 학생과 해직 교수들이 학교로 돌아갔다. 총소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차츰 흐려졌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