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관의 고금유사
최근 장지연의 연보를 꼼꼼히 읽었다. 그의 연보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6년에 한국사사료총서 4권으로 발간한 <위암문고>에 실린 것이고, 또 하나는 그의 집안에 전해오던 필사본 연보다. 전자는 작성자를 알 수 없지만, 후자는 장지연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이다. 두 연보는 그 내용이 사뭇 달라 따져볼 것이 한둘이 아니다. 이 문제는 뒤에 따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필사본 연보의 한 대목을 읽어보자.
1907년 7월19일조의 한 부분이다. “30일에 군대해산 조칙이 내려지자 시위대 군병이 ‘난동’하여 일병(日兵)과 충동하였다. 시위대 참령(參領) 박성환(朴成煥)이 8월2일 자결, 순절하였다. 같은 달 3일 융희(隆熙)로 개원(改元)하는 포고령이 내려진 뒤로부터 20일까지 전국 군대의 해산이 종료되었다. ‘각처의 폭도’가 봉기하여 해산된 군인과 합쳐서 자칭 의병이라 하면서 전국에서 소요하여 안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사건의 책임을 물어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했으며, 사법권, 행정권, 관리 임면권을 모두 빼앗았다. 이른바 정미칠조약 혹은 한일신협약이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의 통감이 다스리는, 사실상 식민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저항이 시작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박성환이 자결하자, 군인들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지방의 해산 군인들 역시 봉기했다. 8월2일 원주(原州) 진위대(鎭衛隊)가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각지에서 무장투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들은 각 지방의 저항세력과 연합했고, 마침내 ‘의병’이란 이름으로 일제에 대해 무력으로 항쟁하는 세력이 되었다.
한국사는 의병의 무력 항쟁을 지극히 정당한 행위로 본다. 이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 상식으로 판단하건대, 장지연의 발언은 어딘가 이상하다. “군대 해산 조칙이 내려지자 시위대 군병이 ‘난동’해서 일병과 충돌했다”고 말한다. 난동이라니, 또 충돌이라니 이해가 가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군대의 해산이 종료된 뒤 ‘각처의 폭도’가 봉기해 ‘의병’이라고 하면서 전국을 ‘소요’케 만들었다고 말한다. 의병은 폭도가 되고 난동과 소요를 일으켰다!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 아닌가.
장지연은 <대한자강회보>에 쓴 ‘과거의 상황’이란 글에서 “춘추전(春秋傳)에 ‘나라가 망하려 하면 반드시 요얼(妖孼)이 있는 법이다’ 하였으니, 청나라의 권비(拳匪, 義化團)와 우리의 동학(東學)은 모두 나라에 화를 끼친 요얼이었다”고 말한다. 복잡한 설명 줄이자면, 농사짓는 무식한 백성이 나랏일에 간섭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타락한, 탐욕스런, 무능한 지배계급이 국가권력을 동원해 백성을 착취해도 물리적 저항은 안 된다는 말이다. 군대 해산으로 촉발된 의병 항쟁을 못마땅하게 본 것도 동일한 시각이다. 장지연은 뒷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막대한 양의 글을 쓰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그에게 지금까지 친일 시비가 붙어 있는 이유다.
요즘도 시민들이 집회를 열어 하고 싶은 말을 하고자 하면, 그 말은 듣지 않고 불문곡직 ‘불법폭력시위’란 프레임을 먼저 갖다 댄다. 그 프레임으로 원래 시민들이 집회에서 말하고자 했던 문제들은 모두 덮이고 잊혀버린다. 흡사 정미칠조약 때의 장지연을 보는 듯하다.
강명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