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광주를 유린하는 공수부대/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 4. 11:22

정치정치일반

80년 5월20일 고립무원 ‘광주’는 밤새 공수부대와 싸웠다

등록 :2016-01-03 19:59수정 :2016-01-04 10:36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4회 광주학살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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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과 재야 민주인사들을 무더기 연행함과 동시에 광주 주요 대학에 무장 공수부대를 진주시킨 뒤 5월18일 시위대는 물론 무고한 시민들까지 무차별 살상했고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터졌다. 80년 5월16일 밤까지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여는 등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17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과 재야 민주인사들을 무더기 연행함과 동시에 광주 주요 대학에 무장 공수부대를 진주시킨 뒤 5월18일 시위대는 물론 무고한 시민들까지 무차별 살상했고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광주민중항쟁’이 터졌다. 80년 5월16일 밤까지 광주 시민들은 전남도청 앞 분수대에서 ‘민족민주화성회’를 여는 등 평화로운 집회를 했다.'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월14일부터 16일까지 전남 광주의 도청 앞 광장에는 시민과 학생이 참가한 ‘민족 민주화 성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는 마지막날 5만여명에 이르렀다. 5월17일 밤 김대중과 동교동 사람들이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시각에 광주에는 특전사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배치됐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체포할 경우 광주에서 저항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17일 밤 12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직후 공수부대는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를 급습해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을 붙잡아 구타하고 학교 본부 건물에 감금했다.

신군부 ‘김대중 체포’ 저항 예상
5월17일 밤 공수부대 광주 투입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 ‘충돌’
오후들어 제7공수 ‘무차별 살육’
현장 기자 “인간사냥이었다” 증언

19일 ‘화려한 휴가’ 끔찍한 만행
오후 시민들 투석저항에 ‘첫 발포’
“싸우다 죽자” 시민들 하나로 똘똘
20일 저녁 택시 200대 금남로 시위
수천 시민들 태극기 들고 도청으로

계엄사 ‘광주 소요 경미한 피해’ 발표
오락프로만 틀던 방송국들 불탔다

18일 오전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 100여명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수는 곧 200~300명으로 불어났다. 학생들은 무장한 공수부대를 앞에 두고 “계엄군은 물러가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같은 구호를 외쳤다. 돌격 명령과 함께 공수대원들이 학생들에게 달려들어 곤봉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곤봉에 머리를 맞은 학생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흩어진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로 옮겨갔다. 정오 무렵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 일대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동경찰대가 시위대 진압에 나섰다. 시위대는 흩어지고 모이기를 계속하며 금남로 가톨릭센터, 광주역, 광주고속터미널, 공용터미널 인근에서 계속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김대중을 석방하라”,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외쳤다.

오후 4시를 전후해 제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가 투입되자 사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공수대원들은 3~4명이 한 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젊은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머리를 내리치고 군홧발로 가슴과 배를 걷어찼다.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쓴 진압봉은 단단한 박달나무에 쇠심을 박은 길이 70㎝의 살상용 곤봉이었다. 전투경찰이 쓰던 길이 50㎝ 진압봉과는 질이 달랐다. 곤봉에 맞은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고꾸라졌다. 공수대원들은 골목까지 쫓아가 숨어 있던 젊은이들을 개처럼 패고 죽은 개를 잡듯 끌고 가 군용트럭에 던져 넣었다.

80년 5월18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자국민들에게 ‘시위 진압용’이 아니라 ‘적군 살상용’ 무기를 휘둘렀다. 엠(M)16 소총에 장착된 대검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80년 5월18일 작전명 ‘화려한 휴가’에 따라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자국민들에게 ‘시위 진압용’이 아니라 ‘적군 살상용’ 무기를 휘둘렀다. 엠(M)16 소총에 장착된 대검이 보인다. '한겨레' 자료사진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저지른 만행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보며 제 눈을 의심했다. 훗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날의 상황을 증언했다. 시위 현장에서 사태를 목격한 시민 김시도는 이렇게 말했다. “도망간 학생을 잡으려고 공수부대 2명이 양복점 안까지 쫓아갔다. 공수들은 그 학생의 멱살을 잡더니 다짜고짜 다리미를 빼앗아 들고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 학생의 머리와 얼굴을 구분하지 않고 뜨거운 다리미로 내리치는 것이었다.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은 입만 벌리며 분노하고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말도 못하고 서 있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죽일 놈들아! 이놈들아!’ 하면서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살기가 오른 공수부대는 이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붙잡힌 학생이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가 뛰어가 몸으로 학생을 막았다. 할아버지가 ‘이러지 말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공수부대는 엠(M)16 소총에 살상용 대검을 장착하고 있었다. 사람 잡는 칼이었다. 공수대원은 잡힌 학생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치고 대검으로 등을 찌른 뒤 다리를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시위를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냥하는 것 같았다. 젊은 여성들은 더 끔찍하게 당했다. 백주에 대검으로 겁탈을 당하는 꼴이었다. 항쟁기간 중 시민군 상황실장이 된 박남선은 이날 본 것을 이렇게 증언했다. “공수 놈들은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60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 놈들은 ‘이 ×××아, 너는 뭐야?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홧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홧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람들은 대로에서 벌어지는 만행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인가.’ ‘우리 국군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저히 국군의 짓이라고 믿을 수 없었던 시민들은 ‘북괴 무장공비’가 침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했다. 거리는 인간 도살장이었다. 만행에 짓이겨지며 내지르는 희생자들의 비명과 그 참혹한 광경을 보며 울부짖는 시민들의 통곡이 대로와 골목에 흘러넘쳤다.

80년 5월20일 저녁, 사흘째 계속된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에 맞서 마침내 광주 시민 10만여명은 버스와 택시 200여대를 앞세우고 ‘아리랑’을 부르며 금남로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80년 5월20일 저녁, 사흘째 계속된 공수부대의 유혈진압에 맞서 마침내 광주 시민 10만여명은 버스와 택시 200여대를 앞세우고 ‘아리랑’을 부르며 금남로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당시 광주 상황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광주항쟁을 취재하면서 글이나 말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뼈저리게 체험했다. (…) 이런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가 ‘인간사냥’이었다. 또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 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은 어떻게 표현해야 되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같은 표현들이 떠올랐으나 이것 역시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뒤에 시민들에게 잡힌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에 배치되기 전 사흘 동안 식량을 받지 못했고, 작전에 투입되기 직전 소주를 배급받았다고 실토했다. 공수부대는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공수부대의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몇 달 동안 계속된 진압훈련으로 살기등등해진 공수부대는 광주의 백주대로에서 사람을 때려잡아 마음껏 분풀이를 했다. 공수부대 장교와 병사들 사이에서는 “전라도 새끼들 다 죽인다”, “씨를 말려버린다”고 고함치는 소리들이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시민들이 목격한 것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인간성을 파괴하는 난행이었다. 공수부대는 보란 듯이 때리고 찌르고 짓밟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 끔찍함에 몸서리쳤다.

공수부대의 곤봉과 대검이 휩쓸고 간 뒤 5시쯤 거리엔 핏자국만 남았다. 사람들은 그 참혹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학생을 뜨거운 다리미로 내리치는 장면을 보았던 김시도는 이렇게 증언했다. “나는 너무나 분한 마음을 삼키며 전업사를 하고 있는 형님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고 뭣이고 다 던져버리고 우리도 나가서 싸웁시다.’ 그리하여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금남로로 걸어 나왔다. 나는 같은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만행을 보고도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다는 사실에 견딜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저녁 7시쯤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다시 시위가 벌어졌고, 공수부대가 나타나 시위하는 사람들을 짓밟았다. 공수부대는 산수동과 풍향동 일대 주택가를 뒤지며 젊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5월19일 오전 공수부대의 만행은 극에 이르렀다.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울먹일 정도였다. 경찰은 시민들에게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호소했다. 금남로는 피에 굶주린 야수의 정글이 되었다. 누군가 건물 창문에서 공수부대를 바라보기만 해도 일대의 건물을 샅샅이 뒤져 사람을 잡아낸 뒤 금남로 바닥에 꿇어앉혔다.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면 곤봉으로 내리치고 대검으로 찌르고 트럭에 짐짝처럼 던졌다.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다 잡아 죽인다’, ‘내 새끼들을 공수부대가 다 죽인다’고 시민들은 절규했다.

공수부대의 폭력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일부러 더 잔인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곤봉으로 칠 때도 얼굴과 머리를 가격했다. 여성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았다. 공수부대는 사람들을 패고 찌르며 묘한 웃음을 짓거나 서로 낄낄대기도 했다. 공수부대는 ‘우리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과시하는 듯이 날뛰었다. 그 광란에 시민들은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광주항쟁에 마지막까지 참여한 김종배는 1988년 국회청문회에서 그 분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공수부대들이 무차별 학살을 했기 때문에 수류탄이 아니라 폭탄이 아니라 원자폭탄이라도 갖고 공수부대들한테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수부대는 장갑차까지 동원해 시위대를 몰았다. 점심때쯤 금남로 일대의 거리는 다시 텅 비었다. 오후가 되자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날 오후부터 시위의 주력은 대학생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었다.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뛰어들었다. 공수부대를 몰아내지 않으면 광주 시민들이 모두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거리를 뒤덮었다. 시위대는 금남로 가톨릭센터 인근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공사판 자재와 집에서 쓰던 연장으로 무장하고 공수부대와 맞섰다. 계엄군은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폭도’ ‘불순분자’ 같은 말을 내뱉으며 선무방송을 했다. 시민들은 자신들을 ‘폭도’로 모는 계엄군의 선무방송에 격노했다.

시민들은 일을 분담하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이 앞에서 싸우고 여자들은 뒤에서 보도블록을 깨뜨려 시위대에 전달하고 공사장의 인부들은 각목과 쇠막대를 실어다 날랐다. 목숨을 건 항쟁이었다. 시위군중이 격렬하게 저항하자 공수부대의 폭력은 더욱 극렬해졌다. 대검에 찔리고 곤봉에 맞아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 19일 오후 5시쯤 광주고등학교 앞에서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최초로 발포했다.

19일 저녁 비가 내렸다. 시민들은 비를 피해 흩어졌다가 20일 아침 다시 모였다. 전남주조장 앞에서 참혹하게 찢긴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이날 오후가 되자 시 외곽의 시민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중심가로 몰려들었다. 시위대는 금세 수만명에 이르렀다. 시위대 규모가 커지자 다시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의 공수부대가 시내로 투입되었다. 2시30분께 서방삼거리에서 공수부대가 화염방사기를 쏘아 그 자리에서 여러 명의 시민이 타 죽었다. 오후 3시 금남로 화니백화점 앞에서 시민 수천명이 최루탄 연기 속에서 연좌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이 금남로 바닥을 타고 퍼지면서 일대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시위대는 “우리를 다 죽여라!” “우리 다 같이 죽읍시다!” 하고 죽음을 작정한 절규를 쏟아냈다. 공수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대자보는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고 절망적으로 부르짖었다.

광주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며 한 몸뚱이처럼 됐다. 스크럼을 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곤봉에 피범벅이 되어가면서도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황금동의 술집 아가씨들, 대인동의 사창가 여자들도 할 일을 찾아 뛰어나왔다. 피를 뽑아 헌혈하고 부상자를 치료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행주는 이렇게 증언했다. “황금동 쪽으로 갔더니 술집 여종업원들이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길거리에 늘어서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주는 그 여자들을 보니 광주 시내 사람들이 한마음이 된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오자 유동삼거리 쪽에서 대형 트럭과 버스를 앞세우고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켠 채 금남로로 밀려왔다. 차량시위는 전날의 택시기사 학살이 직접적 원인이었다. 19일 택시 한 대가 머리가 깨지고 팔이 부러져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공수대원에게 걸렸다. 택시기사가 ‘사람이 죽어 가는데 병원으로 실어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자 공수대원은 택시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 대검으로 배를 찔러 죽였다. 그날 적어도 세 명의 택시기사가 그렇게 살해당했다. 20일 밤 차량시위는 이 참혹한 만행에 대한 항의였다.

택시 200대가 한꺼번에 밀려들자 금남로의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여자들은 김밥·주먹밥·음료수·수건을 가지고 나와 시위대에게 나누어주었다. 이날 저녁 수천개의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이렇게 전했다. “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그토록 피 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 도청 앞 광장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광주는 피의 바다였지만 신문과 방송은 침묵했다. 신군부가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광주는 고립무원의 도시였다. 계엄사는 20일 오후 ‘광주사태’와 관련해 처음으로 공식 언급을 했지만, 이 발표도 광주 지역 방송에만 보도되었다. 이 발표는 18일·19일 소요로 경미한 피해가 있었으며 연행한 176명은 모두 귀가시켰다고 했다. 시민들은 보도에 분개해 문화방송국(MBC)과 한국방송국(KBS)으로 몰려갔다. 텔레비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오락프로그램만 내보내고 있었다. 문화방송국 앞에 시위대가 몰려들었을 때 공수부대의 장갑차가 시위대를 향해 달려들어 사람들을 깔아뭉갰다. 어린아이 두 명이 장갑차에 깔려 처참하게 죽었다. 이날 밤 문화방송국과 한국방송국이 불에 탔다. 11시30분 광주역 부근에서 제3공수여단이 시민을 향해 사격을 했다. 총소리가 도시의 밤하늘을 갈랐다. 시위대는 밤을 지새우며 공수부대와 싸웠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