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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신이 준 것은 지혜 뿐/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 4. 11:29

국제유럽

신이 준 것은 불과 지혜뿐…인간은 정치를 발명해야 했다

등록 :2016-01-03 19:55수정 :2016-01-04 10:35

 

민회가 열렸던 프닉스 언덕에서 본 아크로폴리스, 왼쪽이 프로필레아 건물이고, 오른쪽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유재원 교수 제공
민회가 열렸던 프닉스 언덕에서 본 아크로폴리스, 왼쪽이 프로필레아 건물이고, 오른쪽이 파르테논 신전이다. 유재원 교수 제공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①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서서
그리스학의 대가인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가 그리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격주로 연재합니다. 인류 최초로 민주주의 정치를 만드는 등 인간 중심의 사회를 만들어 간 고대 그리스인의 고민과 생각, 갈등 등을 현장 답사를 통해 재밌게 풀어낼 예정입니다. 서울대와 그리스 아테네대학교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유 교수는 현재 한국그리스학연구소장과 한국-그리스협회장을 맡고 있으며, 저서로는 <유재원의 그리스신화>, <그리스 민담> 등이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제우스 보물을 훔쳐냈으나
정치만은 못 훔쳐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벗으려
그리스인은 정치실험을 할수밖에…

보잘것없던 왕정이 무너진 뒤
수백개의 폴리스로 나뉘고
토지가 한쪽으로 쏠리며 귀족정치
시민들은 노예로 전락할 위기에

무장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 평민은
항해로 돈을 번 상인과 연대
혁명의 기운이 아테네 떠돌 때
독재자 솔론은 금권정치를 고안

■ 제우스와 아테나, 헤파이스토스, 그리고 프로메테우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아그리파스의 동상이 서 있던 대리석 받침 기둥이 보이고 사진 뒤쪽으로는 프로필레아 건물이 보인다. 유재원 교수 제공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 왼쪽에 아그리파스의 동상이 서 있던 대리석 받침 기둥이 보이고 사진 뒤쪽으로는 프로필레아 건물이 보인다. 유재원 교수 제공
내가 처음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간 것은 1975년 12월 어느 날, 비가 내리던 늦은 오후였다. 아크로폴리스로 올라가는 길에는 계단이 없다. 지그재그로 굽어진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그리스인들은 계단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그 비탈길 중간쯤에 아레이오파고스 언덕과 아고라의 헤파이스토스 신전이 한눈에 보이는 구석진 곳이 있다. 로마의 공화정을 끝내고 제국을 시작한 아우구스투스의 절친이자 사위인 아그리파스가 자기 대리석상을 위해 세웠다는 거대한 회색 빛깔의 사각형 기둥이 있는 곳이다. 내가 그곳에 처음 이르렀을 때, 나도 모르게 숨이 막혀 왔다. 무언가 깊은 뜻을 가진 것이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당시의 나로서는 그 전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작년 여름 다시 그곳에 섰을 때, 이제는 그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너무나 잘 알기에 다시 한번 숨이 막혀 왔다. 그 자리는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가 시작된 현장을 굽어볼 수 있는 곳이다. 멀리 발아래 보이는 아고라의 폐허에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가 시작되었고, 가까이 보이는 아레이오파고스 언덕에서 가장 공정한 재판의 개념이 태어났다.

민주주의가 고대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워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를 알기까지는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야 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알려면 신화에서부터 그 뿌리를 찾아보아야 한다.

제우스는 지구 위의 짐승들이 제각기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재주 한 가지씩을 나누어 주기로 하고, 그 일을 에피메테우스에게 맡겼다. 에피메테우스는 ‘뒤늦게 배우는(깨닫는) 자’란 이름에 걸맞게 아무 생각 없이 짐승들에게 재주를 나누어 주다가 인간의 차례가 됐을 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고 말았다. 인간은 빨리 뛰는 재주도, 날카로운 발톱도, 날 수 있는 날개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다른 짐승들의 밥이 될 절망적 처지가 되었다.

에피메테우스가 이렇게 일을 그르친 것을 본 그의 형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에서 불을, 아테나에게서 지혜를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다만 출입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던 제우스의 거처에는 들어갈 수 없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정치만은 훔치지 못했다. 불과 지혜는 천상의 보물로서 제우스가 반출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프로메테우스는 연약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고, 또 불 없이는 지혜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우스에게 불경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사이좋게 살기 위해서는 ‘정치’가 꼭 필요하기에 제우스에게서 이것까지도 훔쳐 오려 한 것이다.

■ 정치는 인간의 일이다

아크로폴리스 입구에서 내려다본 아고라 전경. 왼쪽으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이 보인다. 유재원 교수 제공
아크로폴리스 입구에서 내려다본 아고라 전경. 왼쪽으로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신전이 보인다. 유재원 교수 제공
제우스는 인간에게 ‘정치’를 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리스에서는 그 누구도 하늘에서부터 권력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신성불가침의 절대 권력이 존재할 수 없었다. 또 제우스는 인간에게 권력의 사용을 자제할 줄 아는 능력도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인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무한 투쟁’ 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잡히고 안정된 사회를 이루고 살기 위하여 스스로 모든 지혜를 짜내어 정치를 만들어내야 했다. 이렇게 그리스에서 정치는 인간들끼리 알아서 처리하는 인간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인들은 왕정, 귀족정치, 금권정치, 참주정치, 민주주의까지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정치 제도를 다 시험해 보았다. 그것도 불과 200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이루어냈다.

중국이나, 인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와 같은 거대한 강을 낀 농업 문명에는 정치란 개념조차 없다. 베이징의 천안문(天安門)이란 말 자체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평화롭게 통치한다’라는 뜻의 ‘수명우천, 안방치국’(受命于天, 安邦治國)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하늘에서 점지한’ 신성한 존재인 천자가 ‘하늘의 뜻’을 받아 통치하는데 일반 백성이 어찌 그에 대한 비평이나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그저 복종하고 충성을 바쳐야 할 뿐이다. 이의를 달거나 의심하는 일 자체가 하늘의 뜻에 반하는 역적질이고 신성모독이다. 중국의 천자도, 인도의 라자도, 메소포타미아의 바실레우스도, 이집트의 파라오도, 그리고 우리나라의 임금도 모두 그런 신성불가침의 존재다. 이런 정체에서는 통치만 있지 정치는 있을 수 없다.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는 로마에도 정치는 없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민주적인 정치가 있었지만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무력으로 진압된 뒤부터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내전이라는 방법을 동원했다. 마리우스와 술라 사이의 제1차 내전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제2차 내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과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일당 사이의 제3차 내전,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벌어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악티움 해전을 통해 로마는 결국 일인 독재자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다. 토의와 양보, 타협을 통해 합의에 이르는 정치 과정 대신 내전에서 이긴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주는 것이 로마 나름의 갈등 해소 방법이었다. 로마는 그리스의 많은 것을 받아들였지만 정치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그리스인들은 정치를 발명했다

그리스에서도 처음에는 왕이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리스의 왕은 신으로부터 신성한 권력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그 권위가 다른 곳의 왕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했던 아카이아인들의 우두머리 아가멤논 왕도 중요한 일은 모두 다른 참전 장군들과 상의하여 결정해야 했다. 물론 아가멤논은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아킬레우스의 여자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오만한 행위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수많은 전사가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의 그런 불완전한 왕정마저도 기원전 12세기 말에 들이닥친 난민 ‘바닷사람들’(Sea People)에 의해 붕괴되고 그리스의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800년쯤에 그리스의 역사가 다시 기록되기 시작했을 때, 그리스 곳곳에는 폴리스라는 독특한 정치 체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전설적인 왕 미노스가 다스리던 크레타 섬에만 50여개의 폴리스가 들어서 있었다. 다양성을 가장 큰 특성으로 하는 그리스 문명의 바탕이 바로 이 크기와 정치·경제 체제, 모시는 수호신, 심지어 공용어와 문화까지도 제각기 다른 폴리스였다. 그리스 문명이 한창일 때 폴리스의 수는 수백개가 넘었다.

지주였던 귀족들은 가난한 자영농 농부들의 파산을 먹이 삼아 토지를 넓혀갔다. 더욱이 귀족들은 소작인이나 노예를 부려 점점 더 부유해졌다. 그리고 그들만이 누리는 여가를 도심지에서 보내면서 정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법을 만들고 해석하는 일도 그들의 차지였다.

기원전 8세기 끝 무렵부터 그리스에 화폐가 쓰이게 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점점 벌어지고 있던 빈부 차이가 화폐로 말미암아 더욱 커지고 속도도 빨라졌다. 귀족들은 남아도는 잉여 농산물을 예전처럼 평민들에게 자기가 주고 싶은 만큼씩 노나주어 자기편을 만드는 데 쓰지 않고 팔아서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그렇게 해서 쌓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비싼 이자를 받고 빌려주어 더 큰 돈을 벌었다.

■ 기원전 7세기의 아테네의 위기

아테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아테네에는 ‘재산은 가문에 속한 것이다’라는 원칙이 있어 귀족의 땅은 다른 가문에 팔 수도 없고 딸의 지참금으로 줄 수도 없었다. 그런 까닭에 토지는 점점 더 소수의 귀족 가문에 집중되었다. 가난에 짓눌린 평민들은 처음에는 땅을 팔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더 가난해지면 자식을 팔고 심지어는 자신의 몸까지 저당 잡혀야 했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하면 노예 신분으로 떨어졌다. 기원전 7세기가 되자 귀족이 아닌 아테네 시민 거의 전부가 노예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다른 폴리스에 없는 한 가지 중요한 변수가 있었다. 항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역삼각형 모양의 반도 전체에 구불구불한 해안이 펼쳐져 있어 어디서든 쉽게 배를 띄울 수 있었다. 또 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촘촘하게 놓여 있어 큰 어려움 없이 에게해를 통해 소아시아까지 항해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더 나아가 흑해나 레반트, 이집트까지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땅이 없는 아테네 사람들은 일찍부터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상인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바다에 나간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땅을 가진 귀족 못지않은 큰 재산을 모았다. 또 포도와 올리브를 주로 재배하는 지주 귀족들 역시 자신들의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해외에 팔기 위해서는 상인들과 옹기장이들의 도움이 절실했기에 상인들이나 도공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에서 그리스는 곡식을 생산하는 고대 4대강 문명의 지주 지배자들보다 불리했다. 그곳의 지주들은 잉여 생산물을 창고에 쌓아 두고 개인 용병을 고용하여 평민을 억압할 수 있었지만 환금 작물을 재배하던 그리스 귀족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가장 사정이 딱한 계층은 가난한 농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바로 무장을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애초에 자기방어를 위해 형성된 폴리스에서 자유 시민의 자격은 스스로 무장을 하고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 그러기에 평민들도 무장을 할 권리와 의무가 있었다. 농부들은 사회 부조리로 생긴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언제든지 무장 봉기를 할 수 있었다. 반란에 필요한 물자와 자금은 같은 평민 계급인 부자 상인들이나 도공이 제공할 수 있었다. 이제 부유한 상인 계급과 가난한 농민이 힘을 합쳐 귀족들에게 반기를 든다면 절대적으로 수가 적었던 귀족들은 한번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런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남은 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변수는 상인 계급과 농민들이 연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테네는 이 연대마저도 쉽게 이루어질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거친 항해에서 협력과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몸으로 익혀 알고 있었다. 또 세계 구석구석을 여행했기에 아는 것도 많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상인이었기에 협상의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들이 농민과 도공들을 끌어들여 귀족과 맞서 싸울 연대를 만들었다. 기원전 6세기에 들어설 즈음 아테네는 혁명 전야처럼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런 위기에서 아테네 사람들은 내전 대신 타협을 선택했다. 귀족과 평민 사이의 타협을 주관할 한명의 조정자를 지정해 그에게 독재권을 주어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맡기자는 데에 합의했다. 기원전 594년 아테네 시민들은 솔론을 독재자로 임명하여 모든 개혁을 맡겼다. 솔론은 핏줄에 뿌리를 둔 ‘귀족정치’(aristocracy)를 끝내고 재산 정도에 따라 폴리스의 권력과 의무를 갖는 ‘금권정치’(plutocracy)를 고안한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