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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건하지만 단호한 솔론의 개혁/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 18. 22:52

국제유럽

온건하지만 단호한 솔론의 개혁…어느 편도 만족하지 않았다

등록 :2016-01-17 20:32

 

델피(델포이) 프로니아 아테나 신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유재원 교수 제공
델피(델포이) 프로니아 아테나 신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유재원 교수 제공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② 델포이에서
고대 그리스 세계의 중심은 델포이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국가의 큰일부터 개인들의 소소한 일들까지 델포이로 가서 신탁을 물었다. 그리스인들만이 참가할 수 있었던 올림픽 제전과 달리 델포이 신탁소는 이방인들에게까지 열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전세계 사람들이 세계 구석구석의 소식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델포이에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모든 정보가 모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무엇에 대해 정보를 얻으려면 인터넷을 검색하듯이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델포이로 가서 신탁을 물었다.

델포이 신탁소 입구에는 두 개의 경구가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너 자신을 알라!”였고, 다른 하나는 “어느 것도 지나치지 말라!”였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신의 운명에 대해 물어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고, 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과도한 의욕을 갖거나 욕심을 부리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 것이다. 고대 그리스 위인들 가운데 델포이의 이 경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은 아마도 아테네의 현인 솔론(기원전 638년쯤~558년쯤)일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어느 것도 지나치지 말라”
델포이 신탁소의 두 경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은
아테네의 현인 솔론이다

절대권력을 부여받은 그는
제도가 아니라 탐욕과 불의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그는 귀족과 평민 어느 한편에
쏠리지 않고 중용을 지켰다
참정권에선 신분 기준을 없애고
경제력만으로 자격을 부여했다
공직을 맡으면 부담도 더 지웠다

그러자 귀족들은 손해봤다 하고
농민들은 얻은 게 없다고 불평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긴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결국 물러났다

■ 솔론이 독재자로 임명되다

델포이 고고학 박물관을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흉상이 하나 있다. 우리에게 흔히 <플루타르크 영웅전>으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적 위인들의 <비교 생애사>를 쓴 역사학자 플루타르코스(기원후 46년쯤~120년쯤)의 흉상이다. 델포이에서 80㎞쯤 떨어진 카이로네아에서 태어난 플루타르코스는 젊은 시절 플라톤이 세운 아테네의 아카데미아에서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고, 노년에는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두 명의 최고 사제 가운데 한 명으로 봉직했다. 당시 그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상당히 유명한 지식인이었다. 우리가 솔론에 대해 알고 있는 많은 사실들은 그의 책 <비교 생애사>에 근거하고 있다.

이오니아식 기둥과 아테네 보물창고.
이오니아식 기둥과 아테네 보물창고.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솔론은 왕족 출신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다가 모든 재산을 다 나누어 주어 가난하게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솔론은 돈을 벌기 위해 장사를 시작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 기원전 6세기 말에 아테네의 빈부차가 매우 심해져 부유한 귀족 계층과 가난한 평민들 사이에 내전의 불길한 조짐이 감돌자 아테네 시민들은 한 명의 조정자를 지정해 그에게 독재권을 주어 아테네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을 맡기자는 데에 합의했다. 그런 일을 맡을 사람은 귀족에게서는 물론 평민에게서도 신뢰를 받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 조정자로 솔론이 임명되었는데, 그는 부자들의 횡포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극악한 빈곤에 빠지지 않을 정도의 재산도 있었다. 양편은 모두 큰 희망을 걸고 솔론에게 어서 절대권을 장악하라고 간청했다. 부자들은 솔론의 부유함을 보고 자기들 편이라고 신용하였고 그가 자신들이 빌려준 돈을 보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가 정의감이 있고 선한 사람이기에 토지를 재분배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왕 자리를 차지하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솔론은 “군주란 좋은 자리지만 한 번 앉으면 물러날 길이 없다”고 사양했다.

대권을 잡은 솔론은 차분하게 개혁을 준비했다. 그는 근본적인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들의 ‘탐욕과 불의’ 때문이라고 보았다. 부자들에게 공평이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과 공로에 따라 합당한 몫을 가진다는 것을 뜻했다. 반면, 빈민들은 모든 것을 전적으로 똑같이 나누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다. 이런 건널 수 없는 반목과 갈등 속에서 솔론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겸허하게 정의를 내세워 설득하는가 하면 때로는 강력하게 권력을 행사하여 개혁을 이끌어 나갔다. 그는 결코 어느 한편으로 쏠리지 않고 중용을 지켰다. 권세 있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거나 복종하지 않았고, 뽑아 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어 법을 만들지도 않았다. 오로지 시민의 신임과 호의에 의지하여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려고 노력했다. 공평한 사회에서는 내전이나 반란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탐욕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했고 평민들의 지나친 균등 분배 요구에 맞서 귀족의 이권을 보호했다.

플루타르코스 흉상
플루타르코스 흉상
또 그는 모든 제도와 법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기존의 법 가운데 좋은 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절도나 단순 폭행까지도 사형을 내렸기에 ‘피로 쓴 법’이라고 불리던 ‘드라콘(기원전 7세기에 활동함)의 법’은 살인죄만 제외하고 모두 폐지했다. 그가 개혁에 이렇게 신중했던 것은 공연히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어 혼란하게 만들었다가는 다시 새로운 체계를 잡을 대책이 없을까 염려한 까닭이다.

■ 솔론의 경제 개혁

그가 제일 먼저 취한 개혁은 빚 때문에 거의 노예로 전락한 농민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는 일이었다. 그는 농토에서 저당 잡힌 땅이라는 표시인 말뚝을 뽑아 귀족들이 차지한 땅을 빼앗아 가난한 농부들에게 돌려주고 남은 부채를 탕감했다. 이는 부자들이 타격을 입는 조치였지만 그 빚을 받지 못한다고 부자들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결코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경제적인 희생을 하여 사회 안정을 찾는다면 부자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이미 노예 신분으로 하락하여 외국에 팔려나간 시민들에게 다시 자유를 사 주어 모두 본국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아울러 앞으로는 빚의 담보로 자신의 몸을 맡길 수 없게 법을 제정했다.

■ 솔론의 정치 개혁

솔론의 정치 개혁은 비교적 온건하면서도 단호했다. 일단 모든 공직을 종래에 담당해 온 사람들, 즉 부유한 귀족층에게 그대로 맡긴 채, 제한적으로나마 다른 계층들도 맡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전까지 최고 공직인 1년 임기의 아르콘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일정 재산 자격을 갖춘 시민들만의 민회에서 선출되었었다. 그러나 솔론은 이렇게 선천적으로 정해진 신분에 따라서 참정권이 제한되던 것을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 즉 경제력에 따라서 제한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는 우선 온 시민의 재산을 조사하여 재산 정도에 따라 네 개의 계급으로 새로이 재편성했다. 가장 상위 계급인 제1 계급은 1년 수입이 500메딤노스(1메딤노스=58.4ℓ) 이상인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당시 5인 가족 생활비가 1년에 25메딤노스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약 20가구를 먹여 살릴 정도의 수입이 있는 부자들이 이 계층에 속했다. 제2 계급은 300메딤노스, 제3 계급은 200메딤노스의 수입이 있어야 했다. 이 계급까지만 공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200메딤노스 이하의 수입이 있는 제4 계급은 어떤 공직도 허용되지 않고 민회에 참가할 자격과 법정 배심원이 될 자격만 주어졌다. 이렇게 혈통 자격을 폐지하고 재산 자격으로 대체함으로써 새로운 상인 계급이 최고 공직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공직을 맡는 데에는 의무도 뒤따랐다. 솔론은 더 많은 권리를 누릴수록 세금이나 군역 등의 부담을 더 지는 식으로 공직을 재편했다. 가장 부유한 시민들은 가장 높은 공직을 차지하는 대신 부담도 더 져야 했다. 반면, 가장 가난한 시민들은 세금을 전혀 내지도 않고, 군역도 노 젓는 일이나 경무장 보병 정도만 복무하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솔론은 가난한 사람들도 다른 부분에서는 정치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모든 시민들이 모여 폴리스의 일을 토의하고 결정하는 민회에는 모든 사람들이 신분과 경제력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참석하여 자유로이 발언하고 투표할 수 있었다.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의 수가 항상 더 많았기 때문에 민회에서 민중은 귀족들과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또한 400인회라고 하는 하원 조직에 선출되어 활동할 수 있는 권리도 누렸다. 이전에는 폴리스의 입법과 민회의 안건 상정은 아르콘을 거친 귀족들로만 구성된 아레이오파고스에서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솔론은 아레이오파고스의 하위 기관으로 네 부족 민회에서 각각 100명씩 선출된 400인회를 신설했다. 이 기관은 일종의 실행 위원회로서 민회의 업무를 미리 준비했다. 그리고 이곳을 경유하지 않은 안건은 전체 민회에 상정할 수 없도록 했다. 이제 아레이오파고스는 전면적인 정무 감사와 법령 유지를 담당하도록 했다. 상당한 권력이 민중에게 넘겨진 것이다.

■ 솔론의 사법 개혁

솔론은 직업적 법관들에 의한 재판에 만족하지 못한 사람이 항소하여 시민 배심원들에 의한 시민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배심 재판은 그 뒤로 차츰 관할권을 넓혀나가 민사와 형사 대부분의 사건들을 재판하게 되었다. 아테네 시민은 누구나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솔론은 배심원 제도를 통해 시민들 전체가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피해에 대해 함께 느끼고 분노하도록 만들었다.

■ 솔론의 중립 금지법

그는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이 피해를 입은 사람과 합심하여 가해자를 벌하는 폴리스야말로 가장 잘 다스려지고 있는 폴리스”라고 말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도시에 내란이 일어났을 때 무기를 들지 않고 양쪽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은 불명예를 당하고 폴리스의 공적인 일에 참가하지 못한다”라는 ‘중립 금지법’을 만들었다. 그는 시민 가운데 그 누구든 공적인 문제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안전과 영광만 꾀하며, 나라의 위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는 폴리스의 안정이 위험해진다. 모든 자유 시민은 옳은 편에 가담하여 정의를 구현하는 모험에 몸을 사리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 솔론의 개혁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

이런 솔론의 개혁에 대해 어느 편도 만족하지 않았다. 부자 귀족들은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했고, 원했던 토지를 얻지 못해 가난한 농민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불만이었다. 그리고 재산에 따라 참정권이 제한되는 금권정치에서는 절대 평등이라는 이상은 구현될 수 없었다. 솔론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기는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독재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고는 10년 동안 해외에 나가 있을 수 있는 출국 허가를 받고 이집트로 떠났다.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특히 솔론이 모든 빚은 탕감하겠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간섭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안 그의 친구들이 부자들로부터 많은 돈을 빌려 넓은 토지를 사서 차지했다. 솔론은 이로 말미암아 신임을 잃고 미움을 받았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그 후 그는 키프로스와 리디아 지방으로 긴 여행을 하고 아테네로 돌아왔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