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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참주정치의 시작/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2. 1. 21:56

국제국제일반

솔론 실각뒤 계급갈등…금광졸부 ‘쿠데타’ 참주정을 열다

등록 :2016-01-31 20:43수정 :2016-01-31 21:10

 

터키 서남쪽 해안도시 보드룸에 있는 명소 ‘성 요한 기사단’의 성. 보드룸은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고향으로,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자세히 전했다. 유재원 교수 제공
터키 서남쪽 해안도시 보드룸에 있는 명소 ‘성 요한 기사단’의 성. 보드룸은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고향으로,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자세히 전했다. 유재원 교수 제공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③ 터키 보드룸에서

터키의 서남쪽 해안에 보드룸이란 인구 3만여 명의 아름다운 휴양 도시가 있다. 이 도시의 명소는 ‘성 요한 기사단’의 성이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항구를 지키는 굳건한 이 성은 함락된 적이 없다. 그러나 1522년 오스만 튀르크(터키)의 술레이만(쉴레이만) 1세의 공격을 이기지 못한 성 요한 기사단이 그들의 본부인 로도스 섬을 포기하고 떠나게 되자 보드룸도 자연스레 오스만 튀르크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이 도시의 고대 명칭은 할리카르나소스인데 이곳이 바로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로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긴 헤로도토스의 고향이다.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4년,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나 독재에 항거하던 아저씨가 살해당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그는 사모스 섬으로 도피했다가 다시 아테네로 망명하여 여생을 지낸다. 헤로도토스는 그의 책 <역사>에서 아테네가 솔론의 망명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으로 바뀌게 되었는가를 자세히 전해 준다.

금권정치에서 참주정으로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이러하다

솔론 망명 뒤 계급갈등 표면화
지주와 소작농들의 평원파
상인과 뱃사람들의 해안파
그 틈에 페이시스트라토스 부각

아버지의 금광 돈줄 삼아
소외층 인기영합 산악파 보스로
자해소동 뒤 몽둥이부대 편성
아크로폴리스 첫 무력점령
반대파 역습으로 두 차례 부침

실패 거울삼은 세번째 쿠데타
튼튼한 용병에 착실한 세금
자식 인질삼아 정적 손발 묶어
체제 안정되면서는 합리적 독재

■ 솔론 망명 이후의 정치적 혼란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동상.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 헤로도토스의 동상.
소수 귀족들이 게걸스러운 탐욕으로 토지를 독점하다시피 하자 토지를 잃은 농민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거기에 무역으로 돈은 벌었지만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권력으로부터 배제되었던 신흥 부자 상인 계급의 불만이 겹쳐지자 아테네는 언제든 내전이 일어날 위기에 빠져들었다. 이에 대한 타협책으로 아테네 시민들은 솔론을 독재자로 선출하여 전권을 맡겼다. 솔론은 빚을 탕감하고, 가문 대신 재산을 기준으로 참정권을 조정하는 한편, 민회의 권한을 강화하는 개혁을 한 뒤 홀연히 망명을 택하고는 이집트로 떠났다.

이런 솔론의 개혁에 대해 어느 누구도 만족하지 못했다. 빚의 탕감과 신흥 부자들과 권력의 공동 소유를 강요당한 귀족들은 자신들만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불평했고, 빚 때문에 빼앗긴 토지를 찾기는 했으나 더 이상의 것을 얻지 못한 농민들은 농민들대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불만에 차 있었다. 농민들이 보기에 솔론의 개혁은 부자 귀족들이 양보한 것도 없고 가난한 자신들이 얻은 것도 없이 상인 신흥부자 계층만 새 권력을 얻어 정치적으로 귀족과 대립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미적지근한 미봉책으로 보였다. 특히 재산의 정도로 참정권을 제한한 솔론의 조치는 시민 대부분을 차지하는 최하위 계층에게는 또 다른 신분 차별로만 여겨졌다. 부가 대물림되듯 가난도 대물림된다. 가난이 본인 자신만의 탓이 아니라면 재산 정도에 따라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금권정치 역시 귀족정치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신분 차별 아닌가?

솔론이 망명을 떠난 시기에 아테네는 이런 불만으로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첫 4년간은 그런대로 평화를 유지했다. 그러나 5년째가 되던 해에 계급 사이의 갈등으로 아르콘을 뽑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까스로 어떻게 타협이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5년 뒤 또다시 지도자 선출에 실패하면서 아테네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결국은 10명의 아르콘을 놓고 귀족 5명, 농부 3명, 수공업자 2명의 배분으로 타협을 보았으나 불안 상태는 조금도 개선되지 못했다.

■ 아테네에 세 개의 분파가 생기다

부자 상인 계급이 상류층으로 수직 이동하자 상인 뱃사람과 가난한 농부 사이의 연대는 깨지고 귀족과 부유 상인의 두 지배 계층이 형성됐다. 이 두 계층은 각기 한 명의 지도자들 중심으로 파벌화했다. 우선 전통적인 지배 계급인 지주 귀족들과 그들을 따르는 소작농들로 구성된 ‘평원파’(Pedieis)가 있었다. 이 파의 지도자는 리쿠르고스였는데 과두 정치를 추구했다. 이들은 곡물을 생산했기 때문에 매우 안정적이고 특히 기근이 들 때에는 아주 유리한 정치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해안가에 사는 신흥 부자 상인 계급과 뱃사람의 지원을 받는 ‘해안파’(Paralioi)가 있었다. 메가클레스라는 인물이 이끄는 이 집단은 중용 정치를 추구했다. 이들은 곡물 확보를 못해 평원파에 비해 불리한 위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해안을 메가라가 지배하고 있어 무역에도 제한을 받고 있었다.

세 번째 파벌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지도하는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의 집단인 ‘산악파’(Hyperakrioi)였다. 이들은 변변한 농토마저 갖지 못해 양봉과 양치기로 지내는 가장 가난한 계층의 집단이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솔론의 개혁으로 빚에서 풀려난 사람들과 출생이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파벌의 구성원들은 한마디로 자기주장도 변변히 하지 못하는 소외 계층이었다. 그러나 숫자에 있어서 다른 두 파를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솔론의 개혁에 가장 충실한 민주주의파였다. 원래 이 산악파는 그 이전에는 파벌을 이루지 못했던 집단이었던 것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조직한 것이었다.

이렇게 날카롭게 대립하는 세 파벌 사이에 타협점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제 아테네는 귀족정치와 금권정치에 뒤이은 세 번째 정치 실험을 해야 할 시기를 맞게 되었다. 그 세 번째 정치 형태는 ‘참주정치’(Tyranocracy)였다.

■ 떠오르는 새로운 인물 페이시스트라토스

페이시스트라토스 어머니는 솔론의 어머니와 사촌 사이였다. 즉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육촌 동생이었다.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지닌 고귀한 성품과 아름다움 때문에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헤로도토스(역사 1권 59장)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출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전한다. 그의 아버지가 올림피아 축제에 가서 제물을 바칠 때, 갑자기 고기와 물로 가득 찬 솥들이 불을 때지 않았는데도 끓어넘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를 본 라케다이몬의 킬론이 히포크라테스에게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이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얼마 후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낳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기원전 564년에 아테네의 숙적 메가라의 항구 니사이를 빼앗을 때 공을 세운 바 있어 아테네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권력을 추구하기에는 아직 정치적 기반이 약했다. 마침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 북부의 팡가이온 산에서 금광을 발견하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 돈을 이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권력자들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위해 나서 주는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추종 세력을 규합해 세 번째 파벌인 산악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세력을 얻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결정적인 음모를 꾸몄다.

그는 자신의 몸에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아고라로 나가 정적들이 자기를 죽이려 한다며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지켜줄 50명의 개인 호위대를 갖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이미 팔순이 된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꾸미는 음모라며 자유를 지키려면 정신 차리라고 민중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아테네 시민들은 그의 술책에 넘어가 호위대를 허락해 주었다. 그 뒤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나무 몽둥이를 든 50명의 호위대를 데리고 다니며 시민들에게 겁을 주자 솔론은 홀로 무장을 하고 거리에 나와 버티고 서서 이들에 대항했다. 그러나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솔론은 자기 집 대문 앞에 무기를 내놓고는 자신은 “가장 현명하고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를 노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보다 영리하고, 알면서도 침묵하는 사람들보다 용감하다’라는 것을 이렇게 돌려 말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패거리들은 아크로폴리스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독재를 시작했다. 이때 빈민층 사람들은 이런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열광적으로 지지한 반면, 부유층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주저하고 있었다. 솔론이 개혁을 한 지 32년 지난 기원전 561년의 일이었다. 그의 첫 집권 시기는 약 6년 동안 계속되었다.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두 번의 추방과 세 번의 집권

기원전 555년쯤에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일격을 당한 평원파와 해안파는 힘을 합쳐 페이시스트라토스파를 공격해 아테네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두 파는 공존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곧 다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자 해안파의 메가클레스가 비밀리에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의 딸과 결혼한다면 그를 다시 참주로 추대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둘은 합의를 보고 음모를 꾸몄다.

‘피아’(Phya)라고 하는 이름의 빼어난 미모의 여인의 키는 170센티미터가 넘었다. 당시 남자들의 평균 키가 160센티미터 정도였으니 여자로서는 엄청 큰 키다. 이 여자를 완전무장한 아테나 여신으로 분장시키고는 수레에 태워 아테네 시가지를 돌며 아테나 여신이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참주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한다고 시위했다. 이상하게도 이런 유치한 수법이 가장 이성적이라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먹혔다. 시민들은 그녀가 정말 여신인 것으로 착각하고 페이시스트라토스를 다시 참주로 받아들였다. 아니면 기존 정치가들에게 신물이 난 아테네 시민들이 일부러 속아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메가클레스의 딸한테서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녀와 살을 섞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메가클레스가 다시 리쿠르고스와 손을 잡자 위협을 느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도망쳤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11년 뒤에 권력에 대한 세 번째 도전을 했다. 이번에는 돈으로 외국 용병도 충분히 사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반대파를 공격했다. 기습에 성공하여 다시 아테네로 들어온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고라의 테세이온 신전 앞에서 민회를 열고 연설을 시작했다. 이때 그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잘 안 들리게 연설을 했다. 사람들이 잘 안 들린다고 하자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아크로폴리스 정문 앞으로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시민들이 연설을 들으러 자리를 비우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부하들은 시민들이 놓고 간 무기를 모두 감췄다. 이렇게 해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확실하게 권력을 잡게 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외국 용병과 개인 호위대, 그리고 모든 시민들에게 걷어들이는 10분의 1세로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정적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낙소스 섬에 가두어 놓았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권력을 잡은 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각별히 대우하면서 상의도 하고 몇몇 안건의 경우에는 미리 승인도 구했다. 그리고 솔론의 법을 그대로 시행하면서 스스로 잘 준수하여 모범을 보였다. 그리고 권력을 휘두름에 있어서도 조금도 무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귀족들이나 부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기존의 관직들을 폐지하거나 솔론이 세운 법들을 바꾸지 않고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폴리스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민중을 괴롭히지 않았고 아테네는 언제나 평화롭고 고요했다. 모든 일을 함에 있어 합법적으로 공익을 추구했고 중립적이면서도 매우 합리적으로 폴리스를 다스렸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그의 성품은 민주적이고 자애롭고 온화했으며 잘못한 사람들에게도 동정적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은 유연하고 인정이 있는 독재였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