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강제종군위안부’ 문제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밀리던 아베 총리의 카운터펀치 한방에 정부와 국민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상태다. 비교적 차분하고 일사불란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이 합의로 벌집을 쑤신 듯한 느낌이다. 정부는 잘된 합의라고 하고, 야당은 외교참사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합의가 구두로 발표된 직후부터 일본 언론에서 이면합의를 의심케 하는 다양한 보도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번 합의의 가장 핵심적인 쟁점 중 하나는 한국 정부와 국민이 향후 예외없이 합의 내용을 준수해야 하느냐이다. 양국 외교장관이 구두로 발표한 합의 내용에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강한 어구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도 ‘한국이 딴소리하면 국제사회에서 매장당한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자칫 한국이 향후 이 합의로 발목을 잡히는 게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강제종군위안부와 관련한 이번 한-일 합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이번 합의가 국제법상 ‘조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1969년 비엔나조약법협약 제2조에 따르면 조약은 다양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서면으로 작성되어 국제법에 의하여 규율되는 국가 간 합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국제법상 규정된 체결 절차와 형식을 갖추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양자이건 다자이건 정본이 문서로 작성되고 교환돼야 하며, 국가원수의 비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헌법 제60조에 해당하는 조약의 경우 국회의 비준 동의를 얻어야 하며, 유엔헌장 제102조에 의거하여 유엔에 기탁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한-일 합의는 문서로 된 정본 없이, 양쪽 외교장관이 구두로 발표했을 뿐이며, 그 내용조차 서로 다르다. 조약 정본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합의의 목적이나 분쟁 해결 방안 및 탈퇴 규정 등이 미비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조약으로 성립되기에는 국제법상 기초요건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조약이 아닌 합의로는 주권국가를 구속하지 못한다. 이번 합의는 두 정부 사이에 특정 사안에 대한 입장 조정을 구두로 밝힌 정도 수준이므로 우리의 국익에 현저히 배치되는 경우 향후 한국 정부나 국민은 이 합의를 따를 필요가 없다. 어차피 언론 플레이로 이 황당한 합의조차 무색하게 한 것은 아베 총리 자신이다. 일본 언론이 내각조사국이나 외무성에서 흘린 정보를 얻어 보도를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므로, 결국 이 언론 플레이의 기획과 각본은 아베 총리일 것이다. 전쟁 중 국가의 치밀한 기획에 따라 수십만의 여성을 납치, 감금, 폭행, 강간, 살해한 인류 최악의 국가범죄에 대하여 단지 도의적 유감만 표명하고 10억엔으로 앞으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겠다고 주장하는 아베 총리와 일본 정부가, “합의는 지켜야 한다”(Pacta Sunt Servanda)는 국제법의 대원칙을 들고 한국 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지 그 뻔뻔함이 아연실색할 수준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외교 셈법을 모르고 피해 당사자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덜컥 통탄스런 합의를 추진한 한국 정부의 외교 당국자들과, 합의의 국제법적 성격을 차분히 따져보지 않고 정치적 구호로만 정부를 압박하려 드는 정치권도 이번 대일외교 실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과연 이완용이 우리와 전혀 다른 완벽한 악인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그도 당대 조선에서 누구보다 국제정세에 대한 뛰어난 식견과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던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자존과 신념을 버리는 순간 누구나 을사오적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