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인가, 도쿄에 거주하는 자이니치(일본에 사는 한반도 출신자) 연구자가 팸플릿을 내밀며 의견을 물었다. 일본 도치기현 사노시에 있는 사노시향토박물관이란 곳에 가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사노요? 그런 시골에 뭐가 있나요?”
“혹시 스나가란 인물을 아시는지?”
일본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 한반도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스나가 하지메(1868~1942)라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 때문이다. 그는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을 근대화하려 했던 갑신정변(1884년)의 주역들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교류했던 일본인으로, 일본에 의한 조선 병합으로 귀결되고 마는 구한말 한-일 교류사 속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남기고 있다.
사노의 부농이었던 스나가는 19살께 후쿠자와 유키치의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입학하면서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 갑신정변에 실패한 뒤 오가사와라제도에 유폐 중인 김옥균은 마음속으로 존경할 수 있는 ‘애국지사’의 전범이었다. 이 무렵 김옥균과 서한 교류를 시작한 스나가는 5년 뒤인 1889년 9월 홋카이도의 유폐 생활을 마치고 도쿄로 상경한 김옥균과 우에노역에서 첫 상봉을 하게 된다. 그때 스나가는 스물둘, 김옥균은 세상의 온갖 평지풍파를 겪은 서른아홉의 장년이었다. 이후 스나가는 ‘마음속의 스승’인 김옥균이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당할 때까지 사노의 저택에 그를 모시며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박영효 등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스나가의 거점인 사노를 방문해 여러 자취와 기록을 남겼다. 이런 기록들은 ‘스나가 문고’라는 방대한 분량의 문서로 사노향토사박물관에 남아 있다. 지난 5일 야마구치 아키요시 관장의 호의로 조선 3대 명필로 꼽히는 김정희의 글씨 두 점, 오세창·황철 등의 글과 그림 20여점을 감상할 수 있었다.
스나가와 인연을 이어간 인물 가운데는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을미사변에 가담한 조선인 우범선(1857~1903)이 있다. 사변 뒤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은 기타노 잇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생활비를 보조받고 살았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언급한 ‘동지적 관계’란 표현은 일본군과 조선인 위안부가 아니라, 을미사변을 묵인한 일본과 우범선의 관계를 지칭할 때 쓰여야 한다. 우범선의 아들이 ‘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우 박사는 자식들에게 아버지와 관련된 얘길 단 한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뒤 우범선의 묘가 남아 있는 묘현사란 절을 찾았다. 절의 본당 뒤에 빼곡히 늘어선 묘비석 가운데서 어렵지 않게 우범선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우범선이 히로시마 구레에서 조선인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당한 뒤 도쿄 아오야마에 안치돼 있던 묘비를 스나가가 1년쯤 뒤에 사노로 이전한 것이라고 했다.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버려진 묘비였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살짝 눈물이 났다.
저만치 해가 지고,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우범선은 조선을 근대화하기 위해선 일본의 힘을 빌려 와야 하고, 이를 위해선 명성왕후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게 우범선 나름의 애국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역사의 평가란 얼마나 냉정한 것인가. 한 사람의 인간이 태어나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하려면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 사노에 잠들어 있는 우범선에게도, <제국의 위안부>를 쓴 박유하 교수에게도, 이 글을 쓰는 내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길윤형 도쿄 특파원 charisma@hani.co.kr
길윤형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