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참영웅은 민중의 가슴에 묻힌다던가/ 곽병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 27. 21:29

사설.칼럼칼럼

참영웅은 민중의 가슴에 묻힌다던가

등록 :2016-01-26 19:17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여립은 계원들 앞에서 말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건 성현의 통론이 아니었다’ ‘천하가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있겠는가’ ‘요와 순과 우 임금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왕위를 넘겨주어 백성을 편케 했다. 요순이야말로 성현이 아닌가’.

진정한 영웅은 남은 자의 가슴에 묻힌다고 했던가. 산성터 주변은 민중의 원망과 결합돼 탄생한 신화로 빼곡하다. ‘죽도서실’을 관군이 급습했을 때 그곳엔 벼 200섬과 피잡곡 100섬이 있었다고 한다. 변란 목적의 것인지 난리에 대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대도가 행해지던 때에는 천하를 공유물로 삼았다. …간사한 모의는 일어나지 않고, 도적질과 난적의 무리가 생겨나지 않았다. 사립문을 닫아걸지 않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으니 이것을 ‘대동’의 세상이라 했다.”(<예기>‘예운편’)

대덕산(750m), 고산(875m), 가막고개가 가로막고 구량천, 연평천, 금강이 에워싼 천반산. 1925년 발간한 <진안지>는 “산이 험하고 암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정상부는 평평해 만여명이 머무를 수 있다”고 했다. 주봉에서 서쪽 능선으로 1.2㎞쯤 고원 흔적뿐인 성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무너져내린 돌마다 정여립 신화와 ‘대동세상’의 꿈이 새겨진 곳이다.

단재 신채호가 프랑스의 루소에 비유한 인물. 신복룡 교수처럼 영국 공화정을 처음 연 크롬웰에 비교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긴 전제왕조 아래서 ‘왕후장상의 씨가 어디 있으며, 누군들 모시면 왕이 아니겠는가’라면서 대동세상을 꿈꾸다, 500년 조선 역사상 최대의 옥사에서 국가변란의 수괴로 지목돼 능지처참당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정여립의 난’이 실제였는지 아니면 조작이었는지 여부는 4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논란이 분분하다. <선조실록>은 무고에 의한 조작 사건의 취지로 기록했고, 인조 때 서인들이 떼를 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개찬한 <선조수정실록>에선 국가변란으로 규정했다. 다만 19세기 말 영재 이건창이 중립적 입장에서 당쟁사를 기록한 <당의통략>은 모반의 근거가 빈약하다고 했다.

물론 그의 ‘역심’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그는 선조를 불신하고 혐오했다. 그와 연루돼 처형된 백유양이 여립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힌 것처럼 선조는 ‘도량이 좁고 시기심은 많으며 성질은 모질고 의심이 많’았다. 그의 기회주의적 처신은 붕당을 초래했고, 오히려 조정의 분열을 제 권세 유지에 이용했으며, 민생의 도탄과 외환은 방치했다. ‘천하공물’(天下公物), ‘하사비군’(何事非君)론에 따르면 마땅히 몰아내야 할 군주였다.

여립은 전주의 명문가(동래 정씨 집안)에서 태어나 20대 초반에 대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관련 기록이 모두 인멸돼, 지금은 출생연도나 출생지조차 알 수 없다. 1540년 전후 전주 남문 부근에서 부친 희증에게서 태어났다는 게 고작이다. 그는 선조 3년(1570년) 식년문과에 2등으로 급제했지만 11년 뒤에야 정언에 기용됐다. 2년 뒤 예조좌랑을 거쳐 1584년 홍문관 수찬(6품)에 오르지만 상소가 빌미가 되어 쫓겨나고, 이듬해 그 자리에 다시 기용되지만 역시 직언이 문제가 돼 쫓겨났다.

상소의 내용은 이렇다. “나랏일이 어렵고 염려스러운데 안으로 사류들이 환산하고 밖으로 싸움이 곧 일어나려고 하니 신같이 어리석고 재빠르지 못한 사람이 그 직을 수행하기에….” 선조는 그런 여립을 재빠르게 잘라버렸다. “스스로 그만두겠다고 했으니….” 재기용되고서도 선조의 면전에서 “박순은 간사한 무리의 괴수이고, 이이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며, 성혼은 간사한 무리의 편을 들어 군부를 기망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선조가 ‘조선의 형서(배반의 상징적 인물)로다’라고 이죽거리자, 여립은 “신이 지금부터는 다시 천안을 뵐 수 없겠습니다”라며 물러났다. 사관은 그가 나가면서 ‘눈을 치켜뜨고 왕을 돌아보았다’고 기록했다.

당시 국내외 정세는 급박했다. 거듭된 천재와 가뭄이 이어져, ‘종이 주인을 죽이고 자식이 아비를 버리는 일’이 잇따랐다. 1583년(선조 16년)엔 북방의 경원부와 안원보가 여진족에 함락되어, ‘시체가 들을 덮고 해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러나 선조는 아예 북방 영토를 포기하려 했다. ‘나의 생각으로 마운령 이북은 장차 저들 소유가 되고 말 것이다.’(선조실록)

전라도 금구 동곡마을로 돌아온 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했다. 여러 마을에 있던 일반적인 대동계가 아니었다. 반상을 구별하지 않고, 양반은 물론 상인이나 천민, 산적, 승려까지도 받아들였다. 정팔용처럼 무술에 뛰어난 인물과 운봉의 승려 의연, 도잠, 설청과 해주의 지함두 등 학식과 능력이 특출한 인물들이 가입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전라도사 조대중 등 관리들도 가입했다. 규모는 커져 해서(황해도)로까지 확장됐다.

계원들은 매달 한 번씩 동곡마을 인근의 제비산 월명암 근처에 모여 말타기나 활쏘기, 검법 등 무예를 연마했다. 여립은 훈련이 끝나면 계원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건 성현의 통론이 아니었다’ ‘천하가 공물인데 어찌 주인이 따로 있겠는가’ ‘요와 순과 우 임금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지만 왕위를 넘겨주어 백성을 편케 했다. 요순이야말로 성현이 아닌가’. <여씨춘추>를 인용해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천하의 천하이다’라고 하기도 했고, ‘은나라의 탕왕이 하나라의 걸왕을 내쫓고 주나라의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친 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에 부응한 것’이라고도 했다.

1587년 2월 왜적이 전함 18척을 이끌고 전라도의 손죽도 일대에서 백성 수백명을 살육하거나 포로로 붙잡아가는 정해왜변이 일어났다. 관군으로는 감당이 어렵자 전주부윤 남경언은 지원을 요청했고, 여립은 대동계원을 이끌고 죽도로 내려가 왜구를 물리쳤다. 그즈음 해서에는 이런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호남 전주 지방에 성인이 일어나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다. 그때는 수륙의 천민과 일족, 이웃의 요역(관노)과 도피자 색출 등의 일이 모두 감면될 것이고, 공사천과 서얼을 차별하는 법을 모두 없앨 것이니….” 그건 여립의 야망이 아니라 당시 조선 민중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국가변란의 올가미가 되었다. 서인의 고변에 따라 1589년 음력 10월4일 체포령이 떨어졌고 여립은 쫓기던 중 10월14일 죽었다. 자살인지 살해인지 아직 미궁이지만 이후 옥사는 참혹했다. 그의 주검은 문무백관 앞에서 능지처참됐고 부모, 아내, 자식들은 교살됐다. 서인들은 동인을 뿌리뽑고자 옥사를 확대시켰다. 2년간 53명을 처형하고, 20여명을 유배시키고, 400여명을 투옥했다. 영의정 이발은 여립을 비호했다 하여 형제와 노모, 8살 아들까지 처형당했다. 영호남의 존경받던 학자 최영경과 정개청도 처형당했다.

당시 김천일 장군이 올린 상소는 이반된 민심을 웅변한다. “백성들이 참혹한 화와 연좌의 죄를 눈으로 보고는 앞을 다투어 도망하여 온 마을이 텅 빈 곳이 있기에 이르렀고 (…) 임금을 원망하는 소리가 구천에 사무치니, 나라의 근본이 여지없이 좌절되었다.” 옥사가 끝난 1592년, 여립의 예언대로 왜가 침략했다. 선조와 지배층은 줄행랑쳤고, 갈 곳 없는 민중은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떨어졌다.

진정한 영웅은 남은 자의 가슴에 묻힌다고 했던가. 산성터 주변은 민중의 원망과 결합돼 탄생한 신화로 빼곡하다. 군사 훈련 때마다 ‘大同’(대동)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 훈련지휘소였다는 한림대 터, 망을 본 망바위, 정여립이 말을 타고 뛰어넘었다는 30m 거리의 두 뜀바위, 연단이었다는 장군바위, 수백명분의 밥을 지었다는 죽도 쪽 강가의 돌솥 그리고 시험바위, 말바위, 의암바위….

‘죽도서실’은 신화를 현실과 이어주는 희미한 다리다. 관군이 급습했을 때 그곳엔 벼 200섬과 피잡곡 100섬이 있었다고 한다. 서실이 아니라 보급창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변란 목적의 것인지 난리에 대비한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예기>는 부연한다. “(…) 노인은 그 여생을 편안히 마칠 수 있도록 하고, 젊은이는 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고, 어린이는 건강하게 자라도록 하며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이, 병든 사람은 모두 부양받도록 한다. (…) 재물은 자기만을 위해 쓰이지 않으며 각자의 역량 또한 자신만을 위해 쓰이는 일도 없다.” 하지만 대동세상의 꿈은 예나 지금이나 역모, 곧 국가변란의 증거일 뿐.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단재는 한탄했다. “이 같은 혁명적 학자를 어찌 용납하리오. 애매한 한 장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페허가 되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