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자살로 책임진 대쪽 판사 청초 김용식/ 곽병찬의 향원익청/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2. 21:31

사설.칼럼칼럼

‘매화는 평생 추위에 떨어도 향기 팔지 않고…’

등록 :2016-03-01 18:42수정 :2016-03-01 18:49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투표 당일 월성군 안강읍에서 자유당의 부정투표가 발각돼 3천여 명의 시민이 몽둥이 등을 들고나왔다. 현지로 달려간 김용식은 “생명을 바쳐서라도 문제를 해결할 것이니 사법부를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듬해 6월 월성군에선 재선거가 치러졌다.

그는 특검부장 시절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죽음으로써 국민 앞에 사과하겠다.” “쿠데타를 당해 넘어지는 일이 있다 해도 4월 혁명 영령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뿐.” 자살을 이미 예고한 걸까?

어머니는 아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여염집에 태어나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행복하다. 소신이고 명예고 떠나, 그저 네가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자유롭게 살아라.” 외할아버지의 청렴과 소신으로 말미암아 가족이 몸서리치게 감당해야 했던 가난에서 나온 한탄이었다.

2공화국 특별검찰부 부장이자 1공화국 때 부산지법원장, 대구고등법원장을 역임한 청초 김용식. 아버지를 잊는 게 딸(계순)에겐 힘들었지만, 외손주(이명재)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먹고사는 게 워낙 힘들었으니…. 철들면서 억울해졌다. 가족이야 그렇지만 세상이 외할아버지를 잊어버릴 순 없는 일이었다. 손주는 외할아버지 고향(강원도 속초 중도문리)으로 이사간 뒤 그의 기억을 하나둘 수습했다.

1952년 5월25일 0시를 기해 영남지역에 계엄령이 실시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국 계엄령 실시를 추진했지만,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거부하자 일제 만주군 장교 출신 원용덕을 앞세워 전시 수도가 있는 지역에 부분 계엄령을 실시한 것이었다. 핑계는 ‘공비 소탕’이었지만 군은 야당 국회의원 소탕에 혈안이었다. 타깃은 이승만이 추진하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에 반대하던 이들이었다.

2년 전 2대 총선에서 이승만 반대파가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국회에서 간선으로 뽑힌 이승만은 재선이 불투명했다. 2대 국회를 무력화시켜야 했다. 군은 25일 아침 의원들을 태우고 의사당으로 향하던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견인해 헌병대로 끌고 갔다.

통근버스가 견인되던 바로 그 시간, 부산지방법원 4호 법정에서는 이른바 ‘북괴 안전성 대남간첩단사건’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리고 있었다. 피고들은 이승만의 정적 죽산 조봉암이 추진하던 신당 결성의 핵심이었다. 주문에 이어 재판장(김용식 부산지법원장)은 선고를 했다. 이영근 무죄, 김종원 무죄, 홍민표 무죄, 금룡 무죄…. 검찰이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구형한 피고였지만 모두 무죄였다.

1년5개월 뒤, 역시 부산지법 4호 법정에서 서민호 의원 재심사건 선고공판이 열렸다. 거창양민학살사건 국회조사단 단장이었던 서 의원에 대해 불만을 품은 한 육군 대위가 서 의원을 살해하려다 오히려 서 의원의 총에 맞고 숨진 사건이었다. 보통군사재판은 서 의원에게 사형을, 고등군사재판은 8년 형을 선고했던 터였다. 재판부는 법원장의 의견을 구했다. 법원장(김용식)은 딱 한마디만 했다. ‘소신껏 하십시오.’ 재판장(양회경 부장판사)은 서 의원의 살인 혐의 부분에 대해 정당방위를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1953년 12월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김익진 당시 서울고검 검사장에게도 재판장 김용식은 무죄를 선고했다.

1958년 5월2일 4대 총선 때 그는 대구고등법원장 겸 경상북도 선거관리위원장이었다. 투표 당일 월성군 안강읍에서 자유당의 부정투표가 발각돼 3천여 명의 시민이 몽둥이 등을 들고나왔다. 현지로 달려간 김용식은 “생명을 바쳐서라도 문제를 해결할 것이니 사법부를 믿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듬해 6월 월성군에선 재선거가 치러졌다. 이튿날 오전 대구지법에 시민들이 밀려왔다. 대구을 개표부정에 항의하는 시민들이었다. 김용식은 “투표함을 내 생명처럼 지킬 테니 돌아가십시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법원만은 살아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대구을은 물론 갑과 병 선거구까지 모두 선거 무효와 당선 무효 판결이 내려졌다.

그해는 판사 임기(10년)가 끝나는 해였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법원장 5명에 대해 연임을 제청했지만, 이승만은 김용식과 문기선 전주지법원장을 비토했다. 문 법원장은 이철승 의원 선거법 위반 혐의에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 문제였다. 김용식에게 이승만이 할 수 있는 보복이란 고작 그것뿐이었다. “뒤가 깨끗하면 무엇이 두렵겠는가.” 그가 후배 법관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1960년 9월 장면 정부는 그를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에 임명했고, 이듬해 1월 국회는 재석 152명 중 143명의 찬성으로 그를 특별검찰부장에 선임했다. 3·15 부정선거와 4·19 당시 발포명령 관련자 처벌을 위한 특검이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는 가족은 물론 친인척까지도 찾아오지 못하도록 했다.

유일한 혈육인 딸 계순씨에겐 민원인들이 찾아들었다. 그중엔 전남여고 동기동창으로 자유당 정권에서 내무, 법무 장관을 역임했던 홍진기씨의 딸도 있었다. 홍씨는 ‘아버지에 대한 선처’를 부탁했다. 계순씨가 사정을 설명하고 돌아서자 등 뒤에서 ‘너네 집 권세가 평생 갈 줄 아느냐’는 말이 들렸다. 정치깡패 이정재도 계순씨에게 현금이 가득한 사과상자를 보냈지만 허사였다.

장면 정권은 그가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군의 부정선거 및 시민학살 책임에 대한 수사 때문이었다. “6천만 개의 눈과 귀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3·15 부정선거와 군의 발포명령 관련자에 대한 수사를 피할 수 없다.” 매그루더 주한 미8군사령관도 그와 따로 만나 회유했다. “한국에 꽃이 피거나 지는 것은 당신의 손에 달려 있다.”

5월16일 쿠데타가 발발했다. 군부는 20일 특검 수사관을 모두 트럭에 실어 마포 형무소에 가둬버리고 다음날 특검의 예산 낭비와 뇌물수수 의혹을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앞으로 특검의 방향을 묻는 군부의 물음에 ‘법대로 하겠다’고 한 그의 답변이었다. 혁검은 그해 9월 그를 불기소 처분했다.

김용식의 청렴과 소신은 가족에게 고통을 요구했다. 부인(이남춘)은 철기 이범석의 집안 누이동생이었다. 첫째를 병으로 잃은 부인은 둘째 아들마저 전쟁중 잃었다. 1953년 7월 전쟁이 끝날 무렵 의대생이던 아들에게 돌연 징집영장이 날아왔다. 남편이 손을 쓸 수 있었지만, 남편은 아들을 전선으로 내보냈다. 불과 일주일 후 아들은 한 줌 재로 돌아왔다. 처음엔 자살이라는 통지가 왔지만, 따지고 들자 ‘전사’로 바꿨다. 김용식은 현충원 안장도 포기하고 유골을 절에 안치했다. 부인은 통곡했다. ‘당신의 명예 때문에 아들을 그렇게 보낼 수 있느냐.’

1958년 12월 법복을 벗을 때 전셋집도 구할 수 없었다. 직원들이 모아준 전별금과 독지가의 도움으로 겨우 살림방이 딸린 전셋집을 얻을 수 있었다. 고등법원장, 고등검사장, 특검부장을 역임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한 이에겐 해원할 방법을 알려주고, 벌을 받아야 할 경우엔 이유를 설명한 뒤 돌려보냈다.

1963년 5월18일 아침 그는 자택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특검이 좌절되고 3년째 되던 무렵이었다. 머리맡에는 2홉들이 소주 1병과 유서 6통이 남아 있었다. 딸 계순씨, 가정부 손씨, 집주인, 채권자 등에게 남긴 것이었다. ‘죽은 아들과 부인의 유골을 내 무덤 옆에 묻어 달라.’ ‘많지 않지만 빚을 남기고 떠나 미안하다.’ ‘내 손목시계를 팔아 장례비에 써 달라.’ 그는 빚 21만원만 남겼다.

그는 특검부장 시절 이렇게 말했다.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죽음으로써 국민 앞에 사과하겠다.” “쿠데타를 당해 넘어지는 일이 있다 해도 4월 혁명 영령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할 뿐.” 자살을 이미 예고한 걸까?

죽어서도 머물 곳이 없었다. 처음엔 대구 성서공동묘지에 묻혔으나, 재개발 과정에서 분묘이장 공고도 없이 무덤은 파헤쳐지고 유골도 사라졌다. 지금의 대구 도양동 공원묘지 무덤은 외손주가 조성한 가묘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명재씨를 만난 날, 설악산 백담사에서는 동안거 해제 법회가 열렸다. 조실 오현 스님은 신흠의 한시 한 수를 들려줬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제 가락을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으며(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디 모습을 잃지 않고(月到千虧餘本質)/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꺾여도 새 가지를 낸다(柳經百別又新枝).” 한마음을 지키라는 당부였지만, 청초의 지조의 그늘이 오히려 쓸쓸했다. 지조를 탓해야 하나, 세태를 비웃을 건가. 대법관들도 권력에 붙어 부귀권세를 누리려는데….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