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는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 지금 독일에서는 나치 지휘체계의 최하층에서 복무했던 이들까지 단죄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의무병으로 일했던 95살 노인이 기소되고 경비병이었던 94살 노인이 법정에 섰다. 통신 업무를 담당했던 여성 친위대원도 지난해 91살의 나이로 기소됐다. 수감자들의 소지품 분류 등의 행정 업무를 했던 94살 노인은 지난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나는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에 불과했다”고 변명했지만, 재판부는 “그것이야말로 살인 방조”라고 판결했다.
종전 70년을 넘겨서도 진행되는 늙은 전범들의 재판은 우리에게 여러 차원의 질문을 던진다. 역사 정의를 향한 저 끈질기고 가차없는 노력에 견줘볼 때, <친일인명사전>을 학교 도서관에 보급하는 것조차 논란거리가 되는 우리 현실은 얼마나 비정상인가. 유신 독재의 긴급조치는 위헌임에도 그에 따라 직무를 수행한 공무원들의 행위는 불법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은 정당한가. 정부는 공직가치에서 민주성·도덕성·공익성을 빼고 애국심만 강조하려 하는데 그런 공무원은 ‘생각 없는 톱니’와 어떻게 다른가.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유레카】 늙은 전범들의 재판
등록 :2016-02-14 18:56
1941년 나치 특수부대가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서 유대인 수백명을 학살한 뒤 부모를 잃은 아이들까지 ‘제거’했다. 한 병사는 “아이들에게 이런 짓을 한다면 결국 적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자책했다. 그러나 이후 본격화한 유대인 대량학살 과정에서 이 병사처럼 고뇌하는 가해자는 거의 없었다. “내가 이렇게 무서운 짓을 하다니!”라는 양심의 가책은 오히려 “내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무서운 일들을 지켜봐야만 하다니!”라는 자기연민으로 대체됐다. 그들은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법과 명령에 따를 뿐이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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