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광’ 김대중에게 감옥은 대학이었고 이희호는 조력자이자 안내자였다. 1980~82년 2년 반 남짓 청주교도소 수감 시절 이희호는 무려 600권의 책을 구해서 들여보냈고, 김대중은 하루 10시간씩 읽어낸 지식과 소양을 훗날 대통령 시절 국가경영비전으로 활용했다. 옥중 필독서였던 <제3의 물결>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부부와는 각별한 교분을 나누기도 했다. 2000년 3월31일 청와대에서 주최한 ‘아펙 서울포럼’ 만찬에서 건배하고 있는 김대중·이희호·토플러. '한겨레' 자료사진
감옥의 김대중에게 면회와 편지 다음으로 위안을 준 것은 독서였다. 진주교도소 시절과 마찬가지로 김대중은 청주교도소의 격리 독방을 공부와 탐구의 공간으로 바꾸었다. 철학·신학·정치·경제·역사·문학 여러 방면의 책을 읽었다. 러셀의 <서양철학사>, 플라톤의 <국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찬찬히 읽고 라인홀드 니부어와 하비 콕스의 신학 서적을 꼼꼼히 읽었다. 김대중은 특히 러시아 작가들의 문학 작품을 좋아해서 푸시킨·레르몬토프·투르게네프·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의 소설을 읽었다. 동아시아 고전 <논어> <맹자> <사기>를 정독하고 원효와 율곡, 조선 후기 실학 관련 서적들을 파고들었다. “나는 남편처럼 그렇게 쉬지 않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남편에게는 감옥이 대학이었어요. 유신 시절을 포함해 감옥 생활 5년 반 동안 밖에서 활동할 때는 할 수 없었던 공부를 했지요.”
진주·청주 옥살이 때마다 ‘독서광’
김대중은 ‘넓게·깊이 읽기’ 원칙
이희호는 ‘조력자이자 안내자’ 구실
프랑스 신부 샤르댕의 신학서 등
서점가 순례 2년반동안 600권 ‘차입’
토플러 ‘제3의 물결’은 먼저 읽고 추천
“대통령시절 정보기술강국 안내서로”
1982년 12월 노신영 안기부장 ‘제안’
“미국 가겠다면 온가족 보내주겠다”
재야인사들 찬성에 남편 설득 나서
‘동지들 석방’ 약속에 동의한 김대중
“정치활동 않겠다” 비공개 조건 각서
12월16일 서울대병원 이감 발표
정권은 ‘신병치료 구걸’ 또 각서 공개
청주교도소 독방 시절 김대중은 평소 취미였던 화초 가꾸기로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사진은 90년대 후반 서울 동교동 자택 정원에서 화초를 돌보고 있는 김대중·이희호 부부.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넓게 읽기와 깊이 읽기를 독서의 원칙으로 삼았다. 1981년 6월23일 이희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대중은 이렇게 썼다. “당신은 내가 주위의 친구들에게 1) 신문을 정치면부터 문화·스포츠면까지 고루 읽고 2) 월간 종합잡지 한 권을 정독하며 3) 외국에 대한 기사를 섭취하여 세계적인 인식을 가지며 4) 고전문학을 널리 읽어서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영적 유산을 흡수하고 5) 그 기초 위에 자기의 전문분야에 더욱 관심을 가지라고 자주 충언하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결국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상식인이며, 위대한 생각은 완전한 상식 위에서만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희호는 감옥의 김대중이 공부하는 데 조력자이자 안내자 구실을 했다. 1981년 3월18일 쓴 편지에서 이희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무슨 책을 넣어드려야 할지요. 월 1회 면회에 월 1회 서신으로 당신의 의견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합니다.” 1981년 4월27일 편지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지난 3월 편지에 적어 보내신 책들 중 <일본의 현대사상>(마루야마 마사오)은 판금이 되어서 구하지 못했고, 분도출판사 것 두 권은 요전 편지에서 알린 바와 같이 품절이고, 그 외의 것은 다 준비되었는데 이것저것을 섞어서 차입하고 있어요. 너무 딱딱한 것만 같이 넣으면 읽는 데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과 학구적인 것을 같이 차입하고 있습니다.”
1982년 12월16일 5공화국 정권은 ‘김대중의 도미 치료를 위한 서울대병원 이감’ 사실을 발표했다. 보도지침 검열에 따라, 주요 제목과 이진희 문공부 장관의 사진까지 거의 똑같이 편집된 주요 일간지의 1면. '한겨레' 자료사진
육군교도소와 청주교도소 시절 2년6개월 동안 이희호가 김대중에게 보낸 책은 600권에 이르렀다. 김대중은 감옥에서 하루 10시간 넘게 책을 읽었다. 김대중의 1981년 4월22일 편지는 감옥 안에서 독서하는 방식을 알려준다. “책을 읽을 때마다 30쪽 정도씩 목표량을 정해서 읽어나가면 효과적이라는 것을 지난번(진주교도소 시절)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를 읽을 때 생각하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한 번에 서너 종의 책을 돌아가며 읽는 식이었다. 교도소에서는 처음엔 감방 안에 두는 책을 10권으로 제한했는데 몇 차례 요구한 끝에 30권까지 둘 수 있게 됐다. 김대중은 책을 읽으면서 외국어 공부도 병행했다. 1982년 3월22일 이희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오늘 차입한 책은 당신의 부탁대로 <신종합세계지도>, <불란서어 4주간>, <신불어소사전>입니다. 불어는 나도 전에 두 학기 배운 일이 있으나 발음이 특이하고 모든 것이 남성·여성의 성별이 있어 그것을 구별해 알기에 무척 복잡합니다. 오늘 차입한 책들은 독학하기에 좋다 합니다.”
1982년 12월16일 5공화국 정권은 ‘김대중의 도미 치료를 위한 서울대병원 이감’ 사실을 발표했다. 보도지침 검열에 따라, 주요 제목과 이진희 문공부 장관의 사진까지 거의 똑같이 편집된 주요 일간지의 1면. '한겨레' 자료사진
이희호는 남편에게 보낼 책을 구하려고 신문을 읽고 서점에 다니고 아는 사람들을 찾았다. “내가 주로 다닌 서점은 종로서적과 신촌의 홍익서점이었어요. 번역본이 없으면 일본어 책이나 영어 책을 구했어요. 신문의 출판면을 자세히 살피기도 했고요.” 이희호는 서점에서 모르는 사람이 건네는 뜻밖의 호의를 받기도 했다. “한번은 종로서적에서 책을 한 보따리 사고 계산하려는데 50대쯤으로 보이는 손님 한분이 책값을 지불해주었어요. 처음에는 사양했는데 거듭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해서 고맙게 받아들였지요.”
김대중은 청주교도소에서 <역사의 연구> 전질(14권)을 포함해 토인비의 저서들을 다시 읽었다. 1981년 7월29일의 편지는 그 책에서 받은 감동을 이렇게 전했다.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관계에서 파악한 역사철학이 나에게 많은 깨우침과 신념을 주었습니다. 나는 그의 저서를 거의 다 읽었는데 그의 역사 파악의 기본 시점은 도전과 응전으로 문명의 발생·성장·쇠퇴·붕괴가 결정되어가는 거대한 드라마라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 슬기로운 응전은 반드시 능동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사태에 따라서는 인내가 최대의 효과적인 응전이 됩니다. 역사상 최대로 성공한 정치인은 중국의 한고조(유방)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라 하는데 그 두 사람에게 공통된 특징은 초인적인 인내심과 끈기라고 합니다.”
이날 공개된 김대중의 자필 탄원서. 노신영 안기부장이 이희호에게 약속했던 비공개 조건을 또다시 어긴 정권의 술수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감옥 안에서 김대중은 프랑스 신부 테야르 드 샤르댕의 신학도 만났다. 샤르댕은 베이징원인을 발굴한 고생물학자이자 예수회 소속 신학자였는데, 우주와 생명의 진화론에 기반을 둔 신학을 제시했다.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생명의 출현과 인간의 정신적 완성까지 장대한 역사를 신학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샤르댕의 신학은 김대중이 신앙의 문제로 번민과 회의를 거듭할 때 중심을 잡게 해주었다. 김대중은 샤르댕의 신학을 공부하고 깨달은 바를 자서전에서 이렇게 요약했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한 것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세상을 만드셨다. 그리하여 이 세상은 지금 완성을 향한 역사의 과정에 있다. 이 때문에 이 세상에는 완성 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찰 현상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질병이요, 인간의 범죄요, 사회적 불의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그 역사에 동참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불의한 세상을 의롭고 완전한 세상으로 만드는 신의 사업에 인간이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는 샤르댕의 신학은 김대중의 신앙에 새로운 불빛을 던져 주었다.
이희호는 남편이 원하던 샤르댕의 책들을 찾을 길이 없어 서점과 성당을 순례하다시피 했다. “샤르댕 신부의 저서를 구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서점마다 다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는데, 결국 서교성당 수녀님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 수녀님을 우연히 만났는데 샤르댕 신부의 책을 찾고 있다고 하니까 그분이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구해다 주었지요.”
이희호가 먼저 읽고 도움이 될 것 같아 감옥의 남편에게 보낸 책도 적지 않았다. 그런 책들 중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은 김대중의 생각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토플러의 책은 농경사회와 산업사회에 이어 지식정보사회의 물결이 다가온다고 예고했다. “그 책을 읽고 남편은 교육에 대한 열정이 크고 자질이 우수한 우리 민족에게 맞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계시처럼 받았다고 해요. 남편이 대통령이 됐을 때 토플러의 책이 우리나라를 정보기술 강국으로 만드는 데 안내서가 되었지요.” 후에 김대중과 이희호는 토플러를 여러 차례 만났다. “청와대에 있을 때도 만났고, 퇴임 뒤 동교동 집에서도 만났어요. 토플러는 언제나 부인 하이디 토플러와 함께 왔는데, 그 부인이 아는 것이 많았어요. 책도 부인과 함께 썼다고 해요.”
꽃 가꾸기는 김대중이 독방의 외로움을 이겨나가는 데 도움을 주었다. 너비 2m, 길이 30m 정도 되는 화단에 피튜니아·어제일리어·민들레·데이지·샐비어 같은 꽃들을 심고 운동 시간마다 나가 돌봐주었다. 정성을 들여 가꾸어주면 꽃은 오래갔다. 김대중은 편지에서 꽃에 대해 자주 썼다. “운동하러 뜰에 나가면 국화가 한창인데 전부 노란색입니다. 내가 돌봐준 화단의 꽃들은 열심히 길러준 보람이 있어서 피기도 훨씬 싱그러웠지만 견디는 것도 다른 데 비해서 거의 한 달을 더 견뎌주어서 대견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1981년 10월28일 편지) 김대중은 늦가을 꽃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화단에 나가보니 국화를 빼놓고는 모조리 결딴이 나버려서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피튜니아, 천일홍, 접시꽃, 황색 코스모스, 바스라기, 맨드라미, 샐비어 등 정성을 다해서 가꾸어 다른 화단의 꽃보다 1개월 이상이나 더 유지시켰는데 하루아침에 모진 서리로 끝나고 말았습니다.”(1982년 11월2일) 김대중은 화단의 어제일리어 한 포기를 파서 감방으로 들여와 화분에 심었다. 오후에 볕이 들면 볕을 따라 옮겨가며 햇볕을 쬐어주었다. 어제일리어는 초겨울 감방 안에서 햇볕을 쬐더니 꽃망울이 생겨나 커졌다. 12월 어느 날 김대중이 옮겨 심은 어제일리어는 꽃망울을 터뜨렸다. 김대중은 기뻐서 교도관에게 보여주었다.
12월 중순 안기부 간부 한 사람이 이희호에게 연락을 해 왔다. 이희호는 안기부 간부를 서울 플라자호텔 21층에서 만났다. “그 층 전체가 정권이 세낸 ‘안가’라는 사실을 그땐 몰랐어요. 찾아갔더니 노신영 안기부장이 만나자고 한다며 나를 체부동 관사로 안내했어요.” 이희호를 만난 노신영이 한 말을 간추리면 이러했다. “내가 재임하는 중에 ‘김대중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2~3년 미국에서 병 치료를 하도록 권해보라. 응답을 알려주면 대통령 각하에게 건의해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하겠다. 단 내 개인 생각이니 비밀로 해 달라. 실현될지는 아직 모른다.”
감옥 안에서 김대중은 1971년 교통사고로 다친 고관절 때문에 괴로움을 겪었다. 통증이 심해져 다리가 붓고 쥐가 자주 났다. 스트레스로 인한 이명 증세도 계속됐다. “노신영 부장 말을 듣고 혼자 결정하기 어려워 여러 재야인사들과 의논했어요. 그 다음날 조남기 목사가 시무하는 청담교회에서 홍성우 변호사의 장로 장립식이 열렸어요. 거기에 참석해 먼저 출소한 안병무 박사와 예춘호 선생을 만났어요. 독일문화원에서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도 만나 자문을 구했지요. 건강을 찾는 게 우선이니 각서를 써달라고 하면 써주고 미국으로 떠나는 게 좋겠다고들 했지요.” 재야인사들은 ‘국외에서 투쟁할 사람으로는 김대중이 적격자’라는 말도 했다.
이희호는 재야인사들의 조언을 듣고 청주로 향했다. 안기부 간부가 먼저 청주에 내려가 특별면회를 주선해 놓았다. 이희호는 면회실에서 입회인 없이 김대중과 책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김대중은 정권의 제안을 완강하게 거절했다. “미국에 가고 싶지도 않고 갈 필요도 없다. 억울하게 같이 구속된 동지들이 아직 감옥에 있는데 어떻게 나만 미국으로 떠날 수 있는가. 또 가족과 함께 2~3년간 생활하면서 다리 수술까지 하려면 그 비용을 무슨 수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희호는 다른 재야인사들도 미국행에 찬성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동안 설득을 계속했으나 김대중이 받아들이지 않자 하는 수 없이 마음을 접었다. “내가 면회실을 나오자 안기부 간부가 어디론가 연락을 하더니 자기와 함께 한 번 더 남편을 만나보자고 했어요.”
이희호는 오후 2시에 다시 김대중을 면회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김대중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희호는 “미국에서 서예전이라도 열면 우리를 도와줄 분들이 있을 것이니 생활비나 수술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남편을 설득했다. 안기부 간부도 김대중이 미국으로 떠나야 다른 사람들이 석방될 수 있다고 거들었다. 마지못해 김대중은 이희호의 뜻을 받아들였다. “남편이 미국행에 동의하자 안기부 간부가 종이를 한 장 내놓으면서 ‘병 치료에만 전념하고 정치활동은 하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각서를 써달라고 했어요. 대통령에게 건의하려면 각서가 필요하다고 하면서요.” 김대중은 각서를 쓸 수 없다고 했다. “정치활동은 정치활동금지법에 묶여 할 수도 없고, 미국에 가더라도 우리나라 인권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희호는 남편 대신 자신이 각서를 쓰겠다는 제안을 했다. 안기부 간부는 김대중의 자필 각서를 고집했다. “내가 한 번 더 간곡하게 설득하자 남편이 마지못해 각서를 썼어요.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될 때도 저쪽에서 탄원서를 써달라고 해서 써줬다가 기만당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은 각서를 쓰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이희호는 각서를 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집에 가져와서 홍일이에게 보여주었더니 ‘다른 구속자 석방 요구가 빠졌다’고 지적했어요. 출국하기 전에 다른 구속자들을 모두 풀어달라는 요구를, 각서를 쓰기 직전까지도 했는데 정작 쓸 때는 깜빡 잊어버린 거예요. 홍일이는 속이 상한 나머지 저녁도 먹지 않았어요.”
다음날 이희호는 노신영을 만나 각서를 다시 써야겠다며 남편 면회를 부탁했다. 노신영은 “이 서류는 대통령께 건의하는 데 필요한 것이지 어디에 발표할 것이 아니니 그런 문제라면 조금도 염려하지 마시라”고 자신의 인격을 걸고 말했다. 이희호는 노신영의 말을 믿고 각서를 건네주었다. 김대중은 12월16일 청주교도소에서 나와 서울대병원으로 이감됐다. 그날 문공부 장관 이진희가 기자회견을 열어 각서를 공개하고 김대중이 신병 치료를 구걸한 것처럼 발표했다. “그 사람들이 또다시 약속을 어긴 거였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을 흠집 내려고 온갖 술책을 썼어요.” 서울대병원에서 신문을 본 김대중은 전두환 정권의 계속된 이중플레이에 화가 나 여권 수속을 중단하라고 했다. 이희호는 “어차피 떠나기로 했으니 뒷일은 하느님에게 맡기자”고 남편을 달랬다. 정부는 김대중이 출국하면 다음날로 ‘김대중 사건’ 관련 구속자들을 모두 석방하겠다고 발표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