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강주원 경남대 객원연구위원 제공
[토요판] 커버스토리 / 경제제재 이후 단둥을 가다
대북 경제제재 이후 현장 르포- 제1회
조선족 사업가와 북한 사람들과의 만남 사진 강주원 경남대 객원연구위원 제공
대북 경제제재 이후 현장 르포- 제1회
조선족 사업가와 북한 사람들과의 만남 사진 강주원 경남대 객원연구위원 제공
지난 9일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한 옷공장에는 전날 회식 자리에서 맥주잔을 부딪친 북한 여성 세 명이 미싱대에서 옷을 박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눈빛과 웃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이날 낮 12시, 북한 노동자들이 점심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텅 빈 공장 미싱대에 앉았다. 대북제재의 다음 대상은 북한의 해외노동자다. 미국은 북한 해외노동자 파견 등을 가로막는 내용의 대북제재 행정명령을 지난 16일 발표했다. 옷공장에서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은 약 2000위안(약 35만8000원)이다. 월급의 3분의 1가량이 노동자에게, 3분의 2는 북한 정부와 인력 송출 회사로 들어간다. 세계는 이들을 북한의 외화벌이 수단, 인권 탄압의 대상으로 본다. 공장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고, 하루에 열두 시간 노동하고, 적은 월급을 받는다. 북한을 떠나 처음 이 옷공장에 왔을 때 여성 노동자들은 큰 국그릇 기준으로 한 끼에 쌀밥을 두 그릇 먹었다. 한두 달 뒤 영양상태가 좋아지면서 식사량을 줄였다. 한국의 동남아시아 출신 노동자들이 그러하듯 이들도 중국에서 악덕 사장을 만나기도, 좋은 사장을 만나기도 한다. 때로 선이 악을, 악이 선을 낳는 현실에서 북한 노동자들을 향한 세계의 인권 잣대는 이들을 위한 것일까. 우리말을 공유하는 단둥의 네 인류를 연구한 강주원 박사와 동행했다.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둔 단둥에서 8박9일을 지냈다.
▶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신의주와 마주한 중국 랴오닝성 단둥. 이곳에 북한 사람, 한국 사람, 조선족, 북한 화교가 실타래처럼 얽혀 경제교류와 삶을 영위합니다. 10년 넘게 그들의 삶을 연구하고 체험한 인류학자 강주원(43) 경남대 객원연구위원과 함께 단둥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단둥은 유엔의 대북제재결의안 이후 ‘얼어붙은 도시’로 보도됐습니다. 텔레비전 너머 현실로 걸어들어갔습니다. 이방인 기자와, 현지인이나 다름없는 연구자의 동행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누가 더 돈을 많이 버느냐에 따라서 좌우가 될 뿐이야. 돈이 힘이라는 거죠. 아무리 남녀평등 어쩌고 해도 누가 돈이 많으냐에 따라서 말이죠. 돈이 힘이라는 거죠.”
“세상은 돈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죠.”
“그럼 실례를 말씀해주세요. 현실을 말씀해주세요.”
“현실은 그렇지만….”
“(당신이 얘기하는) 그건 미래고 현실은요?”
그는 재차 나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현실은 돈이 중심이겠죠….”
‘아침이슬’과 ‘사랑의 미로’
나는 계속된 질문에 말끝을 흐렸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어느 일식집에 마주한 그는 상에 오른 아사히 맥주를 들이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 서른세해를 보낸 나는, 세상은 돈으로 돌아간다는 상대에게 반박하지 못했다. ‘돈이 힘’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십년 이상 살아온 북한 사람이다. 10년 넘게 출장으로 중국을 드나들었고, 지금은 북한 회사의 해외 주재원이다. 미국 글로벌 브랜드 토미힐피거 남방을 입은 그는 삼성 스마트폰을 썼다. 중국인 직원들을 데리고 있고, 직원들의 임금이 한달 2만위안(350여만원) 이상이라고 했다. 최근에 회사가 수입한 물품이 50만달러 이상이라며, 중국 바이어가 ‘잘 부탁한다’고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여줬다. 그는 말꼬리를 흐린 나의 답에 말을 이었다.
“그렇죠? 현실은 가혹하군요. 하하. 나는 남쪽 분들을 만날 때마다 돈이 얼마나 주머니에 많겠나, 박유리 기자도 만났을 때 지위가 어느 정도인가, 나하고 만날 정도인가, 돈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는 거죠.”
그의 말은 가끔 모순되었다. 돈이 힘이라고 했지만, 또 배불리 먹는 게 삶의 기준은 아니라고 했다.
“왜 북쪽을 거지라고 생각합니까? 못사는 주제에 핵 만드는데, 배나 불리지 하면서. 사람 사는 것이 내가 배불리 먹느냐 못 먹느냐로 따진다면, 남쪽의 ‘원영이 사건’ 말이에요. 가(그 아이)는 배부른 걸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가난하고 못 먹어 그리됐습니까? 천대를 받고 보호를 못 받은 거란 말입니다. 원영이는 얼마나 불쌍합니까? 남쪽 사람들은 자기들의 사회, 처지는 모르고 배불리 못 먹는 거지라고 (북쪽을 판단하고). 2000년까지는 온 나라가 먹을 게 없었단 말입니다. 이건 거지가 아니고 집단의 한 현상이란 말입니다. 이걸 북쪽은 빤스도 안 입고 젖가슴도 안 가리고 이렇게 아는 겁니다.”
당신들의 자본주의 사회가 더 배불리 먹을진 몰라도, 건강하진 않다는 주장이었다. 아내와 동석한 그는 일식집에서 1차 술자리가 끝난 뒤 노래방에서 양희은의 ‘아침이슬’과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를 불렀다. 그가 물었다. “‘아침이슬’은 아직 금지곡입니까?” 매일 한국 언론을 검색하고, 1980년대 부랑인이라고 불리는 자들의 인권을 유린한 한국의 ‘형제복지원’ 사건까지 아는 그가 ‘아침이슬’ 금지곡 해제가 언제 적 일인지 모를 리 없었다. ‘당신들의 사회’에 대한 뼈 있는 농담이었다.
이런 질문도 던졌다. “(한국) 드라마에선 왜 여성이 남성의 뺨을 때립니까? 현실은 안 그렇지요?” 지난 14일 밤, 노래방에서 주재원 부부와 헤어졌다. 그의 아내가 택시를 타기 전 악수를 청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부부와 헤어져 중조우의교가 보이는 강변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강변의 호텔 방문을 열었다. 호텔 창문 밖으로 어둠 가운데 단둥 시내와 압록강이 보인다. 이 강 건너편은 북한 신의주다. 단둥에 온 지 7일째. 한반도 밖에서, 남쪽과 북쪽 사람이 만나 아침마다 운동을 하고 국경이 허물어지는 도시가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허구보다, 영화보다 상상력을 뛰어넘는 도시, 단둥의 밤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뒤
베이징보다 더 주목받는 단둥
폭풍 전야에 경제적 타격 크다는
언론보도 너머엔 뭐가 있을까
그 현장에 8박9일간 뛰어들었다 남북경제협력 금지한 2010년의
5·24 조치 뒤에도 남북교역은
중국을 우회해 계속되고 있다
북한과 중국 교역도 나날이 증가
북한의 대중 무역의존도도 심화 북한의 해외 주재원들, 북한식 시장화 ‘아침이슬’을 부른 그는 북한의 국영기업 해외 주재원이다. 단둥에는 북한 주재원이 수백명 상주한다. 대다수 김일성종합대학, 국제관계대학(조선노동당 소속으로 외교관 등 대외부문 간부 양성 학교) 출신의 엘리트다. 여기선 회사의 ‘대표’로 불린다. 그는 단둥 주재원 인원을 확인해주지 않았다. 단둥 주재원이 1000명까진 안 된다고 했고, 중국 동북3성에 3000명 안팎이라는 정도만 말했다. 지난해 북한은 주재원들에게 업무상 남쪽 사람을 편하게 만나도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 단둥에 거주하는 한인 대북사업가들과 원래부터 만나는 사이였지만, 공식 지침으로도 길을 터준 것이다. 8박9일간의 단둥 출장 가운데 만난 한국인 대북사업가 C씨(60대·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나이와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북한 무역대표들을 여럿 알고 지낸다. 18년간 대북사업을 한 C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 주재원들끼리 단둥에서 서로 잘 만나지 않아. 견제 대상이지. 상호간의 감시체계가 있어. 차라리 남쪽 사람인 우리를 편하게 대해. 조선족, 북한 화교도 북한과 연결돼 있는데 우리한테 한 이야긴 저쪽으로 안 들어가니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북한식 자유시장 체제가 활발해진다는 신호는 이곳 단둥에서도 보인다. “북한 회사는 대부분 국영 성격을 띠지. 북쪽은 모든 단위, 군대는 군대, 당이면 당, 모든 기관에 부속 회사가 있어. 그게 회사야. 인민무력부 산하, 사단 단위의 회사. 기관별로 회사 만들어서 아이템을 장사해. 단위별로 자력갱생이야. 중앙에서 지원도 받겠지만 어느 정도는 충족을 해야 해. 그리고 나라에 얼마를 바쳐야 하고. 회사가 많진 않았는데 요즘은 회사 설립이 굉장히 자유로워지고 간단해졌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체제 들어서. 사업 아이템은 나라에서 정해줘.”(대북사업가 C씨) 북한은 2009년 11월 화폐 개혁을 단행하면서 장마당(종합시장)을 폐쇄했다. 그러나 물가 폭등 등 부작용이 지속되자 2010년 5월 시장 억제 정책을 철회하고 2015년 12월까지 관용을 유지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의 커티스 멜빈 연구원에 따르면 위성사진 분석 결과 북한에서 운영하는, 정부 책임 아래 주민이 자릿세 내고 장사하는 공식 시장이 2015년 10월 기준 406개다. 2010년 200여개에서 5년 만에 두 배로 뛴 것이다.(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2015년 북한시장화 동향과 향후 전망’) 북한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단둥은 북한을 보는 창이면서, ‘무역’이라는 매개체로 북한과 중국, 한국과 북한이 교류하는 도시다. “1990년대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었던 북한 경제는 2000년대에 들어 제한적인 회복세에 들어갔다. 2013년 현재 북한의 기업구조는 우리가 파악하였던 1990년대에 비해 크게 달라졌을 것이지만 구체적 분석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이석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00년대 북한 기업의 실태 및 산업 동향: 북한 공식 매체 분석을 중심으로’) 그러나 점점 변화하는 북한식 시장경제, 북한 기업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비공개 체결한 국경조약 등을 보면 북한과 중국은 압록강을 공동 관리, 사용한다. 압록강을 공유하는 신의주와 단둥은 1980년대부터 교류를 이어갔다. 여기에 한국 대북사업가들이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 전후로 단둥에 뛰어들었다. 2010년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역을 금지한 5·24 조치 이후에도 제3국인 중국을 경유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북한산 제품이 한국으로, 한국의 물건이 북한으로 들어간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3월3일(한국시각) 5번째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를 채택한 뒤, 단둥은 수도 베이징보다 주목받는 도시가 됐다. ‘폭풍 전야, 경제적 타격 받은 접경, 싸늘한 분위기, 팽팽한 긴장감, 찌푸린 얼굴의 무역상, 주민 생계 불안, 급격히 얼어붙은 북중관계’. 한국의 안방에 전해지는 보도는 이러했다. 손님 없는 단둥의 북한 식당, 압록강 유람선, 사람 없는 세관, 차 없는 압록강철교 사진과 동영상이 그 증거였다. 텔레비전과 신문 너머의 현실은 무엇일까. 유엔이 대북제재를 하면 무역 교두보인 단둥은 즉각 얼어붙을까, 대북제재의 경제적 효과는 있을까, 북한의 무역주재원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활동을 할까, 국경을 뛰어넘어 단둥에서 이십여년을 교류해온 한국인, 조선족, 북한 화교, 북한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결일까. 압록강을 건너면 닿을 북한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와 수준의 폐쇄적 사회일까. 질문을 품고 단둥으로 떠났다. 이미 정해진 답에 현실을 틀에 맞추는 게 아닌, 진짜 단둥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내 곁에는 십여년간 단둥을 오가며 우리말을 쓰는 네 종류의 인류와 이들의 경제협력을 연구한 인류학자 강주원(43) 박사가 있었다.
조선족 K의 대북무역사무실
한국 정부가 대북 독자 제재안을 발표한 지난 8일 오후 4시30분 중국 랴오닝성 단둥역에 도착했다. 같은 시간, 평양에서 도착한 국제열차가 다른 선로에 쉬고 있었다. 아침에 평양에서 출발해 200㎞를 달리면 노을이 지기 전에 단둥에 도착하는 기차 창문은 흰 커튼이 드리워지거나, 거리가 멀어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이날 한국 정부는 북한 금융제재 대상 확대, 북한 관련 해운 통제 강화, 북한 관련 수출입 통제 강화, 북한 식당 등 영리시설 이용 자제 계도를 발표했다.
육중한 기차 굉음,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언어 속에서, 밀물처럼 빠져나가는 중국인들에 섞여 단둥역 개찰구로 향하는 지하도를 걸어 내려갔다. 중조(중국-북한) 박람회를 알리는 우리말 광고 간판이 보인다. 이 간판을 읽고 스쳐가는 자들의 국적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한국, 북한, 중국 국적의 조선족, 중국 국적이지만 사회적 혜택을 담보하는 호구(일종의 주민증)가 없는 북한 화교.
단둥역 앞에 연변 출신의 조선족 대북사업가 K씨(50대)가 우리를 기다렸다. “왔냐?” 8박9일의 일정 가운데 며칠은 K씨의 대북무역 사무실과 K씨 친구의 공장을 기웃거리기로 했다. K씨는 강 박사의 키인포먼트(정보제공자)다. K씨의 차를 타고 대북무역 사무실을 향하면서 강 박사가 말했다. “단둥은 양파 같은 도시지요. 까도 까도 다른 결이 보여요.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아요.” K씨의 사무실엔 두 나라의 시간이 걸려 있다. 북한과 한국의 달력이다. 중국과 한국 시차는 1시간이다. 북한은 중국·한국과 각각 30분의 시차가 난다. K씨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K: 오늘 평양에서 물건 다 들어왔네, 아휴.
강주원: 한국 신문엔 뭐 물건 안 들어온다면서요?
K: 뭐가 안 들어와? 다 들어오는데. 민감한 시기인데. 대한민국에서, 국정원이 단둥 조사해서, (제3국 우회해서 북한산 제품을 납품받은) 한국 원청 치려고 해. 국정원도, 시아이에이(CIA·미국 중앙정보국)도 한번 칠 것 같아. 국정원이 평양 업체 다 알잖아. 원산지 보려고.
강 박사는 한국에서 사온, 질병을 낫게 하는 요리책을 K씨에게 건넸다. 난치병에 걸린 북한 관료가 K씨를 통해 사달라고 한 책이다. K씨의 사무실 벽 한켠엔 책이 가득 꽂혀 있다. 책장이 누군가의 생각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그의 책들은 이념의 저 끝에서 이 끝으로 달렸다. <대통령의 시간>(이명박 전 대통령 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법규집 대외경제부문>, <부자 중국 가난한 중국인>, <문재인의 운명>, <안철수의 생각>….
“전문적으로 와서 책 빌려가는 (북한) 사람이 있어. 책 목록을 계속 적어줘.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나온 <포스트 김정일> 그거 달래서 한달 읽어보고 가져온 동무도 있고.” K씨가 말했다. 그의 책장에서 책을 빌려가는 사람은 북한 주재원 등이다. “단둥에 나온 북한 사람들 보면 한국 제품 좋아해. 특히 드라마는 한류의 첫 시작이고 접하기 쉽고. 우선 말이 통하잖아. 우리 사무실에 오는 (북한 사람) ○○○는 어제 방영한 한국 드라마를 오늘 인터넷으로 본다니까.”
유엔 제재의 경제적 효력
북한과 중국, 두 나라 교역은 나날이 증가 추세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의 <북한 대외무역 동향 통계자료>를 보면 북한의 무역 의존도는 중국 쪽으로 급하게 기운다. 2004년 48.5%에서 2009년 79%, 2011년 89%로 급증했다. 2012년, 북한의 전체 대외 무역액 가운데 88%(68억달러)가 중국이다. 북한의 무역회사가 은행을 배제하고 현물 거래, 현금, 밀무역 등 다양한 방법으로 거래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 세관의 공식 통계보다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된다. 통계상의 무역액이 클지, 비공식 무역 규모가 더 클지도 가늠하기 어렵다. 북한이 원조만 받는 국가라는 편견은 수입, 수출 통계에서 깨진다. 지난해 북한의 대중국 수출액은 22억7900만달러(46.4%), 수입액은 26억3000만달러(53.6%)다.
단둥은 교역의 전진기지다. 북중관계에 정통한 외교부 당국자는 “중-북 전체 교역량 60% 이상이 지리적으로 근접한 동북3성에서, 이 가운데 70% 이상이 단둥에서 이뤄진다”고 말했다.
K씨는 말했다. “사무실에 단둥 회사 목록을 보면 5800여개가 있어. 딱 훑어보면 북과 관련된 기업이 반수 이상이야. 3000개라고 하면 한 회사 인원이 3~8명이야. 그럼 2만명이 걸려. 이 사람들이 물자 하나 수입한다고 하면 원청에 걸리는 사람, 물류, 통관… 무역 과정이 이렇게 여섯, 일곱 단계를 거쳐. 이 단계에 걸리는 인원에다 신의주 관광까지 더하면, 30만 인구 단둥의 반은 저길 쳐다보고 먹고사는 거야. 저기 북쪽도 단둥 쳐다보는 거고.”
2012년 이후 매년 18만명 넘는 북한 사람이 중국을 방문한다. 불법 체류 노동자 등은 집계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단둥에선 탈북자 아닌, 북한 사람을 쉽게 마주한다. 한국인이 많지 않은 비즈니스호텔의 조식을 먹는 식당에서, 엘리베이터에서, 1층 프런트에서. 북한 사람들이 북적였다. 강 박사와 나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대신 눌러주고, 바닥에 떨어진 짐을 들어주고(기차역을 가도 북한 사람들은 정말 짐이 많다), 날씨 얘기를 했다.
두 나라 교역은 핵실험과 유엔·한국의 제재에 따라 얼어붙을까. 언론이 보도하듯이 말이다. “여기 단둥은 북한 의존도가 당연 심하지. 이제껏 단둥 시장이 다 친북이었어. 북한이랑 친하지. 한국의 주요 인사가 단둥 방문해도 북한 눈치 봐서 홀대한다고. 그런데 지난해인가 시장하고 서기(시장보다 중앙당에서 파견한 당 서기가 급이 더 높다) 둘 다 친한(친한국)적인 인물이 되었어. 시진핑 들어서 한중이 좋아졌고 시진핑의 인맥들이 지방까지 파급되었으니까. 그래서 작년에 영사관하고 단둥 시정부하고 한중 우호의 밤 행사를 처음 했어. 다른 동북3성은 예전부터 다 했는데.”(한국인 대북사업가 L씨)
북중 무역 통계를 보면 유엔 제재와 상관관계가 적다. 2013년 한국개발연구원 이석 연구원의 ‘북중 무역의 결정 요인: 무역통계와 서베이 데이터의 분석’ 보고서를 보면, 유엔 제재는 북한의 대중 수출보다 수입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효과는 제재 이후 1, 2분기에 한해 매우 일시적이었다. 2013년 북한의 3차 핵실험으로 유엔 안보리 결의 2094호가 채택됐지만 이때도 북중 무역액 자체 최고치를 달성했다. 한국과의 관계가 우호적인 시진핑 주석이 4차 핵실험에는 단호히 북한을 제재할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도 우세하다. 이종규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의 대외무역: 2015년 평가 및 2016년 전망’에서 “유엔 안보리 결의가 추진되고 있으나 중국 경제가 바오치, 즉 7% 성장률도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동북3성 중심으로 한 지역 경기 위축은 정부에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전망했다.
횟집에 앉아 아사히맥주 들이켜며
“돈이 힘”이라 말하는 북한주재원
미국 남방 입고 삼성 스마트폰 쓴다
40년 이상 북한에서 살아온 그는
북한을 거지로 보지 말라며 웃었다 고기 굽는 북한 여성노동자들과
합석하고 어색한 술잔 부딪쳤다
다음날 그들의 공장으로 갔다
미싱대 앞에서 눈빛을 나눴다
그리고 점심시간, 모두가 떠났다 북한 노동자 300명을 고용한
조선족 L씨의 혀가 꼬여갔다
“우리 애들이 중국서 첫달치
월급 탔을 때 뭘 사는지 알아?
70%가 인형을 사, 곰·개 인형” 남·북·중국, 3국의 회식 단둥에 도착한 첫날은 ‘국제3·8부녀절’이다. 중국, 북한은 여성을 위한 공휴일을 두고 있다. 조선족 K 사장은 무역 사무실, K의 친구는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옷공장을 운영한다. K의 친구는 북한안전대표(노동자 대표)와 여직원 3명을 바깥으로 불러 고기 회식을 했다. 나와 강 박사는 다른 식당에 들렀다가 자리가 없어 그들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다른 수산물 공장의 조선족 L 사장도 있었다. 패딩 점퍼에 바지를 입은 북한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 대표는 다른 테이블에서 각자 고기를 구워 먹다 합석을 하게 됐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노동자들은 술을 잘 못 마셨다. 이 테이블에서 술잔을 홀짝이는 사람은 나를 비롯한 여성 4명뿐이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들은 눈빛으로도 뭔가 통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사장에게서 술잔을 받고선 이를 어쩌나 하는 눈짓을 내게 보냈다. ‘받기만 하고 마시지 않아도 돼’라며 고개를 살짝 저어주었다. 노동자들은 말수가 없다. 간간이 미소를 지었다. 표정은 밝아 보였다. 북한 노동자들은 지난해부터 외출할 수 없다. 북한 영사부에서 사장들에게 외출을 금지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수산물 공장의 사장 L씨는 나와 강 박사를 북한 노동자에게 ‘연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L 사장도 나를 강 박사의 후배 연구자로 알았을 뿐 신분을 몰랐다. 단둥에서 보낸 지난 8~16일 나는 여러 사람이었다. 어떤 자리에선 예비 인류학 연구자, 출신 학교도 아닌 서울의 한 대학교 후배였다. 어떤 자리에선 야, 너로 불렸다. 깊숙이 북한과 관련되거나 10여년 일한 사람은 철저히 그림자여야 한다. ‘숨은 존재’여야 대방(무역 상대를 일컫는 말. 북한 쪽 파트너)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대북사업가들은 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만 한다. 그래서 8박9일간 직함이 아닌 이름, ‘유리’로 지냈다. 국제부녀절이라며,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맥주 원샷’을 권했다. 식사를 마친 네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L 사장이 북한 여성들에게 말했다. “이 언니하고 악수해야지?” 세 여자, 세명의 노동자, 세명의 북한 여동생 손을 잡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눈웃음을 나누었다. L 사장은 점점 취해갔다. 수산업을 하는 L씨는 북한 노동자 300여명을 고용했다. “우리 공장에 시집갈 나이 된 애들, 스물셋, 스물다섯, 조국 가면 시집갈 아이들 있는데. 어떨 때 보면 마음이 좀 그래요. 우리 애들이 중국에서 첫달 월급 탔을 때 산 게 뭔지 알아요? 우리 회사 70%가 인형을 사. 하하하 곰, 개 인형.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 ‘왜 이거 사니?’ 하니까 (인형) 안고 자고 싶대. 한 육개월, 일년 되니까 시집가서 쓸 거 사더라고.” L 사장은 술이 점점 들어가면서 말이 꼬였다. “나는 진짜… 우리는 민족으로서… 저들(북한 노동자)도 알아. 나는 정치 이런 거 상관없어. 진짜 묘한 관계야, 여기가. 오늘 진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저들 악수 안 해. 내가 연변에서 왔다 했을 때 ‘니가 알아서 모른 척해라’ 한 거야. 적 아니고 한민족으로서 한잔하자는 의미야. 우리는 진짜 민족의 단결을, 통일을 위해… 그런데 우리는 메인이 아냐. 우리 중국놈은 나라가 없어. 조국이 없어. 조선족은 북한 가면 재외 동포, 저기(한국) 가면 해외 동포. 불쌍한 사람이야. 당신들이 한국에서 왔다, 남조선에서 왔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겠노. 눈물 나잖아. (국적을) 말하면 현재로서는 갈라져야 해.” L 사장은 계속 중얼거렸다. “사상이 있잖아. 나 그거 싫단 얘기야. 나 직원들 데리고 있는데 친해. 내 돈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래도 애들 나 존중해. 한달에 돼지 두마리 잡고. 하루이틀 원없이 먹게. ‘먹고 싶어?’ 다 해줘. 내 마음이야. 그런데 남북이 내 마음을 몰라.” L의 말은 취해가면서 때로 자조로 흘렀다. “나는 중국놈인데. 나는 상관없어. 나는 돈만 벌면 돼. 나는 신경쓰기 싫다니까… 좀 그래.” L의 공장에는 중국, 북한 노동자가 함께 일한다. 그래서 라인이 두개다. 북한 노동자들이 만든 제품은 한국 회사로 납품할 수 없다. 북한 노동자가 만든 제품은 유럽으로, 중국 노동자가 만든 제품은 한국으로 온다. 2010년 5월24일 남북 경협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미싱대에 앉다
다음날 9일 오전 9시 어제 만난 노동자들이 일하는 옷공장으로 갔다. 선물로 사과 한 상자를 샀다. 공장 마당에는 움막처럼 생긴 작은 비닐하우스가 있다. 노동자들이 직접 담근 김치 저장고다. 1층은 복도 양옆으로 노동자들의 기숙사 방이 쭉 이어졌다. 샤워시설이 보인다. 한 층 올라가니 공장으로 이어진다. “아리랑 아리랑~~ 백두산에서 아리랑~~ 우리는~~ 백두산으로 가리라” 스피커를 통해 노래가 쩌렁쩌렁 울린다. 공장에 손님이 가끔 찾아왔는지, 노동자들이 우리를 유심히 보지 않는다. 어제 만난 여성 노동자가 미싱대에서 옷을 박고 있다. 우리는 말없이 눈빛을 나눴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씩 웃는다. 공장 계단에는 똥개 한 마리가 산다. 공장에 근무하는 조선족 관리자에게 이름을 물었다. “상근이.” 한국 예능 프로그램 출연으로 유명해진 개 이름이다. 북한 노동자들은 ‘상근이’의 의미를 모르겠지만.
점심 12시가 되자 여성 노동자가 노래를 껐다. 노동자들이 아래층 식당으로 다 내려갔다. 텅 빈 공장을 돌아다니다 미싱대에 앉았다. 전날 손을 잡은 세명의 동무들, 스물몇살의 노동자들도 기숙사에서 곰, 강아지 인형을 안고 잠을 잘까.
*다음회에선 직접 평양과 전화 통화를 하고, 10~20년간 북한과 교류해온 한국인 대북사업가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최근 개성공단이 폐쇄됐습니다. 하지만 경제 교류가 개성공단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둥/글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사진 강주원 경남대 객원연구위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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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이전에 단둥의 역사 있었네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북한 신의주로 들어가는 중조우의교를 건너기 전, 세관에서 짐 검사 등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지난 11일 인근 한 호텔 고층 복도에서 세관의 주차장을 찍었다. 북한으로 들어가려는 트럭이 줄지어 주차돼 있다. 하루 두 차례 정해진 시간에 중조우의교를 통해 중국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중국으로 사람과 물자가 이동한다.
베이징보다 더 주목받는 단둥
폭풍 전야에 경제적 타격 크다는
언론보도 너머엔 뭐가 있을까
그 현장에 8박9일간 뛰어들었다 남북경제협력 금지한 2010년의
5·24 조치 뒤에도 남북교역은
중국을 우회해 계속되고 있다
북한과 중국 교역도 나날이 증가
북한의 대중 무역의존도도 심화 북한의 해외 주재원들, 북한식 시장화 ‘아침이슬’을 부른 그는 북한의 국영기업 해외 주재원이다. 단둥에는 북한 주재원이 수백명 상주한다. 대다수 김일성종합대학, 국제관계대학(조선노동당 소속으로 외교관 등 대외부문 간부 양성 학교) 출신의 엘리트다. 여기선 회사의 ‘대표’로 불린다. 그는 단둥 주재원 인원을 확인해주지 않았다. 단둥 주재원이 1000명까진 안 된다고 했고, 중국 동북3성에 3000명 안팎이라는 정도만 말했다. 지난해 북한은 주재원들에게 업무상 남쪽 사람을 편하게 만나도 된다는 지침을 내렸다. 단둥에 거주하는 한인 대북사업가들과 원래부터 만나는 사이였지만, 공식 지침으로도 길을 터준 것이다. 8박9일간의 단둥 출장 가운데 만난 한국인 대북사업가 C씨(60대·기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나이와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는 북한 무역대표들을 여럿 알고 지낸다. 18년간 대북사업을 한 C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북한 주재원들끼리 단둥에서 서로 잘 만나지 않아. 견제 대상이지. 상호간의 감시체계가 있어. 차라리 남쪽 사람인 우리를 편하게 대해. 조선족, 북한 화교도 북한과 연결돼 있는데 우리한테 한 이야긴 저쪽으로 안 들어가니까.”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북한식 자유시장 체제가 활발해진다는 신호는 이곳 단둥에서도 보인다. “북한 회사는 대부분 국영 성격을 띠지. 북쪽은 모든 단위, 군대는 군대, 당이면 당, 모든 기관에 부속 회사가 있어. 그게 회사야. 인민무력부 산하, 사단 단위의 회사. 기관별로 회사 만들어서 아이템을 장사해. 단위별로 자력갱생이야. 중앙에서 지원도 받겠지만 어느 정도는 충족을 해야 해. 그리고 나라에 얼마를 바쳐야 하고. 회사가 많진 않았는데 요즘은 회사 설립이 굉장히 자유로워지고 간단해졌어.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체제 들어서. 사업 아이템은 나라에서 정해줘.”(대북사업가 C씨) 북한은 2009년 11월 화폐 개혁을 단행하면서 장마당(종합시장)을 폐쇄했다. 그러나 물가 폭등 등 부작용이 지속되자 2010년 5월 시장 억제 정책을 철회하고 2015년 12월까지 관용을 유지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한미연구소의 커티스 멜빈 연구원에 따르면 위성사진 분석 결과 북한에서 운영하는, 정부 책임 아래 주민이 자릿세 내고 장사하는 공식 시장이 2015년 10월 기준 406개다. 2010년 200여개에서 5년 만에 두 배로 뛴 것이다.(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2015년 북한시장화 동향과 향후 전망’) 북한과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단둥은 북한을 보는 창이면서, ‘무역’이라는 매개체로 북한과 중국, 한국과 북한이 교류하는 도시다. “1990년대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었던 북한 경제는 2000년대에 들어 제한적인 회복세에 들어갔다. 2013년 현재 북한의 기업구조는 우리가 파악하였던 1990년대에 비해 크게 달라졌을 것이지만 구체적 분석은 아직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이석기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2000년대 북한 기업의 실태 및 산업 동향: 북한 공식 매체 분석을 중심으로’) 그러나 점점 변화하는 북한식 시장경제, 북한 기업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1962년 북한과 중국이 비공개 체결한 국경조약 등을 보면 북한과 중국은 압록강을 공동 관리, 사용한다. 압록강을 공유하는 신의주와 단둥은 1980년대부터 교류를 이어갔다. 여기에 한국 대북사업가들이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 전후로 단둥에 뛰어들었다. 2010년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교역을 금지한 5·24 조치 이후에도 제3국인 중국을 경유하는 우회적인 방법으로 북한산 제품이 한국으로, 한국의 물건이 북한으로 들어간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3월3일(한국시각) 5번째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를 채택한 뒤, 단둥은 수도 베이징보다 주목받는 도시가 됐다. ‘폭풍 전야, 경제적 타격 받은 접경, 싸늘한 분위기, 팽팽한 긴장감, 찌푸린 얼굴의 무역상, 주민 생계 불안, 급격히 얼어붙은 북중관계’. 한국의 안방에 전해지는 보도는 이러했다. 손님 없는 단둥의 북한 식당, 압록강 유람선, 사람 없는 세관, 차 없는 압록강철교 사진과 동영상이 그 증거였다. 텔레비전과 신문 너머의 현실은 무엇일까. 유엔이 대북제재를 하면 무역 교두보인 단둥은 즉각 얼어붙을까, 대북제재의 경제적 효과는 있을까, 북한의 무역주재원들은 어느 정도의 경제활동을 할까, 국경을 뛰어넘어 단둥에서 이십여년을 교류해온 한국인, 조선족, 북한 화교, 북한 사람들의 삶은 어떤 결일까. 압록강을 건너면 닿을 북한 사회는 우리가 생각하는 정도와 수준의 폐쇄적 사회일까. 질문을 품고 단둥으로 떠났다. 이미 정해진 답에 현실을 틀에 맞추는 게 아닌, 진짜 단둥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내 곁에는 십여년간 단둥을 오가며 우리말을 쓰는 네 종류의 인류와 이들의 경제협력을 연구한 인류학자 강주원(43) 박사가 있었다.
지난 1월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단둥역에서 평양행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
지난 9일 방문한 옷공장의 점심 식사. 북한 노동자들이 12시 식사를 끝내고 일을 하는 사이 중국 관리자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단둥의 세관 주변으로 북한 사람에게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사진은 북한에 차량을 수출하는 업체의 입구.
“돈이 힘”이라 말하는 북한주재원
미국 남방 입고 삼성 스마트폰 쓴다
40년 이상 북한에서 살아온 그는
북한을 거지로 보지 말라며 웃었다 고기 굽는 북한 여성노동자들과
합석하고 어색한 술잔 부딪쳤다
다음날 그들의 공장으로 갔다
미싱대 앞에서 눈빛을 나눴다
그리고 점심시간, 모두가 떠났다 북한 노동자 300명을 고용한
조선족 L씨의 혀가 꼬여갔다
“우리 애들이 중국서 첫달치
월급 탔을 때 뭘 사는지 알아?
70%가 인형을 사, 곰·개 인형” 남·북·중국, 3국의 회식 단둥에 도착한 첫날은 ‘국제3·8부녀절’이다. 중국, 북한은 여성을 위한 공휴일을 두고 있다. 조선족 K 사장은 무역 사무실, K의 친구는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옷공장을 운영한다. K의 친구는 북한안전대표(노동자 대표)와 여직원 3명을 바깥으로 불러 고기 회식을 했다. 나와 강 박사는 다른 식당에 들렀다가 자리가 없어 그들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북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다른 수산물 공장의 조선족 L 사장도 있었다. 패딩 점퍼에 바지를 입은 북한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 대표는 다른 테이블에서 각자 고기를 구워 먹다 합석을 하게 됐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노동자들은 술을 잘 못 마셨다. 이 테이블에서 술잔을 홀짝이는 사람은 나를 비롯한 여성 4명뿐이다. 술을 잘 못 마시는 사람들은 눈빛으로도 뭔가 통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사장에게서 술잔을 받고선 이를 어쩌나 하는 눈짓을 내게 보냈다. ‘받기만 하고 마시지 않아도 돼’라며 고개를 살짝 저어주었다. 노동자들은 말수가 없다. 간간이 미소를 지었다. 표정은 밝아 보였다. 북한 노동자들은 지난해부터 외출할 수 없다. 북한 영사부에서 사장들에게 외출을 금지하라는 통지를 보냈다. 수산물 공장의 사장 L씨는 나와 강 박사를 북한 노동자에게 ‘연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사실 L 사장도 나를 강 박사의 후배 연구자로 알았을 뿐 신분을 몰랐다. 단둥에서 보낸 지난 8~16일 나는 여러 사람이었다. 어떤 자리에선 예비 인류학 연구자, 출신 학교도 아닌 서울의 한 대학교 후배였다. 어떤 자리에선 야, 너로 불렸다. 깊숙이 북한과 관련되거나 10여년 일한 사람은 철저히 그림자여야 한다. ‘숨은 존재’여야 대방(무역 상대를 일컫는 말. 북한 쪽 파트너)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대북사업가들은 기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말만 한다. 그래서 8박9일간 직함이 아닌 이름, ‘유리’로 지냈다. 국제부녀절이라며,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맥주 원샷’을 권했다. 식사를 마친 네명의 북한 노동자들이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L 사장이 북한 여성들에게 말했다. “이 언니하고 악수해야지?” 세 여자, 세명의 노동자, 세명의 북한 여동생 손을 잡았다. 아무 말 하지 않고 눈웃음을 나누었다. L 사장은 점점 취해갔다. 수산업을 하는 L씨는 북한 노동자 300여명을 고용했다. “우리 공장에 시집갈 나이 된 애들, 스물셋, 스물다섯, 조국 가면 시집갈 아이들 있는데. 어떨 때 보면 마음이 좀 그래요. 우리 애들이 중국에서 첫달 월급 탔을 때 산 게 뭔지 알아요? 우리 회사 70%가 인형을 사. 하하하 곰, 개 인형.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 ‘왜 이거 사니?’ 하니까 (인형) 안고 자고 싶대. 한 육개월, 일년 되니까 시집가서 쓸 거 사더라고.” L 사장은 술이 점점 들어가면서 말이 꼬였다. “나는 진짜… 우리는 민족으로서… 저들(북한 노동자)도 알아. 나는 정치 이런 거 상관없어. 진짜 묘한 관계야, 여기가. 오늘 진짜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저들 악수 안 해. 내가 연변에서 왔다 했을 때 ‘니가 알아서 모른 척해라’ 한 거야. 적 아니고 한민족으로서 한잔하자는 의미야. 우리는 진짜 민족의 단결을, 통일을 위해… 그런데 우리는 메인이 아냐. 우리 중국놈은 나라가 없어. 조국이 없어. 조선족은 북한 가면 재외 동포, 저기(한국) 가면 해외 동포. 불쌍한 사람이야. 당신들이 한국에서 왔다, 남조선에서 왔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좋겠노. 눈물 나잖아. (국적을) 말하면 현재로서는 갈라져야 해.” L 사장은 계속 중얼거렸다. “사상이 있잖아. 나 그거 싫단 얘기야. 나 직원들 데리고 있는데 친해. 내 돈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래도 애들 나 존중해. 한달에 돼지 두마리 잡고. 하루이틀 원없이 먹게. ‘먹고 싶어?’ 다 해줘. 내 마음이야. 그런데 남북이 내 마음을 몰라.” L의 말은 취해가면서 때로 자조로 흘렀다. “나는 중국놈인데. 나는 상관없어. 나는 돈만 벌면 돼. 나는 신경쓰기 싫다니까… 좀 그래.” L의 공장에는 중국, 북한 노동자가 함께 일한다. 그래서 라인이 두개다. 북한 노동자들이 만든 제품은 한국 회사로 납품할 수 없다. 북한 노동자가 만든 제품은 유럽으로, 중국 노동자가 만든 제품은 한국으로 온다. 2010년 5월24일 남북 경협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단둥~평양’ 열차가 정상 운행한다는 간판이 단둥역 인근에 걸려 있다. 강주원 경남대 객원연구위원
단둥역에 처음 도착한 지난 8일 평양에서 도착한 기차도 다른 선로에서 쉬고 있었다. 강주원 경남대 객원연구위원
▶개성공단 이전에 단둥의 역사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