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관찰하기

김광길 전 개성공단 법무팀장/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5. 16:04

정치국방·북한

이혼과 멸공통일 소동,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록 :2016-03-04 20:39

 

지난달 22일 서울 은평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만난 김광길 변호사. 개성공단 초대 법무팀장이었던 그는 인터뷰에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조처에 대해 “우리는 잃기만 하고 얻는 게 없는 모양새다. 너무 큰 손실을 아주 쉽게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달 22일 서울 은평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만난 김광길 변호사. 개성공단 초대 법무팀장이었던 그는 인터뷰에서 정부의 개성공단 폐쇄 조처에 대해 “우리는 잃기만 하고 얻는 게 없는 모양새다. 너무 큰 손실을 아주 쉽게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김광길 전 개성공단 법무팀장
교복이 동났다. 지난 2일, 일제히 중·고등학교 입학식이 벌어지는 날. 교복을 구하지 못한 집마다 비상이 걸렸다. 당분간 사복을 입고 등교하라고 긴급 통보하는 학교도 속출했다. 원인은 개성공단이다. 통일부가 개성공단 전면중단을 선언하면서 국내 교복시장의 16%를 생산하던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이 교복 수만벌을 개성에 남겨놓은 채 빈손으로 내려온 까닭이다. 개성공단은 생각보다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개성에서 만든 교복을 다시 입어볼 수 있을까? 남과 북이 개성에서 함께 지낸 10년 세월이 우리에겐 어떤 의미일까? 개성공단에서 같이 부대끼는 동안, 남과 북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개성공단은 그들에게 ‘매일같이 적과 대면하는 전장’이었을까, 혹은 ‘통일 이후’를 미리 체험하는 화합의 공간이었을까?

그런 질문에 답해줄 만한 사람으로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김광길(49) 변호사였다. 2004년 공단이 문을 열 때부터 2013년까지, 개성공단관리위원회 법무팀장으로 10년가량 고락을 함께한 산증인. 직무상 언론에 노출되기를 꺼려왔던 그이지만, 개성공단이 사실상 폐쇄되는 상황에서 가슴속에 담아왔던 말을 이제는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지난달 22일, 서울 은평구에 있는 한 오피스텔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부터 써버린 마지막 카드

-개성공단 전면중단 사태를 접하는 심정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처음 들을 땐 믿어지지 않았어요.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거치는 동안 개성공단에 있었는데, 이명박 정부도 개성공단을 못마땅해했지만 결국은 유지하고 가는 걸 옆에서 지켜봤거든요. ‘설마 폐쇄까지 가겠나?’ 싶었는데 진짜 하는 걸 보고 정말 황당했어요.”

-그동안 서로 엄포성 시위는 있었어도 이렇게 진짜 닫을 줄은 몰랐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요. 2008년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남한 체류인원을 축소하라고 통보했을 때도 그 최소인원 수가 가동을 하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어요. 2009년 한미 군사훈련 한다고 육로통행을 차단했을 때나, 2013년 공단을 잠정폐쇄했을 때도 실제로 개성공단을 문 닫을 생각은 아니었다고 봐요. 남측에서 기숙사를 짓고 가로등이나 도로시설을 하기로 했는데 그 후속작업이 부진한 것에 대한 항의나 엄포였지. 그래서 2013년엔 전기나 수도를 완전 끊지는 않은 상태였어요.”

-겉으론 싸우는 척해도 돌아올 구멍을 남겨두는….

“그렇죠. 근데 지금은 전기, 수도마저 다 끊어버렸어요. 거기 식품회사들도 있는데 밤, 미역, 이런 식품들이 다 상해 못 쓰게 되었겠죠. 기계도 완전 가동중지되어 버리면 다시 복구하기 어려운 게 많고요. 되돌리기 쉽지 않죠.”

-개성공단으로 들어간 돈이 핵 개발에 쓰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어요. 남측이 임금을 직접 현금 형태로 북측 노동자들한테 지급하지 않고 북한측 관리기구(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를 통해서 전달하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게 전용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어떻게 보세요?

“돈이 북한 당국을 거쳐서 들어가는 건 맞아요. 2004, 5년에 남한측이 북한 노동자에게 임금을 직접 주느냐 마느냐로 무척 갈등이 많았어요. 그것 때문에 (개성공단)관리위원회 직원들이 한 2주간 쫓겨난 적도 있고요. 근데 우리로서도 사실 대안이 없었어요. 근로자마다 계좌를 만들어 임금을 지급하려 해도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 방침에 걸리니까 못 했죠.”

-그럼 임금 상당액을 북한 당국이 가져간다는 추측도 가능한 겁니까?

“문제는 아무도 그걸 정확히 데이터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단 점이에요. 핵 개발에 전용되었다는 측이나, 아니라는 측이나 양쪽 다 근거가 없어요. 제가 현지에 있을 때 들은 얘기론 개성공단 노동자가 한 달에 쌀 50㎏을 받는대요. 제가 개성공단 부임할 때부터 일기를 써왔는데 (일기를 펼쳐 보이며) 그렇게 메모해 두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지급하는 임금 액수와 실수령액 사이에 그리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진 않아요.”

-탈북자 김태산이란 사람은 국회 세미나에서 ‘남측 기업이 개성공단 노동자한테 80달러를 지급해도 실제 돌아가는 액수는 일인당 6000원에 불과하다. 이건 쌀 1㎏ 값이 약간 넘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양반은 2002년에 탈북한 사람이에요.(웃음)”

-아, 그럼 개성공단 조성되기 전에요?

“근거 없는 얘기라고 봐요.”

-과거에 여러 차례 경색국면이 있었고 개성공단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번 사태를 더 심각한 것으로 보시는 이유가 뭡니까?

“말폭탄이 너무 세져서 ‘핵 문제 해결 안 되면 개성공단을 재개할 수 없다’고 해버렸으니까요. 개성공단 폐쇄한다고 핵 문제 해결될 것이냐? 다들 그렇게 생각지 않잖아요. 북한 핵 해결해야죠. 폐기시키는 게 맞아요. 근데 그걸 위해선 여러 가지 수단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가야 하는데,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마지막에 쓸 카드를 써버린 거죠. 정부로선 중국을 압박해서 대북제재에 끌어들이자는 심산이었을 텐데, 중국이 안 움직이면 어떻게 하죠? 그럼 다시 물러날 명분이 없어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게 그 대목이에요. 중국은 왜 북한 제재에 미온적인가요?

“제가 중국 연변에서 교환교수로 지내면서 보니까, 중국이 북한과의 합법적 경제거래를 금하고 북한을 고립시키려면 국경선을 차단해야 해요. 근데 그 국경선이 1400㎞예요. 우리 휴전선이 400㎞인데, 여긴 강 따라서 내려오는 자연국경선이라 3배쯤 되죠. 지금 우리 휴전선을 60만명의 군인이 지키는데 숫자상으로만 봐도 180만명의 병력을 유지해야 하잖아요.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만으로도 중국이 감당하기 곤란한 조치라고 봅니다.”

-중국의 북한 제재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 우리 정부가 취할 수 있는 다음 조치는 뭘까요?

“우리는 잃기만 하고 얻는 게 없는 모양새죠. 너무 큰 손실을 아주 쉽게 결정했습니다. 제가 걱정되는 건, 정부가 여기서 물러서면 대북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게 되니까 어떤 다른 극단의 방법을 쓰게 되진 않을까. 군사적인 방법 같은….(한숨)”

개성공단에서 일할 때 써온 두툼한 몇 권의 일기장 위로 그의 긴 한숨이 쏟아졌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 인생에서 변호사를 한 지가 16년 되었는데 그중 12~13년을 개성공단과 연변에서 지냈어요. 그동안 쌓아놓은 노하우나 이런 게 참 부질없는 것이 되는구나, 이렇게 역사 속으로 흘러가는구나, 하는 그런 느낌입니다.”

2004년 문 열 때부터 2013년까지
개성공단관리위 법무팀장으로
고락을 함께한 산증인
직무상 언론노출 꺼려왔지만
가슴속 말을 이젠 할 수 있다

노동운동하러 1989년 울산행
1년간 코피 흘리며 일만 하다
진로 바꿔 변호사 된 뒤
로펌에서 대기업 계약 도와줘
‘갑’의 지위 어마어마하더라

블루오션? 오션이 없어졌다

김광길을 만든 시간들
김광길을 만든 시간들
1980년대가 아니었다면 김광길은 물리학도의 길을 걷고 있었을지 모른다. 광주 석산고를 졸업하고 1985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할 때까지도 그의 꿈은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학생운동을 할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무시하고 공부만 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울산의 노동현장에 신분을 속이고 취업을 하겠다 작정하고도, 물리학 공부를 그만두는 게 아쉬워서 도서관에 틀어박혀 전 과목 ‘에이’(A)를 받을 만큼 공부에 대한 미련도 컸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이 일을 꼭 내가 해야 하나” 끊임없이 회의하면서도 그는 매번 더 험난한 길을 택했다.

-울산엔 노동운동을 하러 내려간 거였나요?

“울산 내려간 게 1989년인데 (노동현장에) 가보니까, 제가 완전 ‘막차 타고 간 거’더라고요. 노동자 출신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온 상태라 더 활동할 여지도 없고. 그냥 일만 ‘쌔빠지게’ 했죠. 하하하.”

-무슨 일을 했어요?

“그라인더(연삭기로 금속을 갈고 다듬는 일)를 했는데 일이 익숙지 않고 너무 힘들어서 목욕하러 가면 매번 코피를 쏟았어요. 노동운동이라고 뭔가 조직적으로 해본 것도 없어요. 그저 1년 동안 일만 하다 나왔어요.”

-그래서 진로를 바꾼 건가요?

“해보니까 조직활동에 맞는 스타일도 아니고, 열심히는 하는데 카리스마 있게 누굴 조직하고 이런 성격도 못 되고. 1998년 사법시험 쳐서 합격한 뒤, 친구랑 이야기했어요. ‘다시는 이쪽(사회운동)으로 쳐다도 보지 말고 우리끼리 막걸리 마시면서 재미있게 살자’고… 하하하. 그래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도 안 하고 대형 로펌에 취직했어요.”

-그래서 재미있게 사셨어요?(웃음)

“로펌에서 금융파트 일을 맡았는데 기업들 인수합병이나 재무관리를 했죠. 주고객이 대기업들이에요. 대기업 편에 서서 중소기업하고 계약 맺을 때 자문을 하곤 했는데, ‘갑’의 지위란 게 정말 어마어마하다는 걸 실감했어요. 우리나라 중소기업들은 ‘참, 답이 없겠구나!’ 싶었습니다. 한편으론 대기업한테, 한편으론 근로자들한테 양쪽으로 샌드위치처럼 껴서 참 답이 없겠다…. 우리 경제가 잘되려면 중소기업이 좀 공정하게 대우받도록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개성공단엔 왜 들어가게 되었죠? 북한에 대해 관심이 있었나요?

“북한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좋게 생각하지도 않았어요. 개성공단에 중소기업들이 입주하게 될 거라고 해서, ‘내가 그동안 쌓아온 기업컨설팅 노하우를 잘 활용하면 중소기업에 도움도 되고, 잘하면 돈도 크게 벌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생각했죠.(웃음) 이게 블루오션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어요. 이젠 오션 자체가 없어졌지만. 하하하.”

-초대 법무팀장으로 개성공단에 합류했는데, 선례가 없는 일이라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처음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불분명했어요. 처음 한 달 동안은 물도 잘 안 나와서 세수도 변변히 못하고 숙소도 공사 중이라 컨테이너에서 자고. 어휴….”

남북이 함께 하는 전대미문의 경제협력 현장. 더구나 상대는 해외합작 경험이 많지 않고 사법제도도 미비한 북한 사회의 관료들이었다. 사안마다 이견이 불거질 때마다 ‘개성공업지구 법규집’을 들고 가서 법을 가지고 따지기 시작하니, 처음엔 목청 높여 우기기만 하던 북한이 나름 논리를 만들기 위해 법규집을 들고 와 협의하기 시작했다. 법치주의 개념이 없는 북한으로선 놀라운 변화였다.

김광길 변호사가 서울 은평구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개성공단 사업 중단에 따른 상황과 관련해 이진순(왼쪽)씨와 이야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광길 변호사가 서울 은평구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개성공단 사업 중단에 따른 상황과 관련해 이진순(왼쪽)씨와 이야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무서운 북한군은 왜소한 150㎝ 청년들

-직접 접촉하면서 북한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있었습니까?

“우린 북한 군인이라고 하면 굉장히 무섭게 생각하잖아요. 2005년 여름이던가, 주말에 가이드 따라서 개성 구경을 나갔는데 그때 마침 모내기철이었어요. 군인들이 모내기에 동원되었는데 스무살 안팎의 북한군들이 러닝셔츠 차림으로 일을 하더라고요. 근데 애들 키가 150㎝밖에 안 되는 거예요. 1990년대 후반 북한 경제가 어려웠을 때 청소년기를 지낸 청년들이죠. 몸매도 작고 왜소한 그 친구들을 보자니, ‘무서운 북한군’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왠지 짠하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경제난이 심각한가요?

“직원들 입사할 때 얼굴을 보면 굉장히 힘들게 살아온 티가 역력해요. 얼굴에 버짐이 많고, 옷차림도 남루하고. 근처 사는 어린애들은 겨울에 땔감용으로 쓸 검불을 긁어모으러 다니는데, 운동화도 없이 천으로 발을 감싸고….”

-헌 신발을 천으로 쌌다고요? 아니면 발싸개를 했다고요?

“발싸개죠. 운동화가 없어서.”

-저런….

“기업 본격 가동하기 전에 강당에 모아놓고 교육을 시키는데, 화장실이 양변기였어요. 저도 어렸을 때 처음 양변기 보고는 어떻게 쓰는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그렇게 쓰더라고요. 재래식처럼 발로 올라서서.”

-양변기 위에?

“그래서 그림으로 안내문을 써 붙였죠.”

-개성공단에 취업하는 노동자들은 북한 내에서도 별도로 선발된 인원들입니까?

“처음엔 돈 쓰고 왔다, 당원만 일부 왔다, 그런 얘기들이 있었는데 제가 보기엔 그냥 무작위로 온 것 같아요. 지금 인원이 5만5000명 정도 되는데 개성 시내 인구가 많아야 15만명 정도예요. 거의 대부분 개성에서 왔고, 개성 인근의 장풍군, 개풍군 인력도 상당수 와요. 그 인원들을 사상적으로 검증하고 말고 할 형편이 아니지요. 노동력이 부족하니까.”

북한 사람들과 자주 술 마셔
불행하게 사느니 이혼이 낫다고
했다가 언성 높이는 와중에 욕
날 쫓아내라고 노발대발 대소동
주장 안 굽혔지만 결국 흐지부지

2012년 시계 뒤딱지 생산 기업
군부대 납품용이었는지 태극기에
멸공통일이라고 크게 쓰여 있어
옛날 같으면 추방됐을 텐데 쉬쉬
북한 쪽 담당자도 너그러워졌더라

“선생은 이혼을 조장하는 사람입니까?”

-남북간 문화적 이질성 때문에 갈등도 많았을 것 같아요.

“북한 사람들하고 술을 자주 했어요. 관계를 터야 하니까. 첨엔 긴장돼서 마시다가 조금 취하면 이 얘기, 저 얘기 하게 되지 않습니까? 하루는 이혼을 화제로 얘기하게 되었는데, 내가 ‘불행하게 같이 사는 것보다 이혼이 나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했더니 북한 관료 하나가 발끈해서 ‘선생은 이혼을 조장하는 사람입니까?’ 하는 거예요. 서로 언성이 높아지다가 내가 취해서 무심코 욕을 뱉었더니 난리가 났죠. 남한 사람이 북한 사람 무시했다고, 쫓아내라고.(웃음)”

-어떻게 수습이 되었어요?

“나중에 술 깨고 ‘욕한 건 미안한데 내 주장은 굽힐 수 없다’고 하니까 그걸로 또 얘기하다가 그냥 흐지부지되었죠. 하하하….”

-엄청난 사상투쟁을 하셨네요.(웃음)

“그런 일 많았죠. 나이 드신 남한 관리자가 북한 아가씨보고 ‘우리 똥강아지, 이리 와서 떡 먹어라’ 하면 거기선 ‘모욕했다’고 펄펄 뛰고. 남한 신문에 가끔 김일성 사진 같은 게 나오잖아요. 어디 구석진 데 치워놨다가 무심결에 깔고 앉으면 ‘반성문을 써야 한다’는 둥 굉장히 반발이 심했죠.”

-지나면서 서로 적응이 되던가요?

“그런 사건 하나하나를 다 처리하고 보고서를 쓰려고 들면 사실 너무 피곤한 거예요. 2012년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우리 기업이 시계 뒤딱지를 주문받아서 생산하는데 그중에 군부대 납품이 있었나 봐요. 태극기 그려져 있고 ‘멸공통일’이라고 크게 쓰여 있는….”

-하하하, 노발대발했겠네요?

“옛날 같으면 몇 사람 추방되어야 할 사건이죠. 근데 북한측 담당자가 하는 말이 ‘거, 좀 조심하지. 그 물건 몇 개 안 되니 수거하고 없던 일로 하자’고….(웃음)”

-소소한 갈등엔 서로 너그러워졌군요.

“그게 저는 개성공단이 가진 큰 의의라고 생각해요. 외국과 접촉이라든가 개방을 안 해본 북한 사람들에겐 개성공단이 거의 첫 경험인데, 북한이 ‘개혁, 개방을 해도 괜찮겠다’ 하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거죠.”

-같은 공장에서 10년 이상 일하다 보면 남북 간에 인간적인 동료애 같은 것도 생길 것 같은데.

“당연히 생기죠. 특히 자동차 수리나 건설업 같은 경우엔 여름에 같이 웃통 벗고 차 밑에 기어 들어가 일하다가 별 얘기를 다 하게 되지요. 북한 노동자 하나는 ‘전쟁 나도 형님은 걱정하지 마쇼. 우리 집에 숨겨줄게’ 하는 그런 관계까지 가고. 남녀 간의 애틋한 관계도 생기게 마련이지요.”

-‘남한의 자본가와 북한의 노동자’ 조합 자체가 사실 아이러니한 건데요. 사회주의 체제에서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반자본가 의식을 가지진 않나요?

“그런 게 많이 있었죠. 그래서 우리 근로자들이 북한 근로자들에게 직접 지시하면서 일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기들로선 남한 사람한테 직접 지시받고 일하는 게 받아들이기 힘든 거예요. 그래서 법적 명칭으로 하면 ‘직장장’ 통상적으로 부르는 용어로 하면 ‘종업원 대표’라는 직책을 두고 노무관리를 합니다. 우리로 치면 공장장이자 노조위원장이죠.”

-상당히 번거롭고 불편한 구조일 것 같은데, 그런데도 개성공단이 가지는 이점이 있나요?

“이익이 있으니까 하죠. 처음에 들어갔던 기업 중에서 철수한 기업이 거의 없어요. 인건비, 물류비 면에서 현저한 경쟁력이 있는 거죠.”

개성공단으로 우리 기업은 지난 10년간 3조9000억원을 벌어들였다. 북한이 벌어들인 돈의 10배가량이다. 개성공단이 멈춰선 지금 손실액 예상치는, 작게는 8000억원에서 크게는 2조~3조원까지로 추정된다.

국제 제재는 북한 집권층에 유리할 뿐

-개성이면 휴전선에서 가까운데 대북 전단이나 확성기 방송에 노출돼 있지 않나요?

“전단이 날아와요, 개성까지. 날씨 맑은 날이면 거기서 북한산도 보여요. 저희 집 아파트가 보인다고요. 게다가 남한 사람들 생활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개성공단이에요. 옷도 잘 입고 자동차 몰고 오는 ‘인간 확성기’ 수천명이 거기 가 있는 거죠. 남한 사람들이 북한보다 잘사는 거, 북한 사람들 다 알아요. 전단 같은 걸로, ‘남한이 더 잘사는 거 보여주면 북한이 흔들릴 거다’ 이건 완전 우리의 착각이지요.”

-남한이 더 풍족한 거 알아도 흔들리지 않는다고요?

“북한식 표현으로 하면 남한은 미국에 종속돼서 물질적으로 앞서 있는 것에 불과하고, 자기들은 자존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자기는 ‘뼈대 있는 가난한 양반 가문’이고 남한은 ‘돈 많은 상놈 집안’이라고 할까….”

-그런 자존심의 요체가 뭐죠?

“우리(남북)가 서로 부담 없이 얘기할 수 있는 주제가 일제 식민지 시절에 대한 거예요. ‘일제놈들, 나쁜 놈들이야’ 이건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얘기니까. 한번은, ‘우리가 어쩌다 일본 식민지가 되었을까?’ 얘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북한 사람들은 대부분 첫번째 원인을 ‘우리가 군사력이 너무 약해서’라고 얘기하더라고요. 군사력 없는 나라는 절대로 나라의 주권을 세울 수가 없다고,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을 통해서 독립을 쟁취했다고 강조하면서… 19세기, 20세기 초반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군사력에 의해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정신이 또렷해요. 경제적으로 어려울수록 핵 개발로 문제를 풀겠다는 사고가 그런 데서 나오는 것 같아요.”

-핵 개발과 미사일 실험으로 국제사회 제재가 심해질 텐데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제재가 북한의 이런 군사안보주의를 더 강화시키면 시켰지, 핵 개발을 포기하게 할 거라고 보지 않습니다. 제가 만나본 북한 사람들은 ‘굶어 죽으면 죽었지, 굴복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제재가 강화될수록 그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북한 당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외부로 향합니다. 북한 당국의 입장에서는 체제 유지에 더 좋은 조건이 되는 거죠.”

김광길 변호사.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김광길 변호사.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돈 받으려면 해!’가 안 통해요

-그럼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하곤 전혀 다른 세계에 산다는 걸 우선 이해해야 해요. 산업화와 근대민주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 북한이 가지는 사고의 한계는 분명해요. 저희도 개성공단을 가지고 북한과 어떻게 협상할 것인가 고민 숱하게 했어요. ‘그거 안 하면 돈 안 줄 거니까, 돈 받으려면 너 이거 해!’가 일반적인 (우리 식) 협상 방식인데, 북한은 이게 안 통해요. 우리가 뭔가를 강요해서 그들이 변화하는 게 아닙니다. 북한 스스로 변화할 수 있는 ‘정보’와 ‘길’을 보여주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북한이 스스로 체득하고 습득해서 선택하도록 하는 것.”

-개성공단이 그들에게 그런 방편이 될 수 있었다고 보세요?

“개성공단을 한다고 해서 북한이 스스로 붕괴하거나 동요할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는 잘못입니다. 상당히 장기간의 변화가 필요해요. 우리도 상당한 기간 산업화가 진행되고, 이후에 민주화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잖아요. 어느 정도 먹고살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북한 사회 내에서도 말랑말랑한 사고가 가능해집니다.”

-너무 멀고도 막연한 얘기로 느껴집니다.

“중국도 ‘행정소송’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게 1989년 개혁개방 과정에서입니다. 외국 투자를 유치하려고 하니 행정소송이나 사법제도 같은 게 필요했던 거예요. 북한 인권 얘기를 많이 합니다만, 중국의 예를 보면 2000년도까지도 공개 총살형이 있었다고 해요. 그게 없어진 게 외국인들이 왔다 갔다 하고 투자하러 오고 하면서 사라진 거죠. 북한이 당 중심 국가에서 다양한 사법제도, 행정제도, 회계제도 같은 걸 도입해서 법치주의로 가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외자 유치나 경제협력은 그런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변수죠.”

지난달 16일 박근혜 대통령은 “개성공단 전면 중단은 시작에 불과하다”며 강경한 대북 정책을 천명했다. 매일매일의 소소한 마찰과 갈등과 화해와 조율 속에서 한발 한발 싹 틔워온 작은 통일의 꿈들이 얼어붙은 개성공단에 갇혀 있다.

녹취 이돈섭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