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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안드로스의 권력은 운하 건설에 도전하다/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11. 16:46

국제국제일반

페리안드로스의 하늘을 찌르는 권력…운하 ‘무모한 도전’

등록 :2016-04-10 20:14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⑧ 코린토스 운하에 서서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코린토스 지협에 있는 운하에서 배들이 지나가고 있다. 기원전 7세기 초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는 현대 기술로도 쉽지 않았던 운하 파기를 시도했을 만큼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유재원 교수 제공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코린토스 지협에 있는 운하에서 배들이 지나가고 있다. 기원전 7세기 초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는 현대 기술로도 쉽지 않았던 운하 파기를 시도했을 만큼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유재원 교수 제공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잇는 코린토스 지협은 지금은 운하에 의해 끊겨 있어 펠로폰네소스는 더 이상 반도가 아니라 섬이 되었다. 수에즈 운하를 팠던 레셉스는 1882년부터 1893년까지 12년 동안 길이 6.4㎞, 너비 25m, 깊이 8m의 코린토스 운하를 팠다. 이 운하를 이용하면 에게해와 이탈리아 사이의 뱃길 320㎞ 정도를 줄일 수 있어 많은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고대부터 이곳에 운하를 파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이미 기원전 7세기 초에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가 운하를 파려 했고, 칼리굴라 로마 황제 역시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지만 곧 비명횡사했다. 그의 뒤를 이은 네로 황제는 6천명의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에서부터 코린토스로 이주시켜 운하를 파기 시작했지만 골족의 침입으로 중단됐다. 이때 이주했던 유대인들은 나중에 사도 바울을 맞아 코린토스에 유럽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세웠다.

기원전 7세기 초에 벌써 현대 첨단기술로도 쉽지 않은 코린토스 운하 파기를 시도했던 코린토스의 참주 페리안드로스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오늘날 그 누가 그를 기억이나 하겠는가?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현대 첨단기술로도 쉽지 않은데
기원전 7세기 초에 벌써 시도
운하 어렵자 사람이 배 통째 옮겨

노예수 제한 빈곤층 수입 안정화 등
권력 유지 위해 서민 실업문제 힘쏟아
공공부문 일자리 만들려 운하 추진도

부유층엔 금 헌납 강요 등 견제
유력인사 숙청 등 잔혹한 만행도
‘뒤이은 조카’ 3년만에 귀족에 죽음
‘코린토스’ 73년 참주정치 무너져

■ 기원전 7세기 전반의 코린토스

아테네보다 앞서서 참주정이 행해진 폴리스가 몇 개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코린토스는 가장 전형적인 참주정의 모습을 보여 준다. 기원전 7세기 전반기에 코린토스는 불과 200여명의 바키아다이 집안 사람들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 다른 가문 사람들은 귀족이라 해도 정부의 말단직조차 차지할 수 없었다.

코린토스 지협 남쪽 끝에서 본 운하의 모습.
코린토스 지협 남쪽 끝에서 본 운하의 모습.
당시 코린토스는 농토가 없는 가난한 농부들을 먹여 살릴 다른 산업이 발달해 있지 못했고, 해외 식민지 건설 역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빈부 사이의 긴장은 날로 높아져만 갔다. 바키아다이 집안 사람들은 이 위기의 해결을 자기 집안 사람인 페이돈에게 맡겼다. 그의 해결책은 솔론의 해결책과는 상당히 달랐다. 그는 사람들이 가난해지는 이유가 상속인 수가 많아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농토가 잘게 나누어지는 데 있다고 보고 농토가 더 이상 영세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가족당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 이상의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는 산아제한법을 만들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기 때문에 인구 증가가 바로 빈곤화의 원인이니 인구를 억제해야 한다는 맬서스(1766~1834)의 ‘인구 이론’의 고대판이다. 이는 빈곤층이 바랐던 토지개혁과는 거리가 먼, 지주들을 옹호하는 반동적 조치였다. 코린토스의 시민들은 낙심하여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누군가가 이들을 선동하기만 하면 목숨을 걸고 독재 타도를 위해 투쟁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 킵셀로스의 참주정치

기원전 660년 코린토스가 케르키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바키아다이 가문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런 위기를 틈타 킵셀로스라는 사람이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바키아다이 가문을 내쫓고 권력을 잡았다. 킵셀로스는 당시 코린토스에서는 특이한 존재였다. 바키아다이 가문은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결혼했다. 그러나 킵셀로스의 어머니 ‘라브다’는 절름발이였기에 아무도 결혼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리스 북쪽 지방에서 이주해 온 집안의 남자 ‘에에티온’을 사위로 맞았다. 바키아다이 집안 사람들은 이렇게 반쪽만 자기네 피를 받은 킵셀로스도 자신들 부족의 일원으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그가 ‘상자의 자식’이란 뜻의 ‘킵셀로스’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기구한 까닭이 있었다. 결혼한 뒤 한동안 라브다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에에티온은 델포이에 신탁을 물었다. 신탁의 내용은 그의 아들이 코린토스의 독재자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에에티온에게 내린 델포이의 신탁을 전해 들은 바키아다이 집안 사람들은 라브다가 낳는 아이를 죽이기로 모의하고 출산 날에 10명의 사람을 보냈다. 그들은 누구든 첫 번째로 아이를 안게 되는 자가 땅바닥에 아이를 메어쳐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안긴 아기가 방긋 웃자 그 누구도 차마 아이를 집어던져 죽이지 못하고 결국 아기를 엄마에게 다시 돌려주고 나왔다. 문밖에서 그들은 서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아기를 죽이자고 다짐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라브다가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아기를 집안 깊숙한 곳에 있는 상자 속에 숨긴 후였다. 남자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기를 찾지 못했다. 그러자 그들은 아기를 죽였다고 말을 맞추기로 하고 돌아갔다. 이렇게 상자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기에 아이는 ‘상자의 자식’이란 뜻의 킵셀로스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총사령관이 된 킵셀로스는 이 지위를 이용하여 시민들의 환심을 샀다. 총사령관에게는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이 벌금을 다 물 때까지 감옥에 가두는 임무가 주어졌다. 벌금의 일부는 총사령관의 몫이었다. 그러나 킵셀로스는 죄인들을 감옥에 가두는 대신 자신이 그 벌금을 다 물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시민들이 킵셀로스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이런 추종 세력의 지지를 바탕으로 기원전 657년 초에 피로 물든 쿠데타를 일으켰다. 바키아다이 집안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외로 도망쳤다. 다른 코린토스의 귀족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추방을 당했고, 다른 사람들은 재산을 몰수당했다. 킵셀로스는 부자 귀족들의 힘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10년 동안 10%의 재산세를 부과했다.

킵셀로스는 몰락한 귀족들의 농토를 가난한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농토를 분배받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 식민지를 개척했다. 킵셀로스는 이렇게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펼친 까닭에 민중들에게 인기가 매우 높아 그리스의 참주들 가운데 유일하게 호위병 없이 어디든 돌아다녔다고 한다. 킵셀로스는 전 그리스인들이 참가하는 고대 그리스의 4대 체전 가운데 하나인 ‘이스트미아 제전’을 만들어 코린토스의 위상을 높이는 등, 유능하게 통치해 코린토스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

■ 페리안드로스의 참주정치

기원전 627년, 킵셀로스가 30년 동안의 독재를 하다가 편안하게 죽자 그의 아들 페리안드로스가 뒤를 이어 참주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627년부터 기원전 587년까지 40년6개월 동안 그리스 역사상 최장기 독재를 통해 질서와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세금을 인하하고 화폐 제도를 도입해 교역과 산업을 장려하는가 하면 문학과 예술을 후원하여 코린토스를 그리스 최고 폴리스로 만들었다.

페리안드로스는 처음에는 아버지보다 더 온건했지만 밀레토스의 참주 트라시불로스의 충고를 듣고 난 뒤로는 아버지보다 훨씬 더 피비린내 나는 통치를 했다. 트라시불로스는 페리안드로스의 전령을 밭으로 데리고 나가 함께 곡식 사이를 지나면서 다른 이삭보다 웃자란 이삭은 모두 잘라버렸다. 그러고는 한마디 말도 없이 전령을 코린토스로 돌려보냈다. 페리안드로스는 트라시불로스의 이런 괴상한 행동의 속뜻이 정권을 유지하려면 가장 훌륭한 시민들을 죽이라는 충고임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페리안드로스는 정기적으로 유력 인사들을 잡아 죽이는 등 온갖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페리안드로스는 첩들의 중상모략에 속아 임신 중인 정실 부인을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게 했다. 그리고 곧 후회하여 그런 불행을 불러일으킨 첩들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였다. 당시 17살이었던 아들 리코프론은 외할아버지가 다스리는 에피다우로스로 망명하여 자기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유능한 장군이었던 페리안드로스는 반란군을 진압하고 장인을 포로로 잡고는 에피다우로스를 코린토스에 병합했다.

이어서 페리안드로스는 숙적 케르키라를 정복하고 그의 아들을 총독으로 앉혔다. 그러나 케르키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들을 죽이자 페리안드로스는 다시 케르키라로 쳐들어가 반란을 진압하고는 케르키라의 귀족 자제 300명을 포로로 잡아 환관을 만들기 위해 리디아로 보냈다. 그러나 이들을 태운 배가 사모스 섬에 도착했을 때 사모스 사람들은 이들을 불쌍히 여겨 풀어 주었다.

페리안드로스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지 세력인 서민들을 위해 실업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우선, 그는 임금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빈곤층 시민들을 위해 새로운 노예 수입을 엄격하게 금하여 임금을 안정시키고, 한 사람이 고용할 수 있는 노예 수를 제한하여 대규모 사업자들로부터 중소 사업자들을 보호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임금을 시민들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조정하여 시민들이 감히 정치에 참여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또 한 시민의 소비가 그의 수입에 걸맞은 정도인가를 조사하는 특별기구를 만들어 감시하는 한편, 일 없는 사람들이 아고라에서 빈둥빈둥하는 것과 농민이 도심에 이주하는 것을 금했다.

다른 참주들과 마찬가지로 페리안드로스 역시 큰 공공사업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실업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코린토스 지협에 운하를 팔 계획을 세웠으나 당시 기술로는 어림없는 일이라 곧 포기하고, 대신 인력을 이용하여 배를 통째로 옮기는 ‘디올코스’라는 길을 만들었다. 그는 또 해외 식민지 건설도 계속했다. 특히, 화폐 주조를 위한 은을 얻기 위해 칼키디케 지방에 식민지를 세우기도 했다.

페리안드로스는 잠재적 정적인 부자 귀족들을 견제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부자들이 부를 과시하는 사치를 금하는 한편, 부유층의 남아도는 금을 거대한 황금상 제작에 헌납하도록 강요하고, 귀부인들을 축제에 초대해 값비싼 옷과 보석의 절반을 바치게 한 뒤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또 퇴폐 사업을 일소한다는 구실 아래 코린토스의 매춘업자들을 바다에 수장했다.

독재가 길어질수록 페리안드로스의 적은 늘어났고 세력 또한 강해졌다. 그래서 그는 그의 아버지 킵셀로스와는 달리 중무장한 경호원들 없이는 감히 외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두려움과 은둔 생활로 그는 점점 더 괴팍하고 잔인한 인물로 변해 갔다. 기원전 587년 그가 죽었을 때, 그에게는 살아남은 아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의 뒤를 이은 조카는 불과 3년을 견디지 못하고 반대파 귀족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킵셀로스의 30년, 페리안드로스의 40년6개월, 그리고 그 후계자의 통치 기간 3년, 모두 73년6개월 동안의 코린토스 참주정치는 또다시 소수 귀족들의 과두정으로 되돌아갔다.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