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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앞세운 아리스토텔레스 “참주정은 사악한 체제”/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24. 21:08

국제국제일반

공동체 앞세운 아리스토텔레스 “참주정은 사악한 체제”

등록 :2016-04-24 20:05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⑨ 스타게이라 성벽 위에 서서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 동쪽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도시이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인 스타게이라 마을의 성벽과 궁전터.
그리스 북부 테살로니키 동쪽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 도시이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인 스타게이라 마을의 성벽과 궁전터.
그리스 북부의 수도 테살로니키에서 정동쪽으로 55㎞ 가면 바닷가 언덕 위에 고대 성터가 하나 보인다. 이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인 스타게이라다. 중세 때 ‘철학자’라는 일반명사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할 정도로 위대한 철학자의 고향이 군사시설만 남긴 채 서 있는 게 생뚱맞다.

기원전 384년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태어났다. 그는 17살 때(기원전 367년) 아테네로 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했다. 37살이 되던 기원전 347년, 스승 플라톤이 죽자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 북서부에 있는 아소스로 이주하여 생물학을 연구하다가 39살 되던 해(기원전 345년) 바다 건너편 레스보스 섬으로 가서 결혼도 하고 2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42살 때(기원전 342년)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초청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 2년 동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으로 지냈다.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 갈파
개인의 행복은 공동체 안에서만
독재체제 순응하는 대신
이상국가 실현 추구할 것

불화·독선 치닫던 왕정 거의 몰락
귀족 과두정도 내홍·반발에 취약
‘권력 분점’ 왕정 스파르타 등 빼고는
참주정이 그리스세계 대세로

겉으론 민중 옹호 내건 참주들
용병 의존 권력·축재 챙기기만
“무책임한 독재체제” 여론 파다

기원전 335년, 49살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 아테네로 와서 자신의 학교 리케이온을 설립하고 이후 10년 동안 제자들을 길렀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권력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선생이었기에 풍부한 지원을 받아 세계 최대 도서관을 세웠다고 한다. 특히 그의 도서관에는 158개 폴리스의 정체 자료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아테네의 시민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불경죄’로 고소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는 아테네인들이 두 번째로 철학에 대해 죄를 짓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신의 땅이 있는 에우보이아의 칼키스로 갔다. 그리고 기원전 322년, 그는 그곳에서 62살 나이로 죽었다.

스타게이라의 아리스토텔레스 공원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신상.
스타게이라의 아리스토텔레스 공원에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전신상.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상당한 양의 저술을 남겼다. 그 가운데에서도 폴리스의 형성과 구조, 바람직한 정치체계, 통치기술 등을 다룬 ‘정치학’은 정치를 ‘하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일’로 다룬 그리스인들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사회성을 강조한 철학자로서 “인간은 폴리스적 동물이다”(정치학 제1권 1253a3-4)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개인의 진정한 행복은 도덕과 질서가 바로 선 폴리스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기에 그는 개인보다는 폴리스가 우선해야 한다고 보았고, 정치가의 임무는 폴리스 공동체의 도덕과 질서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정치학은 그에게 윤리학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는 왕정이라는 한 가지 정체만 아는 사람들은 그에 순응하지만 그리스인들처럼 여러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통치자의 이익만 추구하는 독재정치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정치체제를 받아들이면 그곳에는 한 명의 주인과 수많은 노예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온전한 인간이라면 새로운 형태의 이상국가를 실험하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그는 노동 없는 축재인 고리대금업(금융업)을 비난하면서 무한 경쟁을 전제로 한 물질 만능의 개인주의 사회는 빈부 격차만 늘려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고 단정했다.

땅거미가 지는 스타게이라 언덕에서 “이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고향이 아니었더라면 누가 이 구석진 곳까지 오겠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곳은 참 아름다웠다.

■ 기원전 700년에서 500년 사이의 그리스 정치체제의 변화

스타게이라 성벽의 외관.
스타게이라 성벽의 외관.
기원전 700년부터 기원전 500년 사이에 그리스에서 왕정이 거의 다 사라졌다. 기원전 6세기 끝 무렵에는 스파르타와 마케도니아, 에피로스, 키프로스, 키레네에서만 왕정이 유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실 안의 불화와 법을 무시하는 왕들의 독선적 독재 때문에 왕정이 몰락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실제로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에서는 두 왕족 가문이 치열하게 권력 다툼을 하다가 공멸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폴리스에서는 왕들의 권력 남용 때문에 왕정이 무너졌다.

왕이 권력의 상당 부분을 양보한 스파르타와, 왕이 시민들과 함께 권력을 나눠 행사하도록 타협한 키프로스에서는 왕정이 유지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왕정은 절제를 지킴으로써 보존되고, 왕들의 특권이 제한될수록 더 오래간다”고 주장하면서, 왕의 통치를 감독하는 감독관 제도를 허용함으로써 왕권의 상당 부분을 양보한 스파르타의 테오폼포스 왕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보다 더 적은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부끄럽지 않으냐”고 묻는 아내에게 “부끄럽긴, 나는 아들에게 더 오래 지속될 왕권을 물려주는 거요”라고 대답한 사건을 전해준다.

왕정이 물러간 자리를 귀족들의 과두정이 채웠다. 코린토스에서는 한 가족이 권력을 독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폴리스에서는 1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귀족 집단이 권력을 나눠 가졌다. 귀족들의 권력은 거의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들의 임기는 죽을 때까지였고,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또 법을 제정하고 직접 집행까지 했을 뿐 아니라 모든 공직을 독점했다. 귀족들의 권력 남용과 경제적 착취에 분노한 시민들은 우선 귀족들에게 자기들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문자로 적은 법, 즉 성문법을 요구했다. 국가 방위를 위해 스스로 비용을 감당하여 무장한 시민들이 꼭 필요했던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이런 요구를 들어주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귀족들의 행패가 그칠 리 없었다. 그러자 일부 과격한 시민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귀족정을 뒤엎고 자기들 스스로 직접 정치에 참여하려 했다.

이미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과 알력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귀족정에 대한 도전은 두 방향에서부터 왔다. 그 가운데 하나는 권력도 재산도 없는 평민 계급의 폭발 직전의 불만에서 왔고, 또 하나는 이런 민중들의 불만을 업고 참주가 되려는 귀족들의 야심에서 왔다. 이런 도전에 귀족정은 제대로 응전하지 못했다. 그 결과 기원전 500년쯤에는 거의 모든 폴리스에서 귀족정은 가난한 시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빼앗는 참주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내주고 오직 기원전 6세기에 역사적 발전이 멈춘 크레타에서만 겨우 명맥을 이어갔다.

위기를 맞은 귀족들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은 나름대로 민중들의 개혁 요구를 들어주어 정권을 유지해보려고 노력했다. 몇몇 폴리스에서는 솔론과 같은 신망이 두터운 인물에게 절대권력을 주어 계급 간의 갈등을 해소해보려 했다. 이때 가장 흔히 취한 조처는 귀족 이외에 스스로 성공하여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일부 신흥 부자 계급의 정치 참여를 허락하는 것이었다. 이런 정치를 금권정치(plutocracy) 또는 명예정치(timocracy)라고 한다. 금권정은 개인의 능력을 기준으로 한다는 점에서 핏줄에 의해 고정된 귀족정에 비해 더 유연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제도였다.

이런 불만을 비집고 등장한 것이 참주정이었다. 흔히 고대 그리스 대부분의 폴리스에서 민주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기원전 6세기 초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흔한 정치체제는 참주정이었다. 또 이 시기 내내 참주정은 민주정의 가장 강력한 경쟁 체제로서 민주정을 위협했다. 농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보다는 상업이나 가내공업이 발달한 폴리스일수록, 그리고 귀족들 사이의 불화가 심해 정치적인 상황이 불안할수록 참주정이 자리잡기 쉬웠다. 또 이웃에 강력한 적이 있거나 전쟁 중이어서 불안한 상태에 놓인 폴리스에서는 시민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기에 참주정이 나타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까닭에 야만족들에게 둘러싸인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와 페르시아 침입의 위협을 받던 소아시아에서는 참주정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리고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의 그리스 폴리스를 점령한 뒤에는 소아시아의 모든 그리스 폴리스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는 참주들의 지배를 받았다.

■ 참주란 어떤 존재인가?

참주들은 억압받는 가난한 시민 편에 서서 귀족들에게 맞섬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얻어 비합법적 수단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이다. 모든 참주들은 귀족이었다. 당시에는 오직 재산과 명성, 교육을 독점했던 귀족들만이 권력 가까이에 있으면서 권력의 생리를 알고 야심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들만이 권력을 잡은 뒤에 친척이나 친구들의 지원으로 정권을 지킬 수 있는 능력과, 권력 투쟁이나 유지에 필요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고, 민중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교양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런 자격을 갖춘 귀족 한 명이 정부 고위직을 차지하여 큰 권력을 얻는다든지,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든지, 또는 극심한 빈부 차이로 사회 분위기가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중재자로 나선다든지 하게 되면 그 누구도 그가 참주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일단 권력을 잡은 참주들은 외국인 용병에 의지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현상을 “왕의 친위대는 시민이고, 참주의 친위대는 외국인 용병이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참주들이 외국인 용병을 선호한 것은 자기의 과거를 잘 알고 있는 자국의 시민들보다는 외국인을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참주들은 귀족들을 비롯한 옛 권력자들을 죽이거나 추방했다. 특히 인민을 착취했던 옛 권력자의 제거나 추방은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였을 뿐 아니라 유력한 정적들을 제거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국내 정치에 있어 참주들은 기득권층 귀족과 싸워야 했기에 겉으로는 핍박받는 민중을 위하는 척했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기 개인의 권력과 축재와 쾌락이었기에 자신의 이익만 챙기고 공익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투키디데스가 지적한 대로 참주들은 자신의 안전과 일족의 축재에만 관심이 있었다. 외국인 용병 친위대와 호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참주정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평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참주정은 왕정이 왜곡된 것으로 독재자가 마치 주인이 노예를 대하듯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온갖 잔혹하고 야비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자기와 동등하거나 훌륭한 자들을 자의적으로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사악한 정치체제라고 혹평했다.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들은 참주정에 비판적이다. 설사 참주정이 한 폴리스의 위기에서 유일한 해결 방법이었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런 부정적인 여론 때문인지 기원전 4세기 들어 그리스 본토 안의 참주들 대부분은 한 번도 참주정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스파르타에 의해 축출당하고 만다. 무엇이 스파르타로 하여금 참주정을 그토록 혐오하게 만들었을까?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