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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두차례 방해공작…아테네 민주정은 더 강해졌다/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28. 21:48

국제유럽

스파르타의 두차례 방해공작…아테네 민주정은 더 강해졌다

등록 :2016-03-27 20:31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⑦ 참주정이 시작된 곳, 코린토스

지협이 있어서 동과 서 양방향 항해가 가능했던 고대 그리스 도시 코린토스의 모습. 코린토스는 참주정이 시작된 곳으로, 사진에 나타난 길은 코린토스에서 외항인 레카이온으로 통하는 길의 모습이다.   유재원 교수 제공
지협이 있어서 동과 서 양방향 항해가 가능했던 고대 그리스 도시 코린토스의 모습. 코린토스는 참주정이 시작된 곳으로, 사진에 나타난 길은 코린토스에서 외항인 레카이온으로 통하는 길의 모습이다. 유재원 교수 제공
기원전 1100년쯤에 바닷사람들의 침입으로 미케네 문명이 갑자기 막을 내리고 문자가 없는 300년 동안의 긴 암흑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기원전 800년쯤부터 새로운 철기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번성했던 도시는 지협을 가지고 있어 동과 서의 양방향 항해가 가능했던 코린토스였다. 바로 이곳에서 기원전 7세기 중엽에 그리스의 독특한 정치 체제인 참주정이 시작되었다. 코린토스도 아테네와 마찬가지로 귀족들의 토지 독점과 무산 계급 사이의 갈등이 심각했다. 그러나 여러 귀족 집안이 지배하던 아테네와 달리 단 한 가문에 의해 지배되던 코린토스의 지배층은 타협을 통한 개혁을 하기보다는 산아제한이라는 방법을 통해 독점 체제를 이어가려다가 민심을 잃고, 킵셀로스라는 야심가에게 쿠데타를 당해 몰락하고 만다. 이것이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기득권 귀족을 몰아내고 독재를 하는 참주정의 시작이었다. 코린토스의 아고라 중앙 광장에 서면 이 도시의 한때 영광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아테네 참주 몰아낸뒤 권력공백기
귀족 이사고라스, 반대파 숙청하려
스파르타 끌어들여 공격했지만 실패

스파르타, 아테네가 날로 강해지자
참주 앉히려는 목적 숨긴 채
동맹국 군대 모아 다시 쳐들어갔다
아테네 시민들 냉정 잃지 않고 승리
헤로도토스 “자유민, 뛰어난 전사로”

집요한 스파르타, 동맹국들 재설득
참주정 겪은 코린토스가 반대 앞장
아테네에 참주 앉히려는 음모 좌절돼

■ 혁명 후 과도기의 위기

모든 혁명이 그렇듯 아테네에서도 참주를 몰아낸 뒤 생긴 권력의 공백을 두고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조직과 자금 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이사고라스가 대표 아르콘으로 선출되자, 클레이스테네스는 이에 맞서 민회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네 개의 부족을 해체하고 대신 열 개의 새로운 부족을 만들어 민중들의 손에 상당한 정치적 권력을 넘겨주는 법안을 통과시켜 민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 개혁으로 클레이스테네스는 민주파의 우두머리로 두각을 나타냈고 귀족 과두정의 가망성은 거의 사라졌다.

고대 그리스 도시 코린토스의 아고라 중앙광장의 유적지. 코린토스는 고대 그리스 철기 문명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고대 그리스 도시 코린토스의 아고라 중앙광장의 유적지. 코린토스는 고대 그리스 철기 문명 시대에 가장 번성했던 도시였다.
위협을 느낀 이사고라스와 귀족들은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왕을 다시 끌어들여 반대파를 숙청하려 했다. 이사고라스는 아크로폴리스에서 히피아스를 포위할 때부터 클레오메네스와 친하게 지냈을 뿐 아니라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 부인은 정부 사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이사고라스의 부추김을 받은 클레오메네스는 아테네에 전령을 보내 클레이스테네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니 추방하라고 요구했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치세 이전에 올림피아 제전의 우승자였던 ‘킬론’이란 자가 참주가 될 야망을 품고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 그러자 이를 막으려는 아테네 시민들이 무장을 하고는 이들을 포위했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킬론 일당은 결국 아테나 여신 신상이 있는 신전 안으로 몸을 피해 여신에게 탄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테네 시민들은 킬론 일당에게 목숨은 살려 줄 테니 대신 신전에서 나와 재판을 받으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신전 밖으로 나오던 그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이때 그들을 죽인 장본인이 클레이스테네스가 속한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성모독을 저지른 사람이 폴리스에 계속 머물면 신의 저주와 분노가 온 폴리스를 오염시켜 큰 불행을 가져온다고 믿었기에 그 죄인을 추방하는 전통이 있었다.

클레오메네스의 요구가 민회에 알려지자 클레이스테네스는 혼자서 아테네를 떠났다. 그럼에도 클레오메네스는 아랑곳 않고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아테네로 와서 이사고라스가 지목한 민주파 700 가족을 모두 ‘저주받은 자’로 몰아 추방했다. 그리고 의회를 해산하고 이사고라스 지지자들로 구성된 300명의 위원회로 대체하려고 했다. 이에 의회가 저항하자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파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를 점령했다. 그러자 시민들까지 무장하고 의회를 도와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했다. 킬론의 위기 때와 흡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도 클레오메네스와 이사고라스파는 수적으로 절대 불리했다. 클레오메네스는 아테네 의회 대표들과 협상을 원했고 휴전 협정은 포위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 이사고라스와 과두정파 사람들을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클레오메네스를 비롯한 스파르타인들은 모두 아테네를 떠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사고라스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나머지 과두파 사람들은 모두 잡혀 처형당했다. 이제 아테네가 귀족 과두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 계속되는 스파르타의 위협

추방되었던 클레이스테네스와 민주파 인사들은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 시민들은 스파르타가 더 강한 군대를 몰고 다시 침입할 것이 두려워 강대국 페르시아와 협정을 맺기를 바랐다. 그래서 사절단을 페르시아의 소아시아 수도인 사르데이스로 보냈다. 페르시아 총독은 ‘땅과 물’을 페르시아 대왕에게 복종의 표시로 바치지 않는다면 어떤 나라도 대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테네 사절단은 페르시아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내겠다는 생각만으로 이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테네 민회는 이런 굴욕적인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절단을 엄하게 처벌했다.

아테네인들의 두려움은 사실로 밝혀졌다. 아테네인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한 클레오메네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역에서 동맹국들의 군대를 모았다. 그러나 클레오메네스는 이번 원정의 목적이 아테네인들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하고 이사고라스를 참주로 앉히는 것임은 밝히지 않았다. 클레오메네스 자신은 서쪽에서부터 진격했고, 동맹국 보이오티아는 북쪽에서, 칼키스는 북동쪽에서 아티카 반도로 침입했다.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은 아테네인들은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들은 우선 가장 강한 적이 있는 서쪽으로 주력 부대를 보냈다. 그러나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클레오메네스의 숨은 목적이 동맹군 장군들에게 알려졌다. 이에 가장 먼저 코린토스 군의 장군이 이번 원정은 정의롭지 못하다며 철군했다. 그러자 그와 함께 스파르타에서 온 또 다른 한 명의 왕인 데마라토스 역시 자기 휘하의 스파르타 군을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를 계기로 스파르타에서는 두 명의 왕이 동시에 출정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다른 동맹국들도 더 이상 남아 싸울 의지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와해되었다.

위기를 넘긴 아테네인들은 주변의 적들에게 복수의 칼을 돌렸다. 우선 에우보이아 섬에 있는 칼키스로 진격하는 도중 이들을 도우려고 오던 보이오티아 군을 크게 무찌르고 700명의 포로를 잡았다. 같은 날 에우보이아 섬으로 진격하여 칼키스도 점령했다. 그리고 그곳 부자들의 땅을 4000명의 아테네 이주민 농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날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은 많은 몸값을 받고 풀어 주었다. 기원전 506년의 일이었다.

헤로도토스는 민주화된 아테네의 이런 눈부신 군사적 성공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감을 밝혔다.

“아테네는 전에도 강력한 폴리스였지만 참주에게서부터 벗어나자 더욱 강해졌다. … 법 앞의 평등이 어느 한 면에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밝혀졌다. 왜냐하면 아테네인들이 참주들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전쟁에서 어떤 나라도 능가할 수 없었지만, 참주들에게서 벗어나자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압제하에서 주인을 위해 일하기에 일부러 게으름을 피우는 반면, 자유민이 된 지금은 각자 자기를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 집요한 스파르타의 민주정 전복 시도

이렇게 날로 강해지는 아테네를 바라보는 스파르타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게다가 클레오메네스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서 물러날 때 가지고 온 기록들을 통해 페이시스트라토스 일가의 참주 독재 시절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델포이의 여사제 피티아를 매수하여 스파르타로 하여금 아테네 참주정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신탁을 내리게 한 사실이 밝혀지자 스파르타의 여론은 급격히 아테네를 처벌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아테네가 이미 상당히 강해져 더 이상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음이 분명해진 지금 스파르타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견 역시 강했다. 그들은 아테네 시민들이 자유를 누리면 자신들의 맞수가 될 수 있지만 참주의 억압을 받으면 허약해지고 고분고분해질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스파르타인들은 지난번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우선 인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이사고라스 대신에 자신들이 쫓아냈던 히피아스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른 동맹군들을 초청하여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스파르타인들은 동맹국 지도자들에게 자신들이 히피아스를 참주 자리에서 몰아낸 것은 알크마이온 집안 사람들이 델포이를 매수하여 내린 거짓 신탁에 놀아나 저지른 큰 실수였으며, 그들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도와 아테네의 자유를 찾아주었지만 아테네인들은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오만불손하게도 스파르타 왕을 추방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동맹국인 보이오티아와 칼키스를 침략하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으니 그들의 오만을 벌하지 않으면 다른 폴리스도 같은 불행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맹국 대표들은 아테네를 상대로 함께 전쟁을 일으키자는 이 말을 듣고 동조하고 싶지 않았지만 감히 드러내 놓고 맞서기를 꺼려 조용히 있었다.

그때 참주정의 혹독함을 뼈저리게 겪은 코린토스의 대표 소시클레에스가 말문을 열었다. 우선 그는 같은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다른 폴리스를 폭력으로 뒤엎고 정치 제도 가운데 가장 정의롭지 못하고 피에 굶주린 참주정을 복원하려는 스파르타인들에 대해 분노를 표시했다. 그리고 만약 참주정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스파르타인 자신들부터 참주정을 도입하라고 일침을 놓았다. 참주정을 경험해 본 적도 없고 또 참주정이 들어서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스파르타가 다른 폴리스에 참주정을 세우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가를 역설했다. 그리고 코린토스인 자신들처럼 참주정의 혹독함을 경험했더라면 절대로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도시 코린토스가 킵셀로스와 그의 아들 페리안드로스의 참주정 아래에서 어떤 수난과 고통을 받았는가를 이야기하고는, 끝으로 스파르타인들이 전령을 보내 히피아스를 불러온 것에 대해 비난하면서, 다른 폴리스 대표들에게 참주제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충고와 함께 만약 계속 스파르타를 따라 히피아스를 아테네 참주로 복권시키려 한다면 코린토스의 지지는 조금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로 말을 마쳤다. 이 말을 들은 다른 동맹국 사절들은 모두들 말문을 열고 코린토스인의 의견에 동조할 뿐 아니라, 스파르타인들에게 다른 그리스 폴리스의 내정에 개입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이렇게 하여 히피아스를 아테네의 참주로 다시 앉히려는 스파르타의 음모는 좌절됐다.

스파르타에서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된 히피아스는 자신의 이복동생이 다스리는 시게이온으로 돌아갔다가 페르시아의 총독이 있는 사르데이스로 가서 아테네인들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페르시아의 힘을 빌려 아테네를 다시 지배할 궁리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을 때 페르시아군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아테네로 돌아온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와 같이 두 번에 걸친 스파르타의 방해 공작을 극복한 아테네는 클레이스테네스의 지도 아래 민주정을 확고히 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