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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둘이었던 스파르파는 독재를 막기 위하여 /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9. 15:39

국제국제일반

왕이 둘이었던 스파르타…독재를 막기 위한 장치였다

등록 :2016-05-08 19:51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⑩ 스파르타 폐허에서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독재자인 참주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스파르타의 모습은 폐허가 된 원형극장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독재자인 참주들을 몰아내는 데 앞장선 스파르타의 모습은 폐허가 된 원형극장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라케다이몬인들의 도시가 폐허가 되고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사람들은 아마도 그들에게 과연 명성만큼의 실력이 있었는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 그들은 한 도시에 모여 살지도 않고, 값비싼 신전이나 물건도 없고, 그리스의 옛 관습에 따라 여러 마을에 흩어져 살기에 외견상 초라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일이 아테네에 일어난다면, 사람들은 외관만 보고 이 도시가 실제보다 두 배나 더 강했다고 추측할 것이다.”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제1권 10장, 2)에서 스파르타를 두고 한 말이다. 과연 오늘날 스파르타에는 화려한 신전의 흔적도 궁전 터도 남아 있지 않다. 거의 다 무너져 버린 원형극장 폐허만 초라하고 을씨년스럽게 나그네를 맞을 뿐이다. 절제와 극기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검소하게 살던 스파르타인들은 플라톤과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수많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비쳤다.

스파르타의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매혹했을까? 현대인들은 물론 당시의 다른 그리스 폴리스 사람들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스파르타 정신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얼핏 보기에 전체주의의 전형으로 보이는 이 폴리스가 어떻게 기원전 6세기 동안 그리스 곳곳의 참주를 몰아낸 나라로 유명했을까?

토지 부족과 불평등 해소 위해
메세니아 정복한 뒤 개혁 돌입
토지는 불완전 분배로 끝나고
후일 멸망을 부르는 요인이 됐다

정치에선 시민 참여 폭을 높였다
30살 이상 시민들로 민회 구성하고
모든 법은 민회 동의를 받도록 했다

민회가 선출한 5명의 집정관들이
모든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왕은 두 집안서 한 명씩 배출했다
둘은 서로 거부권을 갖고 있었다
독특한 체제의 목적은 단 하나
권력 독점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 기원전 8~7세기의 스파르타 역사

기원전 8세기가 시작될 무렵 스파르타는 토지 귀족이 민회를 지배했던 다른 폴리스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직도 왕정이 유지되어 있다는 것만이 특이한 점이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은 인구 증가에 따른 토지 부족의 문제와 토지 소유의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서 다른 폴리스들처럼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는 대신 비옥한 이웃 지방 메세니아를 정복하는 전쟁을 선택했다.

기원전 735년부터 기원전 715년까지 20년 동안 벌어졌던 제1차 메세니아 전쟁에서 스파르타는 악전고투 끝에 승리하고 메세니아의 주민들을 노예화하여 스파르타의 구성원 가운데 제일 하층민인 ‘헤일로타이’(Heilotai)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고 얻은 땅에 대한 분배는 그리 공정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스파르타인들은 반란을 일으킬 기세였다. 이런 위험을 줄여 보고자 기원전 706년에 남부 이탈리아 타라스(지금의 타란토)에 식민도시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는 목숨을 걸고 싸웠음에도 불평등한 차별을 받았다고 분노에 차 있는 시민들을 달랠 수 없어 긴장은 높아만 갔다.

그런 와중에 스파르타는 기원전 669년에 중장비 보병을 앞세운 이웃의 아르고스에 참패를 당했다. 중장비는 비싸므로 중장비 보병을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 이상의 토지를 가진 중산층이 있어야 했다. 토지개혁을 통해 중산층을 키워 이런 위기를 극복해 보고자 하던 당시의 왕 폴리도로스는 귀족파에게 암살당했다. 이런 혼란을 틈타 기원전 650년에 메세니아 지방의 헤일로타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2차 메세니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메세니아인들이 북쪽의 아르카디아의 원조까지 받아 결사적으로 버티는 바람에 기원전 600년에 스파르타가 최후의 승리를 할 때까지 자그마치 5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메세니아인들은 그 이전까지 아직 빼앗기지 않았던 땅마저도 다 잃었다. 이제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의 5분의 2 정도의 땅을 차지한 그리스 안에서 가장 큰 폴리스가 되었다.

■ 스파르타의 세 계층

메세니아 전쟁 후 스파르타는 주민을 폴리스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온전한 시민인 스파르티아타이와 스파르타 영토 안에 사는 자유인이지만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는 페리오이코이, 그리고 국가의 노예인 헤일로타이의 세 계층으로 구분했다. 스파르티아타이는 조상 때부터 스파르타 도심에 살던 원주민의 후예들로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아고게)을 받아야 했고 군인 이외의 직업은 허용되지 않았다. 이들은 메세니아 지방의 일정한 토지를 배정받아 헤일로타이들이 경작하는 생산물로 생활을 꾸려갔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가난해져 자기에게 할당된 공동생활 비용을 댈 여력이 없어지면 스파르타인 자격을 상실하고 중간 계층인 페리오이코이로 강등되었다. 이 법 때문에 스파르타는 후대에 전투 등으로 시민을 잃었지만 이를 보충할 수 없어 국가 유지가 위태롭게 되고 만다.

기원전 480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해 굴복하지 않는 스파르타의 정신을 보여준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기원전 480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해 굴복하지 않는 스파르타의 정신을 보여준 레오니다스 왕의 동상.
두 번째 계층인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타 영토의 외곽 지역에 사는 자유인들로서 자치권과 재산권을 보장받았지만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또 이들은 아고게의 대상도 아니었고 스파르티아타이와 결혼도 할 수 없었다. 농업이나 교역, 제조업에 종사했던 페리오이코이들은 과세와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이소크라테스는 이들이 스파르타가 형성되던 초기에 귀족들에게 권력을 빼앗긴 일반 시민들이라고 전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스파르티아타이와 페리오이코이를 아울러 라케다이모니오이라고 불렀다.

최하류 계층인 헤일로타이는 정복당한 메세니아인들로 땅에 매인 국가 소유 노예였다. 이들은 수확의 절반을 주인에게 바쳐야 했고 의무적으로 개가죽 모자와 가죽조끼를 착용해야 했고 연중 일정 대수의 매를 맞아야 했다. 만약 헤일로타이의 주인이 이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면 벌금을 물어야 했다.

기원전 7세기 중반 스파르타에는 3만6천명의 스파르티아타이(성인 남자 9천명, 아녀자 2만7천명)와 3만명의 페리오이코이, 그리고 12만명의 헤일로타이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 전설적 천재 입법가 리쿠르고스의 개혁과 스파르타의 정치 체계

아르고스에 참패당한 쓰라린 경험과 50년 동안의 헤일로타이들과의 전쟁에서 중장비 보병의 중요성은 확실해졌다. 아직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영웅들처럼 일대일 결투를 선호하던 귀족들 역시 자신들의 특권을 상당히 양보하지 않는 한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 메세니아에서 새로 얻은 토지를 시민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고 또 어떻게 이에 따른 새로운 정치 체제를 만드느냐 하는 것이다. 이 일을 맡아 성공적으로 개혁을 해 낸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리쿠르고스다.

플루타르코스(<생애 비교> 리쿠르고스전 8장 1~2절)는 리쿠르고스가 토지 소유의 엄청난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가난하고 무력한 시민들이 많아져 폴리스 자체가 힘들어지고, 소수 부자들의 교만과 사치가 가난한 자의 질투와 범죄로 이어지면서 사회 불안이 생긴다고 보고, 귀족들에게 토지를 모두 내놓게 한 뒤 새로 나누어 평등한 생계 수단을 가지고 동등하게 살면서 덕이라는 것만으로 뛰어남을 겨루도록 하는 동시에 천한 행동을 비난하고 훌륭한 행동을 칭찬하는 방법으로 사람들 사이에 차이나 불평등이 없음을 납득하도록 배려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새로 얻은 메세니아의 땅을 9천 필지는 스파르타 시민에게, 3만 필지는 페리오이코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라코니아 지방의 소유 토지에는 손대지 않고 새로 정복된 땅만 분배한 듯하다. 따라서 전통 부자인 귀족들은 여전히 일반인들보다는 많은 땅을 가지고 있어 빈부 차이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것 같다. 나중에 이런 빈부 차이가 스파르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여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토지 분배보다 더 중요한 개혁은 정치 분야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에는 친족 중심으로 되어 있었던 정부 구성을 지역적 구분으로 대체하여 옛 명문가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시민들이 좀 더 폭넓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리쿠르고스가 만들어낸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는 군주정과 귀족정, 그리고 민주정이 묘하게 혼합된 형태였다.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에 있어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왕이 두 명이라는 것이다. 헤라클레스의 자손인 ‘아기아다이’ 집안과 ‘에우리폰티다이’ 집안에서 각기 한 명씩 왕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동등한 자격을 가져 서로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한 명의 왕이 지나친 권력을 갖게 되어 독재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왕들은 종교와 사법, 군사적 권한과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왕들은 종교적으로 국가의 최고 제사장이었고, 스파르타 정치에서 늘 중요했던 델포이 신탁을 받기 위한 일들을 담당했다. 군사적으로 왕들은 전쟁 때에 사령관직을 맡을 권리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파르타의 왕정을 “일종의 무제한적이고 영속적인 장군직”(<정치학> 3권 I285a)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그들의 군사적 권한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줄어들어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진 기원전 5세기 초부터는 왕들은 독자적으로 선전포고를 할 권한을 잃고 전쟁에 나갈 때 반드시 집정관인 에포로스 두 명과 함께 동행해야 했다. 사법적으로도 왕들의 권한은 계속 줄어들어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기술했던 기원전 450년쯤에는 상속녀, 양자 입양, 공공도로에 관한 송사 정도로 제한되었다. 민사 및 형사 소송은 처음에는 원로원인 게루시아, 나중에는 집정관들인 에포로이에게 권한이 넘어갔다. 이렇게 되어 스파르타에서 두 왕은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남게 되었다.

일종의 입법기관인 게루시아는 두 명의 왕과 28명의 원로들로 이루어졌다. 종신직인 원로들은 민회에서 선출되었는데 후보 자격은 60살 이상의 귀족 출신으로 제한되었다. 스파르타에서는 아직 60살이 되지 않은 사람은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기에는 미숙하다고 여겨졌다. 새로운 원로를 뽑을 때, 민회에서 남들보다 더 큰 박수를 받은 사람을 당선자로 결정했다. 스파르타인들은 이 방법이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루시아는 땅의 소유와 군 복무, 시민들의 공동식사에 내야 할 공동 비용과 같은 중요한 사항에 대한 입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국가의 중요한 정책들을 심의하여 민회에 법안을 제안했다. 이때 항상 두 개의 법안을 제출해 민회가 그 두 법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그리고 민회에서 어떤 법안이 부당하게 통과되었다고 생각하면 게루시아는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있는 비토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 게루시아는 기원전 5세기 초까지 최고 법정으로 살인과 같은 중요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아펠라’(Apella)라고 불렸던 민회는 30살 이상의 스파르타 시민으로 이루어졌다. 민회는 한 달에 한 번, 보름달이 뜨는 날 열렸다. 모든 법은 민회의 동의를 구해야만 효력이 있었다. 민회는 투표를 통해 게루시아가 제출한 두 법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그러나 민회는 법안에 대해 논의하거나 개정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일반 시민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에포로이들은 민회에서 선출되었는데 임기는 1년이었다. 에포로이는 정부의 법령 집행과 군과 경찰 업무, 비밀경찰 크립테이아 운영과 같은 모든 실질적인 권력 행사를 했다. 에포로이들의 이런 권한들은 원래 왕들의 것이었는데 기원전 7세기와 6세기 사이에 모두 에포로이들에게 넘어갔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런 독특한 스파르타의 정치 체제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그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여 독재를 할 수 없게 하기 위한 치밀한 정치적 장치들을 마련하다 보니 이런 독특한 정치 형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이렇게 정해진 법들을 철저하게 잘 지켰다. 그리고 독재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이런 두려움과 혐오가 스파르타가 기원전 6세기 동안 그리스 세계에서 독재자인 참주들을 몰아내는 데 열을 올리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