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군산 개복동 애가(哀歌) / 곽병찬의 향원익청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27. 21:55

사설.칼럼칼럼

개복동 애가(哀歌)

등록 :2016-04-26 18:52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

월명산이 감싸안은 월명동 금동 영화동 장미동 등에 정복자들은 조선판 ‘교토’ 같은 도시를 세우려 했다. 그러나 둔율동, 창성동, 선양동 등 산비탈 동네나 비탈과 평지에 어중간하게 걸친 개복동에는 조선인들이 게딱지처럼 붙은 움집, 토막집에서 짐승처럼 살았다. 소설 <탁류>에나 의지해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2002년 1월29일 개복동 7-13번지 대가-아방궁에서 21~24살 여성 14명이 화재로 질식사했다. 1층 창문은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2층 옥상으로 가는 출입문도 잠겨 있었다. 시민사회는 그곳에 여성인권교육센터를 세우자는 운동을 10여년째 해왔다. 그러나 군산시도 주민들도 외면했다. 그들은 그저 싸그리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었다.

명암의 대조가 어쩌면 그렇게도 극단적일까. 월명동은 화사했고 개복동은 음울했다. 영화동은 반듯했고 창성동, 둔율동은 미로였다. 장미동은 과시적이고 선양동은 웅크리고 있었다. 하나 세상의 모든 극단이 그렇듯이, 비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신기루 속을 걷듯이 몽롱했다.

월명산이 감싸안은 햇볕 잘 드는 품 안엔 월명동, 금동, 영화동, 장미동 등이 들어앉았다. 정복자들은 그곳에 조선판 ‘교토’ 같은 도시를 세우려 했다. 전주통, 본정통, 소화통 등 반듯한 도로를 내고, 경찰서, 세관, 일본18은행 군산지점 등 은행,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등 억압과 수탈기구를 들였다. 히로쓰등 일본인 대지주의 호화 저택들을 짓고, 마을 뒤 산자락엔 정통 일본식 사찰 동국사를 앉혔다. 월명산의 바다로 향한 마루엔 마루야마 같은 공원을 꾸몄다. 그들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군림하며 살고자 했던 것이다. 제국의 영화에 젖고 싶은 일본인들은 지금도 이곳을 찾는다. 지금의 군산시도 세상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데 이곳을 앞세운다.

그러나 군산 구도심을 떠받치는 건 그곳만이 아니었다. 1934년 인구조사에서 군산 인구는 3만6959명, 조선인 2만7144명, 일본인 9408명이었다. 그러나 소설가 채만식이 <탁류>에서 추정한 ‘조선인 6만, 일본인 1만’여명이 현실에 가까웠다. 월명산에 게딱지처럼 붙은 움집, 토막집에서 짐승처럼 살던 조선인들 상당수는 통계에 잡히지 않았다. 둔율동, 창성동, 선양동 등 산비탈 동네나 비탈과 평지에 어중간하게 걸친 개복동이 그런 곳이었다.

“보라! 개복정(개복·창성동), 약송정(개복·선양동), 산상정(선양동), 둔율정(둔율동·둔뱀이) 일대를! 그중에도 고지대를! 다시 말하면 조선인 빈민지대를! 거리마다 오물이 산적하여 있으며, 변소의 분뇨가 도로에 일류(溢流)하여 통행인으로 하여금 코를 들지 못할 지경이오~.”(<동아일보> 1936년 8월20일치) 일제하에서도 그랬듯이 지금도 이들 마을은 지우거나 숨겨지고 있다. 군산시가 간행한 ‘1930년대 시간여행’ 지도에도 없다. 수탈기관과 억압기구 그리고 일본인 호화 주택들만 볼거리로 삼았다. 소설 <탁류>에나 의지해야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탁류>의 정주사는 땅 팔고 집 팔아 마련한 돈을 미두장에서 몽땅 털린다. 일제가 조선의 쌀 유통을 통제하고, 조선인들의 남은 재산을 털어먹는 데 이용한 것이 미두장(쌀 선물시장)이었다. ‘화투는 백석지기 노름이요 미두는 만석지기 노름’이었다. 미두장 근처를 떠나지 못하고 하바꾼 노릇을 하던 정주사는 어느날 젊은것에게 멱살을 잡힌 채 온갖 모욕과 조롱을 당한다. 겨우 멱살잡이에서 빠져나와 째보선창에서 궁상을 떨다가 빈해원과 동령고개를 거쳐, 개복동과 아리랑고개를 거쳐 선양동 말랭이 셋집으로 돌아간다. 바로 그 길이다.

빈해원은 한때 군산 화교들의 영화를 보여주는 식당이었다. 뒤편의 동령고개는 월명산의 동쪽 자락이 끝나는 곳이었다. 지금은 깎여나가 반듯한 도로와 주택가가 되었다. 일제가 전주, 익산, 태인 등지에서 쌀을 실어오기 위한 도로 전주통(전군도로)이 시작하는 곳이다. 고개를 넘으면 개복동.

<탁류>는 당시 개복동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 급한 비탈에 게딱지 가튼 초가집이며, 낡은 생철집 오막사리들이 손바닥만한 빈틈도 냉기지 아니하고 콩나물 길듯 다닥다닥 주어 박혀 있다. … 이러한 몇 곳에 군산의 인구 칠 만 명 가운데 육 만도 넘는 조선 사람들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산다.”

일제는 개복동에 도시의 배설용 유흥가를 조성했다. 군산좌(군산극장, 우일씨네마)와 희소관(극도극장) 등이 들어섰고, 호남에서 최대 규모였다는 윤락가가 골목골목 들어섰다. 개복동 윤락가는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6·25전쟁과 미군의 진주로 말미암아 성황을 이뤘다. 미군 영외거주자들은 산북동 아메리카타운에서 벗어나 개복동 인근 영화동에 현지처와 살림을 차렸다.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엔 일본인 기생관광단이 밀려왔다. 유신정권은 도선장 부근에 세일러하우스를 짓고 성매매 타운을 건설했지만, 개복동의 역사와 연륜을 지울 순 없었다. 2002년 개복동 성매매업소 화재 참사가 일어날 때까지도 그 맥은 이어졌다.

시민들이 예술인의 거리 혹은 예술촌으로 변신시키려 안간힘 쓰는 개복동 교복거리를 지나 창성동 쪽으로 들어서면 콩나물고개다. 왼쪽으로는 둔뱀이(둔율동)이다. 오른쪽 창성동 산비탈엔 조선인 상대의 ‘은군자 마을’(주점 골목)이 있었다. 술도 팔고 몸도 파는 골목이었다. <탁류>에서 고태수가 드나들던 기생 행화네나 200원에 팔려간 명님이의 유곽도 그곳에 있었다. 그곳이 ‘500고지’로 불린 것은 지대가 높기도 하려니와, 싼값에 몸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성동 산마루에 서면 명산동 고개가 발아래다. 고개 북쪽 끝자락에 명산시장이 있다. 점령자들 전용의 고급 유곽이 있던 자리다. 이제 고개는 없다. 산허리를 툭 잘라 월명로를 내었다. 건너편 선양동 말랭이(달동네)와는 다리로 연결했다. 다리 중간엔 정주사의 집터를 알리는 표석이 있다. ‘탁류’ 시절 명산고개 마루쯤 되는 곳이다.

그곳 사람들은 제 땅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조선인들이었다. 일제는 제 논에 물 대기식 토지조사로 수많은 토지를 수탈해 일본인들에게 넘겼다. 소규모 조선인 자영농들도 내쫓아 일본인들이 대농장을 조성할 수 있게 했다. 당시 군산 옥구의 일본인 대농장은 20여개에 달했고, 넓은 곳은 3000만㎡에 달했다. 지주들은 42~47%의 소작료를 물렸다. 그악한 이엽사 농장은 1927년 소작료를 현물 75%로 올렸다. 옥구 농민항쟁의 발단이었다. 농민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100여명이 체포되고 34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옥구항쟁은 전국적인 소작쟁의와 항일농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지만, 수많은 농민이 제 땅에서 쫓겨났다. 호남의 그런 이들이 찾아든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당시 군산엔 전국에서 ‘불량주택’(가마니로 둘러친 집)이 가장 많았고, 토막집도 경성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지금은 해맞이공원으로 바뀐 선양동 말랭이 마루에 서면 구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선창가의 조선은행, 식산은행, 세관, 쌀 창고 건물 등 일제의 수탈시설들이 보인다. 그리고 개복동의 ‘그 자리’도 어림짐작할 수 있다.

그 일은 일제하에서가 아니라 21세기에 일어났다. 2002년 1월29일 오전 11시50분께였다. 대낮이었지만 개복동 7-13번지 대가-아방궁의 21~24살 여성들은 오갈 데도, 오갈 수도 없었다. 건물 출입구에서 불이 났다. 유독가스가 이들의 1층 구석방으로 밀려왔다. 창문을 넘어 탈출하면 간단했지만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2층 옥상으로 탈출하려 했다. 그러나 2층 계단 출입문도 잠겨 있었다. 그들은 그 앞에서 모두 질식사했다. 14명이었다. 그중엔 중풍 걸린 어머니와 늙은 아버지를 위해 ‘돈 벌어 오겠다’며 집을 떠난 유씨(22살)가 있었고, 대학에 합격했지만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한 한씨(23살)가 있었다.

“산다는 것이 힘들어.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집이 그립다. 부모가 보고 싶다. 눈물이 나오려고 그런다.” 이런 메모들 가운데 한씨는 이런 내용을 남겼다. “희망 없는 미래, 순수했던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사고 현장 근처에서 길을 잃었다. 동네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이 반갑게 맞았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말씀 좀 묻겠는데요, 2002년 화재사고가 난 곳이 어디죠?” 주인의 표정이 돌변했다. “몰라요.” 찬바람이 났다. 그러나 현장은 그곳에서 불과 50m 거리였다. 군산 시민사회는 그곳에 여성인권교육센터를 세우자는 운동을 10여년째 해왔다. 그러나 군산시도 주민들도 외면했다. 그들은 그저 싸그리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었다. 개복동, 그 슬픈 조선인들의 비가를. 순수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개복동 나비들의 비원을.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