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15일 미국 항공우주국(NASA) 소속 우주비행사 스콧 켈리가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찍은 태풍 ‘빌’의 모습. 태풍이 미국 멕시코만 인근에서 텍사스 해안(위쪽)으로 접근 중인 가운데, 검은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지구의 둥근 수평선이 드러나 있다. 미 항공우주국 제공
[토요판] 별
지구 평평론
지구 평평론
▶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지구가 둥근 구체라는 사실은 오랜 세월 인류가 과학적 탐구를 통해 밝혀온 결과물입니다. 과학자들뿐 아니라 평범한 이들도 각자의 경험을 통해 지구가 둥글다는 진실을 확증해 왔습니다. ‘구체지구’는 그래서 재반박이 불가능한, 여러 증거들이 쌓인 과학적 진리의 지위에 오른 엄연한 사실입니다. 한데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구가 평평한 원반 모양이라 생각합니다. 아이들도 아는, 분명한 진리를 이들은 왜 외면하는 걸까요.
지구는 둥글다. 이미 오래전에 밝혀져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이다. 굳이 이런저런 증거들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비행기만 한 번 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적으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과학의 시대라고 해도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 같은 복잡한 이론들은 여전히 의심받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만큼은 이제 아무 의문의 여지도 없는 듯하다. 글쎄, 과연 그럴까? 21세기도 조금씩 중엽을 향해 가는 지금, 지구가 둥글지 않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떨까. 과학적 지식이 전해지지 않은 아마존이나 아프리카의 일부 주민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대도시에서 사회생활을 하며 책이나 인터넷으로 모든 현대 지식과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주장들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기나긴 착각과 오해
그런 가운데 지난 1월에는 미국의 유명 래퍼 ‘비오비’(B.o.B)가 수십 개의 트위트를 올리며 이 평평한 지구론을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여기에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닐 타이슨 박사가 반박글을 올리는 일이 벌어졌다. 트위터에서의 이 설전은 비오비와 닐 타이슨이 각각 자신의 생각을 담은 랩송을 만들어 사운드클라우드에 업로드하는 일로까지 이어져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낱 가십거리로 삼기에도 유치해 보이는 이 황당무계한 주장에 의외로 무게가 실리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당황케 한 것은 물론이다.
‘지구 평평론’(Flat earth theory)이라 해석될 수 있는 이 이론의 지지자들은 ‘평평한 지구 학회’(Flat earth society) 등의 모임과 웹페이지를 개설하고 다큐멘터리 영상을 제작하는 등 ‘감춰진 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최근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지구는 구형이 아니라 평평한 접시 형태의 원반이며, 유엔(UN)기에 그려진 세계지도의 형상처럼 북극이 중심에 있고 우리가 남극이라 여기는 지역은 거대한 얼음벽으로 둘러싸인 원반의 테두리일 뿐이다. 기존의 지리학과 지구과학, 천문학 등의 성과를 깡그리 부정하는 참으로 놀라운 주장이다. 혹시 모르니 이쯤에서 확실하게 해 두자. 지구는 둥글고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란 없다. 그 증거들을 굳이 여기에서 열거할 필요도 없다. 다만 돌이켜보면 인류는 스스로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의 정체에 대해 기나긴 착각과 오해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거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심리적 이유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주 오래전, 문명이 발흥하기도 이전의 까마득한 조상들은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할 아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찬란한 문명을 일군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도 세상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뉜 조그마한 지역이 전부였다. 그리스어로 지구를 뜻하는 ‘테라’(Terra)영어의 ‘어스’(Earth)도 마찬가지가 땅이나 흙의 의미를 함께 가진 점을 봐도 세상이 구형일지 모른다는 관념이 일반적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에게 아시아는 한국이나 일본이 아닌 지중해 접경의 터키와 시리아 인근일 뿐이었고, 아프리카도 이집트와 리비아 정도가 고작이었으니 우리가 아는 이 거대하고 둥근 지구는 그 시대 사람들 경험 속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고대 그리스 학자들이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고 있었다는 점은 놀랍기 그지없다. 수학자로 잘 알려진 기원전 6세기의 피타고라스는 그 형태의 순수성을 근거로, 신의 작품이자 인류의 터전인 지구는 완전한 구여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200여년 뒤 아리스토텔레스는 월식 때 달에 생기는 지구의 그림자를 근거로 지구가 구형의 천체라는 훨씬 과학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수평선 너머 다가오는 배의 돛대의 모습을 증거 중 하나로 내세운 것도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더 나아가 지구가 구형이 된 이유를 세상 모든 물질들이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 즉 한 점으로 모이기 때문으로 해석했는데 실제로 지구가 중력에 의해 형성된 과정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대단한 통찰력이라 할 것이다.
‘평평지구’ 주장하는 이들
“지구는 접시 형태 원반”
15세기에야 구형 천체 합의
기나긴 착각과 오해의 역사
자기기만적, 비과학적 태도 믿고 싶은 것만 선택해 믿는
특별해지려는 욕망 탓
감춰진 세상 비밀 탓
과학적 사실까지 부정해도
진실보다 놀라운 건 없다 터무니없는 근거들 이런 고대의 지구 구형론에 정점을 찍은 것으로는 뭐니 뭐니 해도 기원전 240년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계산을 꼽게 된다. 그는 정오에 이집트의 시에네(오늘날의 아스완)와 알렉산드리아 간의 그림자 길이가 다르다는 점을 통해 지구의 둘레를 실제의 10% 정도의 오차로 계산해 냈는데, 2200년 전으로는 믿기 어려운 정확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예들을 보면 과학이 반드시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발전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중세로 들어서며 이런 그리스의 앞선 과학이 잊혀져 과거 득세했던 지구 평평론이 다시 상식으로 득세하게 된 점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지구의 형태와 우주의 구조에 대해 유럽인들이 다시 과학적인 사고를 하게 된 것은 지구중심설(천동설)이 담긴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 <알마게스트>가 15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세계에서 유럽으로 역수입된 이후다. 천동설은 지동설과 비교해 마치 잘못된 생각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지구와 태양, 행성 등을 모두 구형의 천체로 파악한 것은 물론 그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규명한, 당시 유럽인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정교한 과학이론이었다. 이를 접한 유럽 지식인들이 충격을 받고 향후 한동안 지구중심설에 집착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데, 여하튼 태양이 지구를 돌든 지구가 태양을 돌든 그 모든 것들이 둥근 구형이라는 점만큼은 이때쯤 이미 합의가 이뤄진 거다. 그리고 이른바 지리상 발견 시대를 지나면서 구형의 지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증적으로 검증되기 시작했다. 여행과 운송 수단이 발달하며 세상은 점점 작아졌고 마젤란처럼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탐험가들이 생겨났다. 지구가 둥글기에,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기 위해 동쪽의 육로가 아닌 서쪽의 바다를 택했다. 기구와 비행기를 통해 지구의 곡면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고, 급기야 인류는 달에까지 가서 지구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이렇게 오랜 세월 역사적인 검증 과정을 거치고 또 많은 실증적인 증거들이 있는데도 어떻게 이제 와서 다시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지구 평평론자들도 무작정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근거들을 내세우고 있다. 물론 그 내용은 터무니없으리만치 조잡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남극이 존재하지 않기에 아무도 남극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도 명백한 착오라서 검증할 차원의 문제조차 아니다. 이미 1956년 남극점에 아문센-스콧 기지가 설립되어 지금도 운영 중이기 때문이다. 비록 오류로 판명되었지만 빅뱅 중력파 검출로 한때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된 ‘바이셉(BICEP)2’ 전파망원경이 바로 이곳에 설치되어 작동 중이기도 한데, 이런 사실은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 단 몇 분 만에 확인 가능하다. 다른 근거로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남미 지역을 오갈 때 남극 상공을 지나는 직항로가 훨씬 가까운데도 두바이 등 먼 지역을 거쳐서 간다는 점을 든다. 남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의외로 여기에 솔깃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극대륙 옆을 지나 호주 시드니에서 칠레의 산티아고를 오가는 직항로가 있다. 비록 남극 바로 위를 지나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들의 위치가 원래 그렇기에 이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남반구는 북반구보다 인구가 훨씬 적기 때문에 먼 대륙을 연결하는 항로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지구 평평론자들이 이런 유의 근거 없고 불합리한 것들을 철석같이 신봉하는 가운데 정작 과학기술을 통해 얻어낸 구형 지구의 증거들을 싸그리 부정하는 것은 자기기만적이다. 그들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찍어 보낸 수많은 지구 사진들을 모조리 합성이나 조작이라고 치부해 버리는데, 만약 원반형 지구 사진이 하나만 있었어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믿고 싶은 것만을 취사선택하는 통탄할 만치 비과학적인 태도다. 집요한 욕망의 발현 이들이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스스로 특별하고자 하는 인간의 집요한 욕망의 발현이다. 여러 종교의 인류 탄생 설화에서부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생물은 물론 우주 속 모든 것과 차별화되는 지위를 갈망하고 또 오랜 기간 그리 믿어 왔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일견 그런 인류의 특별함을 부정하는 듯하다. 과학이 말하는 138억년 된 우주보다는 기독교 원리주의의 6천년 된 세상 속에서 인간의 크기는 그만큼 크게 보일 수 있다. 천억 개의 은하 속 천억 개의 별 중 행성 하나인 지구보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괴이한 원반 같은 지구가 더 특별히 느껴질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세상에 뭔가 감춰진 비밀이 있고 자신은 그걸 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신봉하는 심리가 대개 이런 것인데 실제로 지구 평평론에는 음모론이 뒤섞여 있다. 각국의 정부는 지구가 원반 형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이 남극 안쪽(얼음벽의 바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 원반 위에는 실은 투명한 돔이 씌워져 있어서 우리들은 그 아래서 마치 영화 <트루먼 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까지도 펼친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이 지구 평평론을 널리 알리는 것은 압제와 음모에서 벗어나 진실과 자유를 얻기 위한 숭고한 노력마저 되는데, 실은 이런 판타지 스토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드라마틱한 의미를 싣고 싶은 것이다. 그런 욕망이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정립된 과학적 사실인 ‘지구는 둥글다’마저 부정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런 욕구들이 기회만을 엿보며 꿈틀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재의 의미는 시공간을 축소하고 세상을 신화 속에 구겨넣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과학이 드러내는 우주의 진면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의 발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138억년 된 우주가 6천년 된 세상보다 훨씬 경이로우며, 자발적인 생명이 넘실대는 이 행성이야말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원반보다 훨씬 의미있다. 이렇듯 우리들의 존재와 삶이야말로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기적 그 자체다. 과학이 밝혀주는 이 자연과 생명의 진실보다 더 놀라운 드라마는 없다. 파토 원종우/<태양계 연대기> 저자·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 진행
“지구는 접시 형태 원반”
15세기에야 구형 천체 합의
기나긴 착각과 오해의 역사
자기기만적, 비과학적 태도 믿고 싶은 것만 선택해 믿는
특별해지려는 욕망 탓
감춰진 세상 비밀 탓
과학적 사실까지 부정해도
진실보다 놀라운 건 없다 터무니없는 근거들 이런 고대의 지구 구형론에 정점을 찍은 것으로는 뭐니 뭐니 해도 기원전 240년 에라토스테네스의 지구 둘레 계산을 꼽게 된다. 그는 정오에 이집트의 시에네(오늘날의 아스완)와 알렉산드리아 간의 그림자 길이가 다르다는 점을 통해 지구의 둘레를 실제의 10% 정도의 오차로 계산해 냈는데, 2200년 전으로는 믿기 어려운 정확성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예들을 보면 과학이 반드시 시간의 흐름에 비례해 발전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중세로 들어서며 이런 그리스의 앞선 과학이 잊혀져 과거 득세했던 지구 평평론이 다시 상식으로 득세하게 된 점을 보면 더욱 그렇다. 지구의 형태와 우주의 구조에 대해 유럽인들이 다시 과학적인 사고를 하게 된 것은 지구중심설(천동설)이 담긴 프톨레마이오스의 저서 <알마게스트>가 15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세계에서 유럽으로 역수입된 이후다. 천동설은 지동설과 비교해 마치 잘못된 생각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지구와 태양, 행성 등을 모두 구형의 천체로 파악한 것은 물론 그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규명한, 당시 유럽인들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정교한 과학이론이었다. 이를 접한 유럽 지식인들이 충격을 받고 향후 한동안 지구중심설에 집착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데, 여하튼 태양이 지구를 돌든 지구가 태양을 돌든 그 모든 것들이 둥근 구형이라는 점만큼은 이때쯤 이미 합의가 이뤄진 거다. 그리고 이른바 지리상 발견 시대를 지나면서 구형의 지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실증적으로 검증되기 시작했다. 여행과 운송 수단이 발달하며 세상은 점점 작아졌고 마젤란처럼 지구를 한 바퀴 도는 탐험가들이 생겨났다. 지구가 둥글기에, 콜럼버스는 인도에 가기 위해 동쪽의 육로가 아닌 서쪽의 바다를 택했다. 기구와 비행기를 통해 지구의 곡면은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고, 급기야 인류는 달에까지 가서 지구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이렇게 오랜 세월 역사적인 검증 과정을 거치고 또 많은 실증적인 증거들이 있는데도 어떻게 이제 와서 다시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지구 평평론자들도 무작정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니며 나름대로 근거들을 내세우고 있다. 물론 그 내용은 터무니없으리만치 조잡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은 남극이 존재하지 않기에 아무도 남극 깊숙이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너무도 명백한 착오라서 검증할 차원의 문제조차 아니다. 이미 1956년 남극점에 아문센-스콧 기지가 설립되어 지금도 운영 중이기 때문이다. 비록 오류로 판명되었지만 빅뱅 중력파 검출로 한때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된 ‘바이셉(BICEP)2’ 전파망원경이 바로 이곳에 설치되어 작동 중이기도 한데, 이런 사실은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 단 몇 분 만에 확인 가능하다. 다른 근거로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남미 지역을 오갈 때 남극 상공을 지나는 직항로가 훨씬 가까운데도 두바이 등 먼 지역을 거쳐서 간다는 점을 든다. 남극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의외로 여기에 솔깃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는 남극대륙 옆을 지나 호주 시드니에서 칠레의 산티아고를 오가는 직항로가 있다. 비록 남극 바로 위를 지나는 것은 아니지만 도시들의 위치가 원래 그렇기에 이를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남반구는 북반구보다 인구가 훨씬 적기 때문에 먼 대륙을 연결하는 항로 자체가 그리 많지 않다. 지구 평평론자들이 이런 유의 근거 없고 불합리한 것들을 철석같이 신봉하는 가운데 정작 과학기술을 통해 얻어낸 구형 지구의 증거들을 싸그리 부정하는 것은 자기기만적이다. 그들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찍어 보낸 수많은 지구 사진들을 모조리 합성이나 조작이라고 치부해 버리는데, 만약 원반형 지구 사진이 하나만 있었어도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을 것이다. 믿고 싶은 것만을 취사선택하는 통탄할 만치 비과학적인 태도다. 집요한 욕망의 발현 이들이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스스로 특별하고자 하는 인간의 집요한 욕망의 발현이다. 여러 종교의 인류 탄생 설화에서부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지구상의 다른 생물은 물론 우주 속 모든 것과 차별화되는 지위를 갈망하고 또 오랜 기간 그리 믿어 왔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일견 그런 인류의 특별함을 부정하는 듯하다. 과학이 말하는 138억년 된 우주보다는 기독교 원리주의의 6천년 된 세상 속에서 인간의 크기는 그만큼 크게 보일 수 있다. 천억 개의 은하 속 천억 개의 별 중 행성 하나인 지구보다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괴이한 원반 같은 지구가 더 특별히 느껴질지도 모른다. 또 다른 이유는 이 세상에 뭔가 감춰진 비밀이 있고 자신은 그걸 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음모론을 신봉하는 심리가 대개 이런 것인데 실제로 지구 평평론에는 음모론이 뒤섞여 있다. 각국의 정부는 지구가 원반 형태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진실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이 남극 안쪽(얼음벽의 바깥)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이 원반 위에는 실은 투명한 돔이 씌워져 있어서 우리들은 그 아래서 마치 영화 <트루먼 쇼>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주장까지도 펼친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이 지구 평평론을 널리 알리는 것은 압제와 음모에서 벗어나 진실과 자유를 얻기 위한 숭고한 노력마저 되는데, 실은 이런 판타지 스토리를 통해 자신의 존재에 드라마틱한 의미를 싣고 싶은 것이다. 그런 욕망이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정립된 과학적 사실인 ‘지구는 둥글다’마저 부정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내면에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이런 욕구들이 기회만을 엿보며 꿈틀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존재의 의미는 시공간을 축소하고 세상을 신화 속에 구겨넣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사고의 결과가 아니라 과학이 드러내는 우주의 진면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두려움의 발로일 뿐이기 때문이다. 138억년 된 우주가 6천년 된 세상보다 훨씬 경이로우며, 자발적인 생명이 넘실대는 이 행성이야말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원반보다 훨씬 의미있다. 이렇듯 우리들의 존재와 삶이야말로 현실과 판타지가 뒤섞인 기적 그 자체다. 과학이 밝혀주는 이 자연과 생명의 진실보다 더 놀라운 드라마는 없다. 파토 원종우/<태양계 연대기> 저자·팟캐스트 ‘과학하고 앉아있네’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