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컴퓨터' 리비트가 발견한 세페이드 변광성의 일종인 ‘아르에스(RS) 퍼피스'. 2013년 12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허블우주망원경을 이용해 발견했다며 공개했다. 우리의 태양보다 10배 무겁고 1만5천배가 더 밝은 이 ‘거대별'은 지구에서 약 6500만광년 떨어져 있으며 40여일을 주기로 밝기가 변한다. 변광성은 우주에서 성단이나 은하의 거리를 잴 때 기준으로 쓰는 ‘우주 자' 구실을 한다. 미국 항공우주국 제공
[토요판] 별
여성 천문학자들
여성 천문학자들
▶ 전세계의 유명 천문학자들 중 여성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교육을 받았지만 정식으로 학자로 고용되기 거의 불가능했던 여성들은 싼 임금을 받거나 무급으로 고용돼 일종의 ‘계산 기능인’으로 활용됐다고 합니다. 그랬던 여성들이 천문학자로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생각보다 꽤 최근의 일입니다. 오늘날 많은 여성 천문학자들이 등장해 활약하고 있지만 ‘유리천장’은 아직 공고합니다. 아직도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는 천문학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어떤 활약을 해왔을까요?
요즘 천문학자들에게 망원경 이야기를 물어보면 무안당하기 일쑤다. “제가 망원경 보는 시간보다는 컴퓨터 화면 보는 시간이 더 많아서요. 아니, 사실상 거의 모든 시간을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지내죠.”
관측장비를 통해 정밀하게 우주를 관찰하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천문학자들이 연중 몇 차례씩 칠레나 미국 하와이 등 세계 곳곳의 망원경을 순례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 밖의 시간은 관측 결과로 얻은 자료를 컴퓨터를 이용해 분석하는 데 오롯이 바칠 수밖에 없다. 천문학은 자료의 양이 방대하기로 유명하다. 몇 년 전 빅데이터라는 말이 유행할 때 가장 먼저 활용 분야로 꼽힌 분야도 천문학이었다.
월가에서 모셔가는 천문학자
천문학자가 방대한 관측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해 고심하고, 당대 최고의 기술을 이용해 해결하는 모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늘날 천문학자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데이터를 다루는 데 최고의 전문가이며(데이터 분석에 주목하는 미국 월가의 금융회사가 천문학자들을 ‘모셔’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이를 위해 어떤 수단이든 활용할 준비가 돼 있다. 그런데 시간을 100년 이상 되돌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로 가보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때의 천문학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곧 상대성 이론이 나오고 이를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서 블랙홀, 팽창하는 우주, 외부 은하 등 새롭고 낯선 개념이 탄생했다. 하나같이 우주에 대한 인류의 기존 상식을 부정하고 시공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켜주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새롭고 충격적인 개념이라도 관측을 통해 증명되지 않으면 한갓 가설에 불과하다. 다행히 이 무렵에는 실력과 열정을 지닌 많은 천문학자들이 등장해 드넓은 우주 공간을 샅샅이 관측하며 이런 개념들을 하나하나 사실로 증명했다. 하지만 이 과정이 쉽지는 않았으니, 부수적인 문제인 계산하기 까다로운 관측 데이터의 존재 때문이었다.
미국 하버드대 천문대장을 맡고 있던 에드워드 피커링은 이런 방대한 천문 관측 데이터를 처리하느라 골치를 썩은 사람 중 하나였다. 천문대의 직원들이 만족스러울 만큼 자료를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피커링이 골치만 썩고 두 손 들고 말았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일이 별로 없었을지 모르지만, 그는 특이하고 과감한 조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고 오늘날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 바로 ‘컴퓨터’를 이용한 것이다. ‘아니, 컴퓨터는 요즘 천문학자들이 가장 많이 쓰는 도구라며?’라고 반문한다면, 오해다. 이때는 19세기 말로 아직 최초의 컴퓨터도 만들어지기 전이었다. 피커링의 컴퓨터는 ‘계산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종의 수리천문학자였다. ‘계산에 능한 직원을 고용한 게 뭐가 대수라고?’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피커링이 고용한 직원들은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피커링은 교육을 많이 받았지만, 정식으로 학자로 고용되기가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의 여성들을 싼 임금을 주고(혹은 무급으로) 고용해 일종의 계산 기능인으로 활용했다. 시작은 자신의 집 가정부였던 윌리어미나 플레밍이었다. 이후 애니 캐넌, 헨리에타 리비트 등이 컴퓨터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이들 중 일부는 천문학 역사에 전설적인 흔적을 남겼다. 피커링의 여성 컴퓨터들은 큰 화제가 됐다. 일부에서는 이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커링의 하렘’이라고 불렀는데, 일부다처제 사회의 여성 거처를 일컫는 이 말은 모욕적이었고 오늘날에는 쓰이지 않는다.
방대한 자료 처리해야 하는
천문학자들은 빅데이터 전문가
19세기엔 교육받은 여성들이
컴퓨터 대신 ‘계산기능인’ 활약
첫주자 플레밍은 가정부 출신 항성분류법 등 천문학 기초 닦고
‘걸물’ 리비트는 외부은하 밝혀내
능력 빛나도 망원경 조작조차 금지
아직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여성 천문학자 유리천장은 ‘여전’ ‘드림팀’ 하버드 컴퓨터들 컴퓨터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플레밍의 개인사는 요즘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극과 닮았다. 플레밍은 영국에서 공립학교를 나와 십대 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을 해왔다. 결혼을 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됐고 아이도 가졌지만 남편은 곧 가족을 버렸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플레밍은 가정부 일을 시작했다. 그가 일을 하게 된 곳이 피커링의 집이었다. 관측소의 직원들이 데이터 처리를 잘 하지 못해 낙담해 있던 피커링은 플레밍에게 계산을 시켜봤는데, 놀랍게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플레밍은 피커링 아래에서 일평생 컴퓨터로 활약했다. 플레밍은 단순히 계산만 한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쓰이는 항성의 분류법을 만드는 등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닦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나중에는 자신처럼 계산 능력이 뛰어나거나, 대학을 나왔지만 천문학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을 불러모아 ‘드림팀’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하버드 컴퓨터들이었다. 플레밍은 천문학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천문학회의 회원이 됐고 1911년 죽기 직전까지 활발히 연구했다. 하버드 컴퓨터 가운데 또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은 헨리에타 리비트였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천문학자가 될 수 없었던 리비트는 1893년부터 컴퓨터로 일하며 밤하늘을 촬영한 사진 건판을 확인하고 찍힌 별들의 밝기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처음엔 자원봉사였고, 나중엔 당시 면화 노동자보다 약간 많은 시급(25센트)을 받고 일했다. 깨알 같은 별이 찍힌 건판을 일일이 확인하고 재고 계산하는 중노동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급료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리비트는 그 와중에서 빼어난 발견을 해내기 시작했다. 리비트는 세페이드 변광성이라는,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별의 밝기 변화 주기와 광도 사이의 정교한 규칙성을 발견했다. 세페이드 변광성은 별의 외부에 있는 헬륨이 이온화됐다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밝기가 극적으로 변하는 별이다. 밝기 변화 주기는 하루에서 수십 일까지 다양한데, 리비트는 밝기 변화 주기가 긴 별은 광도(절대등급) 역시 증가한다는 특성을 발견했다. 별의 절대등급과 겉보기등급을 비교하면 지구로부터의 거리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변광성은 우주에서 성단이나 은하의 거리를 잴 때 기준으로 쓰일 수 있다. 일종의 우주 ‘자’인 셈이다. 리비트의 발견은 당대에는 높이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꾼 역사적 발견의 토대가 됐다. 1920년대에는 두 명의 저명한 천문학자 할로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다. M31(안드로메다)이라는 천체가 하늘에 있는데, 이 천체가 우리은하 안에 있는지(이 경우 M31은 안드로메다 ‘성운’이며 우리은하가 우주 전체가 된다) 혹은 밖에 있는 다른 은하인지(이 경우 안드로메다 ‘은하’이며 우리은하는 우주의 일부가 된다)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천체까지의 거리를 잴 수 없어 무의미한 공론에 그치고 있었다. 미국 윌슨산 천문대에 근무하던 관측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M31 안에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밝기를 이용해 거리를 재는 데 성공했고, 이 천체가 우리은하 밖에 위치한 외부 은하임을 밝혔다. 우주가 우리은하 바깥까지 넓게 펼쳐져 있음을 처음 알게 된 데에는 컴퓨터 리비트의 공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리비트는 허블의 연구 결과를 보지 못하고 192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빼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고 놀라운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리비트는 생전에 큰 인정을 받지 못했고 정식 천문학자로 불리지도 못했다. 하버드 천문대의 컴퓨터들은 독자적으로 연구 주제를 정하거나 발표할 수 없었다. 망원경을 조작하는 것도 금지였다. 리비트가 발견한 내용도 피커링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을 통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1912년 3월의 하버드 관측소 회보는 “소마젤란은하(당시에는 성운) 안의 변광성 25개의 주기에 대한 다음 진술은 리비트 양이 준비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리비트의 공을 인정하는 듯한 대목이지만, 글 작성자가 피커링으로 돼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리비트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이었다. 리비트를 다룬 전기 <리비트의 별>에 따르면, 피커링은 리비트가 계산 이외의 역할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연구를 계속하지 못하게 다른 프로젝트에 묶어두는 등 은근히 방해하기도 했다. 플레밍과 리비트는 어디에 하버드 천문대의 컴퓨터들은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이를 바탕으로 빼어난 천문학 이론을 세워 우주를 혁신했지만,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문학자’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니다.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 학계는 많이 달라졌을까. 수많은 여성 천문학자들이 등장해 활약하고 있으나, 아직 부족한 면도 많다. 지난해 12월말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미국 예일대 천문학·천체물리학센터 메건 어리 교수(미국천문학회장)의 기고문을 보면, 여전히 유리천장은 공고하다. 허블우주망원경을 사용하려고 제안서를 내도 여성 천문학자는 남성 학자보다 배정받는 비율이 낮고, 상을 받을 때도 후보에 덜 오른다(그냥 느낌이 아니라, 모두 논문으로 연구돼 있다). 급료를 적게 받는 경우도 여전히 있고 교육이나 봉사활동, 멘토링 활동 등 연구 외에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해야 하며, 심지어 그렇게 봉사해도 “딴 일도 많은데 용케 연구했네” 식의 빈정거리는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미국천문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대학의 천문학과 정교수 중 여성의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대학원생 때는 35%였던 여성 비율이 조교수, 박사후 연구원, 부교수 등으로 올라가며 점점 줄어들어 열에 한두 명이 됐다. 메건 어리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이 단순히 육아 등 가정생활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박사 학위를 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한국의 젊은 여성 천문학자들을 떠올려 본다.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며 용감하게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그들도 언젠가 보이지 않는 천장에 부딪히게 될까. 그리고 묻게 된다. 그 많던 여성 천문학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현대판 플레밍과 리비트는.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미국 하버드대 천문대장을 맡았던 에드워드 피커링이 고용한 여성 수리천문학자들의 모습. 1890년 어느 날 찍힌 사진 속 ‘하버드 컴퓨터’라 불렸던 플레밍, 리비트 등의 모습이 남았다. 위키피디아 제공
천문학자들은 빅데이터 전문가
19세기엔 교육받은 여성들이
컴퓨터 대신 ‘계산기능인’ 활약
첫주자 플레밍은 가정부 출신 항성분류법 등 천문학 기초 닦고
‘걸물’ 리비트는 외부은하 밝혀내
능력 빛나도 망원경 조작조차 금지
아직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여성 천문학자 유리천장은 ‘여전’ ‘드림팀’ 하버드 컴퓨터들 컴퓨터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플레밍의 개인사는 요즘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극과 닮았다. 플레밍은 영국에서 공립학교를 나와 십대 때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을 해왔다. 결혼을 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됐고 아이도 가졌지만 남편은 곧 가족을 버렸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플레밍은 가정부 일을 시작했다. 그가 일을 하게 된 곳이 피커링의 집이었다. 관측소의 직원들이 데이터 처리를 잘 하지 못해 낙담해 있던 피커링은 플레밍에게 계산을 시켜봤는데, 놀랍게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플레밍은 피커링 아래에서 일평생 컴퓨터로 활약했다. 플레밍은 단순히 계산만 한 게 아니라, 오늘날에도 쓰이는 항성의 분류법을 만드는 등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닦는 데에도 큰 공을 세웠다. 나중에는 자신처럼 계산 능력이 뛰어나거나, 대학을 나왔지만 천문학과 관련된 직업을 가지지 못했던 여성들을 불러모아 ‘드림팀’을 만들었는데 이들이 바로 하버드 컴퓨터들이었다. 플레밍은 천문학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천문학회의 회원이 됐고 1911년 죽기 직전까지 활발히 연구했다. 하버드 컴퓨터 가운데 또 한 명의 걸출한 인물은 헨리에타 리비트였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천문학자가 될 수 없었던 리비트는 1893년부터 컴퓨터로 일하며 밤하늘을 촬영한 사진 건판을 확인하고 찍힌 별들의 밝기를 분석하는 일을 했다. 처음엔 자원봉사였고, 나중엔 당시 면화 노동자보다 약간 많은 시급(25센트)을 받고 일했다. 깨알 같은 별이 찍힌 건판을 일일이 확인하고 재고 계산하는 중노동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급료는 높은 편이 아니었다. 리비트는 그 와중에서 빼어난 발견을 해내기 시작했다. 리비트는 세페이드 변광성이라는, 밝기가 주기적으로 변하는 별의 밝기 변화 주기와 광도 사이의 정교한 규칙성을 발견했다. 세페이드 변광성은 별의 외부에 있는 헬륨이 이온화됐다 다시 되돌아오는 과정에서 밝기가 극적으로 변하는 별이다. 밝기 변화 주기는 하루에서 수십 일까지 다양한데, 리비트는 밝기 변화 주기가 긴 별은 광도(절대등급) 역시 증가한다는 특성을 발견했다. 별의 절대등급과 겉보기등급을 비교하면 지구로부터의 거리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변광성은 우주에서 성단이나 은하의 거리를 잴 때 기준으로 쓰일 수 있다. 일종의 우주 ‘자’인 셈이다. 리비트의 발견은 당대에는 높이 인정받지 못했지만, 나중에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완전히 바꾼 역사적 발견의 토대가 됐다. 1920년대에는 두 명의 저명한 천문학자 할로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다. M31(안드로메다)이라는 천체가 하늘에 있는데, 이 천체가 우리은하 안에 있는지(이 경우 M31은 안드로메다 ‘성운’이며 우리은하가 우주 전체가 된다) 혹은 밖에 있는 다른 은하인지(이 경우 안드로메다 ‘은하’이며 우리은하는 우주의 일부가 된다)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천체까지의 거리를 잴 수 없어 무의미한 공론에 그치고 있었다. 미국 윌슨산 천문대에 근무하던 관측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은 M31 안에 있는 세페이드 변광성의 밝기를 이용해 거리를 재는 데 성공했고, 이 천체가 우리은하 밖에 위치한 외부 은하임을 밝혔다. 우주가 우리은하 바깥까지 넓게 펼쳐져 있음을 처음 알게 된 데에는 컴퓨터 리비트의 공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리비트는 허블의 연구 결과를 보지 못하고 192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빼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고 놀라운 이론을 만들어냈지만, 리비트는 생전에 큰 인정을 받지 못했고 정식 천문학자로 불리지도 못했다. 하버드 천문대의 컴퓨터들은 독자적으로 연구 주제를 정하거나 발표할 수 없었다. 망원경을 조작하는 것도 금지였다. 리비트가 발견한 내용도 피커링의 이름으로 발표된 글을 통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1912년 3월의 하버드 관측소 회보는 “소마젤란은하(당시에는 성운) 안의 변광성 25개의 주기에 대한 다음 진술은 리비트 양이 준비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리비트의 공을 인정하는 듯한 대목이지만, 글 작성자가 피커링으로 돼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리비트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역할이었다. 리비트를 다룬 전기 <리비트의 별>에 따르면, 피커링은 리비트가 계산 이외의 역할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연구를 계속하지 못하게 다른 프로젝트에 묶어두는 등 은근히 방해하기도 했다. 플레밍과 리비트는 어디에 하버드 천문대의 컴퓨터들은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이를 바탕으로 빼어난 천문학 이론을 세워 우주를 혁신했지만,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문학자’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렇게 먼 과거가 아니다.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 이후 학계는 많이 달라졌을까. 수많은 여성 천문학자들이 등장해 활약하고 있으나, 아직 부족한 면도 많다. 지난해 12월말 과학 저널 <네이처>에 실린 미국 예일대 천문학·천체물리학센터 메건 어리 교수(미국천문학회장)의 기고문을 보면, 여전히 유리천장은 공고하다. 허블우주망원경을 사용하려고 제안서를 내도 여성 천문학자는 남성 학자보다 배정받는 비율이 낮고, 상을 받을 때도 후보에 덜 오른다(그냥 느낌이 아니라, 모두 논문으로 연구돼 있다). 급료를 적게 받는 경우도 여전히 있고 교육이나 봉사활동, 멘토링 활동 등 연구 외에 시간을 더 많이 소비해야 하며, 심지어 그렇게 봉사해도 “딴 일도 많은데 용케 연구했네” 식의 빈정거리는 평가를 감수해야 한다. 미국천문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 대학의 천문학과 정교수 중 여성의 비율은 15%에 불과하다. 대학원생 때는 35%였던 여성 비율이 조교수, 박사후 연구원, 부교수 등으로 올라가며 점점 줄어들어 열에 한두 명이 됐다. 메건 어리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이 단순히 육아 등 가정생활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박사 학위를 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은 한국의 젊은 여성 천문학자들을 떠올려 본다.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며 용감하게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그들도 언젠가 보이지 않는 천장에 부딪히게 될까. 그리고 묻게 된다. 그 많던 여성 천문학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현대판 플레밍과 리비트는.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