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아둔한 자의 노력과 공적, 백곡 김득신 / 곽병찬의 향원익청/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11. 21:49

사설.칼럼칼럼

제월대는 높아 외롭고 취묵당은 낮아 평안하니

등록 :2016-05-10 19:35수정 :2016-05-10 21:18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


벽초는 다섯에 천자문을 뗐다. 여덟에 <소학>을 배우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한시를 지었다. 백곡은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어린이용 ‘십구사략’의 첫 단락 26자를 사흘이 지나도록 구두조차 떼지 못했다. 그러나 종내 이룬 드높은 성취는 같았다.

벽초는 군계일학의 빼어남 때문에 평생 풍파에 시달렸다. 백곡은 그 타고난 노둔함과 각고의 노력으로 온전히 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벽초는 끝내 객지에서 삶을 마감했지만, 백곡은 서시보다 곱다던 고향 산천에서 잠들었다. 제월대는 높고 쓸쓸하며, 취묵당은 낮고 평안하다.

달래강은 제월리에서 고산을 만나 암태극 수태극을 이루며 한바탕 어우러지고 개향산을 만나 만곡을 그리며 흐르는 듯 머문다. 고산 제월대는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장수의 기개로 우뚝하고, 개향산 취묵당은 선정에 든 수행자처럼 고요하다.

암울했던 1920년대 벽초 홍명희는 무력감과 절망을 떨치기 위해 제월대를 찾았고, 양대 호란과 당쟁으로 황폐했던 17세기 중후반 백곡 김득신은 몸을 감추고 이름을 숨기려 취묵당에 들었다. 벽초는 제월리 묘막에서 항일과 독립의 뜻을 벼렸고, 백곡은 능촌리 초당에서 주옥같은 시어를 벼렸다. 제월리엔 노론의 명문가 풍양 홍씨 추만공파 일족의 선영이 있고, 취묵당 뒤편 능촌리엔 ‘4세문과’의 문벌 안동김씨 제학공파 일족의 선영이 있다.

종내 이룬 드높은 성취는 같았지만, 두 사람의 타고난 재주는 천양지차였다. 벽초는 다섯에 천자문을 떼고 여덟에 <소학>을 배웠다. 벽초는 여덟 살 때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한시를 지었다. “파리는 해마다 생겨나는데, 우리 어머니는 왜 안 돌아오시나.” 백곡은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어린이용 ‘십구사략’의 첫 단락 26자를 사흘이 지나도록 구두조차 떼지 못했다. 11살이 되어서도 ‘다리 밑에서 노니는 물고기’(橋下魚走)를 보고 “각하육주”(脚下肉走)라 하여 부친을 실색케 하였다.

벽초는 난삽하기 짝이 없는 <서경>의 ‘우공’ 편을 일곱 번 만에 외웠고, 백곡은 <사기>의 ‘백이편’을 11만3천 번이나 읽었다. 벽초는 장편 한문소설 <삼국지>, <수호지>, <동주열국지>, <서한연의> 등을 서너 번 만에 외우다시피 했고, 백곡은 1만 번 이상 읽은 고문만 36수나 됐다.

당대의 천재 벽초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백곡의 노둔함은 당대의 우스개로 회자되곤 했다. 수도 없이 읽은 ‘백이편’ 첫머리나 ‘당음’(唐音·당시)의 첫장에 나오는 시조차 기억하지 못해, 어깨너머로 들어온 하인의 기억력을 빌려야 했다. 말 위에서 떠오른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말 위에서 한식을 맞았네)의 대구를 찾지 못해 수염을 배배 꼬는 모습을 보고 하인이 ‘도중송모춘’(途中送暮春, 길 위에서 다시 봄을 보내네) 일러준 것이다. 그러나 백곡은 성품이 맑고 깨끗했다. 맡아놓은 꼴찌였지만, 질투도 시기도 하지 않았다. 배울 게 있으면 누구나 스승이었다. 하인에게서 대구를 들은 그는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 하인더러 말에 타라고 했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내가 말구종을 해야겠으니 고삐는 내게 주어라.”

그러나 훗날 두 사람이 문학에서 일군 경지는 다르지 않았다. 벽초는 불세출의 장편대하소설 <임꺽정>으로 조선의 문화와 풍속, 말과 글, 사투리를 집대성했다.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조선의 문학을 세계문학에 편입시켰다. 백곡은 17세기 황폐한 조선의 시단을 ‘당음’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조선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인 택당 이식은 그의 시를 ‘당대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다. 당시의 문장가 서계 박세당의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산천과 나그네의 곤궁한 형상과 달밤에 노니는 흥취가 눈앞에 있는 듯하여 읽는 자로 하여금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만드니, 김득신의 시는 다른 사람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듯하다.”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달리 스승이 없었던 그들의 삶을 지켜준 것은 부친이었다. 동시대의 훼절한 천재 최남선이나 이광수와 달리 벽초로 하여금 항일과 독립운동의 외길을 가도록 한 이는 부친 홍범식이었다. 홍범식은 나라가 일제에 병탄당하자 맏이인 벽초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너는 잃어버린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할 것이고, 죽을지언정 왜놈들에게 친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부제학과 경상감사를 역임한 백곡의 부친 김치는 아들의 노둔함을 질책하기는커녕 오히려 격려하고 희망을 주었다. “학문을 성취가 늦는다고 성취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저 읽고 또 읽으면 반드시 큰 문장가가 될 것이다.” 백곡은 59살에야 대과에 가까스로 급제했다.

하지만 백곡은 급제하자마자 괴산 달래강변 개항산 언덕 위에 취묵당을 짓기 시작한다. 더러운 벼슬살이엔 뜻이 없었다. 부친이 입향조인 고조 김석을 비롯해 조상의 무덤 22기를 조성해 봉안한 백현능원 근처였다. 백곡은 1670년 취묵당에 ‘억만재’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나는 태생이 노둔해서 다른 사람보다 배나 더 읽었다. <사기> <한서>와 한유와 유종원의 글은 모두 베껴서 만여 번이나 읽었고, 그중에서 ‘백이전’을 가장 좋아해 일억일만삼천(113,000) 번이나 읽어 드디어 내 방을 억만재라 하였다.” ‘백이전’은 788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스스로도 대견했다. “전, 한, 당, 송의 글을 두루 찾아서, 입에서 침을 날리며 일만 번 읽었네.” 지인들은 그런 그를 놀릴 양으로 이렇게 묻곤 했다. ‘지난 경술년 팔도에 흉년이 들어 이듬해 경향 각처에 쌓인 시체가 헤아릴 수 없었는데, 그대가 책 읽은 수와 죽은 사람 수 가운데 어느 쪽이 많은가.’

백곡에 앞서 다독으로 유명한 이들은 많았다. 방 안에 처박혀 책만 읽던 괴애 김수온은 어느 날 대청에 나가 낙엽 쌓인 것을 보고서 가을이 왔음을 알았고, 허백당 성현은 변소에서 책을 읽다가 나올 줄 몰랐다. 김일손은 한유의 글을 1천 번 읽었고, 소재 노수신은 <논어>를 2천 번 읽었다. 간이 최립은 <한서>를 5천 번, 그중에서 ‘항적전’만 1만 번 읽었다. 동악 이안눌은 두보의 시를 수천 번, 어우당 유몽인은 장자와 유종원의 글을 1천 번씩 읽었다.

하지만 백곡이 ‘고문삼십육수독수기’에서 밝힌 것처럼 ‘백이전’ 11만3천 번을 포함해 1만 번 이상 읽은 글이 36수에 이르는 이는 없었다. 게다가 그건 30살부터 66살까지 읽은 것이니, 그 이전이나 이후 81살까지 살면서 얼마나 더 읽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의 이런 노력은 후세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그보다 158년 뒤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백곡의 독서를 변증한다’를 지어, “글이 생긴 이래 상하 수천 년과 종횡 3만 리를 통틀어 독서에 부지런하고 뛰어난 이로는 백곡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상찬했다. 송곡 이서우는 한술 더 떠 이렇게 극찬했다. “공은 노둔하다고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발분하였으니 뜻을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고, 한 권의 책 읽기를 억 번(십만 번), 만 번에 이르고도 그치지 않았으니 그 뜻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겠다. 조금씩 쌓아가면서 애를 쓴 뒤에 터득하였으니, 그 뜻을 이룬 사람이라고 하겠다.”

황덕길이 지은 ‘독수기 뒤에 쓰다’의 한 대목은 특별하다. “곽희태는 다섯에 ‘이소경’을 다섯 번 읽고 외웠고, 그의 아들 곽지흠은 일곱에 ‘이소경’을 일곱 번 읽고 외웠다. ‘우공’을 배운 권호는 한 번 읽은 뒤, 권민은 배우자마자 외워버렸다. … 하지만 그들의 문장은 단지 한때 재능이 있다는 이름만 얻었을 뿐 후세에 전하는 것은 없다.”

증평군 율리에 있는 그의 무덤 앞 묘비엔 이현석이 지은 묘갈명과 서문이 새겨져 있다. 서문엔 백곡의 이런 말이 인용돼 있다. “재주가 남만 같지 못하다 해서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같이 노둔한 사람도 없지마는 끝내는 역시 이룸이 있었으니, 이것은 부지런히 힘쓰는 데에 달렸을 뿐이다. 만약 재주와 기량이 넓지 못하더라도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해 공을 이룬다면, 재주가 많으면서 이룸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벽초는 군계일학의 빼어남 때문에 평생 풍파에 시달렸다. 백곡은 그 타고난 노둔함과 각고의 노력으로 온전히 저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벽초는 끝내 객지에서 삶을 마감했지만, 백곡은 서시보다 곱다던 고향 산천에서 잠들었다. 제월대는 높고 쓸쓸하며, 취묵당은 낮고 평안하다.

곽병찬 대기자
곽병찬 대기자
백곡은 추정컨대 증평 청안에서 태어났으며, 증평 율리에 묻혔다. 부친이 별세하자 목천 잣밭마을을 중심으로 산사를 찾아다니며 20~30년간 글공부를 했다. 말년은 괴산 능촌리 초당에 머물렀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