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철학

‘7권 저작집’ 마무리 임철규 연세대 명예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30. 21:07

문화

“내 지식 총동원해 인간 존재의 계보학 그렸다”

등록 :2016-05-29 19:20수정 :2016-05-29 20:36

[짬] ‘7권 저작집’ 마무리 임철규 명예교수

“이 책을 통해 나는 인간이 각 시대마다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지, 어떻게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인간 밖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 왔는지, 문학작품을 통해 규명하려 했다. 고전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의 계보학을 그려보려 했다.”

학술계 “노년세대의 대표주자”임을 자처하는 임철규(77) 연세대 명예교수는 ‘임철규 저작집’ 마지막을 채운 제7권 <고전-인간의 계보학>(한길사 펴냄)을 지난달 출간하면서 “이 책에서 처음으로 내 생년을 밝혔다”고 했다. 책 표지 날개 안쪽 저자 약력 소개에 1939년 경남 창녕 출생이라 적혀 있다. “철학·문학·신학 등 내 지식을 총동원한 이 책을 통해 나이 60만 넘어도 책 잘 안 쓰는 우리 학계 풍토의 ‘금기’를 깨고 싶었다. 나 같은 ‘노인’도 이렇게 열심히 쓴다는 걸 후학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임철규 저작집 마지막 저술
‘고전-인간의 계보학’ 펴내
셰익스피어 등 대가 작품 다뤄

“위대한 문학은 인간구원 관점
내 글, 서양학자보다 깊이있다면
내가 살아온 이 땅 때문일 것”

임철규 명예교수. 사진 한길사 제공
임철규 명예교수. 사진 한길사 제공
그의 자부심은 “최신의 참고문헌들까지 적잖게 접했지만, 이 책의 논의 폭과 깊이에 견줄 수 있는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데까지 나아간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뒤 1976년부터 연세대 교수(영문학)로 30년 가까이 재직하다 2004년 정년퇴임하고 얼마 뒤 김해의 둘째 누님 집에 기거한 지 8~9년이 됐다는 임 교수는 이 기간 <그리스 비극>(2007)을 비롯해 <귀환> <죽음> 그리고 이번 책까지 4권의 책을 써냈다.(‘임철규 저작집’엔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 <눈의 역사 눈의 미학> <왜 유토피아인가>가 추가된다.) 지난 27일 전화통화에서 그는 김해에 눌러앉은 것은 서울 생활에선 겨울철마다 5~6차례 앓았던 감기에서 해방될 만큼 기후·풍토가 그에게 맞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재직 기간 제대로 못 읽었던 읽고 싶었던 책들을 실컷 읽고 또 쓰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그런 장소로 김해 장유도서관이 내겐 이상적이었다. (퇴임 뒤) 연세대에도 내 방이 있었으나 오후 5시면 문을 닫았다. 여기는 매달 마지막 월요일 휴관을 빼고는 매일 오전 9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조용하고 정말 좋다.”

미국 유학(1969~75) 때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그리스·로마 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영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호메로스 이후 수많은 문학가들의 작품은 호메로스가 던진 신과 인간, 운명과 자유, 국가와 개인의 관계, 정의와 같은 윤리적 문제, 전쟁의 비극성, 사랑으로 인한 고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니체가 말한 ‘존재의 영원한 상처’에 대한 물음에 그들 나름으로 대답하는 자기고백의 흔적”이라고 했다. 결국 문학이란 “인간이라는 거대한 텍스트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대답의 퇴적물”이며, 고전은 “이 퇴적물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작품들”이다.

이번 책 2부의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 <햄릿>,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카프카 <변신>과 <소송>, 브레히트 <사천의 선인> <갈릴레이의 생애>는 모두 새로 썼다. 도스토옙스키론에서 임 교수는 역사의 공포, 즉 “절망 앞에서 철학이 책임지고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 모든 것을 구원의 관점에서 찬찬히 바라보려는 것”이라고 한 철학자 아도르노의 말을 인용하면서, “위대한 문학 역시 구원의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또 희망은 “간직되어 있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되어 있는 것의 복귀”(아도르노)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2부에서 사회주의 혁명가로 예정됐던 소설 속 삼형제 중 막내 알료샤 관련 얘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계급 불평등이라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일찍 세상을 마감한 일류샤(하급 퇴역장교의 어린 아들)와 그의 친구들 가슴속에 계급타파를 위한 혁명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그를 향한 기억은 희망이 될 수 없다.”

이는 그가 제6권 <죽음> ‘예술가의 죽음-오르페우스의 에피소드’에서 한 얘기와도 닿아 있다. “문학 또는 문학가는 일종의 주술사나 무당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노래로 우리를 즐겁게 해줄 뿐 아니라, 우리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우리의 병든 의식을 치유해주고, 우리의 잠자는 의식을 일깨워주고, 우리의 비뚤어진 의식이나 그릇된 의식을 바꾸고 또 고쳐,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해주고,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우리의 역사, 우리의 현실을 다시 새롭게 보도록 해주고, 더 나아가 그 역사, 그 현실을 변화시키도록 해준다.” 중요한 것은 문학이 “현실의 해석에 그치지 않고 그 해석을 토대로 현실의 변혁 가능성을 열어놓은 실천적 사유를 더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학은 때로는 ‘무장한 무사들’을 현실의 변혁을 위해 거친 역사의 바다로 불러들이고, 때로는 스스로 ‘무장한 무사’가 된다는 점에서 ‘불온한’ 예술장르다.”

임 교수는 자신의 글이 서양 학자들보다 더 풍부하고 깊이가 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내가 이런 땅에서 태어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문학은 “애도의 표현”이라고도 했다. “나는 전쟁·폭력억압으로 인해 삶이 산산이 부서진 채 죽어간 수많은 시대의 희생자, 삶이라는 허무의 바다에서 허망한 몸부림을 치다 한갓 포말처럼 사라져간 숱한 존재를 망각의 바다에서 끌어올려 그들이 남긴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그들의 고통과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문학의 진정한 행위라고 본다.”(<그리스 비극>) 그는 그런 반열에 들어가는 국내 작품으로 박경리 <토지>, 황석영 <장길산>, 조정래 <태백산맥> 등을 꼽았다.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작가 한강을 “학부 때 내 강의를 들었고, 그리스 비극을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고,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관한 리포트를 써낸 것으로 기억”한다며 <고전>을 한 권 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다고 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