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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김씨는 독자 출마를 선언하고 전두환 정권을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이희호 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16. 17:29

정치정치일반

“87년 보라매공원 대군중 열기에 당선 확신했었죠”

등록 :2016-05-15 21:16수정 :2016-05-16 10:18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71년에 이어 두번째로 출마했다. 이희호는 야권 분열 속에 색깔론과 북풍몰이, 언론의 편파·왜곡 보도까지 가장 불리한 조건에 맞선 남편을 도와 유세전에 뛰어들었다. 사진은 투표 사흘 전인 12월13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김대중 후보가 200만명이 넘는 대군중을 상대로 마지막 유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7년 12월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71년에 이어 두번째로 출마했다. 이희호는 야권 분열 속에 색깔론과 북풍몰이, 언론의 편파·왜곡 보도까지 가장 불리한 조건에 맞선 남편을 도와 유세전에 뛰어들었다. 사진은 투표 사흘 전인 12월13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김대중 후보가 200만명이 넘는 대군중을 상대로 마지막 유세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5부 광장의 시련-1회 13대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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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가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의 후보단일화 협상이 본격화했다. “남편은 처음에는 단일화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전해 김영삼 총재가 남편을 대통령 후보로 밀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으로 보았지요. 그런데 김영삼 총재가 6·29선언 뒤에 자신이 대통령 후보를 하겠다고 했어요.” 김영삼은 전해 11월5일의 ‘김대중 불출마 선언’을 거론하며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 김대중은 전두환의 4·13호헌조처로 조건부 불출마 선언이 무효가 됐다고 맞섰다.

두 사람 사이의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서로 양보할 뜻이 없으니 경선을 통한 후보 결정이 남은 방책이었다. “남편은 오랫동안 망명생활과 연금생활을 하고 사면·복권이 되지 않아 통일민주당 내부 기반이 취약했어요. 경선을 하려면 공정경쟁의 꼴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김대중은 그때까지 창설이 안 된 지구당 36곳의 조직책 임명권을 달라고 요구하고 전당대회에서 후보를 뽑자고 제안했다. 김영삼은 김대중의 제안을 거절했다. 김대중은 다시 텔레비전 토론이나 전국 공동유세를 해서 국민적 지지가 높은 사람을 후보로 세우자는 타협안을 냈다. 김영삼은 이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동아일보> 대표이사 김병관이 중재를 서서 대통령 후보와 당 총재를 놓고 김영삼이 먼저 선택하게 하자는 안을 김대중에게 제시했다. 김대중은 이 제안을 수락했으나 김영삼은 이 방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7년 대선 야권후보 단일화 논의
9월부터 ‘양김 협상’ 줄다리기 팽팽
중재 나선 민통련 ‘김대중 후보’ 결의
“대학 모의투표·여론조사 모두 유리”
10월28일 김영삼 출마…끝내 ‘분열’

11월29일 ‘KAL기 사건’으로 북풍몰이
지역감정·안보불안·편파보도 ‘극성’
“방송에선 남편 과격한 모습만 편집”

12월13일 마지막 유세 대군중에 놀라
“연설뒤 10만명과 무개차 타고 행진”

9월29일 김대중과 김영삼은 외교구락부에서 만나 후보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 그 뒤로도 동교동과 상도동의 단일화 협상이 이어졌지만 양쪽의 주장은 평행선만 달렸다. 상도동 쪽은 ‘군부가 김대중을 비토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대중의 양보를 요구했고, 동교동은 ‘김영삼의 무능’을 문제 삼았다. “김영삼 총재 쪽에서는 군부가 남편을 빨갱이라고 하며 거부하니 후보가 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 말을 듣고 남편은 몹시 속상해했어요. 빨갱이라는 말은 독재정권이나 하던 말이잖아요.” 상도동 쪽에서는 지역감정 논리도 내놓았다. ‘김대중이 양보하고 김영삼이 후보가 되면 전라도 사람들은 김영삼에게 투표하지만 김영삼이 양보해 김대중이 후보가 되면 경상도 사람들이 안 찍는다’는 것이었다.

양쪽이 접점을 찾지 못하자 재야의 중심인 민통련이 중재에 나섰다. 민통련은 김대중과 김영삼을 각각 초청해 10월5일 정책세미나를 열었다. 대통령 후보의 자질을 검증하는 청문회였다.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어떻게 보는지, 노동자·농민에 대한 정책 대안이 무엇인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비롯한 기본권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자주적 평화통일의 방안이 있는지 같은 질문들이 제시됐다. 김대중은 자신의 견해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밝혔다. 김영삼의 답변은 원론에 머물렀고 몇몇 질문에는 민통련과 다른 견해를 보였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오른쪽)과 김영삼(왼쪽)은 가을부터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끝내 동시 출마했다. 사진은 9월29일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첫 공식 협상 중인 ‘양김’.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오른쪽)과 김영삼(왼쪽)은 가을부터 야당 후보 단일화 협상을 벌였으나 끝내 동시 출마했다. 사진은 9월29일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첫 공식 협상 중인 ‘양김’. '한겨레' 자료사진
10월13일 민통련은 내부의 격렬한 논의를 거쳐 29 대 2로 김대중을 야당 단일후보로 추천하기로 결의했다. 민통련은 결의문에서 이렇게 밝혔다. “민통련은 지난 9월초 이래 가능한 모든 통로를 활용하여 두 지도자의 양보를 촉구했으나 그들이 자신의 출마의 타당성을 주장함에 따라, 의장단의 직접 접촉과 두 김씨 초청 세미나를 통해 정책과 이념의 차이를 확인한 끝에 12일 오후 22개 가맹단체의 대표를 포함한 중앙위원회에서 진지한 논의를 거쳐 김대중 고문을 범국민적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기로 결의했다.” 민통련은 김영삼의 양보도 요구했다. “두 지도자가 희생적 양보를 통해 후보단일화를 이루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보지만,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김영삼 총재가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으로 김대중 고문의 손을 잡으면서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하고 이번 선거에서 범국민적 후보가 압승하여 군사독재를 끝장내는 데 협력할 것을 촉구한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 중재에 나선 민통련은 10월13일 김대중 단일후보 추천을 결의했다. 사진은 12월11일 민통련 주최 ‘김대중 후보 추대 및 후보 단일화 촉구대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8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 중재에 나선 민통련은 10월13일 김대중 단일후보 추천을 결의했다. 사진은 12월11일 민통련 주최 ‘김대중 후보 추대 및 후보 단일화 촉구대회’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민통련의 결의가 있고 열흘쯤 지난 뒤에 김영삼 총재가 미창당 지구당 조직책 임명권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선거 일정상 너무 시기가 늦어졌다고 보았어요. 그래서 두 사람이 직접 전국을 돌며 국민의 뜻을 물어보는 방안을 제시했지요. 상도동 쪽에서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그 무렵 동교동은 김대중의 지지세가 확산되는 데 고무돼 있었다. “대학교 여러 곳에서 모의투표를 했는데 매번 남편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왔어요. 또 당시 선거법상 여론조사를 발표할 수 없었는데, 신문사마다 여론조사 한 걸 입수해서 보면 우리 쪽이 김영삼 총재보다 훨씬 더 높게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쪽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요.”

10월28일 김영삼은 13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이틀 뒤인 10월30일 김대중도 대통령 선거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 무렵 남편을 지지하는 재야인사들이 수유리 안병무 박사 댁에 모였어요. 거기서 남편과 함께 신당 창당을 결정했지요. 또 당명을 놓고 오래 논의한 끝에 평화민주당으로 하기로 했어요.” 김대중과 지지자들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11월12일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총재로 취임함과 동시에 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김대중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완전한 군정종식, 민중 생존권 보장, 남북의 평화통일, 광주항쟁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내놓았다. 13대 대통령 선거는 평화민주당 김대중, 통일민주당 김영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각축하는 4파전이 됐으며, 재야 후보로 백기완이 나섰다.

김대중의 선거운동이 본격화하자 이희호도 선거 지원 유세에 뛰어들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처럼 나도 따로 팀을 꾸려서 다녔어요. 여성모임이나 교회를 찾아가기도 했고, 남편이 가기 어려운 지역을 돌았어요. 제주, 대전, 광주, 강원, 경기, 서울의 각 지역을 다녔지요. 그때 민가협 회원들이 우리를 헌신적으로 도와주셨어요. 투표 하루 전에는 통일민주당에서 ‘김대중 후보 사퇴’라는 전단을 뿌렸는데, 민가협 어머니들이 이 전단을 들고 항의하러 갔다가 청년 당원들에게 맞기도 했지요.”

이희호는 김대중과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11월23일 유세단과 함께 서산에서 지원유세를 했어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닌 제2의 고향이었는데, 거기에 도착해보니 남편이 나보다 먼저 유세를 하고 홍성으로 막 떠난 뒤였어요.” 이희호의 이날 연설은 <한국일보>에 이렇게 보도됐다. “이희호 여사는 10여분간 남편의 지지를 호소하는 찬조연설을 했다. 청중을 사로잡는 호소력이 있었다. 웬만한 정치 연설꾼 실력을 웃돌아 부창부수라는 중평을 받았다.”

김대중이 텔레비전 연설 녹화로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이희호가 김대중 대신 찾아가는 곳이 늘었다. 이희호는 12월5일 토요일의 활동을 일지에 이렇게 적었다. “오전 7시30분 힐튼호텔 조찬, 11시 영등포 지구당사 신길 삼거리 유세, 11시30분 영등포시장 방문과 오찬, 오후 1시30분 동대문운동장 유세, 3시 상왕십리 전철역 거리유세, 3시30분 성동 무학초등학교 운동장 유세, 5시 선거대책회의.” 유세를 하다 보면 일정이 뒤로 밀리기 일쑤였다. “하루 일정이 자정 넘어서야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다음날에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나갔지요.”

87년 대선 때 이희호는 ‘김대중의 분신’처럼 전국을 돌며 유세전을 펼쳤다. 사진은 12월 경기도 과천에서 ‘기호 3번 김대중’ 선거벽보를 내걸고 연설 중인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87년 대선 때 이희호는 ‘김대중의 분신’처럼 전국을 돌며 유세전을 펼쳤다. 사진은 12월 경기도 과천에서 ‘기호 3번 김대중’ 선거벽보를 내걸고 연설 중인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1월29일 김대중은 여의도 광장에서 유세를 했다. 노태우도 12월2일, 김영삼은 12월5일 여의도 광장에서 유세 대결을 벌였다. 김대중의 여의도 광장 연설에는 130만명이 몰렸다. 군중이 여의도 양끝을 채우고 한강 둔치까지 넘쳐났다. 바로 그날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아부다비를 경유한 대한항공 858편 보잉 707 비행기가 11월29일 오후 2시5분 미얀마 근해 상공에서 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실종됐다. 이 비행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93명과 승무원 20명을 포함해 115명이 타고 있었다.

정부는 이 사건이 ‘88서울올림픽’ 참가신청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현희는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 서울로 압송됐다.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은 대통령 선거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전두환 정권은 이 사건을 국민의 안보불안을 부추기는 데 최대한 이용했다. 20년 뒤인 2006년 과거사진실위원회가 국가정보원(안기부) 조사에서 ‘무지개공작’이라는 문건을 밝혀냈다. 1987년 12월2일 작성된 이 문건은 “국민의 대북 경각심과 안보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한 한 ‘대선 사업 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한다”고 명시해, 정권 차원에서 이 사건을 대통령 선거에 활용했음이 드러났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5공화국 정권은 지역감정과 안보불안을 극도로 부추기고 이용했다. 노태우 진영은 ‘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떠내려간다’고 주장했다. 군부는 대놓고 김대중을 공격했다. ‘김대중이 당선되면 군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워싱턴 포스트> 기자 돈 오버도퍼는 그 무렵 김대중을 인터뷰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필자가 김대중의 자택을 찾아가기 며칠 전 박희도 육군참모총장은 김대중의 대통령 출마에 반대한다는 군부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따라서 김대중이 선거에서 승리한다 해도 군 지도부가 그를 대통령으로 용납할 것인가에 대한 우려감이 팽배했으며 군부에서 김대중 암살을 기도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김대중은 ‘그런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감정 조장도 기승을 부렸다. 11월1일 김대중이 부산 수영만 유세를 마치고 숙소인 국제호텔에 머물고 있을 때 건장한 남자 300여명이 몰려와 호텔 현관을 부수고 난동을 부렸다. 난동꾼들은 “김영삼을 청와대로!”라고 외치며 김대중 수행원들을 폭행했다. 15명이 다치고 차량 10여대가 부서졌다. 11월15일 대구 두류공원에서 열린 ‘군부독재 종식과 지역감정 해소를 위한 영호남 결의대회’에서도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연사로 나온 문익환이 “지역감정은 한겨레의 수치”라고 외쳤지만 군중 사이에서 욕설과 고함이 터지고 돌멩이가 날아왔다. 이어 등단한 김대중에게도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김대중은 끝까지 연설을 했다. 11월14일에는 광주에 간 김영삼이 군중 속에서 날아든 돌멩이를 피해 유세 도중 내려가기도 했다. 11월29일 노태우의 광주 유세도 폭력사태로 10분 만에 중단됐다. 영호남 지역감정 대결이 격해질수록 이득을 보는 것은 노태우 진영이었다. 정권 차원의 지역감정 조장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언론의 편파·왜곡 보도는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강도를 더했다. 텔레비전은 유세장의 폭력사태를 최대한 자극적으로 보도했다. 방송의 편파 보도는 지역감정을 악화시켰고 다른 지역의 반호남 정서를 부추겼다. “텔레비전의 왜곡 보도로 남편은 가장 큰 피해를 보았지요. 방송에서 남편의 연설이나 토론을 내보낼 때면 언제나 찡그린 표정이나 과격한 제스처만 편집해서 보여주었어요. 토론회에서 한 발언을 소개할 때도 까다로운 질문에서 머뭇거리는 장면만 보여주었지요. 방송에서 남편이 웃는 모습을 볼 수 없었어요.”

노태우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이런 보도는 일선 기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87년 9월 <문화방송>(MBC) 기자들은 성명을 내 불공정 보도 사례 10여건을 공개하며 정권의 통제와 압력을 비판했다. 11월9일에는 <한국방송>(KBS) 기자들이 ‘케이비에스(KBS) 노태우 후보 여론조작 방송 계획’이란 이름으로 편파·왜곡 보도 실태를 폭로했다.

신문들의 왜곡 보도도 방송에 뒤지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그 선두에 서 있었다. 후에 민주언론운동연합 신문모니터분과는 “<조선일보>는 1987년 선거보도를 통해 ‘지역감정=호남문제’라는 등식을 고착시켰다”고 비판했다. 지역감정의 피해자인 호남이 왜곡 보도를 거쳐 지역감정의 가해자로 뒤바뀐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호남 지역의 유세장 폭력사태는 1면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하고 다른 지역의 폭력사태는 작게 보도해 폭력을 호남의 문제로 보이게 했다.

방송과 신문의 왜곡·편파 보도가 심해질수록 사람들은 김대중의 연설을 직접 들으려고 유세장으로 몰려들었다. 투표를 사흘 앞둔 12월13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 열린 김대중의 유세에는 2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평화민주당의 색깔인 황색 물결이었다. 이희호도 청중의 규모에 놀랐다. “선거 역사에 유례가 없는 대군중이었어요. 사람들이 얼마나 몰려들었는지 끝이 보이지 않았지요. 후보 얼굴을 보려고 나무에까지 사람들이 올라갔어요.” 김대중의 연설이 끝난 뒤 10만여명이 보라매공원에서부터 한강대교를 지나 서울시청 앞까지 15㎞를 행진했다. “우리가 승리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남편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10만명이 서울시청 앞까지 행진하는데 남편과 나는 트럭을 개조한 무개차를 타고 청중과 함께 갔어요. 다들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어요.”

12월14일 재야 후보 백기완이 후보를 사퇴했다. 투표를 하루 앞두고 12월15일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가 압송돼 서울에 도착했다. 안기부원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로 마스크를 쓰고 나타난 김현희는 방송과 신문을 점령했다. 선거 보도가 뒤로 밀려났다. 이튿날 13대 대통령 선거 투표가 치러졌다. 저녁에 개표방송이 시작됐다. 치열한 경합이 벌어지리라는 예상을 깨고 처음부터 노태우가 독주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