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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로고스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17. 22:46

사설.칼럼칼럼

[아침 햇발] 대통령의 로고스 / 고명섭

등록 :2016-05-17 19:07


‘이성적인 동물’(rational animal)은 인간을 정의하는 말들 가운데 첫째 자리에 오를 만한 말이다. 이 말의 근원은 라틴어 ‘아니말 라티오날레’(animal rationale)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성(라티오, ratio)을 지닌 동물이 인간이다. 그런데 ‘아니말 라티오날레’도 따져 들어가면 더 깊은 뿌리에 닿는다. 이 말은 고대 그리스어를 번역한 말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을 ‘로고스를 사용할 줄 아는 동물’이라고 이해했다. 로고스(logos)는 일차로 말·발언·언어를 뜻한다.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 인간이다. 여기서 ‘말을 한다는 것’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소리나 내뱉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인식하고 이해해서 표현한다는 것을 뜻한다. 인식하고 이해하려면 생각하는 능력, 곧 이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로고스(말)가 라티오(이성)와 통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렇게 로고스가 라티오로 옮겨감으로써 ‘말을 할 줄 아는 동물’이었던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 됐다. 그러니까 ‘이성적인 동물’이란 그 뿌리까지 내려가 살피면 ‘생각하는 능력을 사용해서 인식하고 이해한 것을 말로 표현할 줄 아는 동물’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언론사 편집·보도국장단과 간담회를 했다. 과거 민주적인 대통령들이 즐겨 했던 ‘국민과의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등장한 것이 이 간담회다. 언론사 간부들이 민의를 대신 전달하고 대통령이 거기에 응답하는 형식이니 ‘국민과의 대화’의 변형·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년 만에 마련된 귀한 자리에 어울리는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굳이 의미를 찾자면 대통령의 생각, 더 정확히 말하면 대통령의 말이 여과장치 없이 드러나 그 실상을 살필 수 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잖아도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번역기가 필요하다는 농담이 인터넷상에 퍼져 있는데, 이 말이 단지 농담만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된 만남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말이었다. “(…) 그런데 서로 원활하게 잘 협력해서 국민에게 말하자면 선물, 약속한 그런 부분으로 이루어지면 정당들도 국민들에게 더 좋은 평가를 받을 것이고, 그게 19대랑 변함없이 뭐 별로 변화 없이 그대로 그냥 이것도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고 이렇게 간다고 하면 아마 민심의 속도도 굉장히 빨라지지 않을까(…)” 사태를 꿰뚫어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말이 이렇게 뒤엉킬 이유가 없다. 국정 최고 책임자가 국정의 중요 현안을 앞에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의 혼란은 생각의 혼란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고명섭 논설위원
그렇게 엉키는 말 사이에서 또렷하게 들어오는 말이 있었다. 국사교과서를 국정화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말이었다. “지금과 같은 교과서로 배우면 정통성이 오히려 북한에 있기 때문에 북한을 위한, 북한에 의한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 실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만 골몰하여 민주화 시대의 교과서를 북한 추종 교과서로 뒤바꿔 놓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언술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 곧 말의 본성에는 ‘드러내 밝힘’과 ‘속이고 감춤’의 두 가지 기능이 함께 있다고 했다. 말은 진실을 드러내 밝힐 수도 있지만 감추고 속일 수도 있다. 속임의 대상에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이데올로기 언술은 감추고 속이는 말, 그중에서도 ‘스스로 속이는 말’이다. 나라가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데, 대통령은 언어의 혼란 속에서 이데올로기 주문만 붙들고 있다. 대통령의 불행이고 국민의 불행이다.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