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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진압 이틀전 ‘최규하 광주방문 담화’는 전두환 작품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23. 16:11

사회사회일반

5·18 진압 이틀전 ‘최규하 광주방문 담화’는 전두환 작품

등록 :2016-05-20 19:29수정 :2016-05-20 20:59

 

1979년 11월6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육군 소장 전두환.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11월6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육군 소장 전두환.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입수 ‘5공 전사’ 기록

‘작전 전 최 대통령 선무활동’
건의받은 전두환 보안사령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 희색
다음날인 5월25일 최규하 광주행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이 계엄군의 광주 무력진압을 이틀 앞두고 최규하 당시 대통령이 광주 현지에서 시민들의 자제를 요청하는 선무방송(5월25일)을 하도록 주도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가 5월27일 새벽 이뤄진 5·18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을 준비하면서 최 대통령을 동원해 마지막으로 설득하는 모양새를 갖추는 등 치밀한 명분 쌓기 전략까지 짰다는 것을 뜻한다.

20일 <한겨레>가 입수한 <제5공화국전사>(<5공전사>·사진)를 보면, 1980년 5월24일 오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주영복 국방장관 및 각 군 참모총장 ‘광주사태 대책회의’를 한 뒤 국방부에서 오찬 중이었다. 합수본부 안전처장 정도영 장군은 “합수본부장 전두환 장군께 보고키 위하여 국방부로 갔다”고 한다. 당시는 “계엄군이 상무충정작전, 즉 무력에 의한 (광주) 기습작전을 준비하고” 있던 때다. 계엄군의 5·18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은 5월27일 새벽 이뤄졌다.

정 장군은 “최규하 대통령의 대광주시민 선무방송은 군 작전 개시 전에 정부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대통령이 광주시민에게 호소하는 것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가 국방부에 갔을 땐 “이미 회의가 끝나고 회의 참석자들은 (국방부 울타리 안) 육군회관에서 오찬 중”이었다고 한다. 정 장군은 “시일이 촉박한 것인지라 육군회관으로 가 메모로 오찬 중인 합수본부장을 뵙자고 하였다”고 한다. <5공전사>는 “정 장군이 합수본부장에게 ‘최 대통령의 광주 선무활동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건의를 하자 전 장군은 ‘그것 참 좋은 생각이다’라고 희색을 띄우면서 들어가 식사를 빨리 마쳤다”고 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결심이 서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 책은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최 대통령의 광주 선무활동을 건의”했고 “주영복 국방부 장관은 그 길로 청와대로 직행, 최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다”고 한다. 최규하 대통령은 광주에 가기로 결정했다.

최 대통령은 다음날인 5월25일 오후 5시40분께 광주로 와 전투교육사령부를 방문해 라디오를 통해 광주시민의 자제를 호소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해 전 전 대통령은 5·18 검찰 수사에서 “당시 광주소요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논의하고 노력했던 것뿐”이라고만 진술한 바 있다. 최근에도 그는 월간 <신동아>와 한 인터뷰에서 발포 책임과 관련해 “너무 무식해서 그런 거예요. 보안사령관은 정보·수사 책임자요.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꺾고, 청와대를 꺾고, 이렇게는 절대 못 합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최 대통령은 5월21일 계엄군의 집단 발포 다음날까지 어느 부대가 발포했는지 군 지휘관이 누군지 등 상황 파악을 전혀 못했을 뿐 아니라 신군부의 요구에 저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무력진압을 앞두고 ‘건의’라는 형식으로 대통령을 광주로 보내 선무방송을 하게 한 것은 당시 실세가 누구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