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운 김대중을 공격하는 언론들 / 이희호 평전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5. 30. 21:10

정치정치일반

“그 신문은 왜곡·편파 보도로 우리를 상처냈어요”

등록 :2016-05-29 20:20

 

1989년 1월말 평민당 총재로서 첫 유럽 6개국 순방에 나선 김대중과 이희호는 로마 교황청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예방해 ‘사형수 시절 구명운동’에 답례를 했다.
1989년 1월말 평민당 총재로서 첫 유럽 6개국 순방에 나선 김대중과 이희호는 로마 교황청으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예방해 ‘사형수 시절 구명운동’에 답례를 했다.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5부 광장의 시련-3회 공안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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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31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유럽 여섯 나라 순방길에 올랐다. 첫 방문국 스웨덴에 도착해 1980년 김대중 구명운동에 힘쓴 올로프 팔메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스웨덴 총리 잉바르 칼손과 만났다. 이 만남이 계기가 돼 평화민주당은 국제 사민주의 정당 모임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1989년 6월 총회에 옵서버(참관인) 자격으로 참가했다. 2월3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웁살라대학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스웨덴 지도자 27명이 남편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는 소식이 발표됐어요. 우리는 무척 놀랐지요.”

1989년 1월말 유럽 6개국 순방길
스웨덴서 ‘노벨평화상 후보’ 추천
로마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만나
귀국하자자마 함석헌 선생 ‘문상’

3월초 주간조선 ‘유럽순방 취재기’
악의적 보도에 ‘조-평사태’ 폭발
7개월 공방끝에 고소취하로 ‘봉합’

‘중간평가’ 무기 연기한 노태우 정권
문익환·황석영 방북 ‘공안탄압’ 몰이
6월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터져
김대중 강제구인 밤샘조사 ‘무혐의’

그해 봄부터 공안몰이로 통일운동을 탄압한 노태우 정권은 6월말 평민당 소속 서경원 의원의 1년 전 방북 사실을 뒤늦게 터트려 총재 김대중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들이려 했다. 8월3일 강제구인당한 김대중은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14시간 동안 안기부의 조사를 받은 뒤 이튿날 새벽 3시 풀려나왔다.
그해 봄부터 공안몰이로 통일운동을 탄압한 노태우 정권은 6월말 평민당 소속 서경원 의원의 1년 전 방북 사실을 뒤늦게 터트려 총재 김대중까지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들이려 했다. 8월3일 강제구인당한 김대중은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14시간 동안 안기부의 조사를 받은 뒤 이튿날 새벽 3시 풀려나왔다.
이어 로마로 간 이희호와 김대중은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났다. “교황께서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지요. 요한 바오로 2세는 남편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세 번이나 교황청 대사를 보내 사형 집행에 반대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친서를 직접 보내주기도 했던 고마운 분이었어요. 그날 교황이 남편에게 십자가를 기념으로 주시기도 했지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들렀을 때는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가 살던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유럽 순방 중 마지막으로 간 곳은 헝가리였어요. 우리가 방문하기 직전에 한국과 수교한 나라였지요.”

2월4일 함석헌이 88년의 생애를 뒤로하고 세상을 떠났다. 17일 일정으로 유럽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날 이희호와 김대중은 함석헌의 빈소를 찾았다. “함석헌 선생님과 우리는 유신시대 때부터 민주화 운동을 같이 했지요. 3·1민주구국선언사건 때도 남편과 함께 재판을 받았고요. 함 선생님은 기독교사상가로서 평생 실천하는 삶을 사셨어요. 언제나 하얀 두루마기 차림에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셨지요. 우리는 함 선생님을 존경했고 함 선생님의 씨알사상에 많은 감명을 받았어요.”

1989년 3월 '주간조선'의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일행의 유럽 순방 동행 취재기’로 빚어진 ‘조·평 사태’는 10월 평민당의 고소 취하로 일단락됐다.
1989년 3월 '주간조선'의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일행의 유럽 순방 동행 취재기’로 빚어진 ‘조·평 사태’는 10월 평민당의 고소 취하로 일단락됐다.
김대중·이희호 일행이 유럽에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일보>와 평화민주당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조·평 사태’였다.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가 <주간조선> 3월5일치에 쓴 ‘김대중 평민당 총재 일행의 유럽 순방 동행 취재기’가 사태의 발단이었다. 문제의 기사는 “좌파에도 우파에도 손짓, 수행의원들 추태 만발”이라는 악의적인 제목 아래 수행원들 중 일부가 비행기 안에서 맨발로 돌아다니고 교황의 소매를 붙들고 ‘헤이’ 하고 부르는가 하면 호텔 로비에서 귀부인을 희롱했다고 주장했다. 기사에는 김대중이 예약된 1등석을 놔두고 기자들이 있는 일반석에 착석하기를 고집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주간조선> 기사는 사실 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고 쓴 것이었어요. 우리는 항상 일반석을 탔는데 그것까지 문제 삼았지요. 남편은 천주교 신자로서 수행원들이 교황에게 결례를 범했다고 매도당하는 걸 참지 못했어요. 나도 몹시 화가 났지요.”

<조선일보>와 평민당의 불화는 오래된 것이었다. 직접적 충돌은 전해 12월31일 국회 언론청문회에서 벌어졌다. 평민당 소속 의원 박석무가 증인으로 출석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에게 전두환 정권 초기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활동 이력을 따졌다. “입법위원으로 있으면서 언론기본법 통과에 한마디 반대의견도 못 내놓았느냐?” 박석무는 <조선일보>의 광주항쟁 왜곡보도를 비롯해 5공화국 시절의 보도도 추궁했다. <조선일보>는 지면을 통해 박석무와 평민당을 공격했다. <주간조선> 기사는 그런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1989년 2월 김대중과 이희호의 유럽 순방 중에 재야 학자이자 민주화운동 원로인 함석헌 선생이 별세했다. 사진은 2월8일 서울 용산 오산학교에서 학교장으로 열린 함석헌 선생 영결식.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2월 김대중과 이희호의 유럽 순방 중에 재야 학자이자 민주화운동 원로인 함석헌 선생이 별세했다. 사진은 2월8일 서울 용산 오산학교에서 학교장으로 열린 함석헌 선생 영결식. '한겨레' 자료사진
평민당은 박영숙 부총재를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일보> 허위·왜곡보도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3월6일 ‘언론인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그동안 <조선일보>의 집요하고도 잔인한 비수에 수없이 상처를 입고 가슴 아파해 왔으면서도 인내의 자세로 묵묵히 참아왔던 것이 김대중과 평민당이었던 것은 어쩌면 언론인 여러분들이 더욱 잘 알고 계실 일일지 모른다. (…) 우리는 국민을 대신하여 <조선일보>에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서 싸우고자 한다. 누가 광주시민을 일컬어 난동분자라 했으며 누가 전두환씨를 일컬어 조국의 위대한 영도자라 칭했던가.” 평민당은 담당 기자와 <조선일보> 발행인을 포함해 5명을 명예훼손으로 서울지검에 고소했다.

<조선일보>는 지면을 동원해 평민당을 성토했다. 3월6일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들이 총회를 열어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기자들은 “평민당이 <조선일보>에 대해 취하고 있는 일련의 공격적 행동은 구시대 독재권력의 언론탄압과 결코 다름없는 새로운 형태의 언론탄압”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강제해직 언론인 모임인 조선투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3월14일 성명을 내 <조선일보>를 질타했다. “민주주의가 질식당하고 인권이 유린되던 시절에 <조선일보>는 무엇을 썼고 어떻게 말했는가 우리는 묻고 싶다. ‘언론자유수호선언’은 언론사의 사적 이익을 위해 편리할 때 편리한 방법으로 하는 그런 액세서리가 아니다. 써야 할 때 써야 할 진실은 1단 기사로도 쓰지 못하던 신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회의 공기인 신문 지면을 더럽게 먹칠하면서 이것을 언론자유수호라고 말한다면 국민의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3월15일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은 기관지 <언론노보>의 사설 ‘조선일보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에서 조·평 사태는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에서 비롯했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사는 3월17일 김대중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조선일보> <월간조선> <주간조선>을 총동원해 평민당과 김대중을 공격했다. 3월17일 한국기자협회 기관지 <기자협회보>는 동행했던 다른 기자들을 취재한 결과를 토대로 삼아 <주간조선> 기사가 사실을 왜곡했다고 확인했다. 3월21일 전국 대학신문 16곳의 대표들이 기자회견을 열어 “<조선일보>는 반민족적이고 반민중적인 준동을 멈추라”고 요구하고 조선일보사 앞으로 몰려가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날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과 전국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도 조선일보사 앞에서 “독재 통치에 기여해온 <조선일보>의 사죄”를 요구했다. ‘조·평 사태’는 일곱 달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10월17일 평민당의 고소 취하로 끝을 맺었다. “그 뒤로도 이 신문의 태도는 별로 변하지 않았어요. 남편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왜곡·편파 보도로 상처를 냈지요.”

‘조·평 사태’가 벌어지던 시기에 정치권의 큰 이슈는 ‘대통령 중간평가’ 문제였다. 대통령 중간평가는 노태우가 13대 대통령 후보 시절 내놓은 공약이었다. 1989년 새해 들어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이 ‘노태우 대통령 중간평가’를 들고나왔다. 중간평가는 애초 노태우가 원하던 것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끝난 뒤에 노태우는 ‘대통령 신임을 건 중간평가 국민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다. 여소야대 정국을 뒤집어 주도권을 잡으려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때 중간평가를 대통령 신임과 연계하는 것은 야당에 도움이 되지 않는 위험한 도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3월10일 김대중은 노태우와 청와대에서 회담하고 “중간평가를 신임과 연계하지 않는 단순 정책 평가로 실시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과 노태우는 전두환 국회 증언, 지방자치제 실시에도 합의했다.

김영삼은 김대중과 노태우의 합의에 반발해 군중집회를 열며 ‘노태우 정부 불신임’ 투쟁을 벌였다. 그러는 중에도 노태우와 김영삼은 물밑에서 정계개편 작업을 따로 했다. 정계개편의 노태우 쪽 대리인이었던 박철언은 회고록에서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밝혔다. “1989년 3월16일 밤 10시, 상도동 김영삼 총재 집 2층 서재에서 김 총재와 마주 앉았다. 이날 나와 김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는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발전을 위해 구국적 차원에서 양당을 합당하기로 합의한다’고 합당에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중간평가를 무기한 연기하는 데도 합의를 끌어냈다.”

3월20일 노태우는 ‘중간평가 무기한 연기’를 발표했다. “남편은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평가 연기를 환영했지요.”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였던 김원기는 “신임을 걸고 국민투표를 할 경우 우리가 이길 확률이 0.1%도 되지 않았다”고 후에 밝혔다. 김영삼은 다음날 의원총회를 열어 중간평가 유보를 국민 기만행위라고 비난했다.

1989년 봄 솟구치는 통일 열기를 타고 방북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3월18일 일본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황석영은 베이징을 거쳐 3월20일 평양에 도착했다. 황석영 방북 파문이 가라앉기도 전인 3월25일 문익환이 평양 순안비행장에 발을 디뎠다. 문익환은 김일성과 만난 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과 공동성명을 내 “공존의 원칙에서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노태우 정권은 황석영과 문익환의 방북을 공안탄압의 호재로 삼았다.

4월3일 안기부·검찰·보안사 합동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설치돼 공안몰이가 시작됐다.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하기 전에 문동환 부총재와 함께 남편과 만났어요. 남편은 정부의 사전 허락을 꼭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지요. 그런데 문 목사님이 결국 정부에 알리지 않고 가셨어요.” 후폭풍이 거세게 일었다. 그해 1월 결성된 재야연합단체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으로 수사가 확대돼 고은을 비롯한 주요 간부가 구속됐다.

문익환은 4월13일 귀국하자마자 공항에서 체포됐다. 김대중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 “민주인사를 구속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된 것은 북을 적이 아니라 동반자라고 선언한 정부가 그 뒤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익환이 구속된 다음날 <한겨레신문> 논설고문 리영희도 구속됐다. 한겨레신문사가 그해 1월 창간 1돌 기념사업으로 방북취재를 구상했다가 중도에 그만두었는데 그걸 빌미로 삼았다. 노태우 정권은 리영희에게 반국가단체 지역으로 탈출하려고 예비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걸었다.

공안정국은 여름이 되어도 풀리지 않았다. 이해 6월21일 한국외국어대 4학년 임수경이 서울을 출발해 도쿄와 베를린을 거쳐 6월30일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에서 열리는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전대협 대표로 참가한 것이었다. 임수경과 북한 학생대표 김창룡은 7월7일 남북청년학생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임수경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파견한 신부 문규현과 함께 8월15일 판문점을 거쳐 남쪽으로 내려온 직후 연행돼 구속됐다.

임수경이 방북하기 사흘 전 ‘서경원 밀입북 사건’이 터졌다. 가톨릭농민운동가 출신인 서경원은 재야인사들과 함께 평민당에 들어가 1988년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서경원은 그해 8월 정부에 알리지 않고 북한을 다녀왔다. 안기부는 열 달이 지나서야 방북 사실을 꺼내 6월27일 서경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서경원은 뒷날 “분단 상황을 깨는 데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방북했다고 밝혔다. 서경원 사건이 터지자 공안 광풍이 김대중과 평민당을 집어삼킬 듯 몰아쳤다. 안기부는 서경원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후에 서경원은 자신을 고문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 참! 무슨 속셈인지 꼭 맨주먹으로 머리를 자주 내갈깁디다. 그 사람에게 조사받는 동안 피를 세 그릇이나 쏟았어요. 재떨이로 두 번, 바가지로 한 번 말입니다. 그때만 해도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언제가 교도소에서 본 잡지에 그 얼굴이 실렸는데 ‘정형근’이란 이름이 붙어 있습디다.”

7월25일 검찰과 안기부는 서경원을 고문해 받아낸 허위자백을 언론에 퍼뜨렸다. “서경원 의원이 남편의 지령을 받고 경비를 지원받아 방북했다고 거짓말을 퍼뜨렸어요. 북한에서 받은 돈 1만달러를 남편에게 주었다는 말도 만들어냈지요. 남편의 정치생명을 끊으려 하는 것 같았어요.” 언론은 공안당국보다 더 살벌하게 김대중과 평민당을 비난하고 붉은 색칠을 했다. “남편은 언론 보도 때문에 서글퍼했어요. 우리가 독재치하에서 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서서 투쟁했는데 도움은 못 받고 오히려 언론으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요.”

8월3일 검찰과 안기부가 김대중을 강제로 구인해 중부경찰서로 끌고 갔다. 김대중은 14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다음날 새벽 3시에야 풀려났다. “남편을 그렇게 막무가내로 끌고 갔는데 혐의란 게 불고지죄였어요. 서경원 의원 방북 사실을 두 달 전에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증거라고는 서경원 의원을 고문해서 자백받은 것이 전부였어요. 그래서 남편은 서 의원과 대질시켜 달라고 요구했는데, 그것도 들어주지 않았어요. 후에 검찰이 남편을 기소했는데 아무런 증거도 대지 못해 결국 무혐의로 끝났지요.”

1989년 5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결성됐다. 2만여명이 가입해 ‘민족·민주·인간화 교육’ 실천을 결의했다.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이용해 전교조 교사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했다. 8월 전교조 교사 1500여명이 교단에서 쫓겨났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 무렵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어요. 남편이 브란트 총리를 워커힐호텔로 초청해 저녁을 대접했지요. 브란트 총리는 남편이 유신시절에 도쿄에서 납치됐을 때, 또 1980년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구명운동을 벌이며 우리를 많이 도와준 분이었어요. 만찬이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브란트 총리에게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전갈이 왔어요. 모두 놀랐지요. 브란트 총리도 그렇게 급작스럽게 독일 통일이 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