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아테네 '철저한 권력 분산'으로 독재 원천 차단 / 유재원 외국어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6. 13. 17:31

국제국제일반

아테네 ‘철저한 권력 분산’으로 독재 원천차단

등록 :2016-06-12 20:15수정 :2016-06-13 10:56

 

유재원 교수가 길에서 만난 그리스 사람, 역사, 문화
⑫아고라 폐허에서
고대 그리스 아고라의 한구석에 있던 ‘베마’라고 불리던 자유발언대. 이 발언대 위에서 한 말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고대 그리스 아고라의 한구석에 있던 ‘베마’라고 불리던 자유발언대. 이 발언대 위에서 한 말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성(聖)에 속하는 일들은 아크로폴리스에서 치렀고 속(俗)의 일은 아고라에서 이루어졌다. ‘아고라’는 ‘모인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낱말이다. 이곳에는 가게들과 관공서, 찻집, 회랑과 같은 휴식 공간, 상수도 역할을 하는 분수대 등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은 아침에 아고라로 나와 필요한 물건을 사서 집으로 보내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 사업상의 일도 하고 정치적인 대화나 철학적 대화를 나누었다.

기원전 508년 민회서 민주개혁
혈연관계로 맺은 부족 해체하고
재편한 10개 ‘데모스’가 기반
완전 자치 지방정부 가동

데모스 50인회가 폴리스 행정
500인회 의장 제비뽑기로
집행위원장도 제비뽑기 선출
군사지휘권까지 11명에 분산
독재·군사쿠데타 싹 원천차단

시민들 도편에 이름써
“잘나 보인다” 이유로도
폴리스에서 유력자 추방
참주 막는 직접적·극단적 제도
권력쟁투 피흘림 막는 장치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법 앞에서의 평등과 동등한 발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 둘이 없다면 동등한 권리는 불가능하다. 동등한 발언권에 대한 훈련은 아고라에서 이루어졌다. 아고라 한구석에는 ‘베마’라 불리는 특정한 발언대가 있는데 이 위에서 하는 말에 대해서는 아무런 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든 이 발언대 위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아무런 걱정 없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의 말이 들을 만하면 그다음 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의 말을 듣게 될 것이기에 여론을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곳이었다.

또 아고라에는 오늘날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불레우테리온’이란 건물과 정부 청사에 해당하는 ‘톨로스’라는 건물이 있어 정치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클레이스테네스는 10개의 새로운 데모스를 만든 뒤 이 건물들 건너편에 새로운 부족의 조상들 조각상들을 세웠다. 옛 귀족 가문의 위엄을 대체하려는 그의 정치적 의도가 엿보인다.

아고라의 박물관은 ‘민주주의 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만큼 민주주의와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도편 추방에 쓰였던 고대 아테네의 유명한 정치가 이름들이 적힌 사금파리와 재판에 쓰였던 시민들의 이름표와 의결 때 썼던 팽이 모양의 쇳덩이와 배심원을 뽑는 추첨기는 인상적이다.

■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열 개의 ‘데모스’와 ‘500인회’, 그리고 ‘프리타네이아’

민주정을 수립한 아테네가 강성해지는 것이 두려워 다시 아테네에 참주정을 세우려는 스파르타의 위협이 계속되던 기원전 507년과 505년 사이에 아테네인들은 기원전 508년에 클레이스테네스가 민회에서 통과시킨 민주주의 개혁 조치들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혈연관계로 맺어진 아테네의 전통적 네 부족을 해체하고, 대신 도심 지역과 해안 지역, 내륙 지역을 각기 10개의 단위로 나눠 모두 30개의 트리티스(‘3분의 1’이라는 뜻)라는 행정 단위를 만든 뒤, 제비뽑기로 도심 지역에서 한 트리티스, 해안 지역에서 한 트리티스, 내륙 지역에서 한 트리티스씩을 뽑아 10개의 데모스(‘민중’이라는 뜻)라는 새로운 부족을 만들었다.

데모스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자신들의 의견을 민회에서 대변할 대표를 뽑는 것이었기에 클레이스테네스는 각 부족의 구성원 수를 거의 비슷하게 만드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한 개의 데모스를 구성하는 각기 다른 세 지역의 대표들이 지역감정에 치우쳐 자신들만의 가치관이나 관습, 이익을 주장하기보다는 데모스 전체의 이익을 위해 서로 타협과 합의를 거쳐 통일된 의견을 가지고 폴리스 전체 민회에 올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런 방법으로 그때까지 자신이 사는 지역의 주민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주-귀족들의 힘을 꺾는 데에 성공했다. 데모스의 수가 10개로 늘면서 부족장 수 역시 네 명에서 열 명으로 늘어난 것도 민중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클레이스테네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또 새로운 데모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데모스 주민으로 등록할 때 혈연관계를 드러내는 부족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많은 외국인 거주자들이 새로운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게 했다. 이 외국인 거주자들은 이미 기원전 1000년쯤부터 아테네에 들어와서 살았지만 혈연으로 맺어진 옛 부족에 편입될 수 없어 시민권을 얻지 못했다.

데모스는 민회와 자체적으로 뽑은 관리들로 구성된 행정부, 자체적 재산을 관리하는 재정부, 구성원들의 호적을 관리하는 기록부를 갖춘 완전 자치의 지방 정부였다. 모든 시민은 18세가 되는 해에 데모스에 출생 신고를 했고, ‘아무 데모스의 아무개’라는 식으로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속한 데모스 이름을 함께 사용하되 예전의 이름은 쓸 수 없도록 했다. 이는 혈연에 따른 차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인 동시에 전통적 귀족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단 한 특정 데모스에 등록된 사람은 다른 데모스로 이주를 하더라도 계속 원래의 데모스에 속했다. 이는 각 데모스의 구성원 수를 맨 처음에 배당한 대로 균등하게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런 세심한 조치로 아테네의 전통 네 부족의 우두머리 귀족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당 부분 잃게 되었고, 이제 예전의 부족은 종교적 행사나 축제 때에만 의미를 갖는 상징적 존재로 남게 되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각 데모스로 하여금 매해 자체의 민회에서 50명씩의 대표를 뽑아 500인회에 보내도록 하여 전통 4부족이 각각 100명씩 뽑아 만들었던 이전의 400인회를 대체했다. 이 500인회는 예전의 400인회가 맡았던 폴리스 전체 민회에서 심의, 의결할 법안을 고안하여 상정하는 일뿐 아니라 폴리스의 국정을 담당하는 아르콘[집정관]을 직접 뽑는 일과 그 아르콘을 도와 국정에 참여까지 하여 민중의 정치적인 힘을 크게 키웠다.

10개의 데모스에서 뽑힌 50인 의원은 그 자체가 예비 아르콘들로서 제1 데모스에서 제4 데모스까지는 36일씩, 그 뒤의 여섯 데모스는 35일씩 폴리스의 행정을 맡았다. 자기들의 순서가 돌아와 폴리스의 행정을 맡은 50인을 프리타네이아라 불렀는데, 이들은 임기 기간 동안 국가에서부터 일당을 받았다. 그리고 반원형 지붕의 건물인 ‘톨로스’에서 함께 먹고 자면서 휴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리는 500인회의 회의와 임기 기간 동안 네 차례, 즉 거의 열흘마다 열렸던 폴리스 전체 민회를 주관했다. 프리타네이아는 의회나 민회에서 논의할 사안과 그날의 현안, 개최 시간과 장소를 공포했다. 또 프리타네이아는 중상모략 혐의가 있는 사람들과 민중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 대해 예심을 하는 사법적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프리타네이아는 매일 저녁 그다음 날의 의장을 맡을 사람을 제비뽑기로 정하는데 한 사람이 두 번 뽑힐 수는 없다. 의장은 자신이 지명한 프리타네이아의 3분의 1, 즉 17인을 지명하여 톨로스에 머물면서 폴리스의 돈과 문서가 있는 사원의 열쇠와 국가의 옥새를 보관한다. 그는 그날 하루 동안 국가의 최고 통치자가 된다. 프리타네이아가 500인회나 민회를 소집할 때는 의장이 자신의 데모스 이외의 아홉 데모스에서 한 명씩을 추첨으로 뽑아 모두 열 명의 집행위원회를 구성한다. 다시 제비뽑기로 아홉 명 가운데 한 명을 위원장으로 뽑아서는 그로 하여금 집행위원들에게 의안을 나누어 주게 한다. 그러면 집행위원들은 안건을 상정하고 계표하는 등 신속하고도 일사불란하게 일을 처리한다. 폐회하는 권한도 이 집행위원회에 있다. 집행위원회의 위원장 자리는 1년에 한 번 이상 할 수 없다. 이런 방법으로 국가 최고 통치자가 매일 바뀌게 되어 이제는 그 누구도 독재를 꿈꿀 수 없게 되었다.

■ 도편 추방 제도

프리타네이아가 가지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 임무는 1년에 한 번 민회에서 도편 추방 투표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 제도야말로 클레이스테네스가 독재를 막기 위해 고안해 낸 것들 가운데 가장 직접적이고 극단적인 조치였다. 6번째 데모스의 프리타네이아 임기 때 민회에서는 그해에 도편 추방 투표를 할지 안 할지를 결정했다. 투표를 하기로 결정이 나면 두 달 뒤 8번째 데모스의 프리타네이아는 아고라 한쪽에 투표소를 설치한다. 그러면 시민들은 정해진 날 이곳으로 와서 자신이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력자의 이름을 적은 사금파리(깨진 도자기 조각)를 던진다. 투표가 끝난 뒤 아르콘들은 우선 사금파리 숫자가 6000이 넘는지부터 살핀다. 그에 미치지 못하면 그 투표는 자동적으로 무효가 된다. 6000이 넘을 때는 사금파리들을 이름별로 나누어 헤아린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6000표 이상을 얻게 되면 그의 추방이 선포된다. 추방을 명령받은 사람은 열흘 동안 신변을 정리하고 폴리스를 떠나야 한다. 추방 기간은 처음에는 10년이었으나 나중에는 5년으로 줄었다. 추방된 사람은 추방 중에도 재산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추방된 자가 중간에 폴리스의 땅을 밟은 것이 발각되면 사형이 선고되고 그의 전 재산은 몰수되었다.

참주가 될 위험성이 있거나 국가의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위험이 있는 자들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제거하는 도편 추방 제도는 권력 투쟁에 따르기 마련인 피 흘림을 막아 주기 때문에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인간적이라고 평가된다. 도편 추방 제도가 최초로 시행된 것은 이 제도가 만들어진 뒤 20여년이 지난 기원전 487년이었다. 이때 아테네 시민들은 페르시아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을 위협했던 옛 참주 히피아스의 일당이 아직 아테네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불안했기에 아테네 최초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친척인 히파르코스라는 인물을 추방했다. 그리고 기원전 486년과 485년에도 참주정과 관련된 인물들이 추방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84년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버지를, 기원전 482년에는 가장 공정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았던 아리스테이데스를 추방했다. 이들은 단지 ‘남들보다 잘나 보인다’는 이유 때문에 추방되었다. 그리고 민중의 힘이 강해진 기원전 5세기 중반 이후에는 복지부동의 보수적 정치가들이 주로 추방되었다. 이 제도는 과두정권이 들어선 기원전 417년 이후에는 시행되지 않았다. 참주정은 더 이상 경계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군사 단위로서의 데모스

데모스는 폴리스 민회에 보낼 대표를 뽑는 단위인 동시에 군사적 단위이기도 했다. 전쟁이 나면 데모스별로 부대를 편성하고 작전에 투입됐다. 각 데모스는 투표로 한 명의 장군을 뽑아야 했다. 이렇게 뽑힌 열 명의 장군들은 전쟁 중에는 매일 저녁 제비뽑기로 그다음 날의 총사령관을 뽑았다. 그리고 열 명이 모두 한 번씩 총사령관직을 돌아가며 할 때까지 중임할 수 없었다. 민회에서는 아홉 명의 아르콘 가운데 한 명에게 ‘폴레마르코스’라는 직책을 주어 열 명의 장군을 감독하도록 했다. 이렇게 열한 명에게 군사지휘권이 분산되어 있었기에 군사 쿠데타는 아예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장군은 병사들의 생사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데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직책이므로 같은 인물이 여러 번 선출될 수 있었다. 후에 아테네 정치에서 거의 왕과 같은 권한을 휘두른 페리클레스는 15년 동안 내내 장군직에 선출됐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아테네는 사회가 안정되어 10여 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방면에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외부에서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유재원 한국외국어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