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 세번째 도전했다. 12월18일 대선 투표를 한달쯤 앞두고 이희호는 첫 자서전 <나의 사랑 나의 조국>을 펴내고 남편의 선거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사진은 ‘나의 사랑 나의 조국’ 출간기념회에서 세 아들 부부와 함께 한 모습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홍걸·홍일·둘째 며느리·홍업·큰며느리·이희호·막내 며느리.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91년 4월26일 ‘학원 자주화 투쟁’ 시위에 참가한 명지대 1학년 학생 강경대가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날 이후 한 달 남짓 동안 대학생들의 분신이 줄을 이었다. 4월29일 전남대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치사 사건 규탄과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범국민대회’ 중에 분신한 것을 기점으로 11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버렸다. 젊은이들의 분신은 3당 합당 이후 한국 사회를 휘감은 절망감의 표출이었다. 5월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유서를 남기고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자살했다. 노태우 정권은 ‘분신배후설’을 퍼뜨렸다.1991년 4월 강경대 사망에 분신정국
6월 광역의회선거 신민주연합당 참패
9월 꼬마민주당과 ‘당대당’ 야권통합92년 3월 이지문 중위 ‘선거부정’ 폭로
4월 총선서 민주당·국민당 야당 압승
14대 대선 김대중·김영삼·정주영 ‘출마’
“68살 남편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했죠”5월10일 각자 교회·성당 다녀온 뒤
온가족이 점심…세 며느리에게 고마워
“82년 옥중 생일축하 엽서 가장 소중”
검찰은 5월18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해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압수수색을 벌였다. 분신 정국의 반전을 노린 수사였다. 노태우 정권은 김기설의 유서가 강기훈의 필체와 같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필적 감정을 받아내 강기훈을 구속했다. 강기훈은 징역 3년의 실형을 살고 출소했으나 ‘유서대필 조작’ 의혹은 그 뒤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2014년에야 서울고등법원이 강기훈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2015년 5월 대법원이 고등법원의 판결을 확정했다. 모든 것이 검찰의 조작이었으나 ‘유서대필 사건’은 언론을 통해 진실인 양 퍼져나가 민주화 세력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안겼다.분신 정국이 계속되자 5월24일 노재봉이 총리에서 물러나고 교육부 장관을 지낸 정원식이 새 총리로 기용됐다. 이튿날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 3차 국민대회’에서 성균관대 학생 김귀정이 시위 도중 질식사당했다. 6월3일 정원식이 외국어대에 왔다가 흥분한 학생들에게 붙들려 밀가루와 계란을 뒤집어썼다. 정부는 이 사건을 호재로 활용해 학생들을 ‘패륜아’로 몰아붙였다. 앞서 4월9일 평민당은 광역의회선거를 앞두고 재야인사들과 옛 야권인사들을 영입해 신민주연합당으로 재출발했으나 ‘정원식 사건’은 야당에 악영향을 끼쳤다. 6월20일 정권의 공안몰이 중에 광역의회선거가 치러졌다.“결국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지요. 당시 강경대군의 죽음이나 정원식 총리 사건은 노태우 정부의 공안통치와 민주주의 탄압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학생들의 대응이 국민과 호흡을 함께하지 못한 것은 문제였어요.” 신민주연합당은 최소 목표인 200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165석에 머물렀다. 반면에 민자당은 애초 목표보다 많은 564명을 당선자로 냈다. 1991년 8월17일 평화민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은 ‘꼬마 민주당’에 야권통합을 제의했다. “두 당의 국회의원 수는 67 대 8로 큰 차이가 났지만 남편은 당 대 당 통합을 조건으로 제시했지요. 큰 폭의 양보였어요.” 9월16일 두 당은 민주당으로 통합해 새로 출발했다. “남편은 이기택 총재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어요.”1991년 9월17일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이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북한은 160번째, 남한은 16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됐다. “남편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을 주장했는데, 그것 때문에 용공이라는 비난을 받았어요. 20년 뒤에 결국 남과 북이 유엔에 함께 들어갔는데, 감회가 깊었지요.” 그날 김대중은 소련 방문에 나섰다. 김대중은 모스크바대학에서 민주주의를 주제로 삼아 강연했다. “오늘날 많은 공산국가들이 몰락한 것은 그 나라들이 사회주의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가 패배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지 않은 독재적 사회주의가 패배한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하고 있는 나라는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다 같이 성공했습니다. 서구 사회의 자본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가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20세기는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독재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의 역사입니다.” 모스크바대학 총장 아나톨리 로구노프는 김대중을 모스크바대학 평생 명예교수로 임명했다.
1992년 3월24일로 예정된 14대 총선을 앞두고 그해 1월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이 정치에 뛰어들었다. 정주영은 2월8일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2월 말 국민당은 전국의 일간지에 ‘아파트를 반값으로 낮추어 대량으로 공급하겠다’는 광고를 냈다. 국민당이 총선의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노태우는 “14대 총선을 가장 공명정대한 선거로 치르겠다”고 밝혔지만, 공언과 달리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했다.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개발 공약을 남발했다. 민자당은 피라미드 조직 방식으로 ‘한맥청년회’를 만들어 대학생들을 끌어들였다. 학생들은 고액 일당을 받고 유세장에 동원됐다.3월22일 육군 9사단 소대장 이지문이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사무실에서 군 부재자투표 부정을 폭로했다. 보안사 후신인 국군기무사가 개입해 공개투표와 중간검표를 비롯해 선거부정행위를 광범위하게 저질렀다고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방송과 신문은 이지문의 폭로를 축소·왜곡해 보도했다. 14대 총선은 부정으로 얼룩졌다. 민자당은 예상을 깨고 선거에서 참패했다. 전체 299석 가운데 과반수에 미달하는 149석을 얻는 데 그쳤다. 총선 전 의석수 218석에서 69석을 잃었다. 반면에 민주당은 22석을 늘려 97석을 확보했다. 서울에서는 44곳 중 25곳에서 승리했다. 정주영의 국민당은 31석을 얻었다.1992년 5월10일 이희호는 결혼 30돌을 맞았다. “결혼 10돌 때는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셔서 상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고요. 결혼 20돌 때는 남편이 청주교도소에 갇혀 있었어요.” 30돌은 처음으로 평안한 마음으로 맞은 기념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평소처럼 각각 교회와 성당을 다녀왔어요. 늘 주일이면 가족들이 모여 점심식사를 함께했는데 그날도 같이 밥을 먹었지요. 우리는 세 며느리에게 각별히 고마움을 표시했어요. 핍박받는 정치인 집에 시집와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요.”결혼 뒤 험한 세월을 보내느라 이희호는 생일이나 기념일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미국에 망명했던 때 처음 생일 케이크를 받았어요. 하비 목사의 부인 제인 하비가 미국 유학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후배였는데, 1983년 생일에 꽃과 케이크를 보내왔어요. 가족들이 그때야 내 생일인 줄 알고 한바탕 소동을 벌였지요.” 이희호는 김대중이 감옥에서 보내온 생일 축하 엽서를 일생의 귀한 생일선물로 간직했다.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한 달에 봉함엽서를 한 장밖에 보낼 수 없었는데, 엽서 한 면에 생일 축하한다고 크게 써서 보내왔어요.” 김대중은 1982년 9월23일치 엽서에 이렇게 썼다. “축 생신. 당신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하느님께서 당신이 지금까지 겪은 고난과 헌신에 비추어 특별한 축복을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14대 총선이 끝난 뒤 연말에 치를 14대 대통령 선거 구도가 짜였다. 민주당의 김대중, 민자당의 김영삼, 국민당의 정주영이 각축했다. 김영삼은 5월19일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8월25일에는 노태우에게서 민자당 총재 자리도 넘겨받았다. 앞서 정주영은 5월15일 국민당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5월26일 김대중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세 번째 도전이었다. 김대중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정치보복이 없는 대화합의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제정의를 실천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며 ‘공화국연합제’ 방식의 남북통일을 추진하겠다는 약속도 했다.“남편은 그때 68살이었어요. 마지막 도전이라고 생각했지요. 분위기가 좋아서 우리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지요.” 민주당은 ‘뉴디제이플랜’ 전략을 세워 변화한 상황에 대응했다. “오랫동안 굳어진 ‘강경한 김대중’ 이미지를 바꾸려는 차원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가만히 있어도 왠지 근엄해 보인다는 것이 오히려 약점으로 지적됐지요. 나는 남편에게 가능하면 자주, 많이 웃으라고 조언했어요. 특히 유세 중에 목소리를 높일 때 표정이 굳어지니 톤을 낮추고 천천히 말하라고 권했어요.”6월1일 김대중은 “대규모 옥외집회를 자제하고 3당 후보가 텔레비전 공개토론을 열어 국민에게 각 당의 견해를 밝히자”고 제안했다. “텔레비전 토론은 남편이 1971년 대통령 선거 때부터 주장해오던 것이었어요. 1992년에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가정에 텔레비전이 보급돼 있었어요. 텔레비전 토론을 하면 비용도 적게 들고 국민도 후보들의 정견을 잘 알 수 있잖아요. 그런데 주요 신문들이 모두 침묵했어요. <한겨레신문>만 사설에서 정치왜곡을 막으려면 텔레비전 토론이 필요한데 왜 거부하느냐고 지적했지요.”9월7일 김대중은 러시아 국립 외교대학원에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생성과 발전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대 이래 한국 민주주의와 관련해 쓴 주요 논문들을 재구성한 것이었다. “그해 러시아어로 번역된 남편의 저작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남편은 정식으로 대학을 나오지 않아 ‘대학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무던히도 공부를 했지요.” 김대중은 11월에 인촌 김성수 동상 제막식에서 전두환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그냥 덤덤하게 웃으면서 만났대요. 남편은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기도 했어요. 자신을 핍박했던 사람들을 먼저 용서하고 그 사람들과 화해하는 절차였어요. 정치보복에 반대하고 국민 대화합을 이루겠다는 약속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었지요. 나도 남편의 뜻이 좋다고 생각했어요.”1992년 9월9일 국민당은 일간신문에 ‘공무원과 언론은 공명선거를 가늠하는 두 잣대입니다’라는 제하의 정책광고를 냈다. 이 광고에서 국민당은 “언론계에는 ‘김영삼 장학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직적으로 신문·방송에 영향력을 심고 있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했다. 거대 언론은 사실이 아니라고 발뺌했지만 <기자협회보>는 10월1일치에 ‘김영삼 장학생’의 실체를 보여주는 물증을 폭로했다. 통신사 고위 간부가 언론사 주요 간부·기자들의 성향을 김영삼 쪽에 수시로 보고하고 언론인들을 회유하는 작업을 해왔음이 이 폭로로 드러났다. “1992년 대통령 선거는 언론이 좌지우지했어요. 독재의 탄압이 줄어든 대신에 거대 언론이 편파·왜곡보도로 선거판을 어지럽혔지요.”김대중 진영은 언론의 적대적 환경을 이겨내고 대세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여론조사들을 보면 남편이 앞서가고 있는 것으로 나왔어요. 그래서 다들 이번에는 우리가 이긴다고 봤지요. 외국 언론들도 남편의 당선이 유력하다고 보고 목포와 하의도를 먼저 취재하기도 했어요. 외국 어느 대사관에서는 ‘대통령 취임 후 정책’을 듣겠다고 면담을 요청하기도 했고요.” 선거운동이 본격화하자 민주당에서는 헬리콥터 유세를 제안했지만 이희호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다른 후보들이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는데 남편은 전용버스를 타고 이동하니 기동성에서 큰 차이가 났어요. 그래서 참모들이 우리도 헬리콥터를 이용하자는 제안들을 했어요. 나는 헬리콥터는 너무 위험하다고 보았어요. 저쪽에서 무슨 일을 꾸밀지 알 수 없잖아요. ‘대통령이 안 되는 한이 있어도 헬리콥터는 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요.” 동교동은 여전히 도청 위험에 시달렸다. “우리 집 전화는 그때도 도청당하고 있었어요. 1994년 3월에야 우리 뒷집을 포함해 주변 집 네 채를 경찰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요.”1992년 10월6일 선거판을 흔드는 대규모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다. ‘조선노동당 이선실 간첩단 사건’이었다. 안기부가 발표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서열 22위인 거물 간첩 이선실이 세 차례나 남한에 잠입해 공작지도부를 구축하고 재야단체·정계·노동계·학계에 침투해 조선노동당 지부를 만들었다. 장관급을 포함한 10여명의 간첩을 남한에 밀파해 10여년간 암약하게 했으며 사회 각계각층 400여명을 조직원으로 포섭해 대남 적화공작을 해왔다.’ 안기부는 전 민중당 대표 김낙중을 포함해 62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간첩단 사건이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을 점령하다시피 했어요. 선거 때마다 부는 ‘북풍’이 다시 불었지요. 1987년에는 20대 김현희더니 1992년에는 70살 이선실이었어요. 안기부는 남편의 비서 한 사람이 국방부 예산 관련 자료를 간첩에게 넘겨주었다고 물고 늘어졌어요. 그 비서는 간첩이라는 걸 모르고 자료를 넘겨주었는데, 그것도 안기부 공작일 가능성이 컸어요. 이선실이 우리 집에 와서 나랑 기념사진을 찍었다는 소문까지 안기부가 퍼뜨렸지요.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요란하던 간첩단 사건이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흐지부지 자취를 감춰버렸어요.”민자당은 간첩단 사건을 최대한 이용했다. 안기부는 “북한 김일성 주석이 이번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하도록 대남방송을 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리기도 했다. 김영삼은 선거 막판에 유세장에서 김대중에게 ‘붉은 색깔’을 씌웠다. “북한이 남한을 적화하려는데 우리 내부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다.” “최근 평양방송은 김영삼이를 낙선시키고 모당 후보를 당선시키라더니 그 당이 김일성 노선 추종자들이 섞인 전국연합과 손잡자 환영했다.”이희호는 김영삼의 ‘사상 공격’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남편과 정치를 함께했는데 사상이 그렇게 불순하다면 자기는 뭐예요.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했던 거잖아요.” 김대중은 선거가 끝난 뒤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함께 30년이나 민주화투쟁을 했던 옛날의 동지가 나의 사상을 물고 늘어지는 데는 정말 놀랐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내 가슴에 응어리로 남아 있습니다. 쉽게 잊을 수가 없습니다.”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6월 광역의회선거 신민주연합당 참패
9월 꼬마민주당과 ‘당대당’ 야권통합92년 3월 이지문 중위 ‘선거부정’ 폭로
4월 총선서 민주당·국민당 야당 압승
14대 대선 김대중·김영삼·정주영 ‘출마’
“68살 남편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했죠”5월10일 각자 교회·성당 다녀온 뒤
온가족이 점심…세 며느리에게 고마워
“82년 옥중 생일축하 엽서 가장 소중”
1991년 9월 신민주연합당은 3당통합 반대파로 이뤄진 ‘꼬마 민주당’과 당대당 야권통합해 민주당으로 새 출발했다. 공동대표 김대중은 92년 5월 민주당 후보로 14대 대선에 출마했다. 그해 12월 김대중이 특별 개조한 버스를 타고 유세중이다. <한겨레> 자료 사진
1992년 12월 14대 대선을 앞두고 이희호는 민주당사와 재래시장 등을 돌며 김대중 지지를 호소했다. 사진은 그해 11월 방송에 출연한 모습을 갈무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91년 4월 시위 폭력진압으로 사망한 강경대군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가두행진에 나선 김대중과 야당 정치인들이 경찰의 제지를 받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