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얀 히르시 알리 지음, 이정민 옮김/책담·1만5000원 이슬람주의라는 이름을 내걸고 벌어지는 테러와 폭력 사태에 대해선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이슬람 자체가 그런 폭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과 그런 폭력은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슬람주의 폭력의 주요 대상인 서방에서는 후자가 주류적인 견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최근 50명이 숨진 올랜도 총기 난사 사건와 관련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과격한 이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서 물러나야 한다고 비난하자, 오바마가 “미국이 큰 붓으로 모든 무슬림을 (테러분자로) 색칠하는 덫에 빠지거나, 우리가 한 종교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이는 테러리스트들을 돕는 것”이라고 비난한 것은 이런 상반된 견해를 잘 보여준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는 이슬람주의 폭력 사태는 이슬람에 대한 서방의 편견과 식민주의의 결과라고 주장하며, 서방 책임론을 내세운다. 이슬람 자체가 폭력성을 지닌다는 견해는 서방 주류와 진보 진영에서 위험스런 극우보수적 견해로 취급된다. <나는 왜 이슬람 개혁을 말하는가>를 쓴 이얀 히르시 알리는 이 문제에서 논쟁적 인물이다. 소말리아 무슬림 출신 여성인 그는 원치 않는 결혼을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한 뒤 하원의원까지 된 인권운동가이다. 여성과 소수자, 이민자들의 인권을 위한 진보적 운동을 벌이는 그는 이슬람 자체에 폭력성이 있다며 개혁을 주장하는 비타협적 견해와 자세로 이슬람주의 테러분자들의 표적이 되는 수난을 겪고 있다. 그는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의 폭력 행위를 그들의 종교 이상과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리석다”며 “꾸란에 표현된 정치적 이념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기록한 하디스의 가르침에서 (폭력 행위가) 비롯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가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그렇다고 모든 무슬림이 폭력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온건하고 독실한 ‘메카 무슬림’인 대다수 무슬림과 폭력적이고 복고적인 소수의 ‘메디나 무슬림’으로 구분한다. 메카 시절의 무함마드는 포교를 위해 10년에 걸쳐 평화적인 설득을 했으나 성과를 못 얻자, 메디나로 이주한다. 그 뒤 폭력과 정보 등 무슬림의 정치적 특성이 나타났다고 그는 주장한다. 메디나로 옮겨간 무함마드와 그 추종자들은 알라에 복종하라는 설득에 응하지 않으면, 폭력으로 점령하여 개종과 죽음 중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했다. 알리는 이 메디나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주류와 지배자가 되면서 이슬람의 폭력성과 유일무이성이 강제됐다고 주장한다. 알리는 현재 12억명의 무슬림 중 메디나 무슬림을 약 5500만명으로 추산한다. 알리는 기독교의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같은 것이 이슬람에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꾸란과 무함마드의 무오류성과 글자 그대로의 해석 △현세보다 내세의 중시 △정신적 영역과 현세의 영역을 모두 주관하는 이슬람 법률인 샤리아의 포괄성 △옳은 일을 강요하고 그른 일을 금지하는 무슬림의 관습 △지하드의 개념 등 5가지 이슬람 핵심 개념을 수정하고 개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슬람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보듯 모든 종교는 복고성과 반동성을 자체에 내장하고 있다. 문제는 알리가 주장하듯 인간 이성의 진화를 통한 개혁으로 종교의 복고성과 반동성을 제어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알리의 주장과 지적은 타당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주장을 펴면서도, 서방의 극우보수들이 취하는 ‘이슬람 예외주의’의 영역을 위험스럽게 넘나드는 것도 사실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