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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영화, 집결호 / 이승희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6. 17. 21:13

문화영화·애니

21세기 중국 영화는 왜 한국전쟁을 소환했을까

등록 :2016-06-17 16:44수정 :2016-06-17 17:56

이승희의 중국영화 이야기3/펑샤오강의 <집결호>

한국전쟁 66주기가 코앞이다. 그래서 생각난 게 영화 <집결호>(集結號, Assembly)였다. 국공내전으로 시작해서 한국전쟁까지 아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꼭 이 영화여야만 할까? 피하고 싶었다. 보면 볼수록 불쾌한 영화였다. 2007년 대륙을 강타한 이 영화는 엄청난 미장센을 선사한다. 포화 속의 전쟁터, 탱크와 대포, 종횡무진하는 군인들…. 그들의 팔과 다리가 끊긴 자리에서 검은 핏덩이와 장기가 쏟아져 나온다. 절단된 신체, 불타는 신체를 배경으로 장엄한 음악이 흐르고, 그렇게 폭력의 스펙터클은 완성된다. 그런데 내 불쾌감의 연원은 단지 이뿐이 아닌 듯했다.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폭력의 서사는 휴머니즘의 서사로 전환되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더 거슬렸다.

한·중·미 3개국 합자로 제작된 블록버스터 영화 <집결호>. 중국에서 개봉된 지 4일만에 약 90억 원의 관람료 수익을 거두어들였다. 상업영화의 귀재 펑샤오강이 감독을 맡았고 중국의 거대 관객이 손들어 주었다. 중국의 심중으로 들어가는 통로다. 역시, 피할 수 없었다. <집결호> 내부에 작동하는 모종의 장치를 찬찬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집결호 포스터
집결호 포스터

1948년, 해방군 9중대 중대장 구즈디와 47명의 대원은 ‘집결호’가 울리기 전까지 철수하지 말라는 상부 명령을 받고 문하 지역으로 출동한다. 배수의 진을 치고 치열하게 싸우지만 결국 구즈디를 제외한 모든 대원이 사망한다. 구즈디는 국민당 군복으로 갈아입고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투항 의심에 시달리던 구즈디는 자원하여 한국전에 참전한다. 지뢰를 밟은 대장의 목숨을 구하고 그간의 오명을 벗는다. 하지만 구즈디는 여전히 괴롭다. ‘집결호’ 소리를 들었다며 퇴각하자는 부하들을 뿌리치고 전장을 고수한 자신의 아집이 부하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다. 부대원 47명은 실종자 처리된다. 구즈디는 그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시신을 찾아 나선다.

한국과 중국은 20세기 냉전의 유산을 안고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내전을 겪었고 현재까지도 분단 상황에 처해 있다. ‘하나의 중국’을 외치는 중화인민공화국은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분단은 중국에게도 엄연한 현실이다. <집결호>는 두 가지 논점을 제기하는데, 하나는 분단에 대처하는 현 중국의 자세이고, 또 하나는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 고유의 인식이다. 20세기 전쟁 서사를 21세기 맥락 위에서 다시 풀어내었다.

전우애, 폭력 그 자체에서 자생된 기이한 정서

천애고아 구즈디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건 부하들을 향한 끝없는 전우애 때문이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속정이 깊은 구즈디가 매력적인 캐릭터임은 자명하다. 문제는 전우애가 샘솟는 순간이며, 그 순간에 폭발하는 이중성이다. 영화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대치 장면으로 시작된다. 양측 군인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구즈디는 호기롭게 국민당 군을 “형제”라고 부르며 같이 만두나 먹자고 말한다. 하지만 곧이어 총성이 울리고 전투가 벌어진다. 지도원 동지가 처참하게 살상된다. 수세에 몰린 국민당 군이 항복하지만, 이제 구즈디는 그들의 투항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총을 내려놓고 두 팔을 든 국민당 군을 향해 난사한다. 포로 살상은 국제법으로 금지된 사항이지만 상관없다. ‘형제’는 내 뜻에 따라줄 때만 해당되는 얘기다. ‘하나의 중국’이 중심을 향한 주변의 무조건적 흡수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구즈디는 군율 위반으로 사흘간 구류된다. 하지만 형식적인 조처일 뿐 군 사령부조차 암묵적으로 그의 난사행위를 인정한다. 감방에서 만난 왕진춘은 교사 출신으로 전투 중 오줌을 지렸다는 이유로 끌려온 인물이다. 주눅이 든 왕진춘을 맏형처럼 다독이던 구즈디는 새로운 지도원으로 왕진춘을 선택한다. 심약한 왕진춘을 보며 다들 반신반의하지만 구즈디는 “피 좀 보면 정신이 들 거”라며 기다려준다. 결국 왕진춘은 강인한 전사로 ‘성장’한다. 이제 눈 하나 깜빡 않고 ‘적군’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살인의 필요성을 납득하게 된 것이다.

<집결호>에서 전우애는 휴머니즘의 결정체로 그려지지만 실상은 폭력, 그 자체에서 자생된 기이한 정서다. 나쓰메 소세키가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를 보며 “왜 만주 벌판에 자신의 피를 뿌리러 가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질 때, 거기엔 전쟁의 아이러니에 대한 사색이 함축되어 있었다. 하지만 <집결호>가 가장 공들인 작업은 폭력과 휴머니즘의 이중주로 전쟁의 아이러니를 봉합해낸 것이다. 전쟁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무엇을 위한 화합인가?

중국에서 ‘통일’에 대한 염원은 평화와 민주의 가치를 넘어선다. 등소평이 “대륙의 동포와 대만, 홍콩, 마카오, 그리고 해외의 화교 등 모두가 중화민족 자손이다. 우리는 함께 분투하여 조국통일과 민족부흥을 실현시켜야 한다”라고 천명한 이래 주요 정치의회에서 줄곧 ‘화합(和谐)’이 강조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를 이루려는 화합인데, 무엇을 위한 화합이고 그 화합은 어떠한 방식과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에 대한 고민은 없다. 그런데 영화 <집결호>가 바로 이 화합의 실체를 보여준다.

연대장의 묘소를 찾은 구즈디는 나팔수였던 량즈를 만나 진실을 알게 된다. 집결호는 울리지 않았다. 9중대의 전멸을 예상하면서도 연대 전체의 안전을 위해 나팔을 불지 않은 것이다. 구즈디는 배신감에 포효한다. 기념비에 대고 술병을 휘두르며 분노의 눈물을 흘린다. 묘지 관리자로 죽은 상급자에까지 충성을 다하는 량즈는 구즈디를 막아서며 외친다. “전쟁이 원래 그렇잖던가. 죽은 병사가 한둘이 아니야.” 경이로운 건 그 다음 구즈디의 반응이다. 끔찍이도 부하를 아꼈던 그가, 그래서 10년 만에 알게 된 군의 지시에 경악하던 그가 아주 쉽게 수긍한다. 중요한 건 전체의 존속이며 이를 위한 희생은 재고의 여지 없이 당연한 일이다.

- 연대장님, 다 털어버리시오. 운명을 나눠 짊어졌을 뿐. 내게 진 빚도, 내가 갚을 빚도 없소. 그만 굴레를 벗어요.

기념비에 이마를 대고 구즈디가 위와 같이 읊조릴 때 중국정부가 내세우는 화합의 논리가 비로소 완성된다. 중화민족의 오색찬란한 미래를 위해 타자를 배제하고 일부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은 정당해진다. 47인의 시신이 발견된 후, 기념식을 열어 그들을 열사로 추대하며 훈장을 하사할 때 <집결호>는 아주 노골적으로 화합의 종착지를 보여준다. 눈 덮인 기념비 위의 빨간 별이 클로즈업 된다. ‘국가’라는 거대한 우산 안으로 21세기 중국의 관객들을 끌어당긴다.

집결호 스틸컷
집결호 스틸컷

집결호 스틸컷
집결호 스틸컷

G2 대결로 다시 쓰이는 한국전쟁

사실 124분에 달하는 러닝타임 중 한국전쟁을 다룬 분량은 10분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왜 굳이 국공내전에서 한국전쟁으로 장소를 옮겼을까? 구즈디가 한국전에 투입되면서 조력자인 포 대장을 만나게 되지만 그와의 조우가 굳이 한반도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중국에서의 한국전쟁 명칭부터 언급해야겠다.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을 원조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개국한 지 1년도 안 된 신생국가 중국은 한국전쟁 명명을 통해 세계만방에 자국의 위치를 선언했다. 적국과 동맹국을 분명히 함으로써 국가 정체성을 확보했다. 그런데 의아한 건 <집결호>에서 한국전쟁의 1차 당사국인 남한과 북한이 부재한다는 점이다. 교량 폭파의 임무를 띠고 나선 구즈디와 포 대장은 남한군 복장으로 위장한다. 목표지점으로 나아가던 중 포 대장이 지뢰를 밟는다. 포 대장은 자신을 버리고 가길 원하지만 구즈디는 전쟁터에서의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술로 지뢰 제거 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미군 탱크가 다가온다. 당황한 포 대장. 하지만 구즈디는 지혜와 순발력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어리석은 미군은 구즈디에게 속아 넘어가고 포 대장 일행은 끝내 교량폭파에 성공하여 미군의 통행로를 차단한다. 이 숨가쁜 전개가 이루어지는 동안 동맹관계의 북한군은 물론이거니와 적대관계의 남한군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집결호>에서 한국전쟁의 주체는 오늘날의 G2, 중국과 미국이다.

현재 중국은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구호를 외치며 미국과의 대결구도를 펼치고 있다. 역시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는 영화 <상감령(上甘嶺, 1956)>의 주제가 ‘나의 조국’, 20세기 냉전의 흔적을 간직한 이 노래는 이른바 ‘탈냉전 시대’로 일컬어지는 21세기에 와서 아직 냉전이 끝난 것이 아님을 증명해냈다. 2011년 1월 9일, 오바마 대통령이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한 만찬회에서 특별히 중국 출신 피아니스트 랑랑을 초청해 연주하도록 했다. 그가 선택한 곡이 바로 ‘나의 조국’이었다. 가사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친구가 오면 좋은 술로 대접하고 승냥이가 오면 사냥총으로 맞아주겠네.”

60여 년 전 미국 승냥이를 쏘아 죽이겠다고 소리 높여 부르던 곡이 백악관에서 리바이벌된 것이다. 논란이 일자 랑랑은 이 곡이 유명한 데다가 선율도 아름다워 골랐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그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다수 중국인들에게 이 노래는 곧바로 항미원조 전쟁을 연상시킨다. 그날 백악관에 앉아 ‘나의 조국’을 불렀던 중국인사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미지수다.

이승희 李勝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