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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안 중국 어선, 120년의 기시감 / 김정기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6. 28. 22:12

사설.칼럼왜냐면

[왜냐면] 서해안 중국 어선, 120년의 기시감 / 김정기

등록 :2016-06-27 16:54수정 :2016-06-27 19:34

 

6월5일 연평도 어민들이 서해 북방한계선 연평도 해역에서 중국어선 2척을 나포했다. 이 소식은 나를 1880년대로 몰아갔다. 120여년을 초월한 과거와 현재사건의 공시적 유사성 때문이었다. 정녕 역사는 후퇴도 자주 하는가.

“면면히 이어지는 천여리 충청 황해 평안 각도의 연해에 우리 청국 어선 천척, 백척이 돛을 잇대어 출몰함이 무상하다.”(<구한국외교문서 청안Ⅰ>) 1889년 음력 3월 조선주재 청국 공사 격인 원세개의 실토다. 매년 일상이 되어버린 청 어선의 조선 침투는 1882년 흥선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한 뒤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서 기인한다. 조선을 청의 세력권에 편입시킨 이 장정의 제3조에서 평안·황해도, 산동·봉천성의 어채권이 서로 허용되었다. 또한 서양 윤선의 소음 때문에 중국 연안의 고기가 조선으로 달아났다고 부기해 놓았다.

장정이 체결된 1882년 10월부터 조선 연해는 순식간에 청 어선의 즐거운 사냥터로 돌변했다. 규정된 신고와 어세를 전혀 무시한 고기잡이인데다 연안과 섬의 민가를 토색·파괴·방화·구타·강간·살생하고 나무를 베며 조선 어선의 고기·식량·어구 등을 빼앗거나 파괴하는가 하면 잡은 고기를 강매하기도 했다. 청국 어민은 해적이었다. 여기에다 조선의 궁궐 각 관아에 바칠 진상과 어염세를 독촉하는 구실아치의 도적질이 겹치니 어민 생활은 실업에 유리걸식하는 아비규환의 지옥 속 삶이었다. 타개책으로 지방관아에 떼로 몰려가서 연명으로 호소(等訴·呈訴)도 해보았으나 만사 헛일. 조정은 ‘대륙의 위력’에 눌려 장정 규정의 엄수만을 되풀이했다. 가족이 흩어지고 먹을거리가 바닥난 어민 백성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1885년 2월4일부터 두 달 동안 황해도 연안에서 불법조업하던 산동성 어선 3척이 초강풍을 피해 온 곳이 충청도 홍주(지금 홍성) 연해의 연도(대청에서 40㎞ 서쪽). “갑자기 조선 민선 3척, 150~160명이 우리 배로 돌진해왔다. 벌떼처럼 에워싸면서 배로 오르더니 은전 식량 어망 어구 생활용품 등 깡그리 약탈, 순간 배가 텅 비고 말았다. 그뿐인가. 몽둥이와 돌에 맞아 현장에서 8명이 쓰러졌고 죽기 직전의 중상자도 생겼다. (인천까지 도망오는데) 쌀 한 톨 남지 않아 타향에서 죽는 줄 알았다.”(청안Ⅰ). 30여명의 어민이 인천의 중국 관리에게 쏟아낸 증언이었다. 청의 대국우월의식은 땅바닥에 떨어졌고 조선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양국의 자세한 후속조치 사료는 안 보이고, 잠시 주춤했던 청의 해적질이 도졌다. 또한 청 어민을 향해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공격도 기지개를 폈다.

충청도 홍주 어민 150여명의 청 어선 공격사건은 당시 조선 백성의 심장에 새겨진 반대국항쟁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대국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조정을 목표로 백성들은 ‘되놈’관, ‘되국놈’관(大國者觀)을 벽력처럼 난사한 것이다. 당대 어업을 포함한 경제 침탈로 생성된 백성의 반일의식과 이에 버금가는 반중의식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는 외부 요인으로 직결되었다.

왜 요즘은 자주 박근혜 대통령이 고종과 겹쳐 내 안막에 나타날까. 이 글은 국가를 대신한 연평도 주민께 감사의 고개를 숙이며 바친다.

김정기 제주도 유수암리 명예이장